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소은정이 말한 걱정은 말 그대로 걱정 그뿐이었다.지금까지 그녀가 좋다고 다가오는 남자는 수없이 많았지만 소은정은 항상 보이지 않는 벽을 두르며 그들을 밀어냈었다.하지만 이번 교통사고로 인해 전동하에게는 왠지 더 이상 벽을 두를 수 없게 된 소은정이었다.두 사람의 사이는 분명 묘하게 달라졌다.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순수한 소은정의 미소에 전동하는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지금 소은정에게 대시하는 건 전동하였으니 아쉬워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걱정해줬다니 기쁘네요. 다친 게 다행이라고 느껴질만큼.”전동하의 말에 소은정의 미소가 어색하게 굳었다. 소은정이 뭔가 말하려던 그때 전동하가 말을 이어갔다.“박수혁 대표가 왜 절 때렸는지 이유는 말해 줬나요?”박수혁이 뭐라고 해명했는지 꽤 궁금한 전동하였다.“아니요.”“때릴만 해서 때렸다”라는 말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으니 소은정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이때 전동하의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걸렸다.“절 질투했기 때문이에요.”누군가에게 맞고서도 이렇게 기쁘기는 처음이었다. 박수혁의 분노와 그의 주먹에서 자신의 존재가 박수혁에게 정말 위협으로 느껴지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의아한 표정의 소은정을 바라보던 전동하가 말을 이어갔다.“다행이에요. 이번 사고 덕분에 은정 씨한테 저도 쓸모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요. 그리고... 박수혁 대표보다 제가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 것 같아서요.”소은정은 넓은 우주의 블랙홀처럼 모든 걸 집어삼킬 것 같은 전동하의 눈동자를 멍하니 보았다.“사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희소한 혈액형 때문에 귀하게 컸어요. 그래서 더 이기적인 성격으로 컸는지도 모르죠. 그리고 언젠가 이 특별한 혈액형 때문에 객사라도 하면 어쩌나 불안한 적도 많았어요. 처음이에요. 이 혈액형에게 감사함을 느끼게 된 거요. 은정 씨, 나 그렇게 비겁한 사람 아니에요. 이번 사고를 빌미로 은정 씨 죄책감을 자극하고 싶은 생각은
전동하의 말에 담긴 뜻은 분명했다. 설령 불공평하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소은정이 단 1%라도 그를 좋아해준다면 남은 99%는 전동하가 대신 채워줄 수 있었다.다른 여자였다면 결국 그의 정성에 감동해 못 이기는 척 그에게 기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은정은 달랐다.아무리 노력해도 소은정은 그에게 이제 그만 포기하라 말하고 있다.하지만... 이미 움직인 마음을 멈추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시계바늘이 똑딱이는 소리가 똑똑히 들릴 정도로 병실은 적막이 감돌았다. 전동하의 말에 소은정은 가슴 어딘가가 꽉 막힌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그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망설이던 그때, 전동하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소은정의 난처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전동하가 결국 한발 물러섰다.“이렇게 해요. 그렇게 나한테 고맙고 미안하면 소원 하나만 들어줄래요?”전동하의 말에 소은정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더 이상 날 밀어내지 말아줘요. 내가 은정 씨 삶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줘요. 앞으로는 내가 은정 씨를 향한 마음을 표현하게 해줘요. 만약 불편하거나 혐오스럽게 느껴지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대신 나한테 조금이라도 호감을 느낀다면 그때도 말해줘야 해요?”시도 조차 해보지 않고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 게임이라면 지든 이기든 제대로 도전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그래야 처참하게 패배한다 해도 미련없이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전동하의 진심 어린 눈동자를 바라보던 소은정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네.”순간, 어쩌면 전동하와 정말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전동하의 제안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었다.비록 이혼은 했지만 평생 솔로로 살 생각은 없었다. 박수혁이 인생의 마지막 남자가 되는 건 너무 억울하니까.하지만 아직 그녀의 영혼에 울림을 줄만한 남자를 만나지 못한 것, 그뿐이었다.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전동하가 드디어 미소를 지었다. 거절하지 않았다는 건 한발 다가갔다고 봐도 되
