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의 눈동자에는 마지막 남은 웃음기마저 사라지고, 깊고 음산한 기운만이 남았다“그럼 어떻게 해야 돈을 받아들이고 우리 하연이를 풀어줄 거지?”서준은 하민의 질문에 긴장감을 느끼며, 한 마디씩 천천히 말했다. “그 돈, 받지 않을 겁니다.” 받지 않겠다는 단호한 대답.하민은 잠시 서준의 담대함을 느꼈다. 그는 소매를 매만진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하연이를 감옥에 보내려는 거군.”서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비웃었다. “형님도 잘 아시다시피, 최씨 가문의 자식들은 모두 성공한 인물들이죠. 그런데 그중 하나가 감옥에 간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요?”마치 최씨 가문의 명성을 망가지는 장면을 상상이라도 한 듯, 서준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그렇게 되면 최씨 가문도 더는 흠 없는 가문이 아니게 될 겁니다. 부씨 가문도 최하연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고요. 그리고 최하연 자신도 그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겠죠.”서준은 마치 세상의 가장 재미있는 일을 발견한 듯, 천천히 하민의 반응을 살피며 말했다. 그는 한 손으로 의자를 짚고 거의 숨을 못 쉴 정도로 큰 웃음을 터뜨렸다. 서준은 지금 완전히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미친 듯한 광기를 드러내고 있었다.하민은 차가운 눈빛으로 이 장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어머니도 아직 한씨 집안에 있고, 네 여동생도 이방규와 결혼하지 않았어.”하민의 말은 또 다른 위협이었다. 하지만 서준은 이미 이 모든 것에 무던해졌고, 이제 자기 가족조차도 신경 쓰지 않는 상태였다.“평생동안 제 피나 빨아먹던 모기 같은 존재들이에요. 누군가 그 사람들을 한 방에 없애준다면 정말 고마울 것 같네요.” 서준은 더 이상 웃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말은 차갑고, 인간미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이제 나에게는 약점이 하나도 없어!! 이번에 반드시 최하연을 감옥에 보내야 해!!’하민은 서준의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하
“네 말은 이방규부터 시작하겠다는 거야?”상혁은 책상 가장자리에 기대어 서서 하민에게 서류 한 장을 건넸다. “HT그룹의 세금 문제, 왜 지금까지 덮여 있었을까요? 그때는 정말 드러나지 않았던 거예요? 한서준이 진행했던 놀이공원 사업에서 몇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죠. 그런데 사건이 그렇게 빨리 덮인 이유는, 뒤에서 누군가가 한서준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하민은 서류를 빠르게 훑어보더니 대강의 상황을 파악했다. “한서준을 지지하고 있는 그 사람을 움직이겠다는 거구나.”한서준의 뒤에는 강력한 ‘후원자’가 있었고, 이는 상혁이 이전의 임모연 사건을 통해 이미 알아차렸던 사실이었다. 상혁은 그때부터 이방규를 비롯한 더 큰 ‘후원자’를 겨냥하고 있었고, 지금 한서준이 자초한 이 상황은 그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하민은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B시의 두 부시장도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상혁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형님, 모르셨나요? 저는 이미 그 사람들을 건드렸어요.”상혁의 마음속은 불안과 짜증이 가득 차 있었고, 무언가로 마음을 진정시킬 필요를 느끼며 다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하민은 갑자기 지난밤 세무조사의 책임자와 회의하던 때를 떠올렸다. 책임자가 갑작스럽게 불려 나가던 것.그는 상혁의 말을 듣고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내가 어떻게 협력하면 되겠어?”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한 잔을 준비한 후 하민 앞에 놓으며 말했다. “형님은 큰오빠로서 여동생 하연이를 걱정하는 역할만 해주면 됩니다. 한서준의 배후에 사람이 있듯이, 저도 배후에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싸움을 지켜보면 됩니다. 다만 몇 가지 세부적인 면에서, 형님의 CS그룹이 해외에서 협조해 줘야 할 일이 있을 겁니다.”하민은 상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단번에 이해했다.B시의 절반에 가까운 기업들이 CS그룹과 협력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는 지난 몇 년 동안 B시의 시장과 부시장 등 고위 정치인들
조사를 받게 된 지 나흘째 되는 날, 하연은 정태훈을 만났다.며칠 전까지 보였던 불안한 모습과 달리, 하연은 이제 훨씬 차분해진 상태였다. “밖의 상황은 어떻게 되고 있어?”태훈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최 사장님에게 일이 생기자마자, 우리 회사는 리더가 없는 상태가 되어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다행히도 본사의 최하민 대표님이 이미 B시에 도착해 전체 상황을 통제하고 있어, 모든 게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부에서는 최 사장님의 이후 행보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고, 각종 추측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하연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탁자 위에 손가락을 두드리며 차분히 물었다. “상혁 오빠는 나왔어?”