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우미는 들고 온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면서 말했다.“주소영 씨, 차 여기에 놓고 갈게요.”주소영은 아직 편하게 앉아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아 사람이 오자마자 얼른 쿠션을 옆으로 내동댕이치며 바르게 앉았다.“네, 고마워요.”그녀는 테이블 위에 모락모락 김을 내뿜고 있는 찻잔을 보았다. 찻잔은 아주 예뻤고 찻물 위엔 장미 꽃잎이 둥둥 떠 있어 은은한 장미 향이 났다.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자 입안 가득 은은한 장미 향이 퍼졌고 순식간에 품격이 있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맛있네요. 저 태어나서 이렇게 향기로운 차는 처음 마셔봐요.”어쩌면 이렇게 호화로운 곳에 처음 와봐서 그런지 무엇을 보든, 무엇을 먹든 다 비싸고 좋아 보였다.심지어 마시는 차마저 일반 사람들과 다른 것 같았다.도우미는 찻잔을 마저 내려놓다가 들리는 칭찬에 대답했다.“에이, 뭘요. 과찬이세요.”말을 마친 도우미는 자리를 떴다.주소영은 그 도우미의 뒷모습을 한참 보았다. 방금 들은 도우미의 대답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중요한 손님으로 대접을 받는 기분이었다.한참 지나서야 온지유가 나타났다.그녀는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주소영은 온지유를 발견하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는 얼굴로 불렀다.“온지유 씨.”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아, 방은 제가 아주머니한테 청소해 달라고 부탁해서 깨끗해졌을 거예요. 지금 바로 방으로 가서 쉬어도 돼요. 별다른 일이 없다면 오늘은 이쯤에서 하고 전 이만 가볼게요.”“잠시만요.”주소영은 아직도 할 말이 남아있었다.“다른 할 말이 있으신가요?”“저 아직 지유 씨한테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어요. 온지유 씨가 아니었다면 전 이런 곳에 와보지도 못했을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그녀는 어떻게 고마움을 전해야 할지 몰라 온지유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하는 행동을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여이현이 만났던 여자는 아주 많았고 대부분 야망이
온지유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문 밖으로 나오자 차 한 대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섰고 바로 올라탔다.주소영은 그녀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온지유가 탄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보고 나서야 주소영은 시선을 돌렸다.크고 호화로운 별장엔 그녀 혼자만 남아있어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다만 주소영은 지금 고민이 많았다.여이현의 말은 믿으면서 온지유는 그녀의 말은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온지유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천천히 대화하며 오해를 풀다 보면 자신의 말을 믿어주리라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주소영은 기분이 좀 나아졌고 이내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도우미는 마침 그녀를 위해 방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깨끗하게 정리한 뒤 도우미는 예의상 그녀에게 알렸다.그녀는 방으로 들어갔다.그녀가 살던 집보다 더 거대한 안방은 침대마저 거대했고 침대 주위로 꿈에 그리던 공주 커튼도 설치되어 있었다.모든 것이 새것이었다.그녀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아직 태그도 떼지 않은 치마가 가득 걸려 있었고 하나같이 예뻤다.눈 앞에 펼쳐진 이런 광경은 전부 드라마에서만 보던 것이었다.그녀도 예전에 언젠가 공주처럼 살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고민하지 않고 바로바로 사는 그 꿈이 드디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그녀는 기쁜 얼굴로 침대에 벌러덩 눕고는 이리저리 뒹굴었다. 한참 지나도 기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주소영 쪽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그녀는 시간을 슬쩍 확인하였다. 오늘 여이현에겐 일정이 별로 없었기에 아마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으로 생각했다.집에 도착한 뒤 도우미에게 여이현이 있는지 물었지만, 도우미는 여이현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온지유는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오해를 풀고 싶어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오해가 쌓이면 풀기 어려워지니 말이다.그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니 그녀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새벽이
