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온지유가 물었다.“나랑 이혼하기 위해 배 속의 아이가 나민우 아이라는 거짓말을 했잖아.”온지유가 여이현에게 거짓말을 한 횟수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정말로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녀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았다.나민우의 아이라는 말도 애초에 그녀가 한 말이 아니었다.그녀는 인정한 적도 없었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민우 아이가 아니면, 이현 씨 아이겠어요?”“석이가 대체 누구지?”여이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온지유, 그 사람이 정말로 존재하기는 해? 아니면 일부러 내 화를 돋우기 위해 지어낸 거야?”그는 오랫동안 그녀가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았다.그녀가 어릴 때부터 만났던 사람부터 지금까지 전부 알아보았지만, 석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어쩌면 어릴 때 애칭으로 불렀던 이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알아낸 것이 없었다.그의 말을 들은 온지유는 순간 긴장해졌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마주 잡았다.그녀는 이 비밀을 영원히 마음속 깊은 곳에 숨기고 살아야 하나 생각했다.만약 정말로 그녀에게 신경을 썼다면 그는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설령 말을 해준다고 해도 딱히 상관없었다.어차피 기억 못 하는 것 같으니 그러면 영원히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온지유가 말했다.“네, 진짜 존재하는 사람이에요. 전 이현 씨를 속인 적 없어요.”그녀는 여이현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거리가 조금 전보다 가깝지는 않았지만, 말이 조금 많아졌다.“석이는 날 구해준 적 있었어요. 그때 날 지키기 위해 대신 총에 맞았죠. 그 순간부터 석이는 나에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영웅 같은 존재가 되었어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여이현은 진지하게 들으며 그녀에게서 ‘석이'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했다.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면서 결국 이를 빠득 갈고 말았다.“그만 말해!”그녀와 다른 남자 사이에 이야기를 들으니 그 남자를 어떻게 죽여야 할까, 영원히
온지유는 장담했다. 그녀는 어느 여름 방학이던지 사라졌었던 적이 없었다.여이현은 다소 의아했다.사라졌었던 여름 방학을 그녀가 잊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그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거의 도착했네요. 그냥 여기서 세워주세요.”배진호는 부드럽게 차를 세웠다.온지유는 차에서 내렸다.“갈게요. 이현 씨도 일찍 돌아가요.”여이현이 그녀를 데려다준 것이니 그래도 예의상의 말을 해야 했다.여이현은 여전히 머리가 아팠다. 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겼던 것일까.온지유는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긴 모습에 먼저 걸음을 옮겨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온지유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머릿속에 온통 방금 온지유가 했던 말뿐이었기 때문이다.“온지유 뒷조사, 제대로 한 거 맞아요?”여이현이 물었다.이 일은 배진호에게 맡겼다. 석이를 찾기 위해 배진호도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알아보았다.“네, 빠진 것 하나도 없이 전부 알아보았습니다. 어쩌면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서 사모님께서 잊으신 게 아닐까요?”“16살 때의 일을 배 비서는 기억 못 할 것 같아요?”여이현이 물었다.“전 기억합니다만...”배진호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럼 왜 온지유는 못 기억하는 거죠?”여이현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눈빛도 어둡게 가라앉았다.“지유의 사라진 기억 속에 석이가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어요. 대체 지유가 그때의 일을 기억 못 하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가 잘못 알아본 걸까요.”두 가지 가능성 모두 있었다.배진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사모님과 나민우 씨가 오랜 동창이라고 했으니 나민우 씨라면 아마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배진호가 말했다.“전 나민우 씨가 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모님께서 전에 말했다시피 나민우 씨와 다시 만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저 동창으로만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여이현도 잘 알고 있었다.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하면 화가 났던 이유는
