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녀의 뜻대로 움직였으니 분명 그녀가 좋아할 거로 생각했다.그러나 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소영은 점점 굳어지는 두 사람의 표정에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말했다.“온지유 씨, 저랑 이따가 식사 같이해요.”“있잖아요, 아주머니 음식 솜씨 아주 훌륭했어요.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주머니가 뭐든 다 하실 줄 아시더라고요, 정말 대단하시죠? 그러니까 꼭 아주머니 음식 솜씨 맛보고 가세요!”주소영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온지유는 그런 그녀를 보며 말했다.“괜찮아요...”“에이, 제가 안 괜찮아요.”주소영은 빠르게 대답하며 여이현을 보았다.“대표님, 저 온지유 씨랑 같이 밥을 먹어도 되죠? 저 여기 그동안 혼자 오래 있었다고요. 밥 같이 먹는 사람도 없어서 얼마나 외로웠는데요.”여이현은 온지유를 힐끗 보곤 담담하게 말했다.“마음대로 해.”원하는 대답을 들은 주소영은 온지유에게 더 들러붙어 놓아주지 않았다.“봐요, 대표님께서도 허락하셨어요. 그러니까 같이 먹어요.”아마도 여이현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온지유를 더 꽉 붙잡고 있었던 것 같았다.“그래요.”온지유는 더는 거절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식사하겠다고 대답했다.“이 쓸쓸한 집안에 드디어 사람 온기가 생겼네요. 저 정말 너무 기뻐요!”주소영은 웃으며 말했다.여이현은 온지유를 힐끗 보곤 차갑게 말했다.“온 비서, 계속 거기 그렇게 서 있을 건가요?”그의 불쾌한 시선을 느낀 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지금 얼른 주방으로 갈게요.”그러나 주소영은 그녀를 주방으로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아녜요. 온지유 씨는 손님인데 주방으로 갈 수는 없죠. 그냥 여기서 저랑 같이...”온지유가 말허리를 잘랐다.“그래도 제가 주방에 가 있는 것이 나을 것 같네요. 하던 얘기 계속 나누세요.”그녀는 주방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솔직히 욱하는 마음에 그들 앞에서 사라져줄 생각이었다.주소영이 그
그녀의 말에 온지유는 결국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주소영은 입꼬리를 올린 채 웃고 있었다. 동경의 눈빛이라 아마도 여이현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은 듯했다.그리고 그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네, 뭐 그럭저럭.”온지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래서 뭐가 알고 싶은 건데요?”주소영은 솔직하게 말했다.“뭐든 다 알고 싶어요. 제가 이렇게 대표님에 대해 더 알아가면 혹시 대표님께서 불쾌해하실까요?”온지유가 물었다.“대표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가고 대표님을 기쁘게 해드리면 대표님이 주소영 씨를 더 좋아할 거로 생각하시는 거예요?”주소영은 쑥스러운 듯 볼이 발그레해졌다.“온지유 씨에게 제 마음을 들킬 줄은 몰랐네요. 그럼 대표님께서도 눈치채셨겠죠? 제가 대표님을 좋아한다는 것을요!”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소영은 자신의 야망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다시 생각해보니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대표님께선 뭐든 다 알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제가 그런 마음을 품으면 제가 너무 저렴해 보이지 않을까요?”주소영은 아주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여이현 마음속 1순위가 되고 싶었다.“전 집안도 뭣도 없지만, 대표님께선 절 무시하지 않으셨어요.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긴 한데 제가 여기서 뭘 더 바라면 제 욕심인 것 같네요. 지금은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그녀는 온지유를 보면서 해답을 얻길 바랐다.“온지유 씨, 제가 만약 대학에 다니고 열심히 공부해 나중에 성공하면 집안은 일단 제쳐두고 대표님께 어울리는 사람이 될까요?”그녀의 생각은 아주 대담했고 바로 직설적으로 온지유에게 물었다.어떤 부분에선 그녀와 주소영이 조금 닮아 있는 것 같았다.주소영의 모습에서 온지유는 예전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한 사람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그 의지를 말이다.그녀는 주소영에게 물었다.“왜 대표님을 좋아하는 거예요?”주소영이 답했다
