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다 지친 새봄이가 씻으러 들어간 뒤에야 전동하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소은정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가정부가 테이블에 놓인 와인잔을 치우며 전동하에게 말했다.“사모님은 술기운이 올라와서 쉬러 들어가셨어요.”전동하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조용히 침실로 올라가서 문을 열었다. 방 안은 무드등 한 개만 켜진 상태였고 소은정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그는 침대머리로 시선을 돌렸다. 약병을 열은 흔적은 없었다.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기분이 착잡하고 가슴이 쓰렸다.그는 조용히 방 문을 나섰다.약의 힘을 빌려 잠을 자는 것과 술에 취해 잠드는 것, 어떤 게 더 나을까?전동하는 그게 무엇이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그녀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들어하고 있었다.가정부가 자고 가라고 그를 말렸지만 그는 중요한 일정이 있다며 집을 빠져나왔다.뒤따라온 가정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여기 택시 잡기 어려운데 운전기사한테 연락은 하셨어요?”전동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1층으로 내려온 그는 바로 윤이한에게 전화를 걸었다.윤이한은 흔쾌히 동의했다.15분쯤 지나서 윤이한이 차를 끌고 아파트 입구에 나타났다.“빨리 왔네요?”전동하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말하자 윤이한은 쑥스럽게 머리를 긁적였다.“근처에서 고객사 임원들과 한잔하고 있었어요. 대표님도 가셔서 얼굴이나 비추실래요?”전동하는 고개를 저었다.“아니, 근처에 있는 청하병원까지 부탁해요.”“이 시간에 병원에는 왜요?”전동하는 그를 힐끗 보고는 덤덤하게 말했다.“출발해요.”“네. 그런데 시간도 늦었는데 왜 나왔어요? 사모님과 오랜만에 만났는데 하고 싶은 얘기도 많았을 텐데요. 아직 회사에는 대표님 돌아오셨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언제 편하실 때 회사에 얼굴 좀 비춰주세요. 직원들 사기가 올라갈 거예요.”윤이한은 신이 나서 주절주절 떠드느라 전동하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발견하지
최나영은 그가 이번에는 어떻게 해도 마음을 돌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전동하는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그는 더 이상 귀찮다는 이유로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이번 사고에 대해서 그는 진심이었다.그리고 그의 본모습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처럼 착하지도, 무르지도 않았다. 말투에서 느껴지는 살기와 서늘함은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앞세워 용서를 구하려던 그녀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이제 더 이상 약한 척, 불쌍한 척 그에게 들러붙을 수 없었다.그의 아내와 딸에 관한 일인데 그가 관용을 베풀 거라 생각했던 게 욕심이었다.최나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애원하듯 그를 바라봤다.“사장님, 다음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만이라도 안 될까요?”전동하는 계약해지 통보서를 그녀에게 건네며 싸늘하게 말했다.“내가 당신을 해고하는 거야. 우리나라 노동법에 의하면 당신은 정규직도 아니었고 3개월을 채우지도 않았으니 나한테 퇴직금을 지불할 의무는 없어. 하지만 처지를 생각해서 3개월 월급을 더 입금하지. 내가 원하는 건 당장 짐을 싸서 여기를 떠나는 거야.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그 말이 끝나자 최나영은 세상이 넘어지는 것 같았다.“사장님….”전동하는 단호하게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잘랐다.“지금 여기를 나가면 돼. 한 시간 지나서도 계속 버티고 있으면 짐 싸서 경찰서로 보내버릴 거야. 나를 악덕 사장이라고 신고해도 상관 없어.”말을 마친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조각 같이 잘생긴 외모였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냉정하고 무서웠다.최나영은 눈물을 닦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네, 떠날게요. 사장님은 저를 구해주셨지만 보답해 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어쩔 수 없지만 이렇게라도 제 마음을 표현하게 해주세요.”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단추를 풀었다.직원 유니폼은 그녀의 우월한 몸매를 더욱 부각시켰다.동료들은 그녀가 키도 크고 몸매도 좋다며 부러워했다.그녀는 겉옷을 벗고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
