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사이에 박용선은 이미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다급한 뒷모습은 마치 늦으면 피하지 못할까 봐 안달한 사람 같았다.신은지는 손을 빼내려 했지만 박태준이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 말했다.“가지 않을 테니 이거 놔. 나 졸려. 좀 자야겠어.”어젯밤에 잠에서 깬 후 그녀는 다시 눈을 붙이지 못했다. 계속 긴장한 상태에 있어서 박태준이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졸려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병실에 줄곧 사람이 있어서 억지로 참고 자지 않았다.이제 겨우 조용해지고 궁금증도 해결되니 졸음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말하는 사이에 그녀는 연거푸 하품을 하더니 눈에 눈물까지 고였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모습은 너무 가련해 보였다.마음이 약해진 박태준은 즉시 그녀를 놓아주었다. 신은지가 돌아서서 비어 있는 옆 침대로 가자, 그는 나유성이 그 침대에서 잤던 것이 생각났다. 나유성의 냄새도 아직 다 가시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녀가 지금 누우면 같은 침대, 같은 이불, 같은 베개를 쓰게 되니 간접적으로 동침한 셈이 된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녀를 끌어당겼다.“이 침대에서 자.”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신은지는 어이가 없어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다.“다 병원 침대인데 무슨 차이가 있다고? 설마 네가 잤던 침대가 더 향기로워?”“응.”“...”신은지는 그를 향해 엄지를 내밀었다.“진짜 낯가죽이 밑창 천 개를 겹쳐놓은 것만큼 두껍네.”“무슨 뜻이야?”그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직감적으로 좋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신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이불은 박태준 냄새로 가득했고 이불 속에도 그의 온기가 남아 있어 그 속에 누우니 마치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그녀를 감쌌다.그제야 그녀는 박태준이 왜 굳이 이 침대에서 자라고 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진짜...얼마나 졸렸는지 이걸 깨닫자마자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바깥의 시끄러운 소리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그녀가 잠든 것을
그는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며 차를 길가에 세웠다.“대표님, 죽은 사람이... 공예지래요.”순간 박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누구?”“공예지요, 대표님께 마사지해 줬던 그 공예지요.”박태준이 딴사람인 줄 알까 봐 그는 자세히 설명했다.“사건이 발생한 지점은 수영장이고, 경찰이 지금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불러 참고인 조사를 하고 있대요. 곧 대표님 차례가 될 거예요.”“...”어젯밤 은지가 납치된 곳은 정원이었고, 멀지 않은 곳에 수영장이 있었다. 그녀가 나간 그 시간에 마침 공예지도 연회장에 없었다.박태준이 냉정한 목소리로 분부했다.“이 일을 사모님한테 알리지 마.”경찰이 그녀를 찾지 않는 한 공예지가 죽은 것을 모르게 해야 한다....신은지는 잠을 꽤 오래 잤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주황빛 석양이 커튼에 막혀 자극적이지 않았다. 옆 침대에 앉아 휴대폰을 하고 있던 박태준이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깼어?”“응.”신은지는 가볍게 외마디 대답을 했다.“휴대폰은 어디서 났어?”그들의 휴대폰은 납치된 후 압수당했다.“방금 진영웅이 보내온 거야.”박태준은 침대 협탁에 놓인 박스를 가리켰다.“네 것도 샀어.”신은지는 너무 오래 자서 온몸이 나른하니 힘이 없고 움직이기도 싫어 옆으로 누운 자세로 그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뭘 보고 있어?”“뉴스.”박태준은 휴대폰으로 업무를 처리하지 않으면 뉴스를 본다. 경제, 정책 등 어쨌든 다 무미건조한 것들이다. 신은지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만 심심해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물었다.“주식은 올랐어?”“몰라.”“그럼 무슨 기사를 보는데?”박태준은 공유 욕구가 넘치는 듯 휴대폰을 그녀에게 건넸다.“설문조사를 보고 있어. 질문은 ‘남편과 시어머니가 동시에 물에 빠지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는가’야. 너는 누굴 먼저 구할 거야?”“...”그녀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이냐는 듯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아내와 엄마가 아니었어? 여기서는 왜 남