여이현을 언급하자 온지유는 아주 큰 의혹이 생겼다.핸드폰 화면을 보던 그녀는 한참 고민에 빠졌다.그래도 궁금증을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녀가 물었다.[엄마, 혹시 고등학생 때 여름 방학에 제가 집에 없었던 적이 있어요?]여이현이 그녀에게 이런 의혹을 심어주었으니 그녀도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다.정미리는 한참 지나도 답장하지 않았다.온지유는 정미리의 답장만 기다렸다.조금 전까지 계속 대화를 주고받던 사람이 갑자기 조용해지니 그녀는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10분이 지난 후.정미리는 드디어 문자를 보냈다.[누가 그런 말을 한 거야?]온지유는 불 확신한 어투로 말했다.[아녜요.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그런 일 없었어.]정미리가 말했다.[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집에 있었어. 널 교육하면서 키운 사람도 나인데 어떻게 집에 없을 수 있겠니? 그러니까 괜히 이상한 사람한테서 이상한 소리 듣고 믿지 마!]온지유도 그렇게 생각했다.그녀의 친척도 전부 같은 지역에서 살았다.설령 친척 집에서 지냈다고 해도 한 달 넘게 사라졌을 수는 없었다.더구나 그녀의 집안은 유서가 깊은 집안은 아니었지만, 가정교육은 엄했다.온지유도 더는 이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얼른 씻고 누웠다....한편 여이현은 서승만 교장의 집으로 찾아왔다.서승만은 이미 쉬고 있었던 상태였지만 여이현이 왔다는 소식에 겉옷을 챙겨입고 문을 열어주었다.여이현을 본 서승만은 열정적으로 반겼다.“여 대표님께서 이 밤에 어쩐 일로 오셨어요? 오신다고 미리 말씀하셨으면 저도 일찍 잠자리에 들지 않았을 텐데.”그는 얼른 여이현을 집안으로 들이며 도우미에게 차를 내오라고 했다.“죄송합니다. 이렇게 늦은 밤에 찾아와서 실례했네요.”여이현은 안으로 들어가며 예의 있게 말했다.“실례라니요, 괜찮습니다.”서승만이 말했다.“저녁은 드셨어요? 아니면 야식이라도 드실래요? 우리 집엔 뭐든 다 있답니다.”“괜찮습니다.”여이현이 말을 이었다.“사실은 궁금한 것이 있
한참 지난 후 서승만은 시선을 돌려 여이현을 보았다. 놀라움의 감정은 뜻밖으로 변했고 그가 왜 온지유의 일에 신경 쓰는지 이해가 안 되는 얼굴로 물었다.“지유한테 왜 갑자기 신경 쓰시는 거죠? 만약 납치되었던 학생이 지유가 아니라고 해도 여 대표님께 중요한 일인가요?”서승만은 그에 대한 의심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고 딱히 나쁜 마음도 품지 않았다.여이현의 날카로웠던 눈빛도 다소 풀어지며 담담하게 말했다.“한 사건을 알아보다가 우연히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교장님께 이 사건에 대해 들어보면서 의혹을 풀어보려고 한 거고요. 만약 납치된 학생이 온지유가 아니었다면, 온지유는 왜 이 여학생이 자기인 줄 알고 있는 거죠? 심지어 이름도 똑같고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면 온지유는 왜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요?”서승만의 안색이 변했다.“교장님, 이 사건은 당시 교장님께서 관리하던 학교에서 벌어진 거잖아요.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여이현은 합당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아니면 그 사건 속에 더 큰 음모가 숨어 있었는지 말이다.서승만은 긴 한숨을 내쉬곤 자세를 고쳐 앉아 솔직하게 말했다.“사실 제가 해답을 드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드릴 순 있지요.”여이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서승만은 사진을 들며 계속 말을 이었다.“확실히 지유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납치된 학생과 지유는 이름이 똑같지요. 이 사건을 숨긴 것도 지유 부모님의 요구이기도 했습니다.”“지유 부모님의 요구이기도 했다고요?”여이현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왜 숨겨달라고 한 거죠?”서승만이 말했다.“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지유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지유 학생의 부모님이 직접 저를 찾아와 부탁하더군요. 제발 이 사건에 대해 말하지 말아 달라면서 말이죠. 이 사건을 숨기기만 한다면 지유를 납치 피해자로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지유의 기억이 왜 완전하지 않은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서승만은 놀란 눈치였다. 두 사람이 부부일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두 사람이 그런 관계일 줄은 몰랐네요. 전에 제가 무슨 말을 했든 부디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길 바랍니다.”그는 자신이 온지유와 나민우를 이어주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리고 자신의 딸과 여이현을 이어주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신경 쓰지 않습니다.”여이현이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서승만은 털털한 성격이었던지라 직접 두 사람을 배웅했다....어느덧 이미 새벽이 되었다.침대에 누워있던 온지유는 배가 고픈 느낌이 들었다.최근 그녀는 자주 배가 고팠다.입맛도 변했다. 짠 음식과 매운 음식을 즐겨 먹게 되었다.예전의 그녀는 매운 것이라면 전혀 못 먹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하지만 졸렸던 그녀는 움직이기 싫었고 어떻게든 잠을 이루려 했다.