여진숙은 온지유를 깎아내리는 것으로 만족감을 느꼈다.온지유가 슬퍼하고 상처받을수록 깎아내리고 싶은 욕망은 점점 더 켜졌다.온지유의 안색이 굳어진 것을 발견한 여진숙은 이번에도 성공했다며 생각하곤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여진숙의 눈빛마저도 변해 더는 온지유를 괴롭히지 않았다.어차피 말을 더 해봤자 같은 모습일 것이니 괜히 목만 아프게 될 것이었다.여진숙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확실히 지금 별장엔 다른 여자가 들어 살고 있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이 적어도 분수를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절대 밖에서 아무 여자나 만나고 다닐 남자는 아니었다.여이현은 서은지의 고백을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지만, 주소영은 거절하지 못했고 심지어 주소영을 별장에서 지내게 했다. 이것은 보물창고에 여자를 숨기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그날 함께 밤을 보낸 여자가 주소영이라고 여이현은 확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주소영은 처음이었을 뿐 아니라 연약하여 그의 보호 욕구를 일으켰고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도 느끼고 있었다.어쩌면 정말로 다른 여자와 다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을 보면 그간 주소영이 있는 곳에서 지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예전이었다면 온지유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여진숙이 했던 말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더 생각을 어지럽히고 있었다.그녀에겐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여이현에게 주소영을 데리고 온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고 말해줄 틈도 없이 그가 보고 싶었다.온지유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가려 했다.이때 마침 별장의 도우미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도우미는 주소영이 이 지역 사람이 아니라 건조한 날씨에 적응하지 못해 온몸에 발진이 생겼다는 것이다. 여하튼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그녀는 주소영이 쓸만한 연고를 들고 다시 집 밖을 나섰다.직접 운전을 하여 주소영이 머무는 별장으로 출발했다.거의 도착하고 있을 때쯤 그녀는 대문 앞에 있는 익숙한 롤스로이스를 발견했다. 대체 언제부터 대문 앞에 세워져
그의 말에 주소영은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기분을 느꼈고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대표님, 저 같은 사람도 대학을 다닐 수 있을까요?”“그래.”주소영은 기쁜 듯 보조개가 움푹 선명하게 들어갈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대표님은 정말 저한테 너무 잘해주세요. 저에겐 대표님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에요!”그녀의 말에 여이현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다.온지유는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화목하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그녀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여이현은 노승아와 함께 있을 때도 차가운 모습만 보이었고 이토록 화목한 모습을 보여준 적 없었다.주소영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만 하면 그녀는 기뻐 활짝 웃었다. 확실히 다른 여자와 많이 다른 듯했다.순진하고 무해하며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 티 없이 맑다는 기분이 들게 했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도 생겨났다.이것 또한 주소영의 특징이었다.“온지유 씨, 왜 들어가지 않고 여기 계세요?”우뚝 서 있는 온지유를 발견한 도우미가 예의상으로 그녀에게 물었다.도우미의 말은 고스란히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여이현은 고개를 돌려 문 앞에 서 있는 온지유를 보았다. 처음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차갑게 변했다. 아직도 그녀에게 화가 난 것 같았다.주소영은 빠르게 소파에서 일어나 소리를 쳤다.“온지유 씨! 저 보러 오셨군요!”그녀는 빠르게 온지유의 곁으로 가 전혀 거짓 같지 않은 모습으로 말했다.“전 온지유 씨가 제게 화가 나서 다시는 보러 오지 않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여기 계셔서 저 정말 너무 기뻐요.”온지유는 주소영이 자신이 일부러 이곳에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이곳 날씨가 너무 건조해 몸에 발진이 생겼다면서요. 발진을 가라앉혀줄 연고 같은 것을 챙겨 왔으니 발라요. 이 연고 효과가 아주 좋으니까 도움이 될 거예요.”“괜찮아요. 대
