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느닷없는 행동에 곽동건은 몸을 조금 일으켰다.진유라의 시선은 그의 얼굴에서 복부로, 복부에서 다시 얼굴로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더니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진유라는 손발을 다 써서 그에게 깔린 몸을 빼내려 했다. 마치 곽동건이 곧 폭발할 활화산이고, 조금이라도 닿으면 화상을 입을 것처럼 조심스럽게.곽동건은 그녀가 밀쳐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그녀가 완전히 벗어나기 직전에 그녀를 붙잡았다.“왜 그래요?”진유라는 헛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별일 아니에요. 너무 늦어서 가야겠어요. 요즘 부모님 집에 살고 있어서 통금이 있어요.”그녀는 손을 빼내고 싶었지만 감히 거칠게 움직이지 못했다.‘곽동건은 거기가 가늘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굵어졌지?’게다가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딱딱해서 방금 잠깐의 접촉으로 배가 아플 정도였다.너무 갑작스런 변화라 그녀는 진정이 필요했다.곽동건은 여전히 그녀를 붙잡고 정색하며 물었다.“말해요. 도대체 왜 그러는지?”“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가야 해요.”“신은지의 일은 나 몰라라 할 거예요?”“몰라요. 남편인 박태준이 알아서 하겠죠.”‘별수 없다. 이러다 내가 죽게 생겼는데. 망쳐도 관계없다. 내가 살고 봐야 하니까.’곽동건은 그녀가 방금 자기 몸을 아래위로 훑던 모습을 떠올리며 눈썹을 치켜떴다. 그의 몸에서 유일하게 이전과 다른 점은...“놀랐어요?”곽동건의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보며 진유라는 헛기침을 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인정할 수 없다. 아니면 그녀가 너무 형편없어 보이니까. 어쨌든 그녀도 한 번에 20여 명의 도련님과 놀던 드센 여자인데.진유라는 허리를 곧게 펴고 해볼 건 다 해본 듯 침착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아니요. 그냥 갑자기 생각난 건데, 곽동건 씨, 지난번에 우리가 정말 했어요?”‘그럴 리 없는데. 이 정도 크기에, 정말 했다면 며칠 동안
이튿날 박태준은 경찰서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공예지 씨가 살던 집을 수색하던 중 박태준 씨, 신은지 씨와 관련된 물건들이 나왔어요. 두 분이 경찰서에 한 번 더 오셔서 수사에 협조 부탁드립니다.”“...”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전화기 저편의 경찰은 의아해했다.“박태준 씨,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신가요?”박태준의 목소리는 좀 멀게 들렸다.“죄송합니다. 아침을 만들고 있는데 소리가 커서 잘 들리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자세히 들으니 정말 요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은 놀라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재경그룹 대표가 직접 요리한다고?박태준은 죽을 그릇에 담은 후 그쪽에서 말을 하지 않자 귀찮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말씀하세요. 무슨 일인지?”경찰은 침을 삼키고 방금 했던 말을 반복했다.박태준은 알았다고 대답한 후 전화를 끊고 같이 식사하기 위해 신은지를 부르러 위층에 올라갔다.그녀는 아직 자고 있었다. 헝클어진 긴 머리가 베개 위에 늘어져 있고, 그중 몇 가닥은 얼굴에 붙어 있었다. 하얀 볼은 이불 속 온기 때문에 발그스름하게 물들었고, 거기에 새까만 눈썹과 빨간 입술까지 원래도 예쁘지만 오늘따라 그림을 찢고 나온 것 같이 아름다웠다.박태준은 그녀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얼마나 깊은 잠에 빠졌는지 그가 바로 앞에 왔는데도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은지야.”대답이 없자 그는 몇 번 더 불렀다. 그러자 그녀는 시끄럽다는 듯 바짝 다가온 그의 얼굴을 옆으로 밀어냈다.“졸려. 저리 가.”그녀는 중얼거리더니 돌아누워 계속 자려 했다.어젯밤에 공예지의 일로 그녀가 잠을 이루지 못하자 박태준은 그 기회를 틈타 그녀를 못살게 굴었다. 결국 새벽에야 잠들었는데 악몽까지 꾸다 보니 지금 졸려 죽을 것 같다. 재물신이 아니라 염라대왕이 와도 상대하고 싶지 않다.신은지는 잠이 덜 깬 데다 손에 힘이 없고 나른해 쉽사리 박태준에게 잡혔다.그녀의 손가락에는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박태준이 그녀의 손을 잡을 때 반지가
