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시동을 다시 끄고 노승아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노승아는 그녀가 산 도시락을 들고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왜 들어오지도 않고 가요? 제가 오빠랑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불쾌하던가요?”“할 말 있으신 건가요?”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노승아를 보았다.“아직 제 말에 대답하지 않으셨잖아요.”온지유는 시선을 거두고 담담하게 말했다.“혹시 그거 알아요? 아무것도 없으면서 뭔가 있는 척 연기를 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 으스댈수록 원하는 걸 더 얻을 수 없다는 말이 있거든요.”노승아가 이 틈을 타 자신을 비웃으려는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다.아마 그녀의 앞에서 자랑질할 생각이겠지.노승아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온지유의 모습을 아주 싫어했다.“뭘 연기하고 있어요. 분명 불쾌하잖아요. 제가 이현 오빠랑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현 오빠 마음엔 항상 제가 있거든요. 그쪽도 잘 알 거 아니에요. 이현 오빠는 절 위해 연예 기획사도 세웠어요. 제가 연기하고 싶다고 하니까 바로 좋은 감독과 배역을 알아봐 주었다고요. 이것이 뭘 의미하고 있겠어요? 이현 오빠 마음속에 저밖에 없다는 소리잖아요. 그리고 온지유 씨는 어차피 버려질 패에 불과하죠. 이현 오빠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패 말이에요!”그녀의 말에 온지유는 결국 주먹을 움켜쥐었다.순간 여이현과 여희영의 대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확실히 하나의 패에 불과했다. 여이현에게 회사 지분을 가져다줄 수 있는 패였다.3년 결혼 생활의 희생자기도 했다.이렇게 모욕을 당하고 있어도 나중엔 쉽게 버려지는 패였다. 그럴 바엔 마지막까지 자신의 체면이라도 지키는 것이 나았다.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노승아를 보았다. 노승아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전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거예요. 이현 오빠에겐 쓰레기가 필요 없거든요!”말을 마친 뒤 노승아는 온지유의 앞에서 그녀가 사 온 도시락을 쓰레기통에 버렸다.노승아는 일부러 그녀의 앞에서 버린 것이었다.온지
그러나 여이현은 쉬고 싶다는 이유로 만나주지 않았다.배진호는 병실 문 앞을 가로 막고 서 있으며 공손하게 말했다.“노승아 씨, 대표님께선 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가시라고 하셨습니다.”노승아가 말했다.“괜찮아요. 전 이미 오늘 쉬고 싶다고 감독님한테 말씀드렸거든요. 감독님도 그러라고 하셨으니 오빠가 퇴원할 때까지 여기 있어도 돼요.”배진호는 조금 난감해져 에둘러 말했다.“대표님께선 지금 쉬고 싶답니다.”노승아는 병실 안을 힐끔 보았다. 배진호의 뜻을 알고 있었던 그녀는 더는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그럼 이것만이라도 오빠한테 전해 줘요. 마침 집으로 돌아가 아주머니께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할 생각이었거든요.”“네, 노승아 씨.”배진호는 그녀가 건네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서류에 적힌 글씨를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노승아는 그렇게 작별 인사를 하곤 떠났다.그녀의 매니저가 말했다.“언니, 왜 안 들어가요? 어렵게 온 기회인데...”“괜찮아. 조급할 것 없어. 어차피 앞으로 나한테 기회가 많이 차려질 테니까. 일단은 이현 오빠네 집으로 가자.”그녀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병실 안.배진호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다.노승아가 건넨 서류를 여이현에게 전달해야 할지 말지 말이다.여이현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가 곁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배진호는 하는 수 없이 그 서류를 그에게 건넸다.“대표님, 이건 아마 온 비서님의 서류 같습니다.”그제야 여이현은 눈을 떴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 ‘이혼 신고서'라는 커다란 글씨가 들어왔다.그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언제 온 거죠?”배진호가 답했다.“노승아 씨가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온 비서님이 노승아 씨한테 준 것 같습니다.”여이현은 이혼 서류를 손에 들었다. 믿을 수 없어 서류를 다시 한번 꼼꼼히 확인해 보았다. 그러다가 발견한 온지유의 사인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원래부터 좋
