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숙은 온지유를 깎아내리는 것으로 만족감을 느꼈다.온지유가 슬퍼하고 상처받을수록 깎아내리고 싶은 욕망은 점점 더 켜졌다.온지유의 안색이 굳어진 것을 발견한 여진숙은 이번에도 성공했다며 생각하곤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여진숙의 눈빛마저도 변해 더는 온지유를 괴롭히지 않았다.어차피 말을 더 해봤자 같은 모습일 것이니 괜히 목만 아프게 될 것이었다.여진숙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확실히 지금 별장엔 다른 여자가 들어 살고 있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이 적어도 분수를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절대 밖에서 아무 여자나 만나고 다닐 남자는 아니었다.여이현은 서은지의 고백을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지만, 주소영은 거절하지 못했고 심지어 주소영을 별장에서 지내게 했다. 이것은 보물창고에 여자를 숨기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그날 함께 밤을 보낸 여자가 주소영이라고 여이현은 확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주소영은 처음이었을 뿐 아니라 연약하여 그의 보호 욕구를 일으켰고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도 느끼고 있었다.어쩌면 정말로 다른 여자와 다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을 보면 그간 주소영이 있는 곳에서 지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예전이었다면 온지유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여진숙이 했던 말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더 생각을 어지럽히고 있었다.그녀에겐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여이현에게 주소영을 데리고 온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고 말해줄 틈도 없이 그가 보고 싶었다.온지유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가려 했다.이때 마침 별장의 도우미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도우미는 주소영이 이 지역 사람이 아니라 건조한 날씨에 적응하지 못해 온몸에 발진이 생겼다는 것이다. 여하튼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그녀는 주소영이 쓸만한 연고를 들고 다시 집 밖을 나섰다.직접 운전을 하여 주소영이 머무는 별장으로 출발했다.거의 도착하고 있을 때쯤 그녀는 대문 앞에 있는 익숙한 롤스로이스를 발견했다. 대체 언제부터 대문 앞에 세워져
그의 말에 주소영은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기분을 느꼈고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대표님, 저 같은 사람도 대학을 다닐 수 있을까요?”“그래.”주소영은 기쁜 듯 보조개가 움푹 선명하게 들어갈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대표님은 정말 저한테 너무 잘해주세요. 저에겐 대표님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에요!”그녀의 말에 여이현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다.온지유는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화목하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그녀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여이현은 노승아와 함께 있을 때도 차가운 모습만 보이었고 이토록 화목한 모습을 보여준 적 없었다.주소영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만 하면 그녀는 기뻐 활짝 웃었다. 확실히 다른 여자와 많이 다른 듯했다.순진하고 무해하며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 티 없이 맑다는 기분이 들게 했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도 생겨났다.이것 또한 주소영의 특징이었다.“온지유 씨, 왜 들어가지 않고 여기 계세요?”우뚝 서 있는 온지유를 발견한 도우미가 예의상으로 그녀에게 물었다.도우미의 말은 고스란히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여이현은 고개를 돌려 문 앞에 서 있는 온지유를 보았다. 처음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차갑게 변했다. 아직도 그녀에게 화가 난 것 같았다.주소영은 빠르게 소파에서 일어나 소리를 쳤다.“온지유 씨! 저 보러 오셨군요!”그녀는 빠르게 온지유의 곁으로 가 전혀 거짓 같지 않은 모습으로 말했다.“전 온지유 씨가 제게 화가 나서 다시는 보러 오지 않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여기 계셔서 저 정말 너무 기뻐요.”온지유는 주소영이 자신이 일부러 이곳에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이곳 날씨가 너무 건조해 몸에 발진이 생겼다면서요. 발진을 가라앉혀줄 연고 같은 것을 챙겨 왔으니 발라요. 이 연고 효과가 아주 좋으니까 도움이 될 거예요.”“괜찮아요. 대