신은지는 박태준의 말에 콧방귀를 뀌고 씻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다.“붕어보다도 못한 기억력으로 뭘 기억하겠다는 거야, 내일이면 다 까먹을 거잖아!”박태준은 섭섭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 화장실로 향했다.“오늘 한 말들 하나도 까먹지 않고 머릿속에 기억하고 일기장에도 꼼꼼히 적어 놓을게. 그러니까 자꾸 뭐라고 하지 마...”신은지는 손을 씻으려던 행동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면서 물었다.“일기장?”박태준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은지야, 나한테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될까? 이른 시일 내에 너에게 답을 줄게.”신은지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없이 다 씻은 후, 아침을 먹기 위해 1층 주방으로 향했다.식탁에 신은지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고맙다는 말 대신 쌀쌀맞은 표정으로 머리를 푹 숙인 채 조용히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냉랭한 분위기에 박태준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신은지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다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은지야...”신은지는 박태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경찰서에 가봐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빨리 밥 먹어, 자꾸 쳐다보면 내가 밥을 편하게 먹을 수가 없잖아!”경찰서.담당 경찰관은 박태준과 신은지에게 공예지의 집을 수색하던 중에 찾아낸 물건을 보여주면서 말했다.“공예지 씨의 집을 수색하던 중, 두 분이 전예진 씨와 함께 찍은 사진이 발견됐습니다.”이어 경찰관은 사진 뒤에 적혀있는 메모를 가리키면서 말했다.“사진 뒤쪽을 보시면 두 분의 배경과 성격이 적혀 있고 특히 신은지 씨의 성격에 관해서 상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그러면 두 분은 이 사진 속의 여성분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경찰관이 보여준 또 다른 사진에는 열여섯 정도 나이로 추정되는 여자애가 있었다.사진 속 앳돼 보이는 여자애의 외모는 눈이 부실 정도로 예쁜 건 아니었지만 볼수록 매력이 있는 스타일이었다.박태준과 신은지는 처음 보는 낯선 여자애의 사진에 고개를
신은지를 진유라의 가게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던 박태준은 왕준서에게서 걸려 온 연락을 받았다.“박 대표님, 목격자의 위치를 파악했습니다.”박태준은 재빠르게 차를 갓길에 세우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알겠어, 내가 있는 위치를 보내줄 테니까 일단 여기로 와서 같이 가지.”얼마 뒤, 박태준이 보내준 주소에 도착한 왕준서는 시동도 끄지 않은 차 뒷좌석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 박태준을 발견했다.“박 대표님?”“왔어? 출발하지.”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어느 상가 건물의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하지만 박태준은 피곤함에 잠이 든 건지 두통 때문에 힘든 건지 눈을 감은 채 좀처럼 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왕준서도 아무런 기척을 내지 못하고 백미러를 통해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했다.무표정한 얼굴이던 박태준이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고 가쁜 숨소리를 내쉬었으며 뒤이어 그의 이마에 땀까지 송골송골 맺혔다.그 모습에 놀란 왕준서는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대표님, 머리가 또 아프십니까? 제가 안마해 드리겠습니다. 물론...”그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운전석에서 내려 뒷자리로 가서 공예지가 가르쳐준 방법대로 박태준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짧은 기간에 일취월장한 왕준서의 안마 실력은 전문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박태준은 두통이 가라앉자, 눈을 천천히 뜨면서 말했다.“이제 괜찮아졌어. 그만하고 올라가지.”두 사람은 곧이어 건물 4층에 있는 고급 여성 의류 매장에 도착했다.가게 휴게실에서 한 무리의 여자들이 둘러앉아 디저트를 먹으며 다른 매장에 어떤 신상품이 들어왔는지를 얘기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그러던 와중에 값비싼 옷차림에 멀끔하게 생긴 박태준이 등장하자, 모두 하던 얘기를 멈추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박태준의 신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가 풍기는 카리스마에 시선을 빼앗겨서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그는 여자들의 뜨거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가게로 성큼성큼 들어가서는 한 여자 앞에 멈춰 섰다.“초
