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그러다 지치자 여름은 침대에 몸을 잔뜩 옹송그리고 누웠다.날인 더운데도 안에는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었다. 여름은 곧 탈진했다.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누군가가 들어와 주사를 놓으려고 했다.여름은 온 힘을 모아 막아 보려고 했다.그러나 그 사람들은 여름을 꽉 눌러 압박했다.바늘이 살갗을 뚫고 들어왔다.뜨거운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혼미한 가운데 한참이 지났다.여름은 자신이 미쳐간다는 느낌이 들었다.너무나 미웠다.‘대체 어쩌다가 나는 최하준 같은 악마를 사랑하게 되었을까?내가 정신이 나가긴 나갔었지. 삶의 동반자로서 최하준의 병을 함께 치료해서 최하준이 정신병원에 가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믿었다니.아하하. 그 결과가 뭐야? 최하준은 정신병원에 가지 않았지만 내가 들어와 있네.최하준, 백지안.내가 죽어서라도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겠어.’----깊은 밤. 클럽.하준은 가죽 소파에 앉아 손에는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줄무늬 셔츠를 입고 단추를 몇 개 푸르고 앉아 있는 모습은 매우 매혹적면서도 위험스럽게 보였다.시아와 노래를 부르던 백지안이 가만히 하준을 돌아보았다.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이 남자는 이제 철저히 내 거야.’이때 쾅 하고 문이 열렸다.이지훈이 뛰어 들어왔다. 분노에 찬 시선이 하준을 향했다.“하준아, 어떻게 서머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멀쩡한 사람을 그런데 두면 되레 미쳐버릴 거라고!”“지훈아, 네가 몰라서 그래. 강여름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송영식이 천천히 일어서더니 이지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이지훈이 그 손을 탁 떨쳐냈다.“웃기시네. 지난번에 봤을 때만 해도 완전히 정상이었어. 강여름은 내가 잘 알아. 동성에서는 그 미친 일을 다 겪으면서도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던 사람이야.”“강여름을 알아? 네가 나보다 더?”하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천천히 일어섰다.“하준아, 너도 잘 알잖아. 네가 너무 많은 걸 잊어버려서 그래.”이지훈
이지훈은 송영식을 한 번 보고 다시 아무 말이 없는 이주혁과 하준을 보았다.이해할 수가 없었다.‘왜 갑자기 애들이 무슨 세뇌라도 당한 사람처럼 이러지?대체 언제부터야?아마도 백지안이 나타나고 나고부터인 것 같은데?’“주혁아, 영식아. 하준이는 병이 있으니 그렇다고 치고, 너희 둘은 정상이잖아? 애초에 하준이 병이 재발했을 때도 여름이는 하준이를 버리지 않았어. 어쩌다가 지하실에 갇히게 되었는지도 다 알잖아. 그런 사람 다시는 없다고 너희도 칭찬했었잖아? 그래, 여름이랑 그렇게 만나보고도 아직도 여름이를 그렇게 몰라?”이지훈이 분노에 차서 소리 질렀다.“여름이는 하준이네 식구들이 하준이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지 못하도록 막아줬는데 너희는 오히려 여름이를 병원에 집어넣어? 너희가 그러고도 사람이냐?”하준의 미간에 주름이 점점 깊어졌다.이지훈이 하는 얘기들은 어쩐지 익숙했다.그러나 그 장면들을 떠올려 보려고 하면 어쩐지 머리가 아팠다. 아무리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송영식도 미간을 찌푸렸다.이지훈이 송영식에게 외쳤다.“영식아, 넌 자꾸 서머가 하준이를 뺏어갔다고 그러는데, 여름이가 하준이를 따라다닐 때는 백지안이라는 존재 자체를 몰랐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백지안이 죽은 줄 알았지. 여름이가 하준이 아내가 되고 나서 백지안이 돌아오니 네가 여름이에게 하준이 와이프 자리를 내놓으라고 한 거잖아? 너희들이 백지안이랑 사이가 좋다는 이유로. 하지만 너희들 중 누구라도 서머 입장에서 생각해 본 사람 있어? 아이도 잃고, 남편도 잃고, 이제 여름이에게는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백지안은? 너희도 있고, 하준이도 있고, 아름다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송영식은 이지훈의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답답했다.이주혁은 눈꺼풀을 바르르 떨더니 술을 마셨다.‘그래, 전에는 진심으로 여름이가 하준이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강여름과 백소영이 얽히면서 다빈이가 죽고, 지안이가 돌아왔어. 전에 강여름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네.’“지