그녀는 온지유가 가지 못하게 꽉 붙잡았다. 지금 이 순간 온지유를 죽이고 싶은 충동도 생겼다.“넌 처음부터 불운을 몰고 다니는 년이었지. 너만 없었으면 우린 전부 다 잘살고 있었을 거야. 네 아빠도 우리 가족을 도와주고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 네가 중간에서 이간질하는 바람에 네 아빠는 더는 내 남편을 도와주지 않겠다고 한 거야. 이 악랄한 X! 오늘 반드시 널 죽여버릴 거야!”장수희는 손을 뻗더니 그녀의 머리채를 잡으려고 했다.그녀는 반사적으로 피하면서 장수희를 밀어내려고 했다.장수희의 손톱은 조금 길었기에 결국 그녀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저기요, 아주머니. 여긴 경찰서예요. 경찰서에서 이러시면 폭행죄로 구치소에 들어갈 겁니다!”장수희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잡아가! 어디 한번 잡아가 보라고! 그전에 내가 반드시 이 X부터 죽이고 갈 거야! 이 X 죽이고 지옥 갈 거라고!”경찰의 만류에도 계속 손을 뻗는 장수희에 결국 경찰은 그녀를 제압하는 수밖에 없었다.제압당한 장수희는 버둥거리며 온지유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온채린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눈물이 떨어졌다.“엄마, 제발 진정 좀 하세요. 엄마가 구치소에 들어가면 저는 어떻게 하라고요.”온채린은 온지유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언니, 잘못했어요. 전부 저랑 엄마 탓이에요. 그러니까 한 번만 봐주세요. 맹세할 수 있어요. 앞으로는 절대 언니 가족 찾아가 힘들게 하지 않을게요.”온지유는 자신의 볼을 만졌다. 그러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장수희의 손톱에 긁힌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이제 더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떨구어 온채린을 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절대 합의는 없다고.장수희는 그렇게 경찰에게 끌려나갔다. 끊임없이 저주를 퍼부으며 말이다.“죽어! 죽어버리라고!”온채린은 울면서 따라갔다. 그럼에도 장수희의 두 손엔 차가운 철수갑이 채워졌다....노승아는 여이현의 본가로 왔다.여진숙은 그녀가 올 것을 알고
여진숙이 급히 말했다.“서로 만난 적이 있다고 했으니 잘됐구나. 승아야, 저 아이는 주소영이라고 한단다.”“그리고 얘는 노승아란다.”주소영은 노승아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 다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아주머니, 이분이 혹시... 대표님의 첫사랑인가요?”그녀는 여진숙이 자신의 아이를 받아주었으니 자신도 받아줄 거로 생각했다.그런데 아니었다.노승아는 여이현의 첫사랑이란 칭호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안녕하세요. 아주머니께서 이미 저한테 소영 씨에 대해 말씀해 주셨어요. 이현 오빠 아이를 배서 지금 집에서 태교에 집중하고 있다면서요.”주소영은 무의식적으로 배를 감쌌다. 행여나 노승아가 자신의 아이를 해칠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노승아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고 말했다.“아, 걱정하지 말아요. 이현 오빠 아이라고 했으니까 당연히 잘 대해줘야죠. 아이를 낳고 나면 소영 씨는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예요.”주소영은 그래도 의심이 갔다.“정말로 제가 아이를 낳아도 괜찮아요?”노승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전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에요. 절 믿지 못하시겠다면 아주머니를 믿으셔도 돼요. 어차피 그 아이는 아주머니 손주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해칠 리가 없죠.”여진숙은 당연히 손주를 원했다.“소영아, 넌 아무 걱정 말고 태교에 집중하거라. 승아는 내 친딸이나 다를 바 없는 아이란다.”그 말을 들은 주소영은 어딘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노승아가 여이현의 첫사랑이라고 했으니 그럼 언제든지 그녀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었다.온지유를 쫓아내고 나니 이번엔 노승아가 나타났다.딱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하지만 노승아를 아주 살갑게 대하는 여진숙의 모습을 보니 노승아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두 사람과 계속 대화를 이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핑계를 댔다.“아주머니, 전 피곤해서 방으로 돌아가서 쉴게요.”여진숙은 주소영의 핑계를 눈치채지 못했다.“그래, 올라가서 쉬어라.”노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여진숙이 받아들이지 않았는가.그녀는 여진숙의 앞에서 대놓고 싫은 티를 낼 수 없었다.그리고 악녀가 되기도 싫었다.한참 후.누군가가 노크했다.방에 있던 주소영은 노크 소리에 물었다.“누구세요?”“저에요. 노승아.”주소영은 머뭇거리다가 문을 열어주었다.노승아는 무언가가 담긴 그릇을 들고 서 있었고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쉬고 싶다고 하셔서 제가 국 좀 떠왔어요. 아주머니께서 끓이신 건데 아주 맛있거든요.”주소영이 대꾸했다.“전 입맛이 없네요.”주소영은 국그릇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혹시 저 때문에 입맛이 없는 거예요?”주소영이 급히 말했다.“아녜요. 정말 그런 거 아녜요.”“그럼 됐어요.”