박태준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으면서 답했다.“아마도?”불빛 때문에 영상이 다소 흐릿했지만, 생존본능을 억누르면서까지 수심 1.5m밖에 되지 않은 얕은 수영장에서 스스로 익사하는 공예지의 모습이 생생하게 찍혀있었다.신은지는 문득 그날 밤 공예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날 협박하려고 예지 씨를 이용한 것 같아요. 아마도...”박태준은 신은지가 더 이상 기도윤에 관한 일을 떠올리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 손을 뻗어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사건을 조사하는 것도, 인질을 구하는 것도 경찰이 해야 할 일이야. 우리는 경찰서에 가서 이 영상을 제출하고 네 혐의만 벗으면 돼.”신은지는 박태준을 따라서 가게를 나가려다가 고개를 돌려 진유라를 향해 말했다.“나 먼저 경찰서에 갔다 올게.”두 사람이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진유라는 아무 말 없이 다리를 꼬고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저녁은 내가 알아서 먹을게.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는 사람이 눈에 안 보여?”진유라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을 이어 나갔다.“내 풍성한 머리카락이 그 뜨거운 시선을 견딜 수 있어야 말이지.”“...”박태준은 대뜸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곽동건에게 전화를 걸었다.“곽 변호사님, 당신 여자 친구가 밥 친구를 찾고 있는데요?”곽동건은 요즘 여러 개 사건의 변호를 동시에 맡게 되어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보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박태준은 곽동건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발언을 이어 나갔다.“오늘 저녁 당신 여자 친구가 엔조이 클럽에 간다는데 괜찮겠어요?”진유라는 말도 안 되는 박태준의 소리에 노발대발했다.“박태준 씨, 내가 언제 엔조이 클럽에 간다고 했어요! 그리고 엔조이 클럽 투자자가 가게 관리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거기 음식들 어떻게 그 정도로 맛없을 수 있죠?”박태준이 곽동건과의 통화를 끊고 가게를 나가려는 순간, 진유라의 벨 소리가 울렸다.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한 진유라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가게 문을
신은지는 아직도 불신이 가득한 눈빛으로 박태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날 또 속이면 그때는 이 약혼반지가 이별 반지로 변할 줄 알아.”박태준은 화내는 신은지가 귀여운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내가 너를 왜 속여, 근데 검사결과지를 봐도 네가 이해하지 못할걸.”“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빨리 보고서나 가지고 와.”박태준은 얼른 신발을 갈아신고 위층 서재로 가서 검사결과지를 들고 내려왔다.때마침 신은지가 무채색의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핀으로 머리를 고정한 채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따스한 노란 불빛 아래에서 채소를 다듬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썰렁하기만 했던 집에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 같았다.박태준은 자기의 등장으로 인해 아늑하고 포근한 분위기가 깨질까 봐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그는 문득 예전에 신은지가 자기를 위해 죽을 끓여주었던 장면이 떠올랐고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그 무렵 냉장고 문을 열려던 신은지가 자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박태준을 보고 퉁명스럽게 말했다.“거기 멍하니 서서 뭐 해? 빨리 와서 도와줘.”“알겠어.”박태준은 행복에 젖은 미소를 지으면서 신은지에게 다가갔다.이어 그는 검사 보고서를 신은지에게 건네줬고 식칼을 건네받아 채소들을 능숙하게 썰었다.검사 보고서를 받아 든 신은지는 내용을 꼼꼼하게 훑어보았지만, 검사 날짜를 제외하고는 수많은 데이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다.그녀는 내일 의사한테 직접 물어보기로 하고 보고서를 한쪽에 내려놓았다.이때, 채소들을 썰던 박태준이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먹어봤어.”“응?”“아까 문득 네가 만들어준 요리를 먹어봤던 기억이 떠올랐어.”박태준은 동작을 멈추고 신은지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내가 집에 늦게 들어왔던 날, 넌 이미 잠들어 있었고 식탁에는 네가 먹고 남은 음식들이 놓여 있었어. 그 남은 음식들을 내가 먹었던 기억이 문득 났어.”“...”두
