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연속 주소영과 마주친 카운터 직원은 그녀가 정말 끈질기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제가 확인해 볼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주소영은 기대를 갖고 얌전히 기다렸다.“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전화를 걸어 대답을 들은 직원은 주소영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대표님은 회사에 계시지 않습니다. 다음에 다시 오세요.”‘매번 없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이번에 주소영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고집스럽게 물었다.“대표님한테 전화 한 번만 걸어주면 안 될까요? 소영이 도시락을 준비해 와서 기다린다고 해주세요. 저는 도시락만 전하고 떠날게요.”직원은 여이현에게 들이대는 여자를 많이 봐왔다. 주소영도 그중 한 명일 뿐이기에 당연히 내쫓으려고 했다.“대표님은 바쁘셔서 예약하지 않은 분을 만나지 않습니다.”“저는 남이 아니에요. 저는...”주소영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죄송합니다. 제 일을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직원이 다시 한번 경고했다.그러나 주소영은 이미 며칠이나 기다렸다. 그 며칠 동안 그녀는 마음 편히 별장에서 지낼 수 없었다.“그럼 제가 직접 찾아갈게요.”“안 됩니다.”지난번 주소영은 온지유의 이름을 빌려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이번에는 제 입으로 여이현을 만나러 왔다고 했으니 당연히 들여보낼 수 없었다.직원은 경비를 시켜서 주소영을 막았다. 주소영은 끝까지 손에 든 도시락을 단단히 들고 있었다. 여이현이 맛 보기 전에 망가뜨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그만해요.”경비에 둘러싸인 주소영을 보고 온지유가 말했다.“온 비서님. 이 여자분 또 왔어요.”주소영은 고개를 들어 온지유를 보자마자 구세주라도 본 듯이 외쳤다.“지유 씨.”그녀는 빠르게 온지유 곁으로 달려갔다.“이 사람들이 저를 못 들어가게 해요. 저는 그냥 대표님한테 음식을 드리려고 했을 뿐인데... 그래도 지유 씨가 와서 다행이에요.”주소영이 온지유와 친한 것을 본 직원은 침묵에 잠겼다. 물
온지유는 들을수록 어이가 없었다.“괜히 착각하지 마요. 난 사실만 말했으니까요.”“그럼 지유 씨는 대표님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요?”주소영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온지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인정하는 거죠?”주소영은 자신의 직감을 맹신했다. 그래서 온지유가 여이현을 좋아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지난 세월 동안 여이현은 온지유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두 사람 사이에는 가능성이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지유는 다른 여자가 여이현을 좋아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 듯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여이현이 스캔들이 적은 것도 이해가 갔다. 그사이에는 무조건 온지유의 방해가 있었을 것이었다.“지유 씨, 우리 공평하게 경쟁해요. 그래야 제가 졌을 때 납득할 수 있죠.”주소영은 진심 어리게 말했다.“만약 대표님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깔끔하게 물러날게요. 다시는 찾아오는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해요.”온지유는 웃음만 나왔다.“제가 정말 주소영 씨를 경쟁 상대로 본다고 생각해요?”“알아요. 지유 씨는 대표님 곁에 오래 있었으니 정이 들 수밖에 없었겠죠. 하지만 그건 남녀 사이의 정이 아니라 하급자가 상급자에 대한 정이에요. 저는 다 이해해요. 그러니 지유 씨도 저를 이해해 줬으면 해요.”주소영의 말 중에서 온지유가 상처받은 건 딱 하나다. 하급자가 상급자에 대한 정, 이 말에 그녀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그녀는 이를 너무 잘 알기에 한 번도 선을 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그녀인데도 지금은 약간 흔들렸다.주소영의 얼굴은 노승아와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이윤정의 말대로 여이현은 정말 이런 타입의 여자에게 관심 있는지도 모른다.온지유는 마음을 다잡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아무도 슬픔을 보지 못할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주소영 씨 당신은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아요. 나를 가상의 적으로 삼지 마요. 만약 주소영 씨가 대표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차는 금방 회사 앞을 떠났다. 점점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온지유는 주먹을 꽉 쥐었다.“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대표님과 아는 사이였던 거예요?”“저렇게 안고 갔는데 모르는 사이일 리가 없죠. 대표님이 저희 책임을 물으면 어떡하죠?”