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지는 그를 더는 ‘대표님'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이름을 불렀다.그녀는 여이현의 길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여이현은 차가워진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시죠, 서은지 씨?”서은지는 그를 보았다. 뼛속까지 거만했던 그녀는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방금 한 말 진짜예요? 정말로 이미 결혼했어요?”그녀는 여이현이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그래서 그가 일부러 그녀를 피하려고 거짓말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여이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굳이 거짓말을 해서 뭐해요?”“여이현 씨가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요. 게다가 여이현 씨 아내가 누군지도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핑계 대는 줄 알았죠.”“서은지 씨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그가 차갑게 굴수록 서은지는 더 흥미가 생겼다. 꼭 사냥감을 찾은 것처럼 반드시 그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그녀는 가지지 못하는 것에 더 흥미를 느꼈다.서은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에게 다가가며 대범한 행동을 했다.“결혼했다고 해서 뭐요. 어차피 나중에 이혼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전 여이현 씨가 결혼해도 상관없어요.”그녀의 말을 들은 온지유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여이현은 막무가내인 사람과 질척거리는 사람을 아주 싫어했다.그런데 서은지가 그런 사람이었다.여이현은 서승만을 봐서라도 서은지의 당돌한 행동을 참아주고 있었다.그러나 서은지가 가까이 다가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쓰다듬자 그는 결국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혐오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그는 잔뜩 어두워진 안색으로 그녀의 손을 쳐내려고 했지만 온지유가 한발 빠르게 서은지의 손을 잡아챘다.“서은지 씨!”온지유가 나설 줄은 몰랐는지 여이현은 다소 의외라는 눈빛으로 온지유를 보았다.서은지도 온지유를 보았다.“그쪽은 여이현 씨 비서가 아니던가요?”온지유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여기는 병원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인데 대표님께 그런 행동을 하시면 된다고 생각하세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그녀는 여이현이 그녀에게 생리통 있다는 것까지 알 정도로 세심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온지유는 정말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예전에 그와 평생을 함께 살아도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또 몸 상태는 어떤지 모를 거로 생각했다.그녀가 언젠가 죽게 되어도 여이현이 제일 마지막으로 알게 되리라 생각했다.지금으로선 시간이 지나면 기억하기 싫어도 기억이 날 것이다.온지유는 생강차를 단번에 마셔버렸다.“푹 쉬어.”여이현은 세심하게 그녀에게 이불까지 덮어주었다.온지유는 그런 그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이따가 어디 가는 거예요?”“어디 안 가. 집에 있을 거야.”여이현이 답했다.온지유는 그가 며칠 동안 외박을 하여 오늘도 외박하는 줄 알았다.밖에는 예쁜 여자가 아주 많았으니 그가 머물 곳은 분명 있을 것이었다.여이현은 조금 실망한 듯한 그녀의 표정을 눈치채곤 그녀의 옆으로 눕더니 이불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많이 아파?”온지유는 순간 경직되었다. 고개를 삐그덕 돌리며 여이현을 보았다.“왜 갑자기 누운 거예요?”“조금 같이 누워있어 주려고.”여이현은 그녀의 아랫배에 올린 손을 움직이며 통증을 덜어주고 싶은 듯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이러면 좀 나아?”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그녀는 계속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조금 나아졌어요.”“자꾸 밤새우지 마.”여이현은 나직하게 말했다.“밤을 자주 새우면 몸에 무리가 가거든. 항상 몸조리 잘해야 생리할 때도 많이 아프지 않을 거야.”그의 다정하고도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그에게도 이토록 다정하고 세심한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다.온지유가 말했다.“사실 오늘 저를 데리고 어르신 뵈러 간 것도 저한테는 의외였어요. 게다가 어르신께 저를 아내라고 소개했잖아요.”여이현은 뜸을 들이며 물었다.“혹시 싫었어?”온지유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네가 싫지 않았다면 됐어.”여이현은 행여나 그녀가 싫어
