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늘의 말에 소은정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아, 성진그룹이라... 그집 딸 허하진이랑 엮었던 적이 있었지. 뭐 결국 나한테 한방 먹었지만. 성진그룹... 협력하던 파트너들도 다 도망가고 지금은 겨우 이름 정도만 남아있는 상태일 텐데...“그럼 민하준이라는 이름도 가명인 거야? 아버지 복수를 하려고 이름까지 바꾸고 우리한테 접근한 거고?”소은정의 질문에 김하늘이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건 아닐 거야. 애초에 허광현 대표와는 별로 접점도 없었어. 그리고 평생 사생아라고 손가락질 받으면서 살아서... 아마 허광현 대표한테 좋은 감정은 없을 거야. 민하준이라는 이름도 성도 전부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거야. 어머니 쪽에서 운영하던 민연그룹... 사실 파산직전이었거든? 그런데 민하준이 대표로 취임한 뒤로 최근 몇 년 동안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성진그룹 허광현 회장의 사생아라... 멍청한 딸보다는 사생아가 훨씬 더 낫네.잠깐 망설이던 김하늘이 한숨을 쉬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민하준 와이프는 십 년 전에 부동산으로 벼락부자가 된 집안 딸이래. 아마 돈 때문에 억지로 한 결혼인 것 같아. 부부 사이도 안 좋대. 1년에 겨우 얼굴 한 번 볼까 말까라던데? 하, 우리 유라...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어떻게 그딴 남자랑...”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친구들 중에서 한유라는 가장 유흥을 즐기는 타입이었지만 선은 확실히 지키는 사람이었다.게다가 평소에 바람을 피우는 남녀들을 가장 중오하던 그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간녀가 되다니...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싶어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잠시 후, 전동하가 부랴부랴 달려왔다.기온이 많이 떨어졌는지 그의 몸에서 날카로운 한기가 느껴졌다.전동하가 에르메스 토트백을 건넸다.“추울까 봐 옷가지 좀 챙겼어요.”남자 옷이잖아? 동하 씨 옷인가?“워낙 급하게 나와서... 대충 내 옷만 챙겼어요. 일단 입어요.”파티장에서 집으로 들어갔다 옷 갈아입을 새도 없이 부랴부랴 집을 나선터라 소은정은 여전히 드
소은정의 질문에 의사가 미소를 지었다.“별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체내에 주입된 약물은 8-9 시간이 지난 뒤에야 체외로 배출될 거예요. 그 전까지는 몸에 힘이 잘 안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충격 때문인지 발열 증상이 있으시더군요. 해열제 수액 놔드렸으니 아마 곧 내릴 겁니다.”의사의 설명에 소은정도 김하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금이라도 늦었으면 큰일날 뻔했네...의사가 밖으로 나가고 두 사람은 잠에 든 한유라를 힐끗 바라보았다.민하준 꿈을 꾸는 건지 이를 빠득빠득 갈며 “쓰레기”, “죽어버려” 같은 욕설을 내뱉는 한유라의 모습에 두 사람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그래도 씩씩해 보여서좋네.30분 뒤, 전동하가 다시 돌아왔다.포장백에 프린팅 된 로고를 확인한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긴 평소에 예약하기도 힘든 레스토랑이잖아. 이 밤까지 영업할 리도 없고...소은정이 묻기 전에 눈썰미 좋은 김하늘이 먼저 물었다.“이 레스토랑 미리 예약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포장해 오신 거예요?”“오늘 다들 고생 많았잖아요. 환자도 있고 맛있는 거 든든하게 먹어야죠. 그리고 레스토랑 사장이 제 친구라서 특별히 부탁 좀 했죠.”포장백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전동하가 말을 이어갔다.“이건 유라 씨 깨어나면 드리고 이건 두 사람 먹어요.”하, 정말 자상하네... 은정이, 남자 하나는 잘 잡았어.젓가락을 포장을 뜯어 손에 쥐어주기까지 하는 전동하의 모습에 소은정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휴, 둘이서 있을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하늘이도 옆에 있는데... 아주 잘 하면 입에 넣어주겠어?소은정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김하늘을 불렀다.“얼른 와. 따뜻할 때 먹어야지.”가까이 다가온 김하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너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너도 열 나는 거야?”그녀의 말에 전동하가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고 소은정은 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몰래 김하늘을 흘겨보았다.“아니거든! 병실이 좀 덥네! 얼른
