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그녀가 버둥거려도 끄떡하지 않았다.“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니까 나도 이러는 수밖에 없어.”온지유는 다소 화가 났다.“강도예요? 왜 사람을 자꾸 힘들게 만드는데요!”“감정적으로 일을 해결하는 너보단 나아.”“내가 언제 감정적으로 일을 해결했는데요?”그녀는 바로 반박했다.여이현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잊었어? 지난번 무리한 탓에 하마터면 유산할 뻔한 거? 오늘도 노승아의 일로 바쁘게 돌아다녔잖아.”그의 말에 온지유은 눈을 내리깔았고 냉정함을 되찾았다.“그게 내가 택시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여이현은 그녀를 자신의 차가 있는 쪽까지 데리고 온 후에야 내려주면서 그윽한 눈길로 말했다.“택시에서 배가 아프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방금도 배가 아팠었잖아. 그런데 혼자 알아서 가겠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마음 놓고 그러라고 하겠어.”그녀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그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온지유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여이현이 자신을 걱정하며 관심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순간의 감정일까 봐 두려웠다.예전에 그가 그녀에게 했던 일을 그녀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고 한번 생긴 상처는 지워질 리가 없었다.여하튼 여이현은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방금 절 확 끌어당겨서 아픈 것뿐이에요. 제 몸엔 아무 이상도 없어요. 한번 그런 일이 있었으니 두 번째는 없을 거예요. 저도 푹 쉬려고 노력하고 있거든요.”여이현은 그럼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고 점점 단호해졌다.“그래도 이미 차 옆까지 왔으니까 나한테 또 안기고 싶은 거 아니라면 그냥 얌전히 타.”온지유는 여이현의 눈을 빤히 보았다. 그는 눈빛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뭐든 할 수 있다고.더는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얌전히 차에 올라탔다.운전석에 있던 배진호는 두 사람의 말다툼을 전부 보고 있었다. 비록 두 사람의 사이가 안 좋다고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더 가까워진 것 같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온지유가 물었다.“나랑 이혼하기 위해 배 속의 아이가 나민우 아이라는 거짓말을 했잖아.”온지유가 여이현에게 거짓말을 한 횟수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정말로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녀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았다.나민우의 아이라는 말도 애초에 그녀가 한 말이 아니었다.그녀는 인정한 적도 없었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민우 아이가 아니면, 이현 씨 아이겠어요?”“석이가 대체 누구지?”여이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온지유, 그 사람이 정말로 존재하기는 해? 아니면 일부러 내 화를 돋우기 위해 지어낸 거야?”그는 오랫동안 그녀가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았다.그녀가 어릴 때부터 만났던 사람부터 지금까지 전부 알아보았지만, 석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어쩌면 어릴 때 애칭으로 불렀던 이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알아낸 것이 없었다.그의 말을 들은 온지유는 순간 긴장해졌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마주 잡았다.그녀는 이 비밀을 영원히 마음속 깊은 곳에 숨기고 살아야 하나 생각했다.만약 정말로 그녀에게 신경을 썼다면 그는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설령 말을 해준다고 해도 딱히 상관없었다.어차피 기억 못 하는 것 같으니 그러면 영원히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온지유가 말했다.“네, 진짜 존재하는 사람이에요. 전 이현 씨를 속인 적 없어요.”그녀는 여이현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거리가 조금 전보다 가깝지는 않았지만, 말이 조금 많아졌다.“석이는 날 구해준 적 있었어요. 그때 날 지키기 위해 대신 총에 맞았죠. 그 순간부터 석이는 나에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영웅 같은 존재가 되었어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여이현은 진지하게 들으며 그녀에게서 ‘석이'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했다.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면서 결국 이를 빠득 갈고 말았다.“그만 말해!”그녀와 다른 남자 사이에 이야기를 들으니 그 남자를 어떻게 죽여야 할까, 영원히
