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조금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일단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어르신, 안녕하세요.”강태규는 살짝 놀란 듯한 눈빛으로 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듣게 되자 그는 기쁜 듯 이내 크게 웃었다.“그래, 네가 이미 결혼을 했다니 조금 놀랍구나. 언제 결혼했던 게냐. 이렇게 큰 경사가 있었으면서 나를 부르지 않았다니. 네 덕에 내가 이제야 네 집사람 얼굴을 보게 되는구나.”강태규와 그의 할아버지인 여호산은 젊었을 때 전우 사이였다.서로 생사를 함께한 그런 사이 말이다.전쟁에서 함께 싸워 공을 세우고 사업을 일으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선택한 길은 달랐다.강태규는 정치의 길을 선택했고 여호산은 사업의 길을 선택했기에 두 사람은 그 후로 만남이 줄어들었다.강태규는 온하랑을 훑어보더니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좋은 아이구나. 이현이 네가 안목이 좋구나. 이 아이는 마음씨가 아주 고운 아가씨 같구나.”그러자 여이현이 말했다.“저희 결혼식은 아주 소박하게 해서 청첩장도 별로 돌리지 않았어요. 게다가 어르신께선 그때 먼 곳에 계셨으니 알리지 않았죠. 제 아내는 조용한 걸 좋아해서 지금까지 조용히 살고 있었어요.”강태규는 그를 더 원망하지 않았다.“너희는 요즘 젊은이들과 많이 다르구나.”“이 아이는 네 곁에서 고생 많이 했겠어.”여씨 집안의 며느리였지만 대외적으로 공개한 적이 없었다.사람들이 그녀가 여이현의 아내라는 것을 모른다면 많이 속상했을 수도 있었다.여이현에게 투정을 부리지 않고 원망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온지유는 아주 착한 사람이었다.여이현도 부정하지 않았다.“네, 많이 속상했을 거예요.”온지유는 저도 모르게 여이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태규 앞이라 그냥 형식상으로 대답한 것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몰랐다.사람들은 그들이 은밀하게 결혼식을 올린 것에 의문을 가졌다.그때마다 여이현은 그녀를 핑계로 해답을 주었다.그럼에도 온지유는 딱히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하간에 그녀도 열심히 결혼 사실을
그들이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지 표정이 살짝 굳어지더니 이내 다시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 저랑 엄마가 할아버지 뵈러 왔어요.”“어르신.”이 목소리는 서은지의 엄마 윤미혜의 목소리였다.온지유는 생각에 잠겼다. 여이현이 이렇게나 어르신을 존경하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서씨 집안 사람들과도 아는 사이 같았다.강태규는 웃으며 말했다.“왜 다들 우르르 몰려 왔어.”“할아버지께서 아프시다는데 당연히 뵈러 와야죠.”서은지는 꽃을 꽃병에 꽂은 뒤 강태규를 끌어안았다.“그런데 손님이 계셨네요.”강태규가 말했다.“이현이는 내 전우의 손자야. 그러니까 내 손자랑 다를 바 없는 녀석이지.”“전에 만난 적 있어요.”서은지는 자신이 넘치는 모습으로 여이현을 보았다.“안녕하세요, 대표님. 우리 또 뵙네요.”강태규가 물었다.“은지 너 그동안 해외에 머물고 있었던 거 아니었나? 어떻게 이현이 녀석을 알고 있는 거냐.”“며칠 전에 아빠랑 같이 만났었어요. 대표님이랑 식사도 같이했는걸요.”서은지는 솔직하게 말했다.“할아버지, 저희 아빠는 학교 일 때문에 바쁘셔서 저녁이 되어야 뵈러 오실 것 같다고 하셨어요.”“괜찮다.”강태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난 마음만 받으면 돼.”그들의 대화를 통해 온지유는 서승만이 옛날에 강태규 휘하의 군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강태규는 마음이 너그럽고 자상하여 병사들을 아주 잘 가르쳤다고 했다.서승만이 전역하고 나서도 강태규를 잊지 못한 것을 보면 아주 좋은 스승이었던 것 같았다.여이현은 그들이 화기애애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방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어르신, 어르신을 뵈러 온 사람이 있으니 저흰 이만 먼저 가볼게요.”그러자 윤미혜가 그에게 시선을 돌리며 살가운 모습으로 그를 붙잡으려고 했다.“여 대표, 뭘 그렇게 급하게 가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좀 더 이야기하고 가요. 사람이 많으면 더 북적거리고 어르신께서도 좋아하실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 더 있다가 가요.”윤미혜는 여이현을 꼭 사위 보듯 한
