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영이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두손 두발 다 들어버린 조은혁은 아예 신경 쓰지 않고 아주머니에게 와인잔 4개를 꺼내어 달라고 분부했다. 그렇게 자리에 앉은 모두가 와인을 반 컵 따라 장남의 퇴원을 축하하며 다시 모이게 된 가족을 위해 건배했다.단지 조진범의 몸 상태 때문에 술을 많이 마실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그들 부자는 해가 뜰 때까지 술을 퍼마셨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오늘만큼은 너무나도 행복했으니까. 이 세상에 아들 딸의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까?조진범과 조민희 모두 이제 각자 가정을 꾸렸으니 남은 조우현도 문제 될 건 없을 것이다. 유일한 골칫거리라면 이제 저 멀리 해외에 떨어져 있는 조은희뿐이다. 이번에 조진범이 중상을 입은 사실도 그들은 조은희에게 알리지 않았다...와인 한 잔이 목구멍을 타고 기분 좋게 배 속을 채웠다.이제 일 년만 지나면 조은희도 돌아올 것이다.막내딸 생각에 조은혁은 저도 모르게 웃음꽃이 피어올랐다.그때, 조진범이 고개를 쳐들었다. 와인잔에는 술이 한 방울도 남지 않았고 순식간에 조진범의 얼굴은 이미 엷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진안영이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조진범은 그녀의 손끝을 꼭 잡아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이까짓 술은 날 넘어뜨릴 수 없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조진범이 JH그룹을 인수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쳤다. 미룰 수 없는 접대도 많았고 거절할 수 없는 술도 수도 없이 많았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던 나날이 얼마나 많았던지...진안영은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다가도 다시 망설였다.조은혁 부부도 자리에 있고 더욱이 그녀는 아직 조진범과 공식적인 부부가 아니기에 쉽사리 꺼낼 수 있는 화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정도 속내는 조진범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하여 그는 빈 잔을 아주머니에게 건네주며 가볍게 웃었다.“더 마시면 우리 와이프가 삐질 것 같아서요.”이 말은 조진범 자신도 덕을 보면서 진안영의 체면도 차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방 밖에서 조은혁은 또다시 아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진범아, 서둘러라. 전용기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고.”조은혁이 언성을 높이자 조금 전까지 뜨거웠던 열기도 다시 차분히 가라앉았다.처음부터 장난으로 시작한 스킨쉽이었기에 조진범은 순순히 진안영을 놓아주고는 그녀의 말캉한 얼굴을 잡고 진지하게 물었다.“우리 이제 집에 갈까?”집...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가.진안영은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창밖의 따스한 햇볕을 바라보다 보니 이 상황에서 그들보다 중요한 건 존재하지 않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그녀는 조진범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 거니까....두 시간 후, 그들은 이전에 살던 별장으로 돌아갔다.1년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 진안영은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에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조진범은 그러한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여기가 싫으면 다른 곳으로 가서 살자.”그러자 진안영이 급히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이곳도 좋아요.”별장 안의 고용인들은 그들의 짐을 옮기느라 바삐 돌아쳤고 김씨 아주머니는 아현이를 안고 더욱이 손을 떼지 못했다. 워낙 사람 손을 잘 타는 아이이기에 아현이는 순순히 김씨 아주머니의 품속에 안겨 깔깔거리며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아이의 재롱에 심장이 아파 죽을 지경이었는데 김씨 아주머니는 애써 이성의 끈을 꽉 붙잡으며 뽀뽀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혹시나 아이에게 세균을 옮길까 걱정되어서였다.한편, 진안영은 조진범의 팔짱을 끼고 현관으로 향했는데 몇 걸음 더 가 남자는 갑자기 그녀의 손을 맞잡더니 깍지를 꼈다...남자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진안영은 순간 멈칫했지만 결국 거절하지 못했다.조은혁 부부는 그들을 따라오지 않았다.조은혁은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에서 떠다니는 흰 구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눈앞의 별장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바로 그들 맏이의 집... 정말 좋았다. 이곳이 바로 진범이의 집이다.덩달아 눈시울이 뜨거워진 박연희는 남편의 어깨
