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지금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박대한은 태한그룹에서 절대자나 마찬가지였다. 수십년 전 구멍가게 수준이었던 태한그룹을 대한민국 1위 그룹으로 키워낸 데는 박대한의 잔인한 수단도 한몫 했었다.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박대한은 주주들은 권력을 노리는 하이에나들이며 이 바닥은 정글이나 다름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유약한 성격의 아들 박봉원이 아닌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손자 박수혁을 후계자로 점찍었다.박수혁의 경영수업도 박대한이 직접 진행했고 최고의 교육을 시킨 건 물론 이 세상의 잔인함을 가르쳐주기 위해 재벌이라면 다들 피하는 군대도 최전방으로 보낸 건 물론 용병 생활까지 하게 했다.박수혁은 박대한이 일생을 담아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박수혁이 유학 생활을 마치고 오자마자 대표직을 넘기고 뒤로 물러섰지만 이사직은 영원히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태한그룹은 박대한의 인생이자 그에게 가장 빛나는 명예였으니까.그런데 그렇게 아꼈던 손자가 이제 머리 좀 컸다고 그를 회사에서 쫓아내려고 하고 있다. 그러니 화가 치밀 수밖에.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박대한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박수혁을 가리켰다.“이제 다 컸다 이거야? 여자 때문에 집안 망신을 시켜!”하지만 박수혁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할아버지, 지금까지는 봐드렸지만 이번에는 선을 넘으셨어요. 이제는 더 용납할 수 없습니다.”말을 마치고 돌아선 박수혁이 한 마디 덧붙였다.“물론 제 결정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절 대표직에서 끌어내셔도 됩니다.”“그럴 힘이 있으실지는 모르겠지만”이라는 말은 남겨둔 채 박수혁은 서재를 나섰다.회사를 맡은 뒤로 박수혁은 박대한과의 친분만 믿은 채 일도 안 하고 회사의 돈만 긁어먹는 이사들부터 쳐냈다. 이제 태한그룹에 박대한의 편은 거의 없으니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꾹 참을 수밖에 없을 테지.서재 문이 닫히고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우당탕탕 흘러나왔다.“이런 호로자식을 봤나! 누가 널 그 자리에 앉혀줬는데! 내가 아니었으면 네
하지만 박수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끝없는 적막이 박예리는 더 불안했고 무서웠다.한참 뒤에야 박수혁은 차가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용서? 누구를? 널?”박수혁의 말에 박예리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다급하게 변명했다.“오빠,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이건 할아버지가...”박예리의 변명에 박수혁의 표정이 더 차갑게 굳었다.“할아버지 주위에 정말 내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거라 생각해? 어제 낮, 회사에는 왜 온 거야?”박수혁의 말에 박예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래, 이한석은 박수혁의 사람이다. 박예리가 왔다는 걸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겠지.겁을 먹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었던 박예리가 눈시울을 붉혔다.“박예리, 배우라는 건 안 배우고 거짓말 하는 법을 배워왔네? 내일부터 당장 다시 백화점으로 출근해!”박수혁의 호통에 흠칫하던 박예리가 바로 다가가 박수혁의 옷깃을 붙잡고 애원을 시작했다.“오빠, 난 전동하 그 사람이 은정 언니한테 찝적대는 게 싫어서... 그래서 할아버지한테 말씀드린 거야. 난 진심으로 두 사람이 잘됐으면 좋겠어. 그리고... 은정 언니가 욕 먹는 걸 보고... 댓글 알바들까지 풀어서 은정 언니 편을 들었다고.”말을 마친 박예리가 떨리는 손으로 거래 기록과 채팅 기록을 보여주었다.소은정에게 유리한 댓글을 달라는 내용이었다.글귀를 확인한 박수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박예리는 더 불쌍하게 울기 시작했다.“흑... 엄마도 아빠도 전부 해외에 계시잖아. 이제 나한테는 오빠랑 할아버지밖에 없어. 그러니까 내치지만 말아줘. 부탁이야. 원한다면 내가 직접 은정 언니한테 사과할게. 사당에서 무릎 꿇고 반성하라면 밤새 꿇을게. 응?”한참을 훌쩍이던 박예리는 박수혁이 또 그녀를 쫓아낼까 싶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섰다.“지금 바로 갈게.”그 모습을 바라보던 집사가 머뭇거리며 다가왔다.“도련님...”차가운 눈동자로 집사를 바라보던 박수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앞으로 할아버지도 박예리도 외출금지입니다. 내일부터 회사에서