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흰 천을 걷었다. 강여름이 편안히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목에 있는 시퍼런 멍이 아니었다면 그냥 자는 줄 알았을 것이다.하준이 떨리는 손을 여름이 코 아래 대보았다.싸늘했다.‘정말 죽었어?’하준은 갑자기 자기 머리를 세게 때렸다.‘이건 꿈이야, 다 가짜야.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날 욕하고 울부짖었다고.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사람이 죽어?’“최하준, 꺼져!”뒤에서 엄청난 힘이 하준을 밀어냈다.임윤서가 여름을 살펴보더니 엄청나게 분노해서 하준을 노려보았다.“나쁜 놈. 너 때문이야. 네가 우리 여름이를 죽였어. 넌 살인마야!”“내가 그런 게 아니야. 강, 강여름은 아팠다고.”하준의 붉어진 눈은 임윤서를 차마 마주 보지 못했다. 그저 여름을 바라볼 뿐이었다.아직까지도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이해할 수 없어. 난 강여름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데.왜 내 영혼이 뜯겨 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내 삶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 같아.’심지어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도 주체를 할 수가 없었다.“아픈 건 너지. 너희들 다 미치광이들이야!”임윤서가 울부짖었다.“여름이는 멀쩡했다고. 당신 때문이야. 계속 여름이를 몰아붙이고, 가두고. 당신이 밀어서 배 속의 아이들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여름이를 강제 입원까지 시켰잖아. 자유를 잃어버렸는데 사람이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겠어? 사랑하지도 않는다면서 이혼이나 해줄 것이지. 왜 이렇게 놓아주지도 않아서 이 지경을 만들어!”“뭐, 결국 죽음으로서 결국 해방된 건가? 이제 당신들에게 속박받지 않게 되었으니. 여름이는 내가 데려가겠어. 당신들에게 여름이 시신이라도 내줄 순 없지.”임윤서는 심호흡을 하더니 사람을 불러서 운반을 부탁했다.“뭐 하는 짓이야?”하준이 저도 모르게 임윤서의 어깨를 잡았다.“내 아내야. 매장을 해도 내가 해야지. 당신이 할 일이 아니야.”“언제부터 아내 취급을 해주셨는데? 당신 같은 인간쓰레기는 여름이 시신에도 손댈 자격 없어.”임윤서가 피로 얼
“내가 끼어들지 않았더니 네 녀석이 쌍둥이를 저세상에 보내버리지 않았느냐? 나도 며칠 전에야 들었다.”최대범이 노발대발했다.“그런 짓을 하다니 네가 사람이냐? 네가 아무리 마음이 변했어도 네 아내와 아이에게 이럴 수는 없다. 네 에미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그래.”장춘자도 사뭇 차갑게 말을 이었다.“아내가 임신을 했는데 새벽부터 밤까지 백지안 품에서 헤어나질 못하더니, 그냥 방치를 하는 것도 그렇다 치지만, 사람을 가둬 놨다가 일이 벌어지니 이번에는 강제 입원? 너도 어릴 때 있어 봐서 알 텐데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수가 있어? 이제 사람이 죽었는데도 붙들고 놔주지 못하겠다니. 죽어서도 너랑 백지안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줘야겠다는 심산이냐?”“제발 우리 여름이를 보내달라고.”임윤서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통곡했다.“여름이는 서울에 와서 행복한 적이 없어. 난 여름이가 동성으로 돌아가서 편하게 눈을 감았으면 좋겠어.”“데려 가슈.”최대범이 손을 내저었다. 최대범은 원래 여름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함께 지내는 동안 여름의 면면을 보고는 호감이 들었던 것이다.“살아서 사람을 그렇게 괴롭혔으면 죽어서라도 소원을 좀 들어주거라.”장춘자가 씁쓸히 덧붙였다.“하준아, 여름이에게 왜 이렇게 잔인하게 구는지 모르겠구나.”순간 하준의 심장이 저릿했다.‘잔인하다고?정말 내가 잘못한 건가?내가 일부러 여름이를 병원에 보낸 게 아닌데?난 그저 여름이의 우울증을 치료해 주고 싶었을 뿐이야.아이만 낳아주면 평생을 편히 먹고살 위자료도 주고 보내줄 생각이었다고.그런데 왜? 왜 죽어버린 거야?’하준은 붙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임윤서는 결국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툭툭 끊기긴 했지만 하준이 머릿속에 하준과 여름이 만났던 장면들이 떠올랐다.“나 정말 병에 걸린 것 같아요. 정신병이 아니고, 상사병.”“오빠, 눈감은 옆모습이 진짜 너무 매력적이라 거부할 수가 없네요.”“난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어.”“맹세할게. 앞으로 난 당신 한 사