서은지는 그를 더는 ‘대표님'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이름을 불렀다.그녀는 여이현의 길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여이현은 차가워진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시죠, 서은지 씨?”서은지는 그를 보았다. 뼛속까지 거만했던 그녀는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방금 한 말 진짜예요? 정말로 이미 결혼했어요?”그녀는 여이현이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그래서 그가 일부러 그녀를 피하려고 거짓말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여이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굳이 거짓말을 해서 뭐해요?”“여이현 씨가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요. 게다가 여이현 씨 아내가 누군지도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핑계 대는 줄 알았죠.”“서은지 씨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그가 차갑게 굴수록 서은지는 더 흥미가 생겼다. 꼭 사냥감을 찾은 것처럼 반드시 그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그녀는 가지지 못하는 것에 더 흥미를 느꼈다.서은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에게 다가가며 대범한 행동을 했다.“결혼했다고 해서 뭐요. 어차피 나중에 이혼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전 여이현 씨가 결혼해도 상관없어요.”그녀의 말을 들은 온지유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여이현은 막무가내인 사람과 질척거리는 사람을 아주 싫어했다.그런데 서은지가 그런 사람이었다.여이현은 서승만을 봐서라도 서은지의 당돌한 행동을 참아주고 있었다.그러나 서은지가 가까이 다가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쓰다듬자 그는 결국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혐오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그는 잔뜩 어두워진 안색으로 그녀의 손을 쳐내려고 했지만 온지유가 한발 빠르게 서은지의 손을 잡아챘다.“서은지 씨!”온지유가 나설 줄은 몰랐는지 여이현은 다소 의외라는 눈빛으로 온지유를 보았다.서은지도 온지유를 보았다.“그쪽은 여이현 씨 비서가 아니던가요?”온지유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여기는 병원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인데 대표님께 그런 행동을 하시면 된다고 생각하세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그녀는 여이현이 그녀에게 생리통 있다는 것까지 알 정도로 세심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온지유는 정말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예전에 그와 평생을 함께 살아도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또 몸 상태는 어떤지 모를 거로 생각했다.그녀가 언젠가 죽게 되어도 여이현이 제일 마지막으로 알게 되리라 생각했다.지금으로선 시간이 지나면 기억하기 싫어도 기억이 날 것이다.온지유는 생강차를 단번에 마셔버렸다.“푹 쉬어.”여이현은 세심하게 그녀에게 이불까지 덮어주었다.온지유는 그런 그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이따가 어디 가는 거예요?”“어디 안 가. 집에 있을 거야.”여이현이 답했다.온지유는 그가 며칠 동안 외박을 하여 오늘도 외박하는 줄 알았다.밖에는 예쁜 여자가 아주 많았으니 그가 머물 곳은 분명 있을 것이었다.여이현은 조금 실망한 듯한 그녀의 표정을 눈치채곤 그녀의 옆으로 눕더니 이불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많이 아파?”온지유는 순간 경직되었다. 고개를 삐그덕 돌리며 여이현을 보았다.“왜 갑자기 누운 거예요?”“조금 같이 누워있어 주려고.”여이현은 그녀의 아랫배에 올린 손을 움직이며 통증을 덜어주고 싶은 듯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이러면 좀 나아?”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그녀는 계속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조금 나아졌어요.”“자꾸 밤새우지 마.”여이현은 나직하게 말했다.“밤을 자주 새우면 몸에 무리가 가거든. 항상 몸조리 잘해야 생리할 때도 많이 아프지 않을 거야.”그의 다정하고도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그에게도 이토록 다정하고 세심한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다.온지유가 말했다.“사실 오늘 저를 데리고 어르신 뵈러 간 것도 저한테는 의외였어요. 게다가 어르신께 저를 아내라고 소개했잖아요.”여이현은 뜸을 들이며 물었다.“혹시 싫었어?”온지유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네가 싫지 않았다면 됐어.”여이현은 행여나 그녀가 싫어
