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하준 저택에서 청소와 요리를 담당하고 있는 장정자가 창백해진 얼굴로 대답했다.“대표님, 집에 손님이 오셨어요...”소은정은 곧바로 아주머니의 떨리는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챘다.“민하준, 지금 당장 집으로 와...”이 순간만큼은 예의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는 소은정이었다.재벌 2세로서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안면을 텄지만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볼 꼴 못 볼 꼴 다보며 자란 사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발벗고 나서준 친구들이니 소은정에게는 더 각별할 수 밖에 없었다.말을 마친 소은정이 휴대폰을 거칠게 내팽개쳤다.방안에서 한유라의 힘없는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마음이 급해진 소은정이 몸으로 문을 부숴버리려고 했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불과했다.소은호의 손짓에 따라 경호원들도 달라붙었지만 여전히 문은 굳게 닫힌 상태였다.“대표님, 특수제작된 문인 것 같습니다. 억지로 열려고 하면 아예 잠겨버릴 겁니다.”경호원의 말에 소은정의 차가운 눈초리가 장정자에게로 향했다.“열쇠 당장 내놔요...”“열... 열쇠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소은정의 질문에 장정자는 고개를 저었지만 손은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움켜쥐기 시작했다.항상 차분하던 김하늘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요! 당장 내놓으라고요. 안 그럼 가만히 안 있을 거니까.”“무...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세요.”장정자의 얼굴이 공포로 질리고 차가운 미소를 짓던 소은정이 한발 한발 다가섰다.뒷걸음질 치던 장정자가 곧 벽에 부딪히고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불법 감금은 범죄인 거 알죠? 남은 여생 평생 감옥에서 썩게 해줄까요?”소은호의 눈짓과 함께 경호원이 장정자의 팔을 뒤로 제압했다.으아악!!!두 경호원 역시 움직임이 완벽하게 제압당한 채 멍든 눈으로 그들을 노려볼 뿐이었다.경호원은 거친 손길로 장정자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소은정에게 건넸다.열쇠를 손에 넣은 소
소은정의 말에 미간을 찌푸린 채 다가온 소은호는 한유라의 팔에 생긴 주사자국을 발견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그 남자가... 너한테 약이라도 쓴 거야?”클럽 같은 곳에서 반항하는 여성을 마약류 약품으로 제압하는 건 변태 같은 자식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했다.정신은 멀쩡하지만 몸에 힘이 풀려 아무런 반항도 못하게 되는 그런 약이었다.소은호의 질문에 한유라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차가운 눈물이 한유라의 눈가에서 흘러내렸다.충격적인 소식에 모두가 얼어붙고 한유라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그딴 자식을 남자친구라고 생각했던 내가 등신이지...소은호가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유라는 내가 안을 테니까 은정아, 넌 먼저 나가있어.”민하준이 약까지 썼다는 말에 분노로 부들거리던 소은정 역시 심호흡을 하며 이성을 되찾으려 애섰다.소은정이 한유라의 어깨를 쓰다듬었다.“유라야, 걱정하지 마. 이제 괜찮아. 어서 여기서 나가자.”그들이 집까지 쳐들어온 걸 알았으니 민하준도 곧 집으로 돌아올 터, 그쪽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온다면 김하늘, 소은호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다.마약류 약품까지 쓸 정도로 미친 자식이라면 더 미친 짓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을 테니까.소은정은 민하준의 서늘한 인상을 다시 떠올렸다.누가 봐도 섬뜩한 얼굴이었는데... 유라가 너무 순진했어. 그런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다니.하지만 한유라가 아무리 경솔했다 해도 민하준이 저지른 일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었다.한유라가 빨갛게 부어오른 눈을 깜박였다.“얼른 가...”소은호가 한유라를 번쩍 안아들고 거실로 나선 그때 현관에서 다급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민하준이 도착한 것이었다.하, 빨리도 왔네.민하준의 등장에 장정자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그의 발치로 기어갔다.“대표님, 저 사람들이 유라 아가씨를 데려가려고 해요. 제 팔도 이렇게 만들고...”엉망이 된 집안과 바닥에 제압당한 두 보디가드를 차가운 얼굴로 훑어보던 민하준의 시선
