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고 은근히 아들 바보인 전동하가 추상파 대가를 스승으로 붙여주어 어린 나이임에도 상당한 그림 실력을 자랑하는 몸이었다.그림 전용 앞치마까지 차려입은 마이크가 고개를 들었다.“이건 마이크고 여긴 예쁜 누나요.”“그럼 이 사람은?”전동하가 그림 속의 다른 한 사람을 가리키자 마이크가 갑자기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그 모습에 전동하의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뭔데? 누굴 그렸는데?”이때 마침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소은정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기 시작했다.성인 남자 같은데... 설마 동하 씨인가?아니지? 동하 씨면 마이크가 저렇게 우물쭈물할 필요가 없잖아?이때 마이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연준이 형이요!”순간 거실에 정적이 감돌았다.왠지 으스스해진 분위기에 TV에 집중하던 한유라도 고개를 돌렸다.“연준이 형? 우연준 비서?”마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연준이 형 진짜 대단한 사람 같아요. 매일 예쁜 누나랑 같이 일할 수 있고 할 줄 아는 일도 많고. 난 이제 커서 연준이 형 같은 사람이 될래요! 이제부터 연준이 형이 내 롤모델이에요!”한편, 전동하는 말없이 눈썹만 치켜세웠다.하, 내가 지금 우연준 비서한테 밀린 거야?마이크, 이 아버지는 그림에 넣어줄 생각없는 거니?보다못한 소은정이 다가와 중재를 시작했다.“오늘 우 비서님이랑 하루종일 같이 있더니 마음에 들었나 봐요.”“당연하죠. 연준이 형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요. 회사 사람들 얼굴도 다 알고 사람들도 다 연준이 형을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하지만 칭찬이 이어질 수록 전동하의 기분은 점점 더 언짢아져만 갔다.“안 되겠어요. 앞으로는 마이크 데리고 회사로 가지 말아요. 은정 씨 출근하는 동안에는 회장님 댁에 두는 게 좋겠어요.”아들에게서 다른 남자의 칭찬을 듣느니 아직도 어딘가 어려운 소찬식을 마주하는 게 백 배 더 나았다.몇 번 더 만나면 아주 성도 우 씨로 바꾸겠다고 하겠어?11시쯤.마이크가
소은정은 무슨 옷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어차피 사이즈도 비슷하고 서로 옷을 공유한 적도 많았으니까.부랴부랴 옷을 갈아입은 한유라는 당연하다는 듯 소은정의 신상백까지 든 채 싱긋 미소를 지었다.“무슨 일 생기면 전화해.”소은정은 오피스텔 아래까지 나와 한유라를 배웅했다.“그래.”이때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전동하가 한유라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유라 씨 돌아가는 거예요?”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분이 좋아진 전동하가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다행이네요. 드디어 방해꾼이 사라져서...”그리고 소은정이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전동하의 큰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곧이어 뜨거운 키스가 이어졌다.한유라의 눈치를 보느라 며칠 동안 소은정과 제대로 된 스킨십은커녕 단둘이서 있을 새도 별로 없었던 전동하는 말라비틀어지기 일보 직전인 화분과 같은 상태였다.하, 자유다.가뭄끝에 비가 내려 땅이 촉촉해지 듯 몸과 마음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한편, 전동하의 숨결이 점점 더 뜨거워지자 소은정이 다급하게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나 출근해야 한단 말이에요.”이상하게 애교스럽게 나온 목소리에 소은정 스스로도 눈이 동그래졌다.욕망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눈동자로 소은정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전동하가 싱긋 웃었다.“그래요. 집까지 데려다줄래요.”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이 후다닥 엘리베이터에 타고 전동하가 그 뒤를 따랐다.좁은 상자 안에 두 사람만 있으니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묘한 분위기는 더 강렬해졌다.진정하자, 진정해...콩닥대는 심장을 억누르며 소은정은 엘리베이터가 어서 도착하길 바라고 또 바랐다.1초, 2초, 3초...바로 그때, 등 뒤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소은정의 몸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는지 전동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조금만 이대로 있어줘요. 그냥 좀 안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이에 반항 아닌 반항을 멈춘 소은정은 다시 초를 세기 시작했다.세상에 엘리베이터가