정미리는 아직도 온경준의 병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헛소리를 들었으니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동서, 아무리 그래도 신경 쓴 적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 우리 그이가 언제 도련님 일을 안 도운 적 있어? 도련님이 친 사고는 우리가 다 해결해 줬어. 그렇다고 해서 무슨 일만 있으면 찾아오는 건 너무했지.”“저희도 어쩔 수 없어서 이러는 거 아니겠어요.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형님을 찾아오지 않고 이미 해결했을 거예요.”이렇게 말하며 장수희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엄마, 울지 마요.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장수희의 딸이 위로했다. 정작 울고 싶은 사람은 정미리인데도 말이다.그동안 온경준 일가는 얼마나 많이 시달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입도 뻥끗 안 하다가, 나쁜 일이 있을 때만 찾아오는 친척을 누가 달가워하겠는가?정미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정작 하지는 않았다. 온경준이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친동생인 온재준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온재준 일가는 거머리와 같았다. 한 번 도움을 받고 나면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번 20억 원을 빚지게 된 일도 그랬다. 무조건 버는 장사라고 투자하던 온재준은 정작 온경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이번 일로 그들은 집안이 망할 뻔했다. 크게 다툰 정미리와 온경준은 이혼 얘기까지 꺼냈다. 그래도 다행히 온지유가 해결해 준 덕분에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그러다가 장수희가 또다시 찾아온 것이다. 화가 치밀어 오른 온경준은 크게 넘어졌다가 손목이 골절했다. 그런데도 장수희는 뻔뻔하게 도움을 요구했다. 병실에 누워 있는 온경준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습이었다.“도련님은 어디 있어요? 당사자는 어딜 가고 동서랑 딸을 보낸 거예요?”“재준 씨는 숨어 있어요. 요즘 같은 날 밖에서 돌아다니면 맞아 죽을 거예요.”장수희는 붉어진 눈시울로 말을 이었다.“재준 씨가 지난 일로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몰라요. 형이 자기를 위해 쓴 돈을 돌려주겠다고 그렇게 열심히
“동서, 말조심해. 내 남편 몰골을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와? 도대체 우리를 어디까지 끌어내릴 셈이야.”정미리는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좋아요. 그럼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지난번의 20억은 어떻게 해결했어요? 지난번에도 그렇게 돈 없다고 잡아뗐잖아요. 우리 그이는 돈 마련한다고 장기 매매까지 할 뻔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돈은 갚았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죠.”장수희는 줄곧 그들이 어떻게 돈을 갚을 수 있었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어찌 됐든 집에 돈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아주버님, 그 돈은 어디에서 왔어요? 아버님이랑 어머님의 돈을 우리한테 말하지도 않고 빼돌린 거죠!”장수희는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이건 시부모가 돌아가고부터 줄곧 의심하던 것이었다. 지금도 물론 그들을 도와주고도 남을 돈이 있다고 믿었다.이 말을 듣고 온경준은 격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수희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야, 양심 없는 것!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예요?”온경준은 제대로 정신 차렸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마음이 생기면 이상한 것이었다.이러다가 온경준이 숨이라도 넘어갈 것 같았기에 장수희는 재빨리 타일렀다.“진정해요. 손에 깁스도 했잖아요.”온경준의 반응을 보고 장수희는 뒤늦게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약간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저도 그냥 묻는 것뿐이에요. 의심한 거 절대 아니니까 화내지 마세요.”온경준은 가슴이 아팠다. 그는 이런 사람을 위해 딸을 팔았다. 이건 아마 죽을 때까지 후회할 일일 것이다.‘내가 지유한테 빚진 게 많아...’밖에서 듣고 있던 온지유는 대충 상황 파악이 되었다. 장수희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 것 같았다.그녀는 장수희를 좋아한 적 없었다. 무엇이든 꼬치꼬치 캐묻고, 아량이 작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이렇게 의심이 많고 질투가 심한 사람이 부탁하려고 자존심을 내려놓을 줄은 또 아네.’정미리는 온경준과 온재준이 우애 깊은 형제라는 것을 말한 적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너 어느 대학 출신이지?”“수도권은 돼요.”“미안한데 우리 회사는 명문대만 취급해. 