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부.”온채린은 온지유에게 부탁할 바에는 여이현에게 부탁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저 한 달 후에 인턴 자리가 필요하거든요? 형부네 회사에 가서 해도 돼요? 그냥 그런 경력이 있다는 걸 증명하기만 하면 돼서 귀찮게 굴지는 않을 거예요.”장수희도 말을 보탰다.“그래.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다 지유 친척인데, 한 번만 도와줘. 그래야 애가 후에 좋은 일자리를 찾지.”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는 여이현까지 이용하려는 그들의 뻔뻔함이 놀라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여이현을 바라봤다. 첫 만남에 안 좋은 인상을 남겼을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이런 귀찮은 일까지 도울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다.‘나만 귀찮아졌네.’온지유는 똑똑히 알았다. 장수희 일가를 절대 도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한 번이 있으면 두 번이 생기기 마련이다. 짜증 나는 와중에도 그녀는 나긋나긋하게 말했다.“숙모 진짜 그렇게 살고 싶어요? 이현 씨한테 뭐가 있든 다 이현 씨의 것이에요. 숙모를 도울 의무는 없다는 말이죠. 사람 난감하게 굴지 마시고 이만 가세요.”“우리가 너한테 부탁했니? 이현이한테 부탁했지. 아, 알겠다. 너 재벌가에 시집가면서 20억을 받았구나?”장수희는 또 온경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주버님도 그래요. 이렇게 좋은 사위가 있으면 우리한테도 알려줬어야죠. 진작 알았으면 골치 아프게 고민할 일도 없었을 텐데.”온경준은 지금처럼 낯부끄러웠던 적이 없었다. 정말이지 얼굴을 쳐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사람이 말이야, 정도가 있어야지! 우리 사위한테 뭐 하는 짓이야!”“아이고, 가족끼리 뭘 따지고 그래요. 한쪽이 힘들면 돕는 게 당연한데. 아주버님 재벌 사위의 용돈으로도 모자란 돈이잖아요. 별로 큰 일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 이현아, 맞지?”장수희의 질문에 여이현은 말없이 온지유를 바라봤다. 그녀에게 결정권을 넘긴 것이었다.만약 온지유도 도와달라고 하면 그는 두말없이 도울 것이다. 온씨네 일에 인색하게 굴 것은 없었기 때문이
장수희 때문에 잔뜩 화났던 정미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 온지유만 잘 지내면 그녀는 세상에서 부러운 것이 없었다.두 사람의 사이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현이 말도 예쁘게 하는구나. 지유야, 봤지? 너도 이현이한테 잘 해줘야 해.”이 말을 듣고 온지유는 여이현을 힐끗 봤다. 그가 언제 정미리의 마음을 샀는지 궁금한 표정으로 말이다.여이현은 싹싹한 표정으로 정미리에게 말했다.“역시 어머님밖에 없어요.”“그럼.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다 네가 지유한테 얼마나 잘하는지 보아냈을 거야.”정미리는 이렇게 말하며 온경준을 바라봤다. 온경준도 기쁨과 슬픔이 섞인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기쁜 이유는 온지유가 좋은 집안에 시집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슬픈 이유는 이 행복이 얼마 가지 못할까 봐 조바심이 나서였다.잠시 후 간호사가 와서 입원 수속은 끝났고 일주일 후에 퇴원할 수 있다고 알렸다. 여이현과 온지유는 잠깐 더 얘기하다가 떠났다.온경준은 두 사람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기에 몇 번이나 재촉했는지 모른다. 온지유는 밖으로 나가면서 섭섭한 듯 말했다.“아빠는 번마다 이래요. 힘든 일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아요. 만약 제가 먼저 발견하지 않았다면 엄청 억울했을 거예요.”여이현은 온지유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이제 내가 있잖아. 아버님이 힘들어지는 일은 없을 거야.”온지유는 묵묵히 여이현을 바라봤다. 장수희가 하는 말을 그도 전부 들었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들었다. 집안에서 가장 부끄러운 일을 들키게 되었으니 말이다.이러다가는 여이현도 귀찮게 만들 것 같아서 그는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이현 씨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원래도 아빠만 마음먹으면 거절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전에는 마음 약해서 거절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예요.”온경준도 당할 만큼 당했으니 더 이상 만만하게 굴지는 않을 것이다.여이현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주춤거리
