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지는 말을 하지 못하고 ‘우우’ 하는 소리만 냈다. 그녀를 납치한 사람은 남자로,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며 그녀를 주차장 구석으로 끌고 갔다. 납치? 납치? 사람을 죽여서 입을 막는 거야? 기민욱의 사람인가? 당황한 신은지는 그 남자의 손을 떼려 했지만, 자신의 목덜미 사이에 가로놓인 팔뚝은 철옹성처럼 그녀가 꼬집거나 때리더라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CCTV에 잡히지 않는 사각지대로 끌려가던 신은지는 가방을 마구 휘둘러 내리쳤지만 그에게 제지당하며 제대로 때리지도 못했다. 신은지는 여러 번 그를 때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남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펑……” 신은지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가방이 어딘가에 부딪힌 것을 느꼈고, 다음 순간 남자는 고통에 겨운 신음을 내뱉었다. “아, 신은지 씨, 신은지 씨……때리지 말아요. 나는… 아는...... 아는 사이에요." 라고 말했다. 남자는 구석으로 가자마자 중요부위를 맞은 듯 황급히 신은지에게서 손을 떼고 신은지에서 두 걸음 정도 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신은지의 가방은 부드러운 가죽이었다. 그녀의 가방 안에 있던 휴대전화가 그의 광대뼈를 맞춰 그 남자는 눈에서 눈물이 날 정도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구석의 빛이 어두워 신은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방의 얼굴을 자세히 훑어보았지만 그녀는 자신 앞에 있는 그 사람을 알지 못했다."누구세요?" 신은지는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한 자세로 그를 경계하며 물었다. 남자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신은지는 다시 가방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뭘 꺼내려는 거죠? 손 내놔요." "휴대전화." 남자는 신은지가 가방을 들자 급히 손을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손을 펴서 그녀에게 자신이 들고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신은지 씨......” 신은지가 경계하는 것 같자 그는 급히 말을 바꾸었다. "작은 사모님, 육 대표님이 사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셨어요.” "육정현?" 그
신은지는 실망한 듯 눈을 굴렸다. "실종된 사람들은 다시 나타날 때 모두 꽃같이 아름다운 약혼자를 데려오던데, 너는 오히려 아버지를 데려오기는 했는데 병든 아버지를 데려왔네.” 박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억울한 듯 말했다. “내가 어디……” 박태준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멈추고 서서 기쁜 얼굴로 신은지를 바라보았다. "내가 실종되어 아버지를 데려왔다고? 은지 야, 믿고 있었던 거야? 내가 박태준이라고?” 그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변했다. 신은지는 박태준을 화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말했다. "아니요.” 분명히 자신에게 기민욱이 약병의 약이 얼마나 들어있다는 것을 은근히 일깨워 줄 정도로 눈치 빠르고 똑똑한 박태준이 왜 지금 이렇게 멍청한 것일까? 신은지가 그를 박태준이라고 믿지 않았는데, 그가 그녀를 만지작거리고 키스해도 뺨도 안 맞을 거라고 생각한 것인가? 박태준은 마음이 급해져서 신은지가 소파 쪽으로 가려고 하자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하지만 방금 분명히......” 신은지는 그의 손에 잡혀 앞으로 걷지도 못하고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보고 말했다. "육 대표님, 몇 년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셨죠?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돼지에게 기억을 빼앗긴 것이 아닐까요? 괜찮으시면 용한 대사님을 좀 찾아가 보는 것이 어때요? 바보처럼 굴지 말고요. “ 신은지답게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박태준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녀가 이렇게 분명하게 말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바보다. "은지 야, 미안해. 나는 일부러 널 속이려고 했던게 아니야. 내가 너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어. 난 기민욱 뒤에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어. 그 사람은 박씨 가문을 미워하고, 또 재경 그룹을 잘 알아. 게다가 재경 그룹에 그의 사람도 있어.”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다면 기민욱과 그의 배후에 있는 사람은 신은지를 그저 박태준의 전처로만 생각할 뿐,
