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야 전동하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비록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한 적이 없지만 드디어 그를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기뻤다.그래.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박수혁은 이제 중요하지 않아. 박수혁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은정 씨 마음은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가는 내내 전동하는 소은정의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이런 스킨십이 어색했지만 싫지 많은 기분에 소은정도 손을 빼지 않았다.소은정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한 전동하가 미소를 지었다.“잘 자요.”어차피 위층에 살고 있으니 언제라도 내려올 수 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네. 잘 자요.”하지만 인사를 마친 뒤에도 그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먼저 가요.”잠깐 동안의 침묵 끝에 소은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은정 씨 먼저 들어가요.”......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소은정의 얼굴이 달아오를 무렵, 그녀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안도의 한숨을 내쉰 소은정이 도망 치 듯 자리를 떴다.문이 닫힌 뒤에도 한참 뒤에야 전동하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한편, 휴대폰 액정을 확인한 소은정이 미소를 지었다.유라네?“여보세요?”하지만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한유라의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소은정의 미소는 어색하게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은정아, 내... 내가 상간녀가 되어버렸어. 민하준 이 자식 유부남이었다고!”당황한 소은정이 자세히 묻기도 전에 곧 짜증 가득한 민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누구한테 전화하는 거야? 내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잖아!”“은정아, 얼른 나 좀 데리러 와줘. 나 지금...”하지만 한유라가 주소를 말하기도 전에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통화는 종료되었다.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들려오는 건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알림음뿐이었다.소은정은 망설이지 않고 다시 집을 나섰다.민하준 그 자식... 유라를 감금이라도 한 거야?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며 소은정은 김하
소은정이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조금 있다가 제 친구랑 경호원들이 도착할 거예요. 막지 말고 바로 들여보내세요.”말을 마친 소은정은 바로 빌라 단지를 향해 엑셀을 밟았다.차에서 내린 소은정의 시야에 허둥지둥 달려오는 김하늘의 모습이 보였다.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저 멀리서 검은색 차량 세 대가 다가왔다.곧이어 검은 정장차림에 굳은 표정의 장정 십 여명이 차에서 내렸다.전부 소씨 일가 소유의 경호원들이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차에서 내린 소은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가자...”우르르 몰려든 경호원들의 모습에 김하늘은 흠칫 놀랐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여긴 민하준 집이야. 우리 두 사람만 움직이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당연한 거겠지.한편 소은정은 소은호가 직접 온 걸 보고 의아하긴 했지만 유라가 위험하다는 생각에 별 의심없이 발걸음을 옮겼다.민하준의 집 앞.김하늘이 앞장서서 문을 두드렸다.잠시 후,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작게 문틈을 열었다.“누구세요...”“유라 안에 있어요?”역시나 민하준이 미리 단단히 주의를 주었는지 유라라는 이름에 흠칫하긴 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아, 아니요. 유라라니? 그런 사람 모르는데요...”하, 거짓말을 하시겠다?집안일을 담당하는 아주머니 따위와 말싸움을 할 여유가 없었던 김하늘은 바로 문을 홱 잡아당겨 신발도 벗지 않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유라야, 안에 있어?”하지만 김하늘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흉악한 인상의 남자 두 명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젠장, 이쪽에도 경호원을 두고 있었잖아? 나름 준비 많이 했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소은호를 선두로 소씨 일가 쪽의 경호원들이 우르르 집안으로 들어왔다.김하늘의 앞을 막아섰던 경호원들 역시 이런 상황은 생각지 못한 듯 흠칫 뒤로 물러섰다.마지막으로 집으로 들어온 소은정이 저택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쏘아보았다.