순간 민하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행동이 멈칫하자 주위에 있던 보디가드들은 그 허점을 놓치지 않고 바로 달려들었다.4, 5명의 보디가드들이 민하준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민하준은 분노로 붉게 물든 눈동자로 한유라를 노려 보았다.“내가 와이프랑은 이혼할 거라고 했잖아. 그 새를 못 기다리고 이 사달을 일으켜?!”한유라 역시 쉬어버린 목소리로 외쳤다.“이혼은 개뿔! 내가 바보였어! 너 같은 자식한테 다 속고!! 가서 네 와이프랑 평생 오손도손 같이 살아! 너 따위가 감히 날 넘봐?”민하준의 진짜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하고 원망스러웠다.지금이라도 달려들어 민하준의 뻔뻔한 낯가죽을 벗겨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소은호는 증오로 가득한 눈빛의 민하준을 힐끗 바라본 뒤 성큼성큼 집을 나섰다.우르르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우르르 사라지고 커다란 저택이 왠지 더 휑하게 느껴졌다.장정자가 덜렁거리는 팔을 다른 팔로 붙들고 눈물바람으로 다가왔다.“대표님...”“누구 마음대로 문을 열어줘! 누구도 들여보지 말라고 했잖아요.”굳은 표정과 달리 민하준의 목소리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깊은 심연같은 민하준의 눈동자를 마주한 장정자는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자연스럽게 눈을 피한 장정자를 향해 민하준이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거짓말 할 생각은 하지 말아요. 남은 팔 한쪽도 잃고 싶지 않으면...”지금까지 수많은 부잣집에서 가사 아주머니로 일했지만 부자들의 잔인함을 이렇게 피부로 느낀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남은 팔까지 부러트리겠다고? 그건 안 돼...잠깐 망설이던 장정자의 눈에서 눈물이 와르륵 쏟아졌다.“사모님께서 시키신 거예요. 유라 아가씨와 결혼하시면 전 결국 일자리를 잃게 될 거라고... 제가 사모님을 도와드리면 계속 이 집에서 일하게 해주시고 월급도 두 배로 올려주시고 제 아들한테도 직장을 소캐해 주시겠다고 해서... 사모님이 부른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어요...”“사모님이 부른 사
김하늘의 말에 소은정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아, 성진그룹이라... 그집 딸 허하진이랑 엮었던 적이 있었지. 뭐 결국 나한테 한방 먹었지만. 성진그룹... 협력하던 파트너들도 다 도망가고 지금은 겨우 이름 정도만 남아있는 상태일 텐데...“그럼 민하준이라는 이름도 가명인 거야? 아버지 복수를 하려고 이름까지 바꾸고 우리한테 접근한 거고?”소은정의 질문에 김하늘이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건 아닐 거야. 애초에 허광현 대표와는 별로 접점도 없었어. 그리고 평생 사생아라고 손가락질 받으면서 살아서... 아마 허광현 대표한테 좋은 감정은 없을 거야. 민하준이라는 이름도 성도 전부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거야. 어머니 쪽에서 운영하던 민연그룹... 사실 파산직전이었거든? 그런데 민하준이 대표로 취임한 뒤로 최근 몇 년 동안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성진그룹 허광현 회장의 사생아라... 멍청한 딸보다는 사생아가 훨씬 더 낫네.잠깐 망설이던 김하늘이 한숨을 쉬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민하준 와이프는 십 년 전에 부동산으로 벼락부자가 된 집안 딸이래. 아마 돈 때문에 억지로 한 결혼인 것 같아. 부부 사이도 안 좋대. 1년에 겨우 얼굴 한 번 볼까 말까라던데? 하, 우리 유라...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어떻게 그딴 남자랑...”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친구들 중에서 한유라는 가장 유흥을 즐기는 타입이었지만 선은 확실히 지키는 사람이었다.게다가 평소에 바람을 피우는 남녀들을 가장 중오하던 그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간녀가 되다니...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싶어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잠시 후, 전동하가 부랴부랴 달려왔다.기온이 많이 떨어졌는지 그의 몸에서 날카로운 한기가 느껴졌다.전동하가 에르메스 토트백을 건넸다.“추울까 봐 옷가지 좀 챙겼어요.”남자 옷이잖아? 동하 씨 옷인가?“워낙 급하게 나와서... 대충 내 옷만 챙겼어요. 일단 입어요.”파티장에서 집으로 들어갔다 옷 갈아입을 새도 없이 부랴부랴 집을 나선터라 소은정은 여전히 드