박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은지가 아직 안 나왔어요?”공예지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신은지였다는 사실이 전에는 추측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00% 확실해졌다.“여기 우리 셋밖에 없는데, 은지가 나오지 않은 게 안 보여요?”진유라는 경찰서에 불려 왔을 때 어리둥절했고, 참고인 조사를 받고 나서야 공예지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신은지에게 알리려 할 때, 그녀와 박태준이 경찰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박태준을 쳐다보았다.“박 대표님은 이 일을 사전에 몰랐어요? 대표님인데 정보가 빨라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렇게 큰일을 뜬소문이라도 못 들었나요?”박태준은 그녀를 힐끗 보았다.“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전 세계의 시시콜콜한 일을 다 알지는 못해요. 저는 인간이지 CCTV가 아니잖아요.”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어두웠다.진유라가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당신은 CCTV가 아니지만 공예지는 여우가 맞아요. 옆에 서 있으면 여우 냄새가 진동을 하거든요.”“공예지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은지일 거예요.”이건 곽동건에게 한 말이다.“이 일을 진작에 알고 있었어요?”“진작은 아니고, 점심에 기도윤을 만나러 갔을 때 알게 됐어요. 그자가 알려준 거예요. 형사사건의 용의자는 길어서 며칠까지 구속할 수 있어요?”곽동건은 이 말을 듣자마자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챘다.“이 사건의 상황으로 볼 때 최대 14일이에요.”진유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진작에 알았으면 준비를 했겠죠? 은지가 잠시 후에 나오는 건가요?”“은지에게 알려주지 않았어요.”“...”진유라는 신경이 다시 곤두섰고 잠깐 가졌던 안도감도 다시 불안감으로 바뀌었다.“뻔히 알면서...”흥분하니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그녀는 도둑처럼 주변의 경찰 눈치를 살핀 후 목소리를 낮추었다.“왜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방금 형사 사건은 최대 며칠까지 구속할 수 있냐고 물었는데 무슨 뜻이에요? 당신도 은지를 의심하고, 은지를
곽동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릴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진유라는 운전석 문을 연 후, 한 손을 차창 틀에 얹고 다른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몸을 구부리고 그를 바라보았다.“우리가 헤어졌는데, 계속 제 차를 타는 건 아니지 않나요?”“확실해요? 정말 헤어져요?”진유라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 노예주에게 착취당하다 못해 들고일어난 노예와 같아 감정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녀가 노예 위치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것이다.곽동건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신은지 씨 사건은 매우 복잡해요. 목격자도 있고 증거 영상도 있어서 은지 씨가 죽인 것이 아니라 해도 공예지가 수영장에서 죽었기 때문에 물에 빠진 후 일어선 적이 있다거나 다른 범인이 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하면 과실치사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있어요...”진유라는 급히 올라타더니 곽동건의 팔짱을 끼고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댄 후 가녀린 목소리로 아양을 떨었다.“여보...”“...”진도가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직접 등급이 업그레이드됐다.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헤어진 게 아니었어요?”“누가 그래요?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려요?”진유라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격분하며 말했다.“제 남자친구는 잘생기고 성품이 좋고, 몸도 좋고 체력도 좋고, 심지어 그동안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업계 롤모델이거든요. 그야말로 세상에 둘도 없는 일등 남친인데, 제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헤어질 리 없죠.”그녀는 손가락을 들고 맹세했다.“살아 있을 때는 물론 죽은 후 유골도 함께할 거예요. 함께할 뿐만 아니라 한데 섞어 당신과 헤어지기 싫은 저의 결심을 증명할 거예요.”그녀는 구역질 나서 토하기 전에 멈췄다. 그의 면전에서 토를 한다면 방금 한 말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진유라는 곽동건을 빤히 쳐다보며 아첨하는 얼굴로 그를 향해 눈을 깜박였다.“여보, 정말 당신이 말한 그 두 가지 상황에 마주친다면, 전혀 승산이 없는 거예요? 정말 과실치사로