조진범은 이미 세 시간 내내 회의를 했는데 두 시간을 더 한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그는 아직 환자란 말이다.진안영은 고용인에게 아이를 봐달라고 부탁한 뒤, 직접 숄을 어깨에 걸치고 조진범이 먹을 알약과 따뜻한 물 한 잔을 쟁반에 올려두어 직접 서재로 들고 갔다.2층 서재에는 골초들이 한곳에 빽빽이 모여있어 방안은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그리고 그곳에서는 JH그룹의 고위층 인사들이 한창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같은 시각, 조진범은 줄곧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람을 다루는 정수는 바로 그들이 서로를 제약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다. 조진범은 절대 그 누구에게도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결코 좋은 지도자가 아니다.안은 계속되는 언쟁에 열기로 가득 차 있었고 그때, 문 앞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처음에 고용인이 찾아왔다고 생각한 조진범은 기분이 언짢아 고개를 숙여 이 비서에게 문을 열어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진안영일 줄은 이 비서 역시 생각지도 못했고 게다가 그녀는 손에 약 접시까지 받쳐 들고 있는지라 이 비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조진범에게 말을 건넸다.“대표님, 사모님이십니다.”‘진안영이라고?'그 말에 조진범의 표정은 확연히 달라졌다.심지어 진안영이 들어올 때, 그는 주위의 담배 연기 때문에 진안영이 불쾌해할까 열심히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그러한 조진범의 모습에 고위층 인사들도 즉시 담배를 끄고 창문을 열어 통풍을 시켰다.하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안영은 서재에 들어온 뒤, 코를 찌르는 담배 연기에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순간 살짝 눈살을 찌푸렸으나 진안영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끓인 물을 조진범에게 건네주고 손수 알약을 건네주며 다정하고 조용히 말을 건넸다.“약 먹을 시간이에요. 의사 선생님께서 하루 세 번 시간은 8시간 간격으로 약을 챙겨 먹어야 한다 그랬어요... 참, 방금 임 의사가 전화해서 당신 건강 상태를 물어보시길래 저도 말씀드렸어요.”진안영
조진범은 진안영이 대답을 회피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진안영은 대답을 피하기는커녕 손을 뻗어 조진범의 잘생긴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왜요? 내 관심 필요 없어요?”“그럴 리가.”조진범의 목소리는 더욱 잠겨있었다.일 초도 낭비하기 싫었던 조진범은 진안영의 머리를 감싸 쥐고 부드럽게 입맞춤을 하며 진아현에 관해 묻기도 하고 저녁 메뉴에 관해 물어보기도 했다.조진범은 기분이 좋은 듯 환하게 웃어 보였다.웃는 모습이 유난히 매력적인 조진범을 보고 설레지 않을 여자는 없었다.하물며 조진범의 품에 안겨있는 진안영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조진범은 진안영한테 자신의 이마를 맞대며 마음에 담아 두었던 재결합에 관해 물었다.진안영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대답했다.“지금 이대로도 좋잖아요.”“어디가 좋아?”“부족해! 안영아 난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진심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늘 망설였던 조진범은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심지어 조진범은 이대로 쭉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하고 싶었다.귓가에 대고 달콤한 말을 내뱉는 조진범 때문에 진안영은 얼굴이 붉어졌다.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조진범은 조용히 진안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어 갔다....이날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조진범은 집에서 요양하며 사무를 처리했다.이 비서가 자주 별장에 드나들었고 가끔 고위층 간부 두세 명이 들러 간단한 회의를 진행했다.조진범은 낮에는 공무를 처리하고 밤에는 진안영과 속마음을 나누며 뜨거운 밤을 보냈다.조진범은 진안영에게 남자를 지배하는 여러 가지 수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이 기간이 조진범한테는 가장 한가하고 여유로운 날들이었다....짙은 가을.저녁 무렵에 비친 석양은 구름 사이 사이로 황금빛을 내뿜고 있었다.검은색 캠핑카 한 대가 별장 입구에 천천히 멈춰 섰다.클래식한 블랙 수트를 입고 매력적인 얼굴