이불을 둘둘 말아 안은 채 옆으로 돌아누웠다.이때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그녀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 그곳엔 여이현이 서 있었다.온지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여긴 왜 또 왔어요?”온지유는 그가 이미 집으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했다.여이현이 말했다.“네가 걱정되어서 다시 왔어.”“집에 있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 거예요?”여이현은 그윽한 눈길로 그녀의 배를 보았다.“임신했잖아. 임산부 혼자 집에 있어도 위험해. 뭐든 조심해야 한다고. 넘어져도, 배곯고 있어도, 옆에 사람이 없어도 안 돼.”그녀는 혼자 살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살펴 주는 사람은 있었다.말을 마친 뒤, 여이현은 바로 들어와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들어 보여주었다.이미 냄새를 맡은 온지유는 군침이 돌았다.“마라탕이에요?”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응.”어느새 주방까지 들어온 그는 식탁 위에 포장지를 뜯고 젓가락을 온지유에게 건넸다.“와서 먹어.”온지유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여이현은 이런 음식을 먹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평상시 눈길도
그의 말에 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행여나 또 지레 착각하게 될까 봐 그의 시선도 피했다.“신경 쓰인다고 나한테 맞춰줄 수 있다고요? 대체 왜 나한테 신경을 쓰는 건데요?”여이현은 그녀를 보았다.“넌 내 아내니까.”온지유는 입술을 살짝 틀어 물었다. 젓가락으로 마라탕을 휘저었지만 먹지 않았다.“이미 이혼하기로 얘기 끝난 거 아니었어요? 단지 아내라는 이유로 날 위해 변할 수도 있다니요. 그러면 예전에는 왜 날 위해 바뀌지 않았던 건데요?!”여이현은 그녀를 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지유는 그의 시선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그가 한참 지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도 기다려주지 않고 마라탕을 먹었다.“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아.”“컥, 켁...”담담한 그의 한마디에 온지유는 그만 사레가 들고 말았다. 매콤한 국물이 그녀의 식도를 자극하며 괴롭기 시작했다.그녀의 모습을 본 여이현도 순간 괴로웠다. 황급히 그녀에게 물을 따라 주었다.“괜찮아? 물 좀 마셔!”온지유는 눈물이 났다. 눈앞이 흐려지며 사례에 걸려 눈물이 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눈물이 나는 것인지 순간 알 수 없었다.그렇게 오래 기다렸던 말을 이제야 듣게 되었다.하지만 생각처럼 기쁘진 않았다.그녀는 물을 마셨다.그럼에도 여전히 목이 괴로웠고 콜록콜록 댔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말이다.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얼른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쓸어 내려주었다.한참 지나서야 진정되었다.온지유는 진정하고 난 뒤에야 그의 말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날 좋아하는 것 같다고?'온지유는 여이현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괜찮아?”여이현은 그녀가 걱정되어 바로 상태를 물었다.온지유는 놀란 눈빛으로 여이현을 보았다.“방금 뭐라고 한 거예요?”여이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다시 한번 말했다.“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다고.”온지유는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만약 예
온지유는 침대에 앉아 문을 빤히 보았다. 여이현이 문밖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나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가슴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머릿속엔 여전히 그가 했던 고백의 말이 떠올랐다.이런 일에서 그녀는 아직 겁쟁이였다. 자신의 진심을 보여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마음은 조급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또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여이현이 방으로 들어왔다.그녀는 멍하니 그를 보았다. 그를 처음 본 순간처럼 말이다. 그때와 조금 다른 점이라면 대놓고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여이현은 우유를 들고 들어와 그녀의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자기 전에 우유 한잔 마셔. 건장에 좋아. 달달한 우유는 어느 정도 스트레스를 완화할 수 있대.”온지유는 자신의 앞으로 내민 우유를 보다가 여이현의 핏줄이 선명한 팔을 보았다. 순간 멈칫했다. 꼭 어디서 본 장면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녀는 최근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한곳에 집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알 수 없는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머리가 아팠다.