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애 여사는 하연이 전과는 완전히 다른 투로 말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는 커다란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하연을 가리켰다.“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방금 했던 말 다시 한번 해봐!”하지만 하연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민혜경이라는 여자가 집에 들어오면 그 여자한테 집안일을 시키세요. 저는 앞으로 하지 않을 거예요.” 하연은 앵두처럼 붉은 입술로 또박또박 말했다. 말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이 여사는 그녀의 말에 벌컥 화를 냈다.“너!”“엄마, 엄마!”서영이 흥분한 엄마의 팔을 붙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새언니 화난 거 맞죠? 어젯밤에 오빠가...”그녀는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려는 듯 어젯밤 일을 꺼내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니 하연의 화를 돋우려는 의도가 충분히 보였다.이 여사는 딸의 의도를 금방 알아채고 다시 차분해졌다. 그녀는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투로 말했다. “남편 하나 붙잡지 못하는 주제에 별 억지를 다 부리네. 감히 시어머니 탓을 해?”하연은 느릿느릿 짐을 끌고 나오다가 저택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지난 3년동안 아이가 없었던 게 다 저 때문이라고 하셨죠? 절 의심하기 전에 서준 씨에게 비뇨기과 진료를 받으라고 하는 편이 빠를 거예요. 그러면 임신이 안됐던 원인이 과연 누구 쪽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너, 니가 감히!”하연의 말에 이 여사와 서영 둘 다 깜짝 놀랐다. 이 여사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최하연! 난 너랑 우리 서준이하고 꼭 이혼시키고 말 테니 두고 봐!”그동안 하연은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와의 정을 생각해서 한씨 집안 사람들과 다툼을 피했다. 왠만해선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원만하게 지내왔다.지금까지는 집안 사람들과 갈등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며 지냈지만 이제는 신경 쓰
공항 로비에 서 있던 최하연은 잠잠해진 핸드폰에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아마도 오랫동안 한씨 가문에게 억압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온몸이 가벼웠다.오가는 여행객들을 보던 하연은 생각에 잠겼다.‘B시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좀 싱숭생숭하네.’‘그래도 괜찮아, 더 이상 힘든 일은 없을 거야.’그녀는 단순히 한서준의 사랑이 식었다고만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게 다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차라리 깔끔하게 떠나주는 게 더 나아.’하연은 곧장 공항 카운터로 가서 체크인을 했고, 이미 D국행 티켓을 예매한 상태였다.처음 그녀는 가족을 떠나 신분을 숨기고 B시에 머물렀다.이번에 D국에서 열린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 프로젝트만 아니었다면 할아버지는 그녀와 서준을 만나고 싶어하셨을 것이고, 이 프로젝트를 HT그룹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서준은 감사해하기는커녕 그녀 혼자 보냈다.이제 하연 차례였다.“안녕하십니까, 손님. 이 티켓은 현재 잠겨 있어 당분간 처리할 수 없습니다.”비즈니스 카운터 직원은 정중하게 거절했다.“잠겨 있다고요?”믿을 수 없던 하연은 온몸이 얼어붙었다.“그럴 리가 없는데...,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겠어요?”“회사 계좌로 예매하셨나요? 방금 환불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하연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그녀는 서준의 비서였기에 회사에서 만들어준 대부분의 계좌는 HT그룹이 관리했다.그리고 신분증은...얼마전 회사 인사부에서 어떤 것을 등록해야 한다며 들고 간 상태였다.하연은 너무 긴장해 손이 덜덜 떨렸다.그녀는 상처밖에 남지 않은 이 도시를 하루 빨리 떠나고 싶어 체계적이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죄송해요, 제가 전화해서 물어볼게요.”그녀는 가장자리로 걸어가 휴대폰을 꺼내 HT그룹 인사팀에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걸리지 않았고, 사용할 수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만 떴다.하연은 머리속이 새하얘졌다.‘어떻게 내
한서준의 약혼자?최하연과 한서준은 비밀 결혼을 했기에 회사 사람들은 그녀가 서준의 비서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그럼 민혜경을 가리키는 건가?’하연의 이혼협의서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혜경은 HT그룹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나중에 그녀는 한때 하연이 잤던 침대에서 잠을 자고 서준과 잠자리를 가지기도 할 것이다.이 생각에 하연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지만 겉으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고마워요.”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인사팀 사무실을 나갔다.제이슨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아이고, 최 비서가 대표님을 좋아하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모두가 다 알 수 있는데, 해고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그는 컴퓨터를 보며 말했다.“아, 또 재밌는 일이 생기겠네~”대표실이 있는 층에 도착한 하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구동후를 만났다.“최 비서님, 오셨네요.”그녀의 캐리어를 본 동후는 틀림없이 하연이 신분증을 찾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고 신분증이 있는 회의실을 가리켰다.“비서님 신분증은 대표님께 드렸어요. 아직 회의 중이신데, 아직 세 번째 회의예요. 급하시면 제가 말씀드릴까요?”“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하연은 무덤덤하게 말했다.“여기서 기다릴게요.”“네, 알겠습니다. 커피 한 잔 갖다 드릴까요?”동후는 서준이 그녀를 해고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연은 많은 일을 담당하고 있었고, 중요한 프로젝트가 많아 그녀를 해고하면 당장 적당한 직원을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하연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K국식 핸드드립 커피예요, 배운지 얼마 안 됐지만요.”“전 정말 괜찮아요.”서준과 깔끔하게 헤어지고 싶었던 하연은 주위 사람들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이 말을 들은 동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두운 얼굴로 회의실에 들어가 서준에게 서류를 건넸다.하연은 대표실 앞을 지나가다 회의실 쪽을 힐끗 쳐다봤다.문틈사이로 보인 회의실 내부에는 여러 사람이 테이블을 중심으로 앉아 있었다.그녀는