그는 그녀의 뜻대로 움직였으니 분명 그녀가 좋아할 거로 생각했다.그러나 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소영은 점점 굳어지는 두 사람의 표정에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말했다.“온지유 씨, 저랑 이따가 식사 같이해요.”“있잖아요, 아주머니 음식 솜씨 아주 훌륭했어요.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주머니가 뭐든 다 하실 줄 아시더라고요, 정말 대단하시죠? 그러니까 꼭 아주머니 음식 솜씨 맛보고 가세요!”주소영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온지유는 그런 그녀를 보며 말했다.“괜찮아요...”“에이, 제가 안 괜찮아요.”주소영은 빠르게 대답하며 여이현을 보았다.“대표님, 저 온지유 씨랑 같이 밥을 먹어도 되죠? 저 여기 그동안 혼자 오래 있었다고요. 밥 같이 먹는 사람도 없어서 얼마나 외로웠는데요.”여이현은 온지유를 힐끗 보곤 담담하게 말했다.“마음대로 해.”원하는 대답을 들은 주소영은 온지유에게 더 들러붙어 놓아주지 않았다.“봐요, 대표님께서도 허락하셨어요. 그러니까 같이 먹어요.”아마도 여이현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온지유를 더 꽉 붙잡고 있었던 것 같았다.“그래요.”온지유는 더는 거절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식사하겠다고 대답했다.“이 쓸쓸한 집안에 드디어 사람 온기가 생겼네요. 저 정말 너무 기뻐요!”주소영은 웃으며 말했다.여이현은 온지유를 힐끗 보곤 차갑게 말했다.“온 비서, 계속 거기 그렇게 서 있을 건가요?”그의 불쾌한 시선을 느낀 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지금 얼른 주방으로 갈게요.”그러나 주소영은 그녀를 주방으로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아녜요. 온지유 씨는 손님인데 주방으로 갈 수는 없죠. 그냥 여기서 저랑 같이...”온지유가 말허리를 잘랐다.“그래도 제가 주방에 가 있는 것이 나을 것 같네요. 하던 얘기 계속 나누세요.”그녀는 주방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솔직히 욱하는 마음에 그들 앞에서 사라져줄 생각이었다.주소영이 그
그녀의 말에 온지유는 결국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주소영은 입꼬리를 올린 채 웃고 있었다. 동경의 눈빛이라 아마도 여이현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은 듯했다.그리고 그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네, 뭐 그럭저럭.”온지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래서 뭐가 알고 싶은 건데요?”주소영은 솔직하게 말했다.“뭐든 다 알고 싶어요. 제가 이렇게 대표님에 대해 더 알아가면 혹시 대표님께서 불쾌해하실까요?”온지유가 물었다.“대표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가고 대표님을 기쁘게 해드리면 대표님이 주소영 씨를 더 좋아할 거로 생각하시는 거예요?”주소영은 쑥스러운 듯 볼이 발그레해졌다.“온지유 씨에게 제 마음을 들킬 줄은 몰랐네요. 그럼 대표님께서도 눈치채셨겠죠? 제가 대표님을 좋아한다는 것을요!”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소영은 자신의 야망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다시 생각해보니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대표님께선 뭐든 다 알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제가 그런 마음을 품으면 제가 너무 저렴해 보이지 않을까요?”주소영은 아주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여이현 마음속 1순위가 되고 싶었다.“전 집안도 뭣도 없지만, 대표님께선 절 무시하지 않으셨어요.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긴 한데 제가 여기서 뭘 더 바라면 제 욕심인 것 같네요. 지금은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그녀는 온지유를 보면서 해답을 얻길 바랐다.“온지유 씨, 제가 만약 대학에 다니고 열심히 공부해 나중에 성공하면 집안은 일단 제쳐두고 대표님께 어울리는 사람이 될까요?”그녀의 생각은 아주 대담했고 바로 직설적으로 온지유에게 물었다.어떤 부분에선 그녀와 주소영이 조금 닮아 있는 것 같았다.주소영의 모습에서 온지유는 예전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한 사람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그 의지를 말이다.그녀는 주소영에게 물었다.“왜 대표님을 좋아하는 거예요?”주소영이 답했다
