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매우 진지한 마음으로 조은서에게 미안해했다. 항상 그 자리에서 조은서를 기다리겠다고 했었지만 임도영은 그 여자아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약속을 어긴 것이다.조은서는 그 자료들을 손에 쥐고 매우 기뻐했다.“정말 고마워요, 도영 선배. 저한테는 이 자료들이 너무 소중하거든요. 그리고 다른 건... 우리 그냥 지나간 인연이라고 생각해요.”“그래요. 다 지나간 인연이죠.”임도영은 담담히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씁쓸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끝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식사를 마친 후 조은서를 주차장으로 데려다주었다.조은서는 하이힐을 신은 상태에서 바닥에 있는 구덩이를 미처 보지 못하고 발을 헛디뎌 몸이 불안정하게 비뚤어졌다.그러자 임도영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순간의 스킨쉽이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 것인지 조은서를 바라보는 임도영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워졌다.“유선우가 하루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이 자료들이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조은서도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네. 선배님,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임도영은 신사 같은 모습으로 조은서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었고 그날 밤, 마지막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 눈빛으로 조은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자로서 여자를 바라보는 그런 눈빛이었다. 임도영 역시 그와 조은서 사이에는 그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조은서가 좋아하는 사람은 줄곧 유선우였다.동정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사랑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텐션은 타인이 아무리 상대보다 좋은 사람일지라도 영원히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차가운 밤바람이 날카롭게 스쳐 간다.임도영은 조심스럽게 조은서를 끌어안은 채 입술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누르며 입을 열었다.“꼭 행복해야 해요. 알겠죠?”순간 조은서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조금 울먹이는 목소리로 답했다.“꼭 행복할게요, 선배님.”꼭 끌어안았던 두 몸이 떨어지며 그들의 관계
하지만 유선우는 거절했다.그는 말없이 조은서를 바라보며 계속하여 입을 열었다.“난 지금 충분히 차분해. 은서야, 난 네 동정 필요 없어. 너의 베풂은 더더욱 필요 없고... 너 이제 가.”조은서는 제자리에 서서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이유를 물었다.하지만 유선우는 답해주지 않았다.그는 검은 동공으로 한참 동안 조은서를 바라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담배를 꺼내 한 손으로 불을 붙였다...하지만 유선우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불을 붙인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연기를 바라볼 뿐 담배를 피우진 않았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유선우의 가물가물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때 네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었는지 계속 궁금해했지? 그래 맞아. 난 알고 있었어. 네가 떠나는 그 날, 진 비서가 네 임신 테스트 시트를 가지고 날 찾아왔어. 진 비서는 네가 임신했다고, 네가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로 돌아갔다고, 그리고 난 널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어... 은서야, 그때 내 심정을 알아? 난 진심으로 널 되찾고 싶었어. 하지만 난 휠체어에 앉아있고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땅에 넘어지면 일어날 수조차 없는 몸이라고... 그리고 그날, 나는 내가 정상인과 다르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됐어.”“네가 돌아오고 난 네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유혹을 저버리지 못했어.”“하지만 너와 관계를 맺을 때마다 난 매번 이제 끝날 때가 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이 관계는 달콤함과 짜릿함을 제외하면 사실 고통스러운 것이 더 많아.”...