직원들의 말소리를 듣고 온지유는 저도 모르게 우울해졌다. 그녀는 여이현이 여자에게 매정한 모습도, 다정한 모습도 전부 본 적 있다. 기준은 여이현이 그 여자에 대한 마음에 있었다.여이현은 노승아를 좋아한다. 그래서 자그마한 상처도 용납하지 못하고 당장 병원에 데려갔다. 주소영도 마찬가지다. 사고가 나기 바쁘게 그녀는 병원에 가고 있다.직원은 잔뜩 당황한 표정이었다. 자신 때문에 주소영이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직원은 온지유가 아직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다가갔다.“온 비서님, 만약 대표님이 책임을 물으시려고 한다면 대신 설명 좀 해주세요.”온지유는 정신 차리고 감정을 다잡았다.“사고는 우연히 일어난 거예요. 여러분이 자책할 필요는 없어요. 대표님이 나중에 책임을 물으시면 제가 설명할게요.”“고마워요, 온 비서님.”직원들은 안심하며 말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여이현이 주소영을 데리고 나간 지 10분도 안 돼서 사무실에는 온통 그 소식뿐이었다.사람들은 여이현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고 떠들어댔다. 그는 여전히 그런 타입의 여자를 좋아한다면서 말이다.온지유는 여이현이 어떤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노승아와 주소영은 어떤 유형인지, 그리고 자신은 그들과 얼마나 다른지 생각했다.‘언제쯤이면 나도 대표님의 취향이 되어서 사랑을 받을까?’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너무 순진하게 느꼈다.타고난 성격은 이미 정해져 있다. 성격을 바꾼다고 해도 잠깐의 관심만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럴 바에는 자신답게 사는 게 나았다.퇴근 후, 온지유는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강태규를 찾아갔다. 온경준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뿐더러 정미리가 돌봐주고 있어서 가지
강태규는 윗세대와 공감할 수 있었다. 전쟁 끝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막강한 실력이 있어야만 다른 나라에서 무시하지 않아. 정말 어렵게 얻은 평화인데 잘 지켜내야지.”온지유는 윗세대의 잔혹함을 직접 겪지 않았다. 그래도 강태규의 벨 에포크가 젊은 시절에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는 나이가 들어도 나라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열정적인 사람이다. 지금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강태규는 눈가가 붉어졌다.온지유는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그의 다리에 남아 있는 총상 자국을 보았다. 그것만 봐도 그들의 고생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었다.“어르신, 우리나라는 충분히 강해요. 더군다나 인재도 많으니 전쟁이 일어날 일은 없을 거예요.”온지유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강태규는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너무 자만해서는 안 된다.”이때 그는 무언가 떠오른 듯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그래도 인재가 많은 건 사실이야. 이현이 같은 녀석도 있고. 젊은 나이에 벌써 큰 공을 세웠잖니. 그 녀석은 원래 내 후계자였어. 고집스러운 늙은이가 가업을 잇게 한다고 데려가지만 않았어도... 이현이가 나를 따랐었다면 아마 나보다 더 대단한 공을 세웠을 거야.”온지유는 깜짝 놀랐다. 여이현이 회사를 물려받기 전이라면 아마도 그녀가 처음 여이현과 만났던 시기일 것이다.‘혹시 그때 임무 집행 중이었을까?’“지유야, 난 널 믿으니까 하는 말이야.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네, 알겠어요.”언젠가 여이현이 두 가문이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것은 의심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강태규가 여이현과의 사이를 비밀로 하려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온지유는 그의 말을 마음에 새겼다.그녀는 강태규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담요를 덮어 주었다. 다행히 바람은 따뜻했다. 강태규의 안색도 좋아 보였다.온지유는 강태규가 단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요즘은 치아가 받아 주지를 않아서 못 먹는 것으로 알
강태규는 온지유를 경고하고 싶었다. 여이현을 잘 단속해야 한다고 말이다.강태규가 아픈 몸으로 자신까지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온지유는 미소 지은 얼굴로 대답했다.“알았어요. 이번에는 저도 이미 아는 일이라 괜찮아요. 시간이 늦었는데 이만 들어갈까요? 이러다가 감기 걸리시겠어요.”“그래.”강태규도 눈치껏 입을 닫았다.강태규를 병실에 바래다준 다음 온지유는 산부인과에 가봐야 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했다. 이때 마침 주소영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유 씨, 병원에서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저 할 얘기가 있어요.”온지유는 바로 주소영의 병실로 향했다.