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기다리고 있어? 미안. 가는 길에 조금 사정이 있어서 병원에 들렀었어. 지금 바로 갈게.”한유라의 말에 방금 전까지 치밀던 짜증이 순식간에 걱정으로 바뀌었다.“무슨 일인데 병원까지 가? 어디 다쳤어?”잠깐 망설이던 한유라가 대답했다.“접촉사고가 있었어. 별일 아니야.”‘병원까지 가놓고 별일이 아니야?’심강열의 속이 타들어갔다.“지금 아직 병원이야? 내가 바로 갈게. 사고 처리는 제대로 했어?”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는 목소리에 한유라는 더 죄책감이 밀려들었다.“음... 합의로 끝내면 될 것 같아.”“설마... 사람이라도 친 거야?”“그게... 저 사람 아무리 봐도 보험사기단 같아. 짜증 나!”힘찬 한유라의 목소리에 그녀가 다친 건 아님을 확신한 심강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디 병원인데? 주소 보내줘.”“그래. 그런데... 지금 어디야? 설마 아직도 공항인 건 아니지?”한유라의 마지막 질문에 방금 전 굴욕이 다시 떠오르고 결국 아무 대답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한편 한유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뭐야. 갑자기 웬 짜증? 하여간 변덕은.”문자로 주소를 보낸 한유라가 병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래도 남편이라고 바로 오겠다고 하네. 엄마가 알면... 백퍼 깨질 테니까 차라리 심강열 그 사람이 오는 게 더 낫긴 해.’약 20분 뒤, 병원에 도착한 심강열의 모습을 발견한 한유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트렁크? 뭐야? 정말 공항에서 세 시간이나 기다린 거야? 진짜 사람 미안하게...’한유라를 훑어본 심강열은 그녀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그녀의 맞은 편에 앉은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깁스까지 했네?’심강열이 눈을 가늘게 떴다.“네가 한 거야?”하지만 한유라는 억울하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아니... 저 사람 일부러 내 차에 부딪힌 거라니까. 그런데 증거가 없어, 증거가.”“이보세요. 제가 왜 그쪽 차에 일부러 부딪힙니까? 아까 의사 말 못 들었어요? 골절이라잖아요.”한유라의 말에 반박하
한유라가 헛웃음을 지었다.“껌값이고 뭐고 내 잘못도 아닌데 내가 왜 그쪽 피해보상을 해줘요?”‘이 자식이... 내가 호구로 보이나.’“돈을 못 주시겠다면 그쪽 집에 들어누울 겁니다. 화장실도 가기 힘들 테니까 깁스 풀 때까지 직접 병간호를 해주셔야겠어요. 그것도 싫으면 소송으로 가시든가요.”남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실렸다.순간, 차분하던 심강열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다혈질은 한유라가 정말 남자에게 손을 대려던 그때, 심강열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한유라.”심강열이 어딘지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내가 해결할게. 넌 걱정하지 말고 나가있어.”“정말 내가 잘못한 거 아니야. 돈으로 해결할 생각하지 마.”한유라가 의심어린 눈으로 심강열을 훑어보았다.“알겠으니까 걱정하지 마.”심강열의 설득 끝에 한유라는 잔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병원을 나섰다.한편, 남자가 부럽다는 시선으로 심강열을 훑어보았다.“저런 여자 만나려면 한달에 얼마씩 줘야 합니까? 돈이 좋긴 좋아요. 저렇게 예쁜 여자랑도 사귈 수 있고.”하지만 고개를 든 심강열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두 가지 선택지를 주겠습니다.”순식간에 바뀐 분위기에 남자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뭐... 뭔데요?”“나한테 맞아서 진짜로 치료비 2000만원 받아가든가... 아니면 당장 내 아내한테 사과해요.”제대로 호구 잡았다고 생각하던 남자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내가 그렇게 쉽게 물러날 거 같아요?”“물론이죠. 지금 당장 내 인맥으로 그쪽 부모, 동료, 친구들까지 다 찾아낼 겁니다. 그 사람들 중 누구 하나는 그 다리를 어떻게 다쳤는지 알고 있겠죠. 그리고 보험사기로 신고할 거예요. 심하면 징역을 살게될 수도 있겠죠?”AI처럼 무감정한 목소리에 남자의 얼굴에 두려움이 드리웠다.심강열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아시겠지만 나 정도 되는 사람은 그 정도 일 쉽게 해낼 수 있거든요. 그리고... 솔직히 전 그냥 그쪽 때려버리고 2000만원 주는
