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는 노승아도 쓰러뜨려서 둘러멨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다른 차로 옮겨 타더니 유유히 사라졌다....온지유는 정신을 잃고서도 흔들림을 느꼈다. 구역질도 약간씩 올라왔다.정신 차린 그녀는 자신의 손발이 단단히 묶여 있음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주유소 냄새가 맴돌고 있었다.그녀가 있는 곳은 목제 집이었다. 그녀는 나무 기둥에 묶여 있었는데, 뒤에 사람이 한 명 더 있는 것 같았다.온지유는 힘껏 고개를 돌려서 상대의 옷깃을 봤다. 그리고 금방 누군지 알아차렸다.‘노승아?’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왜 노승아와 함께 납치됐는지 의아했던 것이다.‘여긴 어디지?’당황한 와중에도 온지유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다.노승아도 함께 납치당한 걸 봐서 범인은 그녀가 아니었다. 아니라면 가장 유력한 후보였을 텐데 말이다.두 사람에게 동시에 한이 있거나, 여이현과 연관되어 있거나, 혹은 얼마 전 나타난 여자의 시체와 연관 되어 있거나... 셋 중 하나였다.“누구예요?! 누가 날 납치한 거예요?!”뒤늦게 정신 차린 노승아는 긴장한 기색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그녀는 있는 힘껏 몸부림쳤다.온지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경고했다.“가만히 있어요. 여기 사람 한 명 더 있거든요?”노승아는 이제야 뒤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온지유 씨? 온지유 씨가 날 납치했죠! 날 질투해서 이런 일을 벌인 거죠!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요?”“생각이라는 걸 해보면 안 돼요? 저도 같이 묶여 있거든요?”온지유는 인내심을 잃은 듯 투덜댔다. 노승아는 여전히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쳐냈다.“대체 누가 감히 날 납치한 거예요? 내가 누군지 알아요?”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그녀를 보고 온지유는 어이가 없었다.“독 안에 든 쥐가 찍찍댄다고 해서 누가 들어줄 것 같아요? 괜히 시끄럽게 굴지 말고 가만히 있죠?”노승아는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할 줄 꿈에도 몰랐다. 그녀를 납치할 만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노승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개졌다. 눈앞도 약간 흐릿했다.“그걸로 협박이 될 거로 생각해?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고 있어! 그럼 좀 봐줄 수도 있으니까.”노승아는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온지유는 하도 긴장해서 식은땀에 흠뻑 젖었다. 그녀는 홑몸이 아니었다. 그녀는 임신한 몸이기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넌 아직도 살아있을 줄 몰랐네.”흉터남은 온지유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여이현이 신경 많이 쓴 모양이야.”“그게 여이현 씨랑 무슨 상관이죠? 저희 헤어진 거 몰라요? 살인 충동이라면 제가 더 강할 것 같네요.”흉터남은 또 노승아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네가 좀 똑똑한가 보구나. 자기 아버지랑 아주 똑같네.”온지유가 물었다.“도대체 저는 왜 납치한 거예요? 여이현 씨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랑은 상관없잖아요.”“그래, 상관없지. 여이현이 너랑 헤어진 것도 알고 있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두 년 다 잡아 오는 게 안전하지 않겠어?”흉터남은 아무런 실수도 없어야 했다. 한쪽은 여이현의 아내고, 다른 한쪽은 애인이었다. 실수가 없기 위해서는 양쪽 다 잡아야 했다.더군다나 노승아의 아버지는 그를 함정에 빠지게 했다. 더욱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죽게 되더라도 혼자 죽지는 않을 것이다.“사람들이 쫓아왔어요!”홍혜주는 긴장한 기색으로 달려와서 말했다.“준비를 하려면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해요.”홍혜주를 발견한 온지유는 잠깐 멈칫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그녀는 홍혜주가 왜 이곳에 있는지 몰랐다. 그래도 흉터남이 추격을 피할 수 없다는 것과 이곳에 남아 있다가는 자신도 죽으리라는 것은 알았다.흉터남은 차가운 눈빛으로 홍혜주를 바라보다가 배를 퍽 찼다. 뒤로 쓰러진 홍혜주는 힘겹게 다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인명진은? 너희 둘도 날 배신했지? 이제 다 컸다고 나는 안중에도 없는 거 아니야?”“저는 죽어서도 아버지를 따를 거예요. 하지만 명진이는 잘 모르겠어요. 만약 죽이라