여이현은 그녀가 이런 말을 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그럼 지난번에는 왜 말을 안 했던 거지?”“지난번에 말할 기회를 안 줬잖아요.”온지유는 지난번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리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혀 말할 기회가 없었다.여이현은 의아한 듯 또 물었다.“주소영을 데리고 온 사람이 네가 아니라면 네가 누군지 몰라야 하는 거 아닌가? 난 주소영을 처음 봤을 때 너랑 아주 친해 보이기에 아는 사인 줄 알았거든.”그녀가 했던 말과 행동은 확실히 설명하기 어려웠다.다행히 주소영을 찾으러 갔을 때 그녀는 상세하게 말해주지 않아 주소영이 누구의 대체품인지 아무도 몰랐다.그 덕에 지금 그녀에게 또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 것이다.“확실히 전 주소영 씨와 두 번 만난 적이 있었어요.”온지유는 부정하지 않았다.“대표님께서 저더러 찾으라고 하신 거잖아요. 대표님이 저한테 맡기신 임무이니 당연히 중시해야죠.”여이현은 그녀의 말에 트집을 잡았다.“주소영이 찾아오지 않으면 나한테 말하지 않고 계속 숨길 생각이었어?”순간 온지유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행여나 여이현이 그녀가 일부러 숨기고 있었다고 생각할까 봐 얼른 설명했다.“전 그때 제대로 완벽하게 알아내지 못한 것 같아서 말씀드리지 않았던 거예요. 만약 주소영 씨가 대표님께서 찾으시는 여자였다는 거 알았다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데리고 왔을 거예요.”솔직히 말해 그녀는 지금까지 여이현이 화내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그녀는 줄곧 여이현이 시킨 일은 최선을 다해 완성했고 책임도 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책임이 아닌 일에선 책임지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온지유는 자신이 아직도 그의 아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여이현은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담담하게 말했다.“알았으니까 나가 봐.”그녀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여이현은 앞으로 더는 그녀에게 이 일에 관해 책임지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네, 그럼 푹 쉬세요. 식사 준비가 되면 다시 부르러 올게요.”온지유가 말했다.그녀는 밖으로 나가 조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주소영은 온지유가 연이현을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온지유가 후회하여 그녀를 데리고 오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그녀가 여이현에게 큰 영향을 끼쳐 자리를 빼앗을까 봐 그런 것 같았다.어쩐지 온지유의 태도가 변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여이현을 좋아하고 있으니 다른 여자가 끼어드는 것이 용납되지 않아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만약 온지유가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여이현은 평생 그녀가 여이현과 함께 밤을 보낸 여자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온지유는 어떻게든 이 사실을 숨기고 그녀를 돌려보내려 했을 가능성이 아주 컸다.처음부터 주소영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은 그녀도 처음이라 무섭고, 긴장되었지만 상대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했었다.그녀는 여이현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딱히 그를 찾아가 귀찮게 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냥 작별 인사나 하려고 했었다.그러나 여이현은 그녀에게 잘해주고 다정하게 대해주며 곁에 머물게 해주었다.그런 그의 행동에서 그녀는 보호받는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알게 되었다.그래서 남기로 했다.그녀가 남기로 한 것은 어쩌면 온지유에게 일종의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여이현은 전화를 받으러 가더니 급한 일이 생겼다며 온지유에게 말했다.“난 다른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니까 온 비서는 그 우유를 다 마시고 있어요. 그래도 힘들면 퇴근해 푹 쉬고요.”“네, 알겠습니다.”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이곤 주소영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롤스로이스는 그렇게 대문 앞에서 사라졌다.여이현이 자신에게 인사도 없이 떠나자 주소영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고 씁쓸한 기분이 밀려왔다.변한 것 같았다.처음 여이현의 두 눈엔 그녀만 담겨 있었다.그러나 온지유가 나타난 뒤로 그의 두 눈엔 더는 그녀가 담기지 않았다.온지유가 그에게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그녀는 다시 한번 온지유를 보았다.온지유는 느긋하게 달달한 우유를 마시고 있었
양시은은 고통 속에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전에 나도현을 위해 칼을 대신 막아준 상처는 아직 다 낫지 않았고 그 상처 위에 임다혜가 보낸 약까지 보내져 그녀의 몸은 점점 뜨거워졌다. 지금 양시은의 체온은 39도를 넘어서 거의 40도에 가까운 상태였다. 의식은 흐릿하고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져 내린다. 그때 음식을 가지고 온 가사도우미가 양시은이 침대에 누워서 꼼짝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갑자기 입을 벌려 놀랐다. 마치 그녀가 이미 숨을 거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급히 나도현에게 전했다. “도련님, 양시은 씨가 죽은 것 같아요...” “뭐라고?” 