여이현은 그녀가 이런 말을 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그럼 지난번에는 왜 말을 안 했던 거지?”“지난번에 말할 기회를 안 줬잖아요.”온지유는 지난번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리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혀 말할 기회가 없었다.여이현은 의아한 듯 또 물었다.“주소영을 데리고 온 사람이 네가 아니라면 네가 누군지 몰라야 하는 거 아닌가? 난 주소영을 처음 봤을 때 너랑 아주 친해 보이기에 아는 사인 줄 알았거든.”그녀가 했던 말과 행동은 확실히 설명하기 어려웠다.다행히 주소영을 찾으러 갔을 때 그녀는 상세하게 말해주지 않아 주소영이 누구의 대체품인지 아무도 몰랐다.그 덕에 지금 그녀에게 또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 것이다.“확실히 전 주소영 씨와 두 번 만난 적이 있었어요.”온지유는 부정하지 않았다.“대표님께서 저더러 찾으라고 하신 거잖아요. 대표님이 저한테 맡기신 임무이니 당연히 중시해야죠.”여이현은 그녀의 말에 트집을 잡았다.“주소영이 찾아오지 않으면 나한테 말하지 않고 계속 숨길 생각이었어?”순간 온지유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행여나 여이현이 그녀가 일부러 숨기고 있었다고 생각할까 봐 얼른 설명했다.“전 그때 제대로 완벽하게 알아내지 못한 것 같아서 말씀드리지 않았던 거예요. 만약 주소영 씨가 대표님께서 찾으시는 여자였다는 거 알았다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데리고 왔을 거예요.”솔직히 말해 그녀는 지금까지 여이현이 화내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그녀는 줄곧 여이현이 시킨 일은 최선을 다해 완성했고 책임도 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책임이 아닌 일에선 책임지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온지유는 자신이 아직도 그의 아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여이현은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담담하게 말했다.“알았으니까 나가 봐.”그녀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여이현은 앞으로 더는 그녀에게 이 일에 관해 책임지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네, 그럼 푹 쉬세요. 식사 준비가 되면 다시 부르러 올게요.”온지유가 말했다.그녀는 밖으로 나가 조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주소영은 온지유가 연이현을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온지유가 후회하여 그녀를 데리고 오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그녀가 여이현에게 큰 영향을 끼쳐 자리를 빼앗을까 봐 그런 것 같았다.어쩐지 온지유의 태도가 변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여이현을 좋아하고 있으니 다른 여자가 끼어드는 것이 용납되지 않아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만약 온지유가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여이현은 평생 그녀가 여이현과 함께 밤을 보낸 여자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온지유는 어떻게든 이 사실을 숨기고 그녀를 돌려보내려 했을 가능성이 아주 컸다.처음부터 주소영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은 그녀도 처음이라 무섭고, 긴장되었지만 상대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했었다.그녀는 여이현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딱히 그를 찾아가 귀찮게 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냥 작별 인사나 하려고 했었다.그러나 여이현은 그녀에게 잘해주고 다정하게 대해주며 곁에 머물게 해주었다.그런 그의 행동에서 그녀는 보호받는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알게 되었다.그래서 남기로 했다.그녀가 남기로 한 것은 어쩌면 온지유에게 일종의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여이현은 전화를 받으러 가더니 급한 일이 생겼다며 온지유에게 말했다.“난 다른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니까 온 비서는 그 우유를 다 마시고 있어요. 그래도 힘들면 퇴근해 푹 쉬고요.”“네, 알겠습니다.”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이곤 주소영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롤스로이스는 그렇게 대문 앞에서 사라졌다.여이현이 자신에게 인사도 없이 떠나자 주소영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고 씁쓸한 기분이 밀려왔다.변한 것 같았다.처음 여이현의 두 눈엔 그녀만 담겨 있었다.그러나 온지유가 나타난 뒤로 그의 두 눈엔 더는 그녀가 담기지 않았다.온지유가 그에게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그녀는 다시 한번 온지유를 보았다.온지유는 느긋하게 달달한 우유를 마시고 있었
“아주머니가 만드신 음식이 맛있다고 했죠. 그럼 많이 먹어요.”온지유는 컵을 내려놓으며 더는 그녀와 함께 어울려주지 않으려고 했다.그녀가 떠나는 이유도 여이현이 이곳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소영은 이때가 아니면 나중에 물어볼 기회가 없을까 봐 그녀가 떠나기 전에 물었다.“평소엔 제가 하는 질문에 피하지 않고 전부 대답해 주셨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전부 피하고 계시네요. 온지유 씨, 대표님 좋아하시죠? 아까 저한테 하신 말도 위기감을 느껴서 하신 말이시죠? 사실 제가 나타나질 않길 바라고 계셨죠? 저랑 대표님이 밤을 같이 보내서 온지유 씨는 엄청 불쾌하신 거잖아요!”그녀의 말에 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몸을 틀었다.