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하 듯 다시 안진을 매섭게 쳐다보던 전동하가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에 흠칫하던 안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전동하... 내 생각보다 훨씬 재밌는 사람이네. 안진... 이 이름을 아는 사람은 몇 없는데. 하루만에 바로 알아냈단 말이야?“전동하 대표님, 제 바람은 이거 하나예요. 두 사람 사이 얼른 발표하세요. 최대한 빨리요.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두 사람이 사귄다는 걸 알 수 있게요.”안진의 목소리에 전동하가 발걸음을 멈추었다.“박수혁한테 반응할 시간 같은 거 줘버리지 말고 그냥 돌직구 날리라고요.”왠지 초조해진 안진이 말했다.이 기회를 절대 포기할 순 없어. 전동하... 잘만 구슬리면 내 최대의 조력자가 될 사람이야.고개를 돌린 전동하가 깊은 눈동자로 안진을 주시했다.“박수혁 대표랑 사귀고 싶어요? 나한테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알려줄까요?”한편, 오피스텔.거실에 선 소은정과 마이크는 거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트렁크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전동하가 온 줄 알고 환한 얼굴로 문을 연 소은정을 맞이한 건 비서의 얼굴.짐만 오피스텔에 남긴 비서는 다른 정보는 남기지 않은 채 홀연이 자리를 떠버렸다.짐만 먼저 집에 도착했다고? 이게 무슨 상황이지? 게다가... 비서도 동하 씨랑 같이 비행기에서 내렸을 텐데 설마 또 다시 회사로 간 건가? 아닌데... 요즘 그쪽 회사에 그렇게 급한 프로젝트는 없을 텐데...소은정이 이런 생각을 하던 그때, 주방에서 고개를 쏙 내민 한유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요리 시작해 말아! 불만 몇 번을 켜는지 모르겠다. 냄비 다 타겠어!”사실 직접 요리를 하려던 소은정이었지만 저번에 배달음식을 시켰던 게 마음에 걸렸는지 한유라가 굳이 요리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대는 바람에 결국 주방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두 부자의 환영식은 자기가 직접 맡아야 한다나 뭐라나...고개를 돌린 마이크가 눈을 찡긋했다.“유라, 이모. 조금만 더요.”“내가 전화 해볼게.”시간을 확인한 소은정이 휴대폰을 꺼낸
순간 거실에 적막이 드리웠다.“설마요. 그냥 꼬질꼬질하게 은정 씨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요. 매력치가 떨어지잖아요.”싱긋 웃던 소은정이 한유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우리 동하 씨 좀 그만 놀려. 애도 있는데.”소은정의 타박에 쳇 소리와 함께 한유라는 주방으로 향했다.한편, 다시 다가온 마이크가 소은정의 손을 잡고 있는 전동하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더니 깁스 중인 팔을 가리켰다.“아빠, 오늘 예쁜 누나가 병원에 왔을 때...”마이크가 조잘조잘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 소은정은 조용히 주방으로 향해 한유라를 거들었다.어쨌든 손님인데 유라 혼지 일하면 왠지... 부려먹는 기분이란 말이지.이때 거실 쪽을 힐끗 바라보던 한유라가 소은정의 귓가에 속삭였다.“아까 그말 농담 아니야. 조심해, 너.”“동하 씨 그런 사람 아니야.”전동하를 신뢰하기도 했고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당황스러울 건 없었다.이미 떠난 사랑 앞에서 시간 낭비, 감정 낭비 하는 건 질색이었으니까.“야, 사람 겉모습만 봐선 모른다 너. 전동하 대표 겉모습은 완벽해 보이지만... 또 누가 알아? 생각지 못한 결함이 있을지?”한유라가 말을 이어가려던 그때 전동하가 소매를 걷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저도 도울게요.”탄탄한 그의 팔목을 바라보던 소은정이 싱긋 웃었다.“당일 출장이라 피곤할 텐데 얼른 쉬어요.”“아무리 피곤해도 밥 정도 할 힘은 있답니다. 은정 씨, 유라 씨. 나가서 기다리세요. 두 사람 기다리게 한 벌이라고 치죠.”소은정이 더 만류하려던 그때 프라이팬에 담긴 요리를 이미 까맣게 태워버린 한유라가 쿨하게 대답했다.“그래, 은정아. 동하 씨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 알겠다고 하자. 동하 씨, 저희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르세요!”말을 마친 한유라는 앞치마를 집어던지고 도망치 듯 거실로 나가고 단 10분 안에 만들어낸 그녀의 걸작을 바라보던 소은정이 고개를 저었다.한편, 그 사이에 전동하는 벌써 앞치마를 두른 채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상태. 고급스러운