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감쌌다.여이현은 좋지 않은 그녀의 안색을 보며 물었다.“아파?”온지유는 고통이 사라진 후에 답했다.“괜찮아요.”그녀는 얼른 우유 잔을 들어 꿀꺽꿀꺽 마시면서 흥분했던 마음을 달랬다.여이현은 그런 그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참 지나서야 물었다.“지유야, 중학교 때 혹시 납치당 한 적 없어?”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잔을 꽉 잡았다. 살짝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꼭 비밀을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다.“이현 씨...”온지유는 더욱 긴장해졌다. ‘혹시 뭐라도 알아낸 건가?'“그건 왜 물어보는데요? 딱히 큰 비밀은 아니었어요.”여이현은 생각에 잠긴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신의 기억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모르는 것 같았다.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건 과연 좋은 걸까, 나쁜 일인 걸까?온지유의 부모도 그녀가 다른 사람의 기억으로 착각하고
정말 모르는 듯한 여이현의 모습에 온지유는 다소 실망을 느꼈다.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녜요.”여이현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온지유는 이내 몸을 돌리면서 더는 여이현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그녀는 방금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주 담담한 얼굴이었다.그는 대체 왜 석이가 본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걸까.설마 그때의 일을 깔끔하게 잊은 걸까?설령 그렇다고 해도 예전에 썼던 이름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겼던 걸까?온지유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해하기 힘들었고 괜히 머리만 아팠다.눈을 감은 그녀는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여이현은 이불을 잘 정리해준 뒤 그녀의 모습을 한참 빤히 보았다. 쌕쌕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는 방을 나갔다.핸드폰을 꺼내니 몇십 통의 부재중이 와 있었다.그는 엄숙한 얼굴로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회사 주가가 노승아 씨 사건으로 계속 하락하고 있습니다. 전화해도 안 받으시던데 저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얼른 방법을 생각해 주셔야죠.”여이현은 이 일을 해결할 시간이 없었다.“노승아 쪽은 소식 있어요?”“없습니다. 까발리는 기사가 난 뒤 회사와 연락도 하지 않았습니다.”여이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정을 내렸다.“노승아가 직접 지금 사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럼 계약을 해지하세요.”핸드폰 너머에 있던 사람은 당황했다.“대표님, 정말로 계약을 해지하시게요?”여이현은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차갑게 말했다.“노승아의 단독행동은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집안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젠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죠.”“네, 알겠습니다.”노승아의 기사는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다주었다.그녀와 손절하는 것이 지금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노승아도 어떤 일은 해야 하고, 어떤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여이현은 이미 최선을 다해 은혜를 갚았기에 더는 노
여학생이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달리기를 하던 중 과다 출혈이 일어난 것이었다.그녀는 생리 기간이라 선생님에게 달리기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선생님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무리하게 달리기를 하다가 출혈이 심해진 데다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학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한 건 일부일 뿐이고, 학생과 학부모 쪽 책임도 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달려도 멀쩡한데, 왜 그 여학생만 그랬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양시은은 사건 자료를 살펴보면서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이런 파렴치한 학교가 다 있네!”나도현이 달래듯 말을 건넸다.“진정해.”양시은은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400만 원으로 한 생명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 황당하기는 해도 실존한다. 현실에서는 정말 흔히 일어나고 있지만 법에 명시된 조항이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다.