“날 가두겠다고?”여름은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내가 낳은 아이를 백지안에게 넘기라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 날 가둬두기까지 하겠다니….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무슨 근거로? 당신 이거 위법 행위야. 경찰에 신고할 거야.”여름이 휴대 전화를 들자마자 하준이 낚아챘다.“난 기회를 줬어. 누가 양유진이랑 그렇게 붙어서 날뛰래?”하준도 자신이 왜 이렇게 열이 뻗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무슨 자존심 발작 버튼이 눌린 듯 했다.“당신이 지금 남 얘기할 처지인가? 백지안이랑 바람 난 건 당신이잖아? 당신들 둘이 자고 다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잤으면 또 어쩔 거야? 당신 이러고 미쳐서 날뛰는 그 못생긴 얼굴 보면 백지안이랑 비교가 안 된다고.”하준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잔인했다.여름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울퉁불퉁한 자기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솟아올랐다.‘내 외모가 어떻게 되든 영원히 사랑하겠다던 사람이 누군데,이제 와서 내 얼굴이 어쩌고저쩌고 왈가왈부야?내 얼굴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양심에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인가?’“최하준, 당신이 내 아이들을 백지안에게 맡길 거라면 난 차라리 여기서 뛰어내리겠어.”여름이 창백한 얼굴로 결연하게 말했다.“하려면 하시던지. 이것만 알아둬. 내 아이에게 눈곱만큼이라도 이상이 생겼다가는 당신 친구랑 병원에 누워 있는 당신 아버지도 같이 저세상 가게 될 거야.”싸늘하게 말하더니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여름이 막 뛰어나가 봤지만 밖에서 문 잠그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힘껏 손잡이를 잡아 돌려 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열리지 않았다.여름은 이곳에 갇힌 것이다.이제 아무 곳에도 갈 수 없다.전에는 하준이 무슨 짓을 해도 진심으로 하준을 미워한 적은 없었다.하준이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백지안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다고 늘 되뇌어 왔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이제는 진심으로 최하준이 미워졌다.백윤택이 미웠고, 백지안이 미웠다.
강여름은 매일 그 2층 집에서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답답한 나날을 보냈다. 그저 텔레비전을 보거나 테라스에 나가서 바람을 쐴 뿐이었다. 가끔 테라스에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그대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해 억지로 참았다.여름은 1주일을 견뎠다.상혁이 여름을 병원에 데려가 산전 검사를 받으려고 차를 몰고 왔다.“하준 씨는요?”여름이 물었다.상혁이 난감한지 입을 못 열고 있었다.여름이 웃었다.“알아요. 백지안 옆에 붙어 있느라고 바쁘겠죠. 백지안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겠어요?”“사모님, 이러지 마십시오.”상혁의 눈에 동정과 연민이 컸다.“같이 병원에나 가시죠.”여름은 뭔가 더 말하려다가 곁에 있는 낯선 보디가드를 보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병원에 가는 길에 상혁이 운전했다. 뒷좌석에 여름만 남아있게 되었을 때에야 상혁이 입을 열었다.“요즘 제가 회장님과 백지안을 위해서 꽤 애쓰고 있어서 회장님이 이제 저를 의심하지 않으십니다.”“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네요.”여름은 하준이 상혁까지 의심해서 지켜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아마도 전에 제가 회장님께 사모님 편을 드는 듯한 말을 좀 해서 그런지 한동안은 저를 좀 못 미더워 하시더라고요.상혁이 조그맣게 말했다.“지난번에 제가 유산을 가장할 수 있게 준비해 달라고….”“이젠 그 작전도 안 통해요. 하준 씨가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겼다가는 윤서랑 우리 아버지를 가만두지 않겠다네요. 난 이제 윤서가 제일 걱정이에요."여름이 담담히 말했다.“백윤택이 풀려나면 이제 전보다 훨씬 더 지독하게 윤서에게 복수하려고 들 텐데, 윤서는 나랑 연락이 닿지 않으면 서울을 떠나려고도 하지 않을 거예요. 윤서가 바로 외국으로 나가게 제소식을 좀 전해 줄 수 있나요?”“네, 하지만 임윤서 씨도 없으면 사모님은….”“연락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요. 최양하예요.”여름이 갑자기 말했다.상혁은 흠칫했다.“그 분이 도움이 될까요?”“나도 100% 확신은
