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말하면서도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데, 화가 나면서도 실망스러운 듯했다.상혁은 그런 하연을 보며 미소를 지었고, 그녀의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괜찮아, HD그룹과 안 맞아도 다른 기술 회사들이 있잖아. B시에서 안 되면 타지역에서도 할 수 있어. 네가 꼭 하고 싶다면 방법은 많을 거야.”지금으로서는 이런 말이 최선의 위로였다.상혁이 문 쪽을 향해 갑자기 말했다.“사람을 데려와.”얼마 지나지 않아, 보디가드들이 한 남자를 끌고 들어왔다. 그 남자는 바로 하연 앞까지 끌려와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최... 최 사장님!” 남자는 절을 하며 땅에 엎드려 울부짖었다.하연이 일어나 보니, 그 남자는 바로 얼마 전 병원에서 나온 이현오였다. 그는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상태가 매우 초라해 보였다.“네가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하연은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그날엔 제가 정말 정신이 나갔습니다. 최 사장님에게 그런 생각을 품고 협박하다니, 정말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제 와서 엎드려 사죄드리며, 최 사장님의 용서를 구할 뿐입니다. 제발 저를 한 번만 봐주십시오.”이현오는 고개를 들고 애원하더니 다시 땅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그의 몸은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상혁은 그 상황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여전히 무대 쪽을 바라보며, 다리 위로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하연은 이현오 같은 사람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고통을 겪지 않으면, 절대로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법이었다.“오늘 이렇게 나한테 와서 무릎 꿇고 사죄하는 이유가 맞았기 때문이야? 아니면 단지 얻어맞고 일자리를 잃어서 그런 거야?”하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이현오를 바라보며 물었다.이현오는 고개를 더욱 조아리며 말했다.“최 사장님, 저는 정말로 제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욕망에 눈이 멀어 잘못된 길을 갔습니다. 다시는! 절대!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을 겁니다!”사실 이현오가 이 지경에
“물론 HD그룹이 최선의 선택이겠지만, 다른 기업들도 그에 못지않아. 예를 들어 BN그룹이랄까? 이미 연락하고 있어.”하연은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여은도 몇 마디 인사를 더 나누고 대화를 마쳤다. 하지만, 전화를 끊기 직전에 물었다.[지금 어디 가는 중이야?]“말도 마. 한씨 가문을 왕씨 가문에게 넘긴 후, 2주가 지나서야 나한테 연락이 왔어. 지금 그쪽에 자료를 넘기러 가는 길이야.” 하연은 속으로 왕씨 가문이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너에게 하마평을 준 거네. 왕씨 가문은 엉망진창인 한씨 가문을 넘겨받고 싶지 않은 게 분명해. 네가 괜히 나서서 문제를 자초한 것 같아.]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씨 가문을 제외하고는 이 상황을 처리할 더 나은 방법이 없었다.하연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바로 예전의 한씨 가문 고택이었다. 한동안 고택이 관리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했다. 하연이 고택 안으로 들어가니, 마당에 값비싼 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꽤 화려한 차였다.고택 내부로 들어서니, 거의 모든 가구와 물건들이 치워져 있었다. 인기척도 없었다.“최하연 씨, 오셨군요.”계단 모퉁이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연이 고개를 들어 보니, 우아한 자태의 여성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화장하지 않았지만, 눈가의 주름과 피로한 기색이 어렴풋이 보였다.하연은 그녀를 어디선가 봤다고 느꼈는데, 가까이 다가가서야 깨달았다. 그녀는 며칠 전 HD그룹에서 봤던 그 여자였다.‘혜성그룹의 그 고위직 임원!’ 하연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 여자가 바로 지금 내 눈앞의 이 여자라니!’“드디어 만났네요. 저는 왕아영이에요. 왕씨 가문은 최하연 씨가 보낸 것을 다 받았고, 나를 이 일의 책임자로 임명했죠.” 왕아영은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그럼 왕명주 사모님은 왕아영 씨의...”“언니죠. 저보다 다섯 살 많아요.”왕아영의 얼굴에는 철저한 자기관리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녀의 생활이