한유라의 목소리에 소은정과 김하늘이 벌떡 일어섰다.한유라의 목소리에 소은정이 잠이 깨자 순간 전동하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곧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아니다. 환자잖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후다닥 다가간 소은정은 한유라의 얼굴을 살폈다. 창백한 얼굴에 생기가 돌고 퀭하던 눈동자도 반짝이고 있었다.오랫 동안 밥을 먹지 않아서인지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없었지만 말이다.“깼어? 몸은 좀 어때?”전에 일어났던 일들이 떠오른 듯 한유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나 배고파...”소은정과 김하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전동하가 바로 미리 준비한 음식을 건넸다.침대 위에 간이 책상을 올리고 침대 높이를 조절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은정과 김하늘을 바라보던 하유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은호 오빠는... 지금 어딨어?”한유라의 말에 소은정이 흠칫하고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오빠가 날 구해 준 거잖아. 직접 얼굴 보고 고맙다고 하고 싶어.”소은호에 대한 마음은 이미 접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제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죽어버린 사랑의 마음이 다시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를 지켜준 것도 처음, 안은 것도 처음, 그렇게 소은호와 가까이 있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혹시나... 혹시나 은호 오빠도 날 좋아하는 게 아닐까?단 1%의 가능성뿐이라 해도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기대 가득한 한유라의 눈빛에 소은정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오빠는 회사 갔지. 아마 오늘 오지 않을까?”“너, 앞으로 남자 제대로 봐가면서 만나! 민하준 그 사람 딱 봐도 인상이 별로더구만. 뭐? 외모로 사람 판단하지 말라고? 야, 관상도 과학이야!”김하늘의 꾸짖음에 한유라가 고개를 숙였다.“그래. 내가 바보 같았던 거 맞아. 나한테 보여줬던 거 전부 다 거짓말이었어... 우리가 산에 갇혔을 때도 와이프한테 들킬까 봐 일부러 전세기 말고 다른 방법으로 구한 거였대. 하... 난 그것도 모르고...”잔뜩 시무룩해진 한유라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김하늘이 그녀
마지막으로 소은정을 향해 미소를 지어준 뒤 전동하가 자리를 뜨고 소은정은 붉게 물든 얼굴을 어떻게든 숨기려고 고개를 숙였다.쳇, 뭐야...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한유라와 김하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전동하 대표...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박력있네. 아주 며칠 뒤면 청접장이라도 돌리겠어?”소은정이 김하늘을 흘겨보았다.“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리고 지금은 유라 일을 상의하는 자리잖아! 화제 돌리지 말라고!”그녀의 말에 한유라가 웃음을 터트렸다.“하이고... 야, 언제는 돈만 벌고 싶다면서! 연애는 안 할 거라면서.”“당연히 일이 더 중요하지. 사랑은... 맛있는 요리의 데코 같은 존재랄까?”“나쁜 여자!”김하늘, 한유라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치고 소은정이 어깨를 으쓱했다.두 사람이 한유라가 도시락을 싹싹 비우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때, 잠깐 나가서 통화를 하던 김하늘이 굳은 표정으로 다시 병실로 들어왔다.“유라야, 나 지금 회사 들어가봐야 할 것 같아. 너 사실 이제 그만 퇴원해도 되지 않아?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까?”김하늘의 제안에 한유라가 세게 고개를 저었다.“안 돼! 우리 엄마한테 무조건 이 모습 보여줘야 해. 안 그럼 나 정말 엄마한테 맞아죽을지도 몰라!”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김하늘이 소은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알아서 해. 그럼 나 간다?”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이고 김하늘이 병실을 나섰다.그리고 잠시 후, 소은호가 병실 문을 열었다.아침에 소은정은 한유라가 깨어났다고 시간 나면 병실로 와보라고 미리 언질을 준 상태였다.엄마 핑계를 대긴 했지만 사실은 소은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소은호를 본 순간 눈동자를 반짝이던 한유라의 미소가 곧 어색하게 굳었다.“오빠, 시연 언니 왔어?”시연 언니랑 같이 올 줄은 몰랐네...당황한 건 소은정도 마찬가지였지만 최대한 덤덤한 표정을 지어 보았다.고개를 살짝 끄덕인 소은호가 물었다.“몸은 좀 어때?”기다리고 기다렸던 목소리지만