병실 밖에 서 있던 배진호는 온지유가 온 것을 보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오면 안 되는 곳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사모님이 어떻게 오셨어요?”억지 미소를 지은 배진호와 달리 온지유는 아주 무덤덤했다.“무슨 일 있어요?”“아... 저 일단 대표님한테 와보시라고 할게요.”배진호의 반응에 온지유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저한테 숨길 일이라도 있어요?”배진호는 말할지 말지 한참이나 망설였다. 그러다가 병실에 있는 주소영을 힐끗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냥 직접 들어가서 확인하세요.”온지유는 병실 안의 주소영을 힐끗 봤다. 그녀는 어두운 안색과 반대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지유 씨, 왔어요.”그녀는 침대에서 내리려다가 다시 발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죄송하지만 제가 침대에서 내릴 수 없어서요. 대표님이 조심해야 한다고 그렇게 잔소리를 하고 갔어요. 괜찮죠?”배진호는 주소영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거슬렸다. 없는 말을 지어내는 능력이 이토록 뛰어난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온지유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어디 다쳤어요?”“피부가 살짝 까진 게 전부여서 큰 문제는 없어요.”‘그런데도 입원했다고...?’“하지만 알고 보니 제가 임신했더라고요.”이 말을 들은 온지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배진호는 허락을 구하는 듯 온지유를 힐끗 봤다.“나가요.”배진호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주소영은 이제야 이불을 거두고 몸을 일으키더니 기대하는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었다.“대표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저도 알아요.”온지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주소영은 여전히 머리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제가 그분을 닮아서 대표님이 좋아해 주시는 거라면서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요. 제가 바라는 것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는 것뿐이에요.”말을 마친 주소영은 온지유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계속 말했다.“지유 씨도 알죠? 그분 이름 승아라고 하던데?”온지유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주소영이 이것까지 알 줄은 몰랐던 것이다.“대표님이 알려줬어요? 자기는 승아라는 사람을 좋아하고, 주소영 씨는 대용품이라고요?”“대용품이고 뭐고, 저는 신경 쓰지 않아요. 제 출신에 이 정도 사랑받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죠.”여이현이 직접 말하지 않은 한 주소영은 절대 알지 못할 일이다.마음이 차갑게 식은 온지유는 손톱이 살에 박힐 정도로 힘껏 주먹을 쥐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노승아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다.“지유 씨는 대표님한테 이런 사랑 받아본 적 없죠?”주소영은 대놓고 온지유를 자극했다. 온지유는 절대 자신의 위치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맹목적인 자신감이 담긴 눈빛으로 말이다.“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저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온지유는 피식 웃었다.“아니에요. 지구는 누구 한 명 사라져도 계속 돌아요. 대표님한테서 벗어나면...”그녀는 지난날을 떠올리며 가볍게 말했다.“나는 오히려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네요.”주소영은 살짝 놀랐다. 그녀가 이토록 덤덤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법이다. 이게 바로 주소영이 생각하는 사랑이다.‘무슨 포기가 이렇게 빨라? 그래, 내 앞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게 틀림없어.’어찌 됐든 주소영은 현실에 만족스러웠다. 아이라는 보험이
“뭐라고요?”주소영은 사색이 된 얼굴로 현실을 부정했다.“아닐 거예요. 제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요. 시간이 전부 맞아떨어져요. 그 사람은 대표님이 틀림없어요.”“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그쪽에서 여자를 찾기 시작한 걸 보도 나도 네가 계 탄 줄 알았다고, 이 년아. 근데 우리가 착각했어. 네가 그날 밤 만난 남자는 여이현 대표가 아니라... 웬 50대 아저씨야.”주소영의 안색은 삽시에 창백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배를 바라보면서 언성을 높였다.“그러니까 지금 제가 그 50대 아저씨의 아이를 가졌다는 거예요?”엄청난 소식에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의 기쁨도 헛되고 말았다.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았으면 실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날 밤 만난 남자가 여이현이라는 것을 안 순간 그녀는 인생 역전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믿었다.