정미리는 아직도 온경준의 병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헛소리를 들었으니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동서, 아무리 그래도 신경 쓴 적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 우리 그이가 언제 도련님 일을 안 도운 적 있어? 도련님이 친 사고는 우리가 다 해결해 줬어. 그렇다고 해서 무슨 일만 있으면 찾아오는 건 너무했지.”“저희도 어쩔 수 없어서 이러는 거 아니겠어요.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형님을 찾아오지 않고 이미 해결했을 거예요.”이렇게 말하며 장수희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엄마, 울지 마요.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장수희의 딸이 위로했다. 정작 울고 싶은 사람은 정미리인데도 말이다.그동안 온경준 일가는 얼마나 많이 시달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입도 뻥끗 안 하다가, 나쁜 일이 있을 때만 찾아오는 친척을 누가 달가워하겠는가?정미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정작 하지는 않았다. 온경준이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친동생인 온재준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온재준 일가는 거머리와 같았다. 한 번 도움을 받고 나면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번 20억 원을 빚지게 된 일도 그랬다. 무조건 버는 장사라고 투자하던 온재준은 정작 온경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이번 일로 그들은 집안이 망할 뻔했다. 크게 다툰 정미리와 온경준은 이혼 얘기까지 꺼냈다. 그래도 다행히 온지유가 해결해 준 덕분에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그러다가 장수희가 또다시 찾아온 것이다. 화가 치밀어 오른 온경준은 크게 넘어졌다가 손목이 골절했다. 그런데도 장수희는 뻔뻔하게 도움을 요구했다. 병실에 누워 있는 온경준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습이었다.“도련님은 어디 있어요? 당사자는 어딜 가고 동서랑 딸을 보낸 거예요?”“재준 씨는 숨어 있어요. 요즘 같은 날 밖에서 돌아다니면 맞아 죽을 거예요.”장수희는 붉어진 눈시울로 말을 이었다.“재준 씨가 지난 일로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몰라요. 형이 자기를 위해 쓴 돈을 돌려주겠다고 그렇게 열심히
“동서, 말조심해. 내 남편 몰골을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와? 도대체 우리를 어디까지 끌어내릴 셈이야.”정미리는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좋아요. 그럼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지난번의 20억은 어떻게 해결했어요? 지난번에도 그렇게 돈 없다고 잡아뗐잖아요. 우리 그이는 돈 마련한다고 장기 매매까지 할 뻔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돈은 갚았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죠.”장수희는 줄곧 그들이 어떻게 돈을 갚을 수 있었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어찌 됐든 집에 돈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아주버님, 그 돈은 어디에서 왔어요? 아버님이랑 어머님의 돈을 우리한테 말하지도 않고 빼돌린 거죠!”장수희는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이건 시부모가 돌아가고부터 줄곧 의심하던 것이었다. 지금도 물론 그들을 도와주고도 남을 돈이 있다고 믿었다.이 말을 듣고 온경준은 격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수희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야, 양심 없는 것!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예요?”온경준은 제대로 정신 차렸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마음이 생기면 이상한 것이었다.이러다가 온경준이 숨이라도 넘어갈 것 같았기에 장수희는 재빨리 타일렀다.“진정해요. 손에 깁스도 했잖아요.”온경준의 반응을 보고 장수희는 뒤늦게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약간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저도 그냥 묻는 것뿐이에요. 의심한 거 절대 아니니까 화내지 마세요.”온경준은 가슴이 아팠다. 그는 이런 사람을 위해 딸을 팔았다. 이건 아마 죽을 때까지 후회할 일일 것이다.‘내가 지유한테 빚진 게 많아...’밖에서 듣고 있던 온지유는 대충 상황 파악이 되었다. 장수희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 것 같았다.그녀는 장수희를 좋아한 적 없었다. 무엇이든 꼬치꼬치 캐묻고, 아량이 작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이렇게 의심이 많고 질투가 심한 사람이 부탁하려고 자존심을 내려놓을 줄은 또 아네.’정미리는 온경준과 온재준이 우애 깊은 형제라는 것을 말한 적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너 어느 대학 출신이지?”“수도권은 돼요.”“미안한데 우리 회사는 명문대만 취급해. 수도권이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야.”온지유는 딱 잘라서 거절했다. 온채린은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그대로 일단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근데 난 언니가 있잖아요. 