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한은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전동하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그는 지팡이를 짚고 불편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전동하를 보고 웃음을 거두었다.다리가 왜 저러지?전동하는 여전히 무감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직원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그 모습을 보고 급히 그에게 다가갔다.“사장님.”전동하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직원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한번 바라보고 뒤로 물러섰다.윤이한은 그제야 왜 소은정이 전동하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무거운 정적이 흘렀다.아래층으로 내려온 전동하는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고는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따라와요.”윤이한은 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그는 불편해 보이는 전동하의 뒷모습을 보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에게서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침울하고 무기력한 모습이 보였다.윤이한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전동하는 정원을 내다볼 수 있는 창가에 위치한 자리에 앉았다. 윤이한은 여전히 자리에 서서 착잡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전동하가 손짓하며 말했다.“앉아요.”자리에 앉은 윤이한이 물었다.“대표님, 언제 돌아오셨어요? 저는 대표님이….”전동하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끊었다.“내가 죽은 줄 알았어요?”윤이한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모두가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사모님은 대표님이 돌아가셨을 리 없다고 항상 말씀하셨거든요.”전동하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윤이한은 아까 봤던 그 직원이 떠올랐다.전동하와 주고받던 그 눈빛을 보면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그는 소은정이 안쓰럽고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대표님이 이러시면 안 되죠.’가장의 책임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소은정은 그를 위해 많은 희생을 했다. 그걸 안다면 당연히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게 옳지 않을까?아까 본 직원은 몸매는 꽤 봐줄만 했지만 그냥 평범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여자에게 전동하를 빼앗긴 소은정은 어떤 심정일까?윤이한은
전동하는 우울증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심장이 짓이기는 것처럼 아팠다.윤이한이 말했다.“저도 우 비서한테 들은 거라 자세한 상황은 몰라요. 사모님 혼자 정기적으로 정신과 방문한다고 하더라고요.”“담당 의사가 누군지 알아보세요.”전동하가 담담히 말했다.“네.”윤이한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그가 소은정에게 신경 쓰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윤이한을 보낸 뒤, 전동하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최나영은 그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사장님, 들어가서 쉬세요. 여기서 잠들면 감기 걸려요.”전동하는 인상을 쓰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최나영 씨, 이제 떠나도 좋다고 말한 것 같은데요.”최나영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그에게 말했다.“제가 뭘 또 잘못했나요? 사장님, 저 오갈데 없어요. 귀국해도 마땅히 일할데도 없고요. 이 다리로 어딜 가서 일자리를 구하겠어요.”그녀는 울먹이며 매달렸지만 전동하의 표정은 단호했다.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국내는 장애인 복지가 좋다고 들었어요. 필요하면 내가 일자리를 알아봐 줄 수도 있어요.”최나영은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입술을 덜덜 떨었다.“저는… 제가 장애인이라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요. 사람들이 저를 불쌍하게 바라보는 것도 싫어요.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사장님.”그녀는 같은 장애인으로써 전동하도 자신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거라 생각했다.전동하는 피곤한 듯, 이마를 짚더니 짜증스럽게 말했다.“이 가게 처음부터 오래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러니까 나영 씨도 더 늦기 전에 일자리를 구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사장님이 어딜 가든 저는 따라갈게요. 사장님은 제 목숨을 구해주신 은인이세요. 평생 사장님 말만 따를 거에요!”최나영은 당황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또박또박 했다.전동하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최나영 씨, 난 고용인도 필요하지 않고 나영