노승아는 친근하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아직 어리니까 그냥 언니라고 불러요.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말해도 돼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다 도와줄게요.”열정적인 그녀의 모습에 주소영은 조금 당황했다.“전...”“괜찮으니까 불러봐요. 전 외동딸이라 어릴 때부터 여동생이 그렇게 갖고 싶었거든요. 마침 소영 씨가 저랑 닮았으니까 언니 동생처럼 지내고 싶어서 그래요.”노승아는 뭔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참, 제가 비서한테 아이 옷 좀 사 오라고 했어요. 마음에 드나 안 드나 한번 봐줘요. 혹시 마음에 안 들면 우리 같이 가서 다른 거로 바꿔요.”말을 마친 뒤 노승아는 쇼핑백에서 아이의 옷을 두 벌 꺼냈다.순간 주소영은 그녀에게서 친근감을 느꼈고 바로 모성애가 가득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괜찮은데 뭘 이런 걸 다 사 오셨어요. 제 아이 옷을 선물해준 사람은 언니가 처음이에요. 하지만 아직 임신 4주 차라 배도 그렇게 나오지 않았어요.”그녀는 노승아가 꺼낸 아이의 옷을 받았다.아직 아이의 옷을 사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그런데 이렇게 자그마한 옷을 보니 아주 귀엽게 느껴졌다.노승아가 말했다.“일찍 준비해두면 좋죠. 소영 씨 아이는
그녀의 말에 주소영은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온지유는 여이현을 좋아하고 있기에 깔끔하게 이혼해줄 리가 없었다. 정말로 그녀를 속이려고 그렇게 말한 것일까?예전에도 온지유는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너무 여이현에게 푹 빠져 있지 말라고. 그런데 온지유도 여이현에게 푹 빠져 있지 않은가.그녀는 지금 임신한 상태이다. 어쩌면 앞으로 온지유는 그녀의 아이를 없앨 계획도 세울 수 있었다.주소영은 본능적으로 배를 감쌌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절대 온지유의 뜻대로 되지 않게 이 아이를 지켜내리라 다짐했다.노승아는 그런 주소영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럼 푹 쉬어요. 제가 가져온 걸 꼭 마시고요. 아이한테 좋은 거예요. 전 이만 나가볼게요.”말을 마친 뒤 노승아는 방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걸려있었다.노승아가 했던 말 때문에 주소영은 불안감을 느꼈다.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그러다가 온지유의 숙모와 사촌 여동생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온지유는 진술을 마치고 경찰서에서 나왔다.“지유야!”온재준이 경찰서 앞에 서 있었다.그는 온경준과 닮지 않았다. 나이는 50대에 얼굴은 누렇게 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름이 가득했다. 담배꽁초를 바닥으로 던져 발로 비벼 끄면서 따져 물었다.“네 숙모는?”온지유는 눈앞에 있는 삼촌에게 딱히 별다른 정이 없었다.그녀와 온재준은 어릴 때부터 친하지 않았다.장수희는 항상 온재준의 앞에서 나쁜 말을 해댔고 두 사람의 사이를 이간질했기에 그녀와 온재준의 사이는 좋지 않았기에 한 번도 그녀를 안아준 적이 없었다.어릴 때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랑 같이 살았었다. 장수희는 그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녀를 더 예뻐한다고 생각했고 온채린에게 관심이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 아주 불만이 많았다.온재준은 그런 장수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그녀의 가족에게 관심을 끊어버렸다.온지유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몰라요. 들어가서 경찰에게 물어보세요.”“채
온재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 담배를 태웠다.“너는 애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나한테 돈이 있었으면 당연히 갚았을 거 아니니? 나중에 갚는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돈이나 내놓으면 돼.”“전 삼촌한테 빌려줄 돈 없어요. 다른 일도 있으니까 전 이만 먼저 가볼게요.”온재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는 그녀의 모습에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해 담배를 바닥에 던지며 흉악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온지유. 너 나한테 자꾸 그러면 안 될 텐데. 나중에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두렵지도 않냐?!”온지유는 그대로 시동을 걸어 떠나버렸다.그녀는 온재준이 뭘 원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의 가족은 끝이 보이지 않는 블랙홀 같았다. 그녀가 돈을 빌려주기만 하면 그들은 앞으로도 계속 찾아와 돈을 요구할 것이다.마침 두 사람의 모습을 구석에 숨어 있던 주소영이 전부 보고 있었다.온재준은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흉악한 얼굴로 온지유가 떠나간 자리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던 주소영은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했다.