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매정하게 버려진 지채영은 어떻게든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고 민하준은 그저 그런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설상가상으로 회사를 지탱하던 엘리트 직원들까지 전부 민하준과 함께 떠나버리고 이 프로젝트를 따내지 못하면 한달 안에 파산 신청을 해야 할 정도로 그룹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한 상황이었다.다들 그래도 부부로 살았던 정이 있으니 그녀가 이렇게 무너지는 걸 보고 있지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지채영은 알고 있었다.‘민하준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야. 오히려 쌤통이라며 박수나 안 치면 다행이지.’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 위기속에서 지채영을 지탱하기 위해선 증오의 상대가 필요했고 그 화살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한유라에게로 향했다.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헤어졌을 줄이야.그녀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그 두 사람이 헤어지면 속이라도 시원할 줄 알았는데 통쾌하긴커녕 기분은 더 더럽기만 했다.설령 두 사람이 헤어졌다 해도 민하준과의 사이는 다시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독립하고 승승장구하는 민하준과 달리 그녀는 점점 구렁텅이에 빠져가고 있다.두 사람의 인연을 이어줄 아이 하나 없이 헤어졌으니 이제 그녀는 민하준에게 아무런 이용가치 없는 전 와이프, 겨우 이 정도라는 걸 다시 뼛속깊이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방금 전 한유라가 파일을 건넸을 때, 지채영은 너무나 비참했다.도움을 줘야 할 상대로 비춰졌다는 사실이 비참했고 그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 비참했다.하지만 또 우습게도 한유라에게 고맙기도 했다.‘인정하긴 싫지만... 당신... 민하준보다 훨씬 더 근사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더 좋은 남자 만나.’한편, 인사를 마치고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서던 소은정은 이 광경을 전부 목격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자신의 차에 탄 소은정이 한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후회 안 하겠어? 이 프로젝트 단기적으로 보면 이익 공간이 크진 않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충분히 괜찮은 프로젝트야. 아줌마가 아시면 또 한바탕 하실 거
“그래. 내가 데리러갈게. 지금 갈 거니까 기다려.”하지만 그의 말을 끊은 한유라가 쿨하게 응했다.통화를 마친 심강열이 다른 이사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다들 먼저 퇴근하세요. 전 아내가 데리러오기로 했습니다.”“네? 와이프요?”“대표님, 뻥치지 마세요. 갑자기 웬 와이프예요?”“그냥 저희랑 같이 가시죠?”이사들의 반응에 심강열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평소에 내가 너무 편하게 대했나... 내가 어디가 어때서? 평생 노총각으로 늙을 상으로 보이나? 그리고 내가 이 나이 먹고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심강열이 이를 악물었다.“좋습니다. 그럼 퇴근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죠. 아내가 오면 직접 물어보면 되겠네요.”심강열의 말에 깔깔 웃던 이사들은 퇴근도 마다하고 정말 공항에서 함께 기다리기 시작했다.평소 이사들과의 사이가 꽤 좋은 심강열이라 기다리는 사이에도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그럼에도 이사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객관적인 조건만 보면 완벽함에도 항상 이성에게 철벽을 치는 심강열의 모습 때문에 한때 회사에서는 대표님이 게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었다.그 뒤로 오래 사귀던 여자친구가 500억을 받고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모두 심강열의 박복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시간은 흐르고 흘러 15분, 30분, 1시간...초조해진 심강열이 한유라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는 묵묵부답이었다.이때 이사들 중 한 명이 다시 그의 신경을 건드리기 시작했다.“사모님 혹시 오시다 길이라도 잃어버리신 건 아니겠죠?”“아니, 벌써 1시간이나 지났어요.”“대표님. 요즘은 비혼이 대세예요. 