“닥쳐!”홍혜주는 차갑게 말을 이었다.“난 생명의 은인에게 목숨을 바칠 뿐이야.”“미쳤어? 뭐가 됐든 이제 끝장난 사람이야. 넌 개처럼 이용당하고 있다고!”“입 막아.”홍혜주의 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누군가 악취 나는 걸레를 가져와 노승아의 입을 막았다.“읍!”그 역겨운 냄새에 노승아는 구역질이 났지만, 어떻게 벗어날 수 없었다.홍혜주는 온지유를 바라보았다. 온지유도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에서는 중요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흉터남을 돕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를 도우려 하고 있었다.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홍혜주는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그런데도 온지유는 마음이 불안했다. 홍혜주가 그녀를 위해 해독제를 찾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지난번 홍혜주가 말했던 것처럼, 그녀를 돕겠다고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그러나 해독제가 진짜 흉터남의 손에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그녀는 홍혜주가 이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를 바랐다.온지유는 홍혜주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를 가볍게 손을 뿌리치고 나갔다.밖에서는 총성과 폭발음, 그리고 비명이 섞여 들려왔다.온지유는 이런 장면을 처음 봤다. 몸이 후들후들 떨리더니 얼굴은 창백해졌다. 흉터남과 부하들은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이때 홍혜주가 말했다.“다시 기둥에 묶을게요.”온지유와 노승아는 마당의 두 기둥에 묶였다.“하하하하!”흉터남은 죽음도 두렵지 않은 듯 웃음을 터뜨렸다.“이런 날이 올 줄은 또 몰랐군.”그는 마당의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발걸음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한 무리의 사람이 안으로 들어와 그를 향해 총을 겨눴다.흉터남의 부하들도 마찬가지로 총을 들고 그들을 겨냥했다. 흉터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인질이 있었기에 안 되겠다 싶으면 다 같이 죽을 생각이었다.총을 바라보고 있자니 온지유는 피비린내가 맡아지는 것 같아서 구역질이 났다. 마음속에서는 공포가
온지유는 추호도 버둥거리지 않았다. 답을 알기에 두렵지 않은 것이었다.그녀는 여이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인파 속에서도 한눈에 알리는 우월한 남자였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녀가 넘볼 수 없었다.기분 탓인지 오늘따라 여이현이 낯설어 보이기도 했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를 보호해 줄 거라는 느낌도, 그녀를 사랑한다는 느낌도 없었다.그녀는 한없는 실망 속으로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여이현은 고민되는 것이 있는 듯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럴 수록 온지유는 더욱 실망할 뿐이었다.“빨리 골라! 안 그러면 둘 다 죽여버릴 거니까!”흉터남은 마음이 급했다. 그는 주사기를 휘적대며 선택을 강요했다.너무 오래 묶여 있었던 온지유는 몸이 저리기 시작했다. 임신 때문에 원래도 잘 안 올라오던 숨이 더 심해졌다. 안색은 아주 창백했다.노승아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누가 봐도 지켜주고 싶은 불쌍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여이현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다.여이현은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한 사람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가리킨 사람은 노승아였다.온지유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반대로 노승아는 상기된 표정으로 여이현을 바라봤다. 아주 행복한 모습이었다.‘이현 오빠가 나를 선택했어! 나를 살려줬다고! 이현 오빠는 나를 좋아하는 거야!’그녀는 더욱 힘차게 몸부림쳤다. 이제 드디어 풀려날 수 있는 줄 알았다.그러나...“하하하!”흉터남이 섬뜩한 웃음소리를 냈다. 곧 온지유의 밧줄이 풀리더니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그녀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홍혜주가 움찔했다. 그러나 아직은 움직이지 않고 주먹만 움켜쥐었다.온지유는 여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여이현이 자신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풀려나서 어리둥절했던 것이다.그녀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이성을 잃은 흉터남을 바라봤다. 흉터남의 표적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는 독기 서린 눈빛으로 여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자신이 죽는 것보다 사랑하