수도권이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야.”온지유는 딱 잘라서 거절했다. 온채린은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그대로 일단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근데 난 언니가 있잖아요. 언니가 도와주는데 학벌이 무슨 소용이에요.”“규칙은 규칙이야. 낙하산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뒤떨어지게 되어 있어. 회사에서 괜히 명문대 출신을 요구할 것 같아?”온지유의 단호한 태도에 기분 나빠진 온채린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됐어요. 언니가 도와주기 싫어서 이렇게 말하는 거 모를 것 같아요?”“알면 됐어. 뭐든 도움받아서 할 생각하지 마.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거지보다 못한 인생이 될 테니까.”“도와주기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사람 저주하는 건 무슨 경우예요? 엄마, 언니 좀 봐요!”모욕을 견딜 수 없었던 온채린은 눈시울이 빨개졌다. 그 모습이 속상했던 장수희는 당연히 온채린의 편에 섰다.“지유야, 넌 동생한테 그게 무슨 발 버릇이니? 동생 좀 챙겨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남들 다 돕고 사는 세월에... 그래, 네 아버지랑 작은아버지도 그렇게 지내왔잖니. 한 가족은 원래 돕고 사는 거야. 혼자 잘나간다고 으스대지 마.”온지유는 눈빛 하나 안 변하면서 대답했다.“제가 언제 으스댔나요? 저는 감사할 줄도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기 싫을 뿐이에요. 인사는커녕 제 아버지를 이렇게 만들어버렸잖아요.”“너...”장수희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또다시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지유야, 너 지금 날 무시하는 거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건 날 죽이는 것과 마찬...”그녀의 아우성을 듣기 싫었던 온경준은 바로 말을 끊었다.“됐고, 제수씨 집안일은 알아서 해결해요.”“안 돼요, 아주버님! 우리 그이 죽는 꼴 진짜 보고 싶어서 그래요?”이번만큼은 온경준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린 것을 보고 장수희는 더욱 언성을 높였다.“냉정한 인간들! 가족이 죽게 생겼는데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여이현이었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면서도 그는 온경준의 침대 곁으로 걸어갔다.차가운 남자의 목소리에 모녀는 울음을 멈추고 머리를 돌렸다. 온지유는 그가 올 줄 모르는 듯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요?”“병원장이 전화 왔어. 네 아버지가 입원했다고. 그래서 찾아왔지.”“아버님, 어머님, 안녕하세요.”깍듯하게 인사부터 한 그는 깁스한 온경준의 손을 바라보며 물었다.“이제 좀 괜찮으세요?”“손목 골절이라 며칠 쉬어야 한대요.”온지유가 대신 대답했다.여이현은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여긴 너무 시끄럽네요. 휴식하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으니까 VIP 병실로 가시죠.”“아니다, 이현아. 우리가 그럴 형편도 아니고, 여기에서 지내도 괜찮다.”온경준은 약간 못마땅한 눈빛으로 여이현을 바라봤다. 그대로 일단은 관심받는 처지이기에 말은 듣기 좋게 했다.“걱정할 것 없어. 약간 실금이 갔을 뿐이야. 지유야, 이현이 데리고 이만 나가 봐. 병실에는 네 엄마만 있으면 된다.”“괜찮아요. 시간 계산 다 하고 왔으니까요.”여이현은 아직도 VIP 병실로 옮기고 싶었지만, 온경준의 뜻을 존중해야 했기에 질문부터 했다.“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 정말 괜찮겠어요?”“그래. 말동무가 있어야 적적하지 않지. 혼자 있으면 답답해서 못 살 거야.”여이현도 이해는 되었기에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곁에서 지켜보던 장수희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알기로 온경준에게는 자식이 온지유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여이현이 온경준과 정미리를 대하는 태도와 온지유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봤을 때, 그녀는 별로 어렵지 않게 사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장수희는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지유야, 이쪽은 누구니? 네 남편이야?”속으로 답을 내렸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왜 결혼할 때 나한테 알리지 않았니? 알렸으면 내가 용돈이라도 줬을 거 아니야.”그녀는 또 온경준과 정미리를 바라보며 말