솔로가 창피한 것도 아니고 왜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세요?”“에이. 설마 대표님이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시겠어? 사정이 있겠지. 좀 더 기다려보자.”이사들의 질문에도 심강열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시간은 또 흘러 2시간째.이사들이 하나둘씩 일어서기 시작했다.“대표님, 와이프한테서 전화가 와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기다리고 있어? 미안. 가는 길에 조금 사정이 있어서 병원에 들렀었어. 지금 바로 갈게.”한유라의 말에 방금 전까지 치밀던 짜증이 순식간에 걱정으로 바뀌었다.“무슨 일인데 병원까지 가? 어디 다쳤어?”잠깐 망설이던 한유라가 대답했다.“접촉사고가 있었어. 별일 아니야.”‘병원까지 가놓고 별일이 아니야?’심강열의 속이 타들어갔다.“지금 아직 병원이야? 내가 바로 갈게. 사고 처리는 제대로 했어?”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는 목소리에 한유라는 더 죄책감이 밀려들었다.“음... 합의로 끝내면 될 것 같아.”“설마... 사람이라도 친 거야?”“그게... 저 사람 아무리 봐도 보험사기단 같아. 짜증 나!”힘찬 한유라의 목소리에 그녀가 다친 건 아님을 확신한 심강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디 병원인데? 주소 보내줘.”“그래. 그런데... 지금 어디야? 설마 아직도 공항인 건 아니지?”한유라의 마지막 질문에 방금 전 굴욕이 다시 떠오르고 결국 아무 대답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한편 한유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뭐야. 갑자기 웬 짜증? 하여간 변덕은.”문자로 주소를 보낸 한유라가 병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래도 남편이라고 바로 오겠다고 하네. 엄마가 알면... 백퍼 깨질 테니까 차라리 심강열 그 사람이 오는 게 더 낫긴 해.’약 20분 뒤, 병원에 도착한 심강열의 모습을 발견한 한유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트렁크? 뭐야? 정말 공항에서 세 시간이나 기다린 거야? 진짜 사람 미안하게...’한유라를 훑어본 심강열은 그녀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그녀의 맞은 편에 앉은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깁스까지 했네?’심강열이 눈을 가늘게 떴다.“네가 한 거야?”하지만 한유라는 억울하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아니... 저 사람 일부러 내 차에 부딪힌 거라니까. 그런데 증거가 없어, 증거가.”“이보세요. 제가 왜 그쪽 차에 일부러 부딪힙니까? 아까 의사 말 못 들었어요? 골절이라잖아요.”한유라의 말에 반박하
한유라가 헛웃음을 지었다.“껌값이고 뭐고 내 잘못도 아닌데 내가 왜 그쪽 피해보상을 해줘요?”‘이 자식이... 내가 호구로 보이나.’“돈을 못 주시겠다면 그쪽 집에 들어누울 겁니다. 화장실도 가기 힘들 테니까 깁스 풀 때까지 직접 병간호를 해주셔야겠어요. 그것도 싫으면 소송으로 가시든가요.”남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실렸다.순간, 차분하던 심강열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다혈질은 한유라가 정말 남자에게 손을 대려던 그때, 심강열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한유라.”심강열이 어딘지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내가 해결할게. 넌 걱정하지 말고 나가있어.”“정말 내가 잘못한 거 아니야. 돈으로 해결할 생각하지 마.”한유라가 의심어린 눈으로 심강열을 훑어보았다.“알겠으니까 걱정하지 마.”심강열의 설득 끝에 한유라는 잔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병원을 나섰다.한편, 남자가 부럽다는 시선으로 심강열을 훑어보았다.“저런 여자 만나려면 한달에 얼마씩 줘야 합니까? 돈이 좋긴 좋아요. 저렇게 예쁜 여자랑도 사귈 수 있고.”하지만 고개를 든 심강열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두 가지 선택지를 주겠습니다.”순식간에 바뀐 분위기에 남자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뭐... 뭔데요?”“나한테 맞아서 진짜로 치료비 2000만원 받아가든가... 아니면 당장 내 아내한테 사과해요.”제대로 호구 잡았다고 생각하던 남자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내가 그렇게 쉽게 물러날 거 같아요?”“물론이죠. 지금 당장 내 인맥으로 그쪽 부모, 동료, 친구들까지 다 찾아낼 겁니다. 그 사람들 중 누구 하나는 그 다리를 어떻게 다쳤는지 알고 있겠죠. 그리고 보험사기로 신고할 거예요. 심하면 징역을 살게될 수도 있겠죠?”AI처럼 무감정한 목소리에 남자의 얼굴에 두려움이 드리웠다.심강열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아시겠지만 나 정도 되는 사람은 그 정도 일 쉽게 해낼 수 있거든요. 그리고... 솔직히 전 그냥 그쪽 때려버리고 2000만원 주는