온지유는 장담했다. 그녀는 어느 여름 방학이던지 사라졌었던 적이 없었다.여이현은 다소 의아했다.사라졌었던 여름 방학을 그녀가 잊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그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거의 도착했네요. 그냥 여기서 세워주세요.”배진호는 부드럽게 차를 세웠다.온지유는 차에서 내렸다.“갈게요. 이현 씨도 일찍 돌아가요.”여이현이 그녀를 데려다준 것이니 그래도 예의상의 말을 해야 했다.여이현은 여전히 머리가 아팠다. 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겼던 것일까.온지유는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긴 모습에 먼저 걸음을 옮겨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온지유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머릿속에 온통 방금 온지유가 했던 말뿐이었기 때문이다.“온지유 뒷조사, 제대로 한 거 맞아요?”여이현이 물었다.이 일은 배진호에게 맡겼다. 석이를 찾기 위해 배진호도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알아보았다.“네, 빠진 것 하나도 없이 전부 알아보았습니다. 어쩌면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서 사모님께서 잊으신 게 아닐까요?”“16살 때의 일을 배 비서는 기억 못 할 것 같아요?”여이현이 물었다.“전 기억합니다만...”배진호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럼 왜 온지유는 못 기억하는 거죠?”여이현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눈빛도 어둡게 가라앉았다.“지유의 사라진 기억 속에 석이가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어요. 대체 지유가 그때의 일을 기억 못 하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가 잘못 알아본 걸까요.”두 가지 가능성 모두 있었다.배진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사모님과 나민우 씨가 오랜 동창이라고 했으니 나민우 씨라면 아마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배진호가 말했다.“전 나민우 씨가 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모님께서 전에 말했다시피 나민우 씨와 다시 만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저 동창으로만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여이현도 잘 알고 있었다.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하면 화가 났던 이유는
여이현을 언급하자 온지유는 아주 큰 의혹이 생겼다.핸드폰 화면을 보던 그녀는 한참 고민에 빠졌다.그래도 궁금증을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녀가 물었다.[엄마, 혹시 고등학생 때 여름 방학에 제가 집에 없었던 적이 있어요?]여이현이 그녀에게 이런 의혹을 심어주었으니 그녀도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다.정미리는 한참 지나도 답장하지 않았다.온지유는 정미리의 답장만 기다렸다.조금 전까지 계속 대화를 주고받던 사람이 갑자기 조용해지니 그녀는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10분이 지난 후.정미리는 드디어 문자를 보냈다.[누가 그런 말을 한 거야?]온지유는 불 확신한 어투로 말했다.[아녜요.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그런 일 없었어.]정미리가 말했다.[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집에 있었어. 널 교육하면서 키운 사람도 나인데 어떻게 집에 없을 수 있겠니? 그러니까 괜히 이상한 사람한테서 이상한 소리 듣고 믿지 마!]온지유도 그렇게 생각했다.그녀의 친척도 전부 같은 지역에서 살았다.설령 친척 집에서 지냈다고 해도 한 달 넘게 사라졌을 수는 없었다.더구나 그녀의 집안은 유서가 깊은 집안은 아니었지만, 가정교육은 엄했다.온지유도 더는 이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얼른 씻고 누웠다....한편 여이현은 서승만 교장의 집으로 찾아왔다.서승만은 이미 쉬고 있었던 상태였지만 여이현이 왔다는 소식에 겉옷을 챙겨입고 문을 열어주었다.여이현을 본 서승만은 열정적으로 반겼다.“여 대표님께서 이 밤에 어쩐 일로 오셨어요? 오신다고 미리 말씀하셨으면 저도 일찍 잠자리에 들지 않았을 텐데.”그는 얼른 여이현을 집안으로 들이며 도우미에게 차를 내오라고 했다.“죄송합니다. 이렇게 늦은 밤에 찾아와서 실례했네요.”여이현은 안으로 들어가며 예의 있게 말했다.“실례라니요, 괜찮습니다.”서승만이 말했다.“저녁은 드셨어요? 아니면 야식이라도 드실래요? 우리 집엔 뭐든 다 있답니다.”“괜찮습니다.”여이현이 말을 이었다.“사실은 궁금한 것이 있