그는 그녀의 뜻대로 움직였으니 분명 그녀가 좋아할 거로 생각했다.그러나 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소영은 점점 굳어지는 두 사람의 표정에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말했다.“온지유 씨, 저랑 이따가 식사 같이해요.”“있잖아요, 아주머니 음식 솜씨 아주 훌륭했어요.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주머니가 뭐든 다 하실 줄 아시더라고요, 정말 대단하시죠? 그러니까 꼭 아주머니 음식 솜씨 맛보고 가세요!”주소영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온지유는 그런 그녀를 보며 말했다.“괜찮아요...”“에이, 제가 안 괜찮아요.”주소영은 빠르게 대답하며 여이현을 보았다.“대표님, 저 온지유 씨랑 같이 밥을 먹어도 되죠? 저 여기 그동안 혼자 오래 있었다고요. 밥 같이 먹는 사람도 없어서 얼마나 외로웠는데요.”여이현은 온지유를 힐끗 보곤 담담하게 말했다.“마음대로 해.”원하는 대답을 들은 주소영은 온지유에게 더 들러붙어 놓아주지 않았다.“봐요, 대표님께서도 허락하셨어요. 그러니까 같이 먹어요.”아마도 여이현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온지유를 더 꽉 붙잡고 있었던 것 같았다.“그래요.”온지유는 더는 거절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식사하겠다고 대답했다.“이 쓸쓸한 집안에 드디어 사람 온기가 생겼네요. 저 정말 너무 기뻐요!”주소영은 웃으며 말했다.여이현은 온지유를 힐끗 보곤 차갑게 말했다.“온 비서, 계속 거기 그렇게 서 있을 건가요?”그의 불쾌한 시선을 느낀 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지금 얼른 주방으로 갈게요.”그러나 주소영은 그녀를 주방으로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아녜요. 온지유 씨는 손님인데 주방으로 갈 수는 없죠. 그냥 여기서 저랑 같이...”온지유가 말허리를 잘랐다.“그래도 제가 주방에 가 있는 것이 나을 것 같네요. 하던 얘기 계속 나누세요.”그녀는 주방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솔직히 욱하는 마음에 그들 앞에서 사라져줄 생각이었다.주소영이 그
그녀의 말에 온지유는 결국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주소영은 입꼬리를 올린 채 웃고 있었다. 동경의 눈빛이라 아마도 여이현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은 듯했다.그리고 그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네, 뭐 그럭저럭.”온지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래서 뭐가 알고 싶은 건데요?”주소영은 솔직하게 말했다.“뭐든 다 알고 싶어요. 제가 이렇게 대표님에 대해 더 알아가면 혹시 대표님께서 불쾌해하실까요?”온지유가 물었다.“대표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가고 대표님을 기쁘게 해드리면 대표님이 주소영 씨를 더 좋아할 거로 생각하시는 거예요?”주소영은 쑥스러운 듯 볼이 발그레해졌다.“온지유 씨에게 제 마음을 들킬 줄은 몰랐네요. 그럼 대표님께서도 눈치채셨겠죠? 제가 대표님을 좋아한다는 것을요!”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소영은 자신의 야망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다시 생각해보니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대표님께선 뭐든 다 알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제가 그런 마음을 품으면 제가 너무 저렴해 보이지 않을까요?”주소영은 아주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여이현 마음속 1순위가 되고 싶었다.“전 집안도 뭣도 없지만, 대표님께선 절 무시하지 않으셨어요.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긴 한데 제가 여기서 뭘 더 바라면 제 욕심인 것 같네요. 지금은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그녀는 온지유를 보면서 해답을 얻길 바랐다.“온지유 씨, 제가 만약 대학에 다니고 열심히 공부해 나중에 성공하면 집안은 일단 제쳐두고 대표님께 어울리는 사람이 될까요?”그녀의 생각은 아주 대담했고 바로 직설적으로 온지유에게 물었다.어떤 부분에선 그녀와 주소영이 조금 닮아 있는 것 같았다.주소영의 모습에서 온지유는 예전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한 사람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그 의지를 말이다.그녀는 주소영에게 물었다.“왜 대표님을 좋아하는 거예요?”주소영이 답했다
여이현은 그녀가 이런 말을 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그럼 지난번에는 왜 말을 안 했던 거지?”“지난번에 말할 기회를 안 줬잖아요.”온지유는 지난번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리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혀 말할 기회가 없었다.여이현은 의아한 듯 또 물었다.“주소영을 데리고 온 사람이 네가 아니라면 네가 누군지 몰라야 하는 거 아닌가? 난 주소영을 처음 봤을 때 너랑 아주 친해 보이기에 아는 사인 줄 알았거든.”그녀가 했던 말과 행동은 확실히 설명하기 어려웠다.다행히 주소영을 찾으러 갔을 때 그녀는 상세하게 말해주지 않아 주소영이 누구의 대체품인지 아무도 몰랐다.그 덕에 지금 그녀에게 또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 것이다.“확실히 전 주소영 씨와 두 번 만난 적이 있었어요.”온지유는 부정하지 않았다.“대표님께서 저더러 찾으라고 하신 거잖아요. 대표님이 저한테 맡기신 임무이니 당연히 중시해야죠.”