이윽고 유선우는 잠깐 멈칫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조은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은서야, 우리 이제 끝내자.”조은서는 즉답하지 않았다.그녀는 하이힐을 내려놓고 실내화 한 켤레를 찾은 뒤 다시 입고 있던 얇은 트렌치코트를 벗어 입구 캐비닛에 걸어두었다...문이 살짝 닫히고 조은서는 여전히 시선을 문짝에 두고 중얼거렸다.“선우 씨, 잘 생각하셔야 해요. 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물론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조은서는 이제 과거의 어린 소녀가 아닌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됐기 때문이다.하지만 조은서의 말처럼 이제 떠나면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유선우를 돌봐 주겠지만 이제 예전과 달리 거리를 둘 것이다.은색의 롤스로이스가 천천히 별장을 빠져나왔다.유선우는 서재에 앉아 조은서의 차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으로 그녀를 쫓았다.조은서가 떠났다.조은서는 그의 모욕적인 말에 떠난 것이다. 유선우 역시 어젯밤 조은서에게 내뱉었던 그의 말이 얼마나 듣기 거북한지 잘 알고 있다.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지만 계속하여 떨리는 손에 결국 불을 붙이지 못했고 유선우는 초조한 마음에 곧바로 담배를 반으로 접어버렸다...이윽고 그는 휠체어를 끌고 객실로 향했다.조은서가 떠나간 객실은 마치 누구도 이곳에서 살지 않았던 것처럼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객실을 나와 다시 침실로 향했다. 침대 시트는 그가 좋아하는 짙은 회색빛으로 바뀌어 있었고 드레스룸에는 여전히 다림질 냄새가 남아 있었다. 유선우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였다. 그뿐만 아니라 약 상자에는 그가 평소에 자주 먹던 약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가느다란 목걸이 아래, 못 보던 서류가 깔려 있었다.목걸이는 조은서가 돌아온 뒤, 유선우가 정성껏 골라준 선물이다. 고급 제작도 아니고 쇼핑몰 매장에서 두 시간 동안 골라서 준건데 그때 선물을 받은 조은서의 표정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뻐 보였는지... 사실 조은서는 항상 쉽게 만족했다.유선우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이윽고 목걸이 아래에 놓여 있던 서류를 꺼내든 유선우는 스페인어로 되어있는 서류 내용은 그의 병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었고... 곧바로 임도영이 전에 이 나라로 갔음을 기억해냈다.그렇다면 어제 두 사람이 만난 건, 이 서류 때문이란 말인가?유선우의 손가락이 하염없이 떨려 나기 시작했다.서류가 마지막 페이지로 넘겨지고 유선우는 조은서가 남긴 손편지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유선우의 검은 동공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옆에 있던 진 비서는 진즉 아래층의 고용인으로부터 아침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기회를 틈타 입을 열었다.“이젠 오해가 풀렸으니 빨리 은서 씨를 데려오세요.”하지만 유선우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는 품속에서 가느다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꺼내어 애정이 어린 두 눈으로 바라보더니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하지만 진유라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 지금, 이 모습으로 어떻게 조은서를 데리러 간단 말인가?유선우의 몸 상태로는 잠시 화해하더라도 앞으로 그들은 여전히 이 갈등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게다가 조은서는 분명 떠날 때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을 남겼다...하지만 유선우는 여전히 조은서를 잡지 않았다.진 비서의 마음이 점점 다급해질 무렵 유선우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나 대신 임도영 씨 좀 불러줘. 직접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일이 있어.”진 비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결국 임도영과 약속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유선우와 임도영이 오후 3시에 만나기로 한 곳은 여전히 그 호텔이었다.그리고 임도영은 자신의 여자친구를 데리고 왔다.어린 아가씨는 임도영의 말을 매우 잘 들었고 계속하여 그의 몸에 기대 게임을 했다.유선우는 곧바로 그의 여자 친구는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부잣집 외동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유선우는 그 여자를 신경 쓰지 않았고 눈앞에 차려진 음식을 즐기지도 않았다. 그는 호화로운 식당에 단정히 앉아 정식으로 임도영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자료는 이미 실험실에 보냈고 듣기로는 실용가치가 매우 높다더군요... 임도영 씨, 정말 감사합니다.”전에 임도영은 이미 진 비서로부터 유선우가 조은서를 쫓아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고 마음속으로 상당히 언짢았지만 결국 그 불쾌함을 다시 삼켜냈다. 조은서를 위함도 있었지만, 막상 유선우의 모습을 보니 더 이상 가혹하게 그를 비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임도영은 옆에 앉아있는 여자아이를 툭툭 치며 잠깐 다른 곳에 가 놀라며 당부