시아는 잠시 여름의 눈치를 슬쩍 봤다.“너 아직 모르나 보구나. 요즘 이주혁 씨가 자기네 집안 모임에 가끔 나 데리고 가는데 최 회장이 매번 백지안 씨랑 같이 오더라. 둘이 얼마나 달라붙어 있는지 몰라. 끝나면 매번 지안 씨네 가서 자나 보더라."“시아 씨….”상혁이 얼굴로 경고의 신호를 보냈다.“김 비서, 내 말이 사실이잖아요? 김 비서도 다 봤잖아요?”시아가 눈을 깜빡이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지난번에는 지아 씨 목에 키스 마크까지 봤다니까, 세상에.”여름이 얼굴이 싸늘해졌다.“그렇구나. 아주 잘됐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모여 있는 게 좋지.”“아닌 척하지 마. 너도 힘들겠지, 왜 아니겠어?”시아가 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춰 보더니 립스틱을 덧발랐다.“아 참, 며칠 전에는 지안 씨가 불러서 해변 별장에 놀러 갔었거든. 거기가 서울에서 집값 제일 비싼 데라면서? 침실에서 문을 탁 여니까 파란 바다가 보이더라.”여름의 안색이 확 변했다.그곳은 여름과 하준이 살았던 곳이었다. 하준이 요양할 수 있도록 여름이 최선을 다했던 곳이고 여름이 ‘우리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었다. 여름과 하준은 그곳에서 평생을 약속했고 배 속의 아이들도 바로 그곳에서 생겼었다.‘그런 곳을 백지안에게 내주었다니….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가 있지.정말… 정말 너무하네.’완전히 의기소침해진 여름을 보고서 시아가 마침내 웃더니 천천히 목소리를 낮췄다.“한때 금수저였던 너와 임윤서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겠지. 이제 사람들은 임윤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두고 쑥덕쑥덕하지, 너는 남편에게 차였지. 쯧쯧, 인생이라는 게 돌고 도는 거라니까.”“뭐라고?”여름이 확 고개를 쳐들고 시아를 노려봤다.“윤서 일이….”“그래, 요즘 핫한 뉴스잖니? 동성 재벌가의 금수저가 강간당한 일 말이야. 오호홋! 사람들은 윤서가 일부러 백윤택을 꼬드긴 거라고 하더라고. 이제 누가 그런 애랑 사귀려고 하겠어? 이제 내 눈에는 너희 둘의 꼴이야말로 참 우습
여름이 있는 대로 물건을 다 집어 던지는 바람에 새로 온 가사 도우미가 당황하고 말았다.밤이 되자 하준이 마침내 나타났다.하준이 난장판이 된 집을 보고 있는데 별안간 뭔가가 덮쳐왔다.얼른 피하며 여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여름의 손에 든 날붙이를 얼른 멀리로 던져 놓고 돌아보니 뼛속까지 얼릴 한기를 품은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죽을 뻔했잖아?”“내가 틀렸네. 바보가 되는 게 지금보다는 나았겠어.”여름이 가슴 아프게 하준을 바라보았다.“왜 살아남았어? 당신 같은 정신이상자, 가둬두고 풀어주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내가 당신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다니, 미쳤었나 봐.”“시끄러워. 당신이 지금 정신 이상인 것 같은데?”하준은 여름을 화장실로 끌고 가 거울 앞에 여름의 얼굴을 잡아 가져다 댔다.“지금 이 꼴을 보라고, 완전 미치광이 같아.”“그래, 나 미쳤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여름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대체 내 친구를 왜 그따위로 취급해? 당신도 윤서가 피해자인 거 다 알면서. 백윤택이야 도와줘도 이제는 오명을 썼으니 그렇다 치고, 윤서는? 이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이나 받으며 살아야 하잖아?”하준은 머리가 터지는 것 같았다.“말 다 했다? 기사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 당신 친구가 백윤택을 먼저 유혹했다고.”“뭐라고?”여름은 황당함에 눈이 휘둥그레졌다.“임윤서가 먼저 백윤택을 자기 톡에 추가하고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윤택을 유혹했어. 그러다가 백윤택의 소문이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완전히 몸을 빼려고 했던 거라고. 세상에 이렇게 치사한 일이 있겠어?”“누가 그런 소릴 해요? 백지안이? 지금 백지아니 하는 말을 다 믿는 거야?”하준이 콧방귀를 뀌더니 무시하듯 말했다.“그럼 내가 지안이를 믿지, 당신을 믿을까? 유유상종이라고 당신도 임윤서랑 같은 부류겠지. 임윤서가 동성에서는 그래도 좀 사는 집안의 자식이라고 거들먹거리고 살다가 서울에 와서 보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백윤택을 등에 업고 이득을 취해볼까