그녀의 느닷없는 행동에 곽동건은 몸을 조금 일으켰다.진유라의 시선은 그의 얼굴에서 복부로, 복부에서 다시 얼굴로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더니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진유라는 손발을 다 써서 그에게 깔린 몸을 빼내려 했다. 마치 곽동건이 곧 폭발할 활화산이고, 조금이라도 닿으면 화상을 입을 것처럼 조심스럽게.곽동건은 그녀가 밀쳐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그녀가 완전히 벗어나기 직전에 그녀를 붙잡았다.“왜 그래요?”진유라는 헛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별일 아니에요. 너무 늦어서 가야겠어요. 요즘 부모님 집에 살고 있어서 통금이 있어요.”그녀는 손을 빼내고 싶었지만 감히 거칠게 움직이지 못했다.‘곽동건은 거기가 가늘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굵어졌지?’게다가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딱딱해서 방금 잠깐의 접촉으로 배가 아플 정도였다.너무 갑작스런 변화라 그녀는 진정이 필요했다.곽동건은 여전히 그녀를 붙잡고 정색하며 물었다.“말해요. 도대체 왜 그러는지?”“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가야 해요.”“신은지의 일은 나 몰라라 할 거예요?”“몰라요. 남편인 박태준이 알아서 하겠죠.”‘별수 없다. 이러다 내가 죽게 생겼는데. 망쳐도 관계없다. 내가 살고 봐야 하니까.’곽동건은 그녀가 방금 자기 몸을 아래위로 훑던 모습을 떠올리며 눈썹을 치켜떴다. 그의 몸에서 유일하게 이전과 다른 점은...“놀랐어요?”곽동건의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보며 진유라는 헛기침을 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인정할 수 없다. 아니면 그녀가 너무 형편없어 보이니까. 어쨌든 그녀도 한 번에 20여 명의 도련님과 놀던 드센 여자인데.진유라는 허리를 곧게 펴고 해볼 건 다 해본 듯 침착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아니요. 그냥 갑자기 생각난 건데, 곽동건 씨, 지난번에 우리가 정말 했어요?”‘그럴 리 없는데. 이 정도 크기에, 정말 했다면 며칠 동안
이튿날 박태준은 경찰서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공예지 씨가 살던 집을 수색하던 중 박태준 씨, 신은지 씨와 관련된 물건들이 나왔어요. 두 분이 경찰서에 한 번 더 오셔서 수사에 협조 부탁드립니다.”“...”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전화기 저편의 경찰은 의아해했다.“박태준 씨,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신가요?”박태준의 목소리는 좀 멀게 들렸다.“죄송합니다. 아침을 만들고 있는데 소리가 커서 잘 들리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자세히 들으니 정말 요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은 놀라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재경그룹 대표가 직접 요리한다고?박태준은 죽을 그릇에 담은 후 그쪽에서 말을 하지 않자 귀찮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말씀하세요. 무슨 일인지?”경찰은 침을 삼키고 방금 했던 말을 반복했다.박태준은 알았다고 대답한 후 전화를 끊고 같이 식사하기 위해 신은지를 부르러 위층에 올라갔다.그녀는 아직 자고 있었다. 헝클어진 긴 머리가 베개 위에 늘어져 있고, 그중 몇 가닥은 얼굴에 붙어 있었다. 하얀 볼은 이불 속 온기 때문에 발그스름하게 물들었고, 거기에 새까만 눈썹과 빨간 입술까지 원래도 예쁘지만 오늘따라 그림을 찢고 나온 것 같이 아름다웠다.박태준은 그녀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얼마나 깊은 잠에 빠졌는지 그가 바로 앞에 왔는데도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은지야.”대답이 없자 그는 몇 번 더 불렀다. 그러자 그녀는 시끄럽다는 듯 바짝 다가온 그의 얼굴을 옆으로 밀어냈다.“졸려. 저리 가.”그녀는 중얼거리더니 돌아누워 계속 자려 했다.어젯밤에 공예지의 일로 그녀가 잠을 이루지 못하자 박태준은 그 기회를 틈타 그녀를 못살게 굴었다. 결국 새벽에야 잠들었는데 악몽까지 꾸다 보니 지금 졸려 죽을 것 같다. 재물신이 아니라 염라대왕이 와도 상대하고 싶지 않다.신은지는 잠이 덜 깬 데다 손에 힘이 없고 나른해 쉽사리 박태준에게 잡혔다.그녀의 손가락에는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박태준이 그녀의 손을 잡을 때 반지가
