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강윤슬이 화가 나든 말든 신경 쓰는 거죠? 내가 전에 했던 말을 귓등으로 들은 건가요? 이 카드의 주인이 나예요, 그쪽이에요?”그의 말을 들은 비서는 황급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전 혹시나 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오지랖을 부렸습니다.”지석훈은 비서가 무슨 말을 하든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후 문지원의 오빠를 찾는 것에 다시 집중했다.문지원도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 예전에는 그나마 준비라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수상해도 너무 수상했고 더 복잡해졌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확실히 알아낸 거예요. 직접 가기 싫은 거라면 제가 대신 가서 확인해 드릴 수는 있는데... 그게 가격이 조금 비쌀 거예요.”일전에 지석훈이 눈앞에 있는 탐정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들은 그녀는 탐정을 떠보기 시작했고 확실히 어딘가 수상했다.“왜 그렇게 제 오빠가 그쪽에 있다고 확신하시는 거예요? 그쪽으로 가본 신 적도 없잖아요. 그 사람들 말 믿을 수 있는 거 맞아요? 게다가 전 지금까지 오빠가 그곳에 있다는 증거 사진이나 영상도 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몇 마디 말로 저더러 지금 믿으라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요?”만약 지석훈의 말을 듣기 전이였다면 그녀는 믿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이미 수상함을 눈치채고 있었다. 여하간에 회사에 이렇게나 큰일이 일어났고 그녀는 더는 잃을 것도 없었다.탐정은 문지원이 이렇게나 빨리 눈치챌 줄은 몰랐는지 다소 망설이고 있었다. 문지원은 당연히 탐정의 말속에 거짓이 담겨 있음을 알고 있었다.“그동안 탐정님한테 의뢰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전 집안에 일이 생긴 후로 계속 탐정님한테 의뢰를 해왔어요. 그래서 탐정님 실력도 믿고 있고요. 그런데 탐정님이 제 뒤통수 치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만약 사실대로 말해줄 생각이 없으시다면 전에 받았던 의뢰비를 전부 돌려주세요. 이쯤에서 그만둘 거거든요.”말을 마친 문지원은 상대가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마음이 급해진 탐정
“전 지후 씨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가요. 제가 요즘 얌전하게 잘 지내고 있었잖아요. 아니면 제가 손을 다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예요? 그런 거라면 괜찮으니까 저한테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요. 어차피 지후 씨도 제가 반항하지 않을 거라는 거 잘 알잖아요.”여울은 담담하게 손을 내밀고 있어 최지후는 더 화가 났다.“대체 뭐 하자는 거야? 난 그냥 무심코 한 말이었다고. 내가 너한테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나?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 너한테 손을 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전에도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 넌 대체 누구 지시를 받고 여기로 온 거냐? 모르는 사람 없으니까 지금처럼 건방지게 굴지 않는 게 좋을 거야.”그의 말을 들은 여울은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 함께 지낸 시간이 많았는데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으니 말이다.“전 확실히 지후 씨와 만날 수 없는 계층의 사람이었지만 고의는 없었어요. 그래도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요. 전 지후 씨와 함께 지내면서 전보다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네요. 지후 씨에게 전 그렇게 가치가 없는 사람인가요?”예전의 여울이었다면 이런 말을 꺼내는 건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지만 이미 최지후의 경계심이 어느 정도 풀어졌던지라 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최지후는 확실히 감 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조금 전까지 화내고 있다가도 갑자기 즐거워하면서 성격도 이상했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그녀는 아마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손을 다치고 난 후 여울은 최지후가 자신을 많이 봐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예전에 보여주지 않았던 행동도 보여주고 있었던지라 여울은 전보다 더 대범해지고 점점 비꼬는 어투로 그와 말을 했다.“제가 그렇게 거슬리면 지금 바로 나갈게요. 그래도 전 지후 씨한테 진심이었어요. 아무리 지후 씨가 저한테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도, 정말로 절 해치려고 했다고 해도 전 지후 씨 곁에 있고
