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하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다른 비서가 핀잔을 주었다.“소은정 대표님이 얼마나 바쁘신데. 여기로 오시겠어?”“바빠도 이 정도 시간은 낼 수 있지 않아? 게다가 우리 대표님이 전인그룹 지분을 전부 소 대표님한테 넘기셨잖아. 지금 우리 대표님은 그냥 허울 뿐인 이사장일 뿐이라고. 우리 대표님... 은근 순애보시라니까.”“소 대표님은 아직 잘 모르시니까 입 조심해. 우리 대표님 계획에 코 파트리지 말고. 제 말이 맞죠, 대표님?”두 비서의 대답을 듣고 있던 전동하가 피식 웃었다.“그렇긴 하죠. 그런데... 어차피 은정 씨도 곧 알게 될 거예요.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두 분 얼른 퇴근하세요. 전...”전동하가 말을 마치기 전, 비서가 깜짝 놀란 눈동자로 손을 뻗었다.“저... 저쪽에 소은정 대표님 아니에요?”그 말에 흠칫하던 전동하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르려던 순간, 표정이 다시 차갑게 가라앉는다.“뭐야. 아니네...”비서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고 기분이 언짢은 듯한 전동하의 모습에 비서들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전동하가 말없이 여자의 곁을 지나려던 그때, 안진이 불쑥 입을 열었다.“소은정 대표가 아니라 실망이 크신가 봐요?”전동하는 그런 그녀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투명인간 취급에 안진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곧 다시 그 뒤를 따라붙었다.“정말 저랑 손 잡을 생각 없어요? 소 씨 일가 쪽 사람들은 동하 씨 절대 못 받아들여요. 그쪽이 아무리 희생하고 배려해도 결혼 허락 안 할 거라고요. 박수혁 그 인간도 두 사람이 결혼까지 가는 걸 가만히 두고 볼 리도 없고요. 아, 설마 결혼까진 생각 안 하고 있는 거예요?”안진의 마지막 도발에 전동하가 발걸음을 멈추었다.확연히 어두워진 그의 표정이 안진이 계획대로라는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그러니까 나랑 손 잡아요. 동하 씨는 소은정이랑 마음껏 사랑하시고 난 내 나름대로 목적을 이루는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윈윈인데 왜 거절하시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네요?”전
경고하 듯 다시 안진을 매섭게 쳐다보던 전동하가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에 흠칫하던 안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전동하... 내 생각보다 훨씬 재밌는 사람이네. 안진... 이 이름을 아는 사람은 몇 없는데. 하루만에 바로 알아냈단 말이야?“전동하 대표님, 제 바람은 이거 하나예요. 두 사람 사이 얼른 발표하세요. 최대한 빨리요.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두 사람이 사귄다는 걸 알 수 있게요.”안진의 목소리에 전동하가 발걸음을 멈추었다.“박수혁한테 반응할 시간 같은 거 줘버리지 말고 그냥 돌직구 날리라고요.”왠지 초조해진 안진이 말했다.이 기회를 절대 포기할 순 없어. 전동하... 잘만 구슬리면 내 최대의 조력자가 될 사람이야.고개를 돌린 전동하가 깊은 눈동자로 안진을 주시했다.“박수혁 대표랑 사귀고 싶어요? 나한테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알려줄까요?”한편, 오피스텔.거실에 선 소은정과 마이크는 거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트렁크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전동하가 온 줄 알고 환한 얼굴로 문을 연 소은정을 맞이한 건 비서의 얼굴.짐만 오피스텔에 남긴 비서는 다른 정보는 남기지 않은 채 홀연이 자리를 떠버렸다.짐만 먼저 집에 도착했다고? 이게 무슨 상황이지? 게다가... 비서도 동하 씨랑 같이 비행기에서 내렸을 텐데 설마 또 다시 회사로 간 건가? 아닌데... 요즘 그쪽 회사에 그렇게 급한 프로젝트는 없을 텐데...소은정이 이런 생각을 하던 그때, 주방에서 고개를 쏙 내민 한유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요리 시작해 말아! 불만 몇 번을 켜는지 모르겠다. 냄비 다 타겠어!”사실 직접 요리를 하려던 소은정이었지만 저번에 배달음식을 시켰던 게 마음에 걸렸는지 한유라가 굳이 요리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대는 바람에 결국 주방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두 부자의 환영식은 자기가 직접 맡아야 한다나 뭐라나...고개를 돌린 마이크가 눈을 찡긋했다.“유라, 이모. 조금만 더요.”“내가 전화 해볼게.”시간을 확인한 소은정이 휴대폰을 꺼낸
