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매정하게 버려진 지채영은 어떻게든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고 민하준은 그저 그런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설상가상으로 회사를 지탱하던 엘리트 직원들까지 전부 민하준과 함께 떠나버리고 이 프로젝트를 따내지 못하면 한달 안에 파산 신청을 해야 할 정도로 그룹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한 상황이었다.다들 그래도 부부로 살았던 정이 있으니 그녀가 이렇게 무너지는 걸 보고 있지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지채영은 알고 있었다.‘민하준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야. 오히려 쌤통이라며 박수나 안 치면 다행이지.’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 위기속에서 지채영을 지탱하기 위해선 증오의 상대가 필요했고 그 화살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한유라에게로 향했다.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헤어졌을 줄이야.그녀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그 두 사람이 헤어지면 속이라도 시원할 줄 알았는데 통쾌하긴커녕 기분은 더 더럽기만 했다.설령 두 사람이 헤어졌다 해도 민하준과의 사이는 다시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독립하고 승승장구하는 민하준과 달리 그녀는 점점 구렁텅이에 빠져가고 있다.두 사람의 인연을 이어줄 아이 하나 없이 헤어졌으니 이제 그녀는 민하준에게 아무런 이용가치 없는 전 와이프, 겨우 이 정도라는 걸 다시 뼛속깊이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방금 전 한유라가 파일을 건넸을 때, 지채영은 너무나 비참했다.도움을 줘야 할 상대로 비춰졌다는 사실이 비참했고 그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 비참했다.하지만 또 우습게도 한유라에게 고맙기도 했다.‘인정하긴 싫지만... 당신... 민하준보다 훨씬 더 근사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더 좋은 남자 만나.’한편, 인사를 마치고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서던 소은정은 이 광경을 전부 목격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자신의 차에 탄 소은정이 한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후회 안 하겠어? 이 프로젝트 단기적으로 보면 이익 공간이 크진 않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충분히 괜찮은 프로젝트야. 아줌마가 아시면 또 한바탕 하실 거
“그래. 내가 데리러갈게. 지금 갈 거니까 기다려.”하지만 그의 말을 끊은 한유라가 쿨하게 응했다.통화를 마친 심강열이 다른 이사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다들 먼저 퇴근하세요. 전 아내가 데리러오기로 했습니다.”“네? 와이프요?”“대표님, 뻥치지 마세요. 갑자기 웬 와이프예요?”“그냥 저희랑 같이 가시죠?”이사들의 반응에 심강열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평소에 내가 너무 편하게 대했나... 내가 어디가 어때서? 평생 노총각으로 늙을 상으로 보이나? 그리고 내가 이 나이 먹고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심강열이 이를 악물었다.“좋습니다. 그럼 퇴근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죠. 아내가 오면 직접 물어보면 되겠네요.”심강열의 말에 깔깔 웃던 이사들은 퇴근도 마다하고 정말 공항에서 함께 기다리기 시작했다.평소 이사들과의 사이가 꽤 좋은 심강열이라 기다리는 사이에도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그럼에도 이사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객관적인 조건만 보면 완벽함에도 항상 이성에게 철벽을 치는 심강열의 모습 때문에 한때 회사에서는 대표님이 게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었다.그 뒤로 오래 사귀던 여자친구가 500억을 받고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모두 심강열의 박복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시간은 흐르고 흘러 15분, 30분, 1시간...초조해진 심강열이 한유라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는 묵묵부답이었다.이때 이사들 중 한 명이 다시 그의 신경을 건드리기 시작했다.“사모님 혹시 오시다 길이라도 잃어버리신 건 아니겠죠?”“아니, 벌써 1시간이나 지났어요.”“대표님. 요즘은 비혼이 대세예요. 