“게다가 그 여자애 학교에서 전학한 뒤로 적응도 못 하고 왕따까지 당했어. 여기저기 호소해 봐도 해결이 안 됐고 집에서도 신경을 안 썼대.”그렇게 말하던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비슷한 일이 자꾸 생기는데 왜 명확한 규정 하나 안 만들어지는 걸까?”왕따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문제였다. 심지어 매년 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나도현은 시선을 살짝 떨구며 깊은 무력감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정해. 이런 일에는 얽힌 게 생각보다 많이 있어. 그래도 좋게 생각해 보자. 이번에 네가 변론에서 이기면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 그럼 좀 나아질 수도 있어.”“응.”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그 사이, 나도현도 일하기 시작했지만 둘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묘한 평온을 공유했다. 창문 너머
“이 법률 자료들은 누구 겁니까?”양시은이 대답했다.“제 거예요. 요즘 어떤 대회에 참가 중이라서요.”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은 자료를 돌려주며 회사 내에 이런 자료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마디 덧붙이고는 그냥 돌아갔다.그러자 그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아니, 제대로 조사 안 해본 겁니까? 저 사람은 변호사였다고요! 변호사가 어떻게 대표가 될 수 있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도현이 서 있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나도현 씨의 변호사 자격은 이미 오래전에 말소됐습니다.”남자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했다.“그, 그럴 리가... 그건 말이 안 돼요!”“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나도현 씨가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하러 왔을 때, 일부 서류를 저희 쪽에서도 처리해 줬어요.”경찰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건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나도현은 워낙 유명한 변호사였기에 변호사 자격을 정리할 때도 꽤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경찰들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이럴 수가... 이럴 수가...”경찰들은 허탕 치고 가게 된 것이 불만인 듯 돌아가기 전 남자를 한 번 더 나무랐다.“다음부터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신고하지 마세요.”이 한마디로 그 남자는 체면이 말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양시은은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이제 믿겠어요? 아직도 못 믿겠다면 직접 로펌에 가도 돼요. 거기선 다들 증언해 줄 테니. 만약 믿었다면 이전에 한 약속 이행 좀 부탁드릴게요.”남자는 약속을 어기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엄청났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발을 빼려 한다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질 게 뻔했다.결국 그는 마지못해 공개 해명을 올렸다. 그 덕분에 온라인에서 막 불붙으려던 논란은 재빨리 사그라들었고, 나도현
그렇다고 해서 나도현은 양시은이 자신을 대신해 앞장서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그는 양시은을 뒤로 끌어당기며 말을 시작한 무리에게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그럼 경찰 불러서 조사해 보죠.”양시은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물론 잘못이 없으면 두려울 이유도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들은 애초에 시비를 걸 목적으로 왔을 게 뻔했다. 혹시 뒤에서 상대편이 사주한 걸 수도 있고,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해도 여론몰이를 해서 나도현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도현 씨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려 하다니...’양시은은 감동스러우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손길이 양시은을 제지하는 듯했다.“왜 신고 안 해요? 이제 와서 겁내는 거예요?”나도현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눈썹을 치켜떴다. 여유로우면서도 강압적인 기세가 느껴졌다.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이던 이가 가장 먼저 그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 치고, 곧 스스로를 다독이듯 중얼거렸다.“무, 무서울 건 없지. 어차피 다 허세일 뿐이야. 그렇게 짧은 시간에 증거를 없앨 수 있었겠어...”그러면서 나도현을 노려보았다.“좋아요. 지금 바로 신고하죠. 다만 약속하세요.