소은정의 질문에 의사가 미소를 지었다.“별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체내에 주입된 약물은 8-9 시간이 지난 뒤에야 체외로 배출될 거예요. 그 전까지는 몸에 힘이 잘 안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충격 때문인지 발열 증상이 있으시더군요. 해열제 수액 놔드렸으니 아마 곧 내릴 겁니다.”의사의 설명에 소은정도 김하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금이라도 늦었으면 큰일날 뻔했네...의사가 밖으로 나가고 두 사람은 잠에 든 한유라를 힐끗 바라보았다.민하준 꿈을 꾸는 건지 이를 빠득빠득 갈며 “쓰레기”, “죽어버려” 같은 욕설을 내뱉는 한유라의 모습에 두 사람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그래도 씩씩해 보여서좋네.30분 뒤, 전동하가 다시 돌아왔다.포장백에 프린팅 된 로고를 확인한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긴 평소에 예약하기도 힘든 레스토랑이잖아. 이 밤까지 영업할 리도 없고...소은정이 묻기 전에 눈썰미 좋은 김하늘이 먼저 물었다.“이 레스토랑 미리 예약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포장해 오신 거예요?”“오늘 다들 고생 많았잖아요. 환자도 있고 맛있는 거 든든하게 먹어야죠. 그리고 레스토랑 사장이 제 친구라서 특별히 부탁 좀 했죠.”포장백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전동하가 말을 이어갔다.“이건 유라 씨 깨어나면 드리고 이건 두 사람 먹어요.”하, 정말 자상하네... 은정이, 남자 하나는 잘 잡았어.젓가락을 포장을 뜯어 손에 쥐어주기까지 하는 전동하의 모습에 소은정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휴, 둘이서 있을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하늘이도 옆에 있는데... 아주 잘 하면 입에 넣어주겠어?소은정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김하늘을 불렀다.“얼른 와. 따뜻할 때 먹어야지.”가까이 다가온 김하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너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너도 열 나는 거야?”그녀의 말에 전동하가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고 소은정은 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몰래 김하늘을 흘겨보았다.“아니거든! 병실이 좀 덥네! 얼른
한유라의 목소리에 소은정과 김하늘이 벌떡 일어섰다.한유라의 목소리에 소은정이 잠이 깨자 순간 전동하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곧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아니다. 환자잖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후다닥 다가간 소은정은 한유라의 얼굴을 살폈다. 창백한 얼굴에 생기가 돌고 퀭하던 눈동자도 반짝이고 있었다.오랫 동안 밥을 먹지 않아서인지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없었지만 말이다.“깼어? 몸은 좀 어때?”전에 일어났던 일들이 떠오른 듯 한유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나 배고파...”소은정과 김하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전동하가 바로 미리 준비한 음식을 건넸다.침대 위에 간이 책상을 올리고 침대 높이를 조절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은정과 김하늘을 바라보던 하유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은호 오빠는... 지금 어딨어?”한유라의 말에 소은정이 흠칫하고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오빠가 날 구해 준 거잖아. 직접 얼굴 보고 고맙다고 하고 싶어.”소은호에 대한 마음은 이미 접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제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죽어버린 사랑의 마음이 다시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를 지켜준 것도 처음, 안은 것도 처음, 그렇게 소은호와 가까이 있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혹시나... 혹시나 은호 오빠도 날 좋아하는 게 아닐까?단 1%의 가능성뿐이라 해도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기대 가득한 한유라의 눈빛에 소은정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오빠는 회사 갔지. 아마 오늘 오지 않을까?”“너, 앞으로 남자 제대로 봐가면서 만나! 민하준 그 사람 딱 봐도 인상이 별로더구만. 뭐? 외모로 사람 판단하지 말라고? 야, 관상도 과학이야!”김하늘의 꾸짖음에 한유라가 고개를 숙였다.“그래. 내가 바보 같았던 거 맞아. 나한테 보여줬던 거 전부 다 거짓말이었어... 우리가 산에 갇혔을 때도 와이프한테 들킬까 봐 일부러 전세기 말고 다른 방법으로 구한 거였대. 하... 난 그것도 모르고...”잔뜩 시무룩해진 한유라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김하늘이 그녀