한참 지난 후 서승만은 시선을 돌려 여이현을 보았다. 놀라움의 감정은 뜻밖으로 변했고 그가 왜 온지유의 일에 신경 쓰는지 이해가 안 되는 얼굴로 물었다.“지유한테 왜 갑자기 신경 쓰시는 거죠? 만약 납치되었던 학생이 지유가 아니라고 해도 여 대표님께 중요한 일인가요?”서승만은 그에 대한 의심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고 딱히 나쁜 마음도 품지 않았다.여이현의 날카로웠던 눈빛도 다소 풀어지며 담담하게 말했다.“한 사건을 알아보다가 우연히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교장님께 이 사건에 대해 들어보면서 의혹을 풀어보려고 한 거고요. 만약 납치된 학생이 온지유가 아니었다면, 온지유는 왜 이 여학생이 자기인 줄 알고 있는 거죠? 심지어 이름도 똑같고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면 온지유는 왜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요?”서승만의 안색이 변했다.“교장님, 이 사건은 당시 교장님께서 관리하던 학교에서 벌어진 거잖아요.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여이현은 합당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아니면 그 사건 속에 더 큰 음모가 숨어 있었는지 말이다.서승만은 긴 한숨을 내쉬곤 자세를 고쳐 앉아 솔직하게 말했다.“사실 제가 해답을 드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드릴 순 있지요.”여이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서승만은 사진을 들며 계속 말을 이었다.“확실히 지유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납치된 학생과 지유는 이름이 똑같지요. 이 사건을 숨긴 것도 지유 부모님의 요구이기도 했습니다.”“지유 부모님의 요구이기도 했다고요?”여이현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왜 숨겨달라고 한 거죠?”서승만이 말했다.“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지유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지유 학생의 부모님이 직접 저를 찾아와 부탁하더군요. 제발 이 사건에 대해 말하지 말아 달라면서 말이죠. 이 사건을 숨기기만 한다면 지유를 납치 피해자로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지유의 기억이 왜 완전하지 않은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서승만은 놀란 눈치였다. 두 사람이 부부일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두 사람이 그런 관계일 줄은 몰랐네요. 전에 제가 무슨 말을 했든 부디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길 바랍니다.”그는 자신이 온지유와 나민우를 이어주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리고 자신의 딸과 여이현을 이어주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신경 쓰지 않습니다.”여이현이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서승만은 털털한 성격이었던지라 직접 두 사람을 배웅했다....어느덧 이미 새벽이 되었다.침대에 누워있던 온지유는 배가 고픈 느낌이 들었다.최근 그녀는 자주 배가 고팠다.입맛도 변했다. 짠 음식과 매운 음식을 즐겨 먹게 되었다.예전의 그녀는 매운 것이라면 전혀 못 먹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하지만 졸렸던 그녀는 움직이기 싫었고 어떻게든 잠을 이루려 했다.이불을 둘둘 말아 안은 채 옆으로 돌아누웠다.이때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그녀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 그곳엔 여이현이 서 있었다.온지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여긴 왜 또 왔어요?”온지유는 그가 이미 집으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했다.여이현이 말했다.“네가 걱정되어서 다시 왔어.”“집에 있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 거예요?”여이현은 그윽한 눈길로 그녀의 배를 보았다.“임신했잖아. 임산부 혼자 집에 있어도 위험해. 뭐든 조심해야 한다고. 넘어져도, 배곯고 있어도, 옆에 사람이 없어도 안 돼.”그녀는 혼자 살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살펴 주는 사람은 있었다.말을 마친 뒤, 여이현은 바로 들어와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들어 보여주었다.이미 냄새를 맡은 온지유는 군침이 돌았다.“마라탕이에요?”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응.”어느새 주방까지 들어온 그는 식탁 위에 포장지를 뜯고 젓가락을 온지유에게 건넸다.“와서 먹어.”온지유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여이현은 이런 음식을 먹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평상시 눈길도
