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지는 그를 더는 ‘대표님'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이름을 불렀다.그녀는 여이현의 길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여이현은 차가워진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시죠, 서은지 씨?”서은지는 그를 보았다. 뼛속까지 거만했던 그녀는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방금 한 말 진짜예요? 정말로 이미 결혼했어요?”그녀는 여이현이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그래서 그가 일부러 그녀를 피하려고 거짓말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여이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굳이 거짓말을 해서 뭐해요?”“여이현 씨가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요. 게다가 여이현 씨 아내가 누군지도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핑계 대는 줄 알았죠.”“서은지 씨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그가 차갑게 굴수록 서은지는 더 흥미가 생겼다. 꼭 사냥감을 찾은 것처럼 반드시 그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그녀는 가지지 못하는 것에 더 흥미를 느꼈다.서은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에게 다가가며 대범한 행동을 했다.“결혼했다고 해서 뭐요. 어차피 나중에 이혼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전 여이현 씨가 결혼해도 상관없어요.”그녀의 말을 들은 온지유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여이현은 막무가내인 사람과 질척거리는 사람을 아주 싫어했다.그런데 서은지가 그런 사람이었다.여이현은 서승만을 봐서라도 서은지의 당돌한 행동을 참아주고 있었다.그러나 서은지가 가까이 다가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쓰다듬자 그는 결국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혐오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그는 잔뜩 어두워진 안색으로 그녀의 손을 쳐내려고 했지만 온지유가 한발 빠르게 서은지의 손을 잡아챘다.“서은지 씨!”온지유가 나설 줄은 몰랐는지 여이현은 다소 의외라는 눈빛으로 온지유를 보았다.서은지도 온지유를 보았다.“그쪽은 여이현 씨 비서가 아니던가요?”온지유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여기는 병원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인데 대표님께 그런 행동을 하시면 된다고 생각하세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그녀는 여이현이 그녀에게 생리통 있다는 것까지 알 정도로 세심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온지유는 정말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예전에 그와 평생을 함께 살아도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또 몸 상태는 어떤지 모를 거로 생각했다.그녀가 언젠가 죽게 되어도 여이현이 제일 마지막으로 알게 되리라 생각했다.지금으로선 시간이 지나면 기억하기 싫어도 기억이 날 것이다.온지유는 생강차를 단번에 마셔버렸다.“푹 쉬어.”여이현은 세심하게 그녀에게 이불까지 덮어주었다.온지유는 그런 그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이따가 어디 가는 거예요?”“어디 안 가. 집에 있을 거야.”여이현이 답했다.온지유는 그가 며칠 동안 외박을 하여 오늘도 외박하는 줄 알았다.밖에는 예쁜 여자가 아주 많았으니 그가 머물 곳은 분명 있을 것이었다.여이현은 조금 실망한 듯한 그녀의 표정을 눈치채곤 그녀의 옆으로 눕더니 이불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많이 아파?”온지유는 순간 경직되었다. 고개를 삐그덕 돌리며 여이현을 보았다.“왜 갑자기 누운 거예요?”“조금 같이 누워있어 주려고.”여이현은 그녀의 아랫배에 올린 손을 움직이며 통증을 덜어주고 싶은 듯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이러면 좀 나아?”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그녀는 계속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조금 나아졌어요.”“자꾸 밤새우지 마.”여이현은 나직하게 말했다.“밤을 자주 새우면 몸에 무리가 가거든. 항상 몸조리 잘해야 생리할 때도 많이 아프지 않을 거야.”그의 다정하고도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그에게도 이토록 다정하고 세심한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다.온지유가 말했다.“사실 오늘 저를 데리고 어르신 뵈러 간 것도 저한테는 의외였어요. 게다가 어르신께 저를 아내라고 소개했잖아요.”여이현은 뜸을 들이며 물었다.“혹시 싫었어?”온지유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네가 싫지 않았다면 됐어.”여이현은 행여나 그녀가 싫어