여이현은 그녀의 말에 트집을 잡았다.“주소영이 찾아오지 않으면 나한테 말하지 않고 계속 숨길 생각이었어?”순간 온지유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행여나 여이현이 그녀가 일부러 숨기고 있었다고 생각할까 봐 얼른 설명했다.“전 그때 제대로 완벽하게 알아내지 못한 것 같아서 말씀드리지 않았던 거예요. 만약 주소영 씨가 대표님께서 찾으시는 여자였다는 거 알았다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데리고 왔을 거예요.”솔직히 말해 그녀는 지금까지 여이현이 화내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그녀는 줄곧 여이현이 시킨 일은 최선을 다해 완성했고 책임도 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책임이 아닌 일에선 책임지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온지유는 자신이 아직도 그의 아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여이현은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담담하게 말했다.“알았으니까 나가 봐.”그녀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여이현은 앞으로 더는 그녀에게 이 일에 관해 책임지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네, 그럼 푹 쉬세요. 식사 준비가 되면 다시 부르러 올게요.”온지유가 말했다.그녀는 밖으로 나가 조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주소영은 온지유가 연이현을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온지유가 후회하여 그녀를 데리고 오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그녀가 여이현에게 큰 영향을 끼쳐 자리를 빼앗을까 봐 그런 것 같았다.어쩐지 온지유의 태도가 변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여이현을 좋아하고 있으니 다른 여자가 끼어드는 것이 용납되지 않아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만약 온지유가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여이현은 평생 그녀가 여이현과 함께 밤을 보낸 여자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온지유는 어떻게든 이 사실을 숨기고 그녀를 돌려보내려 했을 가능성이 아주 컸다.처음부터 주소영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은 그녀도 처음이라 무섭고, 긴장되었지만 상대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했었다.그녀는 여이현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딱히 그를 찾아가 귀찮게 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냥 작별 인사나 하려고 했었다.그러나 여이현은 그녀에게 잘해주고 다정하게 대해주며 곁에 머물게 해주었다.그런 그의 행동에서 그녀는 보호받는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알게 되었다.그래서 남기로 했다.그녀가 남기로 한 것은 어쩌면 온지유에게 일종의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여이현은 전화를 받으러 가더니 급한 일이 생겼다며 온지유에게 말했다.“난 다른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니까 온 비서는 그 우유를 다 마시고 있어요. 그래도 힘들면 퇴근해 푹 쉬고요.”“네, 알겠습니다.”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이곤 주소영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롤스로이스는 그렇게 대문 앞에서 사라졌다.여이현이 자신에게 인사도 없이 떠나자 주소영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고 씁쓸한 기분이 밀려왔다.변한 것 같았다.처음 여이현의 두 눈엔 그녀만 담겨 있었다.그러나 온지유가 나타난 뒤로 그의 두 눈엔 더는 그녀가 담기지 않았다.온지유가 그에게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그녀는 다시 한번 온지유를 보았다.온지유는 느긋하게 달달한 우유를 마시고 있었
“아주머니가 만드신 음식이 맛있다고 했죠. 그럼 많이 먹어요.”온지유는 컵을 내려놓으며 더는 그녀와 함께 어울려주지 않으려고 했다.그녀가 떠나는 이유도 여이현이 이곳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소영은 이때가 아니면 나중에 물어볼 기회가 없을까 봐 그녀가 떠나기 전에 물었다.“평소엔 제가 하는 질문에 피하지 않고 전부 대답해 주셨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전부 피하고 계시네요. 온지유 씨, 대표님 좋아하시죠? 아까 저한테 하신 말도 위기감을 느껴서 하신 말이시죠? 사실 제가 나타나질 않길 바라고 계셨죠? 저랑 대표님이 밤을 같이 보내서 온지유 씨는 엄청 불쾌하신 거잖아요!”그녀의 말에 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몸을 틀었다.주소영은 자신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온지유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더는 겁 많던 소녀가 아니었다.“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죠?”온지유가 담담하게 물었다.“정말로 대표님과 밤을 보낸 건 맞나요? 주소영 씨를 찾아갔을 때 마침 나타나셨죠. 