언니가 도와주는데 학벌이 무슨 소용이에요.”“규칙은 규칙이야. 낙하산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뒤떨어지게 되어 있어. 회사에서 괜히 명문대 출신을 요구할 것 같아?”온지유의 단호한 태도에 기분 나빠진 온채린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됐어요. 언니가 도와주기 싫어서 이렇게 말하는 거 모를 것 같아요?”“알면 됐어. 뭐든 도움받아서 할 생각하지 마.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거지보다 못한 인생이 될 테니까.”“도와주기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사람 저주하는 건 무슨 경우예요? 엄마, 언니 좀 봐요!”모욕을 견딜 수 없었던 온채린은 눈시울이 빨개졌다. 그 모습이 속상했던 장수희는 당연히 온채린의 편에 섰다.“지유야, 넌 동생한테 그게 무슨 발 버릇이니? 동생 좀 챙겨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남들 다 돕고 사는 세월에... 그래, 네 아버지랑 작은아버지도 그렇게 지내왔잖니. 한 가족은 원래 돕고 사는 거야. 혼자 잘나간다고 으스대지 마.”온지유는 눈빛 하나 안 변하면서 대답했다.“제가 언제 으스댔나요? 저는 감사할 줄도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기 싫을 뿐이에요. 인사는커녕 제 아버지를 이렇게 만들어버렸잖아요.”“너...”장수희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또다시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지유야, 너 지금 날 무시하는 거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건 날 죽이는 것과 마찬...”그녀의 아우성을 듣기 싫었던 온경준은 바로 말을 끊었다.“됐고, 제수씨 집안일은 알아서 해결해요.”“안 돼요, 아주버님! 우리 그이 죽는 꼴 진짜 보고 싶어서 그래요?”이번만큼은 온경준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린 것을 보고 장수희는 더욱 언성을 높였다.“냉정한 인간들! 가족이 죽게 생겼는데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여이현이었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면서도 그는 온경준의 침대 곁으로 걸어갔다.차가운 남자의 목소리에 모녀는 울음을 멈추고 머리를 돌렸다. 온지유는 그가 올 줄 모르는 듯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요?”“병원장이 전화 왔어. 네 아버지가 입원했다고. 그래서 찾아왔지.”“아버님, 어머님, 안녕하세요.”깍듯하게 인사부터 한 그는 깁스한 온경준의 손을 바라보며 물었다.“이제 좀 괜찮으세요?”“손목 골절이라 며칠 쉬어야 한대요.”온지유가 대신 대답했다.여이현은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여긴 너무 시끄럽네요. 휴식하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으니까 VIP 병실로 가시죠.”“아니다, 이현아. 우리가 그럴 형편도 아니고, 여기에서 지내도 괜찮다.”온경준은 약간 못마땅한 눈빛으로 여이현을 바라봤다. 그대로 일단은 관심받는 처지이기에 말은 듣기 좋게 했다.“걱정할 것 없어. 약간 실금이 갔을 뿐이야. 지유야, 이현이 데리고 이만 나가 봐. 병실에는 네 엄마만 있으면 된다.”“괜찮아요. 시간 계산 다 하고 왔으니까요.”여이현은 아직도 VIP 병실로 옮기고 싶었지만, 온경준의 뜻을 존중해야 했기에 질문부터 했다.“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 정말 괜찮겠어요?”“그래. 말동무가 있어야 적적하지 않지. 혼자 있으면 답답해서 못 살 거야.”여이현도 이해는 되었기에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곁에서 지켜보던 장수희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알기로 온경준에게는 자식이 온지유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여이현이 온경준과 정미리를 대하는 태도와 온지유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봤을 때, 그녀는 별로 어렵지 않게 사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장수희는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지유야, 이쪽은 누구니? 네 남편이야?”속으로 답을 내렸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왜 결혼할 때 나한테 알리지 않았니? 알렸으면 내가 용돈이라도 줬을 거 아니야.”그녀는 또 온경준과 정미리를 바라보며 말
“형부.”온채린은 온지유에게 부탁할 바에는 여이현에게 부탁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저 한 달 후에 인턴 자리가 필요하거든요? 형부네 회사에 가서 해도 돼요? 그냥 그런 경력이 있다는 걸 증명하기만 하면 돼서 귀찮게 굴지는 않을 거예요.”장수희도 말을 보탰다.“그래.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다 지유 친척인데, 한 번만 도와줘. 그래야 애가 후에 좋은 일자리를 찾지.”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는 여이현까지 이용하려는 그들의 뻔뻔함이 놀라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여이현을 바라봤다. 첫 만남에 안 좋은 인상을 남겼을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이런 귀찮은 일까지 도울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다.