태훈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부분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외부에서도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공식 발표가 나오기 전까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하연은 잠시 생각한 후, 다른 질문을 던졌다. “황 비서는 요즘 어떤 동향을 보이나?”태훈은 곧바로 답했다. “황 비서님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금융감독원을 자주 드나들었지만, 최근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제가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 걸 수도 있습니다.”이 대답을 들은 하연은 이미 자신이 궁금해하던 것에 답을 얻은 듯했다. 그녀는 깊은숨을 내쉬며 재빠르게 마음을 정리하고, 정태훈에게 DS그룹의 업무를 지시했다.“신재생 에너지 프로젝트는 계속 추진해야 해. 내 사무실 책상 위에 이전에 작성해 둔 계획서가 있을 거야. 그 내용을 팀에 배분하고, 내가 없는 동안에도 프로젝트가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해줘야 해. 이 신재생 에너지 프로젝트는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니까.”하연은 마치 자신이 여전히 DS그룹의 회의실에 앉아 있는 것처럼 말했으며, 그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태훈은 그녀의 모든 지시를 꼼꼼히 메모했다.업무 이야기가 끝난 후, 하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큰오빠가 B시에 와 있는데도 내 상황은 아직 진전이 없어
하성이 가득 찬 분노를 억누르며 막 입을 떼려던 순간,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상혁이 외출했다가 돌아온 것이었다. 사실 그는 그저 아래층 로비에 가서 서류를 받아온 것뿐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묵직했고,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만, 최씨 가문의 형제들을 보자 눈빛이 달라졌다.“부 대표님.” 황연지가 먼저 다가섰다.하성은 상혁을 보자마자 놀란 얼굴로 말했다. “부상혁? 너는 언제 나왔어?”하성도 최근 뉴스를 통해 상혁에 대한 소식을 접했지만, 상혁이 확실히 나왔다는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다.연지가 대답했다. “하성 도련님, 이틀 전입니다. 아직 외부에 공지되진 않았습니다.”그러나 하성은 연지의 말을 무시하고 상혁에게 직접 물었다. “부 대표에게 물었습니다. 그쪽이 부상혁 대표입니까?” 연지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상혁은 연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하성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이틀 전쯤에 나왔어. 막 나온 거야.”“너는 괜찮은 거야?” 하성은 분노를 삼키며 물었다.“그렇게 말할 수 있지.” 상혁은 차분히 대답했다.그 말에 하성의 분노가 폭발했고, 바로 모자를 벗어 바닥에 내던지며 외쳤다. “우리 하연이가 너를 위한 증거를 찾아오던 중에 공항에서 붙잡혔다는 것도 알아?” “알고 있었어.” 상혁의 표정은 무덤덤했지만, 그의 눈에는 깊은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알고도 이렇게 가만히 있는다고?” 하성은 주먹을 쥐고 상혁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하경이 하성을 막아섰다.“최하성!” 하민이 낮고 엄중한 목소리로 동생을 제지했다. “하연이가 걱정된다면, 함부로 행동하지 마.”“형!” 하성은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했다.상혁은 하성과 하경을 지나쳐, 하민 앞에 앉았다. “WA 그룹 사업에 투입된 투자 금액은 총 2,000억이에요. 그중 1,200억은 DL 그룹에서, 나머지 800억은 이방규가 투자했죠. 서태진이 제시한 조건은, 자신이 수익을 일절 받지 않는 대신, F국에서 진행될 후속
조진숙이 B시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서 직원에 의해 가로막혔다. 이 공항 직원도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는데, 매우 공손하게 말했다. “조 여사님, 시간이 늦었습니다. 정 선생님께서 여사님의 입맛에 맞는 레스토랑이 많지 않다고 하시면서, 직접 요리사를 보내 몇 가지 요리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음식을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조진숙은 상대가 들고 있는 음식 상자를 한 번 쳐다본 후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 선생님에게 전해주세요. 저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이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 없다고요, 오히려 집안의 아내에게 더 신경 쓰는 것이 바람직할 겁니다. 저는 헛된 삶에는 관심이 없으니 사양하겠습니다.”결혼하면 아무리 부유한 집안이라도 결국은 현실적인 삶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조진숙은 이미 부동건과 결혼하면서 깨달았다.공항 직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조진숙은 상혁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ME그룹 본사에 다녀오며 인맥을 동원하려 했다. 