유선우의 말에 김병훈은 즉시 핸들을 돌려 조은서가 살고 있는 별장으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지금 가면 마침 밥 먹을 때인데 거기서 밥 한 끼 드실 수 있겠네요... 사돈 어르신이 해주신 요리가 가장 입맛에 맞으시잖아요.”“말이 많네요.”유선우는 창문을 다시 올리고 가죽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잠시 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헤어진 지 불과 10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마치 기나긴 세월이 흐른 것마냥 멀게 느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번쩍거리는 검은색 캠핑카가 천천히 별장으로 들어섰다.차 문이 열리고 바깥세상은 이미 노을빛으로 아름답게 물들어져 있었다. 김병훈의 말대로 마침 식사시간이었는지 별장의 부엌에서 먹음직스러운 음식 향기가 전해져 왔다.그 시각, 이안이는 푸른 잔디밭에서 동생과 함께 작은 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는데 유선우의 캠핑카가 별장에 들어오자 이안이는 뛸 듯이 기뻐하며 소리를 질렀다.“아빠!”이안이는 두 발짝 뛰어가더니 동생 생각이 났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동생을 안아 들고 콩콩거리며 유선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조그마한 두 아이는 다짜고짜 유선우를 에워싸더니 한 명은 팔짱을 끼고 한 명은 다리를 껴안고는 열정적으로 뽀뽀를 해댔다. 이윽고 이안이는 다시 차 쪽으로 달려가더니 설이도 따라왔는지 확인했다.그러자 유선우는 빙긋이 웃으며 설명했다.“잠깐 온 거라 설이는 안 데려왔어.”하지만 그런데도 이안이는 여전히 뛸 듯이 기뻐했다.그녀는 콩콩 뛰어오더니 유선우의 팔을 껴안고 나지막이 속삭였다.“동생이 아빠를 너무 보고 싶어 해요. 조금 전엔 울기까지 했다니까요.”그러자 유선우는 시선을 돌려 막내를 바라보았다.이준이는 얼마나 교만한 것인지 작은 얼굴을 파묻고는 결코 아빠한테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유선우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앞으로 아빠가 자주 보러 올게, 아니면 너희들 데리고 아빠 집에서 잠깐 지내도 되고.”그러자 이안이는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엄마는?”
조은서는 부드럽게 이안이를 격려해주었다.크리스털조명 아래에 선 그녀는 긴 드레스로 그녀의 몸매를 영롱하게 표현했고 검은 긴 생머리를 살짝 걷어 올려 희고 보드라운 목덜미를 드러냈다.기억 속, 조은서는 아무리 사업을 잘 꾸려도 그녀에게서는 단 한 번도 그런 매서운 느낌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하고 아름다웠다...유선우는 점점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윽고 조은서는 무심코 그의 깊은 동공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얼굴을 돌렸다......유선우가 별장을 떠났을 때는 이미 밤 10시가 다 되었다.조은서는 2층에서 내려와 그를 배웅했고 휠체어가 검은색 캠핑카 앞에 도착했을 때 유선우는 곧바로 차에 타지 않고 조용히 물었다.“아이들은 자?”그러자 조은서는 가볍게 물음에 응했다.밤은 깊고 조용한 거리에는 그들 둘만이 서 있었다. 유선우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네가 남긴 자료는 실험실로 보냈어. 그리고 네가 남긴 편지도 봤어...”흐린 달빛 아래, 유선우는 깊은 눈으로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양복 주머니에서 가는 목걸이를 더듬어 꺼내어 고개를 숙이고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두고 간 물건이 있어서 가져다주러 왔어.”조은서는 그 가는 목걸이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싫어요.”순간 유선우가 고개를 들자 그는 곧바로 조은서와 눈이 마주쳤다.조은서의 두 눈은 어느새 촉촉이 젖어있었지만,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단호하기 그지없었다.“선우 씨, 전 싫어요. 만약 선우 씨한테 방해가 된다면 그냥 버리세요. 이제 늦었으니 기사님께 집까지 바래다 드리라고 할게요.”말을 마친 조은서는 곧바로 돌아서서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가로등의 은은한 불빛이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을 길게 끌어당겼다...유선우는 계속 그곳에 앉아 전하지 못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손에 쥐고 목소리를 높여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조은서는 오히려 더 빨리 걸었다