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면 뒤에 있는 저 여자는 준결승에서 사퇴해야 해요.”“당신들 같은 사람이 대회에 나오는 건 인정할 수 없어요.”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조건을 바꾸죠. 이건 제 일이니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요.”자신이야 어떻게 되든 괜찮지만 양시은이 휘말리는 건 견딜 수 없었다. 그녀가 이 대회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그 말을 들은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겁난다면 그냥 겁난다고 하지 그래요?”“그렇게 하죠.”“시은아, 너...”나도현이 말을 잇기도 전에 양시은이 괜찮다는 눈빛을 건넨 뒤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 조건에 응할게요. 다만 저도 약속을 받아야겠어요
“위에 CCTV도 있어요. 임다혜 씨를 위해 화풀이하려는 거라면 이렇게 말씀드리죠. 나씨 가문 일이라고 하든, 임씨 가문 일이라고 하든, 외부인인 단미주 씨가 낄 자리는 없어요. 이 술 한 잔으로 경고하는 거예요. 제 한계를 시험하려 들지 마요.”나도현의 한계란 곧 양시은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녀를 괴롭히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여러분 다 들으셨죠? 술로 저를 경고하겠다네요. 여러분은 이게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몇 마디 했다고 이 지경을 만드는 게 말이나 돼요? 나도현 씨 같은 사람은 분명히 벌을 받게 돼 있어요! 다들 궁금하지 않나요? 변호사로 잘 나가던 사람이 왜 갑자기 회사를 운영하겠어요. 변호사가 상업에 뛰어들면 안 된다는 건 기본 상식이에요.”단미주는 나도현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물러나긴 억울했다. 그 억울함은 임다혜를 대신한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그녀는 한평생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굴욕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나도현이 무슨 권리로 함부로 술을 끼얹느냐는 분노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그 말이 떨어지자 장내가 일제히 술렁거렸다.“그러고 보니 나도현 씨 전에는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왜 갑자기 진로를 바꿨지? 설마 내막이 있는 거 아냐?”“그야 뻔하죠. 뒷배경 없이 어떻게 변호사 접고 곧장 대표 자리에 오르겠어요?”“변호사라는 직업 특성상 인맥도 많고 나씨 가문의 오랜 기반도 있잖아요. 뭐든 상상 초월인 거죠.”“돈 많고 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원하는 걸 얻기 마련이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나도현은 양시은을 데리고 세상 구경을 시키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곳은 어느새 나도현을 몰아세우는 비난의 장소로 바뀌어 버렸다. 사람들 태도가 하나같이 막무가내였다.양시은은 나도현을 끌고 나가려 했으나, 그가 오히려 양시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나도현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제 직종 변경은 모두 절차에 따른 겁니다. 변호사 자격증도 이미 말소했고, 나
양시은은 자신과 나도현의 관계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뭐라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두 사람이 오래갈 것 같아요? 둘 사이에는 애초에 신분 격차가 있어요. 나도현 씨가 정말 신경을 안 썼다면 이렇게 자주 연회에 왔겠어요? 결국에는 신경 쓰고 있다는 거겠죠.”말투에서 은근히 도발적인 기색이 풍겼다. 상대는 우아하고 고상해 보였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양시은은 낮은 목소리로 비꼬듯 대꾸했다.“도현 씨가 신경 쓴다고 해도, 그건 저희 문제지 그쪽과는 상관없잖아요? 그리고 이런 말, 정말 당당하면 도현 씨 앞에서도 해봐요. 근데 저만 붙잡고 이러는 거 보니까 그럴 용기는 없나 보네요.”양시은은 이 상황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낯선 여자가 모른다고 해도 그녀는 잘 알았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얼마나 헌신적인지를 말이다.“나도현 씨 앞에서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어요. 그렇게까지 안 한 건 당신이 눈치 있는 사람인 줄 알아서였는데... 보다시피 아니네요.”여자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섰다.마침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나도현은 곧장 움직였다. 양시은에게 시비를 건 여자가 임다혜의 친구인 단미주라는 걸 바로 알아챘기 때문이다.단미주가 양시은의 앞에 나타난 목적은 뻔했다.그렇게 생각한 나도현은 대화를 나누던 무리에서 벗어나 양시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는 잠시 망설이지도 않고 양시은과 함께 곧장 단미주를 찾아갔다. 단미주는 나도현이 나타난 걸 보자마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당신 고자질하는 취미도 있었네요.”단미주는 나도현이 자신의 앞에 온 이유가 양시은이 무언가 일러바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직접 찾아올 리 없다고 여긴 것이다.“시은이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제가 직접 본 거거든요. 남 험담하는 게 그렇게 좋으면 재능 살릴 만한 직업이라도 구해줄까요, 단미주 씨?”나도현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서빙 트레이에 있던 술잔을 집어 들어 단미주의 얼굴에 그