민하준 저택에서 청소와 요리를 담당하고 있는 장정자가 창백해진 얼굴로 대답했다.“대표님, 집에 손님이 오셨어요...”소은정은 곧바로 아주머니의 떨리는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챘다.“민하준, 지금 당장 집으로 와...”이 순간만큼은 예의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는 소은정이었다.재벌 2세로서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안면을 텄지만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볼 꼴 못 볼 꼴 다보며 자란 사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발벗고 나서준 친구들이니 소은정에게는 더 각별할 수 밖에 없었다.말을 마친 소은정이 휴대폰을 거칠게 내팽개쳤다.방안에서 한유라의 힘없는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마음이 급해진 소은정이 몸으로 문을 부숴버리려고 했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불과했다.소은호의 손짓에 따라 경호원들도 달라붙었지만 여전히 문은 굳게 닫힌 상태였다.“대표님, 특수제작된 문인 것 같습니다. 억지로 열려고 하면 아예 잠겨버릴 겁니다.”경호원의 말에 소은정의 차가운 눈초리가 장정자에게로 향했다.“열쇠 당장 내놔요...”“열... 열쇠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소은정의 질문에 장정자는 고개를 저었지만 손은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움켜쥐기 시작했다.항상 차분하던 김하늘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요! 당장 내놓으라고요. 안 그럼 가만히 안 있을 거니까.”“무...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세요.”장정자의 얼굴이 공포로 질리고 차가운 미소를 짓던 소은정이 한발 한발 다가섰다.뒷걸음질 치던 장정자가 곧 벽에 부딪히고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불법 감금은 범죄인 거 알죠? 남은 여생 평생 감옥에서 썩게 해줄까요?”소은호의 눈짓과 함께 경호원이 장정자의 팔을 뒤로 제압했다.으아악!!!두 경호원 역시 움직임이 완벽하게 제압당한 채 멍든 눈으로 그들을 노려볼 뿐이었다.경호원은 거친 손길로 장정자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소은정에게 건넸다.열쇠를 손에 넣은 소
소은정의 말에 미간을 찌푸린 채 다가온 소은호는 한유라의 팔에 생긴 주사자국을 발견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그 남자가... 너한테 약이라도 쓴 거야?”클럽 같은 곳에서 반항하는 여성을 마약류 약품으로 제압하는 건 변태 같은 자식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했다.정신은 멀쩡하지만 몸에 힘이 풀려 아무런 반항도 못하게 되는 그런 약이었다.소은호의 질문에 한유라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차가운 눈물이 한유라의 눈가에서 흘러내렸다.충격적인 소식에 모두가 얼어붙고 한유라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그딴 자식을 남자친구라고 생각했던 내가 등신이지...소은호가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유라는 내가 안을 테니까 은정아, 넌 먼저 나가있어.”민하준이 약까지 썼다는 말에 분노로 부들거리던 소은정 역시 심호흡을 하며 이성을 되찾으려 애섰다.소은정이 한유라의 어깨를 쓰다듬었다.“유라야, 걱정하지 마. 이제 괜찮아. 어서 여기서 나가자.”그들이 집까지 쳐들어온 걸 알았으니 민하준도 곧 집으로 돌아올 터, 그쪽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온다면 김하늘, 소은호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다.마약류 약품까지 쓸 정도로 미친 자식이라면 더 미친 짓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을 테니까.소은정은 민하준의 서늘한 인상을 다시 떠올렸다.누가 봐도 섬뜩한 얼굴이었는데... 유라가 너무 순진했어. 그런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다니.하지만 한유라가 아무리 경솔했다 해도 민하준이 저지른 일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었다.한유라가 빨갛게 부어오른 눈을 깜박였다.“얼른 가...”소은호가 한유라를 번쩍 안아들고 거실로 나선 그때 현관에서 다급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민하준이 도착한 것이었다.하, 빨리도 왔네.민하준의 등장에 장정자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그의 발치로 기어갔다.“대표님, 저 사람들이 유라 아가씨를 데려가려고 해요. 제 팔도 이렇게 만들고...”엉망이 된 집안과 바닥에 제압당한 두 보디가드를 차가운 얼굴로 훑어보던 민하준의 시선