노승아가 맡을 수 있는 배역은 별로 많지 않았다. 여씨 가문의 파티에서 여이현이 대놓고 그녀를 내치는 바람에 체면도 깎이고 말았다.연예계의 특성상 그녀는 비웃음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또다시 여이현을 찾아갔다. 여이현은 무조건 그녀를 도와줄 것이고, 장차 그녀의 스폰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덕분에 그녀는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촬영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온지유와 기 싸움할 시간도 없었다.온지유는 조용한 생활이 좋기만 했다. 애초에 노승아와 귀찮게 얽히고 싶지도 않았다. 괜히 얽혀 봤자 감정만 상할 것이기 때문이다.이윤정은 온지유의 곁에서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온 비서님, 이번에는 제가 틀렸어요. 그동안 했던 말에 사과할게요. 이제 더 이상 비서님이랑 대표님을 엮는 일은 없을 거예요.”“왜 갑자기 생각을 바꿨어요?”이윤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근데 대표님 말이에요. 유부남이면서 다른 여자랑 살림을 차린 거예요? 이걸 보니 대표님이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란 건 알겠어요. 죄송하지만 저 대표님이 온 비서님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왠지 제가 온 비서님한테 못된 짓을 한 것 같네요. 아무리 잘난 대표님이라고 해도 문란한 남자는 절대 안 돼요.”이윤정은 고개를 내저으며 온지유가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바란다고 했다. 온지유는 자료를 정리하며 대답했다.“윤정 씨 또 누구한테 헛소리 들은 거예요?”“헛소리 아니에요! 제가 직접 봤어요. 그날 그 여자, 비서님도 봤잖아요. 정말 매일같이 찾아오더라고요. 오늘 점심에도 올 거예요.”온지유는 생각에 잠겼다. 이윤정이 본 여자가 누구인지 바로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이때 그녀는 갑자기 별장에서 살고 있는 주소영이 떠올랐다.“대표님 아내분은 대표님이 밖에서 뭘 하는지 신경도 안 쓰나 봐요. 아니면 모르는 건가요? 아무튼 아내분도 참 불쌍해요.”이윤정은 약간 화가 난 듯 말을 이었다.“제가 만약 그런 상황에 부딪혔다면 도망가고 말았을 거예요. 저는 차라리 평범하더
며칠 연속 주소영과 마주친 카운터 직원은 그녀가 정말 끈질기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제가 확인해 볼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주소영은 기대를 갖고 얌전히 기다렸다.“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전화를 걸어 대답을 들은 직원은 주소영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대표님은 회사에 계시지 않습니다. 다음에 다시 오세요.”‘매번 없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이번에 주소영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고집스럽게 물었다.“대표님한테 전화 한 번만 걸어주면 안 될까요? 소영이 도시락을 준비해 와서 기다린다고 해주세요. 저는 도시락만 전하고 떠날게요.”직원은 여이현에게 들이대는 여자를 많이 봐왔다. 주소영도 그중 한 명일 뿐이기에 당연히 내쫓으려고 했다.“대표님은 바쁘셔서 예약하지 않은 분을 만나지 않습니다.”“저는 남이 아니에요. 저는...”주소영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죄송합니다. 제 일을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직원이 다시 한번 경고했다.그러나 주소영은 이미 며칠이나 기다렸다. 그 며칠 동안 그녀는 마음 편히 별장에서 지낼 수 없었다.“그럼 제가 직접 찾아갈게요.”“안 됩니다.”지난번 주소영은 온지유의 이름을 빌려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이번에는 제 입으로 여이현을 만나러 왔다고 했으니 당연히 들여보낼 수 없었다.직원은 경비를 시켜서 주소영을 막았다. 주소영은 끝까지 손에 든 도시락을 단단히 들고 있었다. 여이현이 맛 보기 전에 망가뜨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그만해요.”경비에 둘러싸인 주소영을 보고 온지유가 말했다.“온 비서님. 이 여자분 또 왔어요.”주소영은 고개를 들어 온지유를 보자마자 구세주라도 본 듯이 외쳤다.“지유 씨.”그녀는 빠르게 온지유 곁으로 달려갔다.“이 사람들이 저를 못 들어가게 해요. 저는 그냥 대표님한테 음식을 드리려고 했을 뿐인데... 그래도 지유 씨가 와서 다행이에요.”주소영이 온지유와 친한 것을 본 직원은 침묵에 잠겼다. 물
온지유는 들을수록 어이가 없었다.“괜히 착각하지 마요. 난 사실만 말했으니까요.”“그럼 지유 씨는 대표님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요?”주소영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온지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인정하는 거죠?”주소영은 자신의 직감을 맹신했다. 그래서 온지유가 여이현을 좋아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지난 세월 동안 여이현은 온지유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두 사람 사이에는 가능성이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지유는 다른 여자가 여이현을 좋아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 듯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여이현이 스캔들이 적은 것도 이해가 갔다. 그사이에는 무조건 온지유의 방해가 있었을 것이었다.“지유 씨, 우리 공평하게 경쟁해요. 그래야 제가 졌을 때 납득할 수 있죠.”주소영은 진심 어리게 말했다.“만약 대표님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깔끔하게 물러날게요. 