나도현이 양시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이현이네랑 만났어. 시은아, 내일 나랑 같이 연회에 가지 않을래?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양시은에게 상류층 행사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짜 중시하는 건 나도현의 곁에 함께 있는 일뿐이었다.하지만 나도현은 그녀에게 세상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하고 싶었고, 가능한 모든 인맥과 자원을 총동원해 그녀의 앞길을 활짝 열어 주고자 했다. 양시은은 지금 이 작은 공간에서 조용히 지내는 편이 더 좋은데도 말이다.“난 지금으로 충분해. 연회 같은 거 별로 관심도 없어. 그냥 안 가면 안 될까?”양시은은 차라리 하민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종종 별이도 만나서 둘이 친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당연히 네 의견이 우선이야. 하지만 앞으로 점점 더 큰 자리에 나가야 하는 일이 많아질 텐데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알았어. 먼저 샤워부터 해. 내가 비타민C 챙겨둘게.”이미 나도현이 결정한 듯 보였기에 양시은도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나도현이 푹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나도현은 그녀를 살짝 끌어안고 속삭였다.“난 네가 아이를 하나 더 낳아주면 좋겠지만 출산은 고통스럽지. 그리고 우리가 이현이네랑 같은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일까 봐 좀 꺼려지기도 해. 우선 네가 좀 더 편하게 이 생활을 누리면 좋겠어. 다른 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자.”양시은이 예전에 겪었던 삶은 너무 힘겨웠다. 이제는 일단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혹시 나중에 정말 원하게 되면 무슨 일이든 해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응, 다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나도현을 사랑했고, 당연히 그의 아이를 낳는 일도 기쁘게 여겼다. 예전에 둘이 떨어졌을 때도 아이를 기어코 낳은 건 그를 향한 마음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고 잠들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다음 날, 나도현은 양시은을 데리고
지석훈과 최주하가 동시에 나도현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결혼까지 다 해놓고 그러냐. 하여간 너도 참 대단하다.”여이현은 나도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미 애도 있는데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주면 되는 거야. 게다가 네 와이프 지유랑 같이 있는 거 보니까 괜찮던데?”나도현은 최근 양시은의 상태를 떠올렸다.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하게 된 뒤로는 이전처럼 피곤해 보이지 않아 상태가 훨씬 낫기는 했다.지석훈이 끼어들었다.“나 다음 달 지방 출장 가야 해서 오늘이 아니었으면 못 올 뻔했어.”“나도 내일 해외 나가야 해.”최주하도 맞장구쳤다.그렇게 짬을 내서 다 같이 모인 것이다.여이현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도현이 놀리다가 너희도 똑같이 될 줄 알아. 너희는 언제쯤 가정 꾸리고 애 낳을 건데? 우리 애들 중학생 될 때까지도 결혼 안 하고 이러고 있을 거야?”그들은 이미 서른을 훌쩍 넘겼다. 여이현은 온지유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서부터 안정을 선호하게 되었다.하지만 최주하는 달랐다.“좋아하는 사람이 없는데 아무나 붙잡고 결혼할 수는 없잖아.”지석훈도 거들었다.“여이현처럼 지유 씨랑 먼저 결혼해 놓고 천천히 좋아하게 되는 쪽도, 나도현처럼 재회한 뒤 오해로 얽히고설키는 쪽도, 내 취향은 아냐.”그는 결혼에 전혀 흥미가 없다는 태도였다.“결혼해서 뭐 해? 맨날 아내랑 애들만 신경 쓰게 되잖아. 난 지금 일하는 게 더 재밌어. 인생이 꼭 결혼이 전부는 아니지.”솔직히 말해서, 그는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결혼이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의문이었다.매일 아내와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일하는 게 훨씬 더 매력적이지 않나. 게다가 인생이 결혼만이 전부는 아니었다.최주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석훈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나도 그렇게 생각해. 둘이 결혼했다고 우리까지 끌어들이려는 것 같아.”“뭐야, 네 명이 아니면 못 하는 거라도 있어?”최주하는 여