솔로가 창피한 것도 아니고 왜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세요?”“에이. 설마 대표님이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시겠어? 사정이 있겠지. 좀 더 기다려보자.”이사들의 질문에도 심강열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시간은 또 흘러 2시간째.이사들이 하나둘씩 일어서기 시작했다.“대표님, 와이프한테서 전화가 와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기다리고 있어? 미안. 가는 길에 조금 사정이 있어서 병원에 들렀었어. 지금 바로 갈게.”한유라의 말에 방금 전까지 치밀던 짜증이 순식간에 걱정으로 바뀌었다.“무슨 일인데 병원까지 가? 어디 다쳤어?”잠깐 망설이던 한유라가 대답했다.“접촉사고가 있었어. 별일 아니야.”‘병원까지 가놓고 별일이 아니야?’심강열의 속이 타들어갔다.“지금 아직 병원이야? 내가 바로 갈게. 사고 처리는 제대로 했어?”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는 목소리에 한유라는 더 죄책감이 밀려들었다.“음... 합의로 끝내면 될 것 같아.”“설마... 사람이라도 친 거야?”“그게... 저 사람 아무리 봐도 보험사기단 같아. 짜증 나!”힘찬 한유라의 목소리에 그녀가 다친 건 아님을 확신한 심강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디 병원인데? 주소 보내줘.”“그래. 그런데... 지금 어디야? 설마 아직도 공항인 건 아니지?”한유라의 마지막 질문에 방금 전 굴욕이 다시 떠오르고 결국 아무 대답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한편 한유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뭐야. 갑자기 웬 짜증? 하여간 변덕은.”문자로 주소를 보낸 한유라가 병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래도 남편이라고 바로 오겠다고 하네. 엄마가 알면... 백퍼 깨질 테니까 차라리 심강열 그 사람이 오는 게 더 낫긴 해.’약 20분 뒤, 병원에 도착한 심강열의 모습을 발견한 한유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트렁크? 뭐야? 정말 공항에서 세 시간이나 기다린 거야? 진짜 사람 미안하게...’한유라를 훑어본 심강열은 그녀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그녀의 맞은 편에 앉은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깁스까지 했네?’심강열이 눈을 가늘게 떴다.“네가 한 거야?”하지만 한유라는 억울하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아니... 저 사람 일부러 내 차에 부딪힌 거라니까. 그런데 증거가 없어, 증거가.”“이보세요. 제가 왜 그쪽 차에 일부러 부딪힙니까? 아까 의사 말 못 들었어요? 골절이라잖아요.”한유라의 말에 반박하
한유라가 헛웃음을 지었다.“껌값이고 뭐고 내 잘못도 아닌데 내가 왜 그쪽 피해보상을 해줘요?”‘이 자식이... 내가 호구로 보이나.’“돈을 못 주시겠다면 그쪽 집에 들어누울 겁니다. 화장실도 가기 힘들 테니까 깁스 풀 때까지 직접 병간호를 해주셔야겠어요. 그것도 싫으면 소송으로 가시든가요.”남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실렸다.순간, 차분하던 심강열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다혈질은 한유라가 정말 남자에게 손을 대려던 그때, 심강열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한유라.”심강열이 어딘지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내가 해결할게. 넌 걱정하지 말고 나가있어.”“정말 내가 잘못한 거 아니야. 돈으로 해결할 생각하지 마.”한유라가 의심어린 눈으로 심강열을 훑어보았다.“알겠으니까 걱정하지 마.”심강열의 설득 끝에 한유라는 잔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병원을 나섰다.한편, 남자가 부럽다는 시선으로 심강열을 훑어보았다.“저런 여자 만나려면 한달에 얼마씩 줘야 합니까? 돈이 좋긴 좋아요. 저렇게 예쁜 여자랑도 사귈 수 있고.”하지만 고개를 든 심강열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두 가지 선택지를 주겠습니다.”순식간에 바뀐 분위기에 남자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뭐... 뭔데요?”“나한테 맞아서 진짜로 치료비 2000만원 받아가든가... 아니면 당장 내 아내한테 사과해요.”제대로 호구 잡았다고 생각하던 남자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내가 그렇게 쉽게 물러날 거 같아요?”“물론이죠. 지금 당장 내 인맥으로 그쪽 부모, 동료, 친구들까지 다 찾아낼 겁니다. 그 사람들 중 누구 하나는 그 다리를 어떻게 다쳤는지 알고 있겠죠. 그리고 보험사기로 신고할 거예요. 심하면 징역을 살게될 수도 있겠죠?”AI처럼 무감정한 목소리에 남자의 얼굴에 두려움이 드리웠다.심강열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아시겠지만 나 정도 되는 사람은 그 정도 일 쉽게 해낼 수 있거든요. 그리고... 솔직히 전 그냥 그쪽 때려버리고 2000만원 주는