그 순간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여울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최지후가 그녀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고 얼굴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전에 그가 했던 행동이 떠오른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덜덜 떨고 말았고 최대한 태연한 척하려고 애를 썼다.“누구와 문자를 주고받는 거지?”최지후가 점점 더 그녀에게 다가가고 두 사람의 거리는 손바닥 한 뼘 정도만 남게 되었을 때 그는 갑자기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올렸다.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있었던지라 느껴지는 통증에 여울은 미간을 구기고 말았다.“딱히 특별한 사람은 아니에요. 제 동창이 며칠 전에 저와 마주치고는 다음에 만나자고 문자 보내고 있었던 거예요.”“그래.”그러자 최지후의 목소리가 온화해졌다. 만약 두 사람 사이를 모르는 사람이 보았더라면 정말로 그의 성격이 좋은 줄 알았겠지만 그와 함께 지내고 있는 여울은 그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 순간 그는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여울은 겨우 다시 중심을 잡았다. 머리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그녀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고 이 상황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지금 날 속이고 있는 거지? 여울, 왜 내 말을 안 듣는 거지? 내 말을 안 들으면 벌을 받는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텐데.”최지후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안방까지 끌려들어 가게 되었고 문을 닫고 나서야 그는 손을 내려놓았다.여울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다. 얼른 이곳을 도망치고 싶었지만 엄청난 위압감을 내뿜는 최지후가 눈앞에 있었다.“내가 널 위해 선물을 준비했어. 네가 좋아할지는 모르겠네?”최지후는 말을 하면서 옆에 있던 상자를 들고 왔다. 상자를 열자 안에 있는 물건이 보였고 여러 가지 도구가 담겨 있었다. 여울은 보자마자 몸이 심하게 떨려왔다. 누가 사람을 고문하는 도구를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그녀에게 물으며 대답을 들으려 했
만약 최지후가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최주하도 여울을 최지후에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런 말들은 여울은 그저 속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절대 입 밖으로 내서도 안 되었다. 오래 살고 싶으면 말이다.그녀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정말로 동창과 문자 보내고 있었어요. 믿지 못하겠으면 직접 확인해 봐도 돼요. 여기 제 핸드폰이 있으니까요.”여하간에 그녀와 최주하의 문자 기록은 제때 삭제했고 위장용 문자도 만들었기에 최지후가 정말로 그녀의 핸드폰을 본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그래? 근데 왜 난 아직도 네가 날 속이고 있는 것 같지? 여자들은 다 똑같아. 다들 내 앞에서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 사기꾼들.”최지후는 계속 손을 움직였고 방안에는 여울의 비명만 울려 퍼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최지후는 드디어 손을 멈추었다. 여울의 안색은 창백했고 몸 곳곳에 살 까진 곳과 멍으로 가득했다.“내가 못 해준 게 뭐지? 분명 약속했었잖아. 너한테 손을 대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약속을 먼저 어긴 건 너야. 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거라고!”최지후는 천천히 몸을 굽혀 그녀를 보았다. 여울은 무의식적으로 그가 또 손찌검하려는 줄 알고 움찔거렸다. 이곳에서 얼른 도망치고 싶었지만 지금 그녀의 상태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아프지? 기다려. 내가 약 가져올 테니까. 내가 치료해주지.”말을 마친 최지후는 그대로 방에서 나가서 빠르게 약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약상자에는 약이 가득했고 연고는 물론 소독약도 있었다. 그리고 붕대와 거즈도 가득했다. 그는 여울에게 약을 발라주려고 했지만 여울은 그런 그를 노려보며 잠겨버린 목소리로 말했다.“절 죽일 뻔해 놓고 지금 약 발라주려는 거예요? 애초에 지후 씨를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최지후는 역시나 미친놈이었고 그녀는 그런 미친놈을 믿고 있었다. 지금은 다시 정상적인 인간처럼 보였지만 언제 또 돌변하여 그녀를 죽이려 들지 모른다.“여울, 왜 나를 믿지 않는 거지? 방금은 네가 내 화를 돋워서 그런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이런 상황도 당연한 것 같았다. 사이코패스와 정상적인 사람이 어떻게 서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만약 서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둘 다 사이코패스인 것이다.연이은 며칠 동안 여울은 집에만 박혀 쉬고 있었다. 그간 최지후가 몇 번 다녀오면서 꽃과 먹을 것을 사다주기도 했고 그녀를 애지중지하듯 자꾸만 음식을 그녀의 앞까지 대령해 주었다.“여울아, 이건 네가 제일 좋아하는 꿀 꽈배기야. 이제 막 나온 걸 사 왔으니까 따듯할 때 얼른 먹어 봐.”