“아닙니다. 주소를 제대로 찾아와서 다행이네요. 애들이 거리에서 위험하게 택시를 잡고 있길래 경찰서에 데려가려다가 아이들이 아버님이랑 연락하고 가는 거라고 해서 데려왔어요.”택시기사는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전동하는 표정을 풀고 지갑에서 오만 원권 지폐를 몇 장 꺼내 그에게 건넸다.“어쨌든 감사합니다.”택시기사는 지폐 한 장만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를 그에게 도로 건넸다.“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요. 5만원이면 충분합니다.”말을 마친 그는 바로 걸음을 돌렸다.택시기사를 보낸 뒤, 전동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새봄이와 문준서를 바라봤다.문준서는 잘못을 알고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하지만 새봄이는 잘못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아빠 만나서 좋다고 그에게 매달렸다.아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아빠, 우리 정말 똑똑하지 않아?”전동하는 잠시 침묵하다가 자세를 숙이고 새봄이를 안으며 말했다.“앞으로는 그러지 마.”그는 문준서를 바라보며 정색해서 말했다.“만약 너희들이 만난 택시기사가 나쁜 사람이었으면 어땠을 것 같아?”문준서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사실 아침에 양엄마도 절대 땡땡이 치지 말라고 당부하셨는데 새봄이가 아빠가 너무 보고 싶다고 해서….”전동하는 움찔하며 착잡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았다.“앞으로는 그러지 마. 준서 너도 동생이 억지 부릴 때 다 들어줄 필요는 없어. 계속 애 오냐오냐 하면 지혁이한테 맡길 거야.”문준서는 새봄이의 무리한 요구에도 절대 거절하는 법을 몰랐다. 이런 상황이 계속 지속되면 새봄이에게도 좋을 거 하나 없었다.문준서는 고개를 들고 정색하며 말했다.“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요.”새봄이는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 내밀었다.“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단 말이야.”전동하는 화가 사르르 풀렸지만 정색하며 말했다.“학교 끝나고 와도 되잖아. 주말에 아빠한테 전화하면 바로 데리러 갔을 거야. 엄마는 너 여기 온 것도 모르시는데 너 사라졌다고 걱정할 사람들이 수두룩해
목적지에 도착하자 김하늘은 먼저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그녀는 약간 수상함을 느끼고 있었다.비슷한 규모의 다른 레스토랑에 비해 인테리어가 아주 화려했다.“어서 오세요. 몇 분이시죠?”“두 명이요.”“이쪽으로 오세요.”직원의 안내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한편 최나영은 멀리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전동하를 바라보았다.전동하는 사랑스럽게 생긴 여자아이가 원하는 건 거의 다 들어주고 있었고 아이한테 말할 때면 목소리조차 부드럽게 바뀌었다.부모의 예쁜 곳만 빼다 닮은 새봄이는 정말 미치게 사랑스러웠다.크고 맑은 눈동자와 긴 속눈썹, 그리고 웃을 때 생기는 보조개까지 어디 하나 안 예쁜 구석이 없었다.전동하의 재활 시간이 다가왔다. 그의 방에는 해외에서 가져온 재활 기구들이 있었는데 매일 40분에서 한 시간씩 재활 운동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오늘은 뜻하지 않게 새봄이와 준서가 찾아와서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가 점점 지쳐갈 때쯤, 참다못한 최나영이 다가가서 애들 봐줄 테니 다녀오라고 말했다.전동하는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애들한테 뭘 해줄 필요는 없어요. 그냥 놀다가 다치지 않게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돼요.”최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전동하는 새봄이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빠 갔다 올 테니까 여기서 놀고 있어.”새봄이는 분수대에 있는 관상어에 정신이 팔려 흔쾌히 수락했다.문준서도 옆에서 가슴을 치며 말했다.“양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전동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절뚝거리며 방으로 향했다.최나영은 다가가서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지만 놀이에 빠진 아이들은 응대해 주지 않았다.최나영은 전동하의 딸과 가깝게 지내고 싶었다.그녀는 그와 관련된 모든 것에 관심이 갔다.“아가, 나가서 놀래?”만약 오늘 애들한테서 좋은 평가를 듣는다면 전동하가 자신을 쫓아내지 않을 수도 있었다.문준서가 정색하며 말했다.“서빙 이모, 아빠는 함부로 밖에 나가지 말라고