배가 욱신욱신 아파왔다.‘한때는 나와 하준이 그렇게도 원했던 아이. 둘 다 아픔이 있었지만 아이들이 오면 드디어 우리만의 온전한 가족이 될 줄 알았는데….’여름은 하늘이 자신에게 쌍둥이를 내려 주신 것을 감사하기도 했었다.여름 그 뒤로 어미로서 자신의 아이를 어떻게 지켜야 지,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백지안에게 상처받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보냈다.‘이렇게 그냥 가는 게 나은지도 모르겠다.최소한 고통을 당하며 사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르지.아마도 이건 일종의 해방인지도 몰라.’“강여름, 버텨.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돼.”하준이 여름을 안고 병원으로 뛰어 들어갔다. 품 안의 여름은 분명 임신 3개월인데도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깃털처럼 가벼웠다.하준은 누가 심장을 꽉 움켜쥔 것 같은 느낌이었다.왜인지는 모르지만 너무나 두려웠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는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러나 여름은 하준이 외치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르르 피곤한 두 눈을 감아버렸다.곧 여름은 응급실로 들어갔다.하준은 초조해서 왔다 갔다 걸어 다녔다. 이마에서는 이미 상당히 출혈을 일으키고 있었다.상혁은 그 모습을 보면서 불안했다.“회장님 일단 그 이마를 좀 처치 받으시죠.”“그럴 정신이 어디 있나?”하준의 두 손이 끊임없이 떨렸다. 손도 온통 피로 물들어 옆에서 보기에는 충분히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곧 수술실 문이 열렸다.의사가 걸어 나왔다.“회장님, 환자분의 아이는 아무래도 살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장 수술 동의서에 사인해 주셔야 합니다. 아니면 사모님의 목숨도 위태로워요.”“뭐라고? 아이를 살리지 못하다니, 당신이 그러고도 의사야?”하준이 시뻘게진 눈으로 의사의 멱살을 잡았다.‘내 아이라고, 잃을 순 없어!’그 순간이 아니었다면 하준은 자신이 이렇게나 두 아이를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회장님, 정말 방법이 없습니다. 어느 의사가 와도 똑같아요.”의사가 두려워하며 해명했다.“전에 사모님 임신
“정말이야?”“그렇다니까. 방금 그 비서라는 사람이 사인해줬기 망정이지 아무도 신경을 안 쓰더라고.”“나도 최하준이랑 그 여자가 껴안고 나가는 거 봤어.”“아유, 하여간….”“……”여름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하아아….최하준 정말 독하네.내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데도 사인 하나 해주지 않을 정도라니.심지어 이런 때에도 마음속에 백지안뿐이라니….’우리 두 사이의 사랑은 바스러져 먼지가 되어 하늘로 사라지는 듯했다.‘앞으로 내가 살아서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저것들에게 반드시 복수할 거야.’----병실, 여름이 눈을 떴다.병실에는 백지안 한 사람뿐이었다.백지안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손에든 자동차 키를 달랑거렸다.“보여? 전에 준이 당신에게 선물했던 스포츠카. 이제는 내 거야. 어때?”여름은 한눈에 알아보았다.그것은 전에 하준이 직접 여름에게 주었던 스포츠카의 열쇠였다.당시 번호판과 국내에 1대뿐이라는 사실이 온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었었다.여름은 가볍게 웃었다.“남이 버린 걸 좋아하나 봐? 차, 별장, 남자, 그래, 다 가져라. 어쨌든 난 이제 다 상관없어.”“당신이 신경을 쓰던 말던 준의 마음속에는 이제 나뿐이거든.”백지안이 득의양양하게 침대가로 와서 여름을 내려다봤다.“내 말 한마디면 네 친구의 명예 따위 단숨에 땅바닥에 떨어지는 거거든. 우리 오빠에게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네 친구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하거든. 이제 네 친구의 명예는 시궁창에 떨어졌지. 뭐, 누가 그렇게 우리 오빠를 모욕하랬나?”“애진작에 백윤택이 윤서를 해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구나?”여름이 두 눈을 부릅떴다.“자업자득이지.”여름이 허리를 굽혔다. 신나는 구경을 보는 사람처럼 웃음을 띠고 있었다.“마지막에 성공하지 못해서 그게 참 아쉽네. 하지만 상관없지. 어쨌든 이제 평생을 오명이 임윤서를 따라다닐 테니까.”여름은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다.안 그래도 막 수술을 마쳐서 아프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