다시는 찾아오는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해요.”온지유는 웃음만 나왔다.“제가 정말 주소영 씨를 경쟁 상대로 본다고 생각해요?”“알아요. 지유 씨는 대표님 곁에 오래 있었으니 정이 들 수밖에 없었겠죠. 하지만 그건 남녀 사이의 정이 아니라 하급자가 상급자에 대한 정이에요. 저는 다 이해해요. 그러니 지유 씨도 저를 이해해 줬으면 해요.”주소영의 말 중에서 온지유가 상처받은 건 딱 하나다. 하급자가 상급자에 대한 정, 이 말에 그녀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그녀는 이를 너무 잘 알기에 한 번도 선을 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그녀인데도 지금은 약간 흔들렸다.주소영의 얼굴은 노승아와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이윤정의 말대로 여이현은 정말 이런 타입의 여자에게 관심 있는지도 모른다.온지유는 마음을 다잡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아무도 슬픔을 보지 못할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주소영 씨 당신은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아요. 나를 가상의 적으로 삼지 마요. 만약 주소영 씨가 대표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차는 금방 회사 앞을 떠났다. 점점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온지유는 주먹을 꽉 쥐었다.“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대표님과 아는 사이였던 거예요?”“저렇게 안고 갔는데 모르는 사이일 리가 없죠. 대표님이 저희 책임을 물으면 어떡하죠?”직원들의 말소리를 듣고 온지유는 저도 모르게 우울해졌다. 그녀는 여이현이 여자에게 매정한 모습도, 다정한 모습도 전부 본 적 있다. 기준은 여이현이 그 여자에 대한 마음에 있었다.여이현은 노승아를 좋아한다. 그래서 자그마한 상처도 용납하지 못하고 당장 병원에 데려갔다. 주소영도 마찬가지다. 사고가 나기 바쁘게 그녀는 병원에 가고 있다.직원은 잔뜩 당황한 표정이었다. 자신 때문에 주소영이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직원은 온지유가 아직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다가갔다.“온 비서님, 만약 대표님이 책임을 물으시려고 한다면 대신 설명 좀 해주세요.”온지유는 정신 차리고 감정을 다잡았다.“사고는 우연히 일어난 거예요. 여러분이 자책할 필요는 없어요. 대표님이 나중에 책임을 물으시면 제가 설명할게요.”“고마워요, 온 비서님.”직원들은 안심하며 말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여이현이 주소영을 데리고 나간 지 10분도 안 돼서 사무실에는 온통 그 소식뿐이었다.사람들은 여이현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고 떠들어댔다. 그는 여전히 그런 타입의 여자를 좋아한다면서 말이다.온지유는 여이현이 어떤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노승아와 주소영은 어떤 유형인지, 그리고 자신은 그들과 얼마나 다른지 생각했다.‘언제쯤이면 나도 대표님의 취향이 되어서 사랑을 받을까?’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너무 순진하게 느꼈다.타고난 성격은 이미 정해져 있다. 성격을 바꾼다고 해도 잠깐의 관심만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럴 바에는 자신답게 사는 게 나았다.퇴근 후, 온지유는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강태규를 찾아갔다. 온경준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뿐더러 정미리가 돌봐주고 있어서 가지
강태규는 윗세대와 공감할 수 있었다. 전쟁 끝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막강한 실력이 있어야만 다른 나라에서 무시하지 않아. 정말 어렵게 얻은 평화인데 잘 지켜내야지.”온지유는 윗세대의 잔혹함을 직접 겪지 않았다. 그래도 강태규의 벨 에포크가 젊은 시절에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는 나이가 들어도 나라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열정적인 사람이다. 지금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강태규는 눈가가 붉어졌다.온지유는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그의 다리에 남아 있는 총상 자국을 보았다. 그것만 봐도 그들의 고생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었다.“어르신, 우리나라는 충분히 강해요. 더군다나 인재도 많으니 전쟁이 일어날 일은 없을 거예요.”온지유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강태규는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너무 자만해서는 안 된다.”이때 그는 무언가 떠오른 듯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그래도 인재가 많은 건 사실이야. 이현이 같은 녀석도 있고. 젊은 나이에 벌써 큰 공을 세웠잖니. 그 녀석은 원래 내 후계자였어. 고집스러운 늙은이가 가업을 잇게 한다고 데려가지만 않았어도... 이현이가 나를 따랐었다면 아마 나보다 더 대단한 공을 세웠을 거야.”온지유는 깜짝 놀랐다. 여이현이 회사를 물려받기 전이라면 아마도 그녀가 처음 여이현과 만났던 시기일 것이다.‘혹시 그때 임무 집행 중이었을까?’