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얘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의 호흡은 거칠었다. 신은지는 화가 나서 그런 것이다.신은지는 박태준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그가 무슨 심정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몇 초가 지난 후, 그녀는 겨우 평정심을 찾고 감정을 억제하면서 얘기했다. “계약은 체결했고, 당신이 한 얘기를 번복하면 안 돼.”대답하는 남자 역시 차분하게 얘기했다. “계약을 이어가지 않았으니, 성공한 것은 아니야. 아니면 당신이 한번 물어봐, 진 대표가 아직 재경그룹과 계약할 의향이 있는지?”진 대표는 당연히 원할 것이다. 체면보다 회사의 비전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가 신은지에게 그런 짓을 했는데, 그녀가 어찌……신은지는 다시 한번 분노했다. “박태준, 너무 염치없이 그러지마.”박태준은 아마 평생 다른 사람에게 이 정도의 욕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신은지, 당신 예의는 개가 먹었어?”그녀는 차갑게 웃었고, 전혀 거리낌없이 화내면서 얘기했다. “당신이 먹었잖아.”그를 개라고 지금 욕하고 있다!또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고, 박태준은 감정을 억제하면서 얘기했다. “계좌번호 진영웅에게 보내, 20억 원 이체해 줄 거야. 보상으로 내가 10억 원 더 줄게.”신은지는 알고 있었다. 박태준은 절대로 600억 원에 대하여 쉽게 얘기하지 않을 것을. “10억은 됐어. 당신 나와 먼저 이혼해. 600억 원 빚은 내가 분할로 갚을게.”“당신 나와 조건 얘기 할 자격 있어?”“……”신은지는 침을 삼켰다. 또 이 얘기, 이건 분명 더 이상 가능성이 없음을 얘기해준다!더 이상 얘기 가능성이 없다면, 그녀는 더 이상 그와 얘기하기 싫어 전화를 바로 끊었다.그녀는 눈을 감고, 현재 가지고 있는 돈을 한번 계산해 보았다.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다. 박태준을 지금 당장이라도 주먹으로 때리고 싶었다.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염치가 없고 짜증난 사람이 있을 수가 있을까?그의 돈도 혹시, 이런 사기 수법으로 번 것은 아닐까?신은지는 박태준의 모든 연락
그녀들이 뜨겁게 그 화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나서 많이 놀랐다. 그녀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고, 휴대폰을 든 손을 신속히 뒤로 감췄다. “진……진 비서님.”진영웅은 무서운 사람은 아니지만, 박 대표님의 수행 비서이다. 박 대표는 직원이 회사에서 가십을 떠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진 비서님, 저희가 재무부서에 가서 벌금을 내겠습니다. 이번 일은 못 본 거로 해주세요. 저도 부주의로 그저 봤을 뿐입니다.”진영웅은 눈살을 찌푸리고, 그녀들에게 물었다. “조금 전 그거 무슨 프로그램입니까? 묻는 말에만 답하세요. 다른 얘기는 하지 말고.”“……” 여비서는 속으로 욕을 하면서 얘기했다. “그런 교묘한 일들.”다큐멘터리는 유산되지 않은 문화를 계승하는 일부 수공예 산업을 다루고 있었으며 문화재 복원이 첫 번째 단계였다.진영웅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내용이 아니었다. 그는 시종일관 얼굴을 보이지 않은, 그저 손만 찍은, 성별도 그 손의 크기로 구분해야 하는 그 사람이 궁금했을 뿐이다.조금 전엔, 황급히 보기만 했는데, 그 손이 너무 익숙했고, 볼수록 확신이 들었다……이 사람은 은지 씨 아닌가!그는 아이패드를 들고 대표 실로 들어왔다.“박 대표님, 은지 씨가 티브이에 나왔습니다!”박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첫 번째 반응은 그와 그녀의 관계가 폭로된 줄 알았다. 강혜정의 생일 연회에서 기자를 초대하지 않았지만, 현장에는 많은 사람이 왔고, 새지 않는 바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사 내리도록 조치하면 돼, 이런 일까지 보고할 필요 없어.”진영웅은 침을 삼키고, 대범하게 아이패드를 박태준 앞에 놓았다. “박 대표님, 한번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약, 그저 복원에 대한 설명 정도면 그도 그냥 뒀지만, 두 사람이 손을 잡는 장면이 있었다, 요즘은 무슨 영문인지, 이상한 후문도 다 돌고, 분명 그저 실수일 뿐인데, 다른 사람 머리에는 왜 그런 이상한 생각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지금 인터넷에서 단독으로 그 장면을 편집