정미리는 아직도 온경준의 병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헛소리를 들었으니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동서, 아무리 그래도 신경 쓴 적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 우리 그이가 언제 도련님 일을 안 도운 적 있어? 도련님이 친 사고는 우리가 다 해결해 줬어. 그렇다고 해서 무슨 일만 있으면 찾아오는 건 너무했지.”“저희도 어쩔 수 없어서 이러는 거 아니겠어요.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형님을 찾아오지 않고 이미 해결했을 거예요.”이렇게 말하며 장수희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엄마, 울지 마요.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장수희의 딸이 위로했다. 정작 울고 싶은 사람은 정미리인데도 말이다.그동안 온경준 일가는 얼마나 많이 시달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입도 뻥끗 안 하다가, 나쁜 일이 있을 때만 찾아오는 친척을 누가 달가워하겠는가?정미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정작 하지는 않았다. 온경준이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친동생인 온재준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온재준 일가는 거머리와 같았다. 한 번 도움을 받고 나면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번 20억 원을 빚지게 된 일도 그랬다. 무조건 버는 장사라고 투자하던 온재준은 정작 온경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이번 일로 그들은 집안이 망할 뻔했다. 크게 다툰 정미리와 온경준은 이혼 얘기까지 꺼냈다. 그래도 다행히 온지유가 해결해 준 덕분에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그러다가 장수희가 또다시 찾아온 것이다. 화가 치밀어 오른 온경준은 크게 넘어졌다가 손목이 골절했다. 그런데도 장수희는 뻔뻔하게 도움을 요구했다. 병실에 누워 있는 온경준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습이었다.“도련님은 어디 있어요? 당사자는 어딜 가고 동서랑 딸을 보낸 거예요?”“재준 씨는 숨어 있어요. 요즘 같은 날 밖에서 돌아다니면 맞아 죽을 거예요.”장수희는 붉어진 눈시울로 말을 이었다.“재준 씨가 지난 일로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몰라요. 형이 자기를 위해 쓴 돈을 돌려주겠다고 그렇게 열심히
“동서, 말조심해. 내 남편 몰골을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와? 도대체 우리를 어디까지 끌어내릴 셈이야.”정미리는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좋아요. 그럼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지난번의 20억은 어떻게 해결했어요? 지난번에도 그렇게 돈 없다고 잡아뗐잖아요. 우리 그이는 돈 마련한다고 장기 매매까지 할 뻔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돈은 갚았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죠.”장수희는 줄곧 그들이 어떻게 돈을 갚을 수 있었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어찌 됐든 집에 돈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아주버님, 그 돈은 어디에서 왔어요? 아버님이랑 어머님의 돈을 우리한테 말하지도 않고 빼돌린 거죠!”장수희는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이건 시부모가 돌아가고부터 줄곧 의심하던 것이었다. 지금도 물론 그들을 도와주고도 남을 돈이 있다고 믿었다.이 말을 듣고 온경준은 격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수희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야, 양심 없는 것!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예요?”온경준은 제대로 정신 차렸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마음이 생기면 이상한 것이었다.이러다가 온경준이 숨이라도 넘어갈 것 같았기에 장수희는 재빨리 타일렀다.“진정해요. 손에 깁스도 했잖아요.”온경준의 반응을 보고 장수희는 뒤늦게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약간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저도 그냥 묻는 것뿐이에요. 의심한 거 절대 아니니까 화내지 마세요.”온경준은 가슴이 아팠다. 그는 이런 사람을 위해 딸을 팔았다. 이건 아마 죽을 때까지 후회할 일일 것이다.‘내가 지유한테 빚진 게 많아...’밖에서 듣고 있던 온지유는 대충 상황 파악이 되었다. 장수희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 것 같았다.그녀는 장수희를 좋아한 적 없었다. 무엇이든 꼬치꼬치 캐묻고, 아량이 작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이렇게 의심이 많고 질투가 심한 사람이 부탁하려고 자존심을 내려놓을 줄은 또 아네.’정미리는 온경준과 온재준이 우애 깊은 형제라는 것을 말한 적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너 어느 대학 출신이지?”