“배고프지 않아요.”여울은 그가 사 온 음식을 먹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의 얼굴만 봐도 토가 나올 것 같았지만 약속한 일은 해야 했던지라 역겨운 마음을 꾹 참고 최지후의 곁에 있었다.“정말로 배가 고프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내가 사 온 것들을 먹기 싫은 거야.”최지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와 같은 사이코패스에게 있어 이미 한번 손찌검을 했으니 두 번째는 더 쉽게 손찌검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꽈배기를 테이블 위에 쾅 내려놓았다.“그래. 지난번에 확실히 너한테 손찌검을 했어. 하지만 그건 네가 날 오해하게 만들어서 그런 거잖아. 그 후에 바로 사과도 하고 직접 약도 발라주었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설마 고작 그 한 번으로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짓기라도 한 거야?”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떤 사이든 간에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에서도 사소한 일로 손찌검을 하는 일은 없었고 최지후처럼 심하게 폭행하는 일도 없었다. 그것은 잘못된 행동이었다. 분명 그가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로 그녀를 폭행한 것이면서 그는 전부 그녀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난 화난 게 아니에요. 정말로 입맛이 없어서 그래요.”여울은 먼저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점심을 너무 많이 먹어서 아직도 소화가 안 됐어요. 지금 꽈배기를 먹기엔 너무 느끼해요.”“하지만 내가 널 위해 사 왔다고. 조금이라도 먹어 봐. 맛만이라도 보라고. 착하지. 얼른 먹어.”
여울은 빠르게 옷을 잡아당겨 상처를 가려버렸다.“별거 아니에요. 이건 주문하신 칵테일이니 맛있게 드세요.”“여울.”최주하는 그런 그녀의 손목을 잡아버리더니 망설임도 없이 소매를 올려버렸다. 그녀의 팔에 잔뜩 난 흉흉한 상처를 본 그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이거 누가 그런 거야?”너무도 처참해 정상적인 사람이 낸 상처가 아니었다. 여울에게 이 정도로 상처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최지후를 제외하고 없었다. 다만 여울은 최주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최지후의 곁에 있는 것이었던지라 딱히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침묵이 곧 그에게 답으로 들려왔다.“최지후가 이렇게 만든 거지? 그렇지?”최주하가 직설적으로 묻자 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전 괜찮아요. 상처도 아물고 있고 시간이 지나면 다 나을 거예요. 지금은 조금 보기에 흉하긴 하지만 그렇게 아픈 것도 아니거든요.”“여기서 잠깐 기다려.”최주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가버렸다. 여울은 그가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갔는지 당연히 몰랐다. 그가 기다리라고 했으니 얌전히 그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최주하의 손에는 커다란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약을 테이블로 내려놓더니 여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약을 발라주었다.“여자 몸에 이런 흉터가 남으면 안 좋잖아. 난 네게 이런 흉터가 남길 바라지 않아.”“전 괜찮아요. 이런 흉터에 신경 쓰지도 않는걸요.”여울은 고개를 저었다. 흉터가 생기든 말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지금의 그녀는 이런 일에 신경 쓸 여우도 없었다.갑자기 고개를 들어버린 최주하 덕에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 순간 최주하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때의 여자도 지금의 여울처럼 최지후에게 고통스럽게 폭행당했었다.머릿속에 떠오른 여자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여자의 눈은 빛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이 공허했다. 비록 살아는 있었지만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빠르게 여울의 상처는 치료가 되었다.“고마워요.”여울
다시 눈을 떴을 때 여울은 시야에 들어온 클럽이 아닌 주위 환경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주위를 두리번대던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실내화를 신고 문을 열고 나갔다.“여긴 어디지?”“여긴 내 집이야. 곤히 자고 있길래 클럽에 두고 나올 수 없어서 데리고 왔어.”혼자 중얼거리고 있던 때 마침 거실에서 최주하가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깨어나자 그는 간단히 설명해주며 다가갔다.“시간도 늦었으니까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내일 데려다줄게.”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시간이 늦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냉장고에 먹을 게 있으니까 배고프면 알아서 꺼내먹어. 그 옆에 서랍에는 간식도 있어. 