소은정의 눈치를 힐끗 보던 우연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 범인의 아내가 딸과 함께 지성그룹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저희가 남편을 구치소를 처넣었다며 생활비와 치료비를 내놓으라며 억지를 부린다도 하더군요...”말을 마친 소은정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정말 뻔뻔한 사람이네요.”가해자 주제에 어디서 피해자 코스프레야? 그리고 뭐? 돈까지 달라고? 역겨워...“농성 때문에 회사 직원들 출입도 불편하고 지나가던 행인들의 시선도 꽤 받는 모양입니다. 경비원도 속수무책이고요. 이건 대표님이 도의상 500만원 정도 주신 것 같은데... 이 방법이 통한다 생각했는지 그 뒤로는 계속 찾아오고 있는 상황이고요. 지금 문제는 이 스캔들이 외부에 어떻게 전해질지 모른다는 겁니다. 행여나 프로젝트에도 영향을 미친다면... 저희 쪽에도 손실이 클 것으로 보여집니다.”순간, 두 사람은 침묵에 잠겼다.차오르는 분노에 소은정이 말없이 주먹을 쥐었다. 사고를 당한 것도 죽을 뻔한 것도 그녀인데 왜, 그녀가 피해를 입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녀가 돈 많은 재벌 2세인 건 사실이지만 자신을 죽이려했던 가해자 가족에게까지 자비를 베풀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경찰에 신고하는 건 어때요?”“경찰에 신고하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 뺑소니 사건도 아직 조사 중이고... 아내까지 경찰에 구속되면 아이를 케어해 줄 사람이 없어서요...”이렇게 애매한 상황은 처음인지라 우연준도 미간을 찌푸렸다. 불치병에 걸린 아이가 끼어있으니 차가운 비즈니스보다 처리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다.“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도 경고만 하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이번 프로젝트가 틀어지면 S시의 경제에도 무리가 갈 예정이라 이 국장도 슬쩍 발을 빼려는 눈치인 것 같고요... 저희더러 알아서 처리하라더군요.”하, 능글맞은 늙은이 같으니.우리더러 알아서 처리하라고? 어떻게?프로젝트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그 어떤 편법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녀가 뭘 더 할 수 있을까
소은정의 말에 우연준은 열정이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주 자극적인 계획이었지만 분명 리스크도 존재했다.지금 여론전을 벌인다면 오히려 계획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대중은 약자에게 유난히 약한 법이니까.“지금 여론전을 벌이는 게 정말 저희한테 좋은 일일까요?”우연준이 미간을 찌푸렸다.전동 휠체어의 버튼을 만지작거리던 소은정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물론 쉽지는 않겠죠. 하지만 그 운전기사는 자기 딸을 위해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는 자예요. 그렇다면 딸을 위해 선행도 할 수 있겠죠.”하지만 우연준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대표님, 그 기사 무기징역은 확정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대표님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경찰에 체포되었죠. 저희한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매수하죠?”그 이유가 어찌 되었든 운전기사는 무고한 사람을 죽인 잔인한 살인자였다. 괜히 또 화를 입지 않을까 걱정되는 우연준이었다.“와이프와 아이가 지성그룹 건물 앞에서 농성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보여주세요. 최대한 비참해 보이게요. 프로젝트 시작 당일 와이프가 자신의 범행을 모두 인정한다면 아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치료비를 제공해 줄 거라고 제안한다면... 분명 넘어올 거예요.”담담한 소은정의 말에 우연준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그래. 돈을 원한다 이거지? 그렇다면 그 돈의 효용가치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주겠어.“할 수 있겠어요?”소은정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우연준을 바라보았다.“못 하겠으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게요.”그제야 정신을 차린 우연준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할 수 있습니다.”소은정을 바라보던 우연준은 놀라움을 넘어 왠지 모를 흥분과 설렘까지 느끼기 시작했다. 새로운 에너지가 끊임없이 그의 가슴에 주입되는 기분이었다.우연준도 수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넘으며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특히 소은호를 보필하며 이 바닥의 음모와 기만에 대해서는 볼 만큼 봐왔다.하지만 소은정은 뭔가 달랐다. 소은정은 그 어떤 시