소찬식은 간곡하게 부탁하는 말투로 말했다.“밥 한끼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내가 중간에서 입장이 난처해서 그래.”소은정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점심에 데리고 갈게요.”소찬식은 그제야 기분이 좋아져서 말했다.“그래. 맛있는 거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을게!”전화를 끊은 소은정은 바로 내선전화로 송지학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오늘도 추가근무 있나요?”“그건 아니고 우리 아버지가 집에 한번 데리고 오라시네요. 다른 약속 있으면 거절해도 괜찮아요.”“오늘 약속 없어요. 아저씨 초대인데 제가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지금 갈게요.”송지학은 아주 흔쾌히 요청에 응했다.소은정은 불만스럽게 인상을 썼다.요즘 애들은 전혀 눈치가 없나?어른이랑 밥 먹는 자리가 불편할 법도 한데 이렇게 흔쾌히 응하다니!김하늘은 가족모임이라는 연락을 받고 소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버님이 많이 심심하신가 봐. 큰 아주버님이랑 형님이 병원에 계시고 우리 은해 오빠는 만나면 짜증나게 하니까 네가 많이 보고 싶은가 봐. 참, 아직 전동하 씨 돌아온 얘기는 안 했어?”“아직.”“왜? 너희 아직도 대화도 안 하고 그 상태야? 이상하다? 전에는 그렇게 죽고 못살더니 돌아왔으면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낯설게 왜 그래?”김하늘은 걱정스럽게 말을 이었다.“나도 어제 상황이 급박해서 짜증 좀 부렸어. 동하 씨 직원이 새봄이한테 사탕 먹여서 그 난리가 났잖아. 그래서 욕 좀 했는데 설마 그것 때문에 기분 상한 건 아니지?”소은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런 거 아니야. 새봄이가 그 사람 가게에서 사고가 났는데 욕 먹는 게 당연한 거지. 나라도 욕했을 거야.”김하늘은 한숨을 내쉬었다.“난 너희가 지금 왜 서먹해 하는지 이해가 안 돼. 할 얘기 있으면 터놓고 하면 되잖아. 아직 이혼한 사이도 아니고.”소은정이 말이 없자 김하늘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그 어린 비서는 설마 진짜 너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니지? 집에 같이 가자는 요청도 덥석 받고 말이야.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소은정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싫어도 떠안고 갈 수밖에 없죠. 이런 일이 처음 발생한 것도 아니잖아요. 잊었어요? 그때 호텔에서 유사한 실수가 있었잖아요. 그쪽에서는 다 환불 처리를 했지만 호텔 이미지는 1년이 지나서야 겨우 복구할 수 있었죠. 우리한테는 시간이 없으니 실수를 인정해야죠. 홍보라고 생각해요. 공식 페이지에 상황을 사실대로 밝히고 이미 구매한 고객들에 한정해서는 환불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접대하도록 하세요. 이거로 회사 이미지 좀 올리죠 뭐.”소은정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의 표정은 가관이었다.누군가는 그 말이 맞다며 동의했고 누군가는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적지 않은 금액이었다.“대표님, 하지만 손실 금액이 너무 커요.”소은정은 싸늘한 눈빛으로 담당자를 바라보며 말했다.“손실은 이미 발생했고 더 큰 손실을 피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요.”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새봄이었다.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엄마가 송 비서 오빠한테 우리를 데리러 오라고 했어?”새봄이는 송지학을 비서 오빠라고 친근하게 불렀다.소은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외할아버지네 집에 갈 거야. 오빠 말 잘 듣고 사고 치지 마. 알겠지?”“새봄이는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새봄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래. 너무 시간 끌지는 말고.”말을 마친 소은정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소은정은 얼굴에 먹구름이 낀 담당자들을 바라보았다.그녀도 안타깝지만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홍보팀 팀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저희가 해명문을 발표하고 어떻게든 최대한 손실금액을 낮추는 쪽으로 검토해 볼게요.”“저도 동의합니다.”“그렇게 하시죠.”다른 사람들도 분분히 고개를 끄덕였다.소은정은 남은 뒤처리를 직원들에게 맡기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한 담당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실수한 직원은 어떻게 처리할까요?”아직도 화가 덜 풀린 이 팀장이었다.해결 방안은 나왔