세상에 이렇게 기막힌 우연이 있을 거로 생각해요?”“온지유 씨는 처음부터 저를 믿지 않으셨네요.”주소영은 그녀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대체 제가 어떻게 해야 제 말을 믿어주실 건가요.”“그날 호텔로 간 것도, 함께 밤을 보낸 것도 전부 처음이었어요. 처음에 그날을 기억하기 싫었던 건 사실이었어요. 하지만 제가 상대한 남자가 대표님이란 걸 알게 된 후로 그날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던 걸 후회했죠.”온지유는 순진하고도 성실한 주소영의 눈빛을 보았다.그녀의 두 눈을 보고 있으니 그녀가 딱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에 온지유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이곳에 들어온 이상 주소영 씨는 제게 믿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대표님께 믿음을 보여줘야 해요. 대표님께서 주소영 씨를 믿는 거로 충분하거든요.”주소영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전 대표님을 좋아하고 있어요.”온지유는 멈칫하더니 입술을 틀어 물었다.“저 대표님을 좋아해요. 어떻게든 대표님도 저를 좋아하게 만들 거
그 사람은 그녀가 떨군 번호표를 보았다. 온지유가 왜 아침 일찍 이곳에서 나타난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그는 허리를 굽혀 떨어진 번호표를 주웠다.온지유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빠르게 먼저 주우려고 했다.그러나 그와 가까이에 떨어져 있었던 탓에 그가 먼저 번호표를 줍게 되었다.“어디 아파?”남자는 번호표를 살펴보았다. 그것이 초음파실에서 뽑은 번호표란 것을 바로 알게 되었다.심플한 번호표를 보고 있으니 그는 더욱 의문이 생겼다.온지유는 엄청난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황급히 그의 손에서 번호표를 빼앗아와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당황한 모습을 감추며 말했다.“아, 그게 건강 검진 좀 해보려고요.”여이현은 그녀를 빤히 보며 또 물었다.“위장이 안 좋은 거 아니었나? 왜 초음파 검사를 하려고 한 거지?”온지유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그의 두 눈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말했잖아요. 그냥 간단하게 검진받아보려고 온 거라고.”여이현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그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병원에 온다는 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온지유가 답했다.“어젯밤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잖아요. 집에 계시지 않으니 저 혼자 온 거예요.”“핸드폰은 장식인가?”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더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며칠 전에 제 연락 전부 받지 않으셨잖아요. 그런데 연락해서 뭐해요.”며칠 전은 일부러 그녀의 연락을 받지 않은 것이었다.그때는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어제부터 그는 핸드폰을 다시 켜뒀다. 그녀가 전화할 거로 생각하며 말이다.여하간에 그는 이미 며칠 동안 귀가하지 않은 상태였다.그녀 혼자 그 집에 남아있어 지내는 게 불편할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쓸데없는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그가 없이도 그녀는 알아서 잘살고 있었고 심지어 혼자 병원까지 찾아왔다.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여이현을 보았다. 그는 어제 입었던 정장을 계속 입고 있었고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온 것 같아 물었다.“
하지만 지금 권다솔이 과연 좋은 삶을 누리고 있는가?배진호의 눈동자에 흐릿한 망설임이 스쳤다. 그는 문득 자신이 고집해 온 길이 옳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아마 회사를 차리지 않아도 다른 방법으로 권다솔의 부모를 설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이런 사태까진 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저는 앞으로 나오지 않을 겁니다.”배진호는 한 템포 쉬고 나서 등 뒤의 정미진에게 차분히 말했다.“남은 장홍화는 저한테 주세요.”그 말을 남긴 뒤 그는 곧장 자리를 떴다.이번에도 정미진과 배진호 사이에는 불협화음만 남았다.그 후로 배진호는 쭉 권다솔 곁에 머물며 회사 일조차 손을 놓고 남에게 맡겼다. 여이현이 선뜻 도와줘서 참 다행인 부분이었다.밤낮으로 곁을 지킨 덕분에, 권다솔의 상태는 한결 나아졌다. 아이를 잃은 상실감의 그림자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드물게 어린아이 용품이나 작은 장난감을 멍하니 응시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회복세를 보였다.그녀의 상태가 좋아지는 걸 보자, 늘 긴장하던 배진호도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며칠간 잠잠하던 정미진이 마침내 전화를 걸어서 장홍화를 넘기겠다고 했다. 배진호는 바로 비서에게 심부름을 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정미진이 그 의도를 못 알아챌 리 없었다. “물건을 가져가려면 네가 직접 와.”배진호는 잠시 생각한 뒤, 권다솔에게 한마디 알리고 집으로 향했다.그는 짐작도 못 했다. 자신이 막 출발한 직후, 권다솔이 병원에서 빠져나와 뒤를 밟을 줄은 말이다.“기사님, 앞에 가는 저 차 따라가 주세요.”권다솔은 택시 기사에게 부탁했다. 기사는 자신과 두 대 앞서 달리는 검은색 차를 힐끗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대낮에 이런 건 좀 그렇지 않나요.”그러고는 무언가 충고라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제 남편이 바람피우고 있어요. 증거 잡으러 가는 길입니다.” 권다솔의 짧은 한마디에 기사는 할 말을 잃었다. 뭔가 목이 막힌 듯