순간 거실에 적막이 드리웠다.“설마요. 그냥 꼬질꼬질하게 은정 씨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요. 매력치가 떨어지잖아요.”싱긋 웃던 소은정이 한유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우리 동하 씨 좀 그만 놀려. 애도 있는데.”소은정의 타박에 쳇 소리와 함께 한유라는 주방으로 향했다.한편, 다시 다가온 마이크가 소은정의 손을 잡고 있는 전동하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더니 깁스 중인 팔을 가리켰다.“아빠, 오늘 예쁜 누나가 병원에 왔을 때...”마이크가 조잘조잘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 소은정은 조용히 주방으로 향해 한유라를 거들었다.어쨌든 손님인데 유라 혼지 일하면 왠지... 부려먹는 기분이란 말이지.이때 거실 쪽을 힐끗 바라보던 한유라가 소은정의 귓가에 속삭였다.“아까 그말 농담 아니야. 조심해, 너.”“동하 씨 그런 사람 아니야.”전동하를 신뢰하기도 했고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당황스러울 건 없었다.이미 떠난 사랑 앞에서 시간 낭비, 감정 낭비 하는 건 질색이었으니까.“야, 사람 겉모습만 봐선 모른다 너. 전동하 대표 겉모습은 완벽해 보이지만... 또 누가 알아? 생각지 못한 결함이 있을지?”한유라가 말을 이어가려던 그때 전동하가 소매를 걷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저도 도울게요.”탄탄한 그의 팔목을 바라보던 소은정이 싱긋 웃었다.“당일 출장이라 피곤할 텐데 얼른 쉬어요.”“아무리 피곤해도 밥 정도 할 힘은 있답니다. 은정 씨, 유라 씨. 나가서 기다리세요. 두 사람 기다리게 한 벌이라고 치죠.”소은정이 더 만류하려던 그때 프라이팬에 담긴 요리를 이미 까맣게 태워버린 한유라가 쿨하게 대답했다.“그래, 은정아. 동하 씨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 알겠다고 하자. 동하 씨, 저희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르세요!”말을 마친 한유라는 앞치마를 집어던지고 도망치 듯 거실로 나가고 단 10분 안에 만들어낸 그녀의 걸작을 바라보던 소은정이 고개를 저었다.한편, 그 사이에 전동하는 벌써 앞치마를 두른 채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상태. 고급스러운
이 무슨 세상 유치한 질문이란 말인가.피식 웃던 소은정은 그저 말없이 티비로 고개를 돌렸다.잠시 후, 전동하가 만들어낸 완벽한 요리는 모두의 칭찬을 받았다.말 많던 한유라도 이미지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밥만 들이켰으니까.허겁지겁 먹는 그녀의 모습에 소은정이 실소를 터트렸다.한편, 전동하는 전학을 가고 싶다며 떼를 쓰는 마이크를 매서운 눈빛으로 제압하고 있었다.하지만 소은정의 생각도 마이크와 다르지 않았다.그런 환경에서 마이크가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까...“전학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그 선생님이 다른 방식으로 보복을 할 수도 있잖아요.”“아니요. 그럴 일은 없어요.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 뒀고 아이도 다른 학교로 전학갔으니까요. 교장선생님한테 직접 전화해서 좋은 선생님으로 부탁드린다고 얘기도 했고요.”담담한 전동하와 달리 소은정과 마이크의 눈동자는 휘둥그레졌다.“학교를 그만뒀다고요? 언제요?”이에 전동하가 싱긋 웃었다.“낮에요. 은정 씨 전화 받고 바로 학교로 전화해 봤죠. 다행히 교장선생님이 만족스러운 답을 주셨고요.”만족스러운 답?그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교장선생님이 먼저 해당 선생과 학생을 처리해 줬으니 나름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밖에.반면, 병원에서 만났던 그 선생님을 떠올린 소은정은 어딘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선생님으로서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아이들을 불공정하게 대하는 것. 이보다 더 나쁜 선생님이 있을까?“그럼 계속 그 학교를 다녀야 해요?”마이크의 질문에 전동하가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지. 깁스 풀면 바로 학교로 돌아가는 거야.”“깁스... 영원히 안 풀었으면 좋겠다.”마이크가 실망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그래도 그전까진 푹 쉴 수 있잖아. 내일 누나네 집에 갈래? 누나 아빠도 마이크 많이 보고 싶어하셔. 아 호랑이도...”소은정의 제안에 마이크의 눈동자에 드디어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갈래요! 오늘 바로 갈래요!”“그래도 괜찮겠어요?”전동하가