방금 전까지 어떻게든 돈을 뜯어내려던 남자가 갑자기 사과를 하기 시작하니 한유라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한유라가 막연한 표정으로 뒤를 따라나온 심강열을 바라보았다.“이제 그만 꺼지세요.”“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심강열의 목소리에 잔뜩 겁을 먹은 듯 굽실거리던 남자가 부리나케 사라졌다.“복 받으실 거예요?”한유라의 질문에 심강열이 어깨를 으쓱했다.“상황 종료. 내가 해결했어.”“진짜 돈 준 거 아니지?”한유라가 의심의 눈빛으로 심강열을 훑어보았다.“안 줬다니까.”“그런데 어떻게...”“사기를 쳤을 때 져야 할 법적 책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줬더니 바로 잘못했다고 하더라고. 치료비도 안 받겠다고 했고.”이에 한유라가 코웃음을 쳤다.“하, 누가 지금 그깟 치료비 때문에 그래? 그 자식이 나한테 사기를 치려고 했다고. 누굴 호구로 보고. 그딴 자식한테는 십원 한 푼 못 줘.”심강열이 아직도 화가 잔뜩 난 한유라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미소를 지었다.“물론이지. 저딴 사람한테 돈 쓰는 건 너무 아깝잖아?”그 뒤로 한참을 꿍얼대던 한유라는 왠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한 손으로는 트렁크를 끌고 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연스레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심강열의 모습을 인지한 한유라의 볼이 살짝 뜨거워졌다.‘며칠만에 만나는 거라 그런가? 왜 이렇게 어색하지?’견딜 수 없는 어색함에 한유라가 괜히 말을 돌렸다.“그런데 왜 오늘 온 거야?”“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태연하게 대답한 심강열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너 빨리 보고 싶어서 나 직원들 야근시키는 나쁜 대표됐어...’대표로서 해외 출장도 잦았지만 이렇게 집이 간절하게 그리웠던 적은 없었다.‘이 여자 진짜 위험해.’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한유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잠깐의 침묵 후 심강열의 기분은 점점 더 언짢아졌다.‘뭐야? 그러니까 2000만원 때문에 날 세 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거야? 그러니까... 내가 2000만원보다 못하다는
‘다행이야. 말은 독하게 했어도 정말 쇼윈도 부부로 살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네.’내심 흐뭇했지만 김현숙은 다시 한유라를 노려보았다.“저 계집애 때문에 내가 물 먹은 적이 한, 두 번이여야지. 강열아, 바로 프로젝트부터 덥썩 맡기는 건 좀 아닌 것 같고. 네가 곁에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가르치는 게 어때? 프로젝트를 온전히 담당할 능력이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하자.”비록 심강열이 제안한 프로젝트는 충분히 유혹적인 것이었지만 그걸 좋다고 덥썩 받았다간 한유라가 괜히 기라도 죽으면 어쩌나 싶은 김현숙이었다.‘저 계집애, 가뜩이나 더러운 성질머리... 돈 때문에 할 말도 못하고 살면 제 명에 못 살지.’김현숙의 마음 역시 이해하는 심강열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죠. 그럼 유라 씨는 제가 잠깐 빌려가겠습니다.”이에 한유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하, 그럼 나 심강열 이 사람 직원으로 일해야 하는 거야?’잠시 후, 사무실을 나선 한유라는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난 패잔병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렇게 무서워”“깡은 안 무서워?”한유라의 질문에 흠칫하던 심강열이 결국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솔직히 나도 아까는 좀... 무섭더라.”‘최대한 안 무서운 척 했지만.’그래도 이미 혼날 건 다 혼났다는 생각에 홀가분한지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던 한유라가 심강열을 돌아보았다.“어휴, 배고파. 밥 사줄래?”“그래.”잠시 후, 두 사람은 굉장히 로맨틱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에 도착했다.직원이 트러플을 자르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한유라를 쳐다보던 심강열이 문득 물었다.“그 땅 누구한테 넘긴 거야?”갑작스러운 질문에 한유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민하준, 지채영, 그리고 한유라 자신까지 추잡하고 복잡하게 얽힌 관계가 다시 떠올랐다.어떻게 풀어서 얘기하면 남편이라는 사람이 받아들을 수 있을지 혼란스러웠다.‘어떻게 말해도 언짢겠지.’한편, 심강열은 굉장히 인내심있게 그녀를 기다려주었다.‘그래. 지금 얘기 안 해도 알아보려면 충분히 스스로 알아볼