하연은 왕아영의 말에 충격을 받은 채 잠시 말을 잃었다. 그 틈을 타 왕아영은 하연을 다시 바라보며 말했다.“모르셨나 보네요? 친구라고 하셔서 당연히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요.”하연은 손에 든 가방을 꼭 쥐며 불길한 예감이 느꼈고, 조심스럽게 물었다.“한명준 씨, 지금 어디에 있나요?”왕아영은 하연을 살펴보더니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우리가 어디서 본 적 있던가요... 아, 기억났어요. 며칠 전에 HD그룹 본사에서 봤죠. 그때 최하연 씨도 거기 있었잖아요.”하연은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대답했다.“저는 DS그룹의 사장으로, 최근 신재생에너지 프로젝트를 맡고 있습니다. 혜성그룹과는 경쟁 관계였죠. 한씨 가문 문제와 상관없이, 왕아영 씨도 저를 알았을 거라고 생각해요.”하연은 왕아영이 일부러 자신을 무시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경고를 주기 위한 의도였다는 것도.왕아영은 입꼬리를 비틀며 고개를 돌렸고, 정면으로 답하지 않았다.“최 사장님, 아무래도 착각하신 것 같네요. 이제 DS그룹과 혜성그룹은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HD그룹은 이미 두 회사의 협력 결정을 공개했거든요. DS그룹은... 이미 탈락했습니다.”왕아영의 도발적인 말에 하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렇게 말씀하시기엔 아직 이른 것 같네요. HD그룹이 업계의 선두 주자일 수는 있지만, 그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후발주자들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니까요.”하연의 말을 들은 왕아영은 조용히 탁자 위에 자료를 내려놓았고, 손으로 탁자를 짚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최 사장님이 말하는 ‘선두’라는 개념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사실, 내가 B시에 온 이유는 최 사장님이 엉망진창인 한씨 가문을 우리 왕씨 가문에 떠넘겼기 때문이죠. 그게 아니었다면, 난 절대 여기 오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 왕씨 가문은 대대로 학문을 중시하는 집안이에요. 우리 언니 일로 명성이 실추되지만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 밖으로 나올 일도 없었을 거예요. 결혼은 아직 못했지만, 다행히 업
종이에 잉크가 번지면서 커다란 얼룩이 생겼다.하연은 겨우 자세를 바로잡고 글씨를 써냈지만, 그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글씨가 아주 못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었다.상혁은 그녀가 쓴 글자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그렇게 쓰기 어려웠어?”예전에도 몇몇 명문가 집안 자제들과 같은 서예 수업을 들었는데, 하연은 항상 성적이 가장 낮았다. 그래서 늘 선생님에게 남아 추가로 연습해야 했고, 한 글자를 열 번씩, 합쳐서 백 번을 써야 했다. 그때 하연은 매우 괴로워했다.“나는 원래 글쓰기에 소질이 없다고요!” 하연의 오빠들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나갔지만, 상혁만은 남아서 하연의 손을 잡고 글씨를 가르쳤다. 그렇게 해서 겨우 글씨를 절반 정도 배울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연은 그 시절을 거의 잊어버렸다.하연은 갑갑한 기분에 붓을 던져두고, 얼음 통에서 에비앙 물병을 꺼내어 한껏 들이마셨다. 물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리자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제야 조금 긴장이 풀렸다.상혁은 가정부에게 글씨를 가져가서 액자로 만들라고 지시하고는 하연에게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하연은 노트북을 켜고 ‘왕씨 가문’을 검색했다.“왕씨 가문의 현재 가주는 왕아영이라는 사람인데, 올해 마흔이고 아직 결혼은 안 했어요.”상혁은 그녀를 힐끔 보며 대답했다.“그 사람을 만났어?”하연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여자는 계속 나에게 불만을 품고, 마치 자기 인생의 모든 불행이 내 탓인 것처럼 원망하는 것 같아요. 내가 왕씨 가문에 그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라면서요.”하연은 분노에 가득 차 가슴을 오르락내리락했다.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자기 무릎 위로 끌어올리며 말했다.“왕씨 가문은 아들이 없이 딸 둘만 있는 상황에서, 왕명주는 정략결혼을 거부하고 한씨 가문에 시집갔고, 난산으로 죽으면서 왕씨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지. 그래서 왕아영이 집안을 이끌어야 했고, 지금까지 결혼도 못 했으니, 불만이 있는 건 당연
하경은 반쯤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 사람을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어?] “그 사람 때문에 신경 쓰는 게 아니에요. 뭔가 내가 놓친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지만 하연도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인지, 그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가슴 한구석에 무언가가 빠져나간 듯한 공허함만이 남아 있었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틀 안에 답을 줄게.] ...운성시는 관광 도시로서, 상업화된 B시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곳은 독특한 수상 도시의 정취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고, 강변을 따라 펼쳐진 풍경은 도시 전체를 감싸 안으며 여유롭고 느긋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치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듯한, 그런 곳이었다.