그 순간 놀란 새봄이가 드디어 울음을 터뜨렸다.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고통에 아이는 겁에 질렸다.새봄이는 소은정의 목을 꽉 끌어안고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긴장감이 풀린 소은정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그녀는 아이의 등을 다독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새봄이 괜찮아. 엄마랑 병원 가자.”말을 마친 그녀는 아이를 안고 냅다 밖으로 뛰었다.남은 사람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한편 재활 운동을 하고 피곤한 몸을 끌고 밖으로 나온 전동하는 아이를 안고 뛰어가는 소은정을 보고 다급히 다가왔다.남아 있는 문준서와 김하늘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그는 다가가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죠?”고개를 들고 전동하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김하늘은 아까부터 들었던 수상한 느낌의 근원을 알아챘다.최나영이 아이에게 사탕을 먹인 모습이 떠오르자 그녀는 분노가 치밀었다.김하늘은 굳은 표정으로 전동하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아니 어떻게 아이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맡길 수 있죠? 이 여자가 새봄이한테 사탕 먹였다가 목에 걸려서 큰일 날 뻔한 거 알아요? 이제 만족해요? 일부러 그런 거예요? 정말 수치심도 모르고 양심도 없는 인간들은 다른 사람한테 피해주지 말고 나가서 죽어 버렸으면 좋겠네요! 새봄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가만히 안 넘어갈 줄 알아요!”그녀는 전동하를 확 쏘아보고는 밖으로 나갔다.전동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최나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했다.“사장님, 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애랑 좀 친해지려다가 이렇게 된 거예요.”이런 사고가 날 줄 알았으면 사탕으로 아이를 유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전동하는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서 지팡이를 가지고 나왔다.문준서도 많이 놀랐는지 울고 있었다.소은정은 이미 새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출발했다.준서는 자기가 새봄이를 지켜주지 못한 것에 큰 죄책감을 느꼈다.아래층으로 내려온 전동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최나영을 무시하고 곧장 문준서에게 다가
문준서가 안으로 달려들어갔다.전동하는 밖에서 잠자코 기다렸다.소은정을 볼 때마다 숨막히는 아픔이 느껴졌다.다가가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그녀의 눈빛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녀의 동정 어린 시선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주변 사람들은 잘 숨긴다고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서 무심결에 흘러 나오는 동정심이 그를 불편하게 했다.그는 소은정의 눈에서도 같은 감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의사가 새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아이는 많이 놀랐는지 아직도 눈물을 글썽이며 흐느끼고 있었다.소은정과 전동하를 본 아이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아빠, 안아줘.”새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전동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전동하는 안쓰러운 마음에 얼른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빠 품에 안긴 아이는 목을 꽉 끌어안고 훌쩍였다.의사가 말했다.“사탕이 목에 걸려서 목안에 상처를 좀 냈어요. 그래도 응급처치를 잘해서 다행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요. 조금만 늦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소은정은 그때 상황만 떠올리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감사합니다.”“목안에 상처가 났으니 침에 피가 섞여 나올 수도 있어요. 최근 며칠간은 각별히 주의해 주세요. 너무 딱딱한 것도 먹이지 말고 죽이나 부드러운 음식 위주로 주세요.”의사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이 나이대 애들 보기 참 힘들죠? 그래도 어른들이 신경을 좀 더 써야 해요. 이렇게 어린애한테 알사탕이라뇨. 애가 떼를 부려도 차라리 다른 간식을 주는 게 나아요.”소은정은 말없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전동하의 얼굴도 싸늘하게 식었다.옆에 있던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선생님. 평소에는 항상 조심하는데 이번에는 사고였어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다른 약은 안 먹어도 되나요?”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소염제만 처방할게요. 저를 따라오세요.”“네.”김하늘은 의사를 따라 자리를 떴다.자리에 남은 문준서는 걱정