순간 민하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행동이 멈칫하자 주위에 있던 보디가드들은 그 허점을 놓치지 않고 바로 달려들었다.4, 5명의 보디가드들이 민하준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민하준은 분노로 붉게 물든 눈동자로 한유라를 노려 보았다.“내가 와이프랑은 이혼할 거라고 했잖아. 그 새를 못 기다리고 이 사달을 일으켜?!”한유라 역시 쉬어버린 목소리로 외쳤다.“이혼은 개뿔! 내가 바보였어! 너 같은 자식한테 다 속고!! 가서 네 와이프랑 평생 오손도손 같이 살아! 너 따위가 감히 날 넘봐?”민하준의 진짜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하고 원망스러웠다.지금이라도 달려들어 민하준의 뻔뻔한 낯가죽을 벗겨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소은호는 증오로 가득한 눈빛의 민하준을 힐끗 바라본 뒤 성큼성큼 집을 나섰다.우르르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우르르 사라지고 커다란 저택이 왠지 더 휑하게 느껴졌다.장정자가 덜렁거리는 팔을 다른 팔로 붙들고 눈물바람으로 다가왔다.“대표님...”“누구 마음대로 문을 열어줘! 누구도 들여보지 말라고 했잖아요.”굳은 표정과 달리 민하준의 목소리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깊은 심연같은 민하준의 눈동자를 마주한 장정자는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자연스럽게 눈을 피한 장정자를 향해 민하준이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거짓말 할 생각은 하지 말아요. 남은 팔 한쪽도 잃고 싶지 않으면...”지금까지 수많은 부잣집에서 가사 아주머니로 일했지만 부자들의 잔인함을 이렇게 피부로 느낀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남은 팔까지 부러트리겠다고? 그건 안 돼...잠깐 망설이던 장정자의 눈에서 눈물이 와르륵 쏟아졌다.“사모님께서 시키신 거예요. 유라 아가씨와 결혼하시면 전 결국 일자리를 잃게 될 거라고... 제가 사모님을 도와드리면 계속 이 집에서 일하게 해주시고 월급도 두 배로 올려주시고 제 아들한테도 직장을 소캐해 주시겠다고 해서... 사모님이 부른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어요...”“사모님이 부른 사
김하늘의 말에 소은정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아, 성진그룹이라... 그집 딸 허하진이랑 엮었던 적이 있었지. 뭐 결국 나한테 한방 먹었지만. 성진그룹... 협력하던 파트너들도 다 도망가고 지금은 겨우 이름 정도만 남아있는 상태일 텐데...“그럼 민하준이라는 이름도 가명인 거야? 아버지 복수를 하려고 이름까지 바꾸고 우리한테 접근한 거고?”소은정의 질문에 김하늘이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건 아닐 거야. 애초에 허광현 대표와는 별로 접점도 없었어. 그리고 평생 사생아라고 손가락질 받으면서 살아서... 아마 허광현 대표한테 좋은 감정은 없을 거야. 민하준이라는 이름도 성도 전부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거야. 어머니 쪽에서 운영하던 민연그룹... 사실 파산직전이었거든? 그런데 민하준이 대표로 취임한 뒤로 최근 몇 년 동안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성진그룹 허광현 회장의 사생아라... 멍청한 딸보다는 사생아가 훨씬 더 낫네.잠깐 망설이던 김하늘이 한숨을 쉬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민하준 와이프는 십 년 전에 부동산으로 벼락부자가 된 집안 딸이래. 아마 돈 때문에 억지로 한 결혼인 것 같아. 부부 사이도 안 좋대. 1년에 겨우 얼굴 한 번 볼까 말까라던데? 하, 우리 유라...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어떻게 그딴 남자랑...”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친구들 중에서 한유라는 가장 유흥을 즐기는 타입이었지만 선은 확실히 지키는 사람이었다.게다가 평소에 바람을 피우는 남녀들을 가장 중오하던 그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간녀가 되다니...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싶어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잠시 후, 전동하가 부랴부랴 달려왔다.기온이 많이 떨어졌는지 그의 몸에서 날카로운 한기가 느껴졌다.전동하가 에르메스 토트백을 건넸다.“추울까 봐 옷가지 좀 챙겼어요.”남자 옷이잖아? 동하 씨 옷인가?“워낙 급하게 나와서... 대충 내 옷만 챙겼어요. 일단 입어요.”파티장에서 집으로 들어갔다 옷 갈아입을 새도 없이 부랴부랴 집을 나선터라 소은정은 여전히 드