심강열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새카만 눈동자를 통해선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잠깐 울적한 표정을 짓던 한유라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그쪽이 500억으로 전 여자친구를 떠나보냈던 것처럼... 이렇게 해서라도 내 마음이 편해졌으면 했어. 그렇게 치면 싸게 먹힌 거 아니야?”‘죽도로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내가 어떤 상황인지 다 알고 결혼한 거야. 정말 신경 쓰였으면 애초에 결혼하지도 않았겠지. 차라리 다 털어놓고 가는 게 나을지도 몰라.’“그럼. 잘했어.”한유라의 솔직한 대답에 심강열 역시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서빙되고 테이블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한유라는 방금 전 울적하던 사람이 맞나 싶게 눈을 반짝였다.심강열도 아까 대화는 없었다는 듯 자연스레 매너있게 스테이크를 썰어주었다....잠시 후 배가 부르니 잠이 솔솔 밀려오고 레스토랑을 나선 한유라는 기지개를 켰다.“타.”이에 한유라가 차창 쪽으로 다가갔다.“회사로 들어갈 거야?”한유라의 질문에 심강열이 고개를 갸웃했다.‘왜 당연한 걸 묻지? 지금은 출근 시간이고 당연히 회사로 다시 들어가야지.’휴대폰으로 급한 메시지에 답장을 하고 있긴 했지만 직접 확인해야 할 서류들이 있어 지금 당장 회사로 돌아가야 했다.하지만 한유라는 몸서리를 쳤다.“싫어. 난 쉴 거야. 오후에는... 마사지나 받으러 가야겠어.”그 대답에 순간 심강열은 김현숙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아, 어머님... 그 동안 참 힘드셨겠군요.’운전석에서 내린 심강열이 한유라를 조수석으로 밀어넣었다.“뭐야? 집에 데려다주려고? 됐어. 내가 알아서 갈 수 있어. 많이 바쁜 것 같은데.”하지만 그녀의 말에 말없이 안전벨트를 해주는 심강열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불안한 예감이 밀려와 미간을 찌푸렸다.“유라야, 나 너 잘 가르치겠다고 장모님이랑 약속까지 했어. 너도 내가 어머님한테 혼나는 건 싫지?”“장모님”이란 호칭에 한유라는 왠지 소름이 돋았다.
정말 연인을 대하는 것 같은 심강열의 달콤한 목소리에 한유라는 왠지 당황스러웠다.‘뭐... 뭐야. 우리가 안 지 얼마나 됐다고. 내 착각이겠지?’잠시 후, 회사.심강열이 한유라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마침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라 그런지 엘리베이터에 사람들이 꽤 많이 몰려들고 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한유라의 손목을 홱 잡아당겼다.2층에서 사람들이 더 타고 한유라는 자연스럽게 구석으로 밀려나고 말았다.인파에 밀려나는 한유라의 모습에 심강열은 몰래 욕설을 내뱉었다.‘윽, 조금 뒤에 올걸...’각 부서 사무실에 도착할 때마다 직원들이 한, 두 명씩 내리고 드디어 엘리베이터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그제야 한유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휴, 구두 밟히는 줄 알았네. 한정판인데.’비록 심해그룹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김현숙이 운영하는 회사도 나름 규모를 자랑하는 곳, 평생 엘리베이터를 타도 버튼 한 번 스스로 눌러본 적이 별로 없는 한유라였다.그런 그녀의 당황스러운 표정에 심강열이 물었다.“적응 안 되지?”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던 한유라가 싱긋 웃었다.“아, 아니. 그냥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네.”‘돈도 많은 사람이... 전용 엘리베이터 하나 만들지.’하지만 심강열의 생각은 달랐다. 바쁘게 움직이며 대표 얼굴도 못 알아보는 직원들을 바라보며 묘한 흐뭇함을 느끼는 게 이상하다면 이상한 심강열의 취미 중 하나였다.잔뜩 당황했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한유라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사람들이랑 우르르 엘리베이터 타는 거 별로면 출퇴근 시간 따로 빼줄게.”잠깐 멈칫하던 그가 말을 이어갔다.“지각해도 봐줄게.”이때 한유라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담담해? 그리고 직원들은 당신이 대표인 줄 모르고 있는 것 같던데?”한유라는 방금 전 엘리베이터에서 심강열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각자 할 일만 하던 직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내가 뭐 연예인도 아니고. 그리고 다들 돈 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