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유진이 머리를 긁적였다.“오늘 저녁 벨레스 창립 30주년 기념식 준비나 잘해봅시다.”----모리 인터내셔널 호텔.성대한 기념식 파티가 준비 중이었다.그동안 벨레스에서는 많은 일이 벌어졌다.3년 전 혼수 상태였던 서경주가 깨어났다. 깨어난 뒤 서경주는 위자영과 이혼을 결심했다. 그러나 위자영은 한사코 동의하지 않아 결국 법정 소송으로 번졌고 법원에서는 두 사람의 이혼을 결정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딸인 서유인이 있었다.서유인이 추성호과 결혼한 뒤 신분이 급상승하여 벨레스 부회장이 되었을 뿐 아니라 추신 그룹 내에서 전자 상거래 플랫폼을 차렸다. 그동안 벨레스 시가 총액은 천정부지로 솟았다.오늘은 그 벨레스의 창립 30주년 되는 날이었다. 그룹에서는 전례가 없이 성대한 파티를 준비했다. 국내 최고의 연예인뿐 아니라 각계의 유명 인사가 모두 초대되었다.서경주는 손님 몇 사람을 맞아 인사를 나누고는 회장 안을 둘러보다가 귀빈들에게 둘러싸인 서경재를 발견했다.마음이 복잡했다.3년 전 깨어나서 보니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여름은 자살했고 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서경재가 신임 회장이 되어 있었다. 서경재는 완전히 사람이 바뀌어서 휠체어에 앉아 있기는 했지만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회사의 경영을 딱 틀어쥐고 심지어 서경주의 심복도 모두 자기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그러나 서경주는 그가 자신의 동생이고 내내 서유인을 돌봐준 것을 고려하여 슬쩍 눈감아 주었다.다행히 이제 서유인은 철이 들었는지 그동안 꽤나 일에서도 노력을 했다.그렇지만 서유인은 아무리 봐도 여름에 비하면 성에 차지 않았다.“여기 있었네요.”위자영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듯 다가와 말했다.“이제 몇 시쯤 우리 유인이가 벨레스와 추신이 공동 설립한 합자 기업의 CEO가 된다고 발표할 거예요?”서경주의 눈에 혐오스러운 기색이 스쳤다.“누가 여기 오라고 했어?”“어머나, 내가 못 올 곳에 왔나? 난 유인이 친모라고요.”위자영이 고개를 쳐들었다.“우리 유인이가 몇 년 동안
“고맙구나.”서경주가 감동한 듯 서경재의 어깨를 두드렸다.“사실 그동안 내 몸이 예전 같지 않구나. 앞으로 벨레스는 너에게 부탁한다.”“열심히 하겠습니다.”서경재가 대답하는데 입구 쪽에서 소란이 벌어졌다.누군가가 외쳤다.“최 회장이야.”최 회장이라면 FTT를 손에 쥔 최하준을 이르는 것이었다.하준은 몸에 딱 맞게 맞춘 블랙 수트를 입고 나비넥타이를 맸다. 훤칠한 키에 근사하게 맞춰 입은 의상이 더욱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연회장의 조명이 하준에게 집중되었다.세월이 지나면서 하준도 고급 와인처럼 잘 익어 더욱 사람의 눈길을 끄는 외모를 완성했을 뿐 아니라 타고난 품위와 거대한 아우라도 농익었다.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서유인은 저만치서 보기만 하는데도 심장이 떨릴 지경이었다.‘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는단 말이야.’그러고 나서 역시나 블랙 슈트를 입고 옆에 서 있는 남편을 보았다. 몇 년 동안 추성호의 신분도 상승했지만 최하준 같은 아우라는 역시 나오지 않았다.“여보, 뭘 그렇게 넋 놓고 봐?”추성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몇 년 동안 죽도록 노력해서 쫓았는데도 하준은 타고난 비즈니스의 천재인 지라 늘 한발 늦고는 했다. 그리고 어디에 있던 하준은 항상 가장 이목을 끄는 사람이었다.“저 사람이 여기는 왜 왔나 궁금해서요.”서유인이 방긋 웃으며 추성호의 손을 잡았다.추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강여름이랑 관련있겠지. 아무래도 전처라고 지난번에 아버님 생신에도 왔었잖아.”“웃기시네. 우리 아빠가 지난번에도 전혀 반기지 않으셨는데. 들어보니 실은 깅여름도 최 회장이랑 백지안 때문에 죽음까지 몰렸다고 하던데.”그 일이 나오니 아무래도 서유인도 할 말이 많았다. 애초에 저런 남자와 결혼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게. 정말 저 뻔뻔함은 나도 존경스러울 지경이라니까.”추성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사람을 독하게 대하는 것도 추성호는 하준을 능가하지 못했다.----한편 하준을 본 서경주는 안색
