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연인을 대하는 것 같은 심강열의 달콤한 목소리에 한유라는 왠지 당황스러웠다.‘뭐... 뭐야. 우리가 안 지 얼마나 됐다고. 내 착각이겠지?’잠시 후, 회사.심강열이 한유라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마침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라 그런지 엘리베이터에 사람들이 꽤 많이 몰려들고 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한유라의 손목을 홱 잡아당겼다.2층에서 사람들이 더 타고 한유라는 자연스럽게 구석으로 밀려나고 말았다.인파에 밀려나는 한유라의 모습에 심강열은 몰래 욕설을 내뱉었다.‘윽, 조금 뒤에 올걸...’각 부서 사무실에 도착할 때마다 직원들이 한, 두 명씩 내리고 드디어 엘리베이터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그제야 한유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휴, 구두 밟히는 줄 알았네. 한정판인데.’비록 심해그룹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김현숙이 운영하는 회사도 나름 규모를 자랑하는 곳, 평생 엘리베이터를 타도 버튼 한 번 스스로 눌러본 적이 별로 없는 한유라였다.그런 그녀의 당황스러운 표정에 심강열이 물었다.“적응 안 되지?”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던 한유라가 싱긋 웃었다.“아, 아니. 그냥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네.”‘돈도 많은 사람이... 전용 엘리베이터 하나 만들지.’하지만 심강열의 생각은 달랐다. 바쁘게 움직이며 대표 얼굴도 못 알아보는 직원들을 바라보며 묘한 흐뭇함을 느끼는 게 이상하다면 이상한 심강열의 취미 중 하나였다.잔뜩 당황했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한유라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사람들이랑 우르르 엘리베이터 타는 거 별로면 출퇴근 시간 따로 빼줄게.”잠깐 멈칫하던 그가 말을 이어갔다.“지각해도 봐줄게.”이때 한유라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담담해? 그리고 직원들은 당신이 대표인 줄 모르고 있는 것 같던데?”한유라는 방금 전 엘리베이터에서 심강열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각자 할 일만 하던 직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내가 뭐 연예인도 아니고. 그리고 다들 돈 벌
잠시 후, 세 사람은 대표 사무실에 입성했다.깔끔하고 차분한 그레이톤이 메인 컬러인 사무실, 심강열의 이미지처럼 진중하고 고급스러웠다.필요없는 인테리어는 최대한 뺐지만 누추하긴커녕 오히려 더 분위기 있게 느껴졌다.심강열이 재킷을 소파에 올려두고 조 비서는 눈치껏 재킷을 옷걸이에 걸어둔 뒤 업무 보고를 시작했다.“대표님, 오전에 신 원장님께서 오셨다 가셨습니다. 방금 전까지 있다가 가셨어요.”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심강열은 고개를 끄덕였다.“식사는 하고 가셨어요?”“네, 저랑 유 이사님이랑 같이 드셨습니다.”심강열이 고개를 끄덕였다.“그쪽 병원은 지금 우리 그룹 의료 설비 시장을 완전히 독점할 생각이에요. 이 기회에 크게 한 번 벌어볼 생각인 것 같은데 그렇게 쉽게 들어줄 수야 없죠. 일단 최대한 시간 끌어줘요.”고개를 끄덕인 조 비서는 어느새 자기 사무실처럼 편하게 소파에 앉아있는 한유라를 힐끗 돌아보았다.“아, 다시 소개할게요. 오늘부터 우리 회사에서 일하실 한유라 씨입니다.”“네?”조희찬이 눈이 커다래졌다.‘직원으로 일하신다고? 사모님이?’이미 운명을 받아들인 한유라가 조희찬을 향해 싱긋 웃었다.“앞으로 잘 부탁드려요.”사모님한테서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들으니 조희찬은 왠지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한편, 심강열은 조희찬을 향해 환하게 웃는 한유라를 발견하고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인사팀한테 정식으로 입사절차 밟도록 해줘요. 오늘부터 출근입니다.”이에 한유라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이렇게 본격적으로 한다고?”“당연하지. 장모님도 내가 이렇게 나와주길 바라실걸?”심강열의 말에 한유라도 백번 동의했지만 뭔가 빠트린 듯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아, 그럼 어느 팀으로...”조희찬이 조심스레 물었다.‘이사? 본부장? 적어도 팀장 자리 정도는 달아주시겠지.’“아, 제 비서로 일할 겁니다.”순간 조희찬도 한유라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조 비서님과 마찬가지로요.”심강열이 한 마디 더 덧붙이자 한유라가 어색하게
