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강열도 당황한 건지 고개를 번쩍 들었다.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한유라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곤 김현숙에게 끊임없이 눈치를 주었다.내가 진짜 창피해서 못 살아. 당장 땅밑으로 꺼지고 싶다... 아직 민하준 그 인간이랑 정식으로 헤어지자고 말도 못 했고 이렇게 성급하게 다가갔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난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이때 하시율이 옆에 앉은 아들의 어깨를 토닥였다.“그렇게 마음에 들면 줄게. 얘도 지금 만나는 사람 없거든. 솔직히 평생 노총각으로 썩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네가 받아준다면야 난 땡큐지.”김현숙과 하시율이 동시에 와인잔을 들었다.“그럼 유라가 내 며느리 하는 거다?”“당연하지.”정작 결혼의 당사자인 두 사람은 눈만 껌벅일 뿐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잠시 후, 참다 못한 한유라가 대충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왔다.베란다로 나오니 드디어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이때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녀의 어깨에 정장 재킷이 걸쳐졌다.깜짝 놀란 한유라가 고개를 돌려 보니 심강열이 미소를 지으며 두 여사님들을 가리켰다.“유라 씨 감기 걸릴까 봐 걱정되신대요.”유리문 너머 가까워진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하시율과 김현숙의 얼굴이 보였다.친구와 만나면 그 친구를 만났던 나이로 돌아간다고 했던가.평소 웃음기 하나 없던 김현숙도 소녀적 순정만화를 보며 꺄르륵대던 그때로 돌아간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두 사람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인 한유라가 물었다.“이런 상황은 처음이시죠?”“아, 뭐 전 괜찮습니다. 어머니께서 여자 앞에서 괜히 폼 잡지 말라고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단단히 당부하신터라.”삐걱대는 관절을 움직이던 심강열이 홀가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어쨌든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그 모습에 한유라가 고개를 들더니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세 여자 사이에서 기 한 번 못 펴는 심강열의 모습이 왜 그렇게 웃긴지...한유라의 눈동자 위로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지고 맑은 웃음소리까지. 심
이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십의 냄새?한유라가 눈을 반짝였다.“그래서요? 시율 이모가 어떻게 했는데요? 너 따위가 어디서 내 아들을! 이 대사 했어요 안 했어요? 물따귀는요?”한유라의 말에 웃음이 터진 심강열의 눈이 이쁘게 휘어졌다.“현실은 드라마랑 다르더라고요. 돈 받고 그냥 떠났어요.”이에 한유라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에이, 생각이 짧았네요. 강열 씨랑 결혼하면 강열 씨 돈 전부를 가질 수 있는데. 푼돈이나 받고 떨어지다니. 나였으면 절대 안 넘어가요.”그녀의 말에 한유라를 바라보는 심강열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실렸다.“유라 씨였으면 안 떠났을 건가요?”“당연하죠. 대어를 낚으려면 작은 유혹 같은 건 떨쳐버릴 줄 알아야 한답니다.”“역시 유라 씨는 다르네요...”이에 한유라가 흠칫했다.아니, 왜 나랑 비교하고 그런대? 다른 얘기. 다른 얘기하자.“그런데 강열 씨는 왜 하나도 안 슬퍼 보여요? 시율 이모랑 안 싸웠어요?”한유라의 질문에 심강열이 고개를 저었다.“제가 애도 아니고 그렇게 막 나갈 나이는 이제 지났죠. 그리고 그 사람이 떠나려는 마음을 이미 굳힌 이상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엄마가 제시한 조건이 그만큼 유혹적이었다는 거겠죠.”별로 슬프지 않다는 건 심강열의 진심이었다. 오히려 어딘지 모르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사랑이 끝났음에 홀가분함을 느꼈다.어쩌면 사랑은 진작 바래지고 오랜 시간 만났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을 수도... 하시율이 아니었다면 심강열은 당연히 결혼을 했을 테고 아마 조용히 이혼을 했을지도 모르겠다.자신을 바라보는 눈에 온통 물욕뿐인 여자를 향해 도저히 더 이상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으니까.오히려 가뭄의 비처럼 나서준 엄마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심강열이었다.다른 사람이 본다면 현실속에 신데렐라 따위는 없다고 한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심강열에게 그 관계는 재산의 차이와 상관없이 너무 무거웠고 내려놓으니 오히려 홀가분했다.한편, 심강열의 말을