하지만 1초, 2초, 10초가 흘러도 김현숙은 그저 그녀를 가만히 볼 뿐이었다.어색한 침묵을 견디다 못한 한유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냥 혼내세요. 전 혼날 준비됐으니까.”차라리 평소처럼 소리치고 화나 내시지. 왜 가만히 계시는 거야. 더 무섭게...한편, 딸을 바라보는 김현숙은 그녀 나름대로 마음이 착잡했다.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그런지 제멋대로인 성격으로 자라버린 딸. 온갖 사고란 사고는 다 치며 자란 딸이 바로 한유라였다.“3개월 전이었나? 바로 이 사무실에서 네가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해? 그 남자랑 사귀고 싶다고. 평생 결혼 안 해도 좋다고 명분 따윈 필요 없다고 말했었지.”한유라의 표정이 허탈함, 실망감, 절망감으로 휩싸이자 김현숙은 다시 말을 멈추었다.평소에 아무리 엄하게 굴어도 한유라는 그녀가 열 달 동안 품었다 낳은 딸.안쓰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니까.“엄마, 그 얘기는 그만 하면 안 돼요?”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눈치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딸이 건넨 물컵을 바라보며 김현숙이 말을 이어갔다.“그 남자 몇 번이나 날 만나러 왔었는데 내가 안 만나줬어. 그리고 며칠 전에야 너희 두 사람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됐고. 평생 숨기고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니?”한유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김현숙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너도 그 남자도 서로에게 진심이었다고 생각해. 그저 그 진심의 무게가 달랐던 것뿐이겠지. 넌 그 남자를 위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달려들었지. 그런데 그 남자는? 그 남자는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전 와이프 동생 되는 사람이 와서 너한테 그딴 말을 하고 갔는데 그런 거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남자야. 네가 그 남자한테 어떤 존재인지 정말 모르겠니?”그 누구보다 날카로운 김현숙의 분석에 한유라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요. 욕 하시려거든 하세요. 하지만 전 진심으로 그 사람 사랑했고 후회는 없어요. 그리고 이젠 이미 끝난 사이고요. 앞으론...”하지만
예상치 못한 자리에 눈이 동그래진 한유라가 발걸음을 멈추었다.이때 낯선 여자가 친절한 미소와 함께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어머, 유라 맞지? 참 예쁘게도 생겼다. 현숙이 너 젊었을 때랑 아주 똑같네.”한유라를 훑어보는 여자의 눈동자에는 흐뭇함으로 가득했다.여전히 멍한 표정인 한유라와 달리 심강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엄마, 유라 씨 놀라게 왜 이러세요...”아들의 말에 후다닥 손을 놓은 여자가 바로 사과했다.“어머, 미안. 아줌마가 너무 주책이었지? 놀랐어?”“아, 아닙니다. 안녕하세요.”다급하게 손을 젓던 한유라가 생각에 잠겼다.저 사람이 심강열 대표 어머니?김현숙이 심강열과의 정략결혼을 밀어붙였을 때에도 한유라는 심강열의 얼굴만 얼핏 봤을 뿐 그 가족은 만난 적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그 와중에 한유라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다.SC그룹이 홍경그룹을 인수한 뒤로 심해그룹은 중부 지역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중인데 왜 굳이 나랑 정략결혼을 하려는 걸까? 솔직히 정략결혼에 관심 없는 줄 알고 나도 마음이 편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은 뭐지?이때 김현숙이 소개를 시작했다.“유라야, 이쪽은 엄마랑 가장 친한 친구 시율 이모. 엄마가 여러 번 얘기했었으니까 기억하지. 그리고 이쪽은 시율 이모 아들, 심강열 대표.”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한 한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말씀 많이 들었어요, 시율 이모.”김현숙은 평소 취미도 일일 정도로 워커홀릭이라 친구가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그런 와중에 개인적인 통화를 하는 사람이라곤 딸인 그녀를 제외하고 하시율이라는 어렸을 때의 친구였는데.그 사람이 심강열 엄마였어. 하, 이런 인연이 다 있네.“얼른 앉아.”하시율이 생글생글 웃으며 한유라를 바라보았다.“네가 요만할 때 봤었는데 벌써 20년이나 흘렀네. 그 동안 요양차 해외에 있었거든. 안 그랬으면 너 크는 거 옆에서 다 지켜보고 그랬을 텐데 아쉽다.”항상 진지하기만 하던 김현숙의 얼굴에도 드물게 진심