먹고 싶으면 꺼내 그냥 꺼내 먹어.”“네.”여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의 그녀는 배가 고팠던지라 서랍을 열어 초코파이 몇 개를 꺼내 먹은 후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그렇게 아침까지 쭉 자게 되었다.어제 최주하가 그녀에게 약을 발라주고 잠든 그녀를 집으로 데려간 후 간식까지 내어줬기에 그가 너무도 고마웠다. 마침 아침 일찍 눈을 떴던지라 주방으로 가서 아침을 만들어 줄 생각을 했다. 최주하의 방은 조용한 것이 아직도 자고 있는 것 같았다.바쁘게 음식을 만들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눈을 뜬 최주하는 거실로 내려가자마자 고소한 음식 냄새를 맡게 되었고 냄새가 나는 곳으로 다가간 후 문을 열었다.“깼어요? 마침 아침 준비가 끝났는데 얼른 씻고 와요.”여울은 죽 그릇을 든 채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아침으로 뭘 드시는지 몰라서 여러 가지를 조금씩 만들어 봤어요. 얼른 와서 먹어 봐요. 제가 요리엔 꽤 자신이 있거든요.”“그래.”최주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씻으러 들어갔다. 어차피 그는 여울의 솜씨에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 비록 입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던 그는 대부분 음식은 전부 맛보았기에 다른 사람들이 만든 음식은 그에게 그저 그런 음식이었다.주방으로 내려온 그는 숟가락을 들어 죽을
최주하는 또 젓가락을 들어 여울이 직접 만든 만두와 교자를 먹어보았다. 확실히 맛은 있었지만 유명한 맛집에서 먹은 것보단 못했다. 그래도 집밥 느낌이 물씬 났고 물론 그 죽도 맛있었다. 그렇게 그의 숟가락은 멈춘 적이 없었고 한 그릇 싹싹 비워버렸다....한편 문지원은 오빠를 찾지 못해 실망하고 있었다. 그녀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던 순간 발신자표시제한으로 한 통의 문자를 받게 되었다. 문자를 눌러 확인하자 손목시계 사진이 한 장 있었다. 그 손목시계는 바로 그녀의 오빠가 늘 하고 다니던 것이었다.그녀는 바로 사진을 확대해 시계에 난 스크래치까지 전부 확인해 보았다. 시계에 새겨진 이니셜마저 똑같은 것이 오빠의 시계가 분명했다. 사진 아래는 위치까지 찍혀 있었고 바로 근처였다. 조금 전까지 실망으로 가득했던 그녀의 눈빛이 변해버렸다.만약 오빠의 소식을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이대로 떠나버렸을 테지만 이미 이 문자를 받고 위치까지 알게 되었다. 설령 이 문자가 누군가 파놓은 함정임을 알아도 그녀는 아마 그곳으로 갈 가능성이 아주 컸다.‘함정이면 뭐 어때?'그녀는 시간 낭비를 해도 오빠에 관한 단서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찾을 가능성이 만분의 일이라고 해도 그녀는 직접 그곳으로 가서 확인하고 싶었다.‘만약에 정말로 있으면?'만약 이번에 정말로 오빠를 찾을 수만 있다면 이 도박에 기꺼이 뛰어들 생각이다.문지원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사진 속에 찍힌 위치가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가는 길 내내 사람이라곤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제대로 된 길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온통 잡초로 무성했다.무성한 풀숲 사이로 벌레가 자꾸만 튀어나왔고 심지어 앞에서는 뱀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깜짝 놀란 문지원은 얼른 뒷걸음질을 쳤다. 다행히 뱀이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계속 앞으로만 스르륵 소리를 내며 기어갔다.뱀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문지원은 움직일 엄두가 났다. 그녀의 두 눈엔 피로로 가득했지만, 오빠를 찾을 수 있다면 이런 길도 언제든지 갈
문지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봤다. 그녀는 말투도 표정도 하나같이 순종적이였다. 그 모습을 본 진수호는 입꼬리를 비딱하게 올리며 웃었다. 그는 바구니에서 물건을 꺼내며 중얼거렸다. “눈치는 좀 있네요.” “내가 이런 복이 있을 줄이야. 다리는 절어도...” 그는 절단된 다리를 툭툭 치며 껄껄 웃었다. “이렇게 고우면서 말도 잘 듣는 마누라가 생겼잖아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진수호는 문득 물었다. “근데 우리 엄마랑 나래는 어디 갔어요?” 문지원은 조용히 창밖을 가리켰다. “밖에 의사 선생님이 왔대요. 마을 사람들한테 무료 진료해준다길래 다들 몰려갔어요.” “당신 어머니도 혹시 당신 다리를 고쳐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가보셨고요.” 진수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요? 내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요? 그게 진짜면... 나 인생 제대로 풀리는 건데?” 문지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한 번 가보세요. 혹시 모르잖아요.” “그래야죠.”다리를 고칠 수 있다는 말에 진수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문앞까지 뛰어갔다. 떠나기 직전, 그는 뒤를 돌아보며 경고하듯 말했다. “잘 들어요. 집 안에 얌전히 있어요.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어디 나가면 안 돼요. 알죠?” “혹시라도 도망치면... 다리 못 쓰게 만들 거예요.” 문지원은 진씨 가족의 뻔뻔하고 역겨운 태도에 속으로는 어이가 없었지만 겉으로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전 어디 안 가요. 다른 여자들이랑은 다르니까요.” 그 말에 진수호는 흐뭇하게 웃으며 문밖으로 뛰어나갔다....진수호는 금세 마을 어귀까지 달려갔다. 밖에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었고 곧 김숙희와 여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김숙희는 아들을 보자 손을 흔들며 외쳤다. “여기야! 얼른 와 봐라.” 진수호는 절뚝이며 다가갔고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와... 줄이 이렇게까지 길다고? 이러다