그의 말에 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행여나 또 지레 착각하게 될까 봐 그의 시선도 피했다.“신경 쓰인다고 나한테 맞춰줄 수 있다고요? 대체 왜 나한테 신경을 쓰는 건데요?”여이현은 그녀를 보았다.“넌 내 아내니까.”온지유는 입술을 살짝 틀어 물었다. 젓가락으로 마라탕을 휘저었지만 먹지 않았다.“이미 이혼하기로 얘기 끝난 거 아니었어요? 단지 아내라는 이유로 날 위해 변할 수도 있다니요. 그러면 예전에는 왜 날 위해 바뀌지 않았던 건데요?!”여이현은 그녀를 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지유는 그의 시선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그가 한참 지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도 기다려주지 않고 마라탕을 먹었다.“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아.”“컥, 켁...”담담한 그의 한마디에 온지유는 그만 사레가 들고 말았다. 매콤한 국물이 그녀의 식도를 자극하며 괴롭기 시작했다.그녀의 모습을 본 여이현도 순간 괴로웠다. 황급히 그녀에게 물을 따라 주었다.“괜찮아? 물 좀 마셔!”온지유는 눈물이 났다. 눈앞이 흐려지며 사례에 걸려 눈물이 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눈물이 나는 것인지 순간 알 수 없었다.그렇게 오래 기다렸던 말을 이제야 듣게 되었다.하지만 생각처럼 기쁘진 않았다.그녀는 물을 마셨다.그럼에도 여전히 목이 괴로웠고 콜록콜록 댔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말이다.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얼른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쓸어 내려주었다.한참 지나서야 진정되었다.온지유는 진정하고 난 뒤에야 그의 말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날 좋아하는 것 같다고?'온지유는 여이현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괜찮아?”여이현은 그녀가 걱정되어 바로 상태를 물었다.온지유는 놀란 눈빛으로 여이현을 보았다.“방금 뭐라고 한 거예요?”여이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다시 한번 말했다.“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다고.”온지유는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만약 예
온지유는 침대에 앉아 문을 빤히 보았다. 여이현이 문밖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나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가슴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머릿속엔 여전히 그가 했던 고백의 말이 떠올랐다.이런 일에서 그녀는 아직 겁쟁이였다. 자신의 진심을 보여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마음은 조급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또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여이현이 방으로 들어왔다.그녀는 멍하니 그를 보았다. 그를 처음 본 순간처럼 말이다. 그때와 조금 다른 점이라면 대놓고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여이현은 우유를 들고 들어와 그녀의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자기 전에 우유 한잔 마셔. 건장에 좋아. 달달한 우유는 어느 정도 스트레스를 완화할 수 있대.”온지유는 자신의 앞으로 내민 우유를 보다가 여이현의 핏줄이 선명한 팔을 보았다. 순간 멈칫했다. 꼭 어디서 본 장면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녀는 최근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한곳에 집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알 수 없는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머리가 아팠다.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감쌌다.여이현은 좋지 않은 그녀의 안색을 보며 물었다.“아파?”온지유는 고통이 사라진 후에 답했다.“괜찮아요.”그녀는 얼른 우유 잔을 들어 꿀꺽꿀꺽 마시면서 흥분했던 마음을 달랬다.여이현은 그런 그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참 지나서야 물었다.“지유야, 중학교 때 혹시 납치당 한 적 없어?”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잔을 꽉 잡았다. 살짝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꼭 비밀을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다.“이현 씨...”온지유는 더욱 긴장해졌다. ‘혹시 뭐라도 알아낸 건가?'“그건 왜 물어보는데요? 딱히 큰 비밀은 아니었어요.”여이현은 생각에 잠긴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신의 기억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모르는 것 같았다.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건 과연 좋은 걸까, 나쁜 일인 걸까?온지유의 부모도 그녀가 다른 사람의 기억으로 착각하고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