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은 송영식을 한 번 보고 다시 아무 말이 없는 이주혁과 하준을 보았다.이해할 수가 없었다.‘왜 갑자기 애들이 무슨 세뇌라도 당한 사람처럼 이러지?대체 언제부터야?아마도 백지안이 나타나고 나고부터인 것 같은데?’“주혁아, 영식아. 하준이는 병이 있으니 그렇다고 치고, 너희 둘은 정상이잖아? 애초에 하준이 병이 재발했을 때도 여름이는 하준이를 버리지 않았어. 어쩌다가 지하실에 갇히게 되었는지도 다 알잖아. 그런 사람 다시는 없다고 너희도 칭찬했었잖아? 그래, 여름이랑 그렇게 만나보고도 아직도 여름이를 그렇게 몰라?”이지훈이 분노에 차서 소리 질렀다.“여름이는 하준이네 식구들이 하준이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지 못하도록 막아줬는데 너희는 오히려 여름이를 병원에 집어넣어? 너희가 그러고도 사람이냐?”하준의 미간에 주름이 점점 깊어졌다.이지훈이 하는 얘기들은 어쩐지 익숙했다.그러나 그 장면들을 떠올려 보려고 하면 어쩐지 머리가 아팠다. 아무리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송영식도 미간을 찌푸렸다.이지훈이 송영식에게 외쳤다.“영식아, 넌 자꾸 서머가 하준이를 뺏어갔다고 그러는데, 여름이가 하준이를 따라다닐 때는 백지안이라는 존재 자체를 몰랐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백지안이 죽은 줄 알았지. 여름이가 하준이 아내가 되고 나서 백지안이 돌아오니 네가 여름이에게 하준이 와이프 자리를 내놓으라고 한 거잖아? 너희들이 백지안이랑 사이가 좋다는 이유로. 하지만 너희들 중 누구라도 서머 입장에서 생각해 본 사람 있어? 아이도 잃고, 남편도 잃고, 이제 여름이에게는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백지안은? 너희도 있고, 하준이도 있고, 아름다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송영식은 이지훈의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답답했다.이주혁은 눈꺼풀을 바르르 떨더니 술을 마셨다.‘그래, 전에는 진심으로 여름이가 하준이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강여름과 백소영이 얽히면서 다빈이가 죽고, 지안이가 돌아왔어. 전에 강여름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네.’“지
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흰 천을 걷었다. 강여름이 편안히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목에 있는 시퍼런 멍이 아니었다면 그냥 자는 줄 알았을 것이다.하준이 떨리는 손을 여름이 코 아래 대보았다.싸늘했다.‘정말 죽었어?’하준은 갑자기 자기 머리를 세게 때렸다.‘이건 꿈이야, 다 가짜야.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날 욕하고 울부짖었다고.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사람이 죽어?’“최하준, 꺼져!”뒤에서 엄청난 힘이 하준을 밀어냈다.임윤서가 여름을 살펴보더니 엄청나게 분노해서 하준을 노려보았다.“나쁜 놈. 너 때문이야. 네가 우리 여름이를 죽였어. 넌 살인마야!”“내가 그런 게 아니야. 강, 강여름은 아팠다고.”하준의 붉어진 눈은 임윤서를 차마 마주 보지 못했다. 그저 여름을 바라볼 뿐이었다.아직까지도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이해할 수 없어. 난 강여름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데.왜 내 영혼이 뜯겨 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내 삶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 같아.’심지어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도 주체를 할 수가 없었다.“아픈 건 너지. 너희들 다 미치광이들이야!”임윤서가 울부짖었다.“여름이는 멀쩡했다고. 당신 때문이야. 계속 여름이를 몰아붙이고, 가두고. 당신이 밀어서 배 속의 아이들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여름이를 강제 입원까지 시켰잖아. 자유를 잃어버렸는데 사람이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겠어? 사랑하지도 않는다면서 이혼이나 해줄 것이지. 왜 이렇게 놓아주지도 않아서 이 지경을 만들어!”“뭐, 결국 죽음으로서 결국 해방된 건가? 이제 당신들에게 속박받지 않게 되었으니. 여름이는 내가 데려가겠어. 당신들에게 여름이 시신이라도 내줄 순 없지.”임윤서는 심호흡을 하더니 사람을 불러서 운반을 부탁했다.“뭐 하는 짓이야?”하준이 저도 모르게 임윤서의 어깨를 잡았다.“내 아내야. 매장을 해도 내가 해야지. 당신이 할 일이 아니야.”“언제부터 아내 취급을 해주셨는데? 당신 같은 인간쓰레기는 여름이 시신에도 손댈 자격 없어.”임윤서가 피로 얼