“지유야, 난 널 믿으니까 하는 말이야.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네, 알겠어요.”언젠가 여이현이 두 가문이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것은 의심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강태규가 여이현과의 사이를 비밀로 하려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온지유는 그의 말을 마음에 새겼다.그녀는 강태규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담요를 덮어 주었다. 다행히 바람은 따뜻했다. 강태규의 안색도 좋아 보였다.온지유는 강태규가 단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요즘은 치아가 받아 주지를 않아서 못 먹는 것으로 알
강태규는 온지유를 경고하고 싶었다. 여이현을 잘 단속해야 한다고 말이다.강태규가 아픈 몸으로 자신까지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온지유는 미소 지은 얼굴로 대답했다.“알았어요. 이번에는 저도 이미 아는 일이라 괜찮아요. 시간이 늦었는데 이만 들어갈까요? 이러다가 감기 걸리시겠어요.”“그래.”강태규도 눈치껏 입을 닫았다.강태규를 병실에 바래다준 다음 온지유는 산부인과에 가봐야 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했다. 이때 마침 주소영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유 씨, 병원에서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저 할 얘기가 있어요.”온지유는 바로 주소영의 병실로 향했다.병실 밖에 서 있던 배진호는 온지유가 온 것을 보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오면 안 되는 곳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사모님이 어떻게 오셨어요?”억지 미소를 지은 배진호와 달리 온지유는 아주 무덤덤했다.“무슨 일 있어요?”“아... 저 일단 대표님한테 와보시라고 할게요.”배진호의 반응에 온지유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저한테 숨길 일이라도 있어요?”배진호는 말할지 말지 한참이나 망설였다. 그러다가 병실에 있는 주소영을 힐끗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냥 직접 들어가서 확인하세요.”온지유는 병실 안의 주소영을 힐끗 봤다. 그녀는 어두운 안색과 반대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지유 씨, 왔어요.”그녀는 침대에서 내리려다가 다시 발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죄송하지만 제가 침대에서 내릴 수 없어서요. 대표님이 조심해야 한다고 그렇게 잔소리를 하고 갔어요. 괜찮죠?”배진호는 주소영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거슬렸다. 없는 말을 지어내는 능력이 이토록 뛰어난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온지유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어디 다쳤어요?”“피부가 살짝 까진 게 전부여서 큰 문제는 없어요.”‘그런데도 입원했다고...?’“하지만 알고 보니 제가 임신했더라고요.”이 말을 들은 온지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진 그룹은 여느 때처럼 평온해 보였고 아무리 둘러봐도 큰 논란이 일어난 회사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양시은은 프런트 데스크에 가서 나도현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나도현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살짝 웃었다.“그분은 지금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분이세요. 왜 로펌에 안 가시고 여길 찾아오셨나요?”“안 계시나요? 그럼 언제 돌아오시는지는 아세요?”양시은은 잠시 멍해져서 생각에 잠겼다.‘방금까지도 통화를 했는데 여기 없다고? 그럼 이런 상황에서 어디로 갔을까?’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죄송하지만 저도 나 변호사님의 개인 스케줄까지 알고 있진 않아서요. 궁금하시다면 직접 전화로 연락해 보시는 게 어떠세요?”양시은은 더 이상 직원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때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잠시만요. 양시은님 맞으세요?”직원이 조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양시은을 보며 물었다. 그제야 직원은 자신이 양시은의 신분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그 말을 들은 양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세요?”“나도현 변호사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당부하셨거든요. 만약 양시은님께서 오신다면 사무실에서 기다리게 하라고 하셨어요.”“그럼 금방 돌아오시는 거죠?”양시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나도현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고 혹시나 자기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양시은은 사무실에서 그를 두 시간 동안이나 기다렸다.나도현이 미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소파에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약간 엉켜 있었는데 표정에서는 피곤이 가득 묻어났다.그 모습을 본 나도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양시은은 꿈속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주 가벼운 터치여서 그저 간지럽기만 했다.그녀는 손을 들어 한 번 툭 치고는 이렇게 중얼거렸