그는 인명진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저 갑자기 나타나 영웅처럼 여자를 구하려는 허세 부리는 젊은 놈 정도로 생각했다. “영웅이 되고 싶으면 주제 파악부터 해라. 당장 꺼져. 안 그러면 매니저 불러서 바로 쫓아낼 테니까.” 손님도 급이 있다. 블랙스페이드 A 카드를 쓸 수 있는 VIP는 일반 손님들과는 대접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인명진은 그를 멍청하게 여기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사람과 싸우는 것 자체가 자신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느꼈다.그는 고개를 돌려 은서우에게 말했다. “매니저 불러와요.” “알겠어요. 바로 갈게요.” 은서우는 지금 다른 말이 필요 없다는 걸 깨닫고 곧장 바를 향해 뛰어갔다. 손님은 은서우가 달아나는 모습을 보며 자존심이 바닥에 내팽개쳐진 기분이 들었다. 굴욕감이 분노로 변하며 눈빛이 살기로 물들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거칠게 인명진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인명진은 이미 단련된 몸이었다. 취객 하나쯤 상대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아까 은서우가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떠오르자 그의 분노는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다행히 그가 제때 도착했다. 아니었으면 은서우는 그들에게 무참히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손님은 순식간에 바닥에 나뒹굴었고 눈두덩이는 순식간에 시퍼렇게 부어올랐다. 그때 매니저가 허겁지겁 달려와 본 것은 VIP 고객이 처참하게 쓰러져 있는 광경이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낮추며 다급하게 손님을 부축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지금 바로 구급차 불러드릴께요.”“너희 술집은 아무 잡것이나 다 들이는 거야? 당장 저 둘을 쫓아내!” 손님은 고함을 지르며 인명진에게 당장 꺼지라고 소리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매니저는 은서우와 손님 사이에서 망설임 없이 손님의 편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두 사람 모두 손님이긴 했지만 인명진의 소비 수준이 훨씬 높았고 그와 함께 온 사람은 이 술집의 단골 중에서도 최상위급 고객이었다. 매니저의 눈동자가 흔들
은서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돈이 필요했고 확실히 일을 해야 했지만 그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몸을 팔아 돈을 버는 건 감당할 수 없었다. 그녀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공손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손님, 저는 이곳의 서비스 직원입니다. 제 업무는 술을 파는 것에 한정되며 그 이상은 포함되지 않습니다.”“순진한 척하지 마. 여기 온 이상 돈만 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잖아?” 남자는 은서우를 비웃듯 한 번 쳐다보며 눈빛에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돈은 충분히 줄 테니까 오늘만 잘 해주면 이 술은 내가 다 살게. 못 믿겠으면 너희 매니저한테 나 유인승이 누구인지 한번 물어봐.” 은서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팔 생각이 없었고 고객과 충돌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취한 손님은 은서우가 자리를 피하려 하자 바로 화를 내며 일어섰다. 그는 그녀의 팔을 강하게 붙잡고 불쾌한 목소리로 욕설을 쏟아냈다. “내가 너 대접할 기회를 주는 게 영광인 줄 알아야지. 여기 술집에서만 1년에 천만 원은 쓰는데 서비스 직원 하나 못 부르냐?” “손님, 이건 제 업무가 아닙니다. 제발...” “이미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으면서 무슨 체면을 차리냐?”손님은 은서우의 말을 거칠게 끊으며 말했다.은서우의 눈물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그녀는 그동안 정말 열심히 살아왔지만 하늘은 늘 그녀에게 가혹하기만 했다. “왜 울고 있어? 기분 좋게 나와서 놀고 있는데 네가 다 망쳤잖아.” 손님의 태도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곧 이쪽에서 나는 소란이 남자 매니저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다가와 상황을 파악한 뒤 예상한 대로 손님 편에 서서 은서우를 꾸짖기 시작했다. “손님이 한 잔 하자고 하면 그냥 앉아서 같이 있는 게 당연한 거죠. 서비스 직원으로서 어떻게 손님과 시비를 걸 수 있어요?” 은서우는 이제 매니저에게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매니저는 오직 경제적