‘나만 귀찮아졌네.’온지유는 똑똑히 알았다. 장수희 일가를 절대 도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한 번이 있으면 두 번이 생기기 마련이다. 짜증 나는 와중에도 그녀는 나긋나긋하게 말했다.“숙모 진짜 그렇게 살고 싶어요? 이현 씨한테 뭐가 있든 다 이현 씨의 것이에요. 숙모를 도울 의무는 없다는 말이죠. 사람 난감하게 굴지 마시고 이만 가세요.”“우리가 너한테 부탁했니? 이현이한테 부탁했지. 아, 알겠다. 너 재벌가에 시집가면서 20억을 받았구나?”장수희는 또 온경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주버님도 그래요. 이렇게 좋은 사위가 있으면 우리한테도 알려줬어야죠. 진작 알았으면 골치 아프게 고민할 일도 없었을 텐데.”온경준은 지금처럼 낯부끄러웠던 적이 없었다. 정말이지 얼굴을 쳐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사람이 말이야, 정도가 있어야지! 우리 사위한테 뭐 하는 짓이야!”“아이고, 가족끼리 뭘 따지고 그래요. 한쪽이 힘들면 돕는 게 당연한데. 아주버님 재벌 사위의 용돈으로도 모자란 돈이잖아요. 별로 큰 일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 이현아, 맞지?”장수희의 질문에 여이현은 말없이 온지유를 바라봤다. 그녀에게 결정권을 넘긴 것이었다.만약 온지유도 도와달라고 하면 그는 두말없이 도울 것이다. 온씨네 일에 인색하게 굴 것은 없었기 때문이
장수희 때문에 잔뜩 화났던 정미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 온지유만 잘 지내면 그녀는 세상에서 부러운 것이 없었다.두 사람의 사이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현이 말도 예쁘게 하는구나. 지유야, 봤지? 너도 이현이한테 잘 해줘야 해.”이 말을 듣고 온지유는 여이현을 힐끗 봤다. 그가 언제 정미리의 마음을 샀는지 궁금한 표정으로 말이다.여이현은 싹싹한 표정으로 정미리에게 말했다.“역시 어머님밖에 없어요.”“그럼.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다 네가 지유한테 얼마나 잘하는지 보아냈을 거야.”정미리는 이렇게 말하며 온경준을 바라봤다. 온경준도 기쁨과 슬픔이 섞인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기쁜 이유는 온지유가 좋은 집안에 시집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슬픈 이유는 이 행복이 얼마 가지 못할까 봐 조바심이 나서였다.잠시 후 간호사가 와서 입원 수속은 끝났고 일주일 후에 퇴원할 수 있다고 알렸다. 여이현과 온지유는 잠깐 더 얘기하다가 떠났다.온경준은 두 사람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기에 몇 번이나 재촉했는지 모른다. 온지유는 밖으로 나가면서 섭섭한 듯 말했다.“아빠는 번마다 이래요. 힘든 일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아요. 만약 제가 먼저 발견하지 않았다면 엄청 억울했을 거예요.”여이현은 온지유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이제 내가 있잖아. 아버님이 힘들어지는 일은 없을 거야.”온지유는 묵묵히 여이현을 바라봤다. 장수희가 하는 말을 그도 전부 들었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들었다. 집안에서 가장 부끄러운 일을 들키게 되었으니 말이다.이러다가는 여이현도 귀찮게 만들 것 같아서 그는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이현 씨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원래도 아빠만 마음먹으면 거절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전에는 마음 약해서 거절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예요.”온경준도 당할 만큼 당했으니 더 이상 만만하게 굴지는 않을 것이다.여이현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주춤거리
신무열은 Y국에서 높은 신분을 지니고 있지만 나라의 미래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격을 낮추고 직접 약초를 가르치고 재배법을 가르치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그 시간 동안, 신무열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었고, 아린에게도 작은 선물을 챙겨주었다. 신무열은 어떤 사람인가?그는 한 번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지금 이런 행동을 한다면 오히려 신무열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망칠 뿐이었다.신무열은 그녀를 계속 싫어할 것이고 아린은 혼자서 그를 바라만 보는 삶을 살게될것이다.그럼에도 아린은 지금은 그들에게 협조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아린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무열 씨를 좋아하는 여자는 많은데 왜 저를 선택한 거죠? 저는 작은 인물이고, 아무런 배경도 없는데요.”“바로 네가 작은 인물이기 때문이지. 그래야 의심받지 않아. 정말 신무열을 영원히 네 곁에 두고 싶지 않나? 신무열은 뛰어난 사람이고 너와 그의 아이라면 최고의 유전자를 가질 텐데.”아린이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계속 그녀를 부추겼다.남자의 말들은 아린의 머릿속에서 수없이 되뇌어졌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신무열과 함께하는 것보다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계획이 뭐죠? 