방금 전까지 어떻게든 돈을 뜯어내려던 남자가 갑자기 사과를 하기 시작하니 한유라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한유라가 막연한 표정으로 뒤를 따라나온 심강열을 바라보았다.“이제 그만 꺼지세요.”“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심강열의 목소리에 잔뜩 겁을 먹은 듯 굽실거리던 남자가 부리나케 사라졌다.“복 받으실 거예요?”한유라의 질문에 심강열이 어깨를 으쓱했다.“상황 종료. 내가 해결했어.”“진짜 돈 준 거 아니지?”한유라가 의심의 눈빛으로 심강열을 훑어보았다.“안 줬다니까.”“그런데 어떻게...”“사기를 쳤을 때 져야 할 법적 책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줬더니 바로 잘못했다고 하더라고. 치료비도 안 받겠다고 했고.”이에 한유라가 코웃음을 쳤다.“하, 누가 지금 그깟 치료비 때문에 그래? 그 자식이 나한테 사기를 치려고 했다고. 누굴 호구로 보고. 그딴 자식한테는 십원 한 푼 못 줘.”심강열이 아직도 화가 잔뜩 난 한유라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미소를 지었다.“물론이지. 저딴 사람한테 돈 쓰는 건 너무 아깝잖아?”그 뒤로 한참을 꿍얼대던 한유라는 왠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한 손으로는 트렁크를 끌고 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연스레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심강열의 모습을 인지한 한유라의 볼이 살짝 뜨거워졌다.‘며칠만에 만나는 거라 그런가? 왜 이렇게 어색하지?’견딜 수 없는 어색함에 한유라가 괜히 말을 돌렸다.“그런데 왜 오늘 온 거야?”“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태연하게 대답한 심강열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너 빨리 보고 싶어서 나 직원들 야근시키는 나쁜 대표됐어...’대표로서 해외 출장도 잦았지만 이렇게 집이 간절하게 그리웠던 적은 없었다.‘이 여자 진짜 위험해.’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한유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잠깐의 침묵 후 심강열의 기분은 점점 더 언짢아졌다.‘뭐야? 그러니까 2000만원 때문에 날 세 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거야? 그러니까... 내가 2000만원보다 못하다는
‘다행이야. 말은 독하게 했어도 정말 쇼윈도 부부로 살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네.’내심 흐뭇했지만 김현숙은 다시 한유라를 노려보았다.“저 계집애 때문에 내가 물 먹은 적이 한, 두 번이여야지. 강열아, 바로 프로젝트부터 덥썩 맡기는 건 좀 아닌 것 같고. 네가 곁에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가르치는 게 어때? 프로젝트를 온전히 담당할 능력이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하자.”비록 심강열이 제안한 프로젝트는 충분히 유혹적인 것이었지만 그걸 좋다고 덥썩 받았다간 한유라가 괜히 기라도 죽으면 어쩌나 싶은 김현숙이었다.‘저 계집애, 가뜩이나 더러운 성질머리... 돈 때문에 할 말도 못하고 살면 제 명에 못 살지.’김현숙의 마음 역시 이해하는 심강열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죠. 그럼 유라 씨는 제가 잠깐 빌려가겠습니다.”이에 한유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하, 그럼 나 심강열 이 사람 직원으로 일해야 하는 거야?’잠시 후, 사무실을 나선 한유라는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난 패잔병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렇게 무서워”“깡은 안 무서워?”한유라의 질문에 흠칫하던 심강열이 결국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솔직히 나도 아까는 좀... 무섭더라.”‘최대한 안 무서운 척 했지만.’그래도 이미 혼날 건 다 혼났다는 생각에 홀가분한지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던 한유라가 심강열을 돌아보았다.“어휴, 배고파. 밥 사줄래?”“그래.”잠시 후, 두 사람은 굉장히 로맨틱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에 도착했다.직원이 트러플을 자르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한유라를 쳐다보던 심강열이 문득 물었다.“그 땅 누구한테 넘긴 거야?”갑작스러운 질문에 한유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민하준, 지채영, 그리고 한유라 자신까지 추잡하고 복잡하게 얽힌 관계가 다시 떠올랐다.어떻게 풀어서 얘기하면 남편이라는 사람이 받아들을 수 있을지 혼란스러웠다.‘어떻게 말해도 언짢겠지.’한편, 심강열은 굉장히 인내심있게 그녀를 기다려주었다.‘그래. 지금 얘기 안 해도 알아보려면 충분히 스스로 알아볼