한유라는 마음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만약 계속 버티고 있었다면 용돈 정도만 받으면서 살았을 테고 한 달에 몇 천만원 정도 쓰는 게 다겠지? 아니다. 시율 이모가 그 여자를 별로 마음에 안 들어했다고 했으니까 한 푼도 안 줄지도? 그래. 눈치 보면서 평생 부잣집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사느니 그 돈 받고 나가서 건물주 소리를 듣는 게 백 번, 천 번 더 낫지.뭐, 이렇게 좋은 남자를 놓친 건 좀 아깝지만.그러던 한유라는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약 민하준 어머니였다면 500억? 하, 5천만 원도 안 줄 거야!한편, 심강열은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얼굴을 찡그렸다 웃었다 한숨을 쉬었다 말았다 하는 여자를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다 문득 물었다.“아, 그 민하준 대표랑은...”그 사람을 언급하자 한유라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끝났어요.”“아.”심강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는데 엄마가 안 믿으시더라고요. 유라 씨 성격에 남자친구 있으면 이런 자리에 안 나올 거라고. 아니, 현숙 이모도 애초에 이런 자리를 만들지 않으셨을 거라고요.”어느새 어둠이 드리우고 차가운 밤바람에 한유라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심강열은 그저 말없이 함께 하늘을 바라보았다.약 10분 뒤...너무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끝이 보이지 않던 수다가 드디어 끝났다.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려던 그때, 하시율이 심강열의 팔을 툭 건드렸다.“얘는 뭐가 그렇게 급해? 난 현숙이랑 쇼핑 좀 할 거니까 네가 유라 집까지 데려다줘.”심강열이 당황한 표정으로 한유라와 김현숙을 바라보았다.“아니에요, 이모. 시간도 많이 늦었고... 쇼핑은 다음에 같이 하시는 게 어떠세요?”이에 김현숙이 딸을 노려보았다.“늦긴. 은정이랑 놀 때는 새벽이 돼도 안 들어오던 애가. 엄마랑 이모 말대로 해.”한유라가 다급하게 뭔가 덧붙이려 했지만 김현숙의 매서운 눈초리에 결국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네, 유라 씨 안전하게 집까지
왜 굳이 날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걸까?나한테 반해서? 그건 아닐 테고...역시 이모 말 때문에 그런 거겠지. 마마보이가 아니긴... 쯧쯧.집으로 가는 동안 한유라는 왠지 모를 불안함에 휩싸였다.그곳에 그녀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서...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비껴가는 일이 없다고 했던가.저택 앞에 익숙한 차 한 대가 멈춰서 있었다.얼마나 그 앞에 있었는지 어둠과 혼연일체가 된 것 같은 차,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남자.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에 심강열도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차에서 그 남자, 민하준이 내렸다.꽤 많이 화가 난 듯 차갑고 무시무시한 표정.어, 뭐지? 바람 피다 들킨 것 같은 이 모습은?묘하게 느껴지는 죄책감에 어색한 헛기침을 뱉던 심강열이 물었다.“끝났다면서요.”이에 한유라가 피식 웃었다.“전 끝냈어요. 그리고 저쪽은...”살짝 멈칫하던 한유라가 말을 이어갔다.“제가 알 바 아니고요.”어차피 미래가 없는 관계,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이어가야 할 이유가 없는데. 미련한 자식.“도와줄까요? 500억 정도면 되겠어요?”웃고 있지만 슬퍼 보이는 한유라를 어떻게든 달래주고 싶어 실없는 농담을 던진 심강열은 스스로의 생각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내가... 왜 이러지?한편, 한유라는 점점 다가오는 민하준을 노려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저딴 자식한테는 1원도 아까워요.”그 말에 심강열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민하준에게 가시가 되어 가슴이 콕 박혔다.한유라가 차에서 내리려던 그때, 심강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정말 도움 안 필요한 거 맞아요?”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눈빛에 한유라는 알 수 없는 따뜻함에 사로잡혔다.“네,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어요.”한유라가 차에서 내렸음에도 심강열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유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심강열과 민하준은 한동안 침묵의 대화를 나누었다.먼저 고개를 돌린 민하준은 여전히 심강열의 재킷을 걸치고