심강열도 당황한 건지 고개를 번쩍 들었다.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한유라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곤 김현숙에게 끊임없이 눈치를 주었다.내가 진짜 창피해서 못 살아. 당장 땅밑으로 꺼지고 싶다... 아직 민하준 그 인간이랑 정식으로 헤어지자고 말도 못 했고 이렇게 성급하게 다가갔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난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이때 하시율이 옆에 앉은 아들의 어깨를 토닥였다.“그렇게 마음에 들면 줄게. 얘도 지금 만나는 사람 없거든. 솔직히 평생 노총각으로 썩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네가 받아준다면야 난 땡큐지.”김현숙과 하시율이 동시에 와인잔을 들었다.“그럼 유라가 내 며느리 하는 거다?”“당연하지.”정작 결혼의 당사자인 두 사람은 눈만 껌벅일 뿐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잠시 후, 참다 못한 한유라가 대충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왔다.베란다로 나오니 드디어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이때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녀의 어깨에 정장 재킷이 걸쳐졌다.깜짝 놀란 한유라가 고개를 돌려 보니 심강열이 미소를 지으며 두 여사님들을 가리켰다.“유라 씨 감기 걸릴까 봐 걱정되신대요.”유리문 너머 가까워진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하시율과 김현숙의 얼굴이 보였다.친구와 만나면 그 친구를 만났던 나이로 돌아간다고 했던가.평소 웃음기 하나 없던 김현숙도 소녀적 순정만화를 보며 꺄르륵대던 그때로 돌아간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두 사람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인 한유라가 물었다.“이런 상황은 처음이시죠?”“아, 뭐 전 괜찮습니다. 어머니께서 여자 앞에서 괜히 폼 잡지 말라고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단단히 당부하신터라.”삐걱대는 관절을 움직이던 심강열이 홀가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어쨌든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그 모습에 한유라가 고개를 들더니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세 여자 사이에서 기 한 번 못 펴는 심강열의 모습이 왜 그렇게 웃긴지...한유라의 눈동자 위로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지고 맑은 웃음소리까지. 심
이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십의 냄새?한유라가 눈을 반짝였다.“그래서요? 시율 이모가 어떻게 했는데요? 너 따위가 어디서 내 아들을! 이 대사 했어요 안 했어요? 물따귀는요?”한유라의 말에 웃음이 터진 심강열의 눈이 이쁘게 휘어졌다.“현실은 드라마랑 다르더라고요. 돈 받고 그냥 떠났어요.”이에 한유라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에이, 생각이 짧았네요. 강열 씨랑 결혼하면 강열 씨 돈 전부를 가질 수 있는데. 푼돈이나 받고 떨어지다니. 나였으면 절대 안 넘어가요.”그녀의 말에 한유라를 바라보는 심강열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실렸다.“유라 씨였으면 안 떠났을 건가요?”“당연하죠. 대어를 낚으려면 작은 유혹 같은 건 떨쳐버릴 줄 알아야 한답니다.”“역시 유라 씨는 다르네요...”이에 한유라가 흠칫했다.아니, 왜 나랑 비교하고 그런대? 다른 얘기. 다른 얘기하자.“그런데 강열 씨는 왜 하나도 안 슬퍼 보여요? 시율 이모랑 안 싸웠어요?”한유라의 질문에 심강열이 고개를 저었다.“제가 애도 아니고 그렇게 막 나갈 나이는 이제 지났죠. 그리고 그 사람이 떠나려는 마음을 이미 굳힌 이상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엄마가 제시한 조건이 그만큼 유혹적이었다는 거겠죠.”별로 슬프지 않다는 건 심강열의 진심이었다. 오히려 어딘지 모르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사랑이 끝났음에 홀가분함을 느꼈다.어쩌면 사랑은 진작 바래지고 오랜 시간 만났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을 수도... 하시율이 아니었다면 심강열은 당연히 결혼을 했을 테고 아마 조용히 이혼을 했을지도 모르겠다.자신을 바라보는 눈에 온통 물욕뿐인 여자를 향해 도저히 더 이상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으니까.오히려 가뭄의 비처럼 나서준 엄마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심강열이었다.다른 사람이 본다면 현실속에 신데렐라 따위는 없다고 한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심강열에게 그 관계는 재산의 차이와 상관없이 너무 무거웠고 내려놓으니 오히려 홀가분했다.한편, 심강열의 말을