이번에 돌아온 길에는 조진숙의 비서인 카리도 동행했는데, 카리는 마침 그 상황을 보고 입을 열었다. “부 대표님이 무사히 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정태산 선생님이 많은 역할을 하셨습니다. 여사님께서 이렇게 냉대하시면, 그분의 기분 상하지 않으실까요?”국내에서는 여전히 인간관계가 중요했기 때문이다.조진숙은 멀어져 가는 직원의 뒷모습을 힐끗 보며 대답했다. “정태산이 나를 초대하고 싶다면, 이렇게 복잡하게 하지 않았을 거야. 방금 그 사람은 정태산의 부인이 보낸 사람일 거야.”“설마 여사님을 떠보려고요?” 카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조진숙은 정태산의 부인에 관한 소문을 들었고, 자신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조진숙은 정태산과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고, 최근 상황에 관해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과거 이야기가 나오자, 조진숙은 카리의 말을 중단시키며 말했다. “내가 그동안 계속 정태산을 피했던 이유는, 지금의
“그리고 HT그룹 재무팀에 관련된 구체적인 상황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이방규의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이방규와 한서준이 손을 잡고 부상혁과 최하연을 노리며 최하연을 여기까지 몰아넣은 것이다. 하연은 이를 생각하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방규가 800억을 투자했으니 계약서에 서명이 되어 있을 거야. 만약 자금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태훈은 바로 대답했다. “이방규는 강제 추방될 겁니다. 그리고 평생 국내의 어떤 기업과도 협력할 수 없게 되겠죠.”“이방규가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까?” 하연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이미 그 부분에 대해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우리 하민 오빠야?” 하연은 바로 떠올렸다.태훈은 주위를 둘러본 후, 종이에 한마디를 적어 건넸다. 하연은 그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분이 이미 나왔을 가능성이 큽니다.]하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잠시 후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HT그룹 재무팀의 재무 담당자의 동향을 꼭 파악해 줘. 나는 이방규가 추방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세 명의 목숨값도 치르게 하고 싶으니까.”태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긴 하지만, 재무 쪽으로는 최 사장님의 상황이 쉽지 않아요. HT그룹의 재무 담당자가 최 사장님은 몰랐다고 진술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겁니다.”하연은 자신의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었다. “내가 말한 대로 우선 진행해줘.”하연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같은 시각 다른 조사실에서는 HT그룹 재무팀의 재무 담당자가 조사받고 있었다.그 재무 담당자는 울면서 외쳤다. “저는 인정합니다! 네, 맞아요! 한서준이 제게 우리 가족의 평생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래서 제가 모든 죄를 최하연 씨에게 뒤집어씌운 거예요!”조사실 안은 충격에 빠졌고, 조사관들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하지만, 형님, 다 지난 일이잖아요.” 석환은 쓴웃음을 지었다. “앞으로의 삶을 사셔야죠. B시에서 모든 걸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현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비슷한 말을 그는 이미 여러 차례 들었었다. 양한빈과 강성훈도 같은 말을 했고, 그때마다 이현은 침묵했다.“석환아, 너도 내가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해?” 이현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완전히 변해버린 이 얼굴, 망가진 앞날, 그렇게 허송세월한 사람이 너라면, 내려놓을 수 있겠어?”석환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때 다른 형제들이 제때 출동하지 못한 건 우리 형제들의 실수가 아니라, 잘못된 출동 시간이 전달됐기 때문이었잖아요. 그때 형님께 잘못된 시간을 전달한 사람은 이미 해고됐어요, 그건 명백한 사실이잖아요.”석환은 이현이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했다.“난 아직 내려놓을 수 없어.” 이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더 이상 한명준이 아니라, 손이현이야.”석환은 이현이 몇 년간 버텨온 정신적 압박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현도 누군가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해 주길 바라지 않았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하민은 재무 담당자가 자백을 번복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놀라서 상혁을 바라봤다. “어떻게 해결한 거야?”위쪽의 권력 다툼은 아직도 시간이 걸릴 일이었지만, 하연은 아주 빨리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상혁은 잠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확인했는데, 이현이 보낸 메시지였다.[해결됨.]둘은 같은 목적을 공유하고 있었다. 모두 하연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고, 상혁이 하려던 일을 알고 나서, 이현은 이 일을 감행해 하연의 무죄를 증명했다.상혁은 고개를 들어 하민에게 물었다. “언제쯤 하연이가 나올 수 있을까?”하민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자백을 번복했어도, HT그룹과의 관계를