이한석의 말에 바로 전화를 끊은 박수혁은 소은정의 본가를 향해 달려갔다.대학교 때 잠깐 취미로 레이싱을 한 뒤로 이렇게 빨린 건 처음이었다.하지만 정작 소은정의 집에 도착하니 박수혁은 오히려 망설여지기 시작했다.살짝 떨리는 손으로 다시 소은정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휴대폰은 이미 꺼진 상태였다.순간 치밀어 오르는 화에 박수혁은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쳤다. 귀를 찌르는 듯한 경적 소리가 적막한 밤 하늘을 가득 채웠다.그 소리에 잠자리에 들려던 집사 또한 깜짝 놀라 문 밖의 CCTV 영상을 확인했다. 익숙한 랜드로버, 박수혁이 온 것이었다.하지만 차마 바로 문을 열지 못하고 부랴부랴 소은정의 방으로 올라갔다.다행히 소은정은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는지 소호랑이 꼬리를 흔들며 집사를 맞이했다.“아가씨, 박수혁 대표님이 오신 것 같습니다.”집사의 말에 소은정이 코웃음을 쳤다.“신경 쓰지 마세요. 앞으로도 박수혁은 집에 들이지 마시고요.”그녀에게 상처를 준 남자긴 했지만 그래도 정정당당한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모습도 전부 연기였던 건가?전동하를 건드린 것도 싫었고 괜히 그녀까지 피해를 입은 것도 싫었고 이렇게 추잡한 방법까지 사용하는 박수혁이 싫었다.소은정의 말에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일찍 주무세요, 아가씨.”집사가 방을 나서고 저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적막에 잠겼다.갑작스러운 경적 소리에 역시 깜짝 놀란 박수혁이 조심스럽게 저택 분위기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박수혁은 씁쓸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는 걸까? 분명 소은정이 저 집 안에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이번에야말로 정말 소은정과 끝났다는 생각에 차가운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밤새, 박수혁은 눈 한번 붙이지 못한 채 소은정의 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이른 아침, 박수혁이 수염이 자라 까칠한 턱을 만지작거리던 그때 굳게 닫혔던 저택의
소은해의 말에 소은정이 눈을 흘겼다. 하여간 눈치는 어디 팔아먹었나?“인터넷 상황은 어때? 기사는 다 내려갔어?”소은정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고 소은해 역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흥미진진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전부 내려갔더라. 그리고 전동하가 말했던 시간보다 2시간 더 일찍. 아, 전동하를 폭로했던 여자도 해명글을 올렸어. 매수당해서 일부러 루머를 퍼트린 거라고. 사실 전동하와는 아는 사이도 아니래. 전동하가 일했던 투자은행에서 인턴으로 일했다나? 그 사진도 그때 찍힌 거고... 물론 지금은 계정도 전부 탈퇴한 상태야.”소은해의 설명에 소은정이 눈을 흘겼다.“뭐야? 돈 노리고 그렇게 한 거래?”“응. 인터넷 반응도 바로 역전됐어. 꽃뱀 아니냐면서... 그런데 전동하 대표도 보통 사람은 아니더라.”“왜?”소은정이 고개를 갸웃했다.“보통은 이 정도면 대충 사과만 받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전동하가 바로 명예훼손으로 바로 경찰에 신고했대... 그 사과문이 바로 증거라면서.”“어떻게 얻은 증거인데 낭비하면 안 되지.”소은정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렇긴 해? 근데 여기서 끝이 아니야. 그 여자 야반도주 하려다 공항에서 체포됐대. 그 장면을 내가 직접 봤어야 했는데...”돈 주고도 못 볼 진귀한 광경을 놓쳤다는 게 꽤 아쉬운지 소은해가 테이블을 살짝 내리쳤다.반면 소은정은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회사 주가는 어때?”“루머 유포자가 체포되고 너에 대한 헛소문도 자연스럽게 해명된 거나 마찬가지라... 주가도 다시 돌아왔어.”“그래. 회사에 피해 안 간 거면 됐어.”그리고 젓가락을 내려놓은 소은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나 다 먹었어. 올라가서 오빠한테 전화라도 할까 봐.”반이나 남긴 소은정의 밥그릇을 바라보며 소은해가 미간을 찌푸렸다.“오빠가 회사 일은 신경 쓰지 말고 푹 쉬라고 했잖아.”소은해의 말에 소은정이 고개를 돌렸다.“이제 반격해야지.”소은정의 차가운 미