심강열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새카만 눈동자를 통해선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잠깐 울적한 표정을 짓던 한유라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그쪽이 500억으로 전 여자친구를 떠나보냈던 것처럼... 이렇게 해서라도 내 마음이 편해졌으면 했어. 그렇게 치면 싸게 먹힌 거 아니야?”‘죽도로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내가 어떤 상황인지 다 알고 결혼한 거야. 정말 신경 쓰였으면 애초에 결혼하지도 않았겠지. 차라리 다 털어놓고 가는 게 나을지도 몰라.’“그럼. 잘했어.”한유라의 솔직한 대답에 심강열 역시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서빙되고 테이블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한유라는 방금 전 울적하던 사람이 맞나 싶게 눈을 반짝였다.심강열도 아까 대화는 없었다는 듯 자연스레 매너있게 스테이크를 썰어주었다....잠시 후 배가 부르니 잠이 솔솔 밀려오고 레스토랑을 나선 한유라는 기지개를 켰다.“타.”이에 한유라가 차창 쪽으로 다가갔다.“회사로 들어갈 거야?”한유라의 질문에 심강열이 고개를 갸웃했다.‘왜 당연한 걸 묻지? 지금은 출근 시간이고 당연히 회사로 다시 들어가야지.’휴대폰으로 급한 메시지에 답장을 하고 있긴 했지만 직접 확인해야 할 서류들이 있어 지금 당장 회사로 돌아가야 했다.하지만 한유라는 몸서리를 쳤다.“싫어. 난 쉴 거야. 오후에는... 마사지나 받으러 가야겠어.”그 대답에 순간 심강열은 김현숙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아, 어머님... 그 동안 참 힘드셨겠군요.’운전석에서 내린 심강열이 한유라를 조수석으로 밀어넣었다.“뭐야? 집에 데려다주려고? 됐어. 내가 알아서 갈 수 있어. 많이 바쁜 것 같은데.”하지만 그녀의 말에 말없이 안전벨트를 해주는 심강열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불안한 예감이 밀려와 미간을 찌푸렸다.“유라야, 나 너 잘 가르치겠다고 장모님이랑 약속까지 했어. 너도 내가 어머님한테 혼나는 건 싫지?”“장모님”이란 호칭에 한유라는 왠지 소름이 돋았다.
정말 연인을 대하는 것 같은 심강열의 달콤한 목소리에 한유라는 왠지 당황스러웠다.‘뭐... 뭐야. 우리가 안 지 얼마나 됐다고. 내 착각이겠지?’잠시 후, 회사.심강열이 한유라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마침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라 그런지 엘리베이터에 사람들이 꽤 많이 몰려들고 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한유라의 손목을 홱 잡아당겼다.2층에서 사람들이 더 타고 한유라는 자연스럽게 구석으로 밀려나고 말았다.인파에 밀려나는 한유라의 모습에 심강열은 몰래 욕설을 내뱉었다.‘윽, 조금 뒤에 올걸...’각 부서 사무실에 도착할 때마다 직원들이 한, 두 명씩 내리고 드디어 엘리베이터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그제야 한유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휴, 구두 밟히는 줄 알았네. 한정판인데.’비록 심해그룹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김현숙이 운영하는 회사도 나름 규모를 자랑하는 곳, 평생 엘리베이터를 타도 버튼 한 번 스스로 눌러본 적이 별로 없는 한유라였다.그런 그녀의 당황스러운 표정에 심강열이 물었다.“적응 안 되지?”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던 한유라가 싱긋 웃었다.“아, 아니. 그냥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네.”‘돈도 많은 사람이... 전용 엘리베이터 하나 만들지.’하지만 심강열의 생각은 달랐다. 바쁘게 움직이며 대표 얼굴도 못 알아보는 직원들을 바라보며 묘한 흐뭇함을 느끼는 게 이상하다면 이상한 심강열의 취미 중 하나였다.잔뜩 당황했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한유라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사람들이랑 우르르 엘리베이터 타는 거 별로면 출퇴근 시간 따로 빼줄게.”잠깐 멈칫하던 그가 말을 이어갔다.“지각해도 봐줄게.”이때 한유라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담담해? 그리고 직원들은 당신이 대표인 줄 모르고 있는 것 같던데?”한유라는 방금 전 엘리베이터에서 심강열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각자 할 일만 하던 직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내가 뭐 연예인도 아니고. 그리고 다들 돈 벌
