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자 검사 보고서만으로는 다들 못 믿으실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른 것도 준비해 뒀었죠.”여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손뼉을 짝짝 쳤다.전면 스크린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떠올랐다.서경주가 침대에 누워있고 위자영이 그 위에 올라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었다.“자기야, 우리 그 폐인 같은 형이 나보다 어디가 더 좋다는 거야?”“맞아. 너무 후회가 된다니까. 진작 알았으면 자기하고 결혼하는 건데. 자기 정말 너무 멋져.”위자영은 그 장면을 보고 기절하기 직전이었다.“멈춰, 멈추라고!”그러나 화면은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고 있었다.위자영은 옷을 풀어 헤친 채 서경재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자기는 서경주 그 망할 늙은이가 대체 언제쯤에나 주식을 우리 유인이한테 물려줄 것 같아?”“걱정하지 마. 30주년 기념일에 내가 형을 설득할 방법을 생각해 뒀어.”“잘 됐다. 주식이 손에 들어오면 벨레스는 이제 우리 유인이 거가 되겠네.”“……”무대 아래서 서경재의 분노에 가득 찼던 얼굴은 완전히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계획대로라면 서유인이 주식을 장악하고 나면 서경주에게는 얼굴을 싹 바꿀 생각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다 보는 가운데서 이런 식으로 형제가 의절을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3년간 애써 쌓아 올린 이미지는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다들 서경주, 위자영, 서유인을 두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맙소사. 구역질 난다. 형수랑 시동생이 얽히다니, TV에서나 보는 일인 줄 알았는데.”“아마도 수십 년 전부터 저런 관계였겠지. 그러니 애도 생겼을 거고. 그래 놓고 서경주의 딸이라고 해서는 서경주의 주식을 손에 넣을 작정이었던 거야.”“서경재 입장이 아주 곤란하겠는걸. 서경주가 내내 엄청 잘해줬잖아.”“저 위자영은 또 어떻고. 평소 그렇게 고상한 척은 다 하더니 사생활이 저렇게 지저분할지 몰랐네.”“누가 아니래. 우리 마누라가 툭하면 위자영이랑 쇼핑 다니곤 했는데 그 생각을 하니까 어제 먹은
“겨, 경재 씨, 살려 줘요.”위자영은 울그락불그락하는 서경주의 얼굴에 깜짝 놀라 얼른 서경재의 뒤로 몸을 숨겼다.서경주가 돌아서서 분노로 동그랗게 뜬 눈을 서경재에게로 향했다.“서경재. 생각지도 못했구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니? 난 네 형인데. 어려서부터 난 뭐든 너에게 다 양보했다. 그런데 넌 날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게냐? 너무나 무섭구나.”“이런 놈을 보았나? 이런 황당한 짓을 벌이다니, 양심이 땅바닥에 떨어진 게냐?”서신일은 화가 나서 컵을 냅다 집어 던졌다. 오늘로 벨레스는 온 세상에 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경재에게 너무나 실망했다.”박재연도 너무 실망한 나머지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자영이 쟤는 내가 애초에 눈이 멀었지, 진작 알았으면 죽어도 저런 인간이랑 결혼시키지 않는 건데.”위자영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외쳤다.“그때 나는 서경주를 사랑했어요. 너무 사랑해서, 서경주와 결혼하고 싶어서 그런 방법을 생각했던 건데….”“날 사랑해서 내 동생이 아이를 가지고 나에게 시집왔다고?”서경주가 허허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나이에 얼마나 웃었던지 눈물이 다 났다.“뭔 놈의 팔자가 당신 같은 인간을 만나서…. 나가. 두 모녀 다 내 눈앞에서 사라져.”“아빠….”서유인의 얼굴은 이미 있는 대로 하얗게 질렸다.곧 벨레스가 손에 들어오는 줄 알았더니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인지 알 수 없었다.“아빠, 전 몰랐어요. 우리 내내 아빠와 딸이었잖아요? 날 버리지 마세요.”“정말 몰랐던 거 확실해?”여름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더니 빙그레 웃었다.“3년 전에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뇌사 상태였을 때 너랑 네 엄마는 한번 들여다보지도 않았잖아? 오히려 아버지를 치료하던 닥터 안드레이는 화재로 죽을 뻔하기도 했지. 내가 안드레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아버지 치료를 계속하게 하지 않았으면 절대 깨어나지 못하셨을걸.”서유인이 당황해서 고개를 마구 저었다.“난 아니야. 내가 병문안을 안 갔던 건… 난….”“추성호랑 결혼