모호한 조진범의 말 때문에 진안영은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조진범은 진안영이 쑥스러워하자 더 말을 이어가지 않고 기분 좋게 차에 시동을 걸며 회사에 있는 사소한 일들을 공유했다.진안영 이외의 여자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새로 온 비서가 이쁘다는지 하는 말로 진안영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하지만 진안영은 항상 그러려니 하며 모든 걸 받아줬다.요즘 두 사람은 여느 평범한 부부들과 마찬가지로 사이가 좋았다.다만 다른 부부들보다 조금 더 달달하고 애틋했다.조진범은 사랑을 입에 달고 사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대신 행동으로 표현했다.일상에서 보여주는 다정한 태도라던가 뜨거운 밤이라던가 매주 주는 선물들은 진안영을 항상 설레게 해주었다.물론 진안영도 직접 고른 셔츠나 넥타이를 선물하기도 하고 뜨거운 밤 조진범의 요구를 들어주기도 하며 그의 사랑에 보답했다.아무튼, 두사람은 금실이 좋았다.조진범은 YS병원이 아니라 집 부근에 있는 큰 규모의 소아전문병원에 안배했다.백신 접종실.진아현은 엉덩이를 드러낸 채 조진범의 품에 안겨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간호사를 올려다보았다...간호사의 손에는 주사가 들려있었고 바늘 끝에서는 약물이 흘러나왔다.주사를 놓기도 전에 진아현은 와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얼굴을 찡그리며 작고 귀여운 이빨 두 개를 드러낸 채 아빠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울고 있는 진아현을 보자 조진범은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딸을 껴안고 뽀뽀를 했다.그러자 진아현은 더 크게 울어댔다.아빠 나빠!결국, 가느다란 주삿바늘이 부드러운 아기의 엉덩이에 꽂히자 진아현은 희망이 없어졌다는 듯이 아빠한테 엎드려 덜덜 떨며 울고 있었다.진안영의 가슴 아파 하는 얼굴을 보던 조진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안영아, 너보다 아픈 걸 더 무서워 하는 거 같아.”한편 간호사는 조진범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그는 이렇게 이쁘게 생긴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백신 접종을 끝낸 간호사가 진아현을 안아서 달래주려고 팔을 뻗자 자신한테 주사
조진범은 성현준과 권하윤을 아래위로 훑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그 순간까지도 권하윤은 성현준의 팔을 잡고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금실 좋은 부부라고 오해할 것 같았다.“조진범.”성현준은 당황한 눈빛으로 조진범을 바라보았다.유이안의 사촌 동생인 조진범이 오늘 일을 유이안한테 말할까 봐 그래서 유이안이 권하윤한테 무슨 짓을 할까 봐 성현준은 불안했다.안 그래도 연우를 키우느라 힘든 권하윤한테 더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두려웠던 성현준은 급하게 변명했다.“권하윤은 내 대학 친구야. 오해하지마.”조진범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옛 애인이잖아요.”조진범의 직설적인 말에 두 사람은 난감해 졌다.특히 얼굴이 창백해진 권하윤은 한참을 입만 뻥긋거리다 결국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했다.이를 본 성현준은 조진범에게 직설적으로 말했다.“다 지난 일이야. 너 누나한테 헛소리하지 마.”연우라고 불리는 아이가 성현준의 허벅지를 껴안았다.연우는 권하윤을 쏙 빼닮았다.초롱초롱한 눈으로 무서운 듯 조진범을 빤히 쳐다보는 연우가 불쌍했는지 성현준은 연우를 안아 올리며 달래줬다.그 장면을 본 조진범은 속이 울렁거렸다.조진범은 성현준을 보며 당장이라도 얼어붙을 듯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걱정 붙들어 매세요. 내 입이 더러워 질까 봐 말 안 합니다.”권하윤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그녀는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현준아 미안해!”두 사람과 더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조진범은 아내와 딸을 데리고 나와 차에 올라탔다.기분이 좋지 않았던 조진범은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피우지 않고 한참 동안 입에 물고만 있다가 반으로 접어 버렸다.진안영은 조진범의 기분을 눈치채고 위로의 말이라도 꺼내려는 찰나 조진범이 입을 열었다“성현준 개천에서 용 난 줄 알았더니. 용이 아니라 지렁이였네.”“성현준과 유이안은 술자리에서 만났어. 연회에서 성현준이 유이안한테 완전히 반했었거든. 하긴 우리누나 정도면 반 할만도 하지. 집안 좋지
성현준은 유이안의 옆에 다가가 모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추운데 왜 방에 안 들어가고 이러고 있어? ”유이안은 고개를 들어 성현준을 쳐다봤다.달빛에 젖은 성현준의 용모는 영준하고 남자다웠다.결혼 후, 권하윤이 나타나기 전까지 수년간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평범하지만 행복했다.권하윤은 예쁘기도 했지만 남자의 연민을 자아내 마음을 애타게 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권하윤의 등장으로 유이안은 성현준이 왜 자신을 원하고 결혼까지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유이안은 성현준이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결국 가지지 못했던 여자 권하윤과 너무 많이 닮았다.유이안 그녀가 권하윤 대타라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그 후 두 사람의 부부관계는 점차 냉랭해졌다.성현준은 모녀를 돌보느라 집에도 거의 돌아오지 않았고 유이안도 더는 묻지 않았다.혼자 외로운 밤을 보낼 때마다 유이안은 이혼을 생각했지만 이런저런 일들로 계속 미루었다.이제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았다.유이안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권하윤한테 집도 사주고 아이를 위해 외국에서 전문의까지 청했다고 들었는데... 