갑작스러운 희소식에 조희찬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비록 수석 비서관도 충분히 높은 자리이긴 했지만 어느 어느 팀 팀장이네 본부장이네. 밖에 나가 말했을 때 그럴 듯한 직함과 달리 비서라고 대답하면 어딘지 모르게 대표 뒤나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뭐 실제로 졸졸 따라다니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굳이 비유하자면 왕의 곁을 지키는 내관 같은 기분이랄까? 궁 사람들의 존중을 받긴 하지만 어딘지 허전한 그런 기분이었다.하지만 기획팀으로 옮겨가면 실질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고 더 자유롭게 그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감사합니다. 대표님. 기대 져버리지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하지만 한유라는 조희찬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차라리 엄마 곁에 있는 게 나을 뻔했어. 자주 혼나긴 해도 결국 뒤처리는 엄마가 다 해주시니까 마음만은 편했는데. 저 사람은... 그냥 대충 넘어갈 생각이 없는 것 같단 말이지?’잠시 후, 조희찬이 사무실을 나서고 심강열이 소파로 다가왔다.“표정이 왜 그래? 줄초상 난 사람처럼?”“그럼? 나도 조 비서님처럼 고맙다고 인사라도 드릴까? 새 비서 뽑으셔서 대표님은 기분 좋으시겠어요?”한유라가 눈을 흘겼다.그녀의 비아냥거림에도 심강열은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눈치였다.“응, 난 기분 좋은데? 너랑 같이 일할 수 있으니까.”“우리 두 사람 자리가 바뀌었다고 생각해 봐. 그래도 그렇게 웃을 수 있겠어?”한유라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뒤로 돌아 사무실 책상을 힐끗 바라본 심강열이 어깨를 으쓱했다.“아, 저 자리가 욕심났었어?”‘하, 참나. 못 알아듣는 척하긴.’한유라가 고개를 돌려버렸다.‘이사, 본부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팀장님 소리는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뭐,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네 날개가 단단해지면 저 자리 너한테 내줄게.”“누가 갖고 싶대?”한유라가 눈을 흘겼다.분명 눈앞의 여자는 말도 안 되는 억지
‘뭐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해 주니까... 내가 한 번은 봐준다.’이미 마음은 풀렸지만 한유라는 짐짓 아직 화난 척 고개를 돌렸다.“알겠는데... 월급은 제대로 줘야 해?”‘아무리 배우는 입장이라지만 공짜로는 일 못하지.’심강열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조 비서 월급이 4억 정도인데... 당신은 특별히 나 도와주려고 온 거니까 5억으로 맞춰줄게. 어때?”심강열의 말에 한유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헐, 우리 엄마도 5억은 안 주는데. 심해그룹... 비서 연봉도 그렇게 높단 말이지? 깡도 참... 먼저 연봉부터 얘기하지. 그럼 아무 불만없이 바로 오케이 했을 텐데.’물론 전 회사에서도 연봉은 받았지만 김현숙의 카드, aka 엄카로 생활하는 한유라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하지만 너무 좋아했다간 괜히 돈만 밝히는 속물에 없어 보일 것만 같아 자꾸만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렸다.한유라의 기분이 조금은 풀린 것 같자 심강열도 흐뭇해졌다.연봉 협상도 끝났겠다, 한유라는 바로 비서라는 새로운 배역에 몰입하기 시작했다.“그럼 우리 사이는 일단 공개하지 않는 게 좋겠어. 다른 사람들이 알면 좀 그렇잖아.”“뭐가 좀 그런데?”심강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남편 백으로 들어온 여자 같잖아.”‘남편 백으로 들어온 거 맞잖아...’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심강열의 생각일 뿐.“그래, 네 말대로 해. 그리고 어차피... 오래는 못 숨겨. 다음 달이면 바로 결혼식이잖아.”“그러니까 어차피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텐데 굳이 우리가 먼저 떠벌리고 다닐 건 없다 이거지.”말을 마친 한유라는 사무실을 둘러보다 싱긋 웃었다.“그런데... 아까 나한테 한 말 내가 다른 사람한테 다 하면 어쩌려고 그래? 알지? 은정이 내 찐친인 거.”“말해. 어차피 다들 알고 있는 비밀 같은 거니까.”