입술을 꽉 다문 민하준이 한동안 차가운 기운을 내뿜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한유라, 투정부리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목소리를 낮춘 민하준의 눈동자가 늑대처럼 번뜩였다.“이미 일어난 일은 다시 돌릴 수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왜 그렇게 과거에 집착해? 나도 널 위해 최선을 다했어. 내 입장도 좀 이해해 주면 안 돼?”이에 한유라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최선을 다해? 내가 이혼하라고 시위라도 했니? 네가 싫어서 네가 정 떨어져서 한 걸로 내 핑계대지 마. 나야말로 하고 싶은 말이야. 나도 최선을 다했어. 네 엄마에 네 전 와이프가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날 불여시네 상간녀네 입에도 담지 못할 말을 했을 때도 다른 사람들이 날 욕했을 때도 난 가만히 있었어. 그런데 내가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해?”민하준이 입을 열려던 그때, 한유라가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이제 널 이해하는 것도 모자라서 동생까지 이해하라고? 너도 그렇고 너희 가족들도 그렇고 참 뻔뻔하다. 내가 언제까지 그 말도 안 되는 사랑에 빠져있을 줄 알았어? 내가 영원히 네 앞에서 네 가족들 앞에서 죄인처럼 굽신대길 바랐던 거야?”한유라가 참았던 말을 쏟아내고 어느새 더 날카로워진 민하준의 시선이 찬 공기를 갈랐다.“그래서? 이제 와서 후회돼? 명분 같은 거 필요없다고 한 건 너였어.”“명분, 그래 필요없어. 내가 왜 너랑 결혼 안 하겠다고 한 줄 알아? 너랑 결혼하면 난 영원히 네 전처 다음이 되는 거니까. 평생 첩처럼 살고 싶지 않았으니까.”민하준의 정교한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그래서...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왜? 이제 와서 배신감이라도 느껴? 난 그래도 우리가 서로에게 공평한 사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너도 네 가족들도 나한테는 짐밖에 안 되네? 미안한데 난 인내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 더 못 버티겠다.”모든 걸 놓은 듯 홀가분하게 웃는 한유라의 모습에 민하준이 이를 악물었다.“하, 며칠 잠수타더니 이제 제정신이 들었나 보지?”“제정신은
하지만 개처럼 싸우는 두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듯 한유라는 멍하니 한참을 서있었다.그래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민하준의 칼이 먼저 그녀의 가슴을 찔러버렸다.민하준의 전 와이프, 민하준의 가족들.한유라는 지금까지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이유가 외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아니었어... 민하준... 민하준 저 자식 자체가 문제였어.검은 하늘을 가르는 바람이 칼날처럼 한유라의 볼과 가슴을 베어내며 스쳐지났다.사랑하는 남자에게 최악의 수모를 당한 오늘 밤을 어쩌면 영원히 잊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그래도... 날 사랑하는 그 마음만은 진짜라고 생각했는데...한편, 두 남자는 다른 쪽에서 액션 영화를 찍고 있었다.길바닥에서 구른 민하준의 주먹 하나하나는 비수처럼 날카로웠지만 어려서부터 복싱이며 태권도를 배운 심강열 역시 그에 밀리지 않았다.5분 정도가 흘렀을까? 그제야 마음을 추스린 한유라가 한데 뒤엉킨 두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그만!”차가운 목소리에 민하준도, 심강열도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무표정으로 다가간 한유라는 바닥에 엎어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두 남자를 바라보다 결국 심강열 쪽으로 다가갔다.그녀의 선택에 놀란 듯 눈이 동그래진 심강열은 한유라의 부축을 받고 일어선 뒤 날카로운 눈으로 민하준을 노려보았다.한편, 버림받은 민하준도 이글거리는 눈으로 두 남녀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한유라는 더 이상 민하준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가요, 강열 씨. 내가 약 발라줄게요.”두 사람이 집으로 올라가려던 그때, 민하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그래, 한유라, 심강열. 잘 먹고 잘 살아라!”이를 악문 민하준이 마음에도 없는 축복을 건넸다.차라리 한유라가 이성을 잃고 그에게 달려들어 욕하고 때리길 바랐다.그런다면 아직 그에게도 기회가 남아있다는 말일 테니까.하지만 그가 던진 비수에 심장을 관통당한 한유라는 더 이상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심강열의 팔을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지만 한유라는 아무렇지 않은