그 아이 당신과 권하윤의 아이인가요?”권하윤이 B시에 온 후부터 성현준이 돌봐줬던 2년 동안 유이안이 이렇게 물어본 건 처음이었다.성현준은 눈살을 찌푸리고 피식거리며 물었다.“조진범이 알려줬어?”유이안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현준 씨는 내가 의료 종사자라는걸 잊고 있었나 봐요? 권하윤에게 찾아준 병원은 YS병원의 협력 업체에요. 제 수하에 의사들이 수시로 교류하고 공부하러 다니는데 두 사람의 애틋한 사이를 알아차리는 것도 당연한 거잖아요.”유이안의 말은 성공적으로 성현준의 심기를 건드렸다.성현준은 셔츠 단추 두 개를 풀며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권하윤은 단지 의지할 곳 없는 외롭고 쓸쓸한 여자일 뿐이야. 말을 꼭 이렇게 각박하게 할 필요가 있어?”“의지할 곳 없는 외롭고 쓸쓸한 여자?”“권하윤이 의지할 곳이 왜 없어요? 성현준 당신을 의지하고 있잖아요. 아! 그리고 권성기술회사
깊은 밤, 성현준은 병원으로 서둘러 향했다.병실에 들어서자마자 권하윤은 성현준을 끌어안았다.권하윤은 예쁜 얼굴을 성현준의 어깨에 가볍게 기대었다.그 어떤 남자가 이렇게 연약하고 의지할 곳 없는 여자의 포옹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하물며 두 사람은 과거 연인 사이인데.성현준은 권하윤한테 느끼는 감정은 동정일 뿐이라고 자신을 세뇌했다.권하윤은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현준아, 나 연우를 잃기 싫어. 연우 없는 날은 상상도 하기 싫어. 연우가 없으면 난 진짜 미쳐버릴 거야... 현준아 나 진짜 미쳐버릴 것 같아.”성현준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침대 위의 연우를 바라보았다.연우는 응급처치를 거쳐 병세가 억제된 후 잠들어 있었다.하지만 성현준은 여전히 아이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성현준은 권하윤한테 조금만 더 강해지라고 꼭 연우의 병을 고칠 방법을 찾아주겠다고 말했다.깊은 감동을 한 권하윤은 성현준의 품에 기대어 두 손으로 셔츠를 잡고 눈물을 흘렸다.한참 후 권하윤은 예쁜 얼굴을 들어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준아 내가 실례했어!”성현준은 권하윤의 어깨를 감싸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혼란스러우면 그럴 수도 있지. 다 이해해.”권하윤은 성현준의 품을 떠나 테이블로 가서 따뜻한 물을 부어 주었다.잠시 후 뭔가 떠오른 권하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응급처치 후 외국에서 온 전문의 쌤이 그러던데. 심장 이식 수술 세계 최고의 의사가 여기 B시에 있다고...”성현준은 즉각 대답했다.“연우를 위해서라면 돈이 얼마가 들던 꼭 이 의사를 청할 거야.”권하윤은 손을 움찔했다.성현준은 까닭을 모른 채 권하윤의 등 뒤로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왜? 날 못 믿어?"권하윤은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돌려 성현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쌤이 말한 그 의사 너의 부인이야. 현준아 유 선생님한테 부탁할 수 있어? 나를 많이 탓하고 있을 텐데 어떻게 연우 수술을 부탁하겠어... 현준아 만약 유 선생님가
조은희는 진석을 빤히 바라보았다.진석은 낮게 웃으며 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블랙 카드를 한 장 꺼내 조은희의 손바닥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내 카드야. 한도가 없으니까 마음껏 써.”조은희는 놀란 듯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진석 씨, 정말 통 크시네요! 진 선생님, 감사합니다.”진석이 장난스럽게 그녀를 가볍게 툭 치자 조은희는 그의 목을 감싸안으며 웃었다.“스폰서 오빠, 감사합니다.”진석은 조은희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녀의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강렬하게 입을 맞추었다. 예전에는 학문적이고 온화했던 그의 이미지가 지금은 사업가다운 자신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조은희의 장난스러운 태도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입맞춤 후 그녀의 귀에 낮고 거친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 조은희는 그 말을 듣고 묘하게 떨리는 감정을 느꼈다...진석은 그녀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살짝 물었다.“넌 은근히 독특한 취향이네.”조은희는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자세를 바로잡으며 운전하라고 했다. 진석은 그녀를 한 번 더 바라보고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차를 출발시켰다...둘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석의 어머니는 고향 요리로 한 상을 가득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진석이 조은희가 좋아한다고 말해준 요리도 포함되어 있었다.진석의 아버지는 붉고 싱싱한 과일을 깨끗이 씻어 가지런히 접시에 놓고 있었다.진석의 차가 멈추자 그는 조은희를 데리고 내렸다. 진석의 부모는 반갑게 나와서 두 사람을 맞았다.아버지는 조은희가 가져온 선물을 받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요.”어머니는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감기 조심하라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조은희의 피부는 밝고 투명하게 하얀 편이라 마치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진석의 부모 눈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속으로 진석과 조은희가 아이를 낳는다면 남녀를 불문하고 정말 예쁘고 훌륭한 아이가 태어날 거로 생각했다.