“여기 사람들은 전부 한통속이야. 낮에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어. 밤이 되면 우리를 집 안에 가두고 도망칠 기회조차 없게 만들어.”여자의 말에도 불구하고 문지원의 눈빛은 여전히 결의에 찬 표정을 유지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도망칠 수 있다면 반드시 희망이 있어요.” 여자는 한숨을 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너 참 순진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니... 예전에 한 여자도 너처럼 여기로 팔려왔었어.” “그 여자는 도망쳤지. 산을 넘어 읍내까지 갔는데... 결국 잡혀서 다시 끌려왔어.” 문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꽉 쥐고는 결연히 말했다. “그래도 포기하면 안 돼요. 우리는 이미 정보를 얻었잖아요. 기회만 잘 잡으면 분명 빠져나갈 수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돌려 진지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까지는... 언니도 최대한 조용히 지내세요. 반항하면 다시 맞을 거예요.”“차라리 그들을 방심하게 만든 뒤 도망치는 게 더 나을 거예요.” 여자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화제를 툭 바꾸며 말했다. “아까 요리 배우고 싶다고 했지?” “지금 가르쳐줄게. 도망 얘기는 나중에 하자.” 그 말을 듣고 문지원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급히 여자의 팔을 잡고 물었다. “그럼... 언니도 저랑 같이 도망치기로 한 거 맞죠?”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너 말대로 지금은 일단 그 사람들 말에 따르자.” “네. 좋아요.” 문지원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태어나서 제대로 요리를 해본 적 없던 문지원은 그녀와 함께 부엌으로 향했다. 여자는 칼을 들어 고구마를 자르며 말했다. “이건 이렇게 손으로 잡고 썰어야 해. 그래야 손 안 베지.” 문지원은 조수현의 말을 따라 하나씩 배워갔다. 같이 칼질을 하던 문지원은 문득 물었다. “맞다. 언니, 이름이 뭐예요?” 여자는 잠시 생각한 뒤 조용히 대답했다. “난 조수현이야.”
그 여자가 돼지우리 안에 갇혀 채찍질을 당하던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 문지원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이 마을에는... 나 말고도 저렇게 갇혀 있는 여자가 얼마나 더 있을까?’ 생각할수록 숨이 턱 막혔다.너무 끔찍했고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녀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과자를 반쯤 먹었을 즈음, 서대수가 고개를 푹 숙인 여자를 데리고 나왔다. 여자는 낡고 해진 삼베옷을 입고 있었고 앙상한 몸에 헝클어진 머리까지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한 채 마치 존재를 숨기듯 서 있었다. 서대수는 여자의 등을 거칠게 떠밀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가! 지원 씨가 요리 좀 가르쳐달라잖아.”“말 잘 들어. 안 그러면 집에 가서 굶는 수밖에 없을 줄 알아.”문지원은 떨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저릿하게 아팠다. 문지원은 의자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심장이 조여오는 듯한 감정에 숨을 한번 가다듬은 그녀는 조심스레 여자 앞으로 다가갔다. 문지원은 입술이 떨리는 걸 들키지 않으려는 듯 여자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을 이었다. “언니, 저... 얼마 전에 막 시집온 새댁이에요.”“아직 요리를 하나도 못 해서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좀 가르쳐주실 수 있을까요?”여자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툭 떨어뜨렸다.그 눈물방울이 땅바닥에 맺히는 걸 보는 순간, 문지원의 가슴도 함께 무너져내렸다. 잠시 후, 여자는 억지로 말을 짜내듯 힘겹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응...”그 순간, 서대수는 또다시 쾌활한 얼굴로 돌변해 떠나기 전 그녀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잘 좀 가르쳐줘라! 쓸데없는 소리하거나 말 안 들으면... 알지?”멀어지는 발소리. 두 사람은 진씨네 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서 한참 떨어져 걸은 뒤 여자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문지원의 손을 확 낚아채듯 뿌리치며 날카롭게 거리를 벌렸다. 문지원은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말했다.