이번엔 반드시 온지유를 이 세상에서 치워버릴 생각이었다. 더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없게, 아이에게도 해가 되지 않게 말이다.그녀만 처리한다면 어쩌면 자신이 여씨 집안 안주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주소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온지유는 운전하고 있었다. 마침 걸려온 백지희의 전화에 블루투스를 연결해 받았다.백지희는 금방 하던 일을 마치고 그녀에게 연락한 상태였다.“너 정말로 여이현과 이혼할 거야?”온지유가 답했다.“이혼 서류도 이미 전해줬어. 그 사람만 작성하면 바로 구청으로 갈 거야.”백지희는 궁금했다.“여이현이 흔쾌히 사인해 주겠대?”온지유는 뜸을 들였다.“아니,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하지만 사인 안 하겠다고도 하지 않았어. 어차피 난 그 사람과 결혼한 후 3년 뒤에 이혼하기로 계약했었어. 전에도 나한테 이혼하겠다고 했었으니까 아마 사인해 줄 거야.”그녀가 만약 그
배진호는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러나 곧바로 다시 걸려왔다.“대표님,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배진호가 말했다.여이현은 오늘의 신문을 읽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핸드폰은 다시 울리고 있었고 화면엔 백지희의 이름이 크게 떠 있었다.평소였다면 백지희는 그에게 연락할 일이 거의 없었다.만약 그에게 연락했다고 해도 전부 온지유와 관련된 것이었다.여이현은 신문을 내려놓았다.“주세요.”배진호는 핸드폰을 여이현에게 건넸다.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한 백지희의 목소리가 들렸다.“여이현 씨,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예요! 정말로 지유가 죽든 말든 신경 쓰이지 않는 거예요?!”다급한 목소리에 여이현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틀어 물었다.“무슨 일인데요?”“지유가 연락이 안 돼요!”백지희는 계속 말을 이었다.“분명 한 시간 뒤에 저를 데리러 오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연락이 안 돼요. 지유는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사람이에요. 절대 아무 이유도 없이 약속 시간을 어길 사람이 아니라고요. 분명 무슨 일이 생겼을 거예요!”여이현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마음속에 들끓던 분노도 가라앉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백지희에게 말했다.“지유가 어디로 간다고 말한 적 있어요?”백지희는 후회되었다. 그때 한 시간 동안 뭐하러 가는지 물어보았었다면...“아니요. 안 물어봐서 모르겠어요.”“일단 알겠어요.”여이현은 백지희와 더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든 온지유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의 팔에는 여전히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 걸리적거렸는지 망설임도 없이 확 빼버렸다.느껴지는 통증을 참아가며 일어나 배진호에게 말했다.“얼른 차 대기 시켜요!”배진호는 그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지금 온지유는 연락되지 않았기에 사람을 찾는 것이 먼저였다.여이현은 옷을 챙겨 입고 병실을 나가려 했다. 마침 그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의사가 들어왔다.“여 대표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요? 수술 부위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
물론 권용민에게 사심도 있었다.만약 권다솔이 집을 나가 혼자 살게 되면 그들이 남태건과 이어줄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아빠, 그러면 제가 매일 집에 들르면 되는 거잖아요. 아니면 주방장이라도 보내서 하루 세 끼를 먹게 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허락해 주세요. 전 기분 전환이 필요해요.”권다솔의 요구에 권용민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그날 밤 권다솔은 편히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침대는 편했지만,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드는 일이 많았다.다음 날 아침 여이현은 온지유와 함께 아침을 만들었고 권다솔의 몫도 만들어 주었다.“지유야, 난 아무리 생각해도 배진호가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 안 해. 두 사람이 이렇게 된 거엔 분명 오해가 있을 거야.”온지유가 만든 음식을 식탁으로 가져가려던 때 여이현이 말했다.사실 온지유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사이가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렇게 이혼하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다솔 씨는 금방 유산했어. 