서경주는 하준을 한 번 더 노려보고는 과히 좋지 않은 기분인 채로 무대로 올라갔다.서경주가 마이크를 들었다.“벨레스 창립 3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주신 여러 내빈 여러분, 오늘은 창립 기념 행사뿐 아니라 축하할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몸이 불편해서 회사 일이 대부분을 서경재와 서유인 두 사람이 맡아 주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서유인을….”“반대합니다.”닫혀있던 연회장 문이 탕하고 열렸다.다들 그쪽을 쳐다봤다.레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하얀 다리를 드러내고 하이힐을 신고 들어왔다. 매혹적인 갈색 머리는 길게 늘어뜨렸고 조명을 받아 미모가 더욱 빛났다. 몸짓마저 우아해서 신비감을 더해주었다.오늘 파티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임이 틀림없었다.다들 홀린 듯 바라보았다.그러나 다들 곧 뭔가를 깨달았다. 서유인과 그 레드 드레스의 여인을 비교해 보니 어쩐지 닮긴 했지만 자세히 비교해 보니 서유인보다 그 여인의 이목구비가 훨씬 시원스러웠다.털썩!무대 위의 서경주가 들고 있던 마이크가 떨어졌다.서경주는 경악해서는 그 레드 드레스를 바라보다 부들부들 떨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서유인도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강여름! 살아있었구나.”서유인은 너무 놀라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3년을 기다려 마침내 벨레스를 손에 넣으려는 찰나인데 강여름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튀어나오다니, 귀신인가?’위자영이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더니 소리 질렀다.“어디서 나온 사기꾼이야? 경비, 연회 망치지 않도록 당장 끌어내요.”경비 몇 명이 즉시 여름에게 다가갔다. 여름이 우아한 눈썹을 치켜세웠다. 품위있는 얼굴에 경멸이 가득했다.“위자영 여사는 이미 서경주 님과 이혼한 지 2년은 되셨을 텐데요? 언제부터 외부인이 벨레스의 중요한 연회를 지휘했나요? 아버지, 안 그래요?”여름이 서경주를 맑은 눈으로 똑바로 쳐다봤다.서경주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곧 위자영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경비에게 말했다.“건드리기만 해보라고.”그러더니 무대에
“설마. 최 회장 전처는 그… 강여름 아냐?”“맞아, 강여름.”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은근슬쩍 하준에게로 향했다.이때 하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윽한 동공에 알 수 없는 차가운 빛이 반짝였다.하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하준은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아빠, 속지 말아요!”갑자기 서유인이 다가와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 돌아겠어요? 그냥 강여름하고 똑같이 생긴 사람일 뿐이에요. 어디서 예전에 강여름에 관해서 듣고는 이제 나타나서 사기 치려는 거겠죠. 게다가 강여름은 얼굴이 다 망가졌었잖아요.”“그렇습니다, 형님. 그때 여름이 얼굴 생각 안 나세요? 국내 최고 성형 권위자도 그 얼굴은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고 그랬었잖아요. 최 회장도 기억하죠?”서경재가 불현듯 앉아 있는 하준을 향해 물었다.하준은 톡톡 치던 테이블을 두고 일어서더니 한 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로 여름을 향해 다가갔다.가까워질수록 여름의 매끄러운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그동안 하준은 여름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마다 늘 그 울퉁불퉁한 피부만 기억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모습은 잊어버리고 있었다.이제 이렇게 다시 만나니 익숙한 느낌과 놀라운 기분이 확 덮쳐왔다.어지간해서는 보기 힘든 미인이었다.“됐네요. 최 회장에게는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애초에 최 회장 마음속에는 내가 없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없는데. 나에 대해서는 최 회장보다 김 실장이 더 잘 알걸요.”여름은 담담히 웃더니 느긋하게 서경주에게 귓속말을 했다.“아빠, 자동차 사고 나기 전에 회사 주식 35%는 제게 준다고 직접 말씀하셨었죠?”서경주의 눈에 남아 있던 일말의 의심이 싹 가셨다.이 일은 자신과 변호사 외에는 여름이 밖에 모르는 것이었다.“자, 더 이상 의심들 할 것 없습니다. 저는 이미 이 사람이 내 친딸 여름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서경주가 확신에 차서 말했다.서유인이 다급히 끼어들었다.“아빠, 저 사람이 무슨 말로 아빠를 꼬드