조연숙이 말을 꺼내자 순간 방 안은 조용해졌다.정미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녀는 조연숙 모녀의 달라진 기색을 인지하곤 허둥지둥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배진호가 입을 열었다. “저는 결혼했습니다.”석규리의 젓가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조연숙은 분노에 들끓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쏘아붙였다. “네 아들이 결혼했다는 걸 왜 이제 와서 말해?”“아니, 그게 아니고, 얘가 헛소리를...” 정미진은 황급히 배진호를 노려보곤 변명에 나섰다. “우리 집안에 얽혔던 여자가 있었던 건 맞지만,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헤어졌어.”하지만 조연숙은 냉소를 지었다. 이런 변명 따윈 세상 물정 다 겪은 사람들 눈에는 뻔히 보이는 허점 덩어리에 불과했다. 설령 정미진의 말대로라고 해도, 결국 배진호는 한번 결혼한 경력이 있는 남자라는 이야기다.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무엇하랴? 잘 키운 딸을 돌싱에게 시집보낼 순 없었다.조연숙은 바로 석규리의 손을 잡아채며 노려봤다. “우리 딸은 그런 사람한테 시집갈 수 없어. 나가자.” 석규리는 아직 멍한 상태였으나 조연숙에게 이끌려 나가면서 미련 어린 시선으로 뒤를 돌아보았다.이렇게 상대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정미진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녀는 답답한 듯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배진호에게 소리쳤다. “왜 그런 말을 했어? 규리가 널 얼마나 마음에 들어 했는지 몰라? 네가 입 다물고만 있었으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을 텐데!”“어머니, 저는 오늘 물을 게 있어서 온 거예요.” 배진호는 느닷없이 정미진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의 눈동자는 한기 서린 빛을 품고 있었고, 그런 기세에 정미진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뭔데?”“다솔 씨 일 어머니한테 책임이 있죠?”배진호는 또박또박 말했다. 기세도 점점 살벌해졌다.자신이 뒷걸음질 친 사실을 깨달은 뒤, 정미진은 고개를 떨구며 고약한 얼굴빛을 띠었다. “내가 네 엄마인 거 모르
권다솔을 바라볼 때만큼은 다시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갔다.“저녁에 볼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 거예요. 혹시 급한 일 있으면 전화해요.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요, 알겠죠?” 권다솔은 입술을 떨며 그가 어디로 가는지 묻고 싶었지만 결국 말문을 열지 않았다.배진호는 병원을 나서서 차를 타고 한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정미진은 일찌감치 이곳에 방을 잡아둔 모양이었다.그가 문밖에 도착했을 땐, 안에서 터져 나오는 즐거운 웃음소리가 문을 뚫고 나올 듯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어둑한 눈빛으로 얼마 전 여이현이 해준 말을 되새겼다.“진호 씨 집 도우미 얼마 전 집안일로 휴가를 냈다죠? 그 도우미가 집에 가기 전 내가 불러서 물어봤어요. 진호 씨도 만약 만나봤다면 다솔 씨가 사고 당일 누구와 있었는지 알았을 텐데요.”그날, 그 말을 듣고 배진호는 등줄기에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한 번도 품어보지 않았던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아마도 그는 이미 마음 한구석에서 그 가능성을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단지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그런데 지금 이 문이 바로 앞에 있다. 더는 피할 수 없었다.쾅!배진호가 문을 박차고 들어서자, 안에 가득하던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찰나에 고요해졌다. 안에 있던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는 정미진, 그리고 그녀가 입버릇처럼 학력이 출중하다고 칭찬하던 규리, 그리고 중년 여성을 발견했다. 그 중년 여성은 규리와 가까워 보였다. 아마 그 규리의 어머니이자, 정미진이 오래도록 입에 올리던 옛 친구일 것이다.또다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목소리, 이번엔 도우미의 말이었다. “사모님께서 그날 드신 거, 어머님 동창이 특별히 가져온 보양식이라던데요.”그 말을 떠올리자, 배진호의 눈빛에는 차가운 기세가 서렸다. 그의 예리한 시선에 안쪽 사람들은 마치 가시에 찔린 듯 몸을 움츠렸다. 석규리는 흠칫하며 어머니 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가 보인 반응에 중년 여성은 약간 머뭇거리며 정미진에게 물었다. “이쪽은...?”