나도현은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빛은 찰나에 이른 속도로 깊어진 흑단처럼 좁아지며 가사도우미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봤다.도우미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도우닌 나도현이 이렇게 급해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나도현의 얼굴은 흰 종이처럼 창백하고 그의 눈에서는 한치의 흔들림도 볼 수 없었다. 그의 몸은 긴장으로 굳어있었고 그는 바로 서재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몇 걸음에 방에 도달하고, 그는 문을 급하게 열었다.침대에 누운 양시은을 확인한 그는 잠깐 멈칫했다. 양시은은 살고 있는 듯 숨을 헐떡이며 자고 있었다. 그러나 땀에 젖은 얼굴과 급한 숨소리가 그에게 명확히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주었다.그는 양시은의 붉어진 뺨을 보며 이마를 만지자 그녀의 열기가 손끝을 뜨겁게 만들었다. 나도현은 급히 핸드폰을 꺼내 지석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석훈, 지금 내 별장에 바로 와. 열 나는 사람이 있어.”지석훈은 피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너희 개인 의사야 뭐야. 열 정도로 괜찮은 거면 약 있잖아.”온지유가 아프면 여이현이 그를 찾았고 권다솔이 아프면 배진호가 그를 찾았다. “나도현의 여자가 아프다니... 아니. 잠깐만. 여자?”지석훈의 눈이 반짝였다. “나도현, 거기 아픈 사람이 여자라고? 어디서 생긴 여자야? 설마 그 전 여친이냐?”“그냥 빨리 와. 약도
여자는 일부러 말을 모호하게 꺼냈다. 그녀를 보낸 사람은 임다혜였고 여기에 더해 박은희가 몰래 도와주면서 이 두 사람이 협력하여 별장에 하녀 한 명을 배치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양시은에게는 그 의도가 확실히 잘못 전달됐다. 여기가 바로 나도현의 집이므로 이 여자는 분명히 나도현이 불러낸 사람일 것이다. 이 보약을 마시지 않으면 나도현이 분명히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약은 여기 두세요. 목마를 때 마실게여.”“양시은 씨, 저는 꼭 당신이 이 약을 마시는 걸 봐야만 갈수 있습니다. 지금 마시지 않으면 저는 여기서 기다리면 됩니다.” 여자는 그 말을 하고 나서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놓고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바로 양시은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양시은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마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만약 그녀 앞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이렇게 대담하게 나올 수 없었겠지만 이 상대는 양시은이었다. 그리고 박은희는 반드시 양시은을 집에서 쫓아내라고 말한 바 있었다. 따라서 양시은이 별로 두렵지 않았다. “약을 언제 마시면 난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같이 기다려 보시든지.”양시은은 지금 아이를 찾는 일이 급해서 이 여자와 시간을 보내며 신경 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마셨으니 이제 가세요.” 그러자 양시은은 그 말과 함께 보약을 한 모금 두 모금, 금방 다 마셨고 그릇을 여자의 쪽으로 돌려보냈다. “다 마셨어요. 이제 가셔도 됩니다.”“물론이죠. 양시은 씨, 푹 쉬세요.” 여자는 목적을 달성하고는 그릇을 들고 떠났다. 여자가 별장을 나서며 길가에 서 있던 차로 올라타 이내 임다혜와 만날 예정이었다.양시은은 보약을 다 마신 뒤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리 신경을 쓰진 않았다. 나도현이 아무리 말을 까칠하게 해도 그녀를 정신적으로 괴롭히
“부탁하지 마. 부탁이 효과가 있었다면 나는 이미 나도현 씨에게 그만 두라고 애원했을 거야. 언니, 제발 부탁한다고 해서 그게 진짜 유용할까?” 양채은은 눈가의 눈물을 훔쳤다.“오늘 내가 전화를 한 이유는 한 가지 말할 게 있어서야. 네가 나한테 빚진 것 나는 하나하나씩 네 아들 하민에게서 얻어 올 거야. 부모의 빚은 자식이 갚는 게 맞잖아.”이 무시무시한 말을 하고 양채은은 전화를 바로 끊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마음속이 점점 아려왔다.마스크남이 그 옆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물었다. “채은 씨, 지금 이걸 하는 게 무슨 의미에요? 양시은을 미워하면서도 왜 그 여자의 아들을 돌보고 있어요? 난 가끔은 당신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마스크남은 자기가 양채은이라면 이 기회를 확실히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양채은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하민은 날 이모라 불렀고 어른들의 잘못을 왜 아이를 탓하겠어요.”양채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양시은은 무정할 수 있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어느 정도는 선이 있었다. “당신 말도 일리는 있어요. 안에 있는 아이는 정말로 아무 죄가 없죠. 그나저나 당신 배 속의 아이는요?” 마스크남이 점점 더 압박을 걸면서 말을 이었다. “다른 아이를 생각하려면 먼저 네 애부터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만해요. 