벨레스 주주들은 이 사태에 당황했다. 유 이사가 난처한 듯 입을 열었다.“서 이사, 집안 개인사는 개인적으로 해결하시지 지금 우리 벨레스 30주년 행사장에서 이러실 게 아닙니다.”“그러게 말이오. 서유인이 그간 회사를 위해서 애써온 것도 사실이고.”다른 이사들도 맞장구쳤다.서경주는 온몸의 피가 다 얼어붙는 것 같았다.그들은 애초에 자신과 함께 벨레스를 일구어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다들 이익을 위해 서경재의 편에 서기로 한 것이었다.“아버지, 너무 화내시면 몸에 해로워요.”여름이 웃으며 서경주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벨레스 그룹 이사들을 둘러보았다.“그러면 여러분은 서경재가 계속해서 회장을 맡고, 서유인에게 CEO를 맡기실 생각이란 말씀이죠”벨레스 이사들과 중역들은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그간 다들 서경재와 한배를 타고 적잖은 이득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그럼 좋아요. 아버지, 안 나간다니 우리가 나가죠.”여름은 서경주의 팔을 잡았다.“여름아….”서경주가 다급히 불렀다. 벨레스는 서경주가 여름에게 줄 수 있는 전부였다.여름이 서경주의 귀에 속삭였다.“아버지, 오늘 30주년 행사라고 기자들 부른 거 잊으셨어요? 지금 기자들이 라이브로 뉴스를 내보내고 있다고요.”여경주는 확 정신이 들었다. 오늘의 추문이 인터넷을 타고 전국에 퍼져나간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어떤 기업이든 오너는 회사의 이미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이사들이 서경재 무리를 남기겠다고 고집한다면 결국 대중의 비난을 받게 될 것이 뻔했다.“곧 아버지에게 돌아와 달라고 부탁할 거예요.”여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서경주가 끄덕였다.“그래, 이런 곳에 남아 있다가는 나도 더러운 물이 들겠어. 가자. 우리는 부녀끼리 어디 가서 회포나 풀자꾸나.”두 사람은 연회장을 떠났다.다들 벨레스 이사장이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갈 줄은 생각도 못 했다.다들 서로 얼굴만 마주 볼 뿐이었다.서경주 부녀가 떠나자 곧 하준도 자리를 떴다.위자영과 서유인은 안도의
잠깐 사이에 벨레스 추문은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벨레스 회장과 형수 불륜으로 둔 혼외자식이 전 회장 재산 편취 기도해.-세계관이 싹 바뀌는 소리가 들린다. 라이브 봤는데 서경재 같은 쓰레기가 벨레스 고위층의 지지를 받는다니 뒷구멍을 뭐 받아먹은 거 아니냐? 세무 조사로 탈탈 털어보자.-와하하 끼리끼리 논다고 다들 불륜하는 인간들이라 감이 떨어지는 건가?-돈 있는 놈들일수록 변태라던데, 나 이제는 그 말 믿을 것 같아.-지금 저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체 뭐야? 서경재를 지지한다는 뜻인가?-안 되겠다. 다음부터 벨레스 제품은 불매 운동이다. 나부터 시작!“……”기념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댓글을 보고는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저기… 저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아이고, 미팅이 있었는데 깜빡했네. 먼저 좀 가보겠습니다.”손님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자 벨레스 중역은 부끄러워서 땅에 굴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을 지경이었다.“서경재 부녀가 아주 우리 늙은이 망신을 있는 대로 시키는구먼.”주주들은 이제 속이 뒤집혔다. 뒤쪽에 중역들에게 외쳤다.“뭘 아직까지 멍하니들 있나? 어여 돌아들 가.”연회장은 순식간에 텅 비어버렸다.서신일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내가 이제 너 때문에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겠냐?”그러더니 박재연과 함께 자리를 떴다.서경재는 화나 가서 술잔을 있는 대로 바닥에 집어 던졌다. 위자영은 놀라서 얼른 서유인을 감싸더니 울부짖었다.“강여름 고 망할 것이 왜 지 에미처럼 일찍 죽지도 않고.”“아빠, 우, 우린 이제 어떡해요?”서유인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빨개진 눈에는 불만이 가득했다.추성호의 눈빛이 잠시 번뜩이더니 기묘한 웃음을 띠었다.“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죠. 방금 강여름이 대놓고 공개적으로 자기가 서경주의 혼외자식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어머님은 그걸 물고 늘어지시면 됩니다. 아버님이 바람이 나서 제대로 돌보지 않으니 복수심에 동생을 찾아갔었다고 프레임을 만드는