박태준은 소란스럽게 행동했다. 신은지와 이경수가 머리를 들어 보았다.남자는 키가 컸고, 문 앞에 서 있는 그는 문으로 비춰 들어오는 햇살을 거의 가릴 정도였다. 잘생긴 얼굴은 아주 차가웠고, 신은지를 보는 눈빛은 사람을 그 자리에서 굳어지게 할 만큼 서늘했다.신은지는 의아했고, 눈살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당신이 여기에 왜 와?”인내심이 없는 말투는, 그녀의 정서를 조금도 가리지 못했고, 아주 티가 났다.이경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조금 전 그 순간, 그의 심장은 공제할 수 없는 만큼 빨라졌고, 그의 코에는 아직도 여자의 은은한 향기가 남아 있었고, 그립게 할 정도였다.그는 다른 사람이 그의 심장 소리를 듣게 될 가봐 걱정하면서 침을 삼켰다.박태준은 재경그룹의 대표이고, 사람을 많이 만나 봤기에, 이경수의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그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차갑게 얘기했다. “내가 오는 것이 싫어?”신은지는 남자의 비아냥을 눈치챘고, 이 사람이 병이 있는 것 같았고, 그녀에게 트집을 잡으려고 이러는 것 같았다!조금 있으니, 식사하러 갔던 직원이 돌아왔고, 박태준이 계속 문앞에 서 있는 것이 좀 이상했다. “난 지금 바빠, 일 끝내고 전화 할게.”조금 듣기 싫게 이해하면, ‘지금 당장 꺼져, 여긴 당신 환영하지 않아’ 이다!박태준은 곧바로 그녀를 향해 걸어왔고,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이 사람이 여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하이힐을 신고 있는 것도 잊은 듯했다.신은지는 끌려가면서 자칫 넘어질 뻔했다. “이 손 놔……”이경수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고, 차가운 얼굴로 박태준의 손을 잡았지만, 힘이 부족했다. 하지만 남자의 발걸음은 성공적으로 멈추게 했다. “선생님, 실버가 같이 가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으니, 손을 놓으시죠?”실버?이는 박태준이 두 번째로 이 사람이 그녀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이 남자가 겁도 없이 자기 차 창문을 노크했었다.박태준은 신은지를 보
다음 날은 주말이었다. 신은지는 11시까지 잤고, 진유라에게 전화해서 밥 먹자고 했다.어젯밤엔 박태준으로 인해 화가 많이 났고, 오늘은 가슴도 답답했다. 역시 나쁜 새끼를 멀리 해야 잘 살 수 있는 법!그녀들은 프랑스 요리를 먹으러 갔다. 진유라의 고객 소유의 레스토랑이고, 그녀는 얼굴 비추러 갔다.레스토랑 문 앞에 도착한 진유라는 정장 차림을 한 웨이터를 보았다. 그녀는 속삭이듯 얘기했다. “오늘 피 터지는 날이야. 여기 아주 비싼 곳이야. 오늘 인사하는 것이 아니면, 난 절대로 여기에 오지 않을 거야.”신은지는 웃으면서 얘기했다. “비싸지 않으면, 무슨 돈으로 골동품을 사겠어?”“맞는 말이야.” 진유라는 그녀의 손을 잡고 들어갔다. “가자, 이런 고급스러운 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해 줄게.”레스토랑에는 360도 크리스탈로 장식되어 있었고, 밖에서 안의 상황이 잘 보였다. 두 사람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신은지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진유라도 눈살을 찌푸렸다. 말투에는 증오가 섞여 있었다. “쟤는 언제 왔대?”신은지는 머리를 저었고,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자리에는 그녀의 배다른 동생 신지연이 앉아 있었다. 그때 엄마가 차 사고를 당하고, 그녀의 아버지는 바로 재혼했고, 계모는 그녀보다 두 살 어린 딸을 데리고 왔다.진유라는 조금 입맛이 떨어졌고 그녀를 보면서 얘기했다. “가자, 먼저 와서 인사하면 정말 끔찍할 것 같아.”그들은 신지연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하지만 역시 그 누군가는 눈치도 없이, 그녀들이 주문하자, 그 여자는 그들이 있는 곳으로 와서 경악하면서 얘기했다. “신은지, 정말 너였구나!”신은지는 그녀를 거들떠보기 싫었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정이 별로 없었다. 3년 전에는 더더욱 사이가 안 좋아졌고, 그 장면은 가관이었고, 오늘 다시 보니, 역겨웠다.진유라는 성격이 아주 난폭했고, 신지연의 그런 악랄한 심보를 알고, 조금도 체면을 주지 않고 얘기했다. “어디서