"네가 아프든 말든 해보자는 거야? 너는 여전히 나를 바보로 알고 회유하고 있어." 신은지는 박태준을 밀치고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넌 아직 적진에 있으니 안심하고 제대로 잠복해. 기민욱이 너에게 약을 먹으라고 하고 있으니 가능한 한 빨리 방법을 생각해. 그 약을 오늘 한 번 안 먹을 수 있었지만 계속해서 안 먹을 수는 없을 거야.” "기민욱이 준 약을 먹고 바보가 될까 봐 걱정도 안 돼?” 기민욱의 능숙한 행동을 보니 박태준에게 약을 먹인 것이 처음은 아닌 것 같았다. 박태준은 그 약이 좋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내밀어 받았다. 신은지는 생각만 해도 화가 났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다면 박태준도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신은지가 문 손잡이를 잡고 힘껏 돌리려 하자 박태준이 뒤에서 그녀를 껴안고 입술을 아쉬운 듯 문지르며 말했다. "오늘 밤 여기 있자. 어때?” 그의 손은 그녀의 배에 닿아 있었다. 신은지는 아까 차에서 내리면서 배에 넣어놓은 베개가 떨어질까 봐 외투의 단추를 잠가 다행이라 생각했다. 박태준은 신은지를 다치게 할까 봐 걱정했기 때문에 힘을 쓰지 않아 그녀의 임신한 배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박태준의 유혹에 속으로 사투를 벌이던 신은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그곳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마침내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서로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갈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기민욱이 그들을 지켜보도록 사람을 보냈는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 둘이 오래 함께 있을수록 더 쉽게 드러날 수 있다. 기민욱은 지금 의심을 하고 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다. 신은지는 안전을 위해 기민욱을 피하고 만나지 않을 수 있지만 박태준의 얼굴이 완전히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그는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박태준이 완전히 단념할 수 있도록 신은지는 말했다. “나는 지금 임산부인 데다 태아 위치가 불안정해서 격렬한 운
"기민욱, 개처럼 짖는 거 배워, 빨리. 개처럼 짖는 거 배워, 멍멍멍.…” "기민욱, 빨리 봐봐. 이거 네 동족지? 오오오. 아니면 네 여자친군가? 이 사람이 네 미래의 아내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빨리 네 마누라가 예쁜지 봐. 자, 뽀뽀해.” 아이들은 평소에 TV에서 이런 것들을 배운다. "멍멍...” “하하하.” 개 짖는 소리와 사람 웃음소리가 뒤섞여 날카롭게 귀에 거슬린다. 침대 위의 기민욱은 눈을 번쩍 떴다. 머리 위의 천장은 어둠 속에 가려져 희미하게 불빛만 보일 뿐이었다. 기민욱은 멍하니 그곳을 노려보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눈에는 음험함과 냉담함 증오심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그의 눈에 비친 그림자는 점차 한 마리의 개의 모습으로 변했다. 정말 역겨웠다. 기민욱은 침대에서 일어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맨발로 테이블로 걸어가 술을 한 잔 따라 한 입에 마셨다. 독한 술이 입안으로 들어가며 타는듯한 느낌이 목구멍에서 위까지 밀려와 은근한 통증을 유발했다. 그가 손에 잔을 움켜쥐자 손가락 마디마다 힘줄이 솟아올랐다. 기민욱의 시선은 겹겹이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넘어 창밖의 밤하늘에 떨어졌다. "신은지...…” 이렇게 비열하고, 나약하고, 둔하고, 권력이 있고 재물을 탐내는 여자는, 설령 자신의 형과 어울린다고 해도 용납할 수 없다 그의 형은 세계 최고가 될 가치가 있다.기민욱은 술잔을 만지며 자신이 고아원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기뻐했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결국 입양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만약 그때 박씨 가문이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 박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 되었을 것이고, 박태준이 가진 것은 모두 그의 것이었을 것이다.그들은 같은 부모, 같은 것을 가지고 동등한 교육을 받는데, 박태준과 그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한때 그런 것들이 그의 앞에 있었지만 아주 간발의 차이로 놓쳤다.기민욱은 자신의 신분으로 얻을 수 없었기에 박태준의