지금 심신이 힘든 상태라 같은 여자인 나도 지금 다솔 씨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어. 그래서 난 설득하기가 조금 어려워.”“그럼 내가 가서 배진호한테 물어봐? 일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고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는지 파악하는 거야. 그러면 두 사람을 더 정확하게 도와둘 수 있을 거야.”“아니야, 됐어. 일단 연락하지 마.”온지유는 곰곰이 생각했다.어차피 내일 그녀는 별이를 어린이집으로 데려다줘야 했기에 돌아오는 길에 권다솔과 함께 가정 법원으로 갈 생각이었다.그때가 되면 배진호와 만나게 될 것이고 직접 얼굴 보며 물어보는 것이 전화 통화해서 묻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나도 석규리라는 사람이 궁금해.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하고. 대체 왜 자기가 내연녀라는 거 알면서도 기꺼이 자처하는 지도 궁금해.”석규리를 언급하면서 온지유는 미간을 구겼다.세상에 자기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연녀를 자처하는 여자는
그녀의 결혼 생활은 이미 파탄이 났기에 여이현과 온지유만큼은 행복하게 이어가길 바랐다.“그럼 저녁엔 뭐 좀 먹었어요?”온지유는 권다솔이 걱정되었다.조금 전 권다솔이 엄청 힘들어했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녀의 집으로 온 이상 손님이지 않은가.손님을 그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권다솔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걱정하지 말아요. 집에서 뭘 좀 먹고 왔어요. 저도 어른인데 당연히 몸 챙겨야죠.”“그럼 됐어요. 혹시라도 배가 고프게 되면 이모님한테 말씀드리면 돼요. 그럼 이모님이 야식거리라도 만들어 주실 거예요.”온지유는 다시 한번 당부했다.그러고 난 후 권다솔을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손님방은 아주 컸고 안에는 샤워실과 드레스룸도 있었다.“고마워요.”권다솔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온지유가 나간 뒤 권다솔은 혼자 방 안에 머물고 있었다.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얼굴로 불어왔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권용민의 번호였다.권다솔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말을 하기도 전에 벌써 눈시울이 붉어졌다.“다솔아, 거기서 잘 지내고 있는 거니? 아빠가 이미 실력 좋은 경호원으로 뽑아뒀으니까 내일이면 도착할 거다. 그리고 주방장도 알아봐 뒀어. 남의 집이라고 해도 절대 끼니는 거르면 안 된다. 알겠지? 어떻게든 몸조리를 잘해. 아빠는 그래도 우리 딸이 건강하던 모습이 좋으니까.”권용민은 세심하게 당부했다.권다솔은 그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목이 메어왔다.“아빠,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그냥 며칠만 지내다가 갈 거예요. 월요일에 이혼 절차가 끝나면 다시 돌아갈 거예요.”“목소리가 왜 그래? 그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아빠가 지금 바로 갈까?”권용민은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멍해졌다.권다솔이 온지유의 집에서 며칠 지내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은 이유는 권다솔이 기분 전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동의한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는 생각이 바뀌었다.아빠로서 딸이 우는 목소리를 듣고
온지유는 두 팔을 벌려 권다솔을 꼬옥 안아주었다.“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요. 지금 날 찾아왔으니까 우린 그냥 즐겁게 재밌는 얘기만 나누면 되는 거예요. 오늘 저녁은 우리 정원에서 함께 바비큐 파티를 하죠.”“네, 저 지금 지유 씨 아이들을 보러 가도 될까요?”권다솔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온지유는 당연히 허락해 주었다.두 사람은 함께 거실로 들어왔다. 온하윤은 이미 잠에서 깬 상태였고 동그란 두 눈으로 신기한 듯 주위를 보고 있었다.“하윤아!”별이는 폴짝폴짝 뛰어가며 들고 있던 장난감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장난감에서는 맑은소리가 났다.온하윤은 그 소리에 바로 꺄르륵 웃었다.아이는 작은 손을 뻗어 별이가 들고 있던 장난감을 가져오려고 했으나 별이는 바로 주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높이 들며 말했다.“하윤아, 이거 가지고 싶으면 하윤이가 직접 일어나서 가져가.”온하윤은 이미 최대한으로 손을 뻗었다. 아직 어리고 몸도 작았기에 당연히 닿을 리가 없었다.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손가락도 닿지 않자 온하윤의 입이 슬금슬금 삐죽 나오기 시작했고 눈을 감더니 바로 큰소리를 내어 울어버렸다.“어어, 하윤아. 울지 마. 나는 그냥 하윤이랑 놀고 싶어서 그런 거야. 오빠가 되어서 우리 하윤이한테 안 줄 리가 없잖아, 응?”별이는 얼른 장난감을 온하윤의 손에 쥐여주며 달랬다.온하윤이 우는 것보다 웃는 것이 좋았던 별이는 어떻게든 눈물 멈추게 하려고 애를 썼다.