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에서 같은 컬러 드레스를 입는 건 서로가 난처해질 수 있는 애매한 상황이다.게다가 신한그룹 딸 신지연은 오늘 파티의 주인공, 자칫하면 소은정이 시선을 빼앗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이라는 소문이 돌 수도 있었다.하지만 우연히 신지연과 소은정이 먼저 마주쳤고 윤시라의 얄팍한 수단을 바로 눈치챈 신지연이 화를 내고 있는 상황이었다.윤시라, 정말 멍청하다니까. 저런 머리로 어떻게 신한그룹 한국지사 지사장 후보였는지 이해가 안 될 지경이었다.소은정이 고개를 젓던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고 억울한 듯한 표정으로 훌쩍이는 윤시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전 정말 좋은 마음에서...”윤시라 역시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은정을 발견했다.하, 다 들은 거야?하지만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신지연이 던진 화병이 윤시라의 등을 명중했다. 그리고 곧 신지연이 달려들더니 윤시라의 머리채를 콱 낚아챘다.어우, 저쪽도 한 성격 하네.“하, 지금 아빠한테 고자질하러 가는 거야? 처음 만날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감히 우리 아빠를 꼬셔?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 멍투성이인 얼굴로도 우리 아빠 마음에 들 수 있을까?”신지연은 욕설을 내뱉으며 윤시라의 배를 걷어찼다.머리채를 잡힌 윤시라가 발버둥을 쳤지만 민첩성도 힘 세기도 신지연에게 확연히 밀리는 상황이라 아무 의미없는 반항일 뿐이었다.윤시라의 처참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일방적인 구타는 한동안 이어졌다. 잠시 후 그제야 분이 풀리는지 신지연은 윤시라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손을 툭툭 털었다.그리고 다음 순간 고개를 든 신지연 역시 소은정의 존재를 발견했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은 표정으로 소은정을 스쳐지났다.나름 대형사고를 치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모습에 소은정도 혀를 내둘렀다.방안이 다시 조용해지고 소은정은 바닥에 쓰러진 채 신음을 내뱉는 윤시라에게 다가갔다.“솔직히 일부러 보려고 그런 건 아닌데...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뭔데요?”“상간녀 노릇도 중독되나 봐요?”그녀가 아는 바에 따르면 신한그룹 회장
누군가 흰 가운 뒤편에 프린팅된 “A시 정신병원”이라는 글자를 확인하고 소리쳤다.술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묘한 미소를 짓던 소은정은 덤덤한 표정으로 잔에 든 와인을 전부 마셔버렸다. 그 동안 묵혀뒀던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윤시라, 내가 정말 그렇게 착한 사람인 줄 알았어? 날 공격하는 사람에게 구급차까지 불러줄만큼? 너에게 가장 어울리는 병원이니까 잘 지내.그리고 앞뒤 가리지 않고 윤시라를 때린 신지연이 부럽기도 했고 대단하게도 느껴졌다.똑똑하고... 바로 손부터 댈만큼 결단력도 있는 게... 마음에 든단 말이야.그녀의 옆에 서 있던 전동하가 주위의 눈치를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은정 씨가 한 거예요?”“아니요. 내가 때렸다면 안 보이는 곳으로 상처도 안 남게 때렸을 거예요.”소은정의 해명에 전동하가 흠칫하더니 곧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워낙 매를 부르는 스타일이잖아요. 아마 벼르고 있는 사람이 많았겠죠. 은정 씨 대신 복수해준 거네요?”전동하의 말에 소은정이 눈을 흘겼다.“나 그렇게 쪼잔한 사람 아니거든요? 윤시라한테 당한 거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았다고요.”“그래요. 내가 쪼잔했네요.”한편, 파티장의 다른 한 구석, 한 남자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티격태격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저 두 사람 같이 온 겁니까?”레이저라도 쏠 듯한 박수혁의 눈빛에 침을 꿀꺽 삼킨 신한그룹 회장은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아니요. 소은정 대표가 먼저 도착했고 전동하 대표는 한참 뒤에 도착했습니다. 아마 우연히 마주친 것 같은데요.”그제야 부시혁의 표정이 살짝 풀렸지만 기분은 여전히 우울했다.이한석의 정보가 틀린 적은 한번도 없었으니까.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인지 일거수 일투족이 그를 향한 도발로 보일 정도였다.가슴이 답답해진 박수혁이 한숨을 내쉬고 옆에 서 있던 강서진이 미소를 지었다.“오고 가며 만나는 사람들이야 뭐 거기서 거기지 뭐. 우연히 만날 수도 있는 거잖아?”하지