방금 전까지 어떻게든 돈을 뜯어내려던 남자가 갑자기 사과를 하기 시작하니 한유라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한유라가 막연한 표정으로 뒤를 따라나온 심강열을 바라보았다.“이제 그만 꺼지세요.”“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심강열의 목소리에 잔뜩 겁을 먹은 듯 굽실거리던 남자가 부리나케 사라졌다.“복 받으실 거예요?”한유라의 질문에 심강열이 어깨를 으쓱했다.“상황 종료. 내가 해결했어.”“진짜 돈 준 거 아니지?”한유라가 의심의 눈빛으로 심강열을 훑어보았다.“안 줬다니까.”“그런데 어떻게...”“사기를 쳤을 때 져야 할 법적 책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줬더니 바로 잘못했다고 하더라고. 치료비도 안 받겠다고 했고.”이에 한유라가 코웃음을 쳤다.“하, 누가 지금 그깟 치료비 때문에 그래? 그 자식이 나한테 사기를 치려고 했다고. 누굴 호구로 보고. 그딴 자식한테는 십원 한 푼 못 줘.”심강열이 아직도 화가 잔뜩 난 한유라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미소를 지었다.“물론이지. 저딴 사람한테 돈 쓰는 건 너무 아깝잖아?”그 뒤로 한참을 꿍얼대던 한유라는 왠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한 손으로는 트렁크를 끌고 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연스레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심강열의 모습을 인지한 한유라의 볼이 살짝 뜨거워졌다.‘며칠만에 만나는 거라 그런가? 왜 이렇게 어색하지?’견딜 수 없는 어색함에 한유라가 괜히 말을 돌렸다.“그런데 왜 오늘 온 거야?”“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태연하게 대답한 심강열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너 빨리 보고 싶어서 나 직원들 야근시키는 나쁜 대표됐어...’대표로서 해외 출장도 잦았지만 이렇게 집이 간절하게 그리웠던 적은 없었다.‘이 여자 진짜 위험해.’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한유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잠깐의 침묵 후 심강열의 기분은 점점 더 언짢아졌다.‘뭐야? 그러니까 2000만원 때문에 날 세 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거야? 그러니까... 내가 2000만원보다 못하다는
‘다행이야. 말은 독하게 했어도 정말 쇼윈도 부부로 살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네.’내심 흐뭇했지만 김현숙은 다시 한유라를 노려보았다.“저 계집애 때문에 내가 물 먹은 적이 한, 두 번이여야지. 강열아, 바로 프로젝트부터 덥썩 맡기는 건 좀 아닌 것 같고. 네가 곁에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가르치는 게 어때? 프로젝트를 온전히 담당할 능력이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하자.”비록 심강열이 제안한 프로젝트는 충분히 유혹적인 것이었지만 그걸 좋다고 덥썩 받았다간 한유라가 괜히 기라도 죽으면 어쩌나 싶은 김현숙이었다.‘저 계집애, 가뜩이나 더러운 성질머리... 돈 때문에 할 말도 못하고 살면 제 명에 못 살지.’김현숙의 마음 역시 이해하는 심강열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죠. 그럼 유라 씨는 제가 잠깐 빌려가겠습니다.”이에 한유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하, 그럼 나 심강열 이 사람 직원으로 일해야 하는 거야?’잠시 후, 사무실을 나선 한유라는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난 패잔병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렇게 무서워”“깡은 안 무서워?”한유라의 질문에 흠칫하던 심강열이 결국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솔직히 나도 아까는 좀... 무섭더라.”‘최대한 안 무서운 척 했지만.’그래도 이미 혼날 건 다 혼났다는 생각에 홀가분한지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던 한유라가 심강열을 돌아보았다.“어휴, 배고파. 밥 사줄래?”“그래.”잠시 후, 두 사람은 굉장히 로맨틱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에 도착했다.직원이 트러플을 자르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한유라를 쳐다보던 심강열이 문득 물었다.“그 땅 누구한테 넘긴 거야?”갑작스러운 질문에 한유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민하준, 지채영, 그리고 한유라 자신까지 추잡하고 복잡하게 얽힌 관계가 다시 떠올랐다.어떻게 풀어서 얘기하면 남편이라는 사람이 받아들을 수 있을지 혼란스러웠다.‘어떻게 말해도 언짢겠지.’한편, 심강열은 굉장히 인내심있게 그녀를 기다려주었다.‘그래. 지금 얘기 안 해도 알아보려면 충분히 스스로 알아볼