장난감을 손에 넣은 온하윤은 천천히 울음을 그쳤고 이내 품에 꽉 끌어안았다.별이의 설명으로 온하윤도 장난감을 흔드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들리는 재밌는 소리에 온하윤은 다시 꺄르륵 웃었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웃음을 지으며 말이다.권다솔은 멀지 않은 곳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너무도 부러웠다.“지유 씨가 사는 삶이 제가 바라던 삶이었어요. 전 부귀영화 따위는 필요 없었어요. 그냥 행복하고 즐겁게 아이들과 살고 싶었을 뿐이에요.”“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예요. 나중에 다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권용민은 여씨 가문으로 집안 도우미를 보내기도 어려웠다. 보내도 그 집안사람들이 기분 나빠할 것이 분명했으나 권다솔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래서 주방장을 보내겠다고 한 것이다.“역시 아빠는 세심하시네요.”권다솔은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기분이었다. 감동을 받은 것이다.이렇게 좋은 부모님을 만나게 된 것도 행운이고 영광이라고 생각했다.권용민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아빠가 세심한 게 아니라 아빠는 진심으로 널 사랑하고 걱정해서 그러는 거야. 정말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네가 상처받는 걸 원치 않아. 이 말만 꼭 기억해.”권다솔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빠.”그녀는 이미 충분히 상처를 받았다. 그럼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정말로 멍청한 것이었다.여씨 가문에 거의 도착할 때 즈음 권다솔은 온지유에게 문자를 보냈다.문자를 받은 온지유는 직접 마중을 나오며 권용민과 인사를 했다.“아저씨, 안녕하세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오셨는데 들어가서 따듯한 차라도 한잔하시고 가지 않으시겠어요?”“괜찮네요. 젊은이들끼리 있어야 대화가 통할 테니 나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시간을 보내야겠네요. 오늘부터는 드디어 둘만의 세계가 되겠어요. 하하하.”권용 만은 웃으며 말했다.다음 날 아침이 되면 권용민이 뽑은 경호원들이 도착할 것이다. 권용민은 경호원들에게 당부했다. 배진호가 나타나면 바로 자신에게 알리라고.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그가 걱정할 게 뭐가 있겠는가.권용 국민이 떠나는 모습을 두 사람은 눈으로 배웅한 뒤 권다솔은 온지유와 함께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가던 도중에 권다솔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미 어둑해진 하늘과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먼지가 그녀의 눈 안에 들어가고 말았다.그녀는 눈을 비비며 온지유에게 물었다.“저 너무 불효자식 같죠? 아빠랑 엄마랑 나이도 많으신데 여전히 제 걱정하게 하고 있잖아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분
“다솔아, 어디를 가는 거니?”김영은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권다솔에게 다가갔다.권용민도 따라 일어나 권다솔이 든 짐을 들어주려고 했다.“네가 나가서 쇼핑하러 간다면 우린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오늘은 늦었잖니. 일단 오늘은 일찍 방에 가서 쉬어라.”“전 쇼핑하러 가는 게 아니에요. 친구 집에 가서 며칠 신세 지려고요. 지유 씨네로 가는 거예요. 두 분도 지유 씨 알고 계시잖아요.”권다솔은 부모님이 걱정할까 봐 일부러 온지유의 이름까지 말해주었다.두 사람은 확실히 온지유를 알고 있었다. 서로 시선을 주고받던 권용민과 김영은은 그래도 딸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애초에 권다솔과 배진호는 여진 그룹에서 일하다가 눈이 맞았기 때문이다.지금 겨우 이혼까지 오게 되었는데 권다솔이 온지유를 찾아갔다가 만약 옆에 배진호라도 있으면 한 달이 되기도 전에 마음이 바뀔까 봐 걱정되었다.두 사람은 절대 그렇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다솔아, 엄마는 네가 남의 집에 가서 민폐를 끼치지 않았으면 한단다. 지유 씨도 아이가 둘이나 있잖아. 아이들을 챙기느라 바쁠 텐데 네가 가면 방해가 되지 않겠니? 오늘 밤은 엄마랑 함께 자는 건 어떠니?”김영은은 다정하게 권다솔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엄마로서 딸과 진지한 얘기를 하며 딸의 속마음을 알고 싶었다.권용민도 김영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권다솔은 당연히 두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저 혼자 가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없어요. 지유 씨가 바쁜 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며칠 신세 지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거 도와주려고 가는 거예요. 전에도 제가 하윤이를 돌본 적 있었어요.”“다솔아, 그럼 며칠 지내다가 올 거니?”정곡 찔린 김영은은 거기에다 권다솔이 아이 얘기까지 하니 가지 말라고 설득하기 어려웠다.권다솔을 낳기 전에 그녀도 아기를 유산한 적 있었기에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수술대에 누워 눈물을 흘리던 그 날을 그녀는 평생 잊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그때의 그 기억이 생생했다