범인은 자신의 딸을 위해 소은정을 죽이려 했다. 소은정이 운이 조금만 나빴어도 아마 정말로 죽었을 것이다.만약 전동하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만약 전동하의 혈액형이 소은정과 달랐다면...최악의 경우를 하던 소은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그런 범인의 가족에게는 돈 한 푼도 쓰고 싶지 않았다.소은호의 마음을 알고 있는 소은정 역시 잠깐 침묵했다.그녀에 관한 일이 아니었다면 소은호가 먼저 돈으로 해결했을 테지.상대가 원하는 건 돈이고 SC그룹에게 가장 부족하지 않은 건 바로 돈이다. 일단 돈을 쥐어주고 프로젝트를 시작한 뒤 향후 죄목을 엮어 구치소로 보내버리면 가장 깔끔한 방법이었다.하지만 소은호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한 가지, 이대로 그 사람들에게 돈을 쥐어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입술을 깨물던 소은정이 입을 열었다.“오빠, 이 돈은 지성그룹의 이미지 회복은 물론 S시 프로젝트의 기반이 될 수 있는 돈이야. 의미없는 자선사업이 아니라고.”소은정은 어디까지나 상인,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최소한의 손실, 최대한의 이익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이 정도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소은정이 마음을 굳힌 이상 더 설득해도 소용이 없음을 알고 있기에 소은호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이미 결정했다면 더 이상 말리지 않을게. 그래도 병원에서 절대 나가지 마. 원하는 거 있으면 전부 우 비서한테 시키고 알겠지?”그제야 소은정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당연하지. 아직 이렇게 젊은데 남은 인생 절름발이로 살고 싶지 않다고.”그 뒤로 일상에 대해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다 전화를 끊은 순간, 누군가 병실문을 두드렸다.당연히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의사라고 생각한 소은정이 고개도 들지 않고 입을 열었다.“네, 들어오세요.”그리고 다음 순간, 뚱뚱한 몸매의 남자가 소은정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은정 대표님, 오랜만이에요! 그 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세요?”“오 집사님
소은정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한참 동안 입을 벙긋거리던 오한진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저희 수혁 대표님은 은정 대표님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하시는 거라고요!”오한진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간파한 소은정은 싱긋 미소 지은 뒤 말없이 음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그 모습에 왠지 머쓱해졌지만 오한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은정 대표님이 사고 당하신 뒤로 우리 대표님께서 이틀 밤을 꼴딱 새우신 건 아세요? 은정 대표님이 계신 병원을 알아내시곤 아주 미친 사람처럼 나가시더라니까요. 분명 S시로 가신 것 같았는데... 돌아오신 뒤부터 왠지 이상하게 변하셨죠. 말도 잘 안 하시고... 뭐 워낙 과묵한 성격이시긴 하지만...”오한진의 말에 젓가락을 잡은 소은정의 손이 멈칫했다. 왠지 가슴이 저릿해지는 느낌이었다. 분명 S시에 있을 때는 박수혁을 만난 적이 없는데... 언제 왔던 거야?“그리고 다시 서산 대학병원으로 옮기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가시더니 돌아오셔서 바로 쓰러지셨어요... 휴, 그리고 정신을 차리시고는 바로 회사에서 살다시피 하신다니까요. 대표님도 은정 대표님 만나러 오고 싶은 눈치라 제가 넌지시 함께 오시는 게 어떠냐고 물으니까 은정 대표님이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말끝을 흐린 오한진이 힐끗 소은정의 눈치를 보았다.하지만 소은정은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식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우아한 젓가락질과 씹는 모습. 예쁜 사람은 먹는 모습도 예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던 그때, 오한진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지. 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지? 충분히 불쌍해 보이게 설명했는데 말이지...살짝 망설이던 오한진이 말을 이어갔다.“요즘처럼 혼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은 처음 봐요... 수혁 대표님이 얼마나 은정 대표님을 사랑하시는지 이번에 새삼스레 다시 깨달았지 뭡니까! 제가 여자라면 너무 행복할 것 같은데요!”눈물까지 글썽이는 오한진의 모습에 소은정이 웃음을 터트렸다.“오 집사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박수혁 대표는 아무 사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못했네! 오한진이 풀이 잔뜩 죽은 얼굴로 병원을 나서려던 그때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병원으로 들어왔다.늘씬한 몸매, 부드러운 분위기, 바로 전동하였다.조선시대 뭇 아가씨들의 마음을 울리는 미남 선비가 환생한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전동하는 수묵화 같은 매력을 가진 남자였다.