결국 은서우는 경찰을 불렀다. 출동한 경찰은 두 사람을 경찰서로 데려가 상황을 파악한 후 먼저 소태훈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저도 여동생이 있어서 기분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동생분도 이미 성인입니다. 본인의 선택을 존중해야죠. 그리고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건 명백한 주거 침해입니다.” “죄송합니다. 형사님.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너무 조급했어요. 동생을 좀 재촉하려다 보니 이렇게 되였습니다...” 소태훈은 고개를 숙이며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가 보이는 태도는 너무 자연스럽고 그럴듯했다. 직접 겪지 않았다면 은서우조차 그가 이렇게 능숙하게 거짓된 얼굴을 숨기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은서우 씨, 어르신이 편찮으시다면 확실히 돌아가서 보셔야 합니다. 가족과 갈등이 있다 해도 결국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잖아요. 계속 피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경찰은 계속해서 은서우를 설득했다. 은서우는 그저 대충 핑계를 대며 말했다. “저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에요. 요즘 너무 피곤해서요. 그리고 돌아갈 표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에요.”어차피 오늘은 소태훈을 일단 넘겨야 했다. 이렇게까지 찾아왔으니 첫 번째가 있으면 두 번째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결국 경찰의 중재로 소태훈은 물러섰다. 떠나기 전 그는 은서우를 깊고 차가운 눈빛으로 한 번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푹 쉬어. 나중에 다시 데리러 올게.” 그 눈빛에서 은서우는 소름이 돋았다. 그의 눈빛은 결코 걱정의 시선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무언의 경고였다. 오늘은 시작에 불과하며 앞으로 반드시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예고였다. 경찰서를 나서며 은서우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전에 아르바이트했던 술집으로 곧장 향했다. 은서우는 매니저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여기 직원 숙소 있나요? 만약 숙소를 사용하게 되면 한 달에 얼마가 차감되나요?” 매니저는 웃으며 답했다. “직원 숙소는 당연히 제공되고 있습니다. 직
쉴 수 있다면 은서우는 당연히 푹 쉬었다. 최근 들어 너무 피곤해서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을 정도였다. 서랍에서 라면 한 통을 꺼내 먹고 샤워를 하며 피로를 씻어낸 뒤 침대에 누워 편안히 잠을 청하려 했다. 그러나 막 잠이 들려는 찰나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더 세차게. 처음에는 택배 기사일 거라 생각했지만 문을 열고 나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소태훈을 보고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의 첫 반응은 문을 닫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은서우, 이제 나랑 말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거야?”소태훈이 손을 뻗어 문틈을 막았다. 그의 힘은 엄청나서 은서우가 온 힘을 다해도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그녀의 저항이 오히려 소태훈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소태훈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잡고 말했다. “이번에 온 건 너랑 제대로 얘기하려고 온 거야. 먼저 들어가게 해줘. 천천히 얘기하자.” 은서우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런 말에 속을 리가 없었다. 그를 들여보내는 건 쉬웠지만 그를 내보내는 건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일이었다.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린 할 말이 없어.”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어제 밤에 퇴원하셨어. 그걸 너한테 알려주고 너랑 함께 아버지를 보러 가려고 온 거야.”소태훈은 서둘러 말을 꺼냈다. 그는 이 말을 하면 은서우가 마음이 약해져서 함께 가자고 할 거라 생각했다. 은서우는 잠시 흔들렸지만 그들이 예전에 자신에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굳혔다. “난 할 만큼 다 했어. 아버지가 아프시다면 네가 잘 돌봐야지. 왜 날 괴롭히는 거야?”그녀는 발끝으로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만약 소태훈과 함께 돌아가면 그들은 분명 이 이유를 들어 그녀를 강제로 붙잡아둘 것이다. 간신히 빠져나왔는데 다시 바보처럼 돌아갈 순 없었다. “은서우!” 소태훈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변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은서우는 왜 아직도 가지 않으려는 거지?