창밖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린 순간, 권다솔은 자신이 어느새 창가까지 다가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입원 병동은 7층에 있었다.이곳 창문에는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어서 사람이 몸을 내밀기만 하면 잠깐의 충동으로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는 일도 발생할 수 있었다.마치 저승으로 가는 다리를 무감각하게 건너온 것만 같았다.그럼에도 권다솔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두려움이나 격앙된 기분도 없이 모든 감정이 텅 빈 채 그저 멍하게 서 있었다.스스로 방금 무엇을 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다솔 씨...”배진호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가 입술 끝에 머문 말을 삼키곤 다른 화제로 돌렸다. “배고프지 않아요? 다솔 씨가 가장 좋아했던 식당에서 갓 만든 새우죽이랑 두유를 가져왔어요. 한번 먹어봐요. 예전 맛이랑 같은지 확인해 봐야죠.”새우죽에서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며 해산물 특유의 신선한 향이 감돌았다. 그 위로 송송 다진 파가 푸르게 떠 있었다.과거에 권다솔이 가장 즐겨 먹던 음식이었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는데도 배진호는 그 기억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되살려냈다.권다솔이 병실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배진호는 조용히 밖으로 나가 의사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조금 전 마치 영혼이 잠시 떠난 듯한 권다솔의 상태를 낱낱이 전했다. 의사는 그의 말을 듣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이 점을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부인께서는 아마도 우울증 증세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사실 임신부에게 흔히 보이는 질환 중 하나입니다. 출산 전 우울증이나 출산 후 우울증 같은 경우가 있는데, 부인의 경우는 상황이 약간 다르지만, 아이를 잃은 충격으로 정서가 불안정해져 우울증이 생길 수도 있지요.” 배진호는 순간 멍해졌다. 무엇보다 활기차고 웃음 많던 권다솔에게 이런 병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하지만 곰곰이 떠올려보니, 권다솔은 정말로 오랫동안 그에게 화를 내거나 큰 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그
정미진은 장홍화를 이용해서 권다솔이 유산하게 만들었다.그런 짓을 저지른 다음 매일 같이 악몽에 시달리면 어쩌겠는가? 더러운 여자를 집안에 들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말조심해.”정미진은 배상준을 힐끗 노려보며 경고했다.“내가 진호랑 통화할 때 말 함부로 하지 마. 안 그러면 용서 안 할 테니까.”“마음대로 해. 난 신경 안 쓸게.”5분 뒤, 정미진은 배진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저녁 집에 와서 밥 먹을래? 내가 규리랑 규리 어머니를 초대했어. 규리는 내가 예전에 같이 학교에 다녔던 동창 딸인데, 성품도 괜찮고 학력도 높고 해외 유학까지 다녀왔어. 무엇보다 우리가 잘 아는 집안이니 한번 만나보지 않겠니?”전화기 너머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확실하진 않았지만, 아마도 좋은 소식이었는지 정미진의 얼굴에 확연한 기쁨이 번졌다.“좋아, 이틀 뒤라도 괜찮아. 네가 만나주기만 하면 됐어! 그때 내가 사람들 불러놓을 테니까 약속 어기면 안 돼!”옆에 있던 배상준이 물었다.“정말 진호가 이렇게 빨리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거로 생각해?”정미진은 콧방귀를 뀌며 남편의 의심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마음을 바꿀 수도 있는 거지. 권다솔은 애당초 진호한테 진심인 적 없었잖아. 그렇게 뻔히 드러나는 사실을 내가 모를 것 같아? 전에야 그 여자한테 잠깐 홀린 데다가 아이까지 있어서 묶여 있었던 거지. 지금은 아이도 없으니 그런 여자한테 미련 갖고 있을 리가 없잖아.”정미진이 계속해서 아이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 배상준은 점점 더 얼굴을 찌푸렸다. 마음속에서 무서운 추측이 고개를 들었지만 차마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정미진이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것을 막지 않고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권다솔이 병원에 입원한 지 다섯째 날.깨어난 이후로 그녀는 병실에 틀어박혀 아무와도 말하지 않았다. 누가 들어와 말을 걸어도, 심지어 배진호가 와도 마찬가지였다.배진호는 이런 그녀의 상태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매일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허상에 불과했다. 소미가 이 장면에 느끼는 것은 질투심밖에 없었다. 