“어떤 일자리를 찾으려고?”“모르겠어. 아직 찾고 있는 중이라...”“그럴 거면 그냥 우리 회사로 오는 건 어때?”나도현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양시은은 잠깐 당황한 듯싶더니 그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다.나도현은 마치 그녀의 생각을 예측한 듯 말했다.“결정을 서두르지는 말고. 어느 회사로 가든 월급은 그냥 그 정도일 거야. 우리 회사보다 좋은 대우는 없을 거라는 얘기지.”양시은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그녀는 나도현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 고민하더니 말했다.“생각할 시간을 좀 줘요.”나도현은 양시은을 급하게 재촉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3일이라는 시간을 주었다. 세 날 후면 하민이도 유치원에 가게 될 것이니 말이다.그때면 하민을 돌보지 않아도 됐기에 양시은도 마음 편히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그녀는 여러 곳에 이력서를 보냈지만 결과는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어떤 곳은 급여가 예상했던 것보다 적었고 어떤 곳은 싱글맘인 그녀를 원하지 않았다. 다들 그녀가 아이에게 집중하느라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양시은은 그러한 차별에 화가 났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도현이 제시한 조건이 제일 좋아 보이기 시작했다.고민에 빠진 그녀는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요. 제 친구 얘기인데 말이죠.”여기까지 들은 온지유는 바로 양시은의 고민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뭘 물어보고 싶으신데요?”“제 얘기가 아니에요.”“알겠어요. 본론부터 말해보세요.”양시은은 한숨을 깊이 내쉬고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전했다.그러자 온지유는 예상보다 더 단호하게 말했다.“뭘 더 고민할 게 있나요? 조건이 좋은 쪽을 골라야죠. 당연한 거 아닌가요?”“정말 제 얘기가 아니라요...”“알았어요, 알았어요. 아무튼 제 뜻은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다는 얘기예요. 그저 일자리를 구하는 것뿐이잖아요. 그냥 상사로 생각하면 돼요.”온지유의 생각을 들은 그녀는 잠깐 생각하다가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그래도 양시은은 바로 확답을
양시은의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급히 뛰어가 하민의 상태를 확인했다.“괜찮아? 아프지 않아? 엄마가 호 불어줄게.”“안 아파요. 제 부주의로 이모한테 부딪혔어요...”하민은 조금 부끄러워하며 옷자락을 움켜잡았다.양시은은 고개를 들고 부딪힌 사람에게 사과하려 했지만 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떠나버렸다.그 여자는 왠지 무섭게 생긴 것 같았다.“마스크를 쓴 데다가 사람이 정상인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어. 찾지 않아도 돼.”나도현이 이마를 찌푸리면서 말했다.그의 말을 듣고 양시은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다행히 하민이도 세게 다치지 않았으니 말이다.“너무 과보호하지 마. 이 정도로 넘어지고 부딪히는 건 괜찮아.”“알아. 그냥 쉽게 걱정하던 습관이 잘 고쳐지지 않으니까 그러는 거지.”양시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쉽게 고칠 수 있는 습관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이 작은 사건은 그들에게 별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하민이랑 즐겁게 학용품을 고르며 시간을 보냈다.하지만 그들은 금방 하민이와 부딪혔던 여자가 마스크를 벗고 구석에서 몰래 이 행복한 장면을 찍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양시은은 하민에게 필통, 책가방, 연필 등을 사주며 학용품 쇼핑을 마쳤고 그 후 하민이와 함께 아이스크림도 먹으러 갔다.하루 종일 놀고 나니 지친 하민은 차 안에서 곧바로 잠들었다.계속 하민이를 품에 안고 있자니 양시은은 손이 조금 아팠다. 그녀가 손목을 풀고 있을 때, 나도현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내가 안을게. 집까지 가려면 아직 시간이 좀 걸려. 너도 피곤하잖아.”양시은은 조심스럽게 하민을 그의 품으로 옮겼고 하민이는 나도현의 품에 안겨 편안한 자세를 찾더니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그 모습을 보고 있는 양시은의 표정이 저절로 부드러워졌다.점점 피곤해하던 그녀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더니 결국 자신이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양시은은 나도현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잠에 들었고 나도현은 그녀가 편