심해그룹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SC그룹과 태한그룹에 비할 바는 못 될 게 분명, 지금 두 회사의 사이가 애매한 게 다른 회사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사모님에 대한 마지막 예우를 지킨 조희찬은 여전히 의아했다.‘날고 기는 인재들은 쳐다도 안 보시더니. 왜 하필 사모님을? 설마... 우리 대표님도 드라마 보시나? 대표와 비서의 두근두근 비밀 사내연애 이런 걸 꿈꾸시는 거야?’심해그룹의 분위기는 뭐랄까.프리하면서도 엄숙했다.수석 비서가 바뀌었으면 적어도 같은 비서실 사람들은 술렁일 줄 알았는데. 간단한 자기소개를 제외하곤 다들 자기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굳이 한유라의 정체에 대해 수군대는 것도 없이 말이다.그렇게 어리둥절한 상태로 업무를 대충 익힌 한유라는 이미 어두워진 창밖 풍경을 발견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뭐? 8시?’한유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하, 야근은 절대 안 되지.’핸드백을 챙긴 한유라가 문을 벌컥 연 순간, 마침 그녀를 보러 오려던 심강열과 마주치고 그녀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5억? 하, 이 정도 업무량이면 10억은 줘야지!’“오늘 첫날이라 많이 힘들었지? 배 안 고파? 내가 맛있는 거 사줄까?”입이 잔뜩 나온 한유라가 그를 밀쳐내고 사무실을 나섰다.“아, 몰라. 나 퇴근할 거니까 말리지 마.”뒤에 덩그러니 남은 심강열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 뒤를 따랐다.“왜 따라와.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한유라가 소곤댔다.“누가 본다고 그래. 다들 퇴근했구만.”그 말에 주위를 둘러본 한유라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진짜네. 우리 둘 빼곤 한 명도 없어.”“회사 규정이야. 매일 해야 할 일만 마치고 바로 집에 가기. 야근 하려면 부장 선에서 미리 보고서 올려야 해.”심강열의 설명에 한유라는 눈을 껌벅였다.“허, 진짜 좋은 대표님이네. 이렇게 자비로운 대표님은 처음 봐.”한편, 다시 엘리베이터 앞에 선 한유라는 복도 한 구석에 놓인 건축자재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뭐 어디 손 보게? 건물이 완전히 새 건 아니지만 손 보려면 돈 꽤 나갈 텐데.”“아니. 엘리베이터 하나 설치하려고.”심강열의 대답은 마치 하늘거리는 깃털처럼 한유라의 마음을
한유라와 함께 걷던 심강열이 고개를 저었다.“아니, 내가 이제 불편해서 그래. 그래도 명색이 대표인데 직원들한테 끼여서 출퇴근 하는 건 좀 모양 빠지잖아?”‘쳇, 어차피 돈도 많겠다. 하고 싶은대로 하라지 뭐.’한유라는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더 숙였다.잠시 후, 심강열은 한유라를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향했다.계산대 앞에서 심강열이 우연히 지인을 만나고 한유라는 대충 자리를 피해 소은정과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소은정: 내일 쇼핑 안 할래?한유라: 시간 없어. 나 일해야 해.소은정: 미친. 뭐 잘못 먹었어?한유라: 그런 거 아니야. 아무튼 그렇게 됐어.소은정: 뭐 돈 부족하니?평소 워낙 베짱이 같은 삶을 살아오던 한유라라 소은정의 첫 반응은 바로 한유라의 회사에 큰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다였다.소은정의 반응에 한유라는 왠지 얼굴이 뜨거워졌다.“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나 이직했어. 오늘부터 심해그룹 심강열 대표 비서야.”“하... 아, 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한유라가 답장을 보며 헤실거리던 그때 룸 문이 열리고 당연히 심강열인 줄 알고 웃으며 일어서던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민하준?’민하준은 전보다 훨씬 더 음울해진 모습이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더 날카로워진 눈은 한유라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마침 이곳에서 식사를 하다 심강열을 발견하곤 혹시나 싶어 룸으로 들어와봤더니 정말 한유라가 있을 줄이야.‘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이제 저 자식이랑 이렇게 대놓고 다닐 정도로 가까워진 거야?’앞으로 당연하다는 듯 심강열 옆에 서 있을 한유라의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욱신거렸다.반면, 한유라가 잔뜩 경계하며 물었다.“네가 여길 어떻게... 나가.”하지만 민하준은 더 가까이 다가섰다.“왜 그래? 우리가 그렇게 내외할 사이는 아니잖아.”“그렇다고 친한 척 대화할 사이도 아니지. 이젠 다 끝났으니까.”“다 끝났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무섭게 한유라를 노려보는 눈과 달리