“내가 끼어들지 않았더니 네 녀석이 쌍둥이를 저세상에 보내버리지 않았느냐? 나도 며칠 전에야 들었다.”최대범이 노발대발했다.“그런 짓을 하다니 네가 사람이냐? 네가 아무리 마음이 변했어도 네 아내와 아이에게 이럴 수는 없다. 네 에미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그래.”장춘자도 사뭇 차갑게 말을 이었다.“아내가 임신을 했는데 새벽부터 밤까지 백지안 품에서 헤어나질 못하더니, 그냥 방치를 하는 것도 그렇다 치지만, 사람을 가둬 놨다가 일이 벌어지니 이번에는 강제 입원? 너도 어릴 때 있어 봐서 알 텐데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수가 있어? 이제 사람이 죽었는데도 붙들고 놔주지 못하겠다니. 죽어서도 너랑 백지안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줘야겠다는 심산이냐?”“제발 우리 여름이를 보내달라고.”임윤서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통곡했다.“여름이는 서울에 와서 행복한 적이 없어. 난 여름이가 동성으로 돌아가서 편하게 눈을 감았으면 좋겠어.”“데려 가슈.”최대범이 손을 내저었다. 최대범은 원래 여름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함께 지내는 동안 여름의 면면을 보고는 호감이 들었던 것이다.“살아서 사람을 그렇게 괴롭혔으면 죽어서라도 소원을 좀 들어주거라.”장춘자가 씁쓸히 덧붙였다.“하준아, 여름이에게 왜 이렇게 잔인하게 구는지 모르겠구나.”순간 하준의 심장이 저릿했다.‘잔인하다고?정말 내가 잘못한 건가?내가 일부러 여름이를 병원에 보낸 게 아닌데?난 그저 여름이의 우울증을 치료해 주고 싶었을 뿐이야.아이만 낳아주면 평생을 편히 먹고살 위자료도 주고 보내줄 생각이었다고.그런데 왜? 왜 죽어버린 거야?’하준은 붙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임윤서는 결국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툭툭 끊기긴 했지만 하준이 머릿속에 하준과 여름이 만났던 장면들이 떠올랐다.“나 정말 병에 걸린 것 같아요. 정신병이 아니고, 상사병.”“오빠, 눈감은 옆모습이 진짜 너무 매력적이라 거부할 수가 없네요.”“난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어.”“맹세할게. 앞으로 난 당신 한 사
‘백윤택 같은 쓰레기를 도와줬다고 하늘이 이제 내게 벌을 내리나?’“미, 미안해.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백지안은 하준의 날카로운 눈에 놀랐다. 이렇게 무서운 하준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예전 같았으면 없을 일인데….’하준은 백지안에게 심하게 말한 것이 후회되었다.하지만 강여름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심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그래, 넌 생각하지 못했겠지. 그저 백윤택을 감쌀 생각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요즘 대체 백윤택이 얼마나 사람을 해쳤는지 생각해 봐”‘여름이 말이 맞았어.백윤택을 감싸느라고 다른 사람의 목숨은 내게 안중에도 없었어.백윤택을 위해서 번번이 선을 넘고, 내 자신의 도덕 기준조차 파괴해 왔지.’“준, 다 내 탓이야. 탓하려면 날 탓해.”백지안이 꿇어앉아 눈물 콧물을 빼며 울었다.“난 정말 이러려던 게 아니야.”“가 봐. 난 혼자서 잠깐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하준이 백지안을 쳐다도 안 보고 차에 올라 떠나 버렸다.최면에 걸린 후 처음으로 백지안을 무시한 것이었다.백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멀어져 가는 차를 보며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강여름이 죽었다고 하준이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분명 최면에 걸렸으니 강여름에 대한 감정은 남아있지 않아야 정상인데. 아무래도 강여름에 대한 하준이의 사랑을 내가 너무 얕잡아 본 모양이군.그래도 그것이 죽었다니 다행이지 뭐야.앞으로 다시는 내 자리를 위협하지 않겠지.’이때 백윤택이 전화를 걸어 왔다.“지안아, 강여름이 진짜로 죽었어?”“응.”“잘됐네. 그럼 이제 넌 곧 진짜 명실상부한FTT 사모님이 되겠네.”백윤택은 신이 났다. 이제 최하준이라는 뒷배가 생기면 앞으로 모든 비바람을 막아줄 터였다.“이제 좀 얌전히 지내.”백지안이 짜증스럽게 말했다.“준은 오빠 때문에 강여름이 죽었다고 생각한다고. 이제 앞으로는 절대 봐주는 일 없을 거야.”“뭐라고? 농담이겠지?”백윤택이 당황하더니 곧 웃었다.“걱정하지 마. 요즘 하준이가 널 엄청