서대수는 문지원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고 그 눈빛 속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문지원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당근하죠. 숙희 아주머니가 대수 씨 정말 능력 있고 남자답다고 항상 칭찬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왜 아내분은 대수 씨 말을 안 듣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좋은 남자를 두고도 몰라보다니...” 누군가 자신을 이렇게 칭찬해주자 서대수는 무릎을 탁 치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 맞는 말만 하시네요. 저 여편네가 보는 눈이 없어서 그래요.” “나처럼 이렇게 좋은 남자가 또 어디 있겠어요...”서대수는 점점 분노를 느끼며 말을 이었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게 아니라 눈이 멀 정도로 어두운 거죠.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라는 걸 모르다니...” “모두가 당신처럼 눈을 뜨고 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문지원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안쪽으로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아내분은 어디 계세요?” “그 여자요?”서대수는 콧방귀를 끼며 얼굴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여자, 말을 안 들어서 지금 돼지우리 안에 갇혀 있어요.” 문지원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녀는 얼굴 색이 급격히 바뀌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 여편네 얘긴 왜 꺼내시는 거예요? 괜히 기분만 상하게...” 말을 끝나자 서대수는 금세 웃으며 기분을 풀었다. “시간 내서 와주셨으니 우리 집에서 뭘 좀 먹고 가세요.” “며칠 전에 어머니가 읍내에서 간식을 사왔는데 한번 드셔보세요.” 문지원은 진씨 집에 온 뒤로 고기 한 점 제대로 못 먹은 지 오래라 속이 허전했다. “그럼 대수 씨, 잘 먹을게요.”서대수는 문지원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은 꽤 좁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서대수는 서랍에서 과자 한 상자와 작은 간식들을 꺼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 문지원에게 따뜻한 물 한 컵을 따라주며 친절하게 말했다. “자, 따뜻한 물 한 잔 드세요.”그는 문지원
“틀린 말은 아니네.” 김숙희는 차가운 웃음을 내뱉으며 떠나기 직전 문지원의 얼굴을 가리키고는 낮게 경고했다. “너, 이 마을 사람들이 다 한통속이라는 거... 이제 슬슬 눈치 챘겠지?”“이웃끼리 워낙 끈끈해서 말이야. 네가 발만 슬쩍 빼도 금세 내 귀에 들어온다?”“우리가 이렇게까지 챙겨줬는데도 네가 끝까지 도망치겠다고 나선다면... 그땐 돼지우리에서 콕 처박혀야 할 거다.”“그때 가서 우리가 너무하다느니, 냉정하다느니 해봤자 소용없어. 그건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이런 식의 협박은 문지원이 TV에서나 보던 장면이었다.설마 자기 인생에 이런 막장 드라마 같은 상황이 펼쳐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 이 판국에 괜히 발끈했다가는 맞아죽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살아남으려면 그냥 얌전한 며느리 코스프레나 잘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 도망 안 가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문지원은 어린 소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등 뒤로 감춘 손을 악착같이 움켜쥐었다. “나래가 저를 구해줬잖아요.”“저도 진씨 가문에 꼭 보답하고 싶어요.”문지원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말에 김숙희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별다른 수상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다시 한번 싸늘하게 비웃었다. “쓸데없는 꿍꿍이 부릴 생각 마.”“경고하는데 우리 집 사람들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쏘아붙이듯 말을 마친 김숙희는 진나래의 손을 잡았다. “가자. 아가.”“듣자 하니 그 의사가 꽤 유명하다더라. 진짜로 네 오빠 다리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몰라.”“그러면 우리 집안엔 또 한 번 경사가 나는 거지.”진나래는 오빠의 불편한 다리를 떠올리자 어느새 붉어진 눈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맞아요... 오빠는 그 다리 때문에 정말 많은 걸 견뎌야 했어요.”“이제 다리만 나으면 남들 눈치 보며 살 필요도 없고...”그녀는 문지원을 돌아보며 수줍게 웃었다. “이렇게 예쁜 언니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면... 다들 부러워서 입이 딱 벌어질 거예요.”그때, 김숙희는