말해줘요. 계획대로 따를게요.”그녀는 자신이 왜 선택되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작은 인물이기 때문에 조종하기 쉽고 조금의 이익으로도 매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계획은 내가 알려줄 거야. 하지만 그 전에, 너의 충성심을 위해...”‘푹!’남자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아린은 피부에서 느껴오는 찌릿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다.아린은 자신에게 독이 주입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남자는 아린에게 위협하듯 말했다.“내 말을 어기기만 해봐. 이 독은 널 죽기보다도 못한 고통을 줄 테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린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머리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지
아린이 아직 입을 떼기도 전에 신무열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지금 나는 이미 헤연에게 약속 했어. 남자로서 한 말은 반드시 지켜야지. 게다가 난 혜연에게 특별히 불만도 없어.”아린은 숨이 막혔다.책임감 때문에 여자를 곁에 두지 않았던 신무열. 그리고 김혜연에게는 불만이 없다는 말에 더해 김혜연이 늘 신무열 곁에 있으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다는 점에 속이 검게 타들어 갔다.“가까이 있는 자가 먼저 기회를 얻는다”는 말과 “오랜 시간이 지나야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참으로 딱 들어맞았다.아린의 마음은 아팠다. 그녀는 평민일 뿐이었고 김혜연과는 신분 자체가 달랐다.신무열이 원하는 건 그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우수한 여성이자 내조자였지 빈민가 출신의 이름 없는 소녀는 아니었다.아린은 여러 해 동안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들 사이의 신분 격차는 변할 리 없었다.“선생님, 당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축복할게요. 당신이 늘 행복하길 바라요.”이것이 아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고마워.”신무열도 그녀의 말에 감사를 표했다.아린은 돌아섰다.자신의 위치와 지위를 바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지만 목표가 사라진 지금은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신무열의 거처를 벗어난 아린은 얼마 가지 않아 무리에게 가로막혔다.그녀보다 키도 크고 체격이 다부진 남자들이 점점 다가왔다.아린은 본능적으로 총을 꺼내려 했지만 상대가 더 빨랐다.총구가 그녀의 머리에 겨눠지며 차갑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렸다.“죽기 싫다면 조용히 우리 말을 듣고 따라와라!”전쟁 중 매일 총탄에 대한 공포 속에 살았던 그녀였다. 몸은 총구를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여긴 신무열의 구역이었다. 그녀 같은 작은 존재가 신무열에게 폐를 끼칠 순 없었다.아린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들의 요구에 순응했다.얼마나 걸었는지 모른 채 끌려간 곳은 작은 방이었다. 그들은 무기를 꺼내 그녀를 겨눴다.“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하세요. 괜히 쇼하지 말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혜연은 신무열을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 왔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렵게 얻은 결과를 지키려고 해야 하는 게 아닐까?하지만 김혜연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태도였다.여인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만약 내가 무열 씨의 마음을 얻어도 정말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김혜연은 미소를 잃지 않으며 대답했다.“왜 그런 걱정을 하는 거죠? 만약 당신이 신무열의 마음을 얻는다면 그건 당신의 능력이에요. 오히려 축복해야겠죠.”김혜연이 신무열을 붙잡으려 애썼던 큰 이유 중 하나는 신무열의 곁에 다른 여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신무열의 곁에 다른 여자가 생긴다면 지금처럼 그녀도 그 관계를 축복했을 것이다.여자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그런 말로 날 속이려는 거죠? 사실은 내가 당신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당신도 곧 제 실력을 알게 될 거니까요!”김혜연은 이해했다.“선전포고라는 뜻이군요.”김혜연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그 여자는 곧장 신무열을 찾아갔다.신무열은 그녀를 보고 곧바로 시선을 돌리며 차갑게 말했다.“날 찾아온 이유가 뭐죠?”“선생님, 저를 잊으셨나요? 저 아린이에요. 5년 전...”아린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급한 마음을 드러냈다.그 말을 들은 신무열이 그녀를 기억해 냈다. 아린은 5년 전 북부에서 온지유와 갈등을 빚었던 소녀였다. 그리고 그녀의 동생 케빈도 떠올랐다.“아린? 무슨 일로 온 거야?”신무열은 그녀를 기억해 냈지만 여전히 말투에서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의 태도에서는 큰 반가움이 보이지 않았다.아린은 신무열이 Y국을 책임지고 있으며 많은 일을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그녀는 신무열과 김혜연의 결혼 소식을 듣고 발길을 멈출 수 없었다. 이 결혼식은 Y국 전체가 주목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아린은 그가 김혜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만약 신무열이 김혜연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김혜연이