하연이 BN그룹의 내부로 들어서자, 직원들은 일에 쫓기는 기색 없이 여유롭게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마치 바삐 출퇴근하는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듯 보였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차분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최 사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BN그룹 대표 오기용이라고 합니다. 운성시에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오기용은 마흔 가까이 되어 보였고, 예의 바르고 매우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오 대표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회의실에 앉아 협력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다. “태양광 산업의 변화에 따라 앞으로는 확실히 전망이 있을 겁니다. 게다가 국가에서도 기지국 건설을 적극 지원하고 있고, B시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 산업에서 자금과 기획을 낼 수 있는 회사는 많지 않습니다. DS그룹은 비록 후발 주자이지만, 무대는 자신 있게 세울 수 있을 겁니다.” 하연이 요약하듯 말했다. 오기용은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농담 섞인 말을 건넸다. “듣자 하니 DS그룹의 첫 번째 목표는 HD그룹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아쉽게도 HD그룹은 이미 혜성그룹과의 협력을 발표해 버렸죠. 결국 우리 BN그룹이 DS그룹의 마지막 선택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그는 악의 없이 말했지
하연은 이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손 선생님, 아니, 손 사장님의 가게는 그렇게 큰데, 사장님께서 직접 물건을 받으러 오셔야 할 정도로 인력이 부족한가요?” 이현은 살짝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최 사장님의 인플루언서 효과가 사라지니 저희 가게도 망할 지경이에요. 지금까지도 성훈이의 월급을 못 줄 뻔했죠.” 이현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연의 농담에 장단을 맞추며 유쾌하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하연도 미소를 지었다. ...오기용의 이름을 대니 효과가 있었다. 가게 주인은 즉시 차를 꺼내주었고, 이현이 하연을 도와 차를 골라주었다. “이 차가 가장 정통적이고, 맛도 깊습니다. 차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절대 놓치지 마세요.” 하연은 찻잎 한 줌을 손에 쥐고 코끝에 대어 그 향을 맡았다. “향이 정말 좋네요.” 이현은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제 기억으로는 하연 씨가 차를 잘 안 마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부 대표님을 위한 건가요?” 하연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게 주인에게 차를 포장해 달라고 부탁하며 웃었다. “저는 차를 잘 고를 줄 모르는데, 다행히 손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상혁 오빠가 분명히 좋아할 거예요.” 이현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당분간 부 대표님께서 우리 가게에 오실 일은 없겠군요.” 이현의 농담에 하연은 어딘가 애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두 사람은 나란히 가게를 나섰다. 때마침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고, 이현은 길가에서 우산을 하나 사서 하연과 함께 썼다. 하연은 거절하려고 했다. “제가 비서에게 데리러 오라고 할게요.” 이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차가 들어올 수 없을 거예요. 이 골목은 굽이굽이 돌아가니까, 하연 씨 비서가 찾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조금 전 하연이 들어왔을 때도 길이 복잡했으니, 이현의 말이 맞았다. 하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
하연은 가게 주인의 말을 듣고 즉시 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왕씨 가문은 대대로 학문을 중시하는 집안이잖아요. 이런 기회는 놓칠 수 없죠. B시에 돌아가면 같이 한 번 보러 갈래요?” 비가 내리고 가로등 불빛이 비치자, 하연의 머리카락은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하연이 미소를 지으며 초대했을 때, 이현은 그 따스한 분위기에 전혀 저항할 수 없었다. “마침 구경도 할 겸, 우리 가게를 보수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게다가 하연 씨가 직접 저한테 같이 가자고 했으니, 제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요?” 이현은 미소를 지으며 갓 구워낸 호떡을 포장해 하연에게 건넸다. 호텔이 멀지 않아서, 이현은 하연을 호텔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 두 사람은 내일의 출발 시간을 약속한 뒤, 더 이상 말없이 돌아섰다. 날씨는 약간 쌀쌀했다. 하연은 팔짱을 끼고 이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마음속에서 의문이 피어올랐다. ‘손이현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어.’