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되면 한번 만나는 게 어때요?”장다희는 온지유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었다. “여이현 씨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유 씨를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여이현 씨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아야 지유 씨가 시름을 놓죠.”이쪽. 노승아는 여이현의 안전이 걱정되어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녀는 너무 걱정된 나머지 노석명에게 전화를 걸어 여이현의 안부를 물어보았다.노석명은 여이현에게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근심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여전히 걱정되었다. 노승아는 아침이라 피곤하고 졸렸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포착되면 여이현이 돌아온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여이현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노승아는 밀려오는 초조함 때문에 《요골》의 시청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어제 《요골》의 시청률이 아주 높았고 《글로리》의 시청률은 생각보다 좋지 않아 점점 더 참담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소식이 그녀의 정서를 조금이나마 안정시켜주었다. 드디어 그녀가 온지유를 한번 이길 수 있었다. 그녀는 명예든 사랑이든 모두 온지유에게서 빼앗을 생각이다. 무슨 일을 해내든지 그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노승아의 자랑이기도 하다. 오직 여이현의 안위만이 그녀를 골치 아프게 했다. 그녀는 소파에 누운 채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노승아는 여이현이 드디어 돌아온 줄로 알아 기쁜 마음으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돌아왔……”문밖에는 노승아에게 아침을 준비해온 비서가 서 있었다. “승아 씨, 아침을 준비했어요.”노승아는 순간 풀이 죽어 대답했다. “저기 놓으면 돼요.”비서는 아침을 차리며 노승아에게 말을 걸었다. “승아 씨, 오늘 실시간 검색어 봤어요? 시청자들이《글로리》에 대한 반응이 좋아졌던데요. ”노승아는 차가운 목소리로 비웃으며 말했다. “시청자들 반응이 좋아진다고 결과가 달라지나요? 시작할 때는 누구나 실시간 검색어를 사는 거죠. 안 그
노승아는 이대로 가만있지 못했다. 온지유뿐만 아니라 여이현까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안돼, 나가봐야겠어. ”노승아는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비서가 아침을 차려놓고 노승아를 보며 물었다. “승아 씨, 어디 가세요?”“이현 씨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를 찾으러 갈 거에요.”말을 마친 노승아는 옷을 바꾸러 갔다. “아침은요?”“안 먹을 거예요.”외출 준비를 마친 후, 노승아는 가방을 들고 서둘러 집을 떠나서 기사님에게 여이현의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여이현의 집에서 기다려야 그녀는 비교적 안심할 수 있었다. 그가 돌아온다면 첫눈에 그를 볼 수 있었으니까. 여이현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익숙한 새 차가 노승아의 눈에 뜨였다. 그 차는 이전에 온지유가 운전하고 다녔다. 노승아가 아는 바에 따르면 그 차는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선물해준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혼 합의서에 이 차는 포함되지 않았다. 계약에 따라 온지유에게 별장 한 채와 40억이 나누어졌지만 여이현의 전부 재산과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별장 한 채와 40억을 거지에게 베푸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한 노승아는 당연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물건을 가지고 간다면 여이현의 여자친구로서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승아는 열려있는 차창 너머로 조수석에 앉아 있는 온지유를 발견했다. 그녀는 온지유를 꺾고 싶은 마음에 투지가 불타올랐다. 그리고 이 방향은 여이현의 별장으로 가는 길인데 온지유가 왜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지 몰랐다. 노승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차를 불러세웠다. “잠깐 멈추세요.”기사 아저씨는 할 수 없이 차를 멈추었다. 온지유는 차에서 한창 폰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장다희의 제안을 거절했다. 비록 여이현이 걱정되었지만, 그녀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설사 찾으러 간다 해도 무슨 신분으로 만나야 하는가? 그녀는 여이현의 차가운 태도에도 계속 곁에 붙어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온지유는 장다희와 함