신은지는 말했다. "응, 저번에 관장님께서 나한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설득하셨어. 결국 재경 그룹에 남기로 선택했지만 고마워.” "......” 차키를 들고 나유성 옆을 지나가며 신은지는 말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고마워, 유성아.” 나유성은 신은지의 뒷모습을 보며 임 관장에게 신은지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신은지는 분명히 그를 오해하고 있다. 만약 그의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신은지는 곧 찻집의 문을 열고 나갈 것이다. "은지야…." 신은지의 이름을 부르는 나유성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난 처음이야.” “......” 신은지는 놀라서 고개를 홱 돌리다가 허리를 삐끗할 뻔했다. 신은지는 마치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로 나유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도 하지 못 한채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너... 너… 너 이거…. 이게 무슨 헛소리야?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지금 뭐가 ‘처음’이라는 거야? 신은지의 놀란 모습을 본 나유성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동안 임 관장님께 부탁한 사람은 내가 아니야.” 신은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잖아.” 신은지는 문의 어두운 색 무늬를 보고 정신을 차렸다. 지난번엔 임 관장이 그녀에게 꿈을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 나유성의 부탁 때문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박태준을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박태준은 당시 막 육영 그룹을 이어받아 지금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았을 텐데, 그녀의 일에 관여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나유성은 신은지의 멍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요즘 네가 걱정이 많은 거 잘 알아. 그래도 이렇게 널 놀리니까 웃네.” “그런 농담은 앞으로 하지 마! 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단 말이야.” 나유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 신은지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이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이렇게 노크도 안 하고 들어올 사람은, 그 자질 없는 기민욱 그놈밖에 없다. "형" 기민욱의 목소리에 소년 같은 풋풋함이 묻어 나왔다. 카펫에 그의 발소리가 묻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형, 자?” 박태준은 소파에서 일어나 다리를 벌리고 팔꿈치를 무릎에 괴고 피곤한 듯 양미간을 비비며 말했다. "아니, 아까 술을ㅣ 마셔서 조금 움직이기 싫어서 그래. 왜 왔어?” "심심해서 그냥 형 보러 왔어.” 기민욱은 박태준 옆자리에 앉아 불을 켜고 TV를 켜며 흥겹게 채널을 돌렸다. 요즘 사람들은 TV를 볼 때 인터넷을 사용하기 때문에 보고 싶은 것을 검색해서 보지 TV 채널을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TV는 설치한 이후로 켜본 적이 없는데, 왜 갑자기 기민욱이 TV를 보는 데 관심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생방송 채널을 말이다. "형, 보물 감정 좋아해?” '감정'이라는 두 글자를 듣자 박태준은 자신도 모르게 신은지를 떠올렸고 마음이 누그러지는 동시에 ‘덜컥'하며 심장이 내려앉은 것 같았지만 얼굴에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래, 특별히 관심 있지는 않아.” 기민욱은 약간 실망한 듯 보였다. “그래? 은지 누나가 오늘 TV에 나오는데 기분이 좋아서 형이랑 같이 보려고 왔어.” “......” 박태준이 말을 안 하기는 했지만 기민욱의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무슨 함정을 파놓았을 수 있다.다만 이 함정이 박태준을 위한 것인지, 신은지를 위한 것인지, 그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박태준은 지금 신은지 곁에 없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돕고 싶지만 도울 힘도 없다. 만약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박태준은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기민욱은 채널을 돌려 신은지가 나오는 방송을 찾았다. 신은지는 고개를 숙이고, 손에 돋보기를 들고 물건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귀밑머리가 늘어져 신은지의 얼굴을 살짝 가렸다.