고개를 끄덕인 소은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그럼 푹 쉬어. 그 남자에 관한 건... 도움 필요한 거 있으면 은정이한테 말하고.”입술을 꼭 깨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유라가 번쩍 머리를 들었다.“오빠, 도와줘서 고마워요.”“아니야. 넌 은정이 친구기도 하고. 집안끼리 비즈니스적으로 엮인 것도 많고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거지.”순간, 한유라의 눈동자에 담겼던 마지막 빛까지 사라지고 말았다.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이려 했지만 아무리를 애를 써도 미소를 지을 수 없어 결국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날 구하러 와준 수많은 이유 중에... 나라서... 내가 걱정돼서 같은 건 없는 거네.하긴... 내가 무슨 자격으로 오빠한테 그런 걸 바라겠어.“오빠, 시연 언니. 얼른 가서 볼일 봐. 난 유라 집으로 데려다주려고.”어차피 별로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던 소은호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한시연의 손을 잡은 채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는 순간, 한시연이 고개를 돌려 한유라를 힐끗 바라보았다.다행히 별 생각없이 싱긋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에 소은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두 사람이 병실을 떠나고 한유라는 참고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어깨가 파르르 떨렸지만 울음소리는 내지 않았다. 한유라의 길고 긴 짝사랑이 완벽한 끝나는 순간이었다.“그냥 소리내서 울어. 다 울고 나면 집으로 가는 거야.”고개를 든 한유라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물들어있었다.“나... 너무 엉망인 사람인가봐. 그래서 오빠가... 날 봐주지 않은 거겠지? 눈길 조차 제대로 주지 않은 거겠지?”“그럴 리가...”한유라가 한숨을 내쉬었다.“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제대로 말도 못 붙이면서 아무 감정도 없는 남자들이랑 놀아나는 게 나잖아. 내가 생각해도 난 엉망이야... 그래, 내 착각이었어. 이 세상에서 은호 오빠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시연 선배뿐이야. 이제 정말... 마음을 접을 수 있을 것 같아.”그래, 내가 졌어... 오빠가 어제 나한테 와준 건 내가 은정이 친구
한유라의 말에 회의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원가는 회사의 기밀사항, 회사 직원들도 잘 모르는 정보를 한유라는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다들 의아할 따름이었다.“저게 무슨 소리죠?”“사실일까요?”“저 여자... 민하준 대표와 무슨 사이일까요?”민하준의 표정이 차갑게 굳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곧이어 그의 옆에 앉은 통통한 몸매의 여자가 한유라를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한유라 씨, 이이가 준 돈이 부족했나요? 여기가 무슨 자리인 줄은 알아요? 이게 지금 무슨 짓이에요!”한유라 역시 여자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차갑게 웃었다.“지채영 씨, 또 만났네요.”“상간녀 주제에 이렇게 당당한 사람은 또 처음 보네요. 한유라 씨는 참 뻔뻔해요? 이 사람한테 차이고 복수라도 하려는 거예요?”한유라, 지금 당장이라도 널 찢어발기고 싶은 심정이야... 그런데 감히 네가 내 앞에 나타나? 게다가 계약까지 망치려 들어?“상간녀”라는 단어에 한유라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이제까지 가만히 있던 소은정이 한발 앞으로 다가섰다.지채영, 민하준 부부를 훑어보던 소은정이 입을 열었다.“지채영 씨라고 했나요? 말씀은 바로 하셔야죠. 먼저 총각 행세를 한 건 그쪽 남편이에요. 그리고 누가 누굴한테 돈을 줘요... 주제를 알아야지. 그리고 애초에 그쪽 남편이 유라한테 매달리지만 않았어도 유라가 넘어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기르던 개가 사람을 물었다면 당연히 목줄을 제대로 못잡은 주인 탓이겠죠. 하필 그곳을 지나던 행인 탓이라고 볼 순 없잖아요?”소은정의 말에 지채영이 표정이 일그러졌다.회의장에 자리한 사람들 역시 대충 상황을 눈치채고는 관심없는 척하면서 귀를 바싹 세웠다.말문이 막힌 지채영의 모습에 피식 미소를 짓던 소은정은 어딘가에서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그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지만 최대한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다.한편, 한유라도 도발을 이어갔다.“그러니까요. 나 좋다는 남자가 한 두 명인 줄 알아요? 쓰레기 같은 민하준 줘도 안