“전 두렵지 않아요.”그녀에겐 생각이 있었다.권다솔은 온지유에게 자기 생각을 손가락을 접으며 보여주었다.“첫째로 그 사람들이 지유 씨 가족을 노리고 있다는 건 분명 지유 씨네 인맥까지 알아봤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친구라는 것도 알아냈겠죠. 두 번째로 전 경호원을 데리고 가면 돼요. 제가 데리고 간 경호원과 함께 산다면 더 안전할 수 있으니까요.”그녀는 진심으로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남태건은 매일 찾아와 그녀의 부모님 앞에서 점수를 따려고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그녀는 정말이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하지만 남태건을 대할 때 진심으로 즐거운 표정을 짓는 부모님을 보면 권다솔은 남태건을 쫓아낼 수 없었고 심한 말도 할 수 없었다.이미 한번 그녀의 고집으로 부모님에게 상처를 주었었으니까. 게다가 이혼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떻게 부모님에게 심한 말을 할 수 있겠는가.정말 그런다면 그녀는 불효자식이 되는 것이었다.그랬기에 이런 일은 마음속에 숨기고 끙끙 앓으며 혼자 소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그럼 와요. 요즘 대부분 시간을 제가 집에서 보내고 있거든요. 저랑 얘기를 나눠도 되고 같이 취미 활동도 해도 되니까 와요. 적어도 다솔 씨가 그 집에 있는 것보단 덜 답답할 거예요.”온지유는 그녀를 환영했다.상의가 끝난 후 권다솔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빠르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간단히 짐을 꾸리고 나서 방에서 나왔다.권용민과 김영은은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바로 권다솔과 남태건이었다.“우리 다솔이는 대체 언제쯤 그놈을 잊을까요? 지금 상태를 봐서는 매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것 같던데... 볼 때마다 정말 속상해 죽겠어요.”김영은은 눈은 티브이에 가 있었지만, 마음은 권다솔에게 가 있었다.권용민은 옆에서 줄담배를 태우고 있었다.“다솔이한테 시간을 좀 더 주자고. 지금 법도 그래. 다솔이가 그간 얼마나 힘들었
너무도 평평했다.“전에는 먹는 걸 좋아해서 뱃살이 좀 있었거든요. 거기에다 임신까지 하니까 티가 나진 않긴 했어도 이곳이 조금 불룩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보세요. 아무것도 없어요.”뱃살뿐만 아니라 아기도 없었다.온지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더욱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아기... 아기가 없는 거예요?”아기를 품은 엄마로서 인생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아기를 잃는 것이었다.권다솔은 전부터 아기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실을 온지유도 알고 있었기에 같은 아이의 부모로서 그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지금 이 순간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이를 잃은 엄마에게 몇 마디의 위로의 말로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네, 아기를 금방 유산했을 때 머리가 멍했어요. 머릿속이 백지장이었죠. 무슨 생각을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바보라는 소리는 아니죠. 수술하고 나온 뒤에 전부 이해가 가더라고요. 배진호 씨 어머님이 얼마나 저를 싫어하셨는데 왜 갑자기 저한테 잘해줬겠어요?”시간을 되돌리는 능력만 있다면 권다솔은 그때로 돌아가 자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 정신을 차리라고.애초에 정미진에게 기대를 품은 것이 잘못이었다. 고작 화목한 집안을 만들고 싶다는 이유로 정미진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누구나 다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정미진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임신했든 말든 그녀는 영원히 정미진의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였다.“그럼 진호 씨는요? 진호 씨는 뭐래요?”“몰라요. 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말든 저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어차피 아기도 없는데 그 사람이랑 함께 살 이유는 없죠. 설령 어머님이랑 싸우고 연까지 끊는다고 해도 제 아기가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잖아요.”권다솔은 이 부분에선 이성적이었다.더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랬기에 배진호와 정미진이 그 정도로 싸울 리가 없었다.그녀에겐 정미진이 그녀의 아기를 해쳤다는 증거