“언니!”뒤늦게 도착한 김예진은 양산을 펼치며 달려갔다. 그러나 노승아의 치마는 이미 더러워진 다음이었다.“온지유 씨 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 제가 닦아드릴게요.”그녀는 급하게 휴지를 꺼내 닦기 시작했다.눈을 크게 뜬 채 온지유가 멀어진 방향을 바라보는 노승아는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저 지경이 돼서도 내 앞에서 센 척해? 두고 봐. 내 앞에서 비는 날이 올 거니까.’아직 거리에 있었던 노승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이현 오빠 별장에 가서 기다리자.”장다희는 백미러로 노승아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먼저 도발할 때는 언제고 정색하기는.”온지유는 노승아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그녀는 노승아가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를 먼저 괴롭히는 건 언제나 노승아 쪽이었다.“오늘 날씨 좋네요. 캠핑 가면 참 좋겠어요.”온지유가 태양을 바라보며 말했다.“좋은 생각이에요. 그럼 사람들 불러서 준비할까요? 지유 씨가 빨리 전화해 봐요.”온지유는 핸드폰을 꺼냈다. 오늘 밤 캠핑이라도 가보려고 말이다.이때 인명진이 마침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전화 건너편에서 인명진은 긴장한 목소리로 외쳤다.“차 세워요!”인명진의 목소리에는 자동차 경적 소리도 껴 있었다.온지유는 앞을 살펴봤다. 도로에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명진 씨, 방금 뭐라고요?”“차 세우...”이 순간 온지유는 안색이 확 변하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다희 씨, 차 세워요! 당장!”말하기 바쁘게 쾅 소리와 함께 뒤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도로는 다닐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곧이어 비명도 들리기 시작했다.갑작스런 폭발에 도로에 있던 차들은 정처 없이 밀려다녔다. 두 사람이 탄 차도 마찬가지다. 하도 흔들려서 핸들을 잡기도 어려웠다.장다희가 최대한 핸들을 꽉 잡았는데도 여파는 엄청났다. 브레이크를 밟은 동시에 차는 그냥 미끄러져 나가고 말았다.폭발에 차창 유리는 전부 깨졌다. 엄청난 파워였다. 장다희의 이마에는 유리 조각에 긁힌 상처
기사는 노승아도 쓰러뜨려서 둘러멨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다른 차로 옮겨 타더니 유유히 사라졌다....온지유는 정신을 잃고서도 흔들림을 느꼈다. 구역질도 약간씩 올라왔다.정신 차린 그녀는 자신의 손발이 단단히 묶여 있음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주유소 냄새가 맴돌고 있었다.그녀가 있는 곳은 목제 집이었다. 그녀는 나무 기둥에 묶여 있었는데, 뒤에 사람이 한 명 더 있는 것 같았다.온지유는 힘껏 고개를 돌려서 상대의 옷깃을 봤다. 그리고 금방 누군지 알아차렸다.‘노승아?’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왜 노승아와 함께 납치됐는지 의아했던 것이다.‘여긴 어디지?’당황한 와중에도 온지유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다.노승아도 함께 납치당한 걸 봐서 범인은 그녀가 아니었다. 아니라면 가장 유력한 후보였을 텐데 말이다.두 사람에게 동시에 한이 있거나, 여이현과 연관되어 있거나, 혹은 얼마 전 나타난 여자의 시체와 연관 되어 있거나... 셋 중 하나였다.“누구예요?! 누가 날 납치한 거예요?!”뒤늦게 정신 차린 노승아는 긴장한 기색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그녀는 있는 힘껏 몸부림쳤다.온지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경고했다.“가만히 있어요. 여기 사람 한 명 더 있거든요?”노승아는 이제야 뒤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온지유 씨? 온지유 씨가 날 납치했죠! 날 질투해서 이런 일을 벌인 거죠!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요?”“생각이라는 걸 해보면 안 돼요? 저도 같이 묶여 있거든요?”온지유는 인내심을 잃은 듯 투덜댔다. 노승아는 여전히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쳐냈다.“대체 누가 감히 날 납치한 거예요? 내가 누군지 알아요?”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그녀를 보고 온지유는 어이가 없었다.“독 안에 든 쥐가 찍찍댄다고 해서 누가 들어줄 것 같아요? 괜히 시끄럽게 굴지 말고 가만히 있죠?”노승아는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할 줄 꿈에도 몰랐다. 그녀를 납치할 만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노승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개졌다. 눈앞도 약간 흐릿했다.“그걸로 협박이 될 거로 생각해?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고 있어! 그럼 좀 봐줄 수도 있으니까.”노승아는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온지유는 하도 긴장해서 식은땀에 흠뻑 젖었다. 그녀는 홑몸이 아니었다. 그녀는 임신한 몸이기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넌 아직도 살아있을 줄 몰랐네.”흉터남은 온지유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여이현이 신경 많이 쓴 모양이야.”“그게 여이현 씨랑 무슨 상관이죠? 저희 헤어진 거 몰라요? 살인 충동이라면 제가 더 강할 것 같네요.”흉터남은 또 노승아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네가 좀 똑똑한가 보구나. 자기 아버지랑 아주 똑같네.”온지유가 물었다.“도대체 저는 왜 납치한 거예요? 여이현 씨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랑은 상관없잖아요.”“그래, 상관없지. 여이현이 너랑 헤어진 것도 알고 있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두 년 다 잡아 오는 게 안전하지 않겠어?”흉터남은 아무런 실수도 없어야 했다. 한쪽은 여이현의 아내고, 다른 한쪽은 애인이었다. 실수가 없기 위해서는 양쪽 다 잡아야 했다.더군다나 노승아의 아버지는 그를 함정에 빠지게 했다. 더욱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죽게 되더라도 혼자 죽지는 않을 것이다.“사람들이 쫓아왔어요!”홍혜주는 긴장한 기색으로 달려와서 말했다.“준비를 하려면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해요.”홍혜주를 발견한 온지유는 잠깐 멈칫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그녀는 홍혜주가 왜 이곳에 있는지 몰랐다. 그래도 흉터남이 추격을 피할 수 없다는 것과 이곳에 남아 있다가는 자신도 죽으리라는 것은 알았다.흉터남은 차가운 눈빛으로 홍혜주를 바라보다가 배를 퍽 찼다. 뒤로 쓰러진 홍혜주는 힘겹게 다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인명진은? 너희 둘도 날 배신했지? 이제 다 컸다고 나는 안중에도 없는 거 아니야?”“저는 죽어서도 아버지를 따를 거예요. 하지만 명진이는 잘 모르겠어요. 만약 죽이라