진석은 조은희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눈치챘다.진석은 미소를 지으며 조은희의 얼굴을 감싸안고 입을 맞췄다.“너와는 결혼 첫날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었지! 게다가 방금 술을 마셨으니까 오늘은 아마 어려울 거야. 너에게 더 좋은 경험을 주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해.”조은희는 얼굴이 빨갛게 변했고 진석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참 묘했다!예전에는 그저 감정에서 비롯된 관계였고 항상 예의를 지키며 선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한 침대에 누워 서로의 몸이 밀착된 채로 있다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조은희는 적어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진석은 조은희의 마음을 알아채고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며 부드럽게 속삭였다.“나도 처음이야! 결혼 첫날 밤을 준비하기 위해서 미리 배워둘게.”조은희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사실 책을 보거나 동영상을 본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냥 진석의 품에 몸을 맡겼다.햇살이 창문 틈새로 스며들기 시작할 때쯤, 진석은 조용히 일어나 집을 떠났다. 조은희의 집이었기에 그 잠깐의 온기는 이미 지나쳐버린 상태였다...그들은 예전에는 갑자기 헤어졌지만, 지금 다시 함께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져 조은희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확실히 진석과 다시 함께하게 되었고 결혼에 대한 얘기도 나누고 있었다.그들은 연애를 건너뛰고 바로 결혼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조은희는 조금 망설였다...조진범은 레드 와인을 손에 들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사실 일찍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적어도 아이도 일찍 낳고 그 후엔 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을 테니.’진안영은 말했다.“아이를 낳으면 둘만의 시간은 더 이상 없지 않을까요?”조우현이 답했다.“다시 만난 연인들은 가장 먼저 혼인신고를 한다고요. 그게 아니면 후회할 거예요. 많은 시간을 허비할 테니까요. 사실 처음에 부소연과 결혼해야 했어요.”오빠들의 이야기를 듣고 조은희는 그 말
진석은 예의 있게 조은혁을 호칭했다.“아버님.”조은혁은 그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고 가볍게 기침하며 조은희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먼저 올라가라. 네 엄마가 네가 돌아오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으니 아마 할 얘기가 있을 거다.”조은희는 처음엔 가만히 있었고 진석은 부드럽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밀면서 말했다.“먼저 올라가.”조은희는 그제야 움직였고 조은혁 옆에 다가갔다. 집에서 막내딸인 조은희는 가장 애교가 많았고 조은혁을 안고 인사한 후 아쉬운 듯 올라갔다.조은혁은 작은 딸을 안자 화난 기분이 어느 정도 풀리더니 진석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앉아서 얘기해.”진석은 즉시 자리에 앉아 조은혁에게 차를 따랐고 조은혁은 일부러 그를 자극하는 듯한 말을 던졌다.“눈치가 빠르네.”진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버님 앞에서는 실수하지 않으려 합니다.”조은혁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그는 이제 두 사람이 다시 함께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여전히 아버지로서 딸의 미래를 걱정했다.“은희와 만나고 싶다면 지금은 조건은 없어. 하지만 요구 사항은 몇 가지 있네.”진석은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조은혁은 진석의 태도를 만족스러워했지만, 하는 말은 전혀 봐주지 않았다.“첫째, 결혼을 하게 되면 은희는 너의 집에 가지 않고 결혼식과 생활은 모두 B시에 있어야 해. 둘째, 조씨 가문은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으니 결혼 때 충분한 축의금을 줘서 편하게 생활하게 할거야. 하지만 네가 결혼 후 벌어들인 모든 돈은 은희와 공동 재산으로 해야 하며 은희가 어떤 일을 하고 싶어도 간섭할 수 없어. 또한 아이를 가질지 안 가질지 은희의 선택을 존중해야 해.”이 조건들은 모두 합리적으로 보였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운 일이다.그렇지만 진석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할 수 있습니다.”조은혁은 더 이상 그를 어렵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진석을 보며 잠시 마음을 정리했다.사실 그도 같은 도시에서 사업을 하며 진석이 처음부터 얼마나 힘들었을