덤덤한 말투였지만 괜히 두 사람이 친한 사이인 것처럼 표현하는 박수혁의 모습에 소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역시나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남자친구인 전동하.고개를 들어 힐끗 전동하의 얼굴을 보니 항상 미소를 짓고 있던 사람이 지금만큼은 잔뜩 굳은 표정이었다.한편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박수혁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역시...박수혁의 질문에 소은정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선을 그었다.“아, 의사선생님이 입원하는 동안에는 되도록 휴대폰 보지 말라고 하셔서. 퇴원하고 나서는 워낙 바쁘다 보니까 답장하는 거 깜박했네. 미안해.”말도 안 되는 핑계라는 걸 알면서도 박수혁은 그녀의 말을 믿고 싶었다.“아니야. 오늘 보니까 거동에도 문제가 없어 보이고. 마음이 놓이네.”이때 마침 음악이 울리고 박수혁의 눈이 번뜩이더니 소은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같이 춤이라도 출래?”박수혁이 내민 손을 바라보던 소은정이 싱긋 웃었다.저번에 같이 춤을 췄던 게 언제였더라... 아, 이혼하고나서 얼마 안 됐을 때 만난 파티에서여지. 그때 박수혁은 아직 내가 SC그룹 외동딸인 걸 몰랐을 때였고...그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수많은 일이 일어났고 주위의 수많은 상황이 바뀌었다. 마치 혼자였던 그녀에게 다른 사람이 생긴 것처럼 말이다.그녀가 망설이던 그때, 또 다른 희고 긴 손이 소은정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전동하가 미소를 지었다.“나도 은정 씨랑 춤 추고 싶은데요.”이렇게 눈 앞에서 박수혁한테 은정 씨를 빼앗길 순 없어. 게다가 은정 씨 남자친구는 나라고.순간 박수혁의 표정이 차갑게 굳고 바로 전동하를 노려보았다.“순서는 지키시죠?”“워낙 드문 기회라서 저도 놓치고 싶지 않은데요?”은정 씨가 물건도 아니고... 어차피 은정 씨 선택에 달린 일이야. 순서가 뭐가 중요해.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소은정은 단호하게 전동하를 선택했다. 그녀와 전동하의 손이 맞닿으려던 그때, 누군가 소은정의 손목을 잡았다.역시나 박수혁이었다.미간을 찌푸린 소은정이 박수혁의
순간 공기의 흐름이 멎는 듯했다. 남자친구라는 네 글자가 비수가 되어 박수혁의 가슴에 꽂혔다.소은정의 인정에 자신감을 되찾은 전동하가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네. 영광스럽게도 제가 은정 씨 남자친구가 됐네요. 그러니까 앞으로 선 좀 지켜주실래요?”소은정의 남자친구로서 박수혁에게 경고를 날리다니. 짜릿한 기분에 전동하는 미소를 지었지만 박수혁은 피가 거꾸로 솓는 기분이었다.심장이 피투성이가 되는 기분이 들고 눈이 새빨개질 정도로 화가 치밀었지만 박수혁은 주먹을 꽉 쥔 채 화를 참고 또 참았다.모두의 앞에서 소은정이 난처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고 정말 그가 화내는 모습을 봤을 때 겁 먹고 도망칠까 봐 걱정돼서였다.깊은 한숨을 내쉰 박수혁이 목소리를 낮추었다.“나 사고 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따라나오는 게 좋을 거야.”말을 마친 박수혁은 바로 돌아서서 파티장 뒤편의 작은 정원으로 향했다. 그늘 아래에 숨은 박수혁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가늠도 가지 않았다.하, 골치 아프게 생겼네. 여기서 더 고집을 부렸다간 이 파티장을 뒤집어 엎을지도 몰라... 저 성질머리에... 충분히 가능하지. 박수혁은 자신의 행동에 따르는 대가 따위 생각지 않는 사람이니까.박수혁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지만 그 “대가”에 자신과 전동하까지 휘말리게 될까 봐 골치가 아팠다.“제가 갈게요. 제가 박수혁 대표한테 확실하게 말하고 올게요.”전동하의 말에 소은정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제가 직접 갈게요. 안 그럼 계속 귀찮게 굴 거예요.”왠지 오래 걸릴 것만 같은 느낌에 소은정은 야무지게 코트까지 챙겨입고 밖으로 나갔다.시끌벅적한 파티장과 달리 조용한 정원은 마치 다른 세상의 공간처럼 느껴졌다.“이런 협박이 통하는 것도 마지막이야. 사고? 그래. 나도 내가 어떻게 사고를 치는지 보여줄게.”내가 당신한테 타협하는 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귀찮아서야. 박수혁, 네 주제를 알아.소은정의 말에 움찔하던 박수혁이 돌아서더니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
우연하게 소은정을 두 번 구한 것 말고는 자신이 전동하에게 뒤떨어지는 게 뭔지 박수혁은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하지만 생명의 은인에게 느끼는 고마움과 이성간의 사랑은 분명 다른 것. 박수혁은 소은정이 감격스러움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박수혁의 억지에 소은정은 잠깐 침묵하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동하 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당신보다 내가 잘 알아. 그리고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설명해 주고 싶지 않아.”