주소영은 자신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온지유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더는 겁 많던 소녀가 아니었다.“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죠?”온지유가 담담하게 물었다.“정말로 대표님과 밤을 보낸 건 맞나요? 주소영 씨를 찾아갔을 때 마침 나타나셨죠. 세상에 이렇게 기막힌 우연이 있을 거로 생각해요?”“온지유 씨는 처음부터 저를 믿지 않으셨네요.”주소영은 그녀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대체 제가 어떻게 해야 제 말을 믿어주실 건가요.”“그날 호텔로 간 것도, 함께 밤을 보낸 것도 전부 처음이었어요. 처음에 그날을 기억하기 싫었던 건 사실이었어요. 하지만 제가 상대한 남자가 대표님이란 걸 알게 된 후로 그날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던 걸 후회했죠.”온지유는 순진하고도 성실한 주소영의 눈빛을 보았다.그녀의 두 눈을 보고 있으니 그녀가 딱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에 온지유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이곳에 들어온 이상 주소영 씨는 제게 믿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대표님께 믿음을 보여줘야 해요. 대표님께서 주소영 씨를 믿는 거로 충분하거든요.”주소영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전 대표님을 좋아하고 있어요.”온지유는 멈칫하더니 입술을 틀어 물었다.“저 대표님을 좋아해요. 어떻게든 대표님도 저를 좋아하게 만들 거
그 사람은 그녀가 떨군 번호표를 보았다. 온지유가 왜 아침 일찍 이곳에서 나타난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그는 허리를 굽혀 떨어진 번호표를 주웠다.온지유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빠르게 먼저 주우려고 했다.그러나 그와 가까이에 떨어져 있었던 탓에 그가 먼저 번호표를 줍게 되었다.“어디 아파?”남자는 번호표를 살펴보았다. 그것이 초음파실에서 뽑은 번호표란 것을 바로 알게 되었다.심플한 번호표를 보고 있으니 그는 더욱 의문이 생겼다.온지유는 엄청난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황급히 그의 손에서 번호표를 빼앗아와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당황한 모습을 감추며 말했다.“아, 그게 건강 검진 좀 해보려고요.”여이현은 그녀를 빤히 보며 또 물었다.“위장이 안 좋은 거 아니었나? 왜 초음파 검사를 하려고 한 거지?”온지유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그의 두 눈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말했잖아요. 그냥 간단하게 검진받아보려고 온 거라고.”여이현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그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병원에 온다는 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온지유가 답했다.“어젯밤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잖아요. 집에 계시지 않으니 저 혼자 온 거예요.”“핸드폰은 장식인가?”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더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며칠 전에 제 연락 전부 받지 않으셨잖아요. 그런데 연락해서 뭐해요.”며칠 전은 일부러 그녀의 연락을 받지 않은 것이었다.그때는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어제부터 그는 핸드폰을 다시 켜뒀다. 그녀가 전화할 거로 생각하며 말이다.여하간에 그는 이미 며칠 동안 귀가하지 않은 상태였다.그녀 혼자 그 집에 남아있어 지내는 게 불편할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쓸데없는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그가 없이도 그녀는 알아서 잘살고 있었고 심지어 혼자 병원까지 찾아왔다.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여이현을 보았다. 그는 어제 입었던 정장을 계속 입고 있었고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온 것 같아 물었다.“
그의 말에 온지유는 아주 당황했다.예전에 아무리 크게 다쳐도, 크게 앓고 있어도 그는 그녀에게 이렇듯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심지어 매일 바쁘게 보내 그녀의 입장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았다.이번에는 그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는 굳이 그녀와 같이 오겠다고 말했다.그녀는 조금 난감했다.여이현은 다른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오르려고 하는 모습을 보았다.“일단 들어가. 나중에 다시 말해.”그들은 엘리베이터 앞에 한참 서 있었다.온지유는 다시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손을 주머니에 넣고 긴장한 듯 번호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하필 오늘 병원에서 그를 마주쳐버렸다.여이현은 엘리베이터 안에 서서 앞을 주시했다. 그러다가 걱정되었는지 그녀에게 물었다.“아침은 먹었어?”