마지막으로 소은정을 향해 미소를 지어준 뒤 전동하가 자리를 뜨고 소은정은 붉게 물든 얼굴을 어떻게든 숨기려고 고개를 숙였다.쳇, 뭐야...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한유라와 김하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전동하 대표...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박력있네. 아주 며칠 뒤면 청접장이라도 돌리겠어?”소은정이 김하늘을 흘겨보았다.“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리고 지금은 유라 일을 상의하는 자리잖아! 화제 돌리지 말라고!”그녀의 말에 한유라가 웃음을 터트렸다.“하이고... 야, 언제는 돈만 벌고 싶다면서! 연애는 안 할 거라면서.”“당연히 일이 더 중요하지. 사랑은... 맛있는 요리의 데코 같은 존재랄까?”“나쁜 여자!”김하늘, 한유라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치고 소은정이 어깨를 으쓱했다.두 사람이 한유라가 도시락을 싹싹 비우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때, 잠깐 나가서 통화를 하던 김하늘이 굳은 표정으로 다시 병실로 들어왔다.“유라야, 나 지금 회사 들어가봐야 할 것 같아. 너 사실 이제 그만 퇴원해도 되지 않아?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까?”김하늘의 제안에 한유라가 세게 고개를 저었다.“안 돼! 우리 엄마한테 무조건 이 모습 보여줘야 해. 안 그럼 나 정말 엄마한테 맞아죽을지도 몰라!”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김하늘이 소은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알아서 해. 그럼 나 간다?”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이고 김하늘이 병실을 나섰다.그리고 잠시 후, 소은호가 병실 문을 열었다.아침에 소은정은 한유라가 깨어났다고 시간 나면 병실로 와보라고 미리 언질을 준 상태였다.엄마 핑계를 대긴 했지만 사실은 소은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소은호를 본 순간 눈동자를 반짝이던 한유라의 미소가 곧 어색하게 굳었다.“오빠, 시연 언니 왔어?”시연 언니랑 같이 올 줄은 몰랐네...당황한 건 소은정도 마찬가지였지만 최대한 덤덤한 표정을 지어 보았다.고개를 살짝 끄덕인 소은호가 물었다.“몸은 좀 어때?”기다리고 기다렸던 목소리지만
고개를 끄덕인 소은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그럼 푹 쉬어. 그 남자에 관한 건... 도움 필요한 거 있으면 은정이한테 말하고.”입술을 꼭 깨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유라가 번쩍 머리를 들었다.“오빠, 도와줘서 고마워요.”“아니야. 넌 은정이 친구기도 하고. 집안끼리 비즈니스적으로 엮인 것도 많고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거지.”순간, 한유라의 눈동자에 담겼던 마지막 빛까지 사라지고 말았다.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이려 했지만 아무리를 애를 써도 미소를 지을 수 없어 결국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날 구하러 와준 수많은 이유 중에... 나라서... 내가 걱정돼서 같은 건 없는 거네.하긴... 내가 무슨 자격으로 오빠한테 그런 걸 바라겠어.“오빠, 시연 언니. 얼른 가서 볼일 봐. 난 유라 집으로 데려다주려고.”어차피 별로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던 소은호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한시연의 손을 잡은 채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는 순간, 한시연이 고개를 돌려 한유라를 힐끗 바라보았다.다행히 별 생각없이 싱긋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에 소은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두 사람이 병실을 떠나고 한유라는 참고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어깨가 파르르 떨렸지만 울음소리는 내지 않았다. 한유라의 길고 긴 짝사랑이 완벽한 끝나는 순간이었다.“그냥 소리내서 울어. 다 울고 나면 집으로 가는 거야.”고개를 든 한유라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물들어있었다.“나... 너무 엉망인 사람인가봐. 그래서 오빠가... 날 봐주지 않은 거겠지? 눈길 조차 제대로 주지 않은 거겠지?”“그럴 리가...”한유라가 한숨을 내쉬었다.“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제대로 말도 못 붙이면서 아무 감정도 없는 남자들이랑 놀아나는 게 나잖아. 내가 생각해도 난 엉망이야... 그래, 내 착각이었어. 이 세상에서 은호 오빠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시연 선배뿐이야. 이제 정말... 마음을 접을 수 있을 것 같아.”그래, 내가 졌어... 오빠가 어제 나한테 와준 건 내가 은정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