심강열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새카만 눈동자를 통해선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잠깐 울적한 표정을 짓던 한유라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그쪽이 500억으로 전 여자친구를 떠나보냈던 것처럼... 이렇게 해서라도 내 마음이 편해졌으면 했어. 그렇게 치면 싸게 먹힌 거 아니야?”‘죽도로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내가 어떤 상황인지 다 알고 결혼한 거야. 정말 신경 쓰였으면 애초에 결혼하지도 않았겠지. 차라리 다 털어놓고 가는 게 나을지도 몰라.’“그럼. 잘했어.”한유라의 솔직한 대답에 심강열 역시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서빙되고 테이블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한유라는 방금 전 울적하던 사람이 맞나 싶게 눈을 반짝였다.심강열도 아까 대화는 없었다는 듯 자연스레 매너있게 스테이크를 썰어주었다....잠시 후 배가 부르니 잠이 솔솔 밀려오고 레스토랑을 나선 한유라는 기지개를 켰다.“타.”이에 한유라가 차창 쪽으로 다가갔다.“회사로 들어갈 거야?”한유라의 질문에 심강열이 고개를 갸웃했다.‘왜 당연한 걸 묻지? 지금은 출근 시간이고 당연히 회사로 다시 들어가야지.’휴대폰으로 급한 메시지에 답장을 하고 있긴 했지만 직접 확인해야 할 서류들이 있어 지금 당장 회사로 돌아가야 했다.하지만 한유라는 몸서리를 쳤다.“싫어. 난 쉴 거야. 오후에는... 마사지나 받으러 가야겠어.”그 대답에 순간 심강열은 김현숙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아, 어머님... 그 동안 참 힘드셨겠군요.’운전석에서 내린 심강열이 한유라를 조수석으로 밀어넣었다.“뭐야? 집에 데려다주려고? 됐어. 내가 알아서 갈 수 있어. 많이 바쁜 것 같은데.”하지만 그녀의 말에 말없이 안전벨트를 해주는 심강열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불안한 예감이 밀려와 미간을 찌푸렸다.“유라야, 나 너 잘 가르치겠다고 장모님이랑 약속까지 했어. 너도 내가 어머님한테 혼나는 건 싫지?”“장모님”이란 호칭에 한유라는 왠지 소름이 돋았다.
정말 연인을 대하는 것 같은 심강열의 달콤한 목소리에 한유라는 왠지 당황스러웠다.‘뭐... 뭐야. 우리가 안 지 얼마나 됐다고. 내 착각이겠지?’잠시 후, 회사.심강열이 한유라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마침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라 그런지 엘리베이터에 사람들이 꽤 많이 몰려들고 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한유라의 손목을 홱 잡아당겼다.2층에서 사람들이 더 타고 한유라는 자연스럽게 구석으로 밀려나고 말았다.인파에 밀려나는 한유라의 모습에 심강열은 몰래 욕설을 내뱉었다.‘윽, 조금 뒤에 올걸...’각 부서 사무실에 도착할 때마다 직원들이 한, 두 명씩 내리고 드디어 엘리베이터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그제야 한유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휴, 구두 밟히는 줄 알았네. 한정판인데.’비록 심해그룹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김현숙이 운영하는 회사도 나름 규모를 자랑하는 곳, 평생 엘리베이터를 타도 버튼 한 번 스스로 눌러본 적이 별로 없는 한유라였다.그런 그녀의 당황스러운 표정에 심강열이 물었다.“적응 안 되지?”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던 한유라가 싱긋 웃었다.“아, 아니. 그냥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네.”‘돈도 많은 사람이... 전용 엘리베이터 하나 만들지.’하지만 심강열의 생각은 달랐다. 바쁘게 움직이며 대표 얼굴도 못 알아보는 직원들을 바라보며 묘한 흐뭇함을 느끼는 게 이상하다면 이상한 심강열의 취미 중 하나였다.잔뜩 당황했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한유라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사람들이랑 우르르 엘리베이터 타는 거 별로면 출퇴근 시간 따로 빼줄게.”잠깐 멈칫하던 그가 말을 이어갔다.“지각해도 봐줄게.”이때 한유라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담담해? 그리고 직원들은 당신이 대표인 줄 모르고 있는 것 같던데?”한유라는 방금 전 엘리베이터에서 심강열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각자 할 일만 하던 직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내가 뭐 연예인도 아니고. 그리고 다들 돈 벌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