-이해가 안 가. 위자영이 서경주 동생과 먼저 잤다면 서경재랑 안 사귄 이유는 뭐고, 왜 굳이 강여름을 못 잡아먹어서 난리인 건데?-이해 안 가지? 서경재는 반쪽짜리라 벨레스에서 상속권이 없었거든. 벨레스는 줄곧 서경주한테 힘이 있었어. 신지는 원래 별 볼 일 없었는데 서경주와 결혼하면서 지금은 재벌 대열에 들어섰지.-3년 전에 서경주 대표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였다며… 위자영하고 서경재 짓 아니었을까?-3년 전에 내가 그런 소문 올렸다가 욕 바가지로 처먹었잖아…“…….”“아아악, 강여름 이게!”위자영이 히스테리컬하게 소리 질렀다.추성호도 이를 갈았다. 강여름은 이미 자신들의 수를 예측한 게 분명했다.사실 서유인이 서경재의 딸인 걸 알았다면 절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서유인이 벨레스를 물려받으면 천천히 벨레스를 삼킬 작정이었다.강여름의 출현은 그 계획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발자국 소리가 주차장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강여름이 차 키를 꺼내 누르자 앞에 세워져 있던 흰색 스포츠카가 라이트를 번쩍였다.“강여름.”뒤에서 갑자기 최하준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서경주가 바로 뒤돌아 여름의 앞을 막아섰다.“내 딸에게서 떨어지게.”하준은 들은 체 만 체하고는 여름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연회장에서 전국 재계 인사들을 상대로 여름이 보여준 차분하고 결연한 태도는 너무나 뜻밖이었다.오늘 밤을 위해 여름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전국의 재벌이 다 모인 이런 자리에서 서경재, 위자영, 서유인의 진면모를 다 까발리다니….‘오늘 밤 연예계 스타들도 많이 와서 라이브 진행하는 방송도 많았는데… 그 바보들은 그것도 몰랐겠지. 이제 신분과 체면을 최고로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 세 사람과 관계를 끊으려 할 거야….’비즈니스에서 관계, 인맥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강여름은 힘들이지 않고 그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원천 봉쇄한 것이다. 정말 탄성이 나왔다.여름에 대한 하준의 기억은 아직도 3년 전 그 사
단단히 화가 난 서경주가 대답하려는데 여름이 살짝 서경주를 밀어냈다. 여름은 담담하게 하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맞아, 속였지.”“잘하는군, 누구랑 작당한 건지 말해. 임윤서? 아니면 병원 사람들인가?”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이 너무나 바보처럼 느껴졌다. 3년 동안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니….여름이 고개를 젓더니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내가 그때 죽은 척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난 아마 진짜 죽어서 한 줌 재가 돼 있을 걸.”“그게 무슨 소리지?”여름의 미소는 분명 아름다웠지만 시니컬한 눈빛이 하준을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만들었다. 하준의 눈에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그걸 정말 몰라서 물어?”여름은 웃으며 핸드백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이렇게 정상인 사람을 정신병원에서 주사 맞고 약 먹고 해 한 점 못 보게 했잖아. 감옥에 갇힌 죄수보다 못했다고. 그렇게 당신들은 날 정신병자로 만들었을 테지.”순간 하준의 목이 메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은 그때… 정상이 아니었어….”“정신에 문제가 있는 상태와 극도로 화가 치민 상태가 어떻게 다른 건지 말해 보시지?” 여름이 싸늘하게 웃었다.“아이는 잃고, 당신은 날 감금한 채 매일 내 눈앞에서 백지안하고 붙어있고… 내가 그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겠어?”“최하준… 내 딸에게 그토록 잔인한 짓을…”서경주는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자신도 깨어났을 때 여름의 상태를 보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 모든 게 최하준 때문이었을 줄이야….“이 자식!”서경주가 욱해서 하준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하준이 가볍게 막고는 서경주의 손목을 잡았다.“놔.” 여름의 아름다운 눈빛에 싸늘함이 감돌았다.“왜? 3년 전엔 아버지를 빌미로 날 위협하더니, 또 아버지를 가지고 나랑 싸우게?”하준의 어깨가 움찔하며 입술이 살짝 씰룩이더니, 서경주를 잡고 있던 손에 스르르 힘을 풀었다. 서경주가 놀라 물었다.“나를 빌미로 위협을 했다는 게 무슨 말이냐?”하준은 침묵하고 여름은 고개를