양시은은 왠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뭔가 속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내 착각인가?’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하민은 눈물을 닦던 동작을 멈추고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양시은을 살짝 엿보더니 입을 열었다.“아저씨, 나 방금 잘했죠?”나도현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정말 잘했어.”하민과 나도현은 동시에 웃었다.점심 식사를 끝낸 후 하민은 또다시 나도현에게 달라붙어 같이 놀자고 했다.양시은은 그를 막고 싶었지만 나도현은 휴대폰을 한 번 들여다보더니 말했다.“회의가 취소됐대. 시간 많으니까 걱정하지 마.”하민은 나도현에게 계속 매달렸고 나도현도 거절하지 않고 저녁이 될 때까지 그와 함께 있었다.밤이 깊어지자 양시은은 어느새 나도현과 하루 종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는 나도현을 배웅하며 문을 열어주었다.그는 빨간 벨벳으로 덮인 작은 상자를 양시은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너한테 주려고 했던 선물이야.”“이게 뭔데?”“열어보면 알게 될 거야.”양시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는 반짝이는 반지가 들어 있었다.반지를 보는 순간, 그 평범해 보이던 상자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고 양시은은 오늘 하루가 모두 나도현의 계획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이런 건 받을 수 없어...”“프러포즈 같은 게 아니야. 그냥 선물일 뿐이야. 경매품이었던 반지도 좋아했잖아? 그래서 비슷한 걸 골랐어.”나도현은 태연하게 말했다.상자 속 반지는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양시은은 그것이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이 반지는 그녀가 경매에서 샀던 반지와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양시은이 경매에서 구입한 반지는 4천만 원이면 살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 반지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는 반지 중 하나였다.“너무 비싸잖아. 받을 수 없어. 나는 신세를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야. 뭐든 받은 만큼 되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양시은은 반지를 도로 나도현에게 돌려
나도현은 그 오렌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그러자 양시은이 본능적으로 접시를 치우려 했다.“아저씨는 오렌지를 안 드신...”“고마워, 하민아. 마침 딱 오렌지가 먹고 싶었거든.”나도현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그러자 양시은은 잠시 멈칫했다.‘음식도 겉보기로 판단하던 사람이 웬일이래? 못생긴 음식이라고는 손에 대지도 않던 사람이...’나도현은 외식조차 자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깜짝 놀란 양시은과는 달리 나도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오렌지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는 하민이에게 예쁘게 잘랐다고 칭찬까지 했다.엄마인 양시은이 봐도 엉망으로 잘린 오렌지였는데 말이다. 그녀조차도 그릇에 있는 오렌지를 보고 아무 칭찬도 할 수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하민을 달래서 방으로 보냈다.그리고는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여기까지 온 건 이유가 있어서겠지?”“나한테 이렇게 차갑게 대할 필요는 없어.”“그럼 내가 어떤 태도로 너를 대야 할까?”양시은의 날카로운 반문에 나도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미안... 그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그리고 또... 하민이도 이젠 퇴원했으니까 학교에 갈 준비를 해야 해. 어제 명진 씨가 집에 찾아와서 전해주시더라고.”나도현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돌렸다. 그 말을 들은 양시은은 깜짝 놀라더니 미소를 지었다.“하민이가 학교에 갈 수 있다고?”선천적인 심장병을 가진 아이가 학교에 가는 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많은 걱정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었다.학교는 집과 달라서 다치거나 넘어지기도 쉬운 곳이었다.전부터 양시은은 늘 하민의 상태를 걱정해 왔다. 수술 이후에도 여전히 신경을 써야 할 것들이 많았고 예전부터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습관은 바꾸기 어려웠다.그녀는 하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두려웠다.나도현은 몇 장의 서류를 그녀에게 건넸다.“내가 프린트한 서류야. 어느 학교가 마음에 드는지 보고 연락해.”그 서류를 받아 들고 진지하게 살펴보던 양시은은 금방 깨달