이건 내 일이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아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양채은은 등을 돌리며 걸어갔다.마스크남은 유유한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알겠습니다! 이름을 변경하여 번역을 다시 작성하겠습니다. 양시은은 마음속으로 하민에 대한 걱정이 극에 달해 당장이라도 아이를 찾으러 나가고 싶었다.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그 순간 방 문이 열리며 낯선 여자가 트레이를 들고 그녀 앞에 섰다.“양시은 씨, 이건 제가 끓인 보약이에요. 기력 보충에 좋으니 따끈할 때 빨리 드세요.”“저 안 마셔요. 그냥 가져가세요.” 양시은은 보약에 전혀
약혼 연회 당일 나도현의 휴대폰이 양시은 옆에 나타났다. 그것은 하나의 신호였지만 그녀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 후 양채은은 친절히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더 잘 챙겼고 심지어 나도현이 양시은을 싫어할까 봐 걱정했다. 결국은? 챙겨준 끝에 그들은 결국 한 침대에서 자고 있었고 이제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그와 그녀의 아이는? 양채은은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하민을 보았을 때 갑자기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녀의 아이가 양시은 덕분에 행복하지 않다면 그녀는 양시은의 아이에게 복수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갚는 복수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민은 계속해서 이모라고 부렀고 그들 사이에는 감정이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무정할 수 없었다. “난 나도현의 별장에 있어. 그 사람이 나를 안 보내줘.” 양시은은 사실대로 말했다. 그녀는 자기 잘못이라면 반드시 인정한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해서 끝나는 거야? 미안하다는 말이 효과가 있으면 세상에 경찰과 법이 왜 필요해.” 양채은의 감정은 점점 격해졌다. “너희는 계속해서 하민이만 찾았고 나에겐 관심을 둔 사람이 있었어?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해서 이런 결과를 맞아야 하는 거야.” 그녀가 남의 감정을 고의로 끼어들어 이 상황에 빠졌다면 지금 배신을 당한 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나도현은 자유 연애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결국 약혼에 이르게 됐다. 그녀가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 이 두 사람은 함께 힘을 합쳐 그녀를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이렇게 큰 차이를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견뎠는지 자신도 몰랐다. 게다가 요즘은 마스크를 쓴 남자가 그녀 곁에 있으면서 이것저것 말하고 그로 인해 그녀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다. “채은아, 우리 한 번 만나자. 하민이만 병원에 데려다주면 네가 나에게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
나도현은 양시은의 턱을 꽉 움켜잡으며 목소리를 낮게 내뱉었다. 그 당시 양시은이 그의 삶에서 사라졌을 때 나도현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빌려 그녀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가 거의 포기하려던 찰나 뜻밖에도 양시은을 만나게 되었고 이는 어쩌면 하늘이 정해준 인연일지도 모른다. 이 한 평생 그는 양시은과 사랑하고 또 싸워야 하는 운명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당연히 그 상황에 흘러가는 대로 행동해야 했다. “내 곁에서 도망칠 방법을 찾기보다는 차라리 어떻게 내게 사과할지 너의 사과를 어떻게 표현할지 생각해봐. 그러면 너의 날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질지도 몰라.” 양시은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나도현은 원하는 건 그녀의 사과와 태도라는 걸 그녀는 분명히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옆에 있을 자격이 없었다. 지금 그를 달래서 그를 기쁘게 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박은희의 편견은 산처럼 높아서 그녀는 도저히 넘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함께할 수 없었다. 그녀의 침묵은 이미 그녀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나도현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내가 너를 용서할 거라고 기대하지 마. 양시은, 이제 너는 여기서 안전하게 지내. 하민이가 걱정 되면 내 마음에 들게 나한테 잘해. 그럼 하민이를 찾아줄게. 안 그러면 소식을 알아도 너한테는 절대 말 안 해.” 양채은이 지금 통화를 거부하고 있어 양시은은 도대체 하민이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녀는 여기 갇혀 있고 아는 사람도 없었고 사설탐정을 고용해 조사할 돈도 없다. 그런데 나도현은 그 능력이 있었다. 지금 그는 아이를 이용해 그녀를 협박하며 그녀가 굴복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도현, 나한테 아무렇게나 대해도 아이는 건드리지 말아줘.” 양시은의 마음은 정말로 아팠다. 그녀의 마음이 아플수록 나도현은 그 점을 더욱 이용해서 계속해서 자극했다. “아이는 건드리지 말라고? 너는 전혀 신경