남자가 가볍게 웃더니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제 나이가 멫 살인 줄 아세요?” 은서우는 순간 멈칫했다.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일단 대충 짐작해 보기로 했다. “스무 살?” 겉보기엔 열여덟 정도로밖에 안 보여서 일부러 살짝 올려 잡은 거였다. ‘세포 분열이 빠르면 노화가 늦춰질 테니 기껏해야 두 살 정도 차이 나지 않을까?’ 남자는 미소를 깊이 머금더니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서른다섯이에요. 나이로만 보면 어쩌면 당신과 띠동갑일 수도 있겠네요.”남자는 자신이 상장 기업의 CEO라고 말했다. 벌써 서른이 넘었는데도 전혀 늙지 않으니 집에서는 압박이 심했고 본인도 불안해서 치료를 결심했다고 했다. “평생 이대로 살 수는 없잖아요. 이러다 나중에 진짜 괴물처럼 될지도 모르겠네요.” 은서우는 그 말을 듣고도 현실감이 전혀 들지 않았다. ‘서른이 넘었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겉보기엔 완전히 고등학생 같았으니까. 졸업한 지도 몇 년이나 지난 은서우는 그제서 몸소 깨달았다.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법이다. 연구소를 나오자 은서우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수술 날짜가 보름 후로 변경됐어요.” 인명진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차가운 빛이 서린 눈으로 여전히 앞을 응시한 채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은서우는 그가 아까부터 계속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원장님이 시간을 버신 거예요?” 인명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었던 건 고작 이 보름이라는 시간뿐이었다.원래 수술은 며칠 뒤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수술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수술이라 부르지만 실상은 인명진과 그들 사이의 한판 승부였다. 성공하면 돌려보낸다. 어차피 그들도 진짜로 무리수를 둘 생각은 없을 테니까. 실패하면? 그럼
연구원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연구원은 인명진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타협을 선택했기에 그들은 작은 방에 갖혀진 환자를 만날 수 있었다.은서우는 연구원이 귀신에게 쫓기기라도 한 듯 쏜살같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아까 말씀하신 이준서 박사님과 신 선생님은 누구인가요?”인명진이 별다른 감정 없이 설명했다.“이준서는 아까 저희가 만난 그 남자예요. 내과와 외과를 모두 전공한 박사로 해외에서 오랫동안 공부했죠. 그리고 신 선생님은 의학계의 우두머리 같은 존재예요. 케임브리지와 여러 유명 대학에서 강연한 적이 있어요. 아, 그리고 이준서 박사가 신 선생님의 제자거든요.”은서우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설마 신석림 선생님인가요?”인명진이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맞아요. 은서우 씨가 신 선생님을 많이 존경하나 봐요?”은서우는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한 것을 깨닫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까 긴장된 분위기를 보면 인명진은 그 두 사람과 무슨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다.그녀가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인명진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신 선생님을 존경하는 건 당연하죠. 명성이 자자하시잖아요.”그는 두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은서우와 거리를 벌렸다. 마치 화가 난 듯한 모습이었다.하지만 은서우는 그것이 단순히 자신의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원장님이 이런 일로 화를 내는 성격이었나? 게다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왜 화를 내지?’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불필요한 생각을 떨쳐내고 그를 따라갔다.모니터로 관찰했지만 실제로 환자를 만나니 안타까움이 밀려왔다.“인명진 박사님, 오랜만에 뵙네요. 지난번 이후로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아요.”열여덟, 열아홉 살 정도로 추정되는 소년이 침대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그의 피부는 눈처럼 하얗고 속눈썹과 머리카락도 모두 하얗기에 놀라울 정도였다.마치 눈의 요정을 보는 듯했다.“알비노 환자예요?”