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 덕분에 팔자를 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 남자가 여이현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니... 그녀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소영아, 우리 정신 차리자. 그 남자 나이가 많아도 돈은 꽤 있어. 너 하나 평생 먹여 살리는 건 얼마든지 가능해.”마담은 이미 현실을 받아들인 듯했다. 그녀도 실망하기는 했지만, 현실을 부정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돈뿐이다. 50대 남자에게서도 돈은 빼먹을 수 있기에 크게 걱정할 것도 없었다.하지만 주소영은 아니었다. 전화를 끊은 다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꿈에서 살고 있었다.“아, 아니야. 나는 대표님의 아이를 가졌어. 남들은 다 부러워서 거짓말하는 거야. 믿으면 안 돼!”그녀는 배를 끌어안으며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병원에서 나간 온지유는 바로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거리를 따라 걸으며 밤바람을 쐬었다. 기분은 여전히 저조했다. 만약 두 사람이 그날 밤에 만난 것이라면 주소영의 아이는 절대 여이현의 아이일 리가 없다. 그 전부터 만나는 사이였다면 모를까...그녀가 알기로 주소영은 우연
여이현의 말에 배진호는 순간 넋을 잃었다. 그날 밤 여이현과 만난 여자가 주소영이라면 틀림없이 그의 아이를 가졌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이때 여이현이 말했다.“가요.”“네.”배진호는 차를 시동 걸었다. 그러자 여이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차에서 내리라는 말이었어요.”“대표님, 아직 참석해야 할 모임이 있어요.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그리고 여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아요.”배진호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이곳이 위험해 보였다. 온지유에게는 별문제 없겠지만, 여이현에게는 달랐다. 더군다나 여이현은 절대 이런 곳에 오지 않을 성격의 사람이었다.여이현은 배진호를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배 비서 이런 분위기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요?”“네?”배진호는 순간 여이현의 질문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여이현은 마치 그를 위해 놀아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다.의도가 어찌 됐든 여이현의 날카로운 눈빛 앞에서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네, 좋아합니다.”“그럼 내려요.”여이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다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묵묵히 오가는 사람을 바라봤다.그는 이런 곳에 사람이 몰리는 이유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짧은 한순간의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달려오는 것도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다.이런 생각과 함께 그는 경멸 어린 미소를 지었다.“조심하세요, 대표님.”배진호는 옆에서 그가 사람들과 부딪힐까 봐 조심스럽게 길을 터주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온지유를 따라갔다.나민우와 함께 고리를 던지며 즐거워하는 온지유를 보자, 그의 눈살은 더욱 깊어졌다. 어린아이도 유치해 할 놀이에 왜 이토록 즐거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온지유는 50개의 고리를 들고 있었다. 4000원에 50개, 가격도 꽤 저렴했다.그녀는 가장 먼 곳에 있는 도라에몽 인형을 원했다. 덩치가 크고 거리가 멀어서 맞추기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그래도 사람들은 항상 최고를 원한다. 고리 던지기에서도 마찬가지다.“난 도저히 안 되겠
나도현은 요즘 너무 피곤한 상태였기에 양시은은 더 이상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런데도 나도현은 여기까지 찾아왔다.“왔구나. 안 올 줄 알았는데...”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손목이 부러질 뻔한 양시은은 왠지 모르게 서운한 마음을 느꼈다.사람은 누구나 그런 듯했다. 어떤 상황에서는 강하게 버티면서도, 누군가에게서 걱정과 관심을 받으면 그 마음을 견디기 힘들었으니 말이다.나도현은 눈시울이 붉어진 양시은을 품에 안으며 어깨를 미세하게 떨렸다.“미안, 늦었어.”양시은은 나도현을 밀어내지 않고 그에게 조용히 기대었다.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은 순조롭게 연행되었다.양시은은 나도현의 차에 타려던 찰나, 어떤 수상한 여인이 카메라를 들고 몰래 다가오는 걸 포착했다.“저 여자 파파라치야!”양시은이 소리쳤다.