‘백윤택 같은 쓰레기를 도와줬다고 하늘이 이제 내게 벌을 내리나?’“미, 미안해.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백지안은 하준의 날카로운 눈에 놀랐다. 이렇게 무서운 하준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예전 같았으면 없을 일인데….’하준은 백지안에게 심하게 말한 것이 후회되었다.하지만 강여름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심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그래, 넌 생각하지 못했겠지. 그저 백윤택을 감쌀 생각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요즘 대체 백윤택이 얼마나 사람을 해쳤는지 생각해 봐”‘여름이 말이 맞았어.백윤택을 감싸느라고 다른 사람의 목숨은 내게 안중에도 없었어.백윤택을 위해서 번번이 선을 넘고, 내 자신의 도덕 기준조차 파괴해 왔지.’“준, 다 내 탓이야. 탓하려면 날 탓해.”백지안이 꿇어앉아 눈물 콧물을 빼며 울었다.“난 정말 이러려던 게 아니야.”“가 봐. 난 혼자서 잠깐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하준이 백지안을 쳐다도 안 보고 차에 올라 떠나 버렸다.최면에 걸린 후 처음으로 백지안을 무시한 것이었다.백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멀어져 가는 차를 보며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강여름이 죽었다고 하준이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분명 최면에 걸렸으니 강여름에 대한 감정은 남아있지 않아야 정상인데. 아무래도 강여름에 대한 하준이의 사랑을 내가 너무 얕잡아 본 모양이군.그래도 그것이 죽었다니 다행이지 뭐야.앞으로 다시는 내 자리를 위협하지 않겠지.’이때 백윤택이 전화를 걸어 왔다.“지안아, 강여름이 진짜로 죽었어?”“응.”“잘됐네. 그럼 이제 넌 곧 진짜 명실상부한FTT 사모님이 되겠네.”백윤택은 신이 났다. 이제 최하준이라는 뒷배가 생기면 앞으로 모든 비바람을 막아줄 터였다.“이제 좀 얌전히 지내.”백지안이 짜증스럽게 말했다.“준은 오빠 때문에 강여름이 죽었다고 생각한다고. 이제 앞으로는 절대 봐주는 일 없을 거야.”“뭐라고? 농담이겠지?”백윤택이 당황하더니 곧 웃었다.“걱정하지 마. 요즘 하준이가 널 엄청
백지안이 혀를 찼다.“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 해서 뭐 하겠어? 나랑 준이 사귀는 걸 강여름이 도저히 못 참은 거지. 게다가 우리 오빠가 임윤서를 범했는데 준은 우리 오빠가 실형 살게 될까 봐 임윤서에게 책임을 추궁하지 못하게 하려고 좀 압박을 했거든. 그랬더니 강여름이 발끈해서 준이랑 다툼이 좀 벌어졌거든. 그 바람에 애를 잃어서 충격을 받았거든. 그래서 나랑 준이 입원시키고 매일 주사에 약에… 열심히 치료를 해주고 있었는데 결국 못 참고 목을 매더라고.”백지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줄줄 이야기를 했다.그러나 백소영의 귀에는 하나하나가 가 폭탄처럼 와서 꽂혔다.‘윤서가 백윤택에게 당했어?여름이는 죽고?’사귄지는 얼마 안 됐지만 백소영에게 사고가 생긴 후로 유일하게 마음을 내준 친구들이었다.그런데 이렇게 비참한 말로라니….“백지안, 대체 왜 이렇게 악독한 거야?”백소영은 화로 눈에 핏발이 서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유리로 두 사람 사이가 막혀있지 않았더라면 백소영은 백지안을 껴안고 함께 죽기라도 할 기세였다.“내가 어디 그뿐이겠니?”백소영이 길길이 날뛰는 모습에 백지안은 만족스러웠다.“강여름이 지난번에 와서 말 안 했나 보네? 네 엄마, 아빠 다 돌아가셨어.”콰광!다른 폭탄이 또 터진 것 같았다. 백소영이 고개를 저었다.“다 거짓말이야.“네 엄마한테 최면을 좀 걸었더니 내가 떠나고 나서 네 엄마가 욕실에서 머리를 부딪히고 쓰러져서 출혈 과다로 돌아가셨고, 아빠는 네 엄마 돌아가셨다는 얘기 듣고 다시 심장병이 재발해서 돌아가셨어. 이제 널 면회하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겠네.”백지안이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만 들리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매장할 때 내가 네 엄마 유골함에 개 뼛가루를 넣어두었지. 네 엄마 유골은 내가 그냥 버렸어.”“백지안, 네가 사람이냐?”백소영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백지안을 당장 죽일 기세로 유리 벽을 두들겼다.그러나 곧 교도관들이 들어오면서 제압되었다.백소영은 온통 눈물범벅이 되