그저 아직 손을 쓸 기회를 찾지 못했을 뿐이다....며칠 후.권다솔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온 힘이 빠져버린 듯 이불 속에 몸을 웅크린 채 조용히 울었다. 눈물은 점점 이불을 적셔갔다.배진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며칠 동안 그는 한순간도 마음이 편한 적 없었다.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그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배진호는 익숙한 얼굴에 순간 놀라며 입을 열었다.“여 대표님.”여이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 쪽을 바라보았다. 오는 길에 그는 권다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략 들은 상태였다.“다솔 씨는 좀 어때요?”여이현이 물었다.배진호는 억지로 웃어보려 했지만 고통스러운 표정 밖에 나오지 않았다.“별로 좋지 않아요. 저조차도 만나려 하지 않아요. 저를 병실 밖으로 내쫓더군요.”그는 주먹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누군가 손을 쓴 게 분명해요. 반드시 그 사람을 찾아내야겠어요. 그리고...”뒤이은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배진호의 차가운 눈빛은 결심을 그대로 드러냈다.이번 일로 그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감히 권다솔을 해치고 아이를 잃게 만든 행동은 이미 인내심의 한계를 넘었다.“그 문제를 얘기하려고 내가 온 거예요.”여이현은 잠시 멈칫하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혹시 주변 사람을 의심해 본 적 있어요?”배진호는 그 말을 듣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이때 배진호 집의 도우미가 불려 와 질문을 받았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사건이 있던 날 배진호의 어머니가 권다솔을 보러 왔다고 했다.“근데 뭐 특별한 일은 아니에요. 어머님은 평소에도 자주 오셨으니까요. 아! 그날도 어머님이 보온병을 들고 오셨더라고요.”“보온병?”“네, 아주 귀한 보양식이라면서요. 맞다, 홍경천이라고 하셨던 것 같아요.”이 말을 들은 배진호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도우미는 그의 싸늘한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일단 그러자.”“저 진짜 이모네 집에 가는 거예요? 이거 꿈 아니죠?”여자아이가 팔을 꼬집었다. 곧 그녀의 팔에는 다른 멍이 생기기 시작했다.온지유는 부랴부랴 허리를 숙이며 말렸다.“몸에 상처 내는 일은 하면 안 돼.”“상처 내는 게 아니에요. 이게 다 꿈일까 봐... 깨고 나면 또 쫓겨 다녀야 할 까 봐 그런 거예요. 다행히 꿈은 아닌 것 같아요. 이번에는 진짜 입이 생기는 거죠?”여자아이는 신이 나서 온지유의 품에 안겼다. 이번에는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의 눈물이었다.“저 진짜 집이 생긴 거 맞죠? 아저씨도 이모도 있고 오빠도 있어요!”“그럼. 앞으로는 우리가 너를 돌봐줄게.”온지유는 부드럽게 여자아이의 등을 쓸었다.이 순간 그녀는 집에 남겨진 온하윤이 떠올랐다. 딸이 있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사월의 어머니가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됐다.딸을 다른 나라에 버리다니 말이다. 이건 그냥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었다.사월이를 집에 데려가기로 했으면 제대로 된 이름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언제까지 사월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앞으로 소미라고 불러도 돼? 이 이름이 싫으면 다른 거로 바꿔도 돼.”온지유는 여자아이의 의견부터 물었다. 이름은 매일 같이 듣게 되는 것인데 본인 마음에 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여자아이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활짝 웃었다.“저도 이제 이름이 생긴 거네요. 소미 좋아요.”그녀는 이름이라고 하면 뭐든 좋았다.온지유가 ‘소미’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는 여자아이의 미래에 미소가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에 있었다.여자아이가 허락했으니 이름은 이렇게 결정되었다.“이제 밥 먹으러 가자. 바로 앞에 호텔이 있어서 거기 가서 먹으면 될 것 같아. 애들 배고플 텐데.”여이현은 별이의 손을 잡고 별이는 소미의 손을 잡았다. 온지유는 소미 곁에서 서서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마중했다.“네 분 안쪽으로 모실게요. 애들이 참 예쁘네