때마침 그의 시선을 느낀 조은서가 유선우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유선우를 마주한 그녀의 눈에는 별다른 큰 파장이 없었고 단지 자세를 고쳐 조금 더 똑바로 섰다.그리고 조은서와 얘기를 나누던 그 남자 역시 덩달아 이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유선우는 실눈을 뜨고 진 비서에게 말을 건넸다.“저쪽으로 밀어줘.”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한 걸음 정도로 좁혀지고 진 비서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조은서를 마주하고 자연스레 매우 열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은서 씨, 오랜만이네요.”조은서는 유선우에게 시선을 돌리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그러게요. 오랜만이네요.”“조 대표님, 이분은...”조은서는 담담하게 사실대로 그들의 관계를 털어놓았다.“이분은 유선우 대표님이세요. 유씨 그룹의 회장이자 제 전남편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진 비서이고 유선우 대표님의 유능한 조수입니다.”조은서의 말은 매우 공식적이었다.그리고 조은서와 얘기를 나누던 남자는 송씨이고 이제 막 외국에서 돌아와 큰돈을 투자하고 싶어 하여 조은서는 THEONE를 위해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여 그녀는 지금 유선우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송 대표는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그는 몸을 약간 기울여 유선우에게 손을 뻗어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저는 송이준이라고 합니다.”그러자 유선우는 빙긋 웃으며 명함을 받았다.“유선우라고 합니다.”이윽고 그는 조은서를 힐끗 바라보더니 계속하여 입을 열었다.“그럼 더 이상 두 분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참, 방금 이안이 학교 선생님한테서 온 연락이 있는데 이안이가 이번 주에 수학 시험을 칠 때 70점밖에 못 받았다더라. 만약 네 사교활동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다면 아이를 며칠 동안 나에게 보내주면 내가 아이를 가르칠게.”이는 분명히 고의로 한 말이다.송이준은 확실히 조은서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젊고 예쁜데 사업까지 잘하니... 게다가 송이준 역시 이혼한 적이 있지만 아이는 없어서 조은서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조은서는 자연히 내키지 않았다.유선우는 검은 눈동자로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장미를 주시하더니 담담하게 물었다. “그 송 대표님께서 주신 거야?”꽃은 조은서가 직접 산 것이다. 하지만 조은서는 인정하지 않았고 그저 담담히 답했다.“누가 줬는지는 대표님과 무관하신 것 같은데요.”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그 말에 유선우의 눈빛은 더욱이 깊어졌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조은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말은 운전석에 앉아있는 김병훈을 향했다.“김병훈 씨, 은서 씨를 차에 태우세요.”고래 싸움에는 새우등이 터지기 마련이다.그들은 서로를 유선우 대표님, 조은서 씨라고 칭했는데 그들의 대화에는 화약 냄새가 물씬 풍겼다. 김병훈은 그들의 중간에 끼어 상당히 난처했지만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차에서 내렸고 그가 향한 곳은 조은서가 서 있는 곳이었다.“눈이 점점 거세게 내립니다. 이만 차에 타시지요. 그렇지 않으면 저도 대표님께 할 말이 없습니다.”김병훈의 눈빛은 간절했다. 그는 조은서에게도 약간의 동정심이 있다고 생각했다.그의 간절한 부탁에 조은서는 결국 차에 올라탔다.차 안은 넓고 어두웠으며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나란히 앉아 한참 동안 서로 침묵을 지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참다못한 김병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눈 오는 날에는 좀 천천히 운전해야겠어요. 안전이 제일이니까요.”그러나 조은서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그녀는 얼굴을 돌려 조용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바깥의 하늘은 눈이 내려서 인지 희고 밝은 빛을 띠어 차 안과는 아예 다른 세상을 이루어내 조은서는 어느새 넋을 잃고 바깥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그 순간, 그녀의 손이 문득 다른 사람에게 잡혔다.갑작스러운 스킨쉽에 조은서가 고개를 돌렸다...유선우는 마치 그녀의 손을 잡은 사람이 그가 아닌 듯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은서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내색하지 않으니 더욱 핑크빛 기류가 도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