김혜연은 믿기 어렵다는 듯 물었다.“제가 했어도 탓하지 않는다고요?”자신의 노력이 드디어 그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은 걸까? 자신이 그의 삶에 뿌리내리고 꽃을 피우는 것을 허락한 걸까?“그래.”신무열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김혜연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왜죠? 그건 저랑 결혼할 생각이 있다는 말인가요?”신무열은 김혜연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그동안 네가 나의 곁에서 어떻게 해왔는지 난 다 보고 있었어. 넌 정말 훌륭한 내조자였어. 지금 모든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알고 있는데 너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너에게 너무 불공평하잖아.”특히 김혜연이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지려고 했던 것을 떠올리면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김혜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무열 씨가 저랑 결혼한다는 건 상상도 못 했어요. 결혼하기 싫으시다면 저 때문에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이 모든 건 제가 원해서 한 일이에요.”김혜연의 목소리는 점점 더 메말라 갔다.설령 마지막에 자신이 상처받고 죽더라도 그것 역시 그녀가 원한 결과였다.신무열은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그런 말 하지 마. 네가 나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그리고 네가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돼 있다는 것도 알아. 나는 네가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신무열은 그녀를 꼭 안아주며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넌 우리 결혼식이 어땠으면 좋겠어?”“저는... 잊지 못할 결혼식을 원해요.”결혼식을 떠올리는 김혜연의 얼굴엔 기대감이 가득했다.사실 결혼식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신무열이 그녀 곁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드디어 결혼에 대해 마음을 열었다는 점이었다.“좋아.”신무열은 김혜연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는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결혼식 준비는 요한에게 맡겼고 김혜연이 직접 준비를 도울 수 있도록 했다.김혜연은 모든 준비에 만족하며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러 간 날, 한 여인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비난하다니?“아버지가 틀리지 않았다고요?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한 번도 우리 두 형제에게 있지 않았잖아요.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주고 믿어주셨다면, 지금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겁니다!”“아버지는 언제나 고집대로예요. 여이현이 대통령 자리에 뜻이 없다고 해서, 우리를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친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을 찾아내서 아버지 말을 따르는 꼭두각시로 세뇌하려 하신 거 아니에요?”두 아들이 한마디씩 비난을 쏟아내자, 브람은 얼굴을 굳히며 각각 한 발씩 걷어차 둘을 바닥에 내리 눕혔다.“너희 머릿속에는 두부라도 들어 있냐? 내가 너희 편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너희가 저지른 짓거리만으로 진작에 끝장났을 거야, 그것도 모르겠냐?”브람은 말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브람의 자식 교육은 아무도 간섭할 수 없었다.온지유는 여이현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온지유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내란은 이제 다 정리됐고 당신 일도 다 마무리됐네.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여인들 사이의 갈등도 복잡하지만 남자들 사이의 싸움은 종종 더욱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법이다.여이현은 온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 일이 없었더라도 이틀 후엔 돌아갈 생각이었어. 괜찮아?”온지유가 불편하다고 하면 그는 더 빨리 떠날 계획이었다.“괜찮아.”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브람은 여이현이 있는 동안의 두 아들의 암살 시도를 공개하고 대통령을 선거를 통해 뽑겠다고 발표했다.많은 사람들이 선거에 참여했으나 결국 브람이 재선에 성공했다. 브람은 화국의 방식을 따라 5년 임기를 추가했다.그의 두 아들은 개조 프로그램에 보내져 일반인의 신분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여이현은 S국이 평온을 되찾은 모습을 바라보며 온지유와 함께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신무열과 김혜연은 Y국으로 함께 돌아갔다.Y국도 현재 평화를 되찾았고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김씨 가문의 옛