“별이 아주 잘했어! 좋은 걸 나눌 줄도 알고. 우리 아들 정말 잘 크고 있네.”온지유는 아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부모로서 그녀는 아들과 딸이 화목하게 잘 지내고 힘들 때 서로 도와주며 의지하길 바랐다.여하간에 부모를 제외한 두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였으니까.여이현은 딸을 안고 거실을 두어 바퀴 걸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아기 흔들이 의자에 눕혀 김명자에게 맡겼다.저녁은 이미 준비되었다. 세 사람은 함께 레스토랑으로 가서 즐겁게 저녁을 즐겼다.저녁을 먹고 난 별이는 애니메이션을 보러 갔고 심심해진 온지유는 핸드폰을 들었다.그러다가 우연히 권다솔이 보낸 답장을 보았다.[다음 주에 진호 씨랑 가정 법원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이혼할 거거든요.]온지유는 믿어지지 않아 눈을 비볐다.‘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았었나? 얼마 전만 해도 다솔 씨가 나한테 임신한 소식을 알려줬었잖아. 그런데 갑자기 이혼한다고.?'그녀는 누군가 권다솔 핸드폰을 해킹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게임을 하다 져서 벌칙으로 이런 문자를 보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농담이죠? 다솔 씨, 이런 농담은 재밌지 않아요. 이혼이란 단어는 함부로 꺼내는 게 아니에요.][전 농담이 아니에요. 정말로 이혼할 거예요. 무조건 이혼할 거예요. 전 이미 이혼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누구도 절 말릴 수 없어요.]권다솔은 답장하면서도 답답한 가슴에 짜증이 솟구쳤다.만약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린다면 무조건 남태건을 칭찬하는 말만 가득할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그녀가 다른 남자를 찾아 상처만 준 배진호를 잊기를 바랄 테니까.하지만 친구들에게 털어놓기엔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결국 고민 끝에 온지유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게 된 것이다. 온지유에겐 아이가 둘이나 있었으니 그녀의 마음을 잘 이해해줄 것으로 생각했다.[혹시 전화 통화 가능해요? 아니면 영상 통화라도 가능할까요?]온지유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온 뒤 문을 꼭 닫았다. 그리고 영상
온지유는 지금 당장 모임을 할 마음이 없었다.조직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괜히 권다솔과 배진호를 만나면 그 조직의 눈길이 그들한테까지 옮겨 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건 감사가 아니라 민폐를 끼치는 일이었다.“집에 가서 내가 진호 연락해 볼게. 마침 회사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는데 같이 해보고 싶었어.”여이현은 한편으로는 배진호를 도와주려는 마음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의 성실한 인품을 믿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맡기면 제대로 해낼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됐어, 운전에 집중해. 내가 그냥 다솔 씨한테 문자나 보낼게. 이 시간대면 두 사람 다 일하고 있을 수 있어.”온지유는 휴대폰을 꺼내 권다솔에게 귀여운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 상대가 답장을 하지 않자 더는 방해하지 않고 휴대폰을 넣었다.곧 차가 집 앞에 도착했고, 온지유는 포장된 음식을 들고 들어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별이가 후다닥 달려왔다.별이는 온지유 손에 든 음식을 신경 쓰지 않고 곧장 매달렸다.“엄마,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걱정했잖아요. 혹시 엄마한테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엄청 무서웠어요!”“엄마 괜찮아. 네가 좋아하는 치킨 사러 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 떨어졌었어. 그래서 새로 나오길 기다리느라 좀 늦어졌어.”온지유는 여이현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 지으며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두 사람 모두 아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별이는 마치 어른처럼 깊은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됐어요. 하지만 엄마 다음부터는 그런 상황이면 그냥 돌아와요. 굳이 거기서 기다릴 필요 없어요. 치킨 못 먹어도 상관없어요.”집에는 먹을 것도 많고 매일 식사도 푸짐하다. 굳이 치킨 하나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다.“우리 별이가 제일 착하네.”온지유는 별이를 번쩍 안아 한 바퀴 빙 돌았다.별이는 온지유에게 안겨 공중에서 빙글빙글 도는 느낌에 깔깔 웃었다. 그 모습에 온지유도 미소 지었다.한편 여이현은 온하윤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