“진정하세요.”여름이 걱정스러운 듯 서경주의 등을 두드리더니 갑자기 서경재를 돌아보았다.“삼촌, 여전히 절 환영하지 않으시는군요. 똑같은 조카인데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닌가요?”서경재가 싸늘하게 여름을 쳐다봤다.“말했다시피 친자 확인 검사를 하기 전에는 난 당신이 우리 형님의 딸이라는 사실을 인정 못합니다. 검사 결과가 없다면 난 못 믿어요.”“못 믿겠는 게 다가 아니라 애초에 내가 돌아오길 원치 않으셨겠죠. 내 존재가 서유인에게 영향을 미치니까요.”여름이 빙그레 웃었다. 눈에는 싸늘한 빛이 반짝였다.“당연히 내 딸에게 영향을 미치지. 혼외자식 주제에 우리 집안에 먹칠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건가?”위자영이 얼른 큰소리를 쳤다.“그동안 우리 유인이가 벨레스에 얼마나 크게 공헌했는지 다들 똑똑히 봤다고.”“그건 그렇죠.”이사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누군가가 서신일을 돌아보았다. “어르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서신일을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유인이가 지금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은 확실하지. 벨레스 후계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 우선 경주가 유인이를 신임 CEO로 발표하고 나서 얘기하자꾸나. 강여름이 진짜인지 가까인지는 친자 검사를 해봐야 할 거고.”“할아버지, 오해세요. 저는 오늘 벨레스 후계자 자리를 다투러 온 게 아니에요. 서유인은 우리 아빠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러 온 겁니다.”여름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연회장 안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서경주 자신도 얼어붙었다.위자영은 불안한 나머지 큰소리쳤다.“후계자 자리를 다투러 온 게 아니라더니 우리 유인이를 몰아내기 위해서 못 하는 짓이 없구나. 우리 유인이가 서경주의 친딸이 아니라고 모욕하다니 저 부녀가 얼마나 닮았는지 딱 보면 안 보여?”“너무 하네, 진짜 아무 소리나 마구 내지르고.”서유인은 눈시울까지 붉혔다.“뭔 헛소리를! 당장 끌어내요!”서경재는 어찌나 분노했던지 휠체어 손잡이를 꽉 잡았다.“삼촌, 왜 이렇게 다급하시죠?”
“친자 검사 보고서만으로는 다들 못 믿으실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른 것도 준비해 뒀었죠.”여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손뼉을 짝짝 쳤다.전면 스크린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떠올랐다.서경주가 침대에 누워있고 위자영이 그 위에 올라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었다.“자기야, 우리 그 폐인 같은 형이 나보다 어디가 더 좋다는 거야?”“맞아. 너무 후회가 된다니까. 진작 알았으면 자기하고 결혼하는 건데. 자기 정말 너무 멋져.”위자영은 그 장면을 보고 기절하기 직전이었다.“멈춰, 멈추라고!”그러나 화면은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고 있었다.위자영은 옷을 풀어 헤친 채 서경재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자기는 서경주 그 망할 늙은이가 대체 언제쯤에나 주식을 우리 유인이한테 물려줄 것 같아?”“걱정하지 마. 30주년 기념일에 내가 형을 설득할 방법을 생각해 뒀어.”“잘 됐다. 주식이 손에 들어오면 벨레스는 이제 우리 유인이 거가 되겠네.”“……”무대 아래서 서경재의 분노에 가득 찼던 얼굴은 완전히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계획대로라면 서유인이 주식을 장악하고 나면 서경주에게는 얼굴을 싹 바꿀 생각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다 보는 가운데서 이런 식으로 형제가 의절을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3년간 애써 쌓아 올린 이미지는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다들 서경주, 위자영, 서유인을 두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맙소사. 구역질 난다. 형수랑 시동생이 얽히다니, TV에서나 보는 일인 줄 알았는데.”“아마도 수십 년 전부터 저런 관계였겠지. 그러니 애도 생겼을 거고. 그래 놓고 서경주의 딸이라고 해서는 서경주의 주식을 손에 넣을 작정이었던 거야.”“서경재 입장이 아주 곤란하겠는걸. 서경주가 내내 엄청 잘해줬잖아.”“저 위자영은 또 어떻고. 평소 그렇게 고상한 척은 다 하더니 사생활이 저렇게 지저분할지 몰랐네.”“누가 아니래. 우리 마누라가 툭하면 위자영이랑 쇼핑 다니곤 했는데 그 생각을 하니까 어제 먹은