“수도권은 돼요.”“미안한데 우리 회사는 명문대만 취급해. 수도권이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야.”온지유는 딱 잘라서 거절했다. 온채린은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그대로 일단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근데 난 언니가 있잖아요. 언니가 도와주는데 학벌이 무슨 소용이에요.”“규칙은 규칙이야. 낙하산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뒤떨어지게 되어 있어. 회사에서 괜히 명문대 출신을 요구할 것 같아?”온지유의 단호한 태도에 기분 나빠진 온채린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됐어요. 언니가 도와주기 싫어서 이렇게 말하는 거 모를 것 같아요?”“알면 됐어. 뭐든 도움받아서 할 생각하지 마.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거지보다 못한 인생이 될 테니까.”“도와주기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사람 저주하는 건 무슨 경우예요? 엄마, 언니 좀 봐요!”모욕을 견딜 수 없었던 온채린은 눈시울이 빨개졌다. 그 모습이 속상했던 장수희는 당연히 온채린의 편에 섰다.“지유야, 넌 동생한테 그게 무슨 발 버릇이니? 동생 좀 챙겨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남들 다 돕고 사는 세월에... 그래, 네 아버지랑 작은아버지도 그렇게 지내왔잖니. 한 가족은 원래 돕고 사는 거야. 혼자 잘나간다고 으스대지 마.”온지유는 눈빛 하나 안 변하면서 대답했다.“제가 언제 으스댔나요? 저는 감사할 줄도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기 싫을 뿐이에요. 인사는커녕 제 아버지를 이렇게 만들어버렸잖아요.”“너...”장수희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또다시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지유야, 너 지금 날 무시하는 거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건 날 죽이는 것과 마찬...”그녀의 아우성을 듣기 싫었던 온경준은 바로 말을 끊었다.“됐고, 제수씨 집안일은 알아서 해결해요.”“안 돼요, 아주버님! 우리 그이 죽는 꼴 진짜 보고 싶어서 그래요?”이번만큼은 온경준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린 것을 보고 장수희는 더욱 언성을 높였다.“냉정한 인간들! 가족이 죽게 생겼는데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여이현이었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면서도 그는 온경준의 침대 곁으로 걸어갔다.차가운 남자의 목소리에 모녀는 울음을 멈추고 머리를 돌렸다. 온지유는 그가 올 줄 모르는 듯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요?”“병원장이 전화 왔어. 네 아버지가 입원했다고. 그래서 찾아왔지.”“아버님, 어머님, 안녕하세요.”깍듯하게 인사부터 한 그는 깁스한 온경준의 손을 바라보며 물었다.“이제 좀 괜찮으세요?”“손목 골절이라 며칠 쉬어야 한대요.”온지유가 대신 대답했다.여이현은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여긴 너무 시끄럽네요. 휴식하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으니까 VIP 병실로 가시죠.”“아니다, 이현아. 우리가 그럴 형편도 아니고, 여기에서 지내도 괜찮다.”온경준은 약간 못마땅한 눈빛으로 여이현을 바라봤다. 그대로 일단은 관심받는 처지이기에 말은 듣기 좋게 했다.“걱정할 것 없어. 약간 실금이 갔을 뿐이야. 지유야, 이현이 데리고 이만 나가 봐. 병실에는 네 엄마만 있으면 된다.”“괜찮아요. 시간 계산 다 하고 왔으니까요.”여이현은 아직도 VIP 병실로 옮기고 싶었지만, 온경준의 뜻을 존중해야 했기에 질문부터 했다.“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 정말 괜찮겠어요?”“그래. 말동무가 있어야 적적하지 않지. 혼자 있으면 답답해서 못 살 거야.”여이현도 이해는 되었기에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곁에서 지켜보던 장수희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알기로 온경준에게는 자식이 온지유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여이현이 온경준과 정미리를 대하는 태도와 온지유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봤을 때, 그녀는 별로 어렵지 않게 사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장수희는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지유야, 이쪽은 누구니? 네 남편이야?”속으로 답을 내렸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왜 결혼할 때 나한테 알리지 않았니? 알렸으면 내가 용돈이라도 줬을 거 아니야.”그녀는 또 온경준과 정미리를 바라보며 말