백지안이 혀를 찼다.“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 해서 뭐 하겠어? 나랑 준이 사귀는 걸 강여름이 도저히 못 참은 거지. 게다가 우리 오빠가 임윤서를 범했는데 준은 우리 오빠가 실형 살게 될까 봐 임윤서에게 책임을 추궁하지 못하게 하려고 좀 압박을 했거든. 그랬더니 강여름이 발끈해서 준이랑 다툼이 좀 벌어졌거든. 그 바람에 애를 잃어서 충격을 받았거든. 그래서 나랑 준이 입원시키고 매일 주사에 약에… 열심히 치료를 해주고 있었는데 결국 못 참고 목을 매더라고.”백지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줄줄 이야기를 했다.그러나 백소영의 귀에는 하나하나가 가 폭탄처럼 와서 꽂혔다.‘윤서가 백윤택에게 당했어?여름이는 죽고?’사귄지는 얼마 안 됐지만 백소영에게 사고가 생긴 후로 유일하게 마음을 내준 친구들이었다.그런데 이렇게 비참한 말로라니….“백지안, 대체 왜 이렇게 악독한 거야?”백소영은 화로 눈에 핏발이 서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유리로 두 사람 사이가 막혀있지 않았더라면 백소영은 백지안을 껴안고 함께 죽기라도 할 기세였다.“내가 어디 그뿐이겠니?”백소영이 길길이 날뛰는 모습에 백지안은 만족스러웠다.“강여름이 지난번에 와서 말 안 했나 보네? 네 엄마, 아빠 다 돌아가셨어.”콰광!다른 폭탄이 또 터진 것 같았다. 백소영이 고개를 저었다.“다 거짓말이야.“네 엄마한테 최면을 좀 걸었더니 내가 떠나고 나서 네 엄마가 욕실에서 머리를 부딪히고 쓰러져서 출혈 과다로 돌아가셨고, 아빠는 네 엄마 돌아가셨다는 얘기 듣고 다시 심장병이 재발해서 돌아가셨어. 이제 널 면회하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겠네.”백지안이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만 들리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매장할 때 내가 네 엄마 유골함에 개 뼛가루를 넣어두었지. 네 엄마 유골은 내가 그냥 버렸어.”“백지안, 네가 사람이냐?”백소영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백지안을 당장 죽일 기세로 유리 벽을 두들겼다.그러나 곧 교도관들이 들어오면서 제압되었다.백소영은 온통 눈물범벅이 되
그때 이주혁은 그 싸늘한 얼굴의 가면을 찢어버리고 싶었다.결국 이주혁은 그 가면을 직접 찢어버렸다.그날 밤 백소영이 부끄러운 척하던 얼굴을 이주혁은 또렷이 기억했다.‘이제, 다 옛이야기구나.’----3년 뒤.해외 어느 곳.감긴 붕대가 하나하나 벗겨지고 눈, 코, 입이 드러났다. 거울 속 여자는 천천히 자신의 보드라운 피부를 만져보았다. 몇 년 동안 치료를 하느라고 햇빛을 보지 못했던 피부는 눈처럼 하얗고 투명했다.이제 여고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와, 우리 엄마 정말 예쁘다.”작은 여자아이가 와락 와서 안기며 기쁜 얼굴로 엄마를 쳐다봤다.“네가 누구 딸인데?”뒤에서 남자아이가 환하게 웃었다.“이 잘생긴 아들 엄마지.”여름은 이마를 짚었다.‘그래. 이제 아무도 내 얼굴이 이렇게 회복되고 귀여운 아이들이 둘이나 있다고는 생각지 못할 거야.’“하지만 난 엄마를 하나도 안 닮아쪄. 나는 그 나쁜 아빠를 닮았나 봐.”여자아이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여름도 곧 슬픈 얼굴이 되었다.어르신들 말씀에 딸은 아빠를 닮고 아들은 엄마를 닮는다고 하더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여울이와 하늘이는 쌍둥이지만 전혀 닮지 않았다.“그래. 우리 여울이가 아빠를 닮긴 했지만 우리 여울이는 엄청 귀여운걸.”임윤서가 허리를 굽혀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윤서야…”여름이 윤서를 바라보았다.“난 귀국할 준비가 되었어. 너는?”임윤서가 눈을 내리깔았다.“나는 조금 더 있다가. 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아직 안 끝났어.”여름이 살짝 마음 아픈 듯 임윤서를 바라보았다.“괜찮아. 그 일은 이미 다 지나갔어. 이번에 돌아가면 내가 직접….”“됐어. 난 내 손으로 백윤택과 맞설 거야.”임윤서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난 네 생각처럼 약하지 않다고.”그럼 됐어.”여름이 눈가에 복잡한 기색을 숨기며 말했다.“이번에 귀국 길에는 아이들을 못 데려가니까 너에게 좀 부탁할게.”“걱정하지 마. 우리 사이에 뭘. 게다가 다 내 수양딸, 수양아