온지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든 그의 곁에서 벗어나자는 생각으로 가득했다.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시선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심각한 일이 있는 듯 고민하는 모습이었다.“온지유.”그의 부름에 온지유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여이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자 그녀의 심장을 빠르게 뛰었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대표님,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그녀는 이곳이 직장인 것처럼 그를 공경하게 대했다.그러나 여이현은 그저 단순히 그녀의 몸을 걱정하는 것일 뿐 그녀에게 일을 시키려는 생각은 없었다.“아침 먹었냐고 물었지 너한테 일 시키려고 물어본 거 아니야!”여이현은 잔뜩 불쾌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아, 먹었어요.”온지유는 사실 먹지 않았지만 먹었다고 대답했다.그녀는 행여나 여이현과 같이 아침을 먹다가 또 입덧할까 봐 두려웠다.그렇게 되면 또 속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댈 수 없었다.여하간에 그는 이미 그녀가 산부인과에 갔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산부인과 방문에 구역질이라니, 그녀가 임신했다는 것을 눈치챌 가능성이 아주 컸다.“그래.”여이현은 더는 묻지 않았다.엘리베이
온지유는 조금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일단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어르신, 안녕하세요.”강태규는 살짝 놀란 듯한 눈빛으로 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듣게 되자 그는 기쁜 듯 이내 크게 웃었다.“그래, 네가 이미 결혼을 했다니 조금 놀랍구나. 언제 결혼했던 게냐. 이렇게 큰 경사가 있었으면서 나를 부르지 않았다니. 네 덕에 내가 이제야 네 집사람 얼굴을 보게 되는구나.”강태규와 그의 할아버지인 여호산은 젊었을 때 전우 사이였다.서로 생사를 함께한 그런 사이 말이다.전쟁에서 함께 싸워 공을 세우고 사업을 일으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선택한 길은 달랐다.강태규는 정치의 길을 선택했고 여호산은 사업의 길을 선택했기에 두 사람은 그 후로 만남이 줄어들었다.강태규는 온하랑을 훑어보더니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좋은 아이구나. 이현이 네가 안목이 좋구나. 이 아이는 마음씨가 아주 고운 아가씨 같구나.”그러자 여이현이 말했다.“저희 결혼식은 아주 소박하게 해서 청첩장도 별로 돌리지 않았어요. 게다가 어르신께선 그때 먼 곳에 계셨으니 알리지 않았죠. 제 아내는 조용한 걸 좋아해서 지금까지 조용히 살고 있었어요.”강태규는 그를 더 원망하지 않았다.“너희는 요즘 젊은이들과 많이 다르구나.”“이 아이는 네 곁에서 고생 많이 했겠어.”여씨 집안의 며느리였지만 대외적으로 공개한 적이 없었다.사람들이 그녀가 여이현의 아내라는 것을 모른다면 많이 속상했을 수도 있었다.여이현에게 투정을 부리지 않고 원망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온지유는 아주 착한 사람이었다.여이현도 부정하지 않았다.“네, 많이 속상했을 거예요.”온지유는 저도 모르게 여이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태규 앞이라 그냥 형식상으로 대답한 것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몰랐다.사람들은 그들이 은밀하게 결혼식을 올린 것에 의문을 가졌다.그때마다 여이현은 그녀를 핑계로 해답을 주었다.그럼에도 온지유는 딱히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하간에 그녀도 열심히 결혼 사실을
가뜩이나 하얀 피부라 붉은 손바닥 자국이 얼굴에 아주 선명하게 생겨났고 이 장면을 목격한 이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해졌다.이때 기세등등했던 연희진이 갑자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은서우의 눈빛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너 그게 무슨 눈길이야? 넌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니?”“아닙니다.”은서우는 얼굴에서부터 전해져오는 아릿한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아주 평온해 보였다. 그 통증이 그녀를 현실로 다시 돌아오게 했기에 고맙기만 할 따름이었다.“제가 오히려 엄마에게 고마워해야 하죠.”얼굴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그녀가 가족에 대한 환상에서 완전히 깨어나게 해주었다.연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은서우가 약해 보일 때엔 마음대로 손찌검을 할 수 있었는데 은서우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예전처럼 괴롭힐 엄두가 나지 않았다.은서우는 연희진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그녀 기억 속의 연희진은 항상 이런 모습이었다. 소심하고 겁이 많으며 본분만을 지키는 사람.연희진은 그저 옛 세대의 방식대로 살아왔을 뿐이었다.남편과 아들의 말은 절대적이었고 아이들이 그녀를 어떻게 대하든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저는 한때... 