이 무슨 세상 유치한 질문이란 말인가.피식 웃던 소은정은 그저 말없이 티비로 고개를 돌렸다.잠시 후, 전동하가 만들어낸 완벽한 요리는 모두의 칭찬을 받았다.말 많던 한유라도 이미지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밥만 들이켰으니까.허겁지겁 먹는 그녀의 모습에 소은정이 실소를 터트렸다.한편, 전동하는 전학을 가고 싶다며 떼를 쓰는 마이크를 매서운 눈빛으로 제압하고 있었다.하지만 소은정의 생각도 마이크와 다르지 않았다.그런 환경에서 마이크가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까...“전학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그 선생님이 다른 방식으로 보복을 할 수도 있잖아요.”“아니요. 그럴 일은 없어요.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 뒀고 아이도 다른 학교로 전학갔으니까요. 교장선생님한테 직접 전화해서 좋은 선생님으로 부탁드린다고 얘기도 했고요.”담담한 전동하와 달리 소은정과 마이크의 눈동자는 휘둥그레졌다.“학교를 그만뒀다고요? 언제요?”이에 전동하가 싱긋 웃었다.“낮에요. 은정 씨 전화 받고 바로 학교로 전화해 봤죠. 다행히 교장선생님이 만족스러운 답을 주셨고요.”만족스러운 답?그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교장선생님이 먼저 해당 선생과 학생을 처리해 줬으니 나름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밖에.반면, 병원에서 만났던 그 선생님을 떠올린 소은정은 어딘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선생님으로서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아이들을 불공정하게 대하는 것. 이보다 더 나쁜 선생님이 있을까?“그럼 계속 그 학교를 다녀야 해요?”마이크의 질문에 전동하가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지. 깁스 풀면 바로 학교로 돌아가는 거야.”“깁스... 영원히 안 풀었으면 좋겠다.”마이크가 실망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그래도 그전까진 푹 쉴 수 있잖아. 내일 누나네 집에 갈래? 누나 아빠도 마이크 많이 보고 싶어하셔. 아 호랑이도...”소은정의 제안에 마이크의 눈동자에 드디어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갈래요! 오늘 바로 갈래요!”“그래도 괜찮겠어요?”전동하가
마이크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고 은근히 아들 바보인 전동하가 추상파 대가를 스승으로 붙여주어 어린 나이임에도 상당한 그림 실력을 자랑하는 몸이었다.그림 전용 앞치마까지 차려입은 마이크가 고개를 들었다.“이건 마이크고 여긴 예쁜 누나요.”“그럼 이 사람은?”전동하가 그림 속의 다른 한 사람을 가리키자 마이크가 갑자기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그 모습에 전동하의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뭔데? 누굴 그렸는데?”이때 마침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소은정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기 시작했다.성인 남자 같은데... 설마 동하 씨인가?아니지? 동하 씨면 마이크가 저렇게 우물쭈물할 필요가 없잖아?이때 마이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연준이 형이요!”순간 거실에 정적이 감돌았다.왠지 으스스해진 분위기에 TV에 집중하던 한유라도 고개를 돌렸다.“연준이 형? 우연준 비서?”마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연준이 형 진짜 대단한 사람 같아요. 매일 예쁜 누나랑 같이 일할 수 있고 할 줄 아는 일도 많고. 난 이제 커서 연준이 형 같은 사람이 될래요! 이제부터 연준이 형이 내 롤모델이에요!”한편, 전동하는 말없이 눈썹만 치켜세웠다.하, 내가 지금 우연준 비서한테 밀린 거야?마이크, 이 아버지는 그림에 넣어줄 생각없는 거니?보다못한 소은정이 다가와 중재를 시작했다.“오늘 우 비서님이랑 하루종일 같이 있더니 마음에 들었나 봐요.”“당연하죠. 연준이 형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요. 회사 사람들 얼굴도 다 알고 사람들도 다 연준이 형을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하지만 칭찬이 이어질 수록 전동하의 기분은 점점 더 언짢아져만 갔다.“안 되겠어요. 앞으로는 마이크 데리고 회사로 가지 말아요. 은정 씨 출근하는 동안에는 회장님 댁에 두는 게 좋겠어요.”아들에게서 다른 남자의 칭찬을 듣느니 아직도 어딘가 어려운 소찬식을 마주하는 게 백 배 더 나았다.몇 번 더 만나면 아주 성도 우 씨로 바꾸겠다고 하겠어?11시쯤.마이크가