하지만 조은희는 그 답변에 만족하지 않았고 눈물이 맺힌 채 애처롭게 다시 물었다.“결혼했어요? 다른 사람이 있어요? 아직도 저를 좋아해요?”그녀가 물었을 때 처음보다 조금 더 고집스러워졌고 그 모습에 진석은 마음이 아팠다.진석은 그들이 헤어졌을 때 조은희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소녀였다는 것을 기억했다.하지만 지금 조은희는 이렇게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질문을 던지며 진석에게 묻고 있었다. 그녀가 점점 용감해질수록 그의 마음은 더 아팠다.진석은 더 이상 조은희를 놀리지 않았다.그는 조은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답했다.“결혼 안 했고 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없어. 약혼녀는 다리 치료를 마친 후 올 상반기에 결혼할 거야. 아직도 좋아해. 많이 좋아해.”...조은희의 눈가는 더욱 붉어졌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그게 제가 진석 씨와 사귀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요.”진석은 한 걸음 다가가 그녀 눈가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5년이 지난 지금 조은희는 눈물이 많은 여린 여자가 되었다. 그는 예전 조은희가 항상 웃고 뒤에서 그를 끌어안으며 ‘진 선생님’이라고 달콤하게 불렀던 기억을 떠올렸다.그녀를 좋아하는 것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그때 그는 자신이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여전히 그 감정을 시작했다. 그 후 조은희는 해외로 떠났고 진석은 B시에 남았다. 그 뒤 1년 동안 진석은 조은희가 아무 말 없이 떠난 것에 대해 그녀를 미워하기도 했었다. 자신을 먼저 유혹한 것도 조은희였기에 더 화가 났다.하지만 그가 나중에 생각하니 조은희는 겨우 20살이었다.진석은 조은희의 첫사랑이었고 그녀의 청춘 그 전부였다. 게다가 그녀는 진심으로 진석을 사랑했기에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진석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울지 마. 알겠지? 우리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먼저 학교 관계자들과 저녁을 먹어야지. 도서관도 지어야 하잖아. 그곳도 우리가 갔던 곳이었지.”그는 조은희가 대답하기 전에
순간 조은희의 생각이 멈추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조은희는 진석의 의도를 알 수 없었고 그가 굳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이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진석은 그녀를 차에서 이끌어 내리고 있었다.학교에서 준비한 식당은 학교 근처에 있었고 과거에 조은희가 진석과 함께 와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별도로 방을 예약하지 않았었다.익숙한 장소를 다시 찾으니 묘한 감회가 밀려왔다.진석과 조은희는 나란히 안으로 들어섰다. 키가 185cm인 남자와 170cm인 여자는 잘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의 조합으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들 사이의 과거를 아는 학교 관계자들은 자연스럽게 몇 마디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띄웠다.조은희는 약간 불편한 기색을 띠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어린 시절엔 철이 없었죠.”반면 최근 몇 년간 사업을 통해 단련된 진석은 여유로운 미소로 담담하게 응대했다.“과거의 인연을 다시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것으로 보여요.”그 말이 나오자 학교 관계자들은 그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 진석이 조은희 때문에 온 것임이 분명했다. 그 1억이 전부 조은희 덕분이었기에 학교 관계자들은 일부러 조은희를 진석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조은희에게 음료만 권하면서 농담을 건넸다. “잠시 후 진석이 취하시면 조은희가 집에 데려다줘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날 수도 있잖아.”조은희는 그들의 관계를 설명하려 했지만, 탁자 아래로 내려간 그녀의 손이 진석의 손에 잡혔다.진석의 손길은 매우 부드러웠고 남녀 간의 감정이 담긴 것 같지 않은 마치 어른이 아이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듯 따스한 느낌이었다.조은희의 붉은 입술이 약간 떨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후 손을 빼냈고 진석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는 학교 관계자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먼저 한 잔을 마셨다.교장은 여전히 예전의 그 교장이었고 진석의 이런 모습을 보고 깊은 감회에 잠긴 듯 말했다.“많이 변했구나.”감상적인 분위