“형부.”온채린은 온지유에게 부탁할 바에는 여이현에게 부탁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저 한 달 후에 인턴 자리가 필요하거든요? 형부네 회사에 가서 해도 돼요? 그냥 그런 경력이 있다는 걸 증명하기만 하면 돼서 귀찮게 굴지는 않을 거예요.”장수희도 말을 보탰다.“그래.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다 지유 친척인데, 한 번만 도와줘. 그래야 애가 후에 좋은 일자리를 찾지.”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는 여이현까지 이용하려는 그들의 뻔뻔함이 놀라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여이현을 바라봤다. 첫 만남에 안 좋은 인상을 남겼을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이런 귀찮은 일까지 도울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다.‘나만 귀찮아졌네.’온지유는 똑똑히 알았다. 장수희 일가를 절대 도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한 번이 있으면 두 번이 생기기 마련이다. 짜증 나는 와중에도 그녀는 나긋나긋하게 말했다.“숙모 진짜 그렇게 살고 싶어요? 이현 씨한테 뭐가 있든 다 이현 씨의 것이에요. 숙모를 도울 의무는 없다는 말이죠. 사람 난감하게 굴지 마시고 이만 가세요.”“우리가 너한테 부탁했니? 이현이한테 부탁했지. 아, 알겠다. 너 재벌가에 시집가면서 20억을 받았구나?”장수희는 또 온경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주버님도 그래요. 이렇게 좋은 사위가 있으면 우리한테도 알려줬어야죠. 진작 알았으면 골치 아프게 고민할 일도 없었을 텐데.”온경준은 지금처럼 낯부끄러웠던 적이 없었다. 정말이지 얼굴을 쳐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사람이 말이야, 정도가 있어야지! 우리 사위한테 뭐 하는 짓이야!”“아이고, 가족끼리 뭘 따지고 그래요. 한쪽이 힘들면 돕는 게 당연한데. 아주버님 재벌 사위의 용돈으로도 모자란 돈이잖아요. 별로 큰 일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 이현아, 맞지?”장수희의 질문에 여이현은 말없이 온지유를 바라봤다. 그녀에게 결정권을 넘긴 것이었다.만약 온지유도 도와달라고 하면 그는 두말없이 도울 것이다. 온씨네 일에 인색하게 굴 것은 없었기 때문이
장수희 때문에 잔뜩 화났던 정미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 온지유만 잘 지내면 그녀는 세상에서 부러운 것이 없었다.두 사람의 사이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현이 말도 예쁘게 하는구나. 지유야, 봤지? 너도 이현이한테 잘 해줘야 해.”이 말을 듣고 온지유는 여이현을 힐끗 봤다. 그가 언제 정미리의 마음을 샀는지 궁금한 표정으로 말이다.여이현은 싹싹한 표정으로 정미리에게 말했다.“역시 어머님밖에 없어요.”“그럼.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다 네가 지유한테 얼마나 잘하는지 보아냈을 거야.”정미리는 이렇게 말하며 온경준을 바라봤다. 온경준도 기쁨과 슬픔이 섞인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기쁜 이유는 온지유가 좋은 집안에 시집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슬픈 이유는 이 행복이 얼마 가지 못할까 봐 조바심이 나서였다.잠시 후 간호사가 와서 입원 수속은 끝났고 일주일 후에 퇴원할 수 있다고 알렸다. 여이현과 온지유는 잠깐 더 얘기하다가 떠났다.온경준은 두 사람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기에 몇 번이나 재촉했는지 모른다. 온지유는 밖으로 나가면서 섭섭한 듯 말했다.“아빠는 번마다 이래요. 힘든 일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아요. 만약 제가 먼저 발견하지 않았다면 엄청 억울했을 거예요.”여이현은 온지유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이제 내가 있잖아. 아버님이 힘들어지는 일은 없을 거야.”온지유는 묵묵히 여이현을 바라봤다. 장수희가 하는 말을 그도 전부 들었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들었다. 집안에서 가장 부끄러운 일을 들키게 되었으니 말이다.이러다가는 여이현도 귀찮게 만들 것 같아서 그는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이현 씨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원래도 아빠만 마음먹으면 거절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전에는 마음 약해서 거절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예요.”온경준도 당할 만큼 당했으니 더 이상 만만하게 굴지는 않을 것이다.여이현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주춤거리
양시은은 고통 속에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전에 나도현을 위해 칼을 대신 막아준 상처는 아직 다 낫지 않았고 그 상처 위에 임다혜가 보낸 약까지 보내져 그녀의 몸은 점점 뜨거워졌다. 지금 양시은의 체온은 39도를 넘어서 거의 40도에 가까운 상태였다. 의식은 흐릿하고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져 내린다. 그때 음식을 가지고 온 가사도우미가 양시은이 침대에 누워서 꼼짝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갑자기 입을 벌려 놀랐다. 마치 그녀가 이미 숨을 거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급히 나도현에게 전했다. “도련님, 양시은 씨가 죽은 것 같아요...” “뭐라고?” 