하연은 하성이 유자 잎으로 자신을 때리며 다가오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몸을 피했다. “오빠, 그만해요. 저 저주받은 거 아니에요.”“그냥 하게 둬. 요즘 저 정도로 걱정을 많이 했어. 촬영 중이던 드라마도 절반만 찍고 바로 때려치우고 온 거야.” 하경이 미소를 지은 채 그 장면을 바라보며 말했다.하연은 웃음을 거두며 조용히 말했다. “오빠들 다 저 때문에 걱정 많이 했군요. 바깥에서 할 일이 많았을 텐데...”“주로 우리 큰형이 다 했어. 그리고...” 하경은 최근 며칠 동안의 일들을 떠올렸다. 상혁이 가장 고생한 사람이었다. 하루 24시간 중 20시간을 일하던 상혁, 하경은 그가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 알고 있었다. 하경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상혁도 많이 도왔어.”‘상혁 오빠가 정말로 나왔구나...’하연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이전에 있었던 일들, 그리고 부남준이 했던 말들이 그녀의 마음속에 불신의 씨앗을 심었다.“하연아,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하연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분위기를 넘기려 했고, 하성은 대충 유자 잎을 던지며 말했다. “너, 지금은 나갈 수 없어도 괜찮아. 내가 요리사를 초청했거든. 여기서 바로 요리해 줄 거야. 너 살이 좀 빠져서 예전보다 안 예뻐.”하연은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자 그렇게 연약하지 않아요. 며칠 갇혀 있었을 뿐이에요.”“며칠이라도 안 돼! 한서준 그 자식이 너를 모함한 거잖아. 결국 자기가 벌을 받을 거야.” 하연은 갑자기 한서준의 이름이 나오자, 뒤에 서 있던 정태훈을 바라봤다.태훈은 바로 대답했다. “아직도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불안증이라고 하더군요.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해요.”“내가 시킨 일은 어떻게 됐어?” 하연은 진지하게 물었다.태훈은 약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좋은 소식이 있어요. 업계 사람 중에 WA 그룹의 사업 재무 담당자와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의 고향 주소를 알아냈어요. 어젯밤에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
허징인이 상혁을 찾았다는 소식은 남준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은 것 같아. 물론 앞으로도 절대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남준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속내에서는 의문이 피어올랐다.‘내가 오래 지켜본 부상혁이라면, 이유 없이 움직일 리가 없는데...’하지만 상혁이 허징인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남준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처럼,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의심이 한 번 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남준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급히 뛰어 들어온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상무님, 교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남준은 정다영의 집에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옷깃을 정리하던 손이 멈춰 섰고,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일인데 그래?”부하는 다급한 얼굴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정규인이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변호사를 불러서 항소재판을 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남준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순식간에 부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잘 갇혀 있던 놈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부하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혹시... 어쩌면 허징인과 그 아들...”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단칼에 잘라버렸다.“말도 안 돼. 이 일은 우리 쪽만 알고 있어. 교도소 안에 있는 정규인이 대체 어떻게 알겠어?”부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외부와 접촉할 방법은 없습니다.”그러나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정규인,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남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놓았다.‘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