그날 밤 조은희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조은혁은 그 시간 동안 새로 들인 취미인 거북이들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박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농담을 던졌다. “늙으니까 이런 거나 만지고 있지.” 그날 밤 조은혁은 거북이들을 모두 방생하며 자신이 아직 늙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들었다. 심지어 한 마리 거북이 등에 ‘진석’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으며 괜히 화풀이도 했다. 박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유치하다며 혀를 찼다. 조은희는 이 모든 일을 몰랐다. 그녀는 그저 아버지가 며칠째 자신에게 집에만 있지 말고 좀 나가보라며 걱정하고 있는 것만 알았다. 일주일이 지나며 휴가가 끝났고 조은희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녀는 대학에서 미술학과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림 수업을 맡고 있었다. 가끔 그녀는 자신이 진석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딱히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일하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저녁 해 질 녘이었다. 조은희는 차 열쇠를 챙겼다. 차를 몰고 가 간단한 간식을 사서 집에 돌아와 드라마를 보며 먹을 계획이었다. 그녀의 일상은 단순했고 굳이 그것을 깰 생각도 없었다. 며칠 전에 그 일은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저 진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조은희의 얼굴은 노을빛에 물들어 더욱 맑고 투명해 보였다. 그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차 문을 열려던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은희야.” 그 목소리는 진석이였다. 조은희는 천천히 돌아섰고 그곳에 서 있는 진석을 보았다. 그는 몇몇 교직원들과 함께 기부에 관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조은희는 학교의 오래된 도서관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한 기부를 논의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재회에 조은희는 순간적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석의 눈빛은 깊고도 복잡했다. 이 학교는 그들이 과거에 함께 있었던 곳이었
휴게실에서 조은희는 진안영의 품에 안겨 억눌린 채로 울고 있었다. 진안영은 그녀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좋아한다면 내가 대신 가서 말해줄게요.” 조은희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가 언니를 대역죄인이라고 할 거예요.” 진안영은 잠시 멈칫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 “진범 씨가 도와줄 거예요.” 조은희는 진안영의 품에 더욱 몸을 기댄 채 계속 울었지만 오늘이 조우찬의 첫돌 날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조금만 울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니까.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이 온화하고 점잖은 사람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진안영은 그가 누군지는 몰라도 자기 남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문 열어볼게요.” 진안영이 문을 열었을 때 예상대로 문밖에는 진석이 서 있었다. 진안영은 그와 눈을 마주쳤지만 아무 감정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두 분이 얘기하세요.”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고 진안영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휴게실 안은 여전히 조은희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그녀는 왜 이렇게 슬픈 걸까. 다시 그 사람을 만나는 게 이렇게 슬픈 일일까? 아니면 이 몇 년 동안 계속 슬픔에 잠겨 있었던 걸까? 진석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5년 동안 떨어져 지낸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실 그들이 처음 함께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첫 만남 이후 바로 헤어졌으니까. 조은희는 그때 겨우 18살의 어린 소녀였고 5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많이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그때의 소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언니...” 조은희는 그를 품에 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처음엔 진안영인 줄 알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진안영의 허리는 이렇게 강건하지 않았다. 분명히 남자의 허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온화한 듯하면서도 차가운 기운을 풍기