백지안의 말에 지난 사건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니 하준의 생각에도 의심스러웠다.“백지안, 헛소리 마. 난 지극히 정상이라고.”하준이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모습을 보니 여름에게 불안이 엄습했다. 그래서 다급히 해명했다.“당신들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런 거라고.”백지안은 연민어린 시선으로 여름을 내려다보았다.“우울증 있는 사람들은 자기 병을 잘 인정 안 하려고 해요. 게다가 유산까지 했으니 정말 빨리 치료를 받으시길 권할게요.”그 말에 여름은 온몸의 힘을 그러모아 백지안에게 따귀라도 날리고 싶었다.그러나 이런 때 여름이 분노할수록 하준은 백지안을 믿게 될 터였다.“최하준은 이미 당신 거잖아. FTT 사모님 자리도 이제 양보하겠어. 그런데 대체 왜 이렇게 날 가만두질 못하는 거야. 이제 앞으로는 눈앞에서 마주쳐도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돌아서 갈게.”하준은 저도 모르게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하준은 여름을 미워해야 하는 것이 맞겠지만, 여름이 자신을 마주치고 아는 척도 안 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하자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백지안이 씁쓸하게 웃었다.“내가 무슨 말을 해야 이해를 하려나? 생각 안 해봤나 본데, 지금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정말 평생 고생할 수도 있어요. 당신은 최하준의 전처인데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최하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됐어. 내가 병이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알지.”여름은 이제 진짜로 멘붕이 올 지경이었다.“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러는지 모르겠네. 아이를 잃은 것만으로도 난 이미 비참한데 날 정신병원에 처넣기까지 하겠다는 건가? 최하준, 날 사랑하지 않는 것까지야 그렇다고 치더라고, 날 인격으로서는 대해줘야 할 게 아니야?”“병원에 입원할 것까지는 없어요. 그냥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매일 시간 맞춰 약만 잘 먹으면 되지.”“됐어. 난 건강한 사람이야. 약 따위 먹을 필요 없어.”“당신하고는 말이 안 통하는군요.”백지안은 고개를 돌려 하준에게 말했다.“준,
여름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그러다 지치자 여름은 침대에 몸을 잔뜩 옹송그리고 누웠다.날인 더운데도 안에는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었다. 여름은 곧 탈진했다.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누군가가 들어와 주사를 놓으려고 했다.여름은 온 힘을 모아 막아 보려고 했다.그러나 그 사람들은 여름을 꽉 눌러 압박했다.바늘이 살갗을 뚫고 들어왔다.뜨거운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혼미한 가운데 한참이 지났다.여름은 자신이 미쳐간다는 느낌이 들었다.너무나 미웠다.‘대체 어쩌다가 나는 최하준 같은 악마를 사랑하게 되었을까?내가 정신이 나가긴 나갔었지. 삶의 동반자로서 최하준의 병을 함께 치료해서 최하준이 정신병원에 가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믿었다니.아하하. 그 결과가 뭐야? 최하준은 정신병원에 가지 않았지만 내가 들어와 있네.최하준, 백지안.내가 죽어서라도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겠어.’----깊은 밤. 클럽.하준은 가죽 소파에 앉아 손에는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줄무늬 셔츠를 입고 단추를 몇 개 푸르고 앉아 있는 모습은 매우 매혹적면서도 위험스럽게 보였다.시아와 노래를 부르던 백지안이 가만히 하준을 돌아보았다.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이 남자는 이제 철저히 내 거야.’이때 쾅 하고 문이 열렸다.이지훈이 뛰어 들어왔다. 분노에 찬 시선이 하준을 향했다.“하준아, 어떻게 서머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멀쩡한 사람을 그런데 두면 되레 미쳐버릴 거라고!”“지훈아, 네가 몰라서 그래. 강여름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송영식이 천천히 일어서더니 이지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이지훈이 그 손을 탁 떨쳐냈다.“웃기시네. 지난번에 봤을 때만 해도 완전히 정상이었어. 강여름은 내가 잘 알아. 동성에서는 그 미친 일을 다 겪으면서도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던 사람이야.”“강여름을 알아? 네가 나보다 더?”하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천천히 일어섰다.“하준아, 너도 잘 알잖아. 네가 너무 많은 걸 잊어버려서 그래.”이지훈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