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마이크의 존재는 전동하에게 오점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소은정은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오히려 진실을 알고 있기에 두 사람이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손끝이 저려오는 느낌에 박수혁은 주먹을 폈다 쥐었다를 반복했다.“나도 널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어. 그러니까 은정아...”애원에 가까운 말투에 소은정의 눈동자도 살짝 흔들렸지만 곧 다시 이성을 되찾았다.“3년이야. 우리가 같이 살았던 시간이. 우리가 서로 안 맞다는 걸 알기엔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러니까 서로 시간낭비 하지 말자. 앞으로 그저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지내는 거야.”소은정이 말을 마치자 어느새 다가와 기다리고 있던 전동하가 한발 다가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기사 도착했대요. 우린 이만 가죠?”박수혁의 매서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소은정은 애써 무시했다.“그럼 난 먼저 갈게.”“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박수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쓸쓸한 분위기속에 묘한 서늘함까지 느껴졌다.소은정은 미간을 찌푸린 채 발걸음을 옮겼지만 전동하는 이대로 물러나는 게 왠지 억울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당당하게 미소를 지었다.“아니요. 영원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목숨을 다해 은정 씨를 지킬 거야. 영원히 후회하지 않도록 평생 사랑해 줄 거야.말을 마친 전동하는 바로 소은정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소은정을 먼저 차로 에스코트한 뒤 다른 쪽 문으로 차에 탄 전동하가 왠지 모르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은정
그제야 전동하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비록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한 적이 없지만 드디어 그를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기뻤다.그래.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박수혁은 이제 중요하지 않아. 박수혁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은정 씨 마음은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가는 내내 전동하는 소은정의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이런 스킨십이 어색했지만 싫지 많은 기분에 소은정도 손을 빼지 않았다.소은정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한 전동하가 미소를 지었다.“잘 자요.”어차피 위층에 살고 있으니 언제라도 내려올 수 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네. 잘 자요.”하지만 인사를 마친 뒤에도 그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먼저 가요.”잠깐 동안의 침묵 끝에 소은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은정 씨 먼저 들어가요.”......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소은정의 얼굴이 달아오를 무렵, 그녀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안도의 한숨을 내쉰 소은정이 도망 치 듯 자리를 떴다.문이 닫힌 뒤에도 한참 뒤에야 전동하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한편, 휴대폰 액정을 확인한 소은정이 미소를 지었다.유라네?“여보세요?”하지만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한유라의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소은정의 미소는 어색하게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은정아, 내... 내가 상간녀가 되어버렸어. 민하준 이 자식 유부남이었다고!”당황한 소은정이 자세히 묻기도 전에 곧 짜증 가득한 민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누구한테 전화하는 거야? 내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잖아!”“은정아, 얼른 나 좀 데리러 와줘. 나 지금...”하지만 한유라가 주소를 말하기도 전에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통화는 종료되었다.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들려오는 건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알림음뿐이었다.소은정은 망설이지 않고 다시 집을 나섰다.민하준 그 자식... 유라를 감금이라도 한 거야?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며 소은정은 김하