“명진 씨?”온지유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얼굴에 진심 어린 미소를 띠었다.인명진은 옆에 있는 작은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이네.”“하민이 보러 온 거예요? 손에 약상자를 들고 있으시길래...”“아니, 시은 씨한테 약을 좀 전해주려고 왔어.”인명진은 어떻게 된 일인지 간단히 설명하면서 온지유에게 양시은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 말을 들은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양시은의 상태를 보러 가고 싶어 했다.하지만 인명진은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지금은 많이 안정됐어. 그렇게 심각한 정도도 아니거든. 다만 여동생의 죽음이 시은 씨한테 너무 큰 충격을 안겨줬을 뿐이야. 게다가 그 외의 여러 요인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지.”“그럼 다행이네요.”잠시 양시은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나서 인명진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요즘은 어떻게 지내?”“잘 지내죠. 명진 씨는요?”온지유는 잠깐 멈칫하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병원 일이 바쁘긴 한데 예전보단 나아.”“그래 보이긴 해요. 명진 씨처럼 바쁜 사람은 드물죠. 저는 매일 사소한 일들에 신경 쓰느라 바빠요. 집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문제부터 큰 문제까지 다 신경 써야 하니까요.”그렇게 말하면서도 온지유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잘 지내고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인명진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지만 그래도 더 많은 건 안도감과 만족스러운 감정이었다. 그의 눈가에 미소가 번졌고 그 미소는 인명진이라는 사람 자체를 온화하게 만들어 주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했고 그는 떠나는 온지유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멀리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그는 오랫동안 그들을 바라보았다.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을 때에야 그는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 눈을 깜빡이더니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예전처럼 차가운 인명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약을 전해주러 간 인명진 역시 양시은을 보지 못했지
양시은은 의심하는 듯한 나도현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도현아, 너 지금 내 동생을 의심하는 거야?”“그런 뜻은 아니었어.”나도현은 이마를 문지르며 자신의 표현이 잘못됐다고 설명했다.그러나 양시은은 듣지 않았다.“나도현... 아니, 강태경이라고 불러야 하나? 채은이가 널 위해서 얼마나 많은 걸 희생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어떻게 채은이를 의심할 수 있어?”“시은아, 그런 뜻은 아니었어...”양시은은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방금까지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나도현에게 알려줘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를 찾은 것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언젠가는 양채은을 데려올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나도현의 반응은 그녀를 실망하게 만들었다.양시은은 요즘 와서야 그에게 조금 부드러워진 태도를 보였지만 또다시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내가 잘못했네. 너라면 내 마음을 이해해 줄 줄 알았거든? 아니었어. 역시 남자는 믿으면 안 돼.”나도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양시은을 붙잡았다.“내가 널 이해하지 못한다고? 시은아, 내가 널 어떻게 더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하는 건 양채은이 아니라 너야. 게다가 채은이는 원래부터 좀 의심스러웠어.”“채은이가 왜 지금까지 죽은 척하면서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해봤어?”“네 말 듣고 싶지 않아!”양시은은 또다시 그의 말을 끊었다. 순식간에 치밀어오른 화로 인해 그녀의 호흡이 빨라지며 평소보다 훨씬 더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그러자 나도현의 눈빛이 부드럽게 변했다.“미안해... 내가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했어. 그러니까 일단 진정해. 약 안 먹었어? 내가 도우미를 불러서 가져오라고 할게.”말을 마친 나도현은 도우미를 불러 약을 가져오라고 했다.그러자 두 번 크게 숨을 쉰 양시은은 조금 진정됐는지 차갑게 말했다.“괜찮아. 만약 네가 채은이가 돌아오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나 혼자서 찾아볼게. 그동안 내가 많이 신세 졌어.”양시은은 계단을 올라가며