온지유는 여자아이 혼자 보낼 수 없었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사고를 당하거나 나쁜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기 때문이다.그녀는 다시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무슨 일인지 이모한테 말해 줄래? 네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넌 엄마 아빠가 없어?”소녀는 울음을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는 떠났어요. 다들 아빠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엄마도 절 혼자 두고 떠나버렸어요. 어디로 간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무도 절 돌보지 않아서 집에서 굶어 죽을 뻔했어요.”여자아이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온지유의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그녀는 이야기를 듣고 대강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아이를 짐스럽게 여겨 의도적으로 버린 것이다.이렇게 어린아이가 집 주소와 전화번호는 물론 이름까지 모른다니 말이다.“이모,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제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어요. 아빠랑 엄마는 그냥 저를 사월이라고만 불렀어요.”소녀는 눈가가 붉어진 채로 속삭였다.“제가 너무 멍청해서 그런 거겠죠? 제가 좀 더 똑똑했으면 엄마가 절 버리지 않았을 텐데...”“아니야.”온지유는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위로가 될지 몰라 머뭇거렸다. 아이에게 잘못이 있는 게 아니었다. 잘못은 그녀의 부모에게 있었다.여자아이를 사월이라고만 부르며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주지 않았으니,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더구나 아이를 낳았다면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아이가 똑똑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이유로도 아이를 버릴 권리는 없었다. 모든 아이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진실을 그대로 말한다면, 소녀의 마음에 더 큰 상처를 남길까 두려웠다. 아이에게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했다.온지유는 여자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거짓말로 이야기를 꾸며냈다.“아마도 네 엄마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거야. 일이
강원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이 되었다. 여이현은 그들을 데리고 가장 큰 백화점으로 갔다. 그리고 한참 구경하고 나서 백화점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갔다.이때 백화점 안에서 귀를 찌르는 화재 경보음이 들렸다.“불났나 봐. 빨리 나가자.”여이현은 별이를 훌쩍 안아 올리며 온지유의 손을 잡았다. 세 사람은 함께 출굴 나갔다.그들이 출구에 갔을 때 이미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그들은 백화점 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밖으로 밀려 나왔다.여이현은 별이를 안은 손에 힘을 더했다. 인파 속에서 흩어지기라도 하면 큰 일이니 말이다. 특히 별이는 아직 어린아이기 때문에 어른들 틈에서 사고를 당할 확률이 높았다. 별이도 지금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알기에 여이현을 꼭 끌어안았다.이때 한쪽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된 온지유는 이런 소리에 유독 예민했다.황급히 고개를 돌려 보자 혼자 울고 있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꽃무늬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는 별이 또래로 보였다.여자아이는 부모 없이 혼자 인파 속에 있었다.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여자아이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휘청댔다. 커다란 발이 이미 그녀의 발을 밟고 지나가고 있었다.온지유는 단호하게 여이현의 손을 놓았다.“별이 데리고 먼저 나가. 우린 밖에서 합류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여자아이 쪽으로 필사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를 안아 올리면서 말했다.“네 부모님은? 어디 가셨어?”여아아이는 더 크게 울면서 온지유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과정에 그녀의 팔에 난 상처들이 드러났다.온지유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설마 아동 학대인가?’어찌 됐든 지금은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그녀는 있는 힘껏 앞으로 걸어가서 무사히 출구로 빠져나갔다.백화점 밖으로 나간 그녀는 우선 여이현과 별이부터 찾았다. 다행히 두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한눈에 찾을 수 있었다.“별아, 너 괜찮아?”온지유는 후다닥 달려가서 별이부터 살폈다. 그리고 그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