“애들은 윤서에게 부탁하고 왔어요.”“집은 인테리어 끝났습니다. 같이 가시죠.”양유진이 여름을 데리고 차에 탔다.차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관계자에 따르면 FTT 최하준 회장은 애인에게 XX브랜드의 웨딩 드레스를 맞춰주었다고 합니다. 이 드레스를 위해 최 회장은 2년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4년에 걸친 두 사람의 사랑이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됩니다.양유진이 여름을 흘끗 쳐다보았다. 여름의 얼굴이 담담한 것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이 소식은 들었습니다. 정말 결혼할 모양입니다."“잘됐네요.”여름은 그다지 괴로워하는 기색 없이 사뭇 담담했다. 정신 병원에 입원당하면서부터 하준에 대한 마음은 완전히 접었었다.“양유진이 말을 받았다.“동거는 진작부터 했습니다. 아직 식을 올린 건 아니지만 사실혼이나 다름없죠.”여름이 웃었다.“정상이네요.”두 사람은 하준과 여름이 이혼을 하기 전부터 엉켜있었는데 여름이 ‘죽은’ 다음에야 말할 게 있겠는가?양유진은 여름의 그런 모습을 보고 뭔가를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았다.1시간 뒤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양유진은 여름을 위해 8층에 집을 사 두었다. 방 4개짜리로 베란다가 널찍하고 아이 방 두 칸 중 하나는 하늘색으로 침대보는 하늘이 좋아하는 스파이더맨 무늬였다. 분홍색 방에는 여러 가지 인형이 놓여있었다.여름은 아이 방 인테리어를 보고 깜짝 놀랐다.양유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여울이와 하늘이가 계속 해외에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대한 빨리 아이들을 데려왔으면 하는 마음에 집도 유치원과 학교를 끼고 있고 주변 환경도 괜찮은 곳에 잡았습니다.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까지 서울에서 모두 손꼽히는 최고의 학군입니다.”그 말을 들은 여름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감동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3년 전 양유진과 최양하, 상혁 세 사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여름은 아직도 그 병실에서 주사와 약물에 절어 미쳤을지도 모른다.출국하고 나서도 양유진은 내내
양유진이 머리를 긁적였다.“오늘 저녁 벨레스 창립 30주년 기념식 준비나 잘해봅시다.”----모리 인터내셔널 호텔.성대한 기념식 파티가 준비 중이었다.그동안 벨레스에서는 많은 일이 벌어졌다.3년 전 혼수 상태였던 서경주가 깨어났다. 깨어난 뒤 서경주는 위자영과 이혼을 결심했다. 그러나 위자영은 한사코 동의하지 않아 결국 법정 소송으로 번졌고 법원에서는 두 사람의 이혼을 결정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딸인 서유인이 있었다.서유인이 추성호과 결혼한 뒤 신분이 급상승하여 벨레스 부회장이 되었을 뿐 아니라 추신 그룹 내에서 전자 상거래 플랫폼을 차렸다. 그동안 벨레스 시가 총액은 천정부지로 솟았다.오늘은 그 벨레스의 창립 30주년 되는 날이었다. 그룹에서는 전례가 없이 성대한 파티를 준비했다. 국내 최고의 연예인뿐 아니라 각계의 유명 인사가 모두 초대되었다.서경주는 손님 몇 사람을 맞아 인사를 나누고는 회장 안을 둘러보다가 귀빈들에게 둘러싸인 서경재를 발견했다.마음이 복잡했다.3년 전 깨어나서 보니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여름은 자살했고 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서경재가 신임 회장이 되어 있었다. 서경재는 완전히 사람이 바뀌어서 휠체어에 앉아 있기는 했지만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회사의 경영을 딱 틀어쥐고 심지어 서경주의 심복도 모두 자기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그러나 서경주는 그가 자신의 동생이고 내내 서유인을 돌봐준 것을 고려하여 슬쩍 눈감아 주었다.다행히 이제 서유인은 철이 들었는지 그동안 꽤나 일에서도 노력을 했다.그렇지만 서유인은 아무리 봐도 여름에 비하면 성에 차지 않았다.“여기 있었네요.”위자영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듯 다가와 말했다.“이제 몇 시쯤 우리 유인이가 벨레스와 추신이 공동 설립한 합자 기업의 CEO가 된다고 발표할 거예요?”서경주의 눈에 혐오스러운 기색이 스쳤다.“누가 여기 오라고 했어?”“어머나, 내가 못 올 곳에 왔나? 난 유인이 친모라고요.”위자영이 고개를 쳐들었다.“우리 유인이가 몇 년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