소은정의 제안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웨이브 스튜디오는 국내 최고의 크레이티브 에이전시, 구박사처럼 악의적인 루머나 퍼트리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에게 웨이브 스튜디오는 꿈의 직장이나 마찬가지였다.갑자기 떨어진 떡을 받아먹어야 하나 망설이던 구박사가 더듬거리며 물었다.“거... 거짓말이면 어떡해요? 작정하고 절 속이시려고 하는 거면...”구박사의 말에 소은정이 웃음을 터트렸다.“집에 계시죠? 약 5분 뒤에 웨이브 스튜디오 채용 계약서가 집에 도착할 겁니다. 그래도 믿음이 안 가시면 변호가까지 대동해 계약서를 작성하시죠. 이번 일만 제대로 해내시면... 돈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제게 했던 짓들 없었던 일로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정도 돈으로 제가 사기를 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SC그룹의 소은정이요.”구박사에게 지금까지 받던 돈의 10배라는 금액은 분명 거액이었지만 소은정에게는 밥 한 끼, 쇼핑 한 번 할 돈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그리고 정말 사기를 치고 싶었다면 직접 전화까지 거는 성의를 보일 필요는 없었겠지.잠시 망설이던 구박사가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그래요. 이건 제 번호니까 제 카톡 추가하세요. 자세한 얘기는 문자로 하죠. 그럼.”전화를 끊은 구박사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그가 온갖 악의적인 말들로 공격했던 여자가 사실은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었다니.게다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일을 물어다주고 직장까지 알아봐 주겠다니... 소은정의 너그러움에 감탄이 나오면서도 지금까지 저런 사람을 공격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밀려들었다.곧바로 소은정의 카톡을 추가한 구박사는 그녀가 원하는 자료들을 전부 넘긴 뒤 자발적으로 장문의 사과문을 전송했다.존경하는 소은정 대표님께:저에게 다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정말 착하게 살겠습니다...... 또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구성호가”“네, 고마워요.”장문의 사과문에 소은정이 짧게 답장했다.이때 비서가 다시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아가씨, 박수혁 대표님 아직
이대로 넘어지겠구나 싶어 눈을 질끈 감던 그때, 휠체어가 멈추었다.누군가 뒤에서 그의 휠체어를 붙잡은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단단한 팔이 쑥 들어오더니 그녀를 휠체어째로 번쩍 들어안았다.시원한 박하향 향수 냄새와 은은한 담배향이 소은정의 코끝을 스쳤다. 박수혁이구나...저택 직원들이나 가족들 중 이렇게 말없이 그녀를 번쩍 들어안을 사람은 없었다.역시나 다시 안정적으로 착지한 소은정이 고개를 들어보니 박수혁의 차갑고 차분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기다리려니 꽤 급했나봐? 그새를 못 참고 쪼르르 들어오는 걸 보니까?박수혁을 발견한 문 앞을 지키던 집사와 보디가드들이 우르르 달려왔다.“아가씨...”소은정이 손을 들고 집사가 경호원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충혈된, 초췌한 안색, 은은한 담배 냄새, 누가 봐도 밤을 샌 사람의 얼굴이었다.한쪽 무릎을 꿇은 채 소은정과 눈을 맞추던 박수혁이 입을 열었다.“은정아, 너한테 할 말이 있어.”사실 소은정이 그를 만날 생각이 없다는 건 박수혁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이 사실을 제대로 해명하지 않으면 두 사람의 관계는 이대로 끝일 테니까.그래서 경호원과 집사가 보지 않는 틈을 타 낮은 담장을 타고 저택에 잠입했다. 그리고 마침 휠체어 위에서 비틀대는 소은정을 잡아준 것이었다.거동 조차 불편한 그녀의 모습이 박수혁의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박수혁이 문을 통해 들어온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챈 소은정이 차갑게 웃었다.“천하의 박수혁이 담장을 다 넘고 웃기네.”복잡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바라보던 박수혁이 대답했다.“네 얼굴 보고 제대로 해명하고 싶었어.”“그래. 말해 봐...”그래, 박수혁. 어떤 변명을 지어내는지 두고 보겠어!하지만 자초지종을 말하려고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다 뱉어낸 말은 결국 사과뿐이었다.“어제 일은... 미안했어.”“뭐가 미안한데?”소은정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모르는 척을 하자 박수혁이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