소은정의 질문에 의사가 미소를 지었다.“별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체내에 주입된 약물은 8-9 시간이 지난 뒤에야 체외로 배출될 거예요. 그 전까지는 몸에 힘이 잘 안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충격 때문인지 발열 증상이 있으시더군요. 해열제 수액 놔드렸으니 아마 곧 내릴 겁니다.”의사의 설명에 소은정도 김하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금이라도 늦었으면 큰일날 뻔했네...의사가 밖으로 나가고 두 사람은 잠에 든 한유라를 힐끗 바라보았다.민하준 꿈을 꾸는 건지 이를 빠득빠득 갈며 “쓰레기”, “죽어버려” 같은 욕설을 내뱉는 한유라의 모습에 두 사람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그래도 씩씩해 보여서좋네.30분 뒤, 전동하가 다시 돌아왔다.포장백에 프린팅 된 로고를 확인한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긴 평소에 예약하기도 힘든 레스토랑이잖아. 이 밤까지 영업할 리도 없고...소은정이 묻기 전에 눈썰미 좋은 김하늘이 먼저 물었다.“이 레스토랑 미리 예약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포장해 오신 거예요?”“오늘 다들 고생 많았잖아요. 환자도 있고 맛있는 거 든든하게 먹어야죠. 그리고 레스토랑 사장이 제 친구라서 특별히 부탁 좀 했죠.”포장백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전동하가 말을 이어갔다.“이건 유라 씨 깨어나면 드리고 이건 두 사람 먹어요.”하, 정말 자상하네... 은정이, 남자 하나는 잘 잡았어.젓가락을 포장을 뜯어 손에 쥐어주기까지 하는 전동하의 모습에 소은정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휴, 둘이서 있을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하늘이도 옆에 있는데... 아주 잘 하면 입에 넣어주겠어?소은정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김하늘을 불렀다.“얼른 와. 따뜻할 때 먹어야지.”가까이 다가온 김하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너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너도 열 나는 거야?”그녀의 말에 전동하가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고 소은정은 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몰래 김하늘을 흘겨보았다.“아니거든! 병실이 좀 덥네! 얼른
한유라의 목소리에 소은정과 김하늘이 벌떡 일어섰다.한유라의 목소리에 소은정이 잠이 깨자 순간 전동하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곧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아니다. 환자잖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후다닥 다가간 소은정은 한유라의 얼굴을 살폈다. 창백한 얼굴에 생기가 돌고 퀭하던 눈동자도 반짝이고 있었다.오랫 동안 밥을 먹지 않아서인지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없었지만 말이다.“깼어? 몸은 좀 어때?”전에 일어났던 일들이 떠오른 듯 한유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나 배고파...”소은정과 김하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전동하가 바로 미리 준비한 음식을 건넸다.침대 위에 간이 책상을 올리고 침대 높이를 조절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은정과 김하늘을 바라보던 하유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은호 오빠는... 지금 어딨어?”한유라의 말에 소은정이 흠칫하고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오빠가 날 구해 준 거잖아. 직접 얼굴 보고 고맙다고 하고 싶어.”소은호에 대한 마음은 이미 접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제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죽어버린 사랑의 마음이 다시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를 지켜준 것도 처음, 안은 것도 처음, 그렇게 소은호와 가까이 있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혹시나... 혹시나 은호 오빠도 날 좋아하는 게 아닐까?단 1%의 가능성뿐이라 해도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기대 가득한 한유라의 눈빛에 소은정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오빠는 회사 갔지. 아마 오늘 오지 않을까?”“너, 앞으로 남자 제대로 봐가면서 만나! 민하준 그 사람 딱 봐도 인상이 별로더구만. 뭐? 외모로 사람 판단하지 말라고? 야, 관상도 과학이야!”김하늘의 꾸짖음에 한유라가 고개를 숙였다.“그래. 내가 바보 같았던 거 맞아. 나한테 보여줬던 거 전부 다 거짓말이었어... 우리가 산에 갇혔을 때도 와이프한테 들킬까 봐 일부러 전세기 말고 다른 방법으로 구한 거였대. 하... 난 그것도 모르고...”잔뜩 시무룩해진 한유라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김하늘이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