말을 마친 홍혜주는 떠나려고 했다. 온지유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혜주 씨는요?”“저는 괜찮아요. 뭐라도 가서 도와야죠.”홍혜주는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온지유는 작고 어두운 공간에 있었다. 이곳에서 버텨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래도 그녀는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말이다.그녀는 자신을 꼭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총소리는 바로 곁에서 들려왔다. 두려움에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눈을 감고 있으니 이상한 기억들이 몰려왔다. 쓰레기 같은 옷을 입은 연약한 여자애는 미소를 지은 얼굴로 말했다.“왜 아무 말도 안 해? 원래도 살아 있는 사람이 얼마 없는 곳인데,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잖아.”“넌 안 무서워?”“응. 난 여기서 자랐어. 죽은 사람이 무서울 나이는 지났지.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뭐.”“아니야! 죽으면 안 돼!”“괜찮아. 난 부모님께 버림받은 순간 이미 죽은 거랑 마찬가지야. 나 너보다 나이 많아. 언니라고 불러. 참, 나랑 같이 지내는 남자애도 있는데 봤어? 맨날 이상한 약 냄새를 풍기는 애 있어. 걔는 내 동생이야.”화면이 갑자기 바뀌고 여자애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맞고 있었다. 그녀는 찐빵 하나를 물고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몸 아래에는 새 찐빵 두 개가 있었다.“안 줘! 다 비켜!”여자애는 피를 머금고 있었다. 힘겹게 인파 속에서 벗어난 그녀는 더러워진 찐빵을 건넸다.“자, 먹어. 뭐라도 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어. 안 그러면 뺏길 거야. 빨리 먹어!”“때릴 거면 날 때려! 얘는 때리면 안 돼!”여자애는 혼자서도 남자들과 싸울 수 있었다. 음식 하나 지키겠다고 말이다.그녀는 자주 다쳐서 돌아왔다. 그런데도 항상 씩씩했다.“왜 나한테 잘해줘?”“여자애들끼리 돕고 살아야지. 나야 상관없지만, 넌 피부도 고운 게 곱게 자란 것 같아. 이런 일은 내가 하면 돼.”“나도 널 지켜줄래!”“됐어. 넌 못 이겨! 난 이길 수 있으니까, 내가 할게!”“우리 도망칠
여이현은 눈살을 찌푸린 채 침묵을 지켰다. 눈빛은 아주 살벌했다.“하하하.”흉터남은 점점 광기에 서렸다. 그토록 정직하던 사람이 여자를 위해 나쁜 길에 들어서다니 말이다.하지만 득의양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흉터남이 먼저 쓰러지고 말았다. 여이현의 발에 배가 차인 그는 한참 낑낑대다가 자존심도 없이 총을 뽑아 들었다.여이현은 무의식적으로 피했다. 그러나 흉터남의 표적은 한 번도 여이현이었던 적이 없다. 그는 음침하게 웃으며 노승아에게 주사를 놓을 생각을 했다.흉터남이 빠르게 달려오는 것을 보고 노승아는 눈을 크게 떴다.“조심!”여이현은 다른 쪽에서 달려와서 흉터남의 허리를 잡고 쓰러뜨렸다. 미처 치우지 못한 주사기는 여이현의 어깨에 꽂혔다.이 장면을 본 노승아는 눈을 크게 뜨며 몸부림쳤다.“우웁...”그러나 이미 되돌릴 기회는 없어졌다.흉터남은 이 정도로 미쳐 날뛰는 여이현을 처음 봤다. 그래서인지 더 광기에 서렸다.“너도 참 대단하다. 하하하하...”주사를 맞은 여이현은 바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몸이 바닥으로 꽂히는 동시에 이명도 들렸다.이때 마침 누군가 와서 노승아의 밧줄을 풀어줬다.“안 돼!”걸레를 뱉아낸 노승아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녀는 후다닥 달려가서 여이현을 부축하려고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오빠, 주사 안 들어갔죠? 안 들어간 거 맞죠?”그녀는 도무지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주사기에 약물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여이현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몸도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데도 있는 힘껏 고통을 참으려고 노력했다.홍혜주의 시선은 흉터남에게 있었다. 흉터남은 이 틈을 타서 도망가려고 했다. 물론 그녀는 그가 도망가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녀는 아직 해독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잠시만요! 해독제는 주고 가야죠!”홍혜주는 발 빠르게 쫓아갔다. 싸우던 중 흉터남은 팔뚝에 총을 맞았다. 출혈은 한눈에 봐도 심해 보였다. 홍혜주가 온 것을 보고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너 죽고 싶어? 감히 내