새봄이가 이렇게까지 애원하는데도 그는 집에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집에 그녀가 있어서 불편해서일까? 아니면 레스토랑에 있는 그녀가 신경 쓰여서 그러는 걸까?소은정은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리고 문준서의 손을 잡았다.그들 부녀에게 둘만 있을 시간을 주기 위한 그녀의 배려였다.김하늘도 말없이 소은정을 따라갔다.엘리베이터에 먼저 오른 그들은 바로 버튼을 누르지 않고 뒤에 오는 전동하와 새봄이를 기다렸다.전동하는 약간 비틀거리며 아이를 안고 다가오다가 자신을 기다리는 그들을 보자 괜히 초라해진 기분이 들었다.소은정은 그의 지팡이와 오른 다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전동하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얼굴이 화끈거리고 수치심에 땅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그는 초라한 모습으로 그녀의 앞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이 한탄스러웠다.소은정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눈부시게 예뻤다.그래서 그는 장애인이 된 자신이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그녀의 곁에 돌아갈 수 있을까?그가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문준서가 그를 향해 손짓했다.“양아빠, 빨리 타요!”전동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경직된 자세로 안으로 들어갔다.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다른 손으로 새봄이를 안고 있어서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그는 허둥지둥 지팡이를 옆에 세우고 버튼을 향해 손을 뻗었다.하지만 다리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며 중심을 잃었다.오늘 재활 치료 시간을 채우지 못했기에 일어난 근육통이었다.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뒤에서 뻗어 나와 가볍게 버튼을 눌렀다.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엘리베이터가 하강했다.그는 경직된 자세로 어색하게 서서 지팡이를 다시 잡고 얕은 신음을 토해냈다.뒤에 있던 소은정이 무심코 물었다.“다리가 많이 아파요?”그는 한참 침묵하다가 겨우 한마디 대답했다.“견딜만해요.”애써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소은정은 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감정을 감
소은정은 인상을 쓰며 처방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하늘이도 참. 복용법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약만 받아왔네요. 그 의사 연락처도 모르는데 이건 몇 알을 먹여야 하지?”그녀는 이런 것에 무감한 편이었다.과거에는 전동하가 항상 약을 분할해서 약통에 넣어주었기 때문에 이런 것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글자가 빼곡히 적힌 처방전만 봐도 머리가 아팠다.전동하는 짧은 한숨을 쉬고는 다가갔다.“내가 한번 볼게요.”소은정은 처방전을 그에게 건네고 자기가 할 일을 했다.전동하는 처방전을 꼼꼼히 읽은 뒤, 약통에 용량을 적었다.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다시 약통에 있는 약을 꺼내서 한번 먹을 양을 따로 담아 분할했다.아직 집에 작은 약통이 남아 있을 텐데 소은정은 서재로 들어가고 가정부도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가 알아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의약품 상자는 그들의 침실에 있었다.다행히 입구에 있는 장롱 맨 아래칸에 있었기에 침실에 완전히 들어가지 않고 꺼낼 수 있었다.약병만 챙긴 그가 자리를 뜨려던 순간, 침대머리에 지저분하게 놓여 있는 약병이 보였다.약품 설명이 전부 영문으로 되어 있었다.설명서를 꼼꼼하게 읽어본 그는 그게 수면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전동하는 흠칫하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국내에서는 사용이 금지된 강도 높은 수면제였다.하지만 그녀의 능력으로 이것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다른 약통도 비슷한 용도로 항우울증 치료제들이었다.그의 몸이 차갑게 얼어붙었고 갑자기 한기가 느껴지면서 온몸이 떨려왔다.그는 고통스럽게 신음을 내뱉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다리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것보다 가슴이 너무 괴로웠다.그녀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수면제와 항우울증제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정신과 진료를 받는다는 걸 알았을 때도 그녀가 잘 이겨낼 거라 믿었다.요트에서 만났던 그녀는 겉보기에 나쁘지 않아 보엿다.하지만 그건 모두 그의 오해였고 현실은 잔인했다.그는 운명이 자신에게 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