전동하가 병원으로 온 목적은 아마 소은정을 만나기 위함일 터, 발만 동동 구르려던 오한진은 다시 뻔뻔하게 병실로 돌아갈까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그는 박수혁의 사람,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박수혁을 대표하기도 한다. 가뜩이나 박수혁을 싫어하는데 더 혐오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한참을 고민하던 박수혁은 태한그룹으로 발걸음을 돌렸다.태한그룹, 요즘 따라 저기압인 대표 덕분에 직원들도 초긴장 상태였다. 최측근인 이한석마저도 만남을 꺼릴 정도이니 말이다.이때 오한진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깜짝 놀란 이한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형이 왜...”오한진은 숨을 헐떡이며 박수혁의 사무실을 가리켰다.“대표님 안에... 계시지?”이한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한진은 바로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박수혁의 차가운 목소리에 침을 꿀꺽 삼킨 오한진이 사무실 문을 열었다.“대표님, 저 왔습니다!”오한진의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든 박수혁은 다시 파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은정이 상태는 어때 보였어?”사실 박수혁도 매일마다 소은정을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소은정이 화를 낼까 걱정되기도 했고 가뜩이나 아슬아슬한 두 사람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질까 두려워 병원 주위도 가지 않고 있었다.그저 소은정에 대한 생각을 잊기 위해, 치밀어 오르는 짜증과 분노를 누르기 위해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은정 대표님은 아주 좋아 보이셨어요. 아, 은정 대표님의 더 빠른 회복을 위해 병원 측에서도 면회를 제한하는 것 같더라고요. 은정 대표님을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오한진은 이런 거짓말으로라도 박수혁의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하지만 오한진은 어디까지나 아이디어만 제공할 뿐, 전동하 정도 되는 거물의 흑역사를 직접 캐낼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없는 사람이었다.물론, 박수혁에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테지만.그제야 박수혁이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오한진을 바라보았다.“은정이는 뭐 좋아하지? 레시피대로 재료 준비해 줘요. 오늘 저녁에 연습 좀 해야겠으니까.”지금 박수혁에게 가장 절실한 건 이미지를 바꾸는 것. 그래서 좀 더 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박수혁의 말에 오한진이 흠칫했다.아니, 또 요리를 하시겠다고? 제발 주방에는 그만 들어오시라고요!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오한진의 속마음일 뿐,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 박수혁은 “가정적인 남자”라는 프레임에 푹 빠진 상태인데다 스스로가 요리에 재능이 없다는 걸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었으니까.박수혁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물던 오한진이 한숨을 쉬었다.“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죠.”휴, 오늘 주방 가전제품들 또 새로 갈아야겟네.오한진이 사무실을 떠나고 박수혁은 바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설 탐정에게 전화를 걸었다.분부를 마친 박수혁은 기분이 좋아진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이때 노크소리와 함께 기획부 부장이 머뭇거리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요즘 박수혁 대표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모두가 공공연히 알고 있는 사실, 게다가 기획안에 문제가 생기기까지 했으니 박수혁가 화를 내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대표님, 기획부 기획안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공사 기간이 한 달 정도 연장될 것 같네요.”공사 기간이 한 달이나 늘어난다는 건 한달치 경비가 늘어난다는 걸 의미했다. 이건 이익을 중요시하는 기업에게는 큰 실수, 부장은 제발 자르지만 말아달라고 기도하며 박수혁의 불 같은 호령을 기다리기 시작했다...과연 부장의 보고에 박수혁은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서슬 퍼런 눈빛에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부장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잠깐의 침묵 후 박수혁은 담담하게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