엄마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어요.”은서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엄마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것도 맞지만 그중 일부는 엄마가 자초한 거예요.”소상태는 두 사람의 대화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는지 헐떡이며 달려오더니 소리쳤다.“내 아들을 풀어줘!”은서우는 아무 표정 없이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그녀의 대답에 화가 난 소상태가 손찌검을 들려 했다.그의 손이 은서우의 얼굴에 닿으려던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인명진이 그 손을 잡았다.인명진의 얼굴은 평소와는 달리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마치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가 이 정도로 화가 나 있는 모습은 처음
소태훈의 그날 증상은 마약의 부작용으로 판명되었고 이로써 은서우에게 씌워졌던 혐의는 완전히 벗겨졌다.하지만 소태훈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이건 조작이야! 은서우, 우리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그러고도 사람이야?”경찰이 그를 끌어가려 했지만 소태훈은 끝까지 버티며 저항했다.그 소란에 병원 전체가 떠들썩해졌다.복도에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수많은 시선이 은서우와 소태훈에게 쏠렸다.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은서우는 이제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단단한 눈빛으로 소태훈을 바라보았다.“그래, 소씨 집안이 날 길러준 건 맞지. 그런데 그게 어쨌다고? 1200만 원은 이미 다 갚았어.”부유한 집안에 놓고 말하면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은서우에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평생 모아도 그런 돈을 마련할 수 없을 정도였다.‘소씨 가문 가족들이 나한테 써준 돈이 과연 1200만이나 될까? 아니, 100만이라도 될까? 학비도, 생활비도 다 내가 스스로 벌었는데... 소씨 집안 사람들이 날 조금이라도 챙겨준 적이 있었던가?’소씨 가문 사람 중에 그녀가 미련을 가졌던 건 오직 소태연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소태연도 세상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도 더 이상 연연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소태훈은 소리를 질렀다.“그럼 내 동생은? 내 동생이 죽은 것도, 내 다리가 이렇게 된 것도 다 너 때문이야! 그것도 네가 갚아야 할 빚 아니야?”소태연을 떠올리는 순간, 은서우의 가슴속 깊은 상처가 다시 한번 아려왔다. 순간,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하지만 인명진을 떠올리는 순간, 그 불안한 감정은 점점 사라지는 것이었다.사실 그가 개입하지 않아도 온서우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소태훈을 끌고 가 검사를 강제로 받게 하는 것쯤은 그녀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인명진은 나서서 그렇게 했다.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제 와서 곱씹어보면 그는 온서우에게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
연희진의 얼굴빛이 극도로 어두워졌다.병실로 들어간 은서우는 멈칫하더니 제자리에 멈춰 섰다.“소태훈, 너 깨어난 거야?”그녀는 멍하니 소태훈을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깨어났는데 왜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걸까? 분명 간호사가 지켜보고 있었을 텐데...’인명진의 표정은 점점 더 싸늘해졌고 그는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간호사를 쳐다보았다.“당직 간호사가 누구죠?””소민이에요.”“그만두라고 하세요.”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소태훈은 순간 당황스러운 듯했지만 이내 금세 진정하며 오히려 역으로 말했다.“너 여기는 왜 들어왔어? 아직도 날 해칠 생각이야? 여긴 병원이야. 함부로 날뛰지 마.”그러면서 그녀 뒤에 서 있는 인명진을 힐끗 바라보며 비웃는 어조로 덧붙였다.“진짜로 사람이 죽기라도 하면 네 남자 친구도 널 지켜줄 수 없을걸?”그 말에 은서우는 짜증이 확 났다.“소태훈, 말조심해. 말을 똑바로 못 하겠으면 내가 좀 가르쳐 줄까?”“이젠 나한테 대놓고 덤비는 거야? 대단하네. 배짱이 커졌나 봐?”소태훈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표정은 싸늘해졌다.그동안 인명진은 이미 간호사에게 검사 준비를 하게 했다.은서우는 그를 한번 쳐다보더니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않고 말했다.“일어나. 검사를 할 거야.”소태훈이 순순히 응할 리 없었다.‘내가 왜 협조해야 하지?’그는 느긋하게 은서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검사를 받았으면 좋겠어? 그러면 네가 직접 날 모셔봐. 어차피 어릴 때도 많이 해봤잖아. 어때?”그 말을 듣자 은서우는 당장이라도 손에 쥔 시험관을 그의 입에 쑤셔서 넣고 싶었다.너무 역겨워서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바로 그때, 인명진이 소태훈을 단단히 붙잡았다. 곧이어 소태훈은 비명을 질렀다.“뭐야, 뭐 하는 거야? 난 환자라고! 이렇게 대해도 된다고 생각해?”인명진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를 화장실로 던져 넣고는 재빠르게 문을 잠가 버렸다.안에서는 필