신은지는 박태준의 말에 콧방귀를 뀌고 씻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다.“붕어보다도 못한 기억력으로 뭘 기억하겠다는 거야, 내일이면 다 까먹을 거잖아!”박태준은 섭섭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 화장실로 향했다.“오늘 한 말들 하나도 까먹지 않고 머릿속에 기억하고 일기장에도 꼼꼼히 적어 놓을게. 그러니까 자꾸 뭐라고 하지 마...”신은지는 손을 씻으려던 행동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면서 물었다.“일기장?”박태준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은지야, 나한테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될까? 이른 시일 내에 너에게 답을 줄게.”신은지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없이 다 씻은 후, 아침을 먹기 위해 1층 주방으로 향했다.식탁에 신은지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고맙다는 말 대신 쌀쌀맞은 표정으로 머리를 푹 숙인 채 조용히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냉랭한 분위기에 박태준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신은지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다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은지야...”신은지는 박태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경찰서에 가봐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빨리 밥 먹어, 자꾸 쳐다보면 내가 밥을 편하게 먹을 수가 없잖아!”경찰서.담당 경찰관은 박태준과 신은지에게 공예지의 집을 수색하던 중에 찾아낸 물건을 보여주면서 말했다.“공예지 씨의 집을 수색하던 중, 두 분이 전예진 씨와 함께 찍은 사진이 발견됐습니다.”이어 경찰관은 사진 뒤에 적혀있는 메모를 가리키면서 말했다.“사진 뒤쪽을 보시면 두 분의 배경과 성격이 적혀 있고 특히 신은지 씨의 성격에 관해서 상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그러면 두 분은 이 사진 속의 여성분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경찰관이 보여준 또 다른 사진에는 열여섯 정도 나이로 추정되는 여자애가 있었다.사진 속 앳돼 보이는 여자애의 외모는 눈이 부실 정도로 예쁜 건 아니었지만 볼수록 매력이 있는 스타일이었다.박태준과 신은지는 처음 보는 낯선 여자애의 사진에 고개를
신은지를 진유라의 가게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던 박태준은 왕준서에게서 걸려 온 연락을 받았다.“박 대표님, 목격자의 위치를 파악했습니다.”박태준은 재빠르게 차를 갓길에 세우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알겠어, 내가 있는 위치를 보내줄 테니까 일단 여기로 와서 같이 가지.”얼마 뒤, 박태준이 보내준 주소에 도착한 왕준서는 시동도 끄지 않은 차 뒷좌석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 박태준을 발견했다.“박 대표님?”“왔어? 출발하지.”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어느 상가 건물의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하지만 박태준은 피곤함에 잠이 든 건지 두통 때문에 힘든 건지 눈을 감은 채 좀처럼 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왕준서도 아무런 기척을 내지 못하고 백미러를 통해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했다.무표정한 얼굴이던 박태준이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고 가쁜 숨소리를 내쉬었으며 뒤이어 그의 이마에 땀까지 송골송골 맺혔다.그 모습에 놀란 왕준서는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대표님, 머리가 또 아프십니까? 제가 안마해 드리겠습니다. 물론...”그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운전석에서 내려 뒷자리로 가서 공예지가 가르쳐준 방법대로 박태준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짧은 기간에 일취월장한 왕준서의 안마 실력은 전문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박태준은 두통이 가라앉자, 눈을 천천히 뜨면서 말했다.“이제 괜찮아졌어. 그만하고 올라가지.”두 사람은 곧이어 건물 4층에 있는 고급 여성 의류 매장에 도착했다.가게 휴게실에서 한 무리의 여자들이 둘러앉아 디저트를 먹으며 다른 매장에 어떤 신상품이 들어왔는지를 얘기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그러던 와중에 값비싼 옷차림에 멀끔하게 생긴 박태준이 등장하자, 모두 하던 얘기를 멈추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박태준의 신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가 풍기는 카리스마에 시선을 빼앗겨서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그는 여자들의 뜨거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가게로 성큼성큼 들어가서는 한 여자 앞에 멈춰 섰다.“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