소은정이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조금 있다가 제 친구랑 경호원들이 도착할 거예요. 막지 말고 바로 들여보내세요.”말을 마친 소은정은 바로 빌라 단지를 향해 엑셀을 밟았다.차에서 내린 소은정의 시야에 허둥지둥 달려오는 김하늘의 모습이 보였다.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저 멀리서 검은색 차량 세 대가 다가왔다.곧이어 검은 정장차림에 굳은 표정의 장정 십 여명이 차에서 내렸다.전부 소씨 일가 소유의 경호원들이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차에서 내린 소은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가자...”우르르 몰려든 경호원들의 모습에 김하늘은 흠칫 놀랐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여긴 민하준 집이야. 우리 두 사람만 움직이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당연한 거겠지.한편 소은정은 소은호가 직접 온 걸 보고 의아하긴 했지만 유라가 위험하다는 생각에 별 의심없이 발걸음을 옮겼다.민하준의 집 앞.김하늘이 앞장서서 문을 두드렸다.잠시 후,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작게 문틈을 열었다.“누구세요...”“유라 안에 있어요?”역시나 민하준이 미리 단단히 주의를 주었는지 유라라는 이름에 흠칫하긴 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아, 아니요. 유라라니? 그런 사람 모르는데요...”하, 거짓말을 하시겠다?집안일을 담당하는 아주머니 따위와 말싸움을 할 여유가 없었던 김하늘은 바로 문을 홱 잡아당겨 신발도 벗지 않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유라야, 안에 있어?”하지만 김하늘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흉악한 인상의 남자 두 명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젠장, 이쪽에도 경호원을 두고 있었잖아? 나름 준비 많이 했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소은호를 선두로 소씨 일가 쪽의 경호원들이 우르르 집안으로 들어왔다.김하늘의 앞을 막아섰던 경호원들 역시 이런 상황은 생각지 못한 듯 흠칫 뒤로 물러섰다.마지막으로 집으로 들어온 소은정이 저택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쏘아보았다.
민하준 저택에서 청소와 요리를 담당하고 있는 장정자가 창백해진 얼굴로 대답했다.“대표님, 집에 손님이 오셨어요...”소은정은 곧바로 아주머니의 떨리는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챘다.“민하준, 지금 당장 집으로 와...”이 순간만큼은 예의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는 소은정이었다.재벌 2세로서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안면을 텄지만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볼 꼴 못 볼 꼴 다보며 자란 사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발벗고 나서준 친구들이니 소은정에게는 더 각별할 수 밖에 없었다.말을 마친 소은정이 휴대폰을 거칠게 내팽개쳤다.방안에서 한유라의 힘없는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마음이 급해진 소은정이 몸으로 문을 부숴버리려고 했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불과했다.소은호의 손짓에 따라 경호원들도 달라붙었지만 여전히 문은 굳게 닫힌 상태였다.“대표님, 특수제작된 문인 것 같습니다. 억지로 열려고 하면 아예 잠겨버릴 겁니다.”경호원의 말에 소은정의 차가운 눈초리가 장정자에게로 향했다.“열쇠 당장 내놔요...”“열... 열쇠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소은정의 질문에 장정자는 고개를 저었지만 손은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움켜쥐기 시작했다.항상 차분하던 김하늘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요! 당장 내놓으라고요. 안 그럼 가만히 안 있을 거니까.”“무...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세요.”장정자의 얼굴이 공포로 질리고 차가운 미소를 짓던 소은정이 한발 한발 다가섰다.뒷걸음질 치던 장정자가 곧 벽에 부딪히고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불법 감금은 범죄인 거 알죠? 남은 여생 평생 감옥에서 썩게 해줄까요?”소은호의 눈짓과 함께 경호원이 장정자의 팔을 뒤로 제압했다.으아악!!!두 경호원 역시 움직임이 완벽하게 제압당한 채 멍든 눈으로 그들을 노려볼 뿐이었다.경호원은 거친 손길로 장정자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소은정에게 건넸다.열쇠를 손에 넣은 소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