아쉽게도 나도현은 이런 걸 이해하지 못했다. 임다혜는 전혀 두렵지 않았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 사람한테 아무 짓도 안 했잖아요. 그냥 평소에 말 좀 섞고 싶은 건데. 설마 이걸로 저를 쫓아 내겠어요? 저는 안 믿어요.” 박은희는 입술을 열어 말하려 했지만 임다혜가 자신감 있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나도현이 그녀를 거절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뒤에서 조용히 손까지 써본다면...’ 박은희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임다혜는 그 생각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어머니, 말씀하신 방법 너무 좋아요. 도현 씨가 더 이상 이상한 짓 안 하게 우리 빨리 실행해요.” “좋아.” 박은희의 계획은 좋았지만 그들은 계획을 삼일 뒤로 미루기로 했다. 한편 나도현은 법률 사무소에 가진 않았지만 사무소의 사건들을 계속 관리했고 양채은과도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다. 전화를 통했지만 영채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양시은은 그와 대화할 때마다 불편해졌지만 양시은은 밥은 잘 먹었다. 그녀에게 있어 사람은 밥심이고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나도현이 정신 없이 있을 때 그녀는 탈출할 수 있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도현은 그걸 참지 못했다. 그는 양시은 앞에 나타나 비꼬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걱정하는 네 아들 결국 네가 이런 식으로 걱정하는 거냐? 양시은, 네 입에는 한 마디 진심이라도 있어?” 양시은은 나도현이 이렇게 작은 일로도 이렇게 화를 낼 줄 몰랐다. 그러나 나도현은 그녀를 싫어하니까 당연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거였다. 그의 눈에 양시은의 단점은 끝없이 확대되어 보였다. 양시은은 더 이상 나도현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나도현, 만약 내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굶어 죽으면 하민이는 돌아와도 못 보잖아.” “그건 네 변명이야. 지금 네 얼굴에는 아무런 슬픔도 없어.”나도현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양시은은 잠시 말이 막혔다. 그런데
양시은이 말을 뱉을 때 나도현은 그녀를 죽여버리고 싶은 만큼 화가 났다. “네가 날 교육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인간성? 그는 인간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수많은 사건을 처리했고 그 가운데 양시은도 포함되어 있다. 처음 양시은과 함께할 땐 결혼까지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결국 양시은은 그에게 깊은 배신을 했다. 나도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뭐라고 하는가?’ 그가 복수를 결심하고 양시은을 죽이려고 해도 마음이 약해져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양시은, 여기서 깊이 반성해.” 만약 양시은이 그에게 울면서 용서를 구하면 그는 분명 마음이 약해질 것이다. 그러나 양시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 애만 신경 썼다. 그는 그 아이가 얼마나 더 버티며 살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고 생각했다. 박은희는 나도현을 설득할 수 없었고 임다혜에게도 어떻게 말할지 몰랐다. 임다혜는 박은희가 직접 고른 며느릿감이었다. 하지만 나도현은 그녀의 얼굴조차 보기 싫어했고 아예 연락도 하지 않았다. 임다혜는 나도현에게 진심이었고 종종 박은희에게 안부를 묻고 늘 영양제와 화장품을 선물하며 찾아왔다. 지금은 그녀를 볼 면목이 별로 없었다. 임다혜가 다시 물어왔다. “도현 씨는 요즘 많이 바쁜가요? 로펌에도 없고...” 임다혜는 나도현이 양시은에게 갔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양시은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사람이고 그의 마음속에 깊은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었다. 나도현은 그녀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임다혜는 포기하기 싫었다. 부모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결혼은 행복하지 않다고 믿고 있었다. 게다가 박은희는 그녀 편이었다. 그녀는 박은희를 통해 나도현의 마음을 얻은 후 나 부인이 되려 했다. 박은희는 이것도 방법이 아닌지라 그녀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다혜야, 넌 정말 좋은 아이야. 하지만 이건 말해 줘야 할 거 같아. 난 네가 정말 좋은데 도현이는... 양시은이라는