잠시 후, 세 사람은 대표 사무실에 입성했다.깔끔하고 차분한 그레이톤이 메인 컬러인 사무실, 심강열의 이미지처럼 진중하고 고급스러웠다.필요없는 인테리어는 최대한 뺐지만 누추하긴커녕 오히려 더 분위기 있게 느껴졌다.심강열이 재킷을 소파에 올려두고 조 비서는 눈치껏 재킷을 옷걸이에 걸어둔 뒤 업무 보고를 시작했다.“대표님, 오전에 신 원장님께서 오셨다 가셨습니다. 방금 전까지 있다가 가셨어요.”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심강열은 고개를 끄덕였다.“식사는 하고 가셨어요?”“네, 저랑 유 이사님이랑 같이 드셨습니다.”심강열이 고개를 끄덕였다.“그쪽 병원은 지금 우리 그룹 의료 설비 시장을 완전히 독점할 생각이에요. 이 기회에 크게 한 번 벌어볼 생각인 것 같은데 그렇게 쉽게 들어줄 수야 없죠. 일단 최대한 시간 끌어줘요.”고개를 끄덕인 조 비서는 어느새 자기 사무실처럼 편하게 소파에 앉아있는 한유라를 힐끗 돌아보았다.“아, 다시 소개할게요. 오늘부터 우리 회사에서 일하실 한유라 씨입니다.”“네?”조희찬이 눈이 커다래졌다.‘직원으로 일하신다고? 사모님이?’이미 운명을 받아들인 한유라가 조희찬을 향해 싱긋 웃었다.“앞으로 잘 부탁드려요.”사모님한테서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들으니 조희찬은 왠지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한편, 심강열은 조희찬을 향해 환하게 웃는 한유라를 발견하고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인사팀한테 정식으로 입사절차 밟도록 해줘요. 오늘부터 출근입니다.”이에 한유라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이렇게 본격적으로 한다고?”“당연하지. 장모님도 내가 이렇게 나와주길 바라실걸?”심강열의 말에 한유라도 백번 동의했지만 뭔가 빠트린 듯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아, 그럼 어느 팀으로...”조희찬이 조심스레 물었다.‘이사? 본부장? 적어도 팀장 자리 정도는 달아주시겠지.’“아, 제 비서로 일할 겁니다.”순간 조희찬도 한유라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조 비서님과 마찬가지로요.”심강열이 한 마디 더 덧붙이자 한유라가 어색하게
갑작스러운 희소식에 조희찬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비록 수석 비서관도 충분히 높은 자리이긴 했지만 어느 어느 팀 팀장이네 본부장이네. 밖에 나가 말했을 때 그럴 듯한 직함과 달리 비서라고 대답하면 어딘지 모르게 대표 뒤나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뭐 실제로 졸졸 따라다니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굳이 비유하자면 왕의 곁을 지키는 내관 같은 기분이랄까? 궁 사람들의 존중을 받긴 하지만 어딘지 허전한 그런 기분이었다.하지만 기획팀으로 옮겨가면 실질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고 더 자유롭게 그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감사합니다. 대표님. 기대 져버리지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하지만 한유라는 조희찬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차라리 엄마 곁에 있는 게 나을 뻔했어. 자주 혼나긴 해도 결국 뒤처리는 엄마가 다 해주시니까 마음만은 편했는데. 저 사람은... 그냥 대충 넘어갈 생각이 없는 것 같단 말이지?’잠시 후, 조희찬이 사무실을 나서고 심강열이 소파로 다가왔다.“표정이 왜 그래? 줄초상 난 사람처럼?”“그럼? 나도 조 비서님처럼 고맙다고 인사라도 드릴까? 새 비서 뽑으셔서 대표님은 기분 좋으시겠어요?”한유라가 눈을 흘겼다.그녀의 비아냥거림에도 심강열은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눈치였다.“응, 난 기분 좋은데? 너랑 같이 일할 수 있으니까.”“우리 두 사람 자리가 바뀌었다고 생각해 봐. 그래도 그렇게 웃을 수 있겠어?”한유라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뒤로 돌아 사무실 책상을 힐끗 바라본 심강열이 어깨를 으쓱했다.“아, 저 자리가 욕심났었어?”‘하, 참나. 못 알아듣는 척하긴.’한유라가 고개를 돌려버렸다.‘이사, 본부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팀장님 소리는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뭐,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네 날개가 단단해지면 저 자리 너한테 내줄게.”“누가 갖고 싶대?”한유라가 눈을 흘겼다.분명 눈앞의 여자는 말도 안 되는 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