소은정은 무슨 옷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어차피 사이즈도 비슷하고 서로 옷을 공유한 적도 많았으니까.부랴부랴 옷을 갈아입은 한유라는 당연하다는 듯 소은정의 신상백까지 든 채 싱긋 미소를 지었다.“무슨 일 생기면 전화해.”소은정은 오피스텔 아래까지 나와 한유라를 배웅했다.“그래.”이때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전동하가 한유라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유라 씨 돌아가는 거예요?”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분이 좋아진 전동하가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다행이네요. 드디어 방해꾼이 사라져서...”그리고 소은정이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전동하의 큰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곧이어 뜨거운 키스가 이어졌다.한유라의 눈치를 보느라 며칠 동안 소은정과 제대로 된 스킨십은커녕 단둘이서 있을 새도 별로 없었던 전동하는 말라비틀어지기 일보 직전인 화분과 같은 상태였다.하, 자유다.가뭄끝에 비가 내려 땅이 촉촉해지 듯 몸과 마음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한편, 전동하의 숨결이 점점 더 뜨거워지자 소은정이 다급하게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나 출근해야 한단 말이에요.”이상하게 애교스럽게 나온 목소리에 소은정 스스로도 눈이 동그래졌다.욕망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눈동자로 소은정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전동하가 싱긋 웃었다.“그래요. 집까지 데려다줄래요.”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이 후다닥 엘리베이터에 타고 전동하가 그 뒤를 따랐다.좁은 상자 안에 두 사람만 있으니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묘한 분위기는 더 강렬해졌다.진정하자, 진정해...콩닥대는 심장을 억누르며 소은정은 엘리베이터가 어서 도착하길 바라고 또 바랐다.1초, 2초, 3초...바로 그때, 등 뒤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소은정의 몸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는지 전동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조금만 이대로 있어줘요. 그냥 좀 안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이에 반항 아닌 반항을 멈춘 소은정은 다시 초를 세기 시작했다.세상에 엘리베이터가
하지만 1초, 2초, 10초가 흘러도 김현숙은 그저 그녀를 가만히 볼 뿐이었다.어색한 침묵을 견디다 못한 한유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냥 혼내세요. 전 혼날 준비됐으니까.”차라리 평소처럼 소리치고 화나 내시지. 왜 가만히 계시는 거야. 더 무섭게...한편, 딸을 바라보는 김현숙은 그녀 나름대로 마음이 착잡했다.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그런지 제멋대로인 성격으로 자라버린 딸. 온갖 사고란 사고는 다 치며 자란 딸이 바로 한유라였다.“3개월 전이었나? 바로 이 사무실에서 네가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해? 그 남자랑 사귀고 싶다고. 평생 결혼 안 해도 좋다고 명분 따윈 필요 없다고 말했었지.”한유라의 표정이 허탈함, 실망감, 절망감으로 휩싸이자 김현숙은 다시 말을 멈추었다.평소에 아무리 엄하게 굴어도 한유라는 그녀가 열 달 동안 품었다 낳은 딸.안쓰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니까.“엄마, 그 얘기는 그만 하면 안 돼요?”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눈치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딸이 건넨 물컵을 바라보며 김현숙이 말을 이어갔다.“그 남자 몇 번이나 날 만나러 왔었는데 내가 안 만나줬어. 그리고 며칠 전에야 너희 두 사람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됐고. 평생 숨기고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니?”한유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김현숙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너도 그 남자도 서로에게 진심이었다고 생각해. 그저 그 진심의 무게가 달랐던 것뿐이겠지. 넌 그 남자를 위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달려들었지. 그런데 그 남자는? 그 남자는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전 와이프 동생 되는 사람이 와서 너한테 그딴 말을 하고 갔는데 그런 거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남자야. 네가 그 남자한테 어떤 존재인지 정말 모르겠니?”그 누구보다 날카로운 김현숙의 분석에 한유라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요. 욕 하시려거든 하세요. 하지만 전 진심으로 그 사람 사랑했고 후회는 없어요. 그리고 이젠 이미 끝난 사이고요. 앞으론...”하지만