정정당당하게 그녀의 곁에 서고 싶어 이혼까지 강행했는데 결국 그는 한유라를 화나게 만들었고 질리게 만들었고 떠나게 만들었다.그래도... 그저 잠깐 동안의 이별이라 생각했다.어찌 보면 법보다 더 무서운 도덕적인 질타를 무시하면서도 한유라는 그의 곁에 있는 걸 선택했으니까.게다가 이제는 이혼까지 했겠다. 구설수도 언젠가 사라질 테고 한평생 한유라와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이제 당연하다는 듯 다른 사람과 함께인 모습을 보니 새삼스레 느껴졌다.‘아, 이 여자는 내 인생을 비추는 태양이 아니라 그저 스쳐지나는 바람이었구나.’이제 그를 바라보는 한유라의 눈빛에선 더 이상 증오도 느껴지지 않아 더 공허하고 절망스러웠지만 그래도 단 0.1%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다시 매달리고 싶었다.“아직도 나한테 화났어? 그 프로젝트는 왜 양보한 거야? 지채영 그 여자가 또 찾아와서 뭐라고 했어?”지채영이 무너져가는 걸 알고 있었지만 민하준은 돕지 않았다.그가 마지막 동아줄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그렇게 완전히 지채영의 몰락을 지켜보고 싶었는데 한유라가 프로젝트를 양보했다는 소식에 민하준은 당황스러웠다.‘어쩌면 나보다 그 여자가 더 미울 텐데 왜?’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하나뿐이었다.민하준이 가장 회피하고 싶었던 그 사실.‘이젠 정말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기꺼이 도와줄 수 있을만큼?’“민하준, 너 왜 그래? 우리 두 사람이 그렇게 깊은 사이는 아니었잖아. 그냥 서로에게 끌려서 사귀었고 이젠 서로 질려서 헤어진 거야. 이 순간에도 수없이 일어나는 일들 중 하나, 이 세상 남녀들이라면 다 한 번쯤 해볼법한 그런 연애였다고. 네 사랑만 특별했다고 착각하지 마. 너랑 계속 사귀었으면 나도 지채영 그 여자 꼴 났겠지. 이용만 당하고 폐기처리 당하는 그런 삶.”이에 민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럴 리가.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이제 내가 너 안 사랑한다고.”한유라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 아무 잘못도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두 남자의 대치가 이어지고 날카로운 시선이 칼날이 되어 부딪혔다.서로 물러날 기색 없는 두 사람의 모습에 한유라는 숨이 막혀왔다.“그냥 가.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한유라가 심강열의 옷깃을 잡아당겼다.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잡은 심강열이 싱긋 웃었다.“그래.”“심강열...”저승사자처럼 차가운 민하준의 목소리가 룸을 가득 채웠다.“쟤가 너한테는 진심인 것 같아? 나 처음에 만났을 때도 쟨 저랬어. 너도 이제 나처럼 버려질 거야.”민하준의 말에 한유라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눈앞이 어질어질했다.‘하, 정말 끝까지 나가는구나? 이렇게 추잡하게... 그래도 한때는 사랑했던 여자인데.’고개를 돌린 한유라가 어떻게든 쏘아붙이려던 그때, 심강열이 그녀의 등을 밀어 룸에서 내보냈다.그리고 곧이어 문이 굳게 다쳤다.다시 돌아선 심강열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다 지껄였어?”민하준이 그런 그를 도발하 듯 픽 웃어 보였다.“하, 도련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나 봐? 왜 쟤가 정말 좋아지기라도 했어?”지금 그가 하는 짓이 얼마나 추잡한지 민하준이 모를 리가 없었다.하지만 심강열에게서 한유라를 떨어트려 놓을 수만 있다면 더 심한 말도 충분히 더 할 수 있었다.‘어차피 정정당당한 승부? 그딴 건 나한테 안 어울려. 더럽고 추잡하게라도 이겨야겠어.’“유라를 정말 사랑했다면 말 가려서 해. 네 말 때문에 저 여자가 상처받을 거란 생각은 안 해?”민하준의 늑대 같은 눈이 번뜩였다.‘네가 뭔데 유라 상처를 걱정해. 네까짓 게 문데.’“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는 아니어도 대충은 알아. 적어도 유라는 두 사람 사이에서 최선을 다했어. 널 사랑했던 것도 진심이고 지금 마음이 떠난 것도 진심이야. 그러니까 이제 그냥 받아들여.”“뭐? 마음이 떠났어? 네가 뭔데. 네까짓 게 뭐라고 평가질이야.”민하준이 분노를 터트렸다.‘넌 뭐가 잘나서 우리 사이에 훈계질인 건데. 부모 잘 만나서 평생 호의호식한 주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