“겨, 경재 씨, 살려 줘요.”위자영은 울그락불그락하는 서경주의 얼굴에 깜짝 놀라 얼른 서경재의 뒤로 몸을 숨겼다.서경주가 돌아서서 분노로 동그랗게 뜬 눈을 서경재에게로 향했다.“서경재. 생각지도 못했구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니? 난 네 형인데. 어려서부터 난 뭐든 너에게 다 양보했다. 그런데 넌 날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게냐? 너무나 무섭구나.”“이런 놈을 보았나? 이런 황당한 짓을 벌이다니, 양심이 땅바닥에 떨어진 게냐?”서신일은 화가 나서 컵을 냅다 집어 던졌다. 오늘로 벨레스는 온 세상에 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경재에게 너무나 실망했다.”박재연도 너무 실망한 나머지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자영이 쟤는 내가 애초에 눈이 멀었지, 진작 알았으면 죽어도 저런 인간이랑 결혼시키지 않는 건데.”위자영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외쳤다.“그때 나는 서경주를 사랑했어요. 너무 사랑해서, 서경주와 결혼하고 싶어서 그런 방법을 생각했던 건데….”“날 사랑해서 내 동생이 아이를 가지고 나에게 시집왔다고?”서경주가 허허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나이에 얼마나 웃었던지 눈물이 다 났다.“뭔 놈의 팔자가 당신 같은 인간을 만나서…. 나가. 두 모녀 다 내 눈앞에서 사라져.”“아빠….”서유인의 얼굴은 이미 있는 대로 하얗게 질렸다.곧 벨레스가 손에 들어오는 줄 알았더니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인지 알 수 없었다.“아빠, 전 몰랐어요. 우리 내내 아빠와 딸이었잖아요? 날 버리지 마세요.”“정말 몰랐던 거 확실해?”여름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더니 빙그레 웃었다.“3년 전에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뇌사 상태였을 때 너랑 네 엄마는 한번 들여다보지도 않았잖아? 오히려 아버지를 치료하던 닥터 안드레이는 화재로 죽을 뻔하기도 했지. 내가 안드레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아버지 치료를 계속하게 하지 않았으면 절대 깨어나지 못하셨을걸.”서유인이 당황해서 고개를 마구 저었다.“난 아니야. 내가 병문안을 안 갔던 건… 난….”“추성호랑 결혼
벨레스 주주들은 이 사태에 당황했다. 유 이사가 난처한 듯 입을 열었다.“서 이사, 집안 개인사는 개인적으로 해결하시지 지금 우리 벨레스 30주년 행사장에서 이러실 게 아닙니다.”“그러게 말이오. 서유인이 그간 회사를 위해서 애써온 것도 사실이고.”다른 이사들도 맞장구쳤다.서경주는 온몸의 피가 다 얼어붙는 것 같았다.그들은 애초에 자신과 함께 벨레스를 일구어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다들 이익을 위해 서경재의 편에 서기로 한 것이었다.“아버지, 너무 화내시면 몸에 해로워요.”여름이 웃으며 서경주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벨레스 그룹 이사들을 둘러보았다.“그러면 여러분은 서경재가 계속해서 회장을 맡고, 서유인에게 CEO를 맡기실 생각이란 말씀이죠”벨레스 이사들과 중역들은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그간 다들 서경재와 한배를 타고 적잖은 이득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그럼 좋아요. 아버지, 안 나간다니 우리가 나가죠.”여름은 서경주의 팔을 잡았다.“여름아….”서경주가 다급히 불렀다. 벨레스는 서경주가 여름에게 줄 수 있는 전부였다.여름이 서경주의 귀에 속삭였다.“아버지, 오늘 30주년 행사라고 기자들 부른 거 잊으셨어요? 지금 기자들이 라이브로 뉴스를 내보내고 있다고요.”여경주는 확 정신이 들었다. 오늘의 추문이 인터넷을 타고 전국에 퍼져나간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어떤 기업이든 오너는 회사의 이미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이사들이 서경재 무리를 남기겠다고 고집한다면 결국 대중의 비난을 받게 될 것이 뻔했다.“곧 아버지에게 돌아와 달라고 부탁할 거예요.”여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서경주가 끄덕였다.“그래, 이런 곳에 남아 있다가는 나도 더러운 물이 들겠어. 가자. 우리는 부녀끼리 어디 가서 회포나 풀자꾸나.”두 사람은 연회장을 떠났다.다들 벨레스 이사장이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갈 줄은 생각도 못 했다.다들 서로 얼굴만 마주 볼 뿐이었다.서경주 부녀가 떠나자 곧 하준도 자리를 떴다.위자영과 서유인은 안도의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