차에 시동을 건 뒤에도 하준은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여름이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말했다.“좀 비켜주시지?”하준이 복잡한 심경으로 여름을 보았다. 선글라스를 걸친 날렵한 콧날, 그 아래 그려놓은 듯한 입술이 혼미할 정도로 아름다웠다.‘철저하게 환골탈태했군….’낯설기도 하면서 동시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자신이 왜 이러는지 하준도 알 수가 없었다. 여자 외모에 혹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이다.잠시 후, 하준이 몸을 이동하자 흰색 스포츠카는 휙 지나갔다.김상혁이 다가왔다.“돌아가시죠.”“조사 좀 해봐. 그때 어떻게 죽은 걸로 위장하고 떠났는지, 누가 도운 건지.”하준이 갑자기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여름이 떠난 쪽을 노려보았다.김상혁은 흠칫 놀라더니 빠르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차에 올라탄 뒤 하준은 여름이 SNS에 올린 글을 읽었다.‘선수 치는 데 도가 텄군…’정신이 들자 온몸이 경직되어 왔다.‘젠장… 분명 3년 동안 농락당했는데, 당연히 화가 치밀어야 할 상황에 왜 웃음이 나는 걸까?’“김 실장, 3년 전에 강여름이 정말 병이 아니었던 건가?”“그건… 저도 잘….”김상혁이 머뭇거리며 답했다.“하지만, 백지안 씨는 전문가이니 그분이 그렇다면 뭐… 설마 그분이 우리를 속이겠습니까?”뒷좌석이 잠시 조용했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하준이 상혁의 말에 멍해졌다.그렇다. 3년 전 백지안이 강여름이 우울증이라고 말했을 때 그대로 믿었었다. ‘하지만 지안이가 거짓말한 거라면?’하준이 미간을 만지작거렸다.‘아니야, 지안이가 그럴 리 없어.’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백지안이었다.“준, 집이야?”“가는 중이야.” 잠시 침묵하더니 백지안이 말을 이었다.“방금 뉴스 봤는데… 강여름이 돌아왔다지? 그 여자 아무래도….”“응.”하준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엔 온통 여름의 매혹적인 모습에 대한 이미지로 가득했다.“준, 나….”불안한 어조였다.“그 여자 봤어. 나보다 예뻐졌더라. 얼굴 고쳤나 봐? 나 좀 불안해
잠시 후, 하준은 지안을 밀어냈다.“난 서재에서 잘게.”“준, 왜 그래? 그럼 우리 아이는?”백지안이 울먹거렸다. “내가 싫어진 거야? 그때 외국에서 그 일 때문에…”“아니야. 네가 싫었던 적 없어. 내가 문제야.”하준의 눈빛에 번민이 스쳤다. 자신도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3년 동안 자신이 사랑하는 건 백지안이라는 걸 분명 잘 알면서도 관계를 좀 진전시키려 할 때면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밀려왔다.때로는 자신이 여성과의 스킨십을 혐오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 백지안의 갖은 방법으로 심리 치료를 시도했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백지안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아니면 우리… 병원에 한 번 가볼까? 나 정말 더 못 견디겠어. 난 정말….”지안은 옷을 벗고 앞뒤 가리지 않고 하준에게 달려들었다. 흠칫 놀란 하준이 무의식적으로 지안을 밀쳐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지안은 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그녀는 이내 절규하기 시작했다.“미안해.”하준은 옷을 벗어 덮어주고는 지안을 안아 침대에 누이고 침실에서 나갔다.하준이 떠나자, 방에서 백지안이 침대를 두드리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하준에게 자신을 사랑하도록 최면을 걸 때, 자신과 관계가 불가능한 사이가 될 거란 예측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때로 억지로 관계를 진전시키고자 하면 어김없이 거부반응을 보이고는 했다.3년 하고도 반이다.이런 생활을 견디자는 곧 미칠 것만 같았다. 때로 지안은 정말 아무나 찾아 하룻밤이라도 즐기고 싶은 심정이었다.분을 못 이기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거절’을 누르고 끊어버렸다.하지만 곧, 그 번호로 사진 한 장이 전송돼 왔다. 자신이 비키니를 입고 어느 중년 남성의 무릎에 앉아있는 사진이었다. 입가에는 시커먼 수염이 덥수룩한 우악스러운 인상에 몸과 팔에는 문신이 가득하고 배는 불룩했다. 그리고 자신은 달콤하게 웃고 있었다. 지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에겐 악몽 같은 시절이었다.핸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