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인 하연은 이미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문 앞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 긴 복도 끝,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곳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연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에 다가서자, 정태훈이 곤란한 표정으로 한쪽에 서 있었다. “최 사장님, 드디어 오셨네요. 전화해도 받지 않으셔서...” 태훈의 긴장한 모습에 하연은 즉시 소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파에는 한 남자가 거침없이 앉아 있었다. 셔츠 단추 두 개가 풀려 탄탄한 가슴이 드러나 있었는데, 그는 눈을 감은 채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다. 소리가 들리자 눈을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돌아왔네.”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하연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아니라 놀라움과 약간의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부상혁은 그녀의 손에 든 음식 상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밖에 나갔었구나. 왜 정 실장을 데리고 가지 않았어?” 만약 손
다음 날, 하연이 눈을 떴을 때 상혁은 이미 방에 없었다.아침 식사 중에 하연은 정태훈에게 입찰 상황에 관해 물었다. 둘이 모든 이야기를 나눈 후,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그럼 오늘 상혁 오빠는 정말 바쁘겠네.”어차피 오전부터 준비가 시작되고, 오후에 입찰이 진행되니 하연에게는 외출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네, 맞습니다.”“나 잠깐 나갔다 올게. 저녁 8시 전에는 돌아올 거야. 상혁 오빠가 나를 찾으면, 내가 축제에 갔다고 전해줘. 괜히 걱정하지 말라고도 해주고.”태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살짝 놀란 듯 물었다.“혼자 가시려고요?”하연은 태훈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정 실장도 나랑 같이 가고 싶은 거야?”태훈은 당황한 듯 웃으며 손을 저었다.“최 사장님, 농담 마세요. 저는 그저 사장님의 안전이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부 대표님이 사장님을 혼자 보냈다는 걸 아시면 분명 화를 내실 거예요.”하연은 한숨을 쉬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자세한 설명 대신 차분하게 말했다.“정 실장이 지금 하는 말, 나도 기분이 썩 좋진 않아. 지금 정 실장이 충성을 다해야 할 사람은 나야, 상혁 오빠가 아니라.”태훈은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외출하기 전, 하연은 샤워 했다.어제저녁 깊은 밤.하연이 어렴풋이 잠들어 있던 사이, 상혁이 그녀를 뒤에서 꼭 안아왔다. 상혁의 몸에서는 비 내린 뒤의 습기와 샤워 후의 잔향이 묻어 있었다. 뜨겁고 강렬한 그의 체온이 하연에게 전해졌고, 목소리는 낮고 잠겨 있었다.하연은 반쯤 깨어서 나지막이 물었다.“오빠...”상혁은 말없이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했다. 하연이 완전히 깨어났을 때, 결국 말했다.“나, 샤워 안 했어요.”“나중에 하자.”그 말과 함께 상혁은 하연을 불빛 아래로 이끌었다. 그는 하연이 먼저 움직이길 원했다. 하연은 이런 순간들에 대해 어느 정도 보수적이었다. 매번 그녀는 불을 끄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상혁은 고집스럽게 불을 켜둔 채 그녀가 모든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여사님. 같은 여자로서, 제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진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이해? 아니요. 전 그런 거 몰라요.” 단칼처럼 냉정하게 잘라버린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송혜선의 입술이 경직되며 굳어버렸다. ‘이런, 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송혜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진윤의 손등을 잡았다. “여사님... 따님 일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빠르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내 터져나온 감정. “사과? 한 아이가 죽었는데, 고작 한 마디 사과로 끝내겠다고요?” “아니면... 송 여사님의 눈엔 제 딸 목숨이 그깟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값싼 거였어요?” 그 목소리는 카페 전체를 울릴 만큼 컸고, 송혜선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흥분하지 마세요... 결국... 이 모든 건 우리 부씨 집안이... 정말 죄송합니다.” 진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결국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울었다. 그 모습은 너무 아프고, 너무 무너져 있었다. 진윤은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송혜선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하지만 진윤은 그것조차 거부했다.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송 여사님, 솔직히 말해봐요 오늘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당신 아들 부남준이 꼬투리 잡혀서, 지금 당장 날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애 죽고,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날