은서우는 지금 당장이라도 소태훈을 찾아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인명진이 그녀를 막아섰다.“지금 가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없어요. 소태훈 씨는 중환자실에 있고 아직 깨어나지도 않았어요. 가봤자 괜히 문제만 생길 거예요.”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은서우는 감정을 가라앉혔다.지금 그녀의 모든 행동은 감시당하고 있었다. 병원 안의 소문은 사그라졌지만 여전히 많은 시선이 은서우를 주시하고 있었고 그녀는 아직 혐의를 벗지 못했다.소태훈이 깨어나기 전까지 그녀는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또다시 그녀에게 책임이 돌아갈 테니 말이다.은서우는 다시 자리에 앉아 얼굴을 감싸 쥐고 잠시 침묵했다.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인명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고마워요.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명진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그 말에 인명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더니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제가 직접 고른 조수인데 당연히 도와야죠. 걱정 마요. 단순히 간단한 검사만 하면 알 수 있으니까요.”하지만 그 단순한 일조차 쉽지는 않았다. 소태훈에게 간단한 검사를 하겠다는 말을 듣자 연희진이 필사적으로 막아섰다.“우리 아들 그런 거 절대 못 해요. 은서우, 너 양심이 있으면 이 의사를 당장 돌려보내!”은서우는 미간을 찌푸렸다.“원장님은 단순히 검사를 하려는 것뿐이에요. 다른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막으시는 거죠?”“내 아들이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무슨 말을 한들 누가 믿겠어?”연희진은 인명진을 돌려보내기 싫어하는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난 듯, 갑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소리쳤다.“다들 여기 봐요! 이 아이예요. 우리 집에서 거둬들여 키운 양녀인데 며칠 전 우리 아들을 병원에 보냈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지금 또 저희를 해치려 하고 있어요!”그녀의 큰 목소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누군가 은서우를 알아보고 손가락질했다.“저도 알아요. 진짜 그런 일이 있었거든요. 그냥 두 마디 정도 말을 걸었을 뿐인데 기분 나쁘다고 그
은서우는 어릴 때부터 소씨 가문 사람들에게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소태훈도 계속 그녀에게 장난만 쳤다. 그땐 아직 어렸기에 독한 마음을 먹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괴롭힌 건 사실이었다.흔히 말하는 인간 말종들은 크면서 갑자기 망가지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썩어 있었던 것일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어릴 때부터 은서우는 늘 그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소태훈은 가끔 일부러 그녀를 문밖에 가둬놓기도 했고 때론 그녀의 숙제를 일부러 잃어버려서 제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온서우는 학교에서 벌을 받고 집에 돌아와서 또 소상태에게 또 혼났다. 창피한 짓 하지 말라며 말이다.“서우 씨를 그렇게 대했다고요?”듣기만 해도 인명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은서우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어릴 때는 이해 하지 못했어요. 크고 나서는 알게 되었죠. 제가 친자식이 아니라서 그랬다는 걸 말이에요.”인명진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그건 그냥 핑계예요. 애초에 제대로 키울 생각이 없었으면 왜 굳이 입양했어요?”은서우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도 그게 궁금했던 것이다. 십수 년 동안, 이 의문은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내가 싫으면서 왜 입양한 걸까...’인명진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차갑고 창백한 그의 얼굴이 조명 아래서 옥처럼 빛났다. 긴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뚜렷했고 그가 손가락을 움직이는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다.은서우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쳐다보던 순간, 갑자기 인명진이 툭 던지듯 물었다.“그래서 아직도 그 사람들이랑 얽힐 생각이에요?