남자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살짝 옅어지더니 입을 살짝 삐죽이며 말했다.“그 정도로 아까우세요?”인명진은 남자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런 대답 없이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은서우도 그 뒤를 바짝 따라갔다.어깨를 스치며 지나갈 때 남자는 그녀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쪽에게 인명진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궁금하군요.”은서우는 동작을 멈추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며 놀란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마치 그녀가 돌아볼 줄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은서우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어디 두고 보시죠.”그리고는 갑자기 빛나는 남자의 눈빛을 무시한 채 엘리베이터에 발을 들여놓으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인명진도 그녀가 한발 늦게 들어오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깨끗이 정리된 병실 안.환자는 환자복을 입고 침대 위에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방에서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고작 다섯 걸음 정도였다. 침대에서 화장실까지의 거리도 겨우 열 몇 걸음에 불과했다. 그가 사는 병실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좁았다.병실 내부의 시설도 매우 단순했다. TV도 없고 책상 하나와 의자 몇 개, 그리고 침대 옆 탁자 위의 스탠드와 몇 권의 책이 전부였다.방 네 귀퉁이에는 모두 빨간 점이 반짝이고 있었는데 환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한 감시카메라였다.은서우는 실시간 모니터를 통해 이 장면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사람을 데려다 놓고 이런 방에 가둬두면 정말 미쳐버리지 않을까요?”인명진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말했다.“이건 규정이라 저도 방법이 없어요.”그가 개입하고 싶어도 개입할 수 없었다.모든 결정은 팀 내부의 투표를 거쳐야 했다. 당시 인명진은 기권했고 팀원 대부분이 투표한 결과가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다.스마트 기계의 자외선이 환자의 세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던 그들의 말을 전해주며 인명진은 쌀쌀한 미소를 지
그러나 곧 인명진의 시선이 은서우에게로 향했다.“뭐 생각나는 거 있나요?”은서우는 고개를 저었다가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생각은 있지만 실제로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생각이 단지 생각일 뿐이죠. 원장님, 그건 원장님이 가르쳐준 거예요.”고개를 든 그녀의 두 눈은 초롱초롱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인명진은 그런 은서우를 바라보며 눈부신 그녀의 모습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인명진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럼 지금 바로 짐을 챙겨서 저를 따라오세요.”그 말을 들은 은서우가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은서우 씨가 말했잖아요. 실제로 만나기 전에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말이에요. 그럼 지금 바로 가서 봐야죠.”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아니, 놀라움보다는 충격에 가까웠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은서우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랐다.‘멸균 장갑과 도구, 그리고 노트도 가져가야 하나?’“거기 다 있으니 이것들은 필요 없어요.”인명진은 이 말과 함께 은서우의 노트만 챙기고 떠났다.“아.”은서우는 자신의 머리를 탁 치며 왜 그렇게 간단한 걸 생각하지 못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기쁨에 겨워서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환자는 병원이 아닌 병원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한 요양원에 있었다.겉보기에는 요양원이었지만 실은 연구소였다. 단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요양원으로 위장한 것뿐이었다. 실제로 요양을 받는 노인은 이곳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곳에는 오직 멸균 복이나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만이 있었다.요양원으로 들어가려면 신원 확인이 필요했다.인명진이 목에 걸고 있는 카드를 책임자에게 보여줄 때 은서우가 사진을 힐끔 훔쳐보았다.카드에는 인명진의 증명사진이 붙어 있었다. 사진 속의 그는 단정하고 정직해 보였으며 또한 날카롭고 과묵해 보였다.인명진이 먼저 들어가며 말했다.“뭐해요?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따라오세요.”그 말에 정신을 차린 은서우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원장님은 그녀에게 그렇게 잘해주시는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평소 인간관계에 둔감했던 은서우는 드디어 자신의 이상함을 깨달았고 인명진에 대한 감사로 생긴 친근감이 순식간에 크게 줄어들었다.심지어 물러나고 싶은 충동까지 생겼다.인명진은 그녀에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왜 말을 안 하죠?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지금 말해도 돼요. 마침 같이 해결할 수 있으니깐요.”인명진은 그녀를 위하는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하지만 은서우가 어떻게 감히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리겠는가!인명진이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된 후 그 차가운 얼굴에 떠오르는 혐오스러운 표정을 상상하자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가슴 한구석에 아릿한 고통이 퍼졌다.인명진의 의혹이 담긴 눈빛을 마주한 그녀는 마음을 애써 안정시키고 아무 일도 없는 듯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온지유 씨는 그날 저와 아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어요.”말을 마치자 남자의 미간이 펴지는 것을 본 은서우는 순간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원장님에게 거짓말을 했고 진실 반 거짓 반으로 그를 속여넘겼다.인명진은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여성의 마음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를 좋아하는 여성들이 다가와서야 비로소 이상함을 느낄수 있을 정도로 둔감한 스타일이었다.게다가 그는 은서우를 믿고 있었다.인명진은 그녀가 온지유의 행동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알고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으세요. 이것도 한번 보세요. 최근 검사 결과에요.”인명진이 건넨 것은 혈액 검사 보고서였다.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은서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검사 결과지를 보고 또 보았다. 여러번 훑어본 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계속 고개를 저었다.“이상해요, 이건 너무 이상해요. 이 세포 수가 왜 또 몇 배나 늘어난 거죠?”인명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그게 바로 제가 은서우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