하지만 민하준은 지채영이 소리를 치든 말든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다. 민하준의 눈동자에 비친 건 한유라뿐이었으니까.발버둥치는 한유라를 간단히 제압한 민하준이 그녀를 끌고 나가고 표정이 굳은 소은정이 바로 그 뒤를 따라나섰다.이미 한유라를 감금까지 한 전적이 있는 민하준이다.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박수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 비서, 민 대표 따라가봐요. 그리고 계약에 관한 건 무기한 연장입니다.”구석 자리에 앉아있던 이한석은 갑작스러운 호명에 흠칫했지만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네, 대표님.”소은정 대표 대신 가라는 거겠지?무슨 수작인가 싶어 소은정이 의아하던 그때, 박수혁의 입에서 드디어 그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은정아...”익숙한 중저음이 소은정의 귀를 간지럽혔다.“알려줘서 고마워. 이대로 계약 진행했었다면 큰 손해를 봤을 거야.”“감사 인사는 유라한테 해. 유라가 제공한 정보였으니까.”계약 무기한 연장이라는 말이란 곧 계약 파기와 마찬가지... 지채영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박 대표님, 저 미친 여자의 말을 믿으시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모함이에요!”하지만 고개를 돌린 박수혁의 날카로운 시선에 곧 깨갱하며 머리를 숙였다.“어쨌든 의문이 제기된 이상 조사는 해봐야 할 것 같군요. 뭐든 확실한 게 좋으니까요.”말을 마친 박수혁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바로 소은정에게로 다가갔다.“고맙다는 의미에서 밥이라도 사고 싶은데.”미간을 찌푸린 소은정이 바로 거절하려던 그때 박수혁이 한 마디 덧붙였다.“한유라 씨도 같이.”이 남자... 뭔가 이상한데? 왜 이렇게 무덤덤한 거야?소은정은 박수혁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 보았지만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어제까지만 해도 화가 잔뜩 난 모습이던 박수혁이 하루만에 소은정이 연애를 받아들였을 리가 없다.그런데 덤덤한 표정에 밥까지 사겠다니...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이럴 때는
박수혁은 소은정의 옆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저 아름다운 얼굴이 이제 그의 것이 아니다.마음 속 깊은 곳에서 무시무시한 생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가질 수 없다면... 망쳐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한편, 화풀이를 끝낸 듯한 한유라가 그녀를 향해 손을 젓고 소은정은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던 그때 민하준이 어두운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유라야, 결혼했다는 거 말고 너한테 숨긴 거 없어. 사실 오늘 오후에 법원으로 가기로 약속까지 했었어. 그러니까 기...”“기다려줘”라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한유라가 코웃음을 쳤다.“두 사람 아주 천생연분이던데 왜 이혼을 해? 난 그냥 길 가다 똥 밟았다 생각하려고.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마. 그땐 정말 죽여버릴 거니까.”지금까지 가벼운 연애를 이어가던 한유라에게 민하준은 처음 그녀의 마음속에 한 발 내디딘 남자였다.이 사람이라면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유부남이라니...내가 아무리 철이 없어도 이건 아니야. 민하준, 당신 진짜 나한테 선 넘은 거야.마지막까지 악담을 퍼부은 한유라가 소은정을 끌고 사라지고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한석이 바로 박수혁 옆으로 다가갔다.이렇게 된 이상 계약은 무리겠어.돌아가는 길,여전히 씩씩대는 한유라를 바라보던 소은정이 피식 웃었다.“아직도 화가 덜 풀렸어?”“내가 지금 화 안 나게 생겼어?”“박수혁이 계약은 무기한 연장이라고 말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아마 이번 계약은 물 건너 가는 거겠지. 그리고 박수혁이라면... 아마 민하준을 두 번 다시 상대하지 않을 거야.”그제야 표정이 살짝 풀린 한유라가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돌렸다.“그런데 박수혁 말이야. 그렇게 큰 계약도 아닌데 왜 직접 온 걸까?”소름 끼치는 인연에 한유라가 고래를 절레절레 저었다.“어쩔 수 없지 뭐. 이 바닥에서 일하려면 어차피 오며 가며 마주치게 돼있잖아. 함께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있고. 익숙해져야지 뭐. 뭐 민하준이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