마이크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고 은근히 아들 바보인 전동하가 추상파 대가를 스승으로 붙여주어 어린 나이임에도 상당한 그림 실력을 자랑하는 몸이었다.그림 전용 앞치마까지 차려입은 마이크가 고개를 들었다.“이건 마이크고 여긴 예쁜 누나요.”“그럼 이 사람은?”전동하가 그림 속의 다른 한 사람을 가리키자 마이크가 갑자기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그 모습에 전동하의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뭔데? 누굴 그렸는데?”이때 마침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소은정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기 시작했다.성인 남자 같은데... 설마 동하 씨인가?아니지? 동하 씨면 마이크가 저렇게 우물쭈물할 필요가 없잖아?이때 마이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연준이 형이요!”순간 거실에 정적이 감돌았다.왠지 으스스해진 분위기에 TV에 집중하던 한유라도 고개를 돌렸다.“연준이 형? 우연준 비서?”마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연준이 형 진짜 대단한 사람 같아요. 매일 예쁜 누나랑 같이 일할 수 있고 할 줄 아는 일도 많고. 난 이제 커서 연준이 형 같은 사람이 될래요! 이제부터 연준이 형이 내 롤모델이에요!”한편, 전동하는 말없이 눈썹만 치켜세웠다.하, 내가 지금 우연준 비서한테 밀린 거야?마이크, 이 아버지는 그림에 넣어줄 생각없는 거니?보다못한 소은정이 다가와 중재를 시작했다.“오늘 우 비서님이랑 하루종일 같이 있더니 마음에 들었나 봐요.”“당연하죠. 연준이 형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요. 회사 사람들 얼굴도 다 알고 사람들도 다 연준이 형을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하지만 칭찬이 이어질 수록 전동하의 기분은 점점 더 언짢아져만 갔다.“안 되겠어요. 앞으로는 마이크 데리고 회사로 가지 말아요. 은정 씨 출근하는 동안에는 회장님 댁에 두는 게 좋겠어요.”아들에게서 다른 남자의 칭찬을 듣느니 아직도 어딘가 어려운 소찬식을 마주하는 게 백 배 더 나았다.몇 번 더 만나면 아주 성도 우 씨로 바꾸겠다고 하겠어?11시쯤.마이크가
소은정은 무슨 옷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어차피 사이즈도 비슷하고 서로 옷을 공유한 적도 많았으니까.부랴부랴 옷을 갈아입은 한유라는 당연하다는 듯 소은정의 신상백까지 든 채 싱긋 미소를 지었다.“무슨 일 생기면 전화해.”소은정은 오피스텔 아래까지 나와 한유라를 배웅했다.“그래.”이때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전동하가 한유라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유라 씨 돌아가는 거예요?”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분이 좋아진 전동하가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다행이네요. 드디어 방해꾼이 사라져서...”그리고 소은정이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전동하의 큰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곧이어 뜨거운 키스가 이어졌다.한유라의 눈치를 보느라 며칠 동안 소은정과 제대로 된 스킨십은커녕 단둘이서 있을 새도 별로 없었던 전동하는 말라비틀어지기 일보 직전인 화분과 같은 상태였다.하, 자유다.가뭄끝에 비가 내려 땅이 촉촉해지 듯 몸과 마음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한편, 전동하의 숨결이 점점 더 뜨거워지자 소은정이 다급하게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나 출근해야 한단 말이에요.”이상하게 애교스럽게 나온 목소리에 소은정 스스로도 눈이 동그래졌다.욕망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눈동자로 소은정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전동하가 싱긋 웃었다.“그래요. 집까지 데려다줄래요.”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이 후다닥 엘리베이터에 타고 전동하가 그 뒤를 따랐다.좁은 상자 안에 두 사람만 있으니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묘한 분위기는 더 강렬해졌다.진정하자, 진정해...콩닥대는 심장을 억누르며 소은정은 엘리베이터가 어서 도착하길 바라고 또 바랐다.1초, 2초, 3초...바로 그때, 등 뒤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소은정의 몸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는지 전동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조금만 이대로 있어줘요. 그냥 좀 안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이에 반항 아닌 반항을 멈춘 소은정은 다시 초를 세기 시작했다.세상에 엘리베이터가