“닥쳐!!” 송혜선이 낮게 내뱉었다. “그 비밀, 평생 당신 뱃속에 묻어둬.”“아니면... 다시는 당신 딸 얼굴 못 볼 줄 알아.” 조봉규는 그제야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혜선아. 나도 그냥... 기분 좋아서, 그만...” “앞으로 이 집에서 그 얘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 약속해.” 조봉규의 간절한 다짐에도, 송혜선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한번 쏘아봤다. 곧이어, 목소리를 낮추며 화제를 돌렸다. “부동건, 딸한테 명분은 준다더니, 정작 혼인신고 얘긴 입도 안 뗐어. ‘이러다 또 마음 변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돼. 남준이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준비해야 해.’ 그 말엔 조봉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봤는데, 유가족 쪽에서 합의서만 받아낼 수 있으면, 그 사건도 다시 볼 여지가 있대.” 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야?” “응. 듣자 하니까 고경수 와이프, 진윤... 아직 F국에 있다더라. 기회만 되면 한번 만나봐. 그쪽에서 합의서를 써주기만 하면, 다시 기회는 생길 거야.” “근데 지금 당신 산후조리 중이잖아. 몸이 먼저야.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지만 혜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준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야. 기회가 있다면... 어떤 수라도 써야 해.’ 며칠 후, 송혜선은 드디어 고경수의 아내 진윤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의외로, 진윤은 단 한 마디 망설임 없이 만남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평일 오전, 한산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 실내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송혜선은 긴 트렌치코트에 머리까지 스카프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끔. 카페 입구에 들어선 그녀는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구석 창가에 앉은, 수척한 얼굴의
조봉규의 말은 하나하나 송혜선의 마음을 쳤다. “정 안 되면, 우리도 그냥 확 뒤엎어.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잖아. 신발 신은 놈들이야 겁낼 게 많겠지만, 우린 맨발이야.”‘맞아... 지금이라도 안 붙잡으면, 우린 끝장이야.’송혜선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채로, 그녀는 곧장 부동건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동건은 송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틈조차 없었다. 부남준의 사건이 악화로 치닫고 있었다. 갓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고, 경찰 쪽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법 앞에선 아무리 부동건이라도 무력하군.’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이 부동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한 죄, 그건 부모의 몫이야...’그저 무기력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송혜선의 말은 부동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그는 오히려 조용히 갓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린 얼굴. 손가락 하나만 잡혀도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이 아이는... 내 마지막 기적일지도 몰라.’부동건은 딸을 안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의 복잡한 모든 것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딸아, 네 엄마랑 진짜 많이 닮았네. 크면 예쁘겠다... 아주.”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지윤이라고 이름 지었어. 복 많은 아이라고 하더라. 부씨 가문 첫 딸, 제대로 키울 거야. 우리 지윤이는, 아빠의 제일 소중한 딸이 될 거야.”‘그래... 남준이는 못 지켜도, 이 아이만큼은...’부동건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혜선의 속은 서늘했다.‘정작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닌데...’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를 부동건의 품에서 안아올렸다.“조심해요, 아직 작아서... 그렇게 막 들면 안 돼요.”부동건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