나도현은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빛은 찰나에 이른 속도로 깊어진 흑단처럼 좁아지며 가사도우미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봤다.도우미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도우닌 나도현이 이렇게 급해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나도현의 얼굴은 흰 종이처럼 창백하고 그의 눈에서는 한치의 흔들림도 볼 수 없었다. 그의 몸은 긴장으로 굳어있었고 그는 바로 서재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몇 걸음에 방에 도달하고, 그는 문을 급하게 열었다.침대에 누운 양시은을 확인한 그는 잠깐 멈칫했다. 양시은은 살고 있는 듯 숨을 헐떡이며 자고 있었다. 그러나 땀에 젖은 얼굴과 급한 숨소리가 그에게 명확히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주었다.그는 양시은의 붉어진 뺨을 보며 이마를 만지자 그녀의 열기가 손끝을 뜨겁게 만들었다. 나도현은 급히 핸드폰을 꺼내 지석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석훈, 지금 내 별장에 바로 와. 열 나는 사람이 있어.”지석훈은 피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너희 개인 의사야 뭐야. 열 정도로 괜찮은 거면 약 있잖아.”온지유가 아프면 여이현이 그를 찾았고 권다솔이 아프면 배진호가 그를 찾았다. “나도현의 여자가 아프다니... 아니. 잠깐만. 여자?”지석훈의 눈이 반짝였다. “나도현, 거기 아픈 사람이 여자라고? 어디서 생긴 여자야? 설마 그 전 여친이냐?”“그냥 빨리 와. 약도
여자는 일부러 말을 모호하게 꺼냈다. 그녀를 보낸 사람은 임다혜였고 여기에 더해 박은희가 몰래 도와주면서 이 두 사람이 협력하여 별장에 하녀 한 명을 배치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양시은에게는 그 의도가 확실히 잘못 전달됐다. 여기가 바로 나도현의 집이므로 이 여자는 분명히 나도현이 불러낸 사람일 것이다. 이 보약을 마시지 않으면 나도현이 분명히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약은 여기 두세요. 목마를 때 마실게여.”“양시은 씨, 저는 꼭 당신이 이 약을 마시는 걸 봐야만 갈수 있습니다. 지금 마시지 않으면 저는 여기서 기다리면 됩니다.” 여자는 그 말을 하고 나서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놓고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바로 양시은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양시은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마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만약 그녀 앞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이렇게 대담하게 나올 수 없었겠지만 이 상대는 양시은이었다. 그리고 박은희는 반드시 양시은을 집에서 쫓아내라고 말한 바 있었다. 따라서 양시은이 별로 두렵지 않았다. “약을 언제 마시면 난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같이 기다려 보시든지.”양시은은 지금 아이를 찾는 일이 급해서 이 여자와 시간을 보내며 신경 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마셨으니 이제 가세요.” 그러자 양시은은 그 말과 함께 보약을 한 모금 두 모금, 금방 다 마셨고 그릇을 여자의 쪽으로 돌려보냈다. “다 마셨어요. 이제 가셔도 됩니다.”“물론이죠. 양시은 씨, 푹 쉬세요.” 여자는 목적을 달성하고는 그릇을 들고 떠났다. 여자가 별장을 나서며 길가에 서 있던 차로 올라타 이내 임다혜와 만날 예정이었다.양시은은 보약을 다 마신 뒤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리 신경을 쓰진 않았다. 나도현이 아무리 말을 까칠하게 해도 그녀를 정신적으로 괴롭히
“부탁하지 마. 부탁이 효과가 있었다면 나는 이미 나도현 씨에게 그만 두라고 애원했을 거야. 언니, 제발 부탁한다고 해서 그게 진짜 유용할까?” 양채은은 눈가의 눈물을 훔쳤다.“오늘 내가 전화를 한 이유는 한 가지 말할 게 있어서야. 네가 나한테 빚진 것 나는 하나하나씩 네 아들 하민에게서 얻어 올 거야. 부모의 빚은 자식이 갚는 게 맞잖아.”이 무시무시한 말을 하고 양채은은 전화를 바로 끊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마음속이 점점 아려왔다.마스크남이 그 옆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물었다. “채은 씨, 지금 이걸 하는 게 무슨 의미에요? 양시은을 미워하면서도 왜 그 여자의 아들을 돌보고 있어요? 난 가끔은 당신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마스크남은 자기가 양채은이라면 이 기회를 확실히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양채은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하민은 날 이모라 불렀고 어른들의 잘못을 왜 아이를 탓하겠어요.”양채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양시은은 무정할 수 있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어느 정도는 선이 있었다. “당신 말도 일리는 있어요. 안에 있는 아이는 정말로 아무 죄가 없죠. 그나저나 당신 배 속의 아이는요?” 마스크남이 점점 더 압박을 걸면서 말을 이었다. “다른 아이를 생각하려면 먼저 네 애부터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만해요. 이건 내 일이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아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양채은은 등을 돌리며 걸어갔다.마스크남은 유유한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알겠습니다! 이름을 변경하여 번역을 다시 작성하겠습니다. 양시은은 마음속으로 하민에 대한 걱정이 극에 달해 당장이라도 아이를 찾으러 나가고 싶었다.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그 순간 방 문이 열리며 낯선 여자가 트레이를 들고 그녀 앞에 섰다.“양시은 씨, 이건 제가 끓인 보약이에요. 기력 보충에 좋으니 따끈할 때 빨리 드세요.”“저 안 마셔요. 그냥 가져가세요.” 양시은은 보약에 전혀