박수혁의 해명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소은정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다 고개를 돌렸다.“어차피 다 일어난 일, 이제 와서 그런 말 해 봤자 무슨 소용이야? 아무 근거도 없는 루머로 무고한 사람 매장시키는 거. 그건 정정당당한 방법이라 생각해?”“아무런 근거도 없는? 정말 전동하가 깨끗한 사람인 줄 알아? 친구 와이프와 애매한 사이였다는 거 미국에서는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야.”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은 화가 치밀었다.이 상황에서 전동하를 믿는다고? 너까지 상간녀라고 욕을 먹고 있어. 그런데 전동하 편을 들어?하지만 소은정이 이토록 냉정하고 담담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사실에 대해서는 소은정이 박수혁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으니까.친구의 와이프라... 아마 마이크의 생모를 가리키는 거겠지.사람들의 입에서 전해지다 보니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루머로 커진 것 같긴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런 더러운 소문까지 감수하면서까지 마이크를 기르고 있는 전동하가 더 다르게 보였다.박수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소은정이 싱긋 미소 지었다.“한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결론내리지 마.”아니야. 이 정도 말로는 상처 같은 거 받지 않겠지.”“당신도 전에... 전우의 여자친구와 애매한 관계였잖아?”서민영은 박수혁의 전우 성준상의 여자친구, 그녀를 위해 어떤 일까지 했는지는 박수혁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그런데 이제 와서 정의로운 척 다른 사람을 비난해? 난 그런 당신의 이중잣대가 싫어.소은정의 말에 박수혁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깊은 눈동자로 소은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수혁이 물었다.“나보다 전동하를 더 믿는다 이거야?”차가운 박수혁의 목소리에도 소은정은 또박또박 대답했다.“내가 믿는 건 오직 진실뿐이야.”소은정의 대답에 박수혁은 분노가 치밀었다.진실을 믿는다고? 그냥 날 믿지 않는 거겠지.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고 소은정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박수혁의 눈동자는 더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소은정 앞이라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
하려던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소은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박수혁 씨, 누구 마음대로 여길 들어와요?”소은해의 얼굴에 혐오와 경멸의 감정이 피어올랐다.너 같이 비겁한 자식을 동정했던 내가 바보지.게다가 무릎까지 꿇은 채 소은정과 가까이 있는 모습에 화가 더 치밀었다. 내 동생한테 또 무슨 짓을 하려고!“그리고 우리 동생한테서 떨어져요!”미간을 찌푸린 박수혁이 일어서고 소은정은 버튼을 눌러 뒤로 물러섰다.쪼르르 달려간 소은해가 바로 경계 어린 시선으로 박수혁을 노려 보았다.“지금 우리 집안 사람들이 그쪽 얼굴을 보고 싶을 거라 생각해요? 도대체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온 거예요? 당장 나가요!”재벌 2세로 자라 태한그룹 대표가 된 그에게 지금까지 이런 말투로 말하는 사람은 소은해가 처음이었다.하지만 소은정의 셋째 오빠라는 사실 때문에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박수혁이 소은정을 바라보고 소은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그럼 멀리 안 나갈게.”뭔가 더 말하려던 박수혁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다음에 다시 올게.”그리고 불쾌하다는 눈빛으로 소은해를 힐끗 쳐다본 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가자, 오빠.”소은해가 휠체어를 밀고 덜컹거리는 길에 미간을 찌푸리던 소은정이 입을 열었다.“이 조약돌 치우자. 휠체어로 움직이려니 힘드네.”소은정의 말에 소은해가 눈썹을 치켜세웠다.“이거 아빠가 직접 구해 오신 건데... 뭐 네가 원한다면 당연히 치워주시겠지.”소은해의 말에 멈칫하던 소은정이 대답했다.“아? 그래? 그럼 됐어. 난 오빠가 픽한 건 줄 알았지.”뭐야? 내가 고른 거면 치워버려도 된다는 거야?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던 소은해가 미간을 찌푸렸다.“박수혁 저 자식 진짜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온 거래? 멍청한 건지 고지식한 건지...”휠체어의 버튼을 누른 소은정이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박 회장이 손을 쓴 모양이더라고. 박수혁이 그렇게 멍청한 선택을 할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