지금 온지유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였다.바로 가족들의 인정과 축복이었다.브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라. 이제 더는 너와 이현이에게 방해가 되지 않겠어.”그는 여이현이 자신의 자리를 이어받아 S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되길 바랐다.하지만 여이현은 그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는 평범한 삶을 원했다. 여이현의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그동안의 부재가 가슴에 남아 있는 브람은 아이가 고통 속에서 살아가길 원치 않았다.“감사합니다.”온지유의 뜻밖의 감사 인사에 브람은 묘한 감정이 일었다.온지유와 여이현은 부부였고 이미 5년 전부터 함께해온 사이였다. 그녀는 긴 시간여이현의 곁에 머물렀다.서로에게 운명이라 믿어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온지유는 여전히 둘을 갈라놓으려 했던 브람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특히 자신과 여이현 사이의 거리감에 더욱 가슴 아팠다.순간, 브람은 깊은 후회를 느꼈다.여이현과 온지유는 한동안 S국에 머물렀고 그 사이 여이현은 브람의 일을 돕고 있었다.그간 뜻밖에도 형과 이복형이 여이현을 암살하려 했다.다행히도 여이현은 이미 준비를 해 두었고 신무열이 미리 사람을 배치해 둔 덕분에 형제들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형제들은 붙잡힌 후에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여이현을 보자마자 끌어내려 함께 죽으려 했다.그들은 여이현을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여이현은 그들의 눈빛에서 비교당하는 삶의 불행함을 느꼈다.여이현은 형제들에게 말했다.“아버지가 구해주셨을 때 저는 중상을 입어 모든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자리를 물려주려 하셨지만 전 처음부터 대통령 자리에 관심이 없었어요. 제가 원하는 건 소소한 가정일 뿐입니다.”“이곳에 온 건 단지 아버지를 돕기 위해서일 뿐이에요. 믿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지만 떠나면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여이현은 형제를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브람은 그들을 심하게 혼냈다. 그
“그래.”브람이 대답한 후 여이현은 바로 돌아섰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브람은 이번이 여이현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여이현이 받지 않으려 해도 억지로 카드를 손에 쥐여주었다.“모두 화국 돈으로 바꿔뒀다. 너에게 주는 게 아니고 내 손자에게 주는 거다. 내가 그 아이를 너무 엄하게 대했다.”그래서인지 별이는 이렇게 오랜 시간 떠나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별이에게도 필요 없다느니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모두 별이를 위해 모아둔 거니까!”브람이 엄숙하게 말했다.그러고는 문득 온지유를 떠올렸다.“지유와 잠시 단둘이 얘기할 수 있을까? 걱정 마. 상황이 이렇고 사람도 많은데 내가 해코지 할리 있겠느냐.”여이현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온지유를 브람 앞에 불러 세웠다.온지유는 예의를 지키며 말했다.“아버님.”브람은 여이현의 친아버지이자 별이의 친할아버지였다. 온지유는 브람을 아버님이라 부를 수밖에 없었다.브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온지유를 바라보았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널 죽이려 했던 나를 그리 불러주는 게냐?”브람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온지유는 브람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누구에게나 사랑받기를 요구할 수는 없죠. 아버님이 저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아버님과 이현 씨의 혈연은 끊을 수 없는걸요.”그녀는 여이현의 아내로서 당연히 브람을 아버님이라 불러야 했다.브람은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지유야, 솔직히 내가 이현이를 처음 찾았을 때 너희가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고 이현이는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여자라면 어떤 약속이나 의식도 없이 지나칠 수는 없으니까.”“그때 나는 이현이가 너와 이혼하고 S국에 와서 새로운 결혼을 하길 바랐어. 