그때 이주혁은 그 싸늘한 얼굴의 가면을 찢어버리고 싶었다.결국 이주혁은 그 가면을 직접 찢어버렸다.그날 밤 백소영이 부끄러운 척하던 얼굴을 이주혁은 또렷이 기억했다.‘이제, 다 옛이야기구나.’----3년 뒤.해외 어느 곳.감긴 붕대가 하나하나 벗겨지고 눈, 코, 입이 드러났다. 거울 속 여자는 천천히 자신의 보드라운 피부를 만져보았다. 몇 년 동안 치료를 하느라고 햇빛을 보지 못했던 피부는 눈처럼 하얗고 투명했다.이제 여고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와, 우리 엄마 정말 예쁘다.”작은 여자아이가 와락 와서 안기며 기쁜 얼굴로 엄마를 쳐다봤다.“네가 누구 딸인데?”뒤에서 남자아이가 환하게 웃었다.“이 잘생긴 아들 엄마지.”여름은 이마를 짚었다.‘그래. 이제 아무도 내 얼굴이 이렇게 회복되고 귀여운 아이들이 둘이나 있다고는 생각지 못할 거야.’“하지만 난 엄마를 하나도 안 닮아쪄. 나는 그 나쁜 아빠를 닮았나 봐.”여자아이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여름도 곧 슬픈 얼굴이 되었다.어르신들 말씀에 딸은 아빠를 닮고 아들은 엄마를 닮는다고 하더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여울이와 하늘이는 쌍둥이지만 전혀 닮지 않았다.“그래. 우리 여울이가 아빠를 닮긴 했지만 우리 여울이는 엄청 귀여운걸.”임윤서가 허리를 굽혀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윤서야…”여름이 윤서를 바라보았다.“난 귀국할 준비가 되었어. 너는?”임윤서가 눈을 내리깔았다.“나는 조금 더 있다가. 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아직 안 끝났어.”여름이 살짝 마음 아픈 듯 임윤서를 바라보았다.“괜찮아. 그 일은 이미 다 지나갔어. 이번에 돌아가면 내가 직접….”“됐어. 난 내 손으로 백윤택과 맞설 거야.”임윤서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난 네 생각처럼 약하지 않다고.”그럼 됐어.”여름이 눈가에 복잡한 기색을 숨기며 말했다.“이번에 귀국 길에는 아이들을 못 데려가니까 너에게 좀 부탁할게.”“걱정하지 마. 우리 사이에 뭘. 게다가 다 내 수양딸, 수양아
“애들은 윤서에게 부탁하고 왔어요.”“집은 인테리어 끝났습니다. 같이 가시죠.”양유진이 여름을 데리고 차에 탔다.차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관계자에 따르면 FTT 최하준 회장은 애인에게 XX브랜드의 웨딩 드레스를 맞춰주었다고 합니다. 이 드레스를 위해 최 회장은 2년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4년에 걸친 두 사람의 사랑이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됩니다.양유진이 여름을 흘끗 쳐다보았다. 여름의 얼굴이 담담한 것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이 소식은 들었습니다. 정말 결혼할 모양입니다."“잘됐네요.”여름은 그다지 괴로워하는 기색 없이 사뭇 담담했다. 정신 병원에 입원당하면서부터 하준에 대한 마음은 완전히 접었었다.“양유진이 말을 받았다.“동거는 진작부터 했습니다. 아직 식을 올린 건 아니지만 사실혼이나 다름없죠.”여름이 웃었다.“정상이네요.”두 사람은 하준과 여름이 이혼을 하기 전부터 엉켜있었는데 여름이 ‘죽은’ 다음에야 말할 게 있겠는가?양유진은 여름의 그런 모습을 보고 뭔가를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았다.1시간 뒤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양유진은 여름을 위해 8층에 집을 사 두었다. 방 4개짜리로 베란다가 널찍하고 아이 방 두 칸 중 하나는 하늘색으로 침대보는 하늘이 좋아하는 스파이더맨 무늬였다. 분홍색 방에는 여러 가지 인형이 놓여있었다.여름은 아이 방 인테리어를 보고 깜짝 놀랐다.양유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여울이와 하늘이가 계속 해외에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대한 빨리 아이들을 데려왔으면 하는 마음에 집도 유치원과 학교를 끼고 있고 주변 환경도 괜찮은 곳에 잡았습니다.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까지 서울에서 모두 손꼽히는 최고의 학군입니다.”그 말을 들은 여름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감동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3년 전 양유진과 최양하, 상혁 세 사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여름은 아직도 그 병실에서 주사와 약물에 절어 미쳤을지도 모른다.출국하고 나서도 양유진은 내내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