홍혜주는 피를 토해내며 흉터남의 바지를 잡았다.“해독제...”흉터남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꼬리를 올렸다.“해독제는 애초에 없었어. 넌 그렇게 순진해서 어떻게 먹고살려고 그래? 말 한마디에 바로 속네.”홍혜주는 놀란 표정으로 힘겹게 말했다.“해독제... 없...”“KA48는 해독제가 없어!”흉터남은 피식 웃으며 홍혜주의 목을 잡았다.“저승에 가서 애들한테 안부 전해줘.”그는 홍혜주를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홍혜주는 아직도 그에게 속았다는 사실에 충격받은 상태였다.“저를... 속인 거예요?”홍혜주의 눈에는 빛이 없었다. 그녀는 흉터남의 손에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가 빠르게 칼을 뽑아내 그의 눈을 향해 찔렀다.흉터남은 빠르게 피했다. 그래도 얼굴에 상처가 남았다.홍혜주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다리가 골절했는데도 꿋꿋이 일어날 정도의 한이었다.“이것도 거짓말이면, 설마 제 부모가 저를 팔았다는 것도 거짓말이에요?”“그렇게 많은 애들이 있는데, 네 부모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아?”“역시... 거짓말이었어... 저를 도구 취급하고, 제 인생을 망쳤어요! 당신은 죽어도 싸요!”홍혜주는 총을 꺼냈다.탕! 탕!두 발의 총성이 들렸다.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던 온지유도 들었다. 그녀는 몸이 굳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슬픈 기분이 들었다. 눈물은 저도 모르게 주르륵 흘러내렸다. 모든 것이 꿈처럼 현실감이 떨어졌다.이때 그녀를 가리고 있던 문이 열렸다. 빛이 들어와서 그녀의 몸에 떨어졌다. 빛이 이토록 눈부시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사람 있습니다! 여기 사람 있습니다!”특전사가 외쳤다.온지유는 울면서 손을 뻗었다. 삶의 희망을 향해 뻗은 손이었다. 손이 잡힌 순간 그녀는 드디어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사... 살았다...”부축받고 일어난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얼어붙은 그녀는 창백한 안색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혜주...”‘혜주 씨가 기다리라고 했는데? 왜 안 돌아오지?’걱정되었던
홍혜주는 손가락을 까딱하더니 힘겹게 눈을 떴다. 온지유를 인식한 그녀는 손을 뻗어 붙잡으려고 했다. 온지유도 느끼고 허리를 숙였다.“혜주 씨!”“추워... 나 추워요...”“안아줄게요. 그럼 안 춥죠? 이쪽으로 기대요.”홍혜주는 무기력하게 말했다.“저 이제 죽는 거죠? 미안해요. 도움이 하나도 못 됐어요. 약도 못 찾고... 저... 콜록콜록...”“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요. 구급차가 오고 있어요. 제가 계속 곁에 있을게요. 곧 따듯해질 거예요.”홍혜주의 시선은 이미 흩어졌다. 그녀는 허약하게 말했다.“저 때문에 슬퍼하지 않아도 돼요. 저희 어차피 모르는 사이였잖아요. 명진이 아니었으면...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이대로 죽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아요. 이제야 좀 쉴 수 있는 느낌이랄까.”홍혜주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했다. 그녀의 인생에 행복이란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도 없이 혼자서 그 힘들 세월을 견뎌내는 게 쉽지 않았다. 인생도 참 재미없게 느껴졌다.“앞으로는 달라질 거예요.”온지유는 어떻게든 그녀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나쁜 사람들이 전부 잡혔어요! 여기도 이제 탈탈 털릴 거예요! 혜주 씨는 자유예요! 이제는 예쁘게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요! 우리 같이 해봐요! 포기가 웬 말이에요!”온지유는 거의 소리 지르다시피 말했다. 그녀는 홍혜주가 희망을 잃은 채 죽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살아만 있다면 기회가 있었다.이런 그녀를 바라보며 홍혜주는 미소를 지었다.“제가 할 수 있을까요?”“네! 제가 장담해요!”온지유는 그녀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혜주 씨도 사랑받으면서 살 수 있어요. 혜주 씨가 좋아하는 예쁜 것도 실컷 해요. 그리고 혜주 씨한테는 친구도 가족도 생길 거예요. 이제는 혼자가 아니에요. 봐요, 저도 있잖아요.”이 말을 들은 홍혜주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항상 바라던 생활이었다.외롭지 않은, 어둠에 가려져 있지 않은 생활... 그녀는 평범한 사람처럼 평범하게 사는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