1층 주방에 내려온 신은지는 싱크대 위에 썰다 만 채소들과 바닥에는 그녀와 박태준의 옷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조금 전 야릇했던 분위기가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고 얼른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가리고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옷들을 하나씩 주워들었다.그러다 박태준의 양복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어서 호기심에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었고 이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일기장을 발견했다.일기장의 표지는 크라프트지의 질감으로 두껍지 않은 편이었고 자주 사용한 흔적이 보였다.신은지는 문득 전날 아침 박태준이 일기장을 언급했던 것이 생각났고 곧바로 일기장을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그녀는 소파 옆의 스탠드를 켜고 양반다리 자세로 앉아 한 장 한 장 펼쳐보았다.박태준의 일기장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다.「은지가 새엄마와 여동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는지 얼굴에 긁힌 상처가 있는 채로 등교했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나한테 아침을 먹었냐고 퉁명스럽게 물었고 나는 이미 먹었음에도 먹지 않았다고 거짓말했다. 이어 그녀는 손에 든 만두를 나에게 건네주었다.」「나유성에게 아침을 주려고 기다리던 은지는 결국 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다가 영어과 얼짱에게 험한 소리를 들었다.」「...」「은지가 사채업자들에게 빚 독촉을 받고 있고 신씨 가문의 별장도 압류당해서 값싼 임대료의 지하실에서 머물고 있다.」「가온 커피숍에서 나의 끈질긴 강요에 끝에 은지가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결혼을 동의했다.」「은지가 낙하산으로 회사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져 동료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그걸 지켜보는 것이 힘들었던 나는 그 소문을 공론화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은지와 함께 본가에 가서 밥을 먹자고 했다. 그날 저녁, 은지가 내 사무실로 찾아오기를 두 시간 동안이나 기다렸지만, 알고 보니 나 몰래 혼자 본가에 가서 밥을 먹었다.」「은지가 나한테 이혼을 요구했다.」「...」일기장은 시간 순서에 따라 서술 형식으로 쓰여 있었고 신기한 것은 모두 신은지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신은지를 기다리는 동안, 박태준은 닫혀있는 구청 대문을 바라보며 몇 년 전 그녀와 혼인신고를 하러 왔던 장면이 떠올랐다.그때 두 사람은 지금과 달리 따로 구청에 왔었고 서로 무표정한 표정으로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고 각자 인적 사항 표를 작성하고 혼인신고서를 받았었다.그러나 오늘은 여느 커플들처럼 옷도 깔끔하게 맞춰 입고 다정하게 깍지를 낀 채 순서를 기다릴 수 있다는 생각에 그의 가슴이 벅찼다.그는 오늘따라 유난히 화사하게 차려입은 신은지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고 배시시 웃으면서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아니, 돈 주고 샀어.”“돈을 주고 자리를 샀다고?”신은지는 첫 번째로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구청에 나와 줄을 선 커플이 돈 몇 푼에 자리를 내어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돈을 주니까 자리를 내어주던데?”박태준은 떨리는 마음을 신은지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봐 말을 될수록 아꼈다.‘처음 겪는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떨리는 거지?’신은지는 첫 순서를 내어준 커플을 찾으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바로 뒤에서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풀이 죽어서 서 있는 커플과 눈이 마주쳤다.여자는 남자의 허리를 꼬집으며 험상궂은 표정과 달리 애교 섞인 말투로 투덜댔다.“내가 일찍 와서 줄 서자고 했지, 오빠가 머리만 안 말리고 왔으면 2천만 원을 우리가 가질 수도 있었잖아. 그 돈이면 신혼여행을 몰디브로 가고도 남았을 텐데.”남자는 아픈 듯 비명을 질렀고 여자의 공격을 피하고자 몸을 비틀면서 답했다.“정말 미안해, 오늘 이런 일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진작 알았다면 내가 한 달 전부터 먼저 와서 줄을 섰을 거야!”신은지는 아웅다웅하던 커플과 눈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멋쩍은 듯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신은지는 그제야 혼인신고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나와 줄을 섰던 커플이 흔쾌히 자지를 내어준 이유를 알게 되었고 고개를 돌려 장난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있는 힘껏 박태준의 허리를 꼬집었다.“너 미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