“뭘 번거롭게 식을 올리려고 하는 거니? 내가 네 아빠한테 시집왔을 때는 그냥 머리에 면사포 하나만 두르고 왔어. 그 면사포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김숙희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둘이서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지 뭘 그렇게 겉치레에 신경 써?”웨딩드레스니 뭐니 들어만 봐도 돈이 많이 들 것 같았다. 그들의 집안 형편은 좋지 못했다. 그동안 모은 돈도 400만 원 되지 않았고 결혼식에 전부 다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문지원이 핸드폰에 배터리가 남아 있는 틈을 타 웨딩드레스와 턱시도 사진을 검색해 진나래에게 보여주었다.“네 오빠가 이런 턱시도를 입으면 분명 엄청 멋있을 거야.”“와! 옷이 너무 예뻐요. 언니는 원래도 이쁘니까 이런 옷을 입으면 완전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이 될 거예요.”진나래는 바로 감탄했다.“이 옷을 사면 나중에 저도 빌려 입을 수 있어요?”“당연하지.”어차피 문지원이 원해서 하는 결혼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사진을 보여준 뒤 진나래의 마음을 움직여 가족들을 설득해주길 바랐다.그녀의 예상대로 진나래는 웨딩드레스를 사달라고 졸랐고 진수호도 턱시도를 입고 싶다며 말했다. 자식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김숙희는 결국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문지원이 조금 전 꺼낸 돈도 있지 않은가.김숙희는 그간 모은 돈을 전부 진수호에게 주었다.“내일 혼자 시내로 가서 사와. 이 돈을 다 쓰지는 말고. 조금이라도 남겨. 우리 집에서 키우는 닭도 몇 마리 안 되는데 남은 돈으로 돼지고기라도 사와야 하니까.”“알았어요.”진수호는 원래부터 문지원을 데리고 갈 생각이 없었다.“다른 사람들을 보니까 핸드폰으로 물건도 사고 그러던데, 지원 씨 핸드폰에도 돈이 있어요? 있는 거면 내일 내가 은행 가서 찾아올게요. 나랑 결혼하는데 나만 돈을 쓰는 건 불공평하잖아요.”문지원은 이미 진수호의 행동에서 뿌리 깊게 내린 악을 발견했다. 진수호는 부녀자를 유괴했을 뿐 아니라 스스럼없이 돈도 요구하고 있어
진나래는 문지원을 보며 말했다.“고기 몇 점 더 먹는다고 살이 찌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드세요. 전 명절에 매일 돼지고기만 먹었는데도 살이 안 쪘거든요.”문지원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런 가정에서 평소에 매일 고기를 먹기란 불가능한 일이었고 명절이 되어야만 먹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먹는 간식은 물론이고 인스턴트 음식도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살이 찔 수가 있단 말인가.그녀가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은 살이 찔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진나래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그녀가 걱정되어서 그런 것이었고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아이가 너무도 미웠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던 그녀는 밥그릇에 있는 고기를 먹어버렸다.김숙희는 그제야 만족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아이도 낳지 않았는데 그렇게 몸매에 집착할 것 없어. 많이 먹어야 건강한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거야. 아들 낳고 나서 살을 빼든 말든 마음대로 해. 그땐 간섭하지 않을 테니까. 오늘은 너와 수호가 이 방에서 자. 어차피 이젠 내 아들과 살림을 차려야 할 텐데 일찌감치 한방에서 자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리고 나한테는 며느리니까 말도 놓을게. 얼른 떡두꺼비 같은 손자를 안겨주면 좋겠구나.”그 순간 문지원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는 비록 순결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런 외진 마을에 갇혀 아이를 낳는 도구가 되는 건 싫었다. 그녀의 아이가 이런 곳에 태어나 비정상적인 교육을 받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만약 정말로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오늘부터 같이 밤을 보내기엔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문지원은 일부러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저희 집에서는 결혼하기 전까지 외간 남자와 함께 밤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저희 부모님께서 어릴 때부터 가르치셨거든요.”“그럼 지금도 순결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진수호는 눈에 띄게 흥분했다. 이렇게나 예쁜 여자가 자신의 여자로 되었으니 그간 얼마나 많은 남자를 만났든 신경 쓰이지 않