그 말을 들은 양시은이 하민의 말을 극구 부인했다.“하민아, 엄마 화 안 났어. 왜 그렇게 생각해?”양시은은 하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안심시켰다.“엄마가 예전처럼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괜찮아. 어른들한테는 항상 많은 걱정거리가 있는 거거든.”천진난만한 하민이를 바라보며 양시은은 자신의 고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저런 방식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어떻게 보면 걱정거리가 맞긴 하니까...’하민은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이해한 듯 양시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위로했다.“하민이는 엄마가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그러니까 제 기쁨 중 절반을 나눠줄게요.”그 말에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고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그 후, 양시은은 하민이와 함께 놀아주었다. 그러다가 밖에서 놀고 싶었는지 하민이는 갑자기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민이가 도대체 뭘 하러 간 건지는 그녀조차 몰랐다.양시은은 하민이가 멀리 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사실 하민이는 그저 침실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아저씨, 말한 대로 했는데도 안 알려주는데요? 어떻게 할까요?”하민은 나도현의 목을 끌어안고 말했다.나도현은 하민의 코를 톡톡 건드리며 칭찬했다.“그래도 잘했어. 하민이가 엄마를 웃게 했잖아. 그게 제일 멋진 거야.”그 말을 들은 하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어린아이와 어른의 기쁨은 결국 무게가 다른 것이었다.하민이가 준 위로는 일시적이었다. 양시은은 그런 단순한 위로로 바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고 나도현도 그녀가 걱정돼서 점점 우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양시은은 익명의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문자 내용은 딱 한 줄 뿐이었다.“나 채은이야. 누군가가 두 사람한테 해를 끼치려고 하니까 꼭 조심해야 돼.”그 문자를 본 양시은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고 의자는 뒤로 넘어져 버리면서 큰 소리를 냈다.그 소리를 듣고 도우미가 달려왔다.“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그녀는 계속해서
“아까 본 사람 말이야. 채은이가 맞을까?”양시은은 나도현을 꽉 붙잡으면서 물었다.“안돼. 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불이 그렇게 큰데 혹시나 벗어나지 못했으면 어쩌지?”양시은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그녀의 여동생도 화재로 죽은 것이었으니 말이다.‘채은이가 아직 살아있다면? 살아있는데 또 내 부주의로 화재 속에서 죽게 된다면?’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양시은은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시은아, 가지 마. 이미 경찰들이 다 막아놔서 들어갈 수도 없어.”나도현은 그녀를 말렸다.“하지만 정말 채은이라면...”“너도 채은이라고 확신 못 하잖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잖아. 왜 그런 불확실한 걸 위해서 죽을 위험까지 감수하려고 해? 네가 다치면 하민이는 어떡하려고?”나도현은 한마디 덧붙이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네가 다치면 난 어떡해?’양시은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눈시울을 붉혔다.나도현은 그녀를 품에 안아주며 말했다.“내가 비서를 보내서 찾으라고 할게. 우리는 집으로 가자.”집으로 가자는 말에서 양시은은 따뜻한 온기를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때의 양시은은 몰랐다. 근처에 한 대의 밴이 주차되어 있었고 차 안에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웨이브 펌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마치 어두운 밤 속에서 피어난 장미와 같은 미모를 가졌다.만약 양시은이 그곳에 갔더라면 분명 깜짝 놀랐을 것이다.왜냐하면 그 여인이 바로 양시은이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양채은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일부러 풀어준 거죠?”운전석에 앉은 남자한테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채은은 깜짝 놀라며 부인했다.“그런 거 아니에요.”“거짓말하지 마요. 다 봤거든요! 한 번 죽었으면서 아직도 그렇게 네 언니를 생각해 주는 건가요? 참 눈물겨운 혈연이네요.”“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그 남자는 그녀가 하는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쪽이 뭐라고 변명하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