나도현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그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에 파파라치는 깜짝 놀라며 도망치기 시작했다.하지만 결국 도망치지 못하고 붙잡혔다.나도현은 파파라치의 카메라 안에 있는 사진을 확인한 후, 안색이 어두워졌다.양시은도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으나 카메라를 건네받고서야 깨달았다.카메라의 메모리 카드엔 두 사람의 사진이 가득했는데 심지어 지난번에 하민이를 데리고 문구점을 갔을 때 찍힌 사진도 있었다.양시은은 화가 나서 손이 떨렸다. 파파라치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는 이 사람이 바로 하민이가 부딪혔던 그 여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지난번 우리가 부딪혔던 그 사람 아니세요?”“아니에요...”양시은은 처음에 확신이 없었다. 겨우 한 번 마주친 사람을 쉽게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파파라치가 급하게 부인하는 태도를 취하자 그녀는 더욱 확신했다.“역시 맞았네... 그러니까 왜 부딪혀 놓고 아무 말도 안 하나 했지.”알고 보니 그때부터 몰래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었던 것이다.양시은은 최근 온라인에서 떠들썩하게 퍼진 사진들을 떠올리며, 그 여자가 한 짓이라는 의혹을 품었다.“혹시 인터
그 남자는 손을 뻗어 양시은을 잡으려 했고 그녀는 급히 피하려 했지만 결국 손목을 잡혔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양시은은 입을 열었다.“뭐 하시는 거예요?”양시은은 다른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바로 신고 전화를 걸려고 했으나 그 남자는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바닥에 내팽개치는 것이었다.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액정이 깨져버렸다.양시은은 자기가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이 사람들을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경찰에 신고해 보든가.”그 남자는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멀리서 차준기가 이 상황을 보고 급하게 달려오려 했다.“시은 씨, 잠깐만요. 제가 갈게요.”“오지 마세요!”양시은이 그를 불러 세웠다.그녀는 자기가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이상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양시은의 급박한 목소리에 차준기는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초조함은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서 가시질 않았다.그는 한시도 마음 편히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그 남자는 양시은이 차준기와 대화하는 걸 보고 실눈을 떴다. 그는 양시은도 나진 그룹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했다.“역시 너도 그 회사 사람이지? 나도현이 널 보낸 거야? 그놈은 무슨 생각으로 널 보낸 거지?”“예쁜 여자분이 이런 위험한 일에 나서면 안 될 텐데...”그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모두 불쾌한 웃음을 터뜨렸다.그 남자가 하는 말을 들은 양시은이 차분하게 물었다.“저희 대표님을 아세요?”그녀는 손목에 느껴지는 통증을 참아가며 여전히 마음속에는 나도현을 떠올리고 있었다.‘나도현을 알고 있는 걸 보면 역시 일부러 나진 그룹을 타깃으로 삼는다는 건데... 배후에서 이 사람들을 조종하는 사람이 누구지?’그 남자의 눈빛이 점점 더 위험하게 변했다. 그는 손에 힘을 더 세게 주면서 말했다.“지금 나를 떠보는 거야?”말로 그 남자를 떠보려는 작전은 실패했지만 양시은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은 손으로 가방에서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더니 그의
나도현은 차갑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한 번 결정한 일은 절대 바꾸지 않는 사람이었다.‘대표님의 결정을 바꿀 수 있었던 사람이 있다니...’양시은은 조금 당황스러웠다.그녀는 택시를 타고 오성 구역으로 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는 나도현이 왜 가지 말라고 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쪽 때문에 우리 어머니 병이 엄중해졌잖아요! 빨리 돈이나 갚아요.”“여러분, 저 사람들을 막아야 해요. 저 사람들은 우리 집을 철거하려고 하거든요!”마을 사람들이 몇 명의 힘없는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몽둥이와 삽이 들려 있었고 누가 봉기를 일으킨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 중앙에 서 있는 중년의 남자는 땀을 흘리며 간절히 말했다.“저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저 새집을 지을 뿐이에요. 새집을 짓고 나면 들어와서 사셔도 좋다고 했잖아요. 이사 비용도 드리겠다고 했고요.”“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까짓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내가 너희들 눈치 보면서 살아야 해?”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그 비명을 선두로 비난의 소리가 이어졌다.