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데 친부모를 찾아볼 생각은 안 해봤어요?”그 말을 듣자, 은서우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역시 찾고 싶은 거겠지.’인명진은 속으로 생각했다.그는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무심한 듯 말했다.“그날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해봐요.”인명진이 말하는 그날이란 소태훈이 사고를 당하기 전의 상황이었다.은서우는 시간을 들여 그날의 일을 하나하나 설명했다.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소상태 등이 돌아간 후에도 이 사건은 사그라지지 않았다.아직 사실 여부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다수 사람들 눈에는 은서우가 이미 가해자로 보였다. 순식간에 그녀는 고립된 존재로 되었고 그녀를 예전처럼 대해 주는 사람은 오직 인명진뿐이었다.병원에서 누군가 험담을 늘어놓으면 인명진이 직접 나서서 막았고 그들에게 경고까지 해주었다.“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지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곳이 아니에요. 떠들고 싶으면 다른 곳으로 가시죠.”그제야 사람들의 험담이 조금 수그러들었다....인명진은 사무실로 돌아왔다.은서우는 눈가를 적신 눈물을 훔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원장님, 믿어 주셔서 감사해요.”인명진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그는 말했다.“웃고 싶지 않으면 억지 미소 짓지 마세요.”그 말을 들은 은서우는 순간 멍해졌다.“억지로 웃는 거 별로예요.”“죄송해요, 저...”은서우는 무의식적으로 사과하려 했다.최근 들어 그녀는 무슨 일이 생기든 먼저 사과부터 하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자기도 모르게 굽신거리는 것이었다.그걸 알아챈 인명진은 진지하고 단호하게 말했다.“저한테 미안해할 거 없어요. 서우 씨가 가장 미안해야 할 사람은 서우 씨 본인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퍼뜨리는데 왜 반박하지 않으세요?”은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설명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더라고요.”거짓 소문은 쉽게 퍼지지만 사실을 바로잡는 건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루머를 퍼뜨리는 사람들은 입을 열기만 하면 거짓말을 했고 진실이 무엇인지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모두가 배은망덕한 인간이라며 그녀를 욕했다.소씨 가문에서 그녀를 입양한 것을 두고 눈이 멀었다면서, 어리석은 선택이었다면서 떠들었다.하지만 아무도 그녀가 소씨 가문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소씨 가문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세상의 모든 악의가
병원에 도착한 인명진은 시끄러운 소리에 이끌려 은서우가 있는 사무실로 향했고 눈앞에 펼쳐진 아수라장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빠른 걸음으로 연희진한테 다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저는 이병원 원장입니다. 일단 진정하시고 너무 위험하니까 거기서 내려오시죠. 이번 일에 대해서는 철저한 조사를 거친 뒤 전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충동적으로 행동하시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황이 더 악화할 수도 있어요.”인명진은 말하면서 옆에 있던 보안 요원에게 눈짓했고 그들은 창문 옆으로 살며시 다가가 연희진을 구할 기회를 살폈다.이어서 인명진은 몸을 돌려 소상태를 보며 말했다.“그리고 소 선생님,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조사도 하기 전에 그런 조건으로 은 선생님을 협박하는 건 아니죠. 일방적으로 한쪽 말만 듣고 잘 잘못을 확정할 수는 없어요. 이는 분명히 법의 공정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에요.”소상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인 원장님, 은서우한테 속지 마세요. 은서우가 우리 아들을 저렇게 만든 걸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인명진은 냉정하게 말했다.“지금 소 선생님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병원에도 절차라는 게 있어요. 경찰들도 수사할 테니 진상은 분명히 밝혀지겠죠. 은 선생님은 지금까지 병원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었고, 아무 증거 없이 함부로 은 선생님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인명진은 또 병원 임원들을 향해 말했다.“여러분들도 너무 당황하지 마시고 경찰들이 와서 제대로 조사하기 전에는 맹목적으로 은 선생님을 비난하지도 마세요. 경찰 조사에 적극 협조하시고 남은 건 조사 결과가 나오면 다시 의논하죠.”임원들은 여전히 불만이 남아 있었지만, 병원장의 말이라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인명진은 이어서 소태훈의 부모를 향해 말했다.“소 선생님 그리고 사모님, 부모로서 지금 심정이 어떨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제가 직접 이 일에 관여할 거고 전문적인