하지만 1초, 2초, 10초가 흘러도 김현숙은 그저 그녀를 가만히 볼 뿐이었다.어색한 침묵을 견디다 못한 한유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냥 혼내세요. 전 혼날 준비됐으니까.”차라리 평소처럼 소리치고 화나 내시지. 왜 가만히 계시는 거야. 더 무섭게...한편, 딸을 바라보는 김현숙은 그녀 나름대로 마음이 착잡했다.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그런지 제멋대로인 성격으로 자라버린 딸. 온갖 사고란 사고는 다 치며 자란 딸이 바로 한유라였다.“3개월 전이었나? 바로 이 사무실에서 네가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해? 그 남자랑 사귀고 싶다고. 평생 결혼 안 해도 좋다고 명분 따윈 필요 없다고 말했었지.”한유라의 표정이 허탈함, 실망감, 절망감으로 휩싸이자 김현숙은 다시 말을 멈추었다.평소에 아무리 엄하게 굴어도 한유라는 그녀가 열 달 동안 품었다 낳은 딸.안쓰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니까.“엄마, 그 얘기는 그만 하면 안 돼요?”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눈치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딸이 건넨 물컵을 바라보며 김현숙이 말을 이어갔다.“그 남자 몇 번이나 날 만나러 왔었는데 내가 안 만나줬어. 그리고 며칠 전에야 너희 두 사람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됐고. 평생 숨기고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니?”한유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김현숙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너도 그 남자도 서로에게 진심이었다고 생각해. 그저 그 진심의 무게가 달랐던 것뿐이겠지. 넌 그 남자를 위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달려들었지. 그런데 그 남자는? 그 남자는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전 와이프 동생 되는 사람이 와서 너한테 그딴 말을 하고 갔는데 그런 거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남자야. 네가 그 남자한테 어떤 존재인지 정말 모르겠니?”그 누구보다 날카로운 김현숙의 분석에 한유라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요. 욕 하시려거든 하세요. 하지만 전 진심으로 그 사람 사랑했고 후회는 없어요. 그리고 이젠 이미 끝난 사이고요. 앞으론...”하지만
예상치 못한 자리에 눈이 동그래진 한유라가 발걸음을 멈추었다.이때 낯선 여자가 친절한 미소와 함께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어머, 유라 맞지? 참 예쁘게도 생겼다. 현숙이 너 젊었을 때랑 아주 똑같네.”한유라를 훑어보는 여자의 눈동자에는 흐뭇함으로 가득했다.여전히 멍한 표정인 한유라와 달리 심강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엄마, 유라 씨 놀라게 왜 이러세요...”아들의 말에 후다닥 손을 놓은 여자가 바로 사과했다.“어머, 미안. 아줌마가 너무 주책이었지? 놀랐어?”“아, 아닙니다. 안녕하세요.”다급하게 손을 젓던 한유라가 생각에 잠겼다.저 사람이 심강열 대표 어머니?김현숙이 심강열과의 정략결혼을 밀어붙였을 때에도 한유라는 심강열의 얼굴만 얼핏 봤을 뿐 그 가족은 만난 적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그 와중에 한유라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다.SC그룹이 홍경그룹을 인수한 뒤로 심해그룹은 중부 지역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중인데 왜 굳이 나랑 정략결혼을 하려는 걸까? 솔직히 정략결혼에 관심 없는 줄 알고 나도 마음이 편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은 뭐지?이때 김현숙이 소개를 시작했다.“유라야, 이쪽은 엄마랑 가장 친한 친구 시율 이모. 엄마가 여러 번 얘기했었으니까 기억하지. 그리고 이쪽은 시율 이모 아들, 심강열 대표.”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한 한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말씀 많이 들었어요, 시율 이모.”김현숙은 평소 취미도 일일 정도로 워커홀릭이라 친구가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그런 와중에 개인적인 통화를 하는 사람이라곤 딸인 그녀를 제외하고 하시율이라는 어렸을 때의 친구였는데.그 사람이 심강열 엄마였어. 하, 이런 인연이 다 있네.“얼른 앉아.”하시율이 생글생글 웃으며 한유라를 바라보았다.“네가 요만할 때 봤었는데 벌써 20년이나 흘렀네. 그 동안 요양차 해외에 있었거든. 안 그랬으면 너 크는 거 옆에서 다 지켜보고 그랬을 텐데 아쉽다.”항상 진지하기만 하던 김현숙의 얼굴에도 드물게 진심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