상황이 점점 심각해지자 양시은은 급히 차준기에게 물었다.“사태가 안 좋게 흘러가는 것 같은데... 차 비서님께서 부른 사람들은 도착했나요? 빨리 가서 막아야 할 것 같아요.”차준기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아직 안 왔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요.”두 사람뿐이었기에 지금 나섰다가는 저 사람들한테 당하기만 할 뿐, 아무 소용 없을 것이었다.차준기는 자신이 위험하지는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양시은은 달랐다. 만약 그녀에게 만일의 경우라도 생기면 나도현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다.그래서 차준기는 양시은을 붙잡고 조심스레 말렸다.“가지 마세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원래 나서려고 했던 양시은은 사람들의 흉악한 모습을 보며 그만두기로 했다.시간은 1분 1초 흘러갔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그 사람들은 중간에 있는 중년 남자를 잡아가려는 계획을
양시은은 구석에서 집중한 상태로 회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었다.나도현은 겉으로는 회의 내용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은연중에 양시은을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그러다 열정적으로 발표하던 팀장이 물었다.“나 대표님, 이 방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나도현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나 대표님?”팀장이 다시 한번 부르자 나도현은 그제야 대답했다.“별로예요. 다시 만들어 오세요.”그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미간을 찌푸리고 화면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단번에 판단을 내리며 냉정하게 말했다.열심히 발표하던 팀장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나 대표님이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것 같은데... 착각인가?’회의는 절반쯤 진행되다가 중단되었다.차준기가 갑작스레 한껏 심각한 표정으로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나 대표님,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나도현은 손짓으로 기획팀 사람들에게 돌아가서 다시 방안을 준비하라고 지시하고는 홍보팀에게는 여론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양시은은 자신의 노트를 쳐다보다가 잠시 멈추고 회의실을 나섰다.“무슨 일이에요? 표정을 보니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차준기는 나도현을 한 번 보고 나서 대답했다.“오성 구역 쪽에서... 문제가 생겼거든요.”양시은은 짐작이 간다는 듯한 미간을 찌푸렸다.오성 구역은 바로 나진 그룹이 매입한 땅이었다.그곳에는 대부분 오래된 주택들이 밀집해 있었는데 이미 오래전에 철거해야 했던 곳이었다.비록 이번에는 나진 그룹에서 주도했지만 사실 이 프로젝트는 위에서 내려온 공공사업이었다. 그렇기에 반드시 잘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철거 과정이 이렇게 어려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오성 구역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첫 번째로 할 일은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는 것이었다.나도현은 차준기를 보며 말했다.“준기 씨가 한 번 가보세요. 절차에도 익숙하시니까요. 사람을 더 데려가도 좋지만 소란이 일어나는 걸 방지해야 합니다. 특히 기자나 언론은
식사를 마친 후, 양시은은 하민이를 유치원에 데려갔다. 거리는 멀지 않았기에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멀리에서 긴 머리에 목도리를 한 여자 선생님이 유치원 입구에서 부모님과 아이들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양시은은 그 선생님이 바로 공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공 선생님은 하민이를 보더니 쪼그려 앉아서 말을 걸었다.“네가 하민이야? 참 잘생겼네.”하민이는 얼굴이 빨개져서 부끄러워하며 양시은의 뒤로 숨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내밀고 선생님을 관찰했다.공 선생님은 그런 하민이를 보고 너무 귀엽다고 생각했다.양시은은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하민이가 좀 낯을 가려서요...”“괜찮아요. 어린아이들이 다 그렇죠. 자, 이제 들어갈게요. 하민이 어머님, 유치원 내부 좀 구경하실래요?”“아니요. 조금만 있으면 출근 시간이라서요. 퇴근하고 구경할게요.”하민이를 선생님에게 맡기고 간단히 인사를 마친 후 양시은은 자리를 떠났다.출근길에 그녀는 깊은숨을 쉬었다.오늘은 하민이의 첫 유치원 등교일 뿐만 아니라 양시은의 첫 출근일이기도 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녀는 어느덧 나진 그룹 건물에 도착했고 이미 많은 직원들이 출근해 있었다.오늘이 첫 출근이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업무 자리에 바로 가지 않고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회사와 업무에 대해서 익히는 시간을 가졌다.이 모든 건 나진 그룹에서 보낸 비서들이 준비해 주었다.요즘, 나도현은 아버지를 돌보느라, 회사의 여러 일을 해결하느라 바삐 돌아쳤다.물론 나도현은 변호사가 사업에 참여하는 건 규정 위반이라는 변호사로서의 원칙을 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회사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하지만 회사의 직원들은 아무도 그의 비밀을 지켜주지 않고 하나같이 그를 대표님이라고 불렀다.“여기가 회의실입니다. 오늘 오전 10시에 중요한 회의가 열릴 거거든요? 비서로서 당신의 업무는 회의 내용을 기록하는 것입니다.”차준기는 양시은