“훌륭합니다. 양시은 변호사는 법 조항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이 인상 깊네요. 주장도 명확하고 논리 정연해서, 이번 사건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줬어요.”다른 심사위원들도 잇달아 동의하며 양시은의 변론을 높이 평가했다.대회가 끝난 뒤, 양시은은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탈락한 여성 변호사가 갑자기 주먹을 쥐고 외쳤다.“이건 불공평합니다.”조금 전 무대에서 사용했던 마이크가 꺼지지 않았던 터라, 그 소리는 대회장 안팎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이번 변론은 양시은 변호사 쪽이 훨씬 수월하게 짜여 있습니다. 게다가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까지 있는 데 왜 참가 자격을 박탈하지 않은 거죠?”그녀의 말에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양시은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표정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상황을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양시은의 목소리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저는 어떤 특혜도 받지 않았어요. 모든 절차는 대회 운영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거쳤고, 온라인상의 소문은 실력 있는 사람을 함부로 정의하지 못한다고 믿습니다.”여성 변호사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그래도 지금 누리는 편의가 전부 다 나도현 변호사 덕분이잖아요. 이게 뒤를 봐주는 게 아니면 뭐겠어요?”양시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나도현 변호사는 대회의 스폰서 중 한 명이고, 스폰서가 추가로 한 명을 뽑을 수 있다는 건 공개된 조항이에요. 그건 운영위원회의 결정이고, 저는 그 범위 안에서 경쟁했을 뿐이죠. 만약 이게 뒤를 봐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스폰서의 추천을 받는 모든 참가자를 그렇게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요?”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양시은의 말은 많은 이들에게도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다.“게다가 대회 중 제가 보여 준 실력은 심사위원과 관중들이 다 지켜봤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결과가 아니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양시은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곧 오늘 대회가 시작되겠네요. 저는 제가 가진 전문성으로 끝까지 가볼 거예요. 설령 못 간다고 해도 떳떳하게 임할 거고요.”그 말을 남기고 양시은은 돌아섰다.곧이어 대회가 시작됐다. 유언비어 때문인지, 방청석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편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무시하는 기색까지 드러냈다.그러나 양시은은 전혀 개의치 않고 법 조항을 들고 무대에 올라 당당하게 변론을 펼쳤다.“이모 씨가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 증언에 따르면 가해자는 여전히 행동 능력이 있었고 침해 행위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모 씨의 생존을 위한 반항은 정당방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봅니다.”상대 변호사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반박했다.“법의학자가 부검한 결과, 피해자는 당시 이미 행동 능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이모 씨가 공격을 이어간 건 방어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죠.”양시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이모 씨는 체구가 작아서 키가 160도 안 되는 반면 가해자는 180에 달합니다. 체격 차이가 꽤 크기 때문에 가해자가 완전히 재공격 능력을 잃었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손을 뗄 수 없었겠죠? 이모 씨에게 가해자를 고의로 해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양시은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사건에 대한 이해와 법 조항 활용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 줬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전문성에 저절로 감탄하는 분위기였다.상대 변호사 역시 그녀의 논리에 흔들린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반박했다.“그래도 이모 씨의 행동은 필요한 한도를 이미 넘어섰습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가상 판사가 기침을 하며 둘 사이의 공방을 제지했다.“핵심은 이모 씨의 행동에 주관적 고의가 있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입니다.”양시은은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실무에서 주관적 고의 판단은 언제나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였기 때문이다.“이모 씨는 가해자가 이미 행동 불능 상태인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양시은은 차분하게 설명했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