“너 언제 올 거야? 은정이랑 같이 오는 거 아니었어?”소찬식의 근엄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옆에 있던 전동하의 귀까지 전해졌다.송지학은 당황한 표정으로 전동하를 바라보고는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대표님은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늦게 도착하실 거예요. 저는 새봄이 준서 데리고 곧 갈 거예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그래, 빨리 와.”말을 마친 소찬식은 전화를 끊었다.송지학이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전동하가 아이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새봄이는 토라진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더 이상 떼를 쓰지는 않았다.전동하는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어서 가.”새봄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송지학에게 다가갔다.자리에 남은 문준서는 만져달라고 목을 길게 빼들었다.전동하는 못 말린다는 듯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너도 빨리 가. 가서 재밌게 놀아.”아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흔들었다.“아빠, 또 봐요!”송지학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하고 아이들과 함께 차로 향했다.그들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없었다.서로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차에 오르려던 문준서가 갑자기 전동하에게 되돌아와서 말했다.“저 뭔가 알 것 같아요. 양엄마가 양아빠한테 싫증난 거 아니에요? 그래서 집도 못 돌아오신 거죠?”전동하는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문준서가 눈을 깜빡이며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차라리 양엄마한테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빌어요. 더 지체하면 저한테 다른 양아빠가 생길 것 같으니까요!”전동하의 주변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그는 싸늘한 시선으로 아이에게 말했다.“가서 나 만났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마!”준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양아빠,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화나게 한 거예요? 이제 외할아버지랑 다른 가족들도 못 보는 거예요?”전동하가 인상을 확 쓰고 화를 내려 하자 문준서는 언제 그랬냐 싶게 도망갔다.교활한 녀석!차에 오른 뒤에 새봄이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송지학은 뒷좌석에서 자고 있는 새봄이를 힐끗 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애들은 부모가 왜 헤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한참이 지나도록 소은정은 답이 없었다.예쁜 눈동자에 슬픔이 사무쳤다.그녀는 한참 뒤에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우린 헤어지지 않았어요.”송지학은 놀라서 그녀를 빤히 보다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회사로 돌아간 소은정은 인터넷 여론부터 확인했다. 회사의 실수에 관해 질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해한다는 입장이었다.홍보팀의 발 빠른 해명과 사고 당사자가 직접 나서서 앞뒤 상황을 해명하자 오히려 SC그룹을 응원한다는 입장이 대부분이었다.조금 손실은 있었지만 그래도 이미지는 더 좋아졌다.“대기업다운 풍채를 보여줬어. 예전에 모 호텔에서 전부 강제 환불 처리했던 거 기억해? 그러면서 실수인 걸 알면서 구매한 네티즌들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했잖아. 그런데 역시 SC는 남달라!”“여신님, 영원히 응원할게요! 저도 할인권 샀어요!”“못 사서 아쉽기는 한데 다음에 원가로 구매해서 놀러 갈 의향 있음!”소은정은 우호적으로 돌아선 여론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아직 기뻐하기는 일렀다.해결하지 못한 일이 그녀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핸드폰 화면이 깜빡였다.“여보세요. 네, 지금은 시간 괜찮아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하지만 일시적인 현상일 뿐, 조금 쉬니까 괜찮아졌다.그녀는 가방을 챙기고 근처에 있는 정신과로 향했다.소은해가 그녀에게 소개한 정신과 의사였다.가족들이 신원을 보장했기에 그녀는 현재 조우태라는 그 의사를 매우 신뢰하고 있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안내데스크 직원들은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소은정을 발견한 직원이 웃으며 인사했다.“소은정 씨죠?”소은정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조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사무실로 가보니 조우태가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들어가자 그