차는 뒤로 돌며 겨우 멈춰 섰다.운전기사조차 왜 멈췄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앞길에서 통제 불능 상태의 트럭이 돌진해 왔다.트럭은 너무 빨리 달려서 그대로 몇십 미터를 미끄러지며 여러 대의 차량을 들이받았다. 날카로운 소리가 귀에 들려왔고 운전기사는 마음이 아찔해 났다.‘만약 방금 양시은이 제때 경고하지 않았다면...’나도현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양시은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려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회전해서 다른 길로 돌아갑시다.”운전기사는 한참 뒤에야 방금의 충격에서 벗어나 차를 다시 운전하기 시작했다.그들이 떠난 뒤, 길은 금세 교통경찰 차량에 의해 둘러싸였고 모든 차는 강제로 에둘러서 가야 했다.차는 안정된 길에서 가고 있었고 운전자도 더욱 긴장하며 운전했다. 사고가 또 일어날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 후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무사히 집에 도착한 양시은은 잠든 하민이가 그 위험한 장면을 직접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린아이의 마음에 트라우마라도 남겼을 것이니 말이다.양시은의 가슴은 아직도 두근거리고 있었다.하민이를 침대에 눕힌 다음 방문을 닫고 나온 그녀는 물 한 모금을 마시며 말했다.“방금 사고는 우리를 노린 거였어.”그 말을 들은 나도현은 실눈을 떴다.양시은은 휴대폰을 꺼내서 방금 받은 메시지를 그에게 보여주었다.“아까 우연히 화면 상단에 뜬 메시지를 보게 됐거든. 거기엔 통제 불능의 차 때문에 일어나는 차 사고가 있을 거라고 적혀 있었어.”“그것도 양채은이 보낸 거야?”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잠시 후, 양시은이 먼저 말했다.“응. 채은이 번호였어. 예전에 몇 번 연락을 시도했을 때는 잘 안됐는데 이번에 다시 나타났더라고.”이렇게 말하는 양시은은 가슴 한편이 아파져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양시은은 지금까지 양채은의 모습도, 양채은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그녀의
사실은 나도현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도 조금 있었다.원래는 이렇게 빨리 동의할 생각이 없었지만 피곤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바뀌었다.나도현은 그녀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양시은은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그의 말이 그녀의 마음을 돌렸다.“입사 축하 선물로 밥 사주는 거야. 꽤 괜찮은 식당이 있거든. 네가 좋아하는 맛일 거야. 우리 돌아가서 하민이도 데리고 가자.”그가 하민이 얘기를 꺼내자 양시은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하민이는 사실 평소에 외출을 자주 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늘 미안한 마음이 갖고 있었다. 그래서 뭐라도 더 해주고 싶었다.그래서 나도현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 하민이를 데리고 왔다.마침 아주머니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려 했던 참이었기에 양시은은 그냥 저녁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다.외식을 하러 나간다는 소식에 하민은 너무 기뻐했다.“엄마, 뭐 먹으러 가요? 저 바비큐 먹고 싶어요!”양시은은 사실대로 이미 레스토랑을 정했놓았다고 하민이를 타일렀지만 그의 반짝이는 눈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말을 바꿨다.“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그 말을 들은 하민은 아주 기뻐했다.그가 웃는 모습을 보니 양시은도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미안하지만 아까 말한 그 식당은 못 갈 것 같아...”그녀가 말을 끝내지도 못했을 때 나도현이 운전사에게 말했다.“괜찮은 바비큐집으로 가요.”양시은은 고개를 숙이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바비큐집에 도착했다. 이 바비큐집은 인테리어가 아주 깔끔한 데다가 테이블도 각각 분리되어 있어서 깨끗했다. 그래서인지 양시은은 더욱 안심되었다. 사실 바비큐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하민이도 있는 만큼 위생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주문한 바비큐가 나왔지만 그들은 별로 먹지 않았고 대부분 하민이가 다 먹었다.하민이가 얼굴에 기름을 잔뜩 묻히며 먹는 모습을 보자 양시은은 휴지를 가져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닦아주었다.“입에 묻은 것 좀 봐.”“엄