”아가씨, 뭐 하세요? 이 그림은 마음대로 다칠 수 있는 그림이 아닙니다!” 옆에서 그 구역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이 소리쳤다. “당신 어서 그 그림 내려놔요. 아니면 절도죄로 신고할 테니!”신은지는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놀라서 돌아보니, 자기도 모르게 그 그림을 손에 쥐고 있었다.자기의 모습을 의식하고, 그녀는 복잡한 심경을 잠시 뒤로 하고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설레어서……이 그림 제가 사겠습니다. 판매자분 연락처 알려주세요.”경비원은 반신반의하면서 책임자에게 전화했다.상대편은 바로 전화받았고, 그녀가 그림을 사려고 한다는 얘기를 듣고, 연락처를 전달해 줬다.상대방도 전시장에 있다는 얘기를 듣자, 책임자가 얘기했다. “신 여사님, 누군가 당신 그림을 사려고 합니다. 괜찮으시면 와서 얘기 나눌 수 있습니까?”신은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속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신’씨는 비록 흔한 성씨이지만, 신씨 이면서 이 그림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신지연뿐이다.그녀의 손가락은 그 그림 속의, 여자아이 손에 있는 토끼 전등을 터치하고 있었다.이 그림은 그녀의 어머니가 그린 그림이고, 그림 속의 여자아이는 바로 그녀이다.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갈 때, 그녀는 8살이었고, 어머니의 유품을 처리할 수가 없었다. 신진하가 신지연 모녀를 데리고 해외에 도망갔을 때, 그녀가 그 소식을 듣고 별장으로 갔을 때, 별장의 주인은 이미 바뀌었고, 물건은 이미 다 정리된 상황이었다.그녀가 신진하에게 어머니 물건이 어디에 두었는지 물어봤을 때, 상대방은 귀찮아하며 얘기했다. ‘죽은 사람 물건을 내가 둬서 뭐 해? 재수없게?’ 라고 그 한마디만 얘기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신은지는 신지연이 앞에 온 것을 보았다.여자는 정교하게 화장하고, 흰색 셔츠에, A라인 치마를 입고 있었고, 그 차림은 그녀의 늘씬한 몸매를 돋보이게 해줬다. 그녀는 그쪽으로 오면서 책임자와 인사했다. “저 여자가 제 그림을 산다고요?”책임자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얘기했다
신은지는 박태준이 정신에 이상이 있다고 생각하고, 매섭게 쳐다보고 앞으로 걸어갔다.소유욕은 남자의 나쁜 근성 중의 하나이다. 자기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것을 넘보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이 자기 것을 넘보는 것은 더더욱 허용하지 않는다.이점을 파악하자, 박태준의 지금 모습이 질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더라도, 신은지는 추호도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팔이 다른 사람에게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남자의 힘은 조금 강했고, 신은지는 팔이 부러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녀는 ‘아파’라고 얘기하고, 아픈 표정을 지었다. 얘기하는 목소리마저 변했다. “이거 놔.”박태준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고, 팔목을 잡고 있는 힘도 풀었지만, 놔주지 않았다.그의 안색은 아직도 차가웠고, 간단하게 한 마디만 했다. “가자.”“난 지금 일하는 중이야……”박태준은 그녀에게 조금도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바로 끌고 밖으로 나갔다.“형부! 언니가 형부에게 시집갔는데, 용돈도 안 주시나요?” 뒤에서 신지연의 얘기가 들렸고,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동생이 언니를 도와 얘기하는 줄로 오해할 것이다.박태준은 가던 길을 멈추고, 머리를 살짝 돌려 보았다.신지연은 사실 조금 겁이 났다. 하지만 신은지가 살사는 꼴은 보기 싫었기에, 그녀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다가가서 얘기했다. “언니는 고작 2000만 원뿐인 그림 살 돈도 없어서 다른 남자가 대신 그림을 사주고, 형부 이렇게 하면 안 되잖아요?”신은지는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신지연은 그야말로 음흉하기 짝이 없는 바퀴벌레 같았다.박태준의 눈빛은 그림에 머물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성이 돈을 준 거야?”크게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대화만 들어도 쉽게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나 혼자 산 거야.” 신은지는 나유성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기에,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 “유성은 그저 도와서 그림을 나한테 준 거야. 안 믿으면……”박태준은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할 줄 알았다