문지원은 순식간에 눈빛이 변해버린 아이의 가족들을 보았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제가 왜 이곳에 남아요? 전 돌아가야 할 집이 있어요.”“언니, 언니도 남편감을 만나지 못한 게 아니에요? 그럼 우리 오빠를 빌려줄게요. 앞으로 둘이 서로 지켜주면서 행복하게 지내면 언니에게도 좋잖아요. 설마 우리 오빠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는 거예요?”진나래는 다급해져 얼른 입을 열었다.“우리 오빠는 비록 발이 평범한 사람들과 달라 힘든 일도 못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못 하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밭일은 저도 도울 수 있어요. 언니랑 제가 밭을 관리하면 되잖아요.”들으면 들을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찌감치 자신을 구해준 아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됐어. 너희 둘 다 그만 말해.”진성국은 집안의 가장이었던지라 당연히 자신의 아들이 한눈에 봐도 귀하게 자란 문지원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문지원이 이곳에 남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 마을로 시집오려는 여자는 아주 흔했고 진수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대도 상관없었다. 사람만 이곳에 있으면 되니까. 그는 직설적으로 문지원에게 말했다.“우리 마을은 아주 외진 곳에 있지요. 마을을 벗어나려면 저 산부터 넘어야 하는데 마을 사람들 중 아무도 아가씨에게 길을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외지인이라면 그 산을 빠져나가기엔 아주 힘들죠. 게다가 마을 사람들끼리도 서로 아는 사이고 친척인 경우도 많아 도망치려고 한다면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 아가씨를 다시 잡아 올 거예요.”문지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하지만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 가족들에게 미움을 산다면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빠질 테니 말이다. 그녀는 이런 산속 마을에 영원히 갇혀 살고 싶지 않았다.“우리 집안 사람들은 그래도 인정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우리 아들이랑 서로 알
여자아이는 조금 난감해졌다.그들의 마을에서 아들을 장가보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대부분 돈이 조금 있다는 집에서 며느리를 들였고 그들처럼 가난한 집안에서는 아들을 장가보낼 돈조차도 없었다. 게다가 아이의 오빠는 절름발이였던지라 오빠를 보는 여자마다 비웃기 바빴고 걷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빨리 걸을 수는 없었기에 밭일도 할 수 없었다.오빠의 나이가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커지고 평생 혼자 살 거라고 생각하니 아이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졌다. 오늘 겨우 산에 올라갔다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 다를 바 없는 문지원을 발견했던 아이는 어떻게든 문지원을 자신의 새언니로 맞이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대로 자리를 비운다면 문지원이 도망치거나 다른 마을 사람에게 잡혀갈 것이 두려웠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의 오빠는 정말로 평생 혼자 살게 될지도 모른다.“지금은 시간이 많이 늦었어. 아무리 마을 사람들과 친하다고 해도 네가 혼자 밖으로 나가는 건 위험해. 차라리 내일 불러오시는 게 어때.”문지원이 호의로 아이를 설득했다. 그녀는 아이가 오밤중에 나갔다가 사고당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언니 말씀이 맞아요. 내일 가서 모셔와야겠어요.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요.”쿵쿵쿵.이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의 오빠는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 문밖에서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저녁 준비 끝났으니까 나와서 먹어.”“언니, 가요. 제가 우리 가족들을 소개해 줄게요.”아이는 문지원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갔다. 안방은 제일 큰 방이었고 아이의 부모가 지내는 곳이었으며 동시에 거실과 밥 먹는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 문지원이 들어오자 아이의 부모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열정적인 모습으로 문지원을 맞이했다.“얼른 앉아서 입맛에 맞는지 봐요. 그런데 정말 예쁘게 생겼네요. 우리 마을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아가씨보다 예쁜 사람은 없을 거예요.”문지원은 대충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너무도 열정적인 그들의 모습을 보니 왜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