나진 그룹은 여느 때처럼 평온해 보였고 아무리 둘러봐도 큰 논란이 일어난 회사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양시은은 프런트 데스크에 가서 나도현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나도현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살짝 웃었다.“그분은 지금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분이세요. 왜 로펌에 안 가시고 여길 찾아오셨나요?”“안 계시나요? 그럼 언제 돌아오시는지는 아세요?”양시은은 잠시 멍해져서 생각에 잠겼다.‘방금까지도 통화를 했는데 여기 없다고? 그럼 이런 상황에서 어디로 갔을까?’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죄송하지만 저도 나 변호사님의 개인 스케줄까지 알고 있진 않아서요. 궁금하시다면 직접 전화로 연락해 보시는 게 어떠세요?”양시은은 더 이상 직원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때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잠시만요. 양시은님 맞으세요?”직원이 조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양시은을 보며 물었다. 그제야 직원은 자신이 양시은의 신분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그 말을 들은 양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세요?”“나도현 변호사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당부하셨거든요. 만약 양시은님께서 오신다면 사무실에서 기다리게 하라고 하셨어요.”“그럼 금방 돌아오시는 거죠?”양시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나도현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고 혹시나 자기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양시은은 사무실에서 그를 두 시간 동안이나 기다렸다.나도현이 미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소파에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약간 엉켜 있었는데 표정에서는 피곤이 가득 묻어났다.그 모습을 본 나도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양시은은 꿈속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주 가벼운 터치여서 그저 간지럽기만 했다.그녀는 손을 들어 한 번 툭 치고는 이렇게 중얼거렸
“어떤 일자리를 찾으려고?”“모르겠어. 아직 찾고 있는 중이라...”“그럴 거면 그냥 우리 회사로 오는 건 어때?”나도현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양시은은 잠깐 당황한 듯싶더니 그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다.나도현은 마치 그녀의 생각을 예측한 듯 말했다.“결정을 서두르지는 말고. 어느 회사로 가든 월급은 그냥 그 정도일 거야. 우리 회사보다 좋은 대우는 없을 거라는 얘기지.”양시은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그녀는 나도현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 고민하더니 말했다.“생각할 시간을 좀 줘요.”나도현은 양시은을 급하게 재촉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3일이라는 시간을 주었다. 세 날 후면 하민이도 유치원에 가게 될 것이니 말이다.그때면 하민을 돌보지 않아도 됐기에 양시은도 마음 편히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그녀는 여러 곳에 이력서를 보냈지만 결과는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어떤 곳은 급여가 예상했던 것보다 적었고 어떤 곳은 싱글맘인 그녀를 원하지 않았다. 다들 그녀가 아이에게 집중하느라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양시은은 그러한 차별에 화가 났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도현이 제시한 조건이 제일 좋아 보이기 시작했다.고민에 빠진 그녀는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요. 제 친구 얘기인데 말이죠.”여기까지 들은 온지유는 바로 양시은의 고민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뭘 물어보고 싶으신데요?”“제 얘기가 아니에요.”“알겠어요. 본론부터 말해보세요.”양시은은 한숨을 깊이 내쉬고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전했다.그러자 온지유는 예상보다 더 단호하게 말했다.“뭘 더 고민할 게 있나요? 조건이 좋은 쪽을 골라야죠. 당연한 거 아닌가요?”“정말 제 얘기가 아니라요...”“알았어요, 알았어요. 아무튼 제 뜻은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다는 얘기예요. 그저 일자리를 구하는 것뿐이잖아요. 그냥 상사로 생각하면 돼요.”온지유의 생각을 들은 그녀는 잠깐 생각하다가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그래도 양시은은 바로 확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