한유라는 마음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만약 계속 버티고 있었다면 용돈 정도만 받으면서 살았을 테고 한 달에 몇 천만원 정도 쓰는 게 다겠지? 아니다. 시율 이모가 그 여자를 별로 마음에 안 들어했다고 했으니까 한 푼도 안 줄지도? 그래. 눈치 보면서 평생 부잣집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사느니 그 돈 받고 나가서 건물주 소리를 듣는 게 백 번, 천 번 더 낫지.뭐, 이렇게 좋은 남자를 놓친 건 좀 아깝지만.그러던 한유라는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약 민하준 어머니였다면 500억? 하, 5천만 원도 안 줄 거야!한편, 심강열은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얼굴을 찡그렸다 웃었다 한숨을 쉬었다 말았다 하는 여자를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다 문득 물었다.“아, 그 민하준 대표랑은...”그 사람을 언급하자 한유라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끝났어요.”“아.”심강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는데 엄마가 안 믿으시더라고요. 유라 씨 성격에 남자친구 있으면 이런 자리에 안 나올 거라고. 아니, 현숙 이모도 애초에 이런 자리를 만들지 않으셨을 거라고요.”어느새 어둠이 드리우고 차가운 밤바람에 한유라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심강열은 그저 말없이 함께 하늘을 바라보았다.약 10분 뒤...너무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끝이 보이지 않던 수다가 드디어 끝났다.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려던 그때, 하시율이 심강열의 팔을 툭 건드렸다.“얘는 뭐가 그렇게 급해? 난 현숙이랑 쇼핑 좀 할 거니까 네가 유라 집까지 데려다줘.”심강열이 당황한 표정으로 한유라와 김현숙을 바라보았다.“아니에요, 이모. 시간도 많이 늦었고... 쇼핑은 다음에 같이 하시는 게 어떠세요?”이에 김현숙이 딸을 노려보았다.“늦긴. 은정이랑 놀 때는 새벽이 돼도 안 들어오던 애가. 엄마랑 이모 말대로 해.”한유라가 다급하게 뭔가 덧붙이려 했지만 김현숙의 매서운 눈초리에 결국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네, 유라 씨 안전하게 집까지
왜 굳이 날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걸까?나한테 반해서? 그건 아닐 테고...역시 이모 말 때문에 그런 거겠지. 마마보이가 아니긴... 쯧쯧.집으로 가는 동안 한유라는 왠지 모를 불안함에 휩싸였다.그곳에 그녀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서...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비껴가는 일이 없다고 했던가.저택 앞에 익숙한 차 한 대가 멈춰서 있었다.얼마나 그 앞에 있었는지 어둠과 혼연일체가 된 것 같은 차,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남자.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에 심강열도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차에서 그 남자, 민하준이 내렸다.꽤 많이 화가 난 듯 차갑고 무시무시한 표정.어, 뭐지? 바람 피다 들킨 것 같은 이 모습은?묘하게 느껴지는 죄책감에 어색한 헛기침을 뱉던 심강열이 물었다.“끝났다면서요.”이에 한유라가 피식 웃었다.“전 끝냈어요. 그리고 저쪽은...”살짝 멈칫하던 한유라가 말을 이어갔다.“제가 알 바 아니고요.”어차피 미래가 없는 관계,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이어가야 할 이유가 없는데. 미련한 자식.“도와줄까요? 500억 정도면 되겠어요?”웃고 있지만 슬퍼 보이는 한유라를 어떻게든 달래주고 싶어 실없는 농담을 던진 심강열은 스스로의 생각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내가... 왜 이러지?한편, 한유라는 점점 다가오는 민하준을 노려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저딴 자식한테는 1원도 아까워요.”그 말에 심강열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민하준에게 가시가 되어 가슴이 콕 박혔다.한유라가 차에서 내리려던 그때, 심강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정말 도움 안 필요한 거 맞아요?”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눈빛에 한유라는 알 수 없는 따뜻함에 사로잡혔다.“네,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어요.”한유라가 차에서 내렸음에도 심강열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유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심강열과 민하준은 한동안 침묵의 대화를 나누었다.먼저 고개를 돌린 민하준은 여전히 심강열의 재킷을 걸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