약혼 연회 당일 나도현의 휴대폰이 양시은 옆에 나타났다. 그것은 하나의 신호였지만 그녀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 후 양채은은 친절히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더 잘 챙겼고 심지어 나도현이 양시은을 싫어할까 봐 걱정했다. 결국은? 챙겨준 끝에 그들은 결국 한 침대에서 자고 있었고 이제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그와 그녀의 아이는? 양채은은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하민을 보았을 때 갑자기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녀의 아이가 양시은 덕분에 행복하지 않다면 그녀는 양시은의 아이에게 복수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갚는 복수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민은 계속해서 이모라고 부렀고 그들 사이에는 감정이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무정할 수 없었다. “난 나도현의 별장에 있어. 그 사람이 나를 안 보내줘.” 양시은은 사실대로 말했다. 그녀는 자기 잘못이라면 반드시 인정한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해서 끝나는 거야? 미안하다는 말이 효과가 있으면 세상에 경찰과 법이 왜 필요해.” 양채은의 감정은 점점 격해졌다. “너희는 계속해서 하민이만 찾았고 나에겐 관심을 둔 사람이 있었어?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해서 이런 결과를 맞아야 하는 거야.” 그녀가 남의 감정을 고의로 끼어들어 이 상황에 빠졌다면 지금 배신을 당한 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나도현은 자유 연애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결국 약혼에 이르게 됐다. 그녀가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 이 두 사람은 함께 힘을 합쳐 그녀를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이렇게 큰 차이를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견뎠는지 자신도 몰랐다. 게다가 요즘은 마스크를 쓴 남자가 그녀 곁에 있으면서 이것저것 말하고 그로 인해 그녀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다. “채은아, 우리 한 번 만나자. 하민이만 병원에 데려다주면 네가 나에게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
나도현은 양시은의 턱을 꽉 움켜잡으며 목소리를 낮게 내뱉었다. 그 당시 양시은이 그의 삶에서 사라졌을 때 나도현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빌려 그녀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가 거의 포기하려던 찰나 뜻밖에도 양시은을 만나게 되었고 이는 어쩌면 하늘이 정해준 인연일지도 모른다. 이 한 평생 그는 양시은과 사랑하고 또 싸워야 하는 운명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당연히 그 상황에 흘러가는 대로 행동해야 했다. “내 곁에서 도망칠 방법을 찾기보다는 차라리 어떻게 내게 사과할지 너의 사과를 어떻게 표현할지 생각해봐. 그러면 너의 날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질지도 몰라.” 양시은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나도현은 원하는 건 그녀의 사과와 태도라는 걸 그녀는 분명히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옆에 있을 자격이 없었다. 지금 그를 달래서 그를 기쁘게 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박은희의 편견은 산처럼 높아서 그녀는 도저히 넘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함께할 수 없었다. 그녀의 침묵은 이미 그녀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나도현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내가 너를 용서할 거라고 기대하지 마. 양시은, 이제 너는 여기서 안전하게 지내. 하민이가 걱정 되면 내 마음에 들게 나한테 잘해. 그럼 하민이를 찾아줄게. 안 그러면 소식을 알아도 너한테는 절대 말 안 해.” 양채은이 지금 통화를 거부하고 있어 양시은은 도대체 하민이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녀는 여기 갇혀 있고 아는 사람도 없었고 사설탐정을 고용해 조사할 돈도 없다. 그런데 나도현은 그 능력이 있었다. 지금 그는 아이를 이용해 그녀를 협박하며 그녀가 굴복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도현, 나한테 아무렇게나 대해도 아이는 건드리지 말아줘.” 양시은의 마음은 정말로 아팠다. 그녀의 마음이 아플수록 나도현은 그 점을 더욱 이용해서 계속해서 자극했다. “아이는 건드리지 말라고? 너는 전혀 신경