다음 해 8월. 조우현과 방유설의 아기가 첫돌을 맞았다. 방유설은 조우현에게 아들을 낳아주었고 그 아이의 이름은 조우찬으로 지어졌다. 이 이름은 큰아버지인 조진범이 지어준 것이었고 방유설은 이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한편 조진범과 진안영의 막내아들의 이름은 조우진이었다. 조우찬과 조우진, 이 두 아이는 조씨 가문의 차세대 남자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가문에서 첫 아이는 여전히 진아현이었다. 현재로서는 유일무이한 작은 공주님으로서 이 작은 소녀는 조은희 고모를 따라다니는 걸 좋아했다. 올해로 세 살 반이 된 진아현은 곧 유치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조우찬의 돌잔치 날 조은희는 여전히 진아현을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예상치 못한 옛사람을 마주쳤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해 그녀가 타국으로 떠난 이후로 가끔 스쳐 지나갈 뿐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몇 년이 지났을까. 조은희는 차마 생각하기조차 두려웠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흐른 듯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벌써 4, 5년이 된 것 같았다. 진석은 옆에 아무도 없이 홀로 서 있었다. 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행사장의 중앙에서 다른 이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조씨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의 일은 잊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은희 진아현의 손을 잡고 있었고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진아현은 고개를 들어 고모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 저 사람 좋아해요?” “아니야.” 조은희는 순간 당황하며 빠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진아현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왜 자꾸 그 사람만 보고 있어요? 물론 잘생겼긴 하지만 여자애들은 좀 더 절제해야 해요.” 조은희는 잠시 놀라며 물었다. “어디서 그런 걸 배웠어?” 진아현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아빠가 그랬어요! 아빠가 항상 엄마한테 말했어요. 잘생겼어도 자기만 보면 안 된다고. 여
유이안의 말이 끝나자 조씨 가문 사람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박연희였다. 그녀는 서둘러 유이안에 물었다. “유설이 상태는 괜찮아?” 유이안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외숙모, 걱정하지 마세요! 유설 씨 상태는 좋아요. 그냥 조금 놀란 것 같아요. 우현이가 안에서 곁에 있어 주고 있어요.” 박연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조은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뜻밖에 아이라니. 그게 좋은 거지! 좋은 거야.” 두 사람의 부부 사이는 원래도 좋았지만 부모라면 누구나 손주를 보고 싶어 하는 법이다. 게다가 조우현과 방유설의 외모가 워낙 출중하니 그 아이 역시 틀림없이 예쁠 거라는 생각에 조은혁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격동되었다. 방유설을 닮은 귀여운 딸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한참 지난 후 조우현이 방유설을 부축하며 나왔다. 방유설은 설탕물을 조금 마신 덕분에 정신을 차렸지만 집에 돌아가 며칠은 충분히 쉬어야 했다. 특히 임신 초기 3개월 동안은 모든 일을 미루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뜻밖에 찾아온 아이였지만 방유설은 그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아직 평평한 아랫배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조우현의 목을 끌어안으며 마음속 깊이 행복이 가득 차올랐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 방유설도 한 번쯤은 행복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꿈에서조차 감히 바랄 수 없을 정도의 행복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조우현이 깊은 애정을 담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가 약간 잠긴 채 말했다. “유설아,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어.” 결혼한 지 오래됐지만 조우현은 가끔은 철없고 유치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성숙했고 갈수록 더욱 성숙해졌다. 가끔 방유설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우현은 젊은 나이에 결혼한 편이었고 자신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모두 그녀에게 쏟아부은 것 같다고. 밤에 문득 잠에서 깨어날 때면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