은서우도 뒤따라가려는데 간호사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엄숙하게 말했다.“은 선생님, 아직은 따라가면 안 되죠.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부터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정말 제가 밀친 게 아니에요. 혼자 병이 발작한 거라고요. 믿어주세요.”은서우의 말에도 간호사는 고개만 저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이때 보안팀 요원들도 현장에 도착했고 은서우를 사무실로 데려가 추가 처리를 기다렸다.은서우는 두 손으로 팔을 꽉 끌어안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 임원진들이 속속 도착했고, 그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은서우를 바라보며 면전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은 선생님, 의사이신 분이 어떻게 병원에서 이런 일을 저지를 수가 있어요? 이건 명백히 병원 규정과 직업윤리에 어긋나는 행실이에요.”“이유가 뭐였든 간에 은 선생님의 이런 행동은 병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요.”은서우는 모든 걸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많은 비난 속에 묻힐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그냥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삼켰다.은서우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소상태와 연희진은 아들의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두 사람은 급하게 병실로 뛰어 들어갔고, 의식을 잃은 소태훈을 본 연희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소상태는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은서우가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 그녀를 보자마자 서슬이 퍼런 눈빛으로 달려들어 때리려 했지만, 다행히 보안 요원이 달려와 그를 말렸다.“내 아들을 저렇게 만들어 놓고 무사할 줄 알아? 죽기보다 못하게 만들어 줄 거야!”소상태는 은서우를 향해 으르렁거렸다.“이 쓸모없는 년아, 내 아들을 저렇게 만들어 놓고 이제 어떡할래!”뒤따라온 연희진은 목이 쉬도록 고함을 지르며 은서우를 잡으려고 허공에서 손을 허우적거렸다.은서우는 울며 말했다.“제가 밀친 게 아니라니까요. 갑자기 병이 발작해서 쓰러진 걸 왜 제 탓으로 돌리는 거예요!”하지만 은서우의 말을 전혀 들을 생각이 없었던 소상태는 연희진보다 다소 진정된
“소연아, 너 그 말 들었어? 저쪽 병동에 있던 까다로운 환자 한 명이 오늘 의료진들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했대.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뜬 거 아닌가 했다니까?”김소민의 신기하다는 듯한 말에 박소연이 웃으며 답했다.“우리가 정성스럽게 돌봐줘서 감동하였나 봐. 그건 그렇고, 은 선생님이 회진하러 간 지 한참 지나지 않았어? 왜 아직도 안 오지?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는 돌아왔을 텐데.”김소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말했다.“상태가 안 좋은 환자가 있으면 좀 걸릴 수도 있지. 은 선생님이 워낙 책임감도 강하고 뭐든 열심히 하시잖아. 너도 잘 알면서.”“그건 그렇지만 너무 오래 지난 것 같은데? 왜 나는 이렇게 불안하지?”박소연은 불안한 마음에 눈썹을 찡그렸다.“아이고, 쓸모없는 걱정하고 있어. 곧 돌아오시겠지. 병원이 이렇게 큰데 아는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나눌 수도 있잖아.”김소민은 박소연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은서우는 돌아오지 않았고 불안감이 더욱 커졌던 박소연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걱정돼서 안 되겠어. 내가 가볼게. 이 밤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떡해.”진지한 박소연의 태도에 김소연도 즉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그럼 같이 가보자.”두 사람이 간호사 스테이션을 나와 얼마 지나지 않자, 비상계단 쪽에서 은서우의 목소리가 섞인 듯한 시끄러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김소민과 박소연은 서로 눈길을 마주치더니 즉시 계단 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은 선생님!”두 간호사의 목소리를 들은 은서우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소리를 질렀다.“사람 살려요! 저 여기 있어요!”은서우는 자신을 잡아당기는 소태훈의 손을 있는 힘껏 뿌리치고 동료들을 향해 달려갔다.겨우 소태훈한테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던 찰나 뜻밖의 사고가 벌어졌다.은서우의 뿌리치는 힘에 몸의 균형을 잃은 소태훈은 뒤로 몇 걸음 비틀거리더니 곧바로 바닥에 쓰러져 입에 거품을 물고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막 계단 입구에 도착하던 간호사들은 은서우 옆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