예상치 못한 자리에 눈이 동그래진 한유라가 발걸음을 멈추었다.이때 낯선 여자가 친절한 미소와 함께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어머, 유라 맞지? 참 예쁘게도 생겼다. 현숙이 너 젊었을 때랑 아주 똑같네.”한유라를 훑어보는 여자의 눈동자에는 흐뭇함으로 가득했다.여전히 멍한 표정인 한유라와 달리 심강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엄마, 유라 씨 놀라게 왜 이러세요...”아들의 말에 후다닥 손을 놓은 여자가 바로 사과했다.“어머, 미안. 아줌마가 너무 주책이었지? 놀랐어?”“아, 아닙니다. 안녕하세요.”다급하게 손을 젓던 한유라가 생각에 잠겼다.저 사람이 심강열 대표 어머니?김현숙이 심강열과의 정략결혼을 밀어붙였을 때에도 한유라는 심강열의 얼굴만 얼핏 봤을 뿐 그 가족은 만난 적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그 와중에 한유라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다.SC그룹이 홍경그룹을 인수한 뒤로 심해그룹은 중부 지역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중인데 왜 굳이 나랑 정략결혼을 하려는 걸까? 솔직히 정략결혼에 관심 없는 줄 알고 나도 마음이 편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은 뭐지?이때 김현숙이 소개를 시작했다.“유라야, 이쪽은 엄마랑 가장 친한 친구 시율 이모. 엄마가 여러 번 얘기했었으니까 기억하지. 그리고 이쪽은 시율 이모 아들, 심강열 대표.”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한 한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말씀 많이 들었어요, 시율 이모.”김현숙은 평소 취미도 일일 정도로 워커홀릭이라 친구가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그런 와중에 개인적인 통화를 하는 사람이라곤 딸인 그녀를 제외하고 하시율이라는 어렸을 때의 친구였는데.그 사람이 심강열 엄마였어. 하, 이런 인연이 다 있네.“얼른 앉아.”하시율이 생글생글 웃으며 한유라를 바라보았다.“네가 요만할 때 봤었는데 벌써 20년이나 흘렀네. 그 동안 요양차 해외에 있었거든. 안 그랬으면 너 크는 거 옆에서 다 지켜보고 그랬을 텐데 아쉽다.”항상 진지하기만 하던 김현숙의 얼굴에도 드물게 진심
심강열도 당황한 건지 고개를 번쩍 들었다.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한유라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곤 김현숙에게 끊임없이 눈치를 주었다.내가 진짜 창피해서 못 살아. 당장 땅밑으로 꺼지고 싶다... 아직 민하준 그 인간이랑 정식으로 헤어지자고 말도 못 했고 이렇게 성급하게 다가갔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난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이때 하시율이 옆에 앉은 아들의 어깨를 토닥였다.“그렇게 마음에 들면 줄게. 얘도 지금 만나는 사람 없거든. 솔직히 평생 노총각으로 썩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네가 받아준다면야 난 땡큐지.”김현숙과 하시율이 동시에 와인잔을 들었다.“그럼 유라가 내 며느리 하는 거다?”“당연하지.”정작 결혼의 당사자인 두 사람은 눈만 껌벅일 뿐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잠시 후, 참다 못한 한유라가 대충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왔다.베란다로 나오니 드디어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이때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녀의 어깨에 정장 재킷이 걸쳐졌다.깜짝 놀란 한유라가 고개를 돌려 보니 심강열이 미소를 지으며 두 여사님들을 가리켰다.“유라 씨 감기 걸릴까 봐 걱정되신대요.”유리문 너머 가까워진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하시율과 김현숙의 얼굴이 보였다.친구와 만나면 그 친구를 만났던 나이로 돌아간다고 했던가.평소 웃음기 하나 없던 김현숙도 소녀적 순정만화를 보며 꺄르륵대던 그때로 돌아간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두 사람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인 한유라가 물었다.“이런 상황은 처음이시죠?”“아, 뭐 전 괜찮습니다. 어머니께서 여자 앞에서 괜히 폼 잡지 말라고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단단히 당부하신터라.”삐걱대는 관절을 움직이던 심강열이 홀가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어쨌든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그 모습에 한유라가 고개를 들더니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세 여자 사이에서 기 한 번 못 펴는 심강열의 모습이 왜 그렇게 웃긴지...한유라의 눈동자 위로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지고 맑은 웃음소리까지. 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