아쉽게도 나도현은 이런 걸 이해하지 못했다. 임다혜는 전혀 두렵지 않았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 사람한테 아무 짓도 안 했잖아요. 그냥 평소에 말 좀 섞고 싶은 건데. 설마 이걸로 저를 쫓아 내겠어요? 저는 안 믿어요.” 박은희는 입술을 열어 말하려 했지만 임다혜가 자신감 있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나도현이 그녀를 거절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뒤에서 조용히 손까지 써본다면...’ 박은희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임다혜는 그 생각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어머니, 말씀하신 방법 너무 좋아요. 도현 씨가 더 이상 이상한 짓 안 하게 우리 빨리 실행해요.” “좋아.” 박은희의 계획은 좋았지만 그들은 계획을 삼일 뒤로 미루기로 했다. 한편 나도현은 법률 사무소에 가진 않았지만 사무소의 사건들을 계속 관리했고 양채은과도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다. 전화를 통했지만 영채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양시은은 그와 대화할 때마다 불편해졌지만 양시은은 밥은 잘 먹었다. 그녀에게 있어 사람은 밥심이고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나도현이 정신 없이 있을 때 그녀는 탈출할 수 있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도현은 그걸 참지 못했다. 그는 양시은 앞에 나타나 비꼬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걱정하는 네 아들 결국 네가 이런 식으로 걱정하는 거냐? 양시은, 네 입에는 한 마디 진심이라도 있어?” 양시은은 나도현이 이렇게 작은 일로도 이렇게 화를 낼 줄 몰랐다. 그러나 나도현은 그녀를 싫어하니까 당연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거였다. 그의 눈에 양시은의 단점은 끝없이 확대되어 보였다. 양시은은 더 이상 나도현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나도현, 만약 내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굶어 죽으면 하민이는 돌아와도 못 보잖아.” “그건 네 변명이야. 지금 네 얼굴에는 아무런 슬픔도 없어.”나도현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양시은은 잠시 말이 막혔다. 그런데
양시은이 말을 뱉을 때 나도현은 그녀를 죽여버리고 싶은 만큼 화가 났다. “네가 날 교육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인간성? 그는 인간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수많은 사건을 처리했고 그 가운데 양시은도 포함되어 있다. 처음 양시은과 함께할 땐 결혼까지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결국 양시은은 그에게 깊은 배신을 했다. 나도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뭐라고 하는가?’ 그가 복수를 결심하고 양시은을 죽이려고 해도 마음이 약해져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양시은, 여기서 깊이 반성해.” 만약 양시은이 그에게 울면서 용서를 구하면 그는 분명 마음이 약해질 것이다. 그러나 양시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 애만 신경 썼다. 그는 그 아이가 얼마나 더 버티며 살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고 생각했다. 박은희는 나도현을 설득할 수 없었고 임다혜에게도 어떻게 말할지 몰랐다. 임다혜는 박은희가 직접 고른 며느릿감이었다. 하지만 나도현은 그녀의 얼굴조차 보기 싫어했고 아예 연락도 하지 않았다. 임다혜는 나도현에게 진심이었고 종종 박은희에게 안부를 묻고 늘 영양제와 화장품을 선물하며 찾아왔다. 지금은 그녀를 볼 면목이 별로 없었다. 임다혜가 다시 물어왔다. “도현 씨는 요즘 많이 바쁜가요? 로펌에도 없고...” 임다혜는 나도현이 양시은에게 갔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양시은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사람이고 그의 마음속에 깊은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었다. 나도현은 그녀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임다혜는 포기하기 싫었다. 부모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결혼은 행복하지 않다고 믿고 있었다. 게다가 박은희는 그녀 편이었다. 그녀는 박은희를 통해 나도현의 마음을 얻은 후 나 부인이 되려 했다. 박은희는 이것도 방법이 아닌지라 그녀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다혜야, 넌 정말 좋은 아이야. 하지만 이건 말해 줘야 할 거 같아. 난 네가 정말 좋은데 도현이는... 양시은이라는