하지만 이현이는 원하지 않았어. 나중에 그 애가 너에게 한 모든 것을 보며 너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지. 지유야, 난 이현이에게 참 못된 짓을 했다. 이제 너희가 행복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여이현은 말이 없었다.침묵은 곧 긍정이다. 온지유는 화가 나서 바로 여이현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세게 내리쳤다.“다시 한번 그딴 생각 하기만 해봐, 내가 직접 죽여버릴 테니까!”온지유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5년이다. 그 긴 시간을 고통 속에서 아이를 생각하며 버텨왔다.여이현은 살아 있으면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처음에는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럼 그 뒤에는?여이현은 한마디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걸 떠올릴 때마다 온지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이 사람은 또 같은 짓을 반복하려 하는 게 아닌가!신무열은 덤덤하게 여이현을 한번 흘겨보았다.“맞아도 싸죠. 저의 하나 뿐인 동생이 그 몇 년간 어떻게 지내왔는데 또 그 고통을 다시 겪게 하려니 말이에요. 이현 씨, 남자라면 정정당당하게 이 모든 걸 해결하고 돌아오세요.”“잘 알고 있습니다.”여이현은 자신이 완벽히 처리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온지유와 약속한 것들을 꼭 지켜야만 했다.신무열은 시선을 거뒀다. 할 말은 이미 다 했다. 남은 건 여이현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다.그렇게 여이현과 온지유는 함께 S국으로 떠났다.브람은 여이현이 홀로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다. 온지유가 함께 돌아온 것을 본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온지유측에는 사람이 여럿 딸려있었고 화국의 군대도 동행했다.여러세력의 동원하에 내란은 작은 파도에 불과했고, 신속히 가라앉았다.가장 주요한 병력은 화국의 군대였다.여이현은 직접적으로 태도를 밝혔다.“다음에 또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될수록 내부에서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화국인이고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닙니다.”여이현은 브람이 자신의 친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온지유처럼 받아들이지 못할 일도 아니라고 여겼다. 여이현은 어릴 적부터 화국에서 자랐고 몸에 밴 습관도 모두 화국의 것이었다. S국의 사람들에게 있어 여이현은 밖에서 온 타국인이었다.그런 신분으로 어떻게 이 나라를 통치
그 속에는 나라를 향한 것도, 브람을 향한 것도 있었다.브람이 그의 친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목숨을 구해 준 은혜는 갚아야 했다.온지유는 이 상황에 대한 억울함과 세상의 불공평함에 화가 났다. 거기다 여이현의 말을 들으니 더더욱 속이 무너져 내렸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이현 씨가 짊어진 책임이 크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당신 곁에 있고 싶어. 제발 나도 데려가 줘.”“절대 발목 잡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기자로서 보도를 낼게. 우리는 부부고 아이도 있잖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함께 해결해 나가자.”여이현은 온지유의 각오를 느꼈다. 그는 과거 자신이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그리고 눈앞의 온지유의 얼굴도.여이현은 결국 마음이 녹아내렸다.그는 온지유를 끌어안고 가볍게 키스했다.“그래, 데려갈게. 내 곁에 있어 줘. 무슨 일이 일어나든 꼭 지켜줄 테니까.”자신의 목숨을 내주더라도 온지유만은 지키고 말 테다.S국으로 향하기로 결정했으니 신무열에게도 한마디 보고할 필요가 있었다.신무열은 온지유가 S국으로 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이현 씨는 처리할 업무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너는 따라갈 필요 없잖아.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별이는 어쩌려고.”여이현은 휴가를 즐기러 외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다. 지금의 S국은 바뀌기 전의 Y국과 같은 상황이었다. Y국에는 신무열이 온지유 손목의 푸른 구슬을 알아봐 도와줄 수 있었다 하지만 S국에는 도와줄 사람은 누구도 없다.여이현의 친아버지인 브람조차 온지유를 좋게 보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만일 돌아가서 그들이 쳐둔 덫에 걸리기라도 하면?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여이현 혼자서라면 탈출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온지유를 데려가는 이상 그에게는 짐이 늘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별이는 아버지가 봐주고 계시잖아요. 난... 이기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난 무슨 일이 있든 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