신은지는 말없이 그를 보았다. “이혼할 사이인데, 전남편에게 전화하라고? 내가 정신이 나간 여자인 줄 알아?”중요한 것은 박태준 이놈은 속이 시커먼 상인이기에, 절대로 아무 대가 없이 그녀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온다고 해도, 절대로 쉽게 그녀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600억 원의 빚에 빚을 더 얹고 싶지 않았다.말하는 사이, 박태준은 운전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는 담배를 물고, 웃을 듯 아닐 듯한 눈빛으로 신은지를 보면서 얘기했다.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나유성을 불렀다고?”“그래서?”“그래서……” 그녀는 눈을 살며시 떴다. 예쁜 얼굴에는 그를 조롱하는 웃음을 띠었다가, 다시 금방 수그러들었다. 그 과정은 마치 조커를 보는 듯했다. “내가 누구를 찾든, 당신과 무슨 상관이야? 당신이 개 같은 짓을 할 때도 난 안 말렸어.”이 말은 박태준의 비위를 건드리는 말이었다. 남자가 여자를 보는 눈빛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찢고 싶은 그런 눈빛이었다. 아마’개 같은 짓’이라는 단어가 그의 고귀한 품위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당신도 유성의 개가 되겠다는 뜻이야? 그래서 신지연을 그에게 소개해 주기 싫었던 거야?”신지연 얘기를 하자, 신은지는 여전히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걔는 유성에게 어울리지 않아.”“어울리지 않는 거야, 아니면 네가 아쉬운 거야?”말을 하면서, 박태준은 순간 브레이크를 밟았다.박태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입꼬리는 올라갔고, 무표정인 얼굴이었다. 지난 일을 생각하더니, 그는 차갑게 반문했다. “만약 그 시계가 아니었다면, 나를 나유성으로 착각하지 않았다면, 당신 나와 자지 않았겠지?”이번에, 신은지는 눈길을 피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래.”그때, 그녀는 박태준을 알지 못했다. 나유성 때문에 몇 번 만났을 뿐이고, 이렇게 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무리 앞길이 막막하다고 해도, 그녀는 절대 그와 자지 않았을 것이다!박태준 같은 신분의 사람이, 어찌 그리 쉽게 넘어올 수 있겠
신은지는 화가 나서 웃음만 나왔다. “좋아. 건장한 견으로 데려와. 딱 봐도 강한 그런……”그녀는 잠시 얘기를 끊었다가 다시 조롱하는 듯한 태도로 얘기를 이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럴듯하지만, 알고 보면 폐물인 경우가 많아서. 사람도 그런데, 동물은 오죽하겠어.”박태준은 화가 치밀었고, 그는 아픈 머리를 만지면서 강하게 얘기했다. “내려.”신은지는 손을 펴면서 얘기했다. “전화 돌려줘.”남자의 시선은 그녀의 흰 손바닥에 머물렀다. “당신 전화 갖고 싶은 거야? 아니면 전화 온 남자가 생각나서 그러는 거야?”“박태준, 당신은 좀 제정신일 수 없어? 나를 박물관에서 데리고 나오는 바람에,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나왔는데, 지금 돈도 없고, 여기서 내리면, 난 여기서 걸어가란 말이야?”여기서 전시장까지 거리가 조금 있었고, 그녀가 사는 집과는 더욱 먼 거리였다.박태준의 안색은 그녀의 설명에 조금 좋아졌고, 그의 외투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그녀에게 주면서 얘기했다. “당신 만약……”자존심을 내려놓으면 차에서 안 내려도 돼.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은지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차 문을 닫을 때 힘을 많이 쓴 탓에 차가 흔들릴 정도였다.신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나무에서 떨어지는 물에 몸이 젖었고, 늦가을이었기에, 뼈를 파고드는 추위에 그녀는 추워서 몸을 떨었다.비 오는 날씨에,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고, 이런 날씨에 신은지는 옷을 얇게 입고 있었다.그는 그녀가 먼저 와서 그에게 부탁하기를 기다렸다!그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 있는 분노를 조금 수그러들게 했다.하지만 신은지는 이경수에게 전화하면서 한쪽으로 택시를 잡았다. 전화는 바로 연결되었고, 이경수가 전화한 것은 업무적인 일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저 그녀가 오랜 시간 보이지 않자 무슨 일이 있나 해서 전화한 것이었다.“난 괜찮아요. 그저 아는 사람을 만났을 뿐입니다. 전시회는 부탁드릴게요. 제가 오늘은 몸이 좀 안 좋아서 먼저 들어가 보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