하지만 나도현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박은희도 하민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천지개벽하고 피와 살이 뒤섞이는 상황에까지 끌고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녀가 숨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도현이 화가 가라앉으면 자연스럽게 그녀를 놓아줄 것이라 믿었다. “그 아이가 누구의 애인지 물어봐서 뭐 해? 나도현, 우리는 말할 건 다 했잖아. 더 이상 서로 힘들게 하지 말자.” “네 엄마가 그렇게 많은 돈을 주는데 내가 바보냐? 그걸 왜 거절해야 해? 예전에 20억에 너를 포기했던 것처럼 지난 4년 동안 우리는 이미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어. 넌 내가 울며 매달려서 싫다고 말할 걸 기대했어?” 양시은은 담담하게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무섭기도 했지만 점점 그녀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죽으라고 할 리는 없으니까. 죽지 않으면 언젠가는 나도현에 의해 풀려날 날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나도현의 마음속엔 그저 그때 분노로 가득 찼을 뿐이다. “그게 가능할 리가 있냐?” 나도현은 비꼬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양시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잖아. 그러니 내가 책임질 순 없어. 지금 나를 여기에 가두고 있을 바엔 차라리 양채은을 찾아가. 양채은은 진짜로 널 사랑해. 뱃속의 아이도...”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 그 여자가 날 사랑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난 널 사랑하지만 너는 나한테 어떻게 했지?” 양시은이 말을 계속하려는 순간 나도현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더욱 어두워진 채 양시은의 몸에 머물렀다.나도현의 깊은 사랑을 양시은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현이 예전에 사랑했던 만큼 지금은 증오도 그만큼 깊어졌다. 나도현은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말했다. “너 같은 사람한테 사랑을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지금까지 아이 아빠는 보지도 못한 걸 보니 네가 죽인 거 아니냐?” 양시은의 마음이 처참하게 찔렸다. 아이의 아버지는 바로 눈앞에
바로 핸드폰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도현은 그 번호를 비서에게 보내며 지시했다. “철저히 조사해.”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갑작스러운 결심이 떠올랐다. ‘더 이상 양시은이 밖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놔둘 순 없어.’ 그리고 나흘 뒤 박은희가 찾아왔다. “네가 가업을 물려받는 걸 싫다고 한 건 이해한다. 근데 지금 또 나랑 대항해서 그 아이를 다시 데리고 오겠다는 거야?” 나도현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은희는 더욱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나도현, 양시은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그 여자에게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거야? 내가 너한테 소개해 준 약혼녀는 네가 고른 여자보다 어디가 못 해?” 임씨 가문도 경성의 명문가다. 나씨 가문과 임씨 가문은 비록 여씨 가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경성에서 두 번째로 손꼽히는 대가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나민우 집안과 친척 관계다. ‘나민우 역시 처음에는 결혼은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부모의 뜻을 따랐고 가문의 이익을 위해 결혼하게 되지 않았나?’이런 생각이 들자 박은희는 더욱 불쾌한 마음에 불만을 터뜨렸다. “나도현, 네가 내 말을 듣기 싫으면 나민우를 좀 본받으면 안 되겠니? 나민우가 어떻게 했는지 알잖아. 넌 도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내가 진짜로 나민우를 내 아들로 삼아야 속이 시원하겠어?” 부모들이 자녀를 나무랄 때 자녀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남이 그렇게 좋으면 그 쪽한테 가서 아들이나 돼달라고 하세요.’와 같은 뉘앙스였다. 하지만 박은희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나도현에게 상황을 잘 파악하고 나인우를 따라 배우라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가문의 발전과 명성을 위해 양시은과는 반드시 거리를 두어여 한다. “왜 그렇게 남들과 비교하기를 좋아해요? 나민우는 나민우의 선택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양시은에 대한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요.” 나도현은 등을 돌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