“닥쳐!”홍혜주는 차갑게 말을 이었다.“난 생명의 은인에게 목숨을 바칠 뿐이야.”“미쳤어? 뭐가 됐든 이제 끝장난 사람이야. 넌 개처럼 이용당하고 있다고!”“입 막아.”홍혜주의 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누군가 악취 나는 걸레를 가져와 노승아의 입을 막았다.“읍!”그 역겨운 냄새에 노승아는 구역질이 났지만, 어떻게 벗어날 수 없었다.홍혜주는 온지유를 바라보았다. 온지유도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에서는 중요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흉터남을 돕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를 도우려 하고 있었다.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홍혜주는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그런데도 온지유는 마음이 불안했다. 홍혜주가 그녀를 위해 해독제를 찾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지난번 홍혜주가 말했던 것처럼, 그녀를 돕겠다고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그러나 해독제가 진짜 흉터남의 손에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그녀는 홍혜주가 이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를 바랐다.온지유는 홍혜주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를 가볍게 손을 뿌리치고 나갔다.밖에서는 총성과 폭발음, 그리고 비명이 섞여 들려왔다.온지유는 이런 장면을 처음 봤다. 몸이 후들후들 떨리더니 얼굴은 창백해졌다. 흉터남과 부하들은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이때 홍혜주가 말했다.“다시 기둥에 묶을게요.”온지유와 노승아는 마당의 두 기둥에 묶였다.“하하하하!”흉터남은 죽음도 두렵지 않은 듯 웃음을 터뜨렸다.“이런 날이 올 줄은 또 몰랐군.”그는 마당의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발걸음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한 무리의 사람이 안으로 들어와 그를 향해 총을 겨눴다.흉터남의 부하들도 마찬가지로 총을 들고 그들을 겨냥했다. 흉터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인질이 있었기에 안 되겠다 싶으면 다 같이 죽을 생각이었다.총을 바라보고 있자니 온지유는 피비린내가 맡아지는 것 같아서 구역질이 났다. 마음속에서는 공포가
온지유는 추호도 버둥거리지 않았다. 답을 알기에 두렵지 않은 것이었다.그녀는 여이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인파 속에서도 한눈에 알리는 우월한 남자였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녀가 넘볼 수 없었다.기분 탓인지 오늘따라 여이현이 낯설어 보이기도 했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를 보호해 줄 거라는 느낌도, 그녀를 사랑한다는 느낌도 없었다.그녀는 한없는 실망 속으로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여이현은 고민되는 것이 있는 듯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럴 수록 온지유는 더욱 실망할 뿐이었다.“빨리 골라! 안 그러면 둘 다 죽여버릴 거니까!”흉터남은 마음이 급했다. 그는 주사기를 휘적대며 선택을 강요했다.너무 오래 묶여 있었던 온지유는 몸이 저리기 시작했다. 임신 때문에 원래도 잘 안 올라오던 숨이 더 심해졌다. 안색은 아주 창백했다.노승아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누가 봐도 지켜주고 싶은 불쌍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여이현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다.여이현은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한 사람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가리킨 사람은 노승아였다.온지유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반대로 노승아는 상기된 표정으로 여이현을 바라봤다. 아주 행복한 모습이었다.‘이현 오빠가 나를 선택했어! 나를 살려줬다고! 이현 오빠는 나를 좋아하는 거야!’그녀는 더욱 힘차게 몸부림쳤다. 이제 드디어 풀려날 수 있는 줄 알았다.그러나...“하하하!”흉터남이 섬뜩한 웃음소리를 냈다. 곧 온지유의 밧줄이 풀리더니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그녀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홍혜주가 움찔했다. 그러나 아직은 움직이지 않고 주먹만 움켜쥐었다.온지유는 여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여이현이 자신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풀려나서 어리둥절했던 것이다.그녀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이성을 잃은 흉터남을 바라봤다. 흉터남의 표적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는 독기 서린 눈빛으로 여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자신이 죽는 것보다 사랑하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