하지만 나도현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박은희도 하민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천지개벽하고 피와 살이 뒤섞이는 상황에까지 끌고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녀가 숨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도현이 화가 가라앉으면 자연스럽게 그녀를 놓아줄 것이라 믿었다. “그 아이가 누구의 애인지 물어봐서 뭐 해? 나도현, 우리는 말할 건 다 했잖아. 더 이상 서로 힘들게 하지 말자.” “네 엄마가 그렇게 많은 돈을 주는데 내가 바보냐? 그걸 왜 거절해야 해? 예전에 20억에 너를 포기했던 것처럼 지난 4년 동안 우리는 이미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어. 넌 내가 울며 매달려서 싫다고 말할 걸 기대했어?” 양시은은 담담하게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무섭기도 했지만 점점 그녀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죽으라고 할 리는 없으니까. 죽지 않으면 언젠가는 나도현에 의해 풀려날 날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나도현의 마음속엔 그저 그때 분노로 가득 찼을 뿐이다. “그게 가능할 리가 있냐?” 나도현은 비꼬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양시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잖아. 그러니 내가 책임질 순 없어. 지금 나를 여기에 가두고 있을 바엔 차라리 양채은을 찾아가. 양채은은 진짜로 널 사랑해. 뱃속의 아이도...”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 그 여자가 날 사랑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난 널 사랑하지만 너는 나한테 어떻게 했지?” 양시은이 말을 계속하려는 순간 나도현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더욱 어두워진 채 양시은의 몸에 머물렀다.나도현의 깊은 사랑을 양시은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현이 예전에 사랑했던 만큼 지금은 증오도 그만큼 깊어졌다. 나도현은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말했다. “너 같은 사람한테 사랑을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지금까지 아이 아빠는 보지도 못한 걸 보니 네가 죽인 거 아니냐?” 양시은의 마음이 처참하게 찔렸다. 아이의 아버지는 바로 눈앞에
바로 핸드폰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도현은 그 번호를 비서에게 보내며 지시했다. “철저히 조사해.”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갑작스러운 결심이 떠올랐다. ‘더 이상 양시은이 밖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놔둘 순 없어.’ 그리고 나흘 뒤 박은희가 찾아왔다. “네가 가업을 물려받는 걸 싫다고 한 건 이해한다. 근데 지금 또 나랑 대항해서 그 아이를 다시 데리고 오겠다는 거야?” 나도현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은희는 더욱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나도현, 양시은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그 여자에게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거야? 내가 너한테 소개해 준 약혼녀는 네가 고른 여자보다 어디가 못 해?” 임씨 가문도 경성의 명문가다. 나씨 가문과 임씨 가문은 비록 여씨 가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경성에서 두 번째로 손꼽히는 대가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나민우 집안과 친척 관계다. ‘나민우 역시 처음에는 결혼은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부모의 뜻을 따랐고 가문의 이익을 위해 결혼하게 되지 않았나?’이런 생각이 들자 박은희는 더욱 불쾌한 마음에 불만을 터뜨렸다. “나도현, 네가 내 말을 듣기 싫으면 나민우를 좀 본받으면 안 되겠니? 나민우가 어떻게 했는지 알잖아. 넌 도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내가 진짜로 나민우를 내 아들로 삼아야 속이 시원하겠어?” 부모들이 자녀를 나무랄 때 자녀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남이 그렇게 좋으면 그 쪽한테 가서 아들이나 돼달라고 하세요.’와 같은 뉘앙스였다. 하지만 박은희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나도현에게 상황을 잘 파악하고 나인우를 따라 배우라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가문의 발전과 명성을 위해 양시은과는 반드시 거리를 두어여 한다. “왜 그렇게 남들과 비교하기를 좋아해요? 나민우는 나민우의 선택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양시은에 대한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요.” 나도현은 등을 돌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