박태준은 관심 없다는 듯 휴대전화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힐끗 바라보다가 말했다. "모르겠어.”기민욱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형은 전혀……”기민욱이 말이 마치기 전에 광고가 끝이났다.진행자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마 선생님의 감정 결과가 정말 인상적입니다.”마 선생이 말했다."이 청동기 그릇은 확실히 판정하기 힘듭니다. 신은지 선생이 감정을 틀리게 했더라도, 정상적인 일입니다. 신 선생은 매우 우수한 문화재 복원사이지만, 감정 쪽은 경험이 풍부하지 않고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에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소한 점을 잘 못 볼 수도 있습니다. 이 청동기 그릇은 표면이 밋밋하고 간결하여 진나라의 표준적 그릇입니다. 위의 녹은 딱 봐도 천년의 침전을 거쳐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양을 보면 위치가 가려져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가짜는 일반적으로 비교적 눈에 띄는 곳에 문양을 넣거나 일부러 표면을 연마해 매끄럽게 만듭니다…” 신은지도 가짜라고 감정한 이유를 말했지만 사회자는 신은지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말했다.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도 충분한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 감정할 수도 있는 것 같네요. 문화재는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귀중한 보물입니다. 감정하는 사람의 실력이 부족하면 그 손실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고 해서 한 번에 성공하려고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진행자가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저렇게 말하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사회자가 다음 감정 의뢰인을 부르려 하자 신은지는 정중하게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방금 그 물건은 가품입니다.” 사회자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신은지 씨, 체면이 좀 깎일 수 있는 일이라는 건 알지만, 나머지 세 분은 모두 이 업계에서 명망이 높은 선배님들이십니다. 특히 마 선생님께서는 문화재 감정 부분에서 단연 최고의 권위를 갖고 계십
날아간 알약은 바닥에 굴러떨어졌고 기민욱의 손은 허공에 뜬 채 굳었다. 기민욱의 시선은 박태준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고, 눈 밑의 빛은 어두웠고, 감정은 모두 그 캄캄한 눈동자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다. "형, 왜 약을 안 먹어? 아닌가…." 뭘 알았어? 기민욱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끝내 묻지 않았다. "약이 너무 쓸 것 같아?” 박태준은 휴대전화를 들고 전화를 하고 있다가 기민욱의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시선이 기민욱의 얼굴에서 발 위로 향했다. "내 병은 당분간 약을 먹지 않아도 죽지 않아. 하지만 너, 눈이 멀었어? 아니면 머리가 어떻게 됐어? 바닥의 깨진 유리 조각이 보이지 않아? 그걸 밟고도 고통을 못 느껴?” 박태준은 카펫을 더럽히고 있는 기민욱의 발바닥에서 배어 나오는 피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전화가 연결되자 박태준은 고개를 돌리며 안정된 말투로 말했다. "주 박사님, 육정현입니다. 잠깐 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민욱이가 발을 다쳤어요.” "네, 유리 조각에 발을 찔려서 피를 많이 흘렸어요. 상처가 좀 심각해 보여요.” 기민욱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며 마음속에 있던 분노가 풀리는 듯했다. "형, 나한테 신경 써주는 거야?” 기민욱은 일어나 박태준을 향해 걸어가려 했다. 그가 발에 힘을 주자 발아래 유리 조각이 더 깊이 살 속으로 들어갔다. "아.” 기민욱은 아파서 소리를 한 번 지르고는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는 박태준을 바라보다가 우울했던 감정이 사라지고 얌전한 고양이처럼 온순 해졌다. "형, 미안해, 내 잘못이야. 내가 형을 의심하지 말았어야 했어.…” 기민욱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억울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박태준은 전화를 끊고 손을 들어 양미간을 만지작거리다가 한참 뒤에야 한숨을 쉬었다. ”뭐가 두려운 거야?” "형이 나를 원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 기민욱이 박태준을 처음 본 것은 고아원이었다.그날 박태준은 어린 왕자처럼 차려입었고 그의 모습은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