한동안 눈을 껌벅이던 심강열이 무의식적으로 창가쪽을 바라보았다.“한번만 좀 도와줘요. 소문은 안 낼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요.”한유라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민하준 그 자존심에 설령 봤다 해도 남한테 떠벌릴 리가 없지.말문이 막힌 심강열이 결국 어깨를 으쓱했다.“유라 씨도 괜찮다고 하는 판에 여기서 제가 더 튕기면 매력 없는 거겠죠?”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심강열이 피식 웃었다.창밖의 네온사인이 마침 그의 완벽한 이목구비를 비추었다.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있던 한유라가 웃으며 물었다.“그런데 아까 갑자기 왜 그랬던 거예요? 얼굴도 다치고 이게 뭐예요.”말은 그렇게 해도 방금 전 심강열이 민하준의 얼굴에 주먹을 꽂는 순간, 한유라는 그에게서 후광을 느꼈었다. 어쩌면 이 남자와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달까?하지만 이성을 되찾고 보니 항상 진중하던 심강열이 다짜고짜 주먹부터 들이밀었다는 게 왠지 믿기지 않았다.“유라 씨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맘 편히 앉아만 있어요. 그쪽에서 유라 씨를 괴롭혔으면 그대로 돌려줘야죠.”심강열이 보고 들은 한유라는 절대 손해를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 심기를 건드리면 배로 돌려주는 스타일인 그녀가 민하준의 말 한 마디에 눈물만 꾹 참고 있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심강열의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품에 약상자를 안은 채 생각에 잠겼던 한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쪽팔리지만 솔직히 아까 조금 당황했거든요. 솔직히 강열 씨가 때리지 않았다고 해도 내가 알아서 복수했을 거예요.”어느새 기운을 차린 한유라의 모습을 보니 심강열도 왠지 안심이 됐다.“그랬겠죠. 그런데... 아까 제가 안 나섰고 엄마가 그걸 아셨으면 아마 제가 맞아죽었을 거예요.”아... 시율 이모 때문이었어?한유라를 혼란스럽게 만들던 궁금증이 풀리니 역시 속이 시원했다.그렇게 모두가 마음이 어지러운 밤이 시작되었다.안방 침대에 눕기 전 한유
얇은 슬립만 걸친 한유라를 차마 쳐다보지 못한 채 바로 안방 화장실로 들어간 심강열이 안방 화장실을 둘러 보았다. 여긴 훨씬 화려하네.그리고 구석에 벗어둔 한유라의 속옷이 눈에 들어오고...빠르게 고개를 돌린 심강열이 수도꼭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흠... 좀 헐렁해졌네.“집에 공구함 같은 거 있어요?”“아... 아, 네.”여전히 멍한 표정의 한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창고로 들어가 한참을 뒤지던 한유라가 가격표도 뜯지 않은 공구함을 들고 나타났다.“여기요.”그때,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만 뻗은 심강열의 손가락이 순간 한유라의 가슴을 스쳤다.이 세상에서 가장 폭신한 물질과 닿은 듯한 촉감에 심강열은 감전이라도 된 듯 다시 팔을 접었다.당황한 건 한유라도 마찬가지.두 사람 모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침묵은 한동안 이어졌다.다시 공구함을 받아든 심강열은 방금 전 그 터치는 잊고 수도꼭지에만 집중하려고 애쓰고 또 애썼다.이상하네. 여자랑 관계를 안 가져본 것도 아니고... 왜 이러는 거야. 다 큰 어른이 돼서는...하지만 한참 스스로를 설득해 봐도 방금 전 그 전율은 다시 심강열의 가슴을 두근거리기 만들었고 피가 꺼꾸로 솟듯 온몸이 뜨거워졌다.평소 친구들이 누가 몸매가 좋더라, 속궁합이 어떻더라는 말을 할 때면 심강열은 그저 말없이 고개만 젓는 타입이었다.사람들은 남자가 하반신으로 생각하는 동물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심강열은 자신만큼은 성적인 욕구에 큰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내가 경험이 너무 적었던 걸까?머릿속의 기억을 지울 수 없으니 심강열은 최대한 한유라의 존재를 잊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한편,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한유라도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아까 도망쳤어야 했나? 아니지. 그럼 너무 유난떠는 것 같잖아. 그냥 실수인데.그럼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가는 게 맞나? 아니지. 그럼 내가 너무 닳고 닳은 여자 같잖아.또 뭘 더 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이대로 도망치면 강열 씨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