소은정이 들어가서 와인 한 잔을 부탁했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원형 무대에서 어떤 여자가 기타를 들고 조용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허스키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여자는 진한 화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거칠고 낮았으며, 진한 화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웠다.소은정이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자 바텐더가 웃으며 그녀를 소개했다."저분이 우리 사장님이십니다." 눈썹을 찡그린 소은정은 바텐더가 건넨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소은정이 눈썹을 찡그리며 술을 마셨다."노래 정말 좋네요."바텐더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심란해진 소은정은 연커푸 와인을 들이켰다. 바텐더는 소은정을 힐끗 바라보았다.여자가 노래를 끝내고 무대 아래로 내려오자 바텐더가 급히 말했다."사장님, 이 분이 많이 취하신 거 같은데 어떡하죠? 여기 처음이신 거 같은데..."남유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취해 앉아 있는 소은정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얼굴을 확인하던 남유주는 소은정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소은정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손님, 술을 너무 많이 마셨네요, 저희가 가족이나 지인분들에게 연락 도와드릴게요. 누구에게 연락드릴까요?"하지만 소은정은 묵묵부답이었다. 머리를 쓸어 넘긴 남유주는 결국 테이블 위에 놓인 소은정의 휴대폰을 들어 소은정의 손가락을 가져다 잠금을 해제했다.정신을 차린 소은정이 얼굴을 찌푸리고 남유주를 바라보았다."남편에게 전화해 주세요."'딱 봐도 젊은 사람인데, 일찍 결혼했네?'소은정을 훑던 남유주는 심상치 않은 스타일에서 소은정이 결코 평볌한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휴대폰을 열어 남편이라는 사람에게 연락하려 했으나 연락처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결국 그녀는 통화목록에 있는 마지막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은정 씨?"당황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유주가 대답했다."저는 은정 씨가 아니고요, 여기 와인 바인데 손님분께서 술을 많이 마셨어요.
전동하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기 정체를 인정했다.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중년 남자의 온화한 외모와 강인한 모습으로 보아 전동하는 그를 결코 속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소은정이 위급하다는 핑계를 대며 전동하를 여기까지 이끈 사람이 조우태였다.전동하의 몸이 불편하다는 걸 눈치챈 조우태는 마음 한편에서 묘한 동정심을 느꼈다.조우태는 동정의 시선으로 전동하를 바라보지 않았다. 자기 시선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 수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자기가 걸었던 번호가 전동하였다는 사실에 그는 희열을 감추지 못했다."죄송합니다. 은정 씨가 실제로 알코올 중독으로 실려 왔어요. 은정 씨와 가장 최근에 통화한 사람이 저라 와인바 사장님께서 저한테 연락했더라고요. 친구라고 생각했나 봐요. 저보다는 보호자분이, 남편분이 직접 오시는 게 옳다고 판단해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하게 됐어요."그는 '남편'이라는 두 글자를 중점적으로 강조했다.전동하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맙습니다.""천만에요, 제가 직업 특성상 정신과 의사이다 보니 은정 씨가 저랑 만나는 걸 꺼려 할 것 같아요." 꺼려 한다는 말을 들은 전동하가 반응이 미세하게 변했다. 정신과 의사라도 전동하 같은 사람의 내면을 헤아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리 방어 메커니즘은 상황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가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 심리를 들킬 수밖에 없었다."동하 씨가 돌아오셨으니까 은정 씨도 곧 좋아질 것 같네요. 앞으로 동하 씨가 은정 씨 약 좀 챙겨주세요. 정기적으로 상담 받으러 오면 은정 씨 정신 건강에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부탁드릴게요."인상을 찌푸린 전동하를 아랑곳하지 않고 조우태는 말을 이었다.전동하는 심란한 눈빛으로 누워서 곤히 자는 그녀를 바라보았다.둘을 번갈아 보며 미소를 짓던 조우태가 말했다."다른 환자분 예약이 있어 오래 머물 수 없을 것 같네요. 오늘은 여기서 안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