최하연은 이미 사직서를 냈으니 민혜경의 말을 들을 의무가 없어 거절했다.그리고 민혜경의 부탁은 거의 명령에 가까웠기에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하지만 하연의 신분증이 아직 한서준에게 있으니 마지막으로 잡다한 일을 맡기로 했다. 더불어 커피를 가져다주면서 자연스레 그에게 말을 걸 수도 있었다.하연은 심호흡을 한 뒤 동의했다.“알겠습니다.”“그럼 부탁할게요.”그렇게 말한 후 혜경은 화장실을 나갔다.임신 후 모성애가 그녀를 감싸는 순간이 잠시 있었지만, 여전히 혜경에게서 풍겨 나오는 자신감과 화려함은 하연과 대조적이었다.과거 하연은 부유한 집안의 그늘 아래 혜경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하지만 몇 년이 흐른 지금, 하연은 초라한 신세였다.엄청난 격차에 그녀는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깊은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추스린 후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나온 하연은 탕비실로 가서 커피를 만들었다.서준은 흑설탕 3 티스푼과 우유를 넣은 아메리카노를 좋아했다.회의가 끝난 사람들은 하나 둘씩 회의실을 빠져나왔지만 그녀는 서준을 발견하지 못했다.‘벌써 대표실로 들어간 건가?’하연은 커피를 들고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안에서 들려온 것은 서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닌 온화하고 부드러운 혜경의 목소리였다.하연은 손이 떨려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했다.긴 고민 끝에 그녀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대표실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서준의 무릎에 앉아 그의 목을 껴안고 있는 혜경을 발견했다.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보니 하연은 진정할 수 없었고 심장은 고통으로 뛰고 있었다.대표실로 들어온 하연을 본 혜경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여기에 두고 나가시면 돼요.”혜경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녀는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하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꽤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준의 눈과 마주쳤다.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단숨에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그 순간 하연은 직감
대표실은 살얼음장과 같았다.늘 한서준을 조심스럽게 대하던 최하연이 강압적이고 차가운 태도를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녀의 말에 서준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정말이야, 서준 씨?”혜경이 다가온 순간, 서준은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미간을 찌푸렸다.“정말이겠어?”그는 서늘한 표정으로 말했다.“저 여자 말대로 HT그룹에 일 잘 하는 사람은 차고 넘쳤어. 저런 일개 비서의 신분증은 원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아.”“퇴사하기 전에 인수인계는 똑바로 해야지. 입사할 때 지급한 유니폼을 입고 인수인계도 없이 떠나는 건 HT그룹 규칙에 어긋나니까.”그제야 하연은 자신의 신분증을 이용해 HT그룹으로 불러들인 서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이곳에 남거나 아무것도 없이 떠나거나.서준은 이런 방법을 사용해 그녀를 항복하도록 하려고 했으며 하연이 항복할 것이라 확신했다.그 순간, 하연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자존심까지 모조리 짓밟혔다.“아, 그런 거야? 그런 거면 최 비서가 잘못했네.”“순간 최 비서랑 서준 씨 사이에 뭔가 있는 줄 알았잖아.”혜경이 서준의 품을 더 파고드는 것을 본 하연은 미친듯이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검은색 유니폼 자켓을 벗고 셔츠를 하나씩 풀었다.“벗을게요.”간결하고 확실한 네 글자.‘서준 씨 말이 맞아. 끝낼 거면 확실하게 끝내야지.’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대표실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혜경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이미 고개를 숙인 서준의 욕정으로 얼룩진 서늘한 눈빛이 얼어붙었다.그는 최근 하연이 이전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이 느낌은 그녀가 자신의 족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서준은 완전히 통제력을 잃었다.아니면 3년이라는 결혼 생활동안 그녀를 정말로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닐까?대표실의 소문이 빠르게 퍼지자 많은 직원들이 문 앞에서 기웃거렸다.아무도 항상 온화하고 친절했던 하연에게 그런 거친 면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셔츠를 벗은 하연
“서준 씨?”민혜경은 한 공간에 같이 있는 이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모른 채 그저 최하연이 눈에 거슬리기만 했다.“서준 씨, 얼른 주고 보내! 오늘 우리 부모님이 내가 당신 데리고 오는 줄 알고 기다리고 있어, 오랫동안 못 만났잖아, 우리 부모님이 서준 씨 보고 싶대.”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에 한서준은 정신을 차렸다.한씨 가문은 민씨 가문에 가책을 느끼고 있어 그는 민씨 저택에 방문했어야 했다.하지만 이 말에도 하연의 얼굴은 서준에 대한 모든 것들이 더 이상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평온했다.서준은 답답하고 복잡했다.“저기 있어.”하연은 그가 턱으로 가리킨 쪽을 바라봤다.그곳엔 신분증이 정수기 밑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채 마치 그녀처럼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다.“네.”하연은 씁쓸한 마음을 억누르고 신분증을 주워들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서 대표실을 떠났다.그 뒤에는 날카롭고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대표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사무실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그저 흥미롭게 보는 사람도 있고 동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에는 가십거리라는 배경이 깔려 있었다.더군다나 회사에선 하연이 서준을 꼬셔서 그에게 쫓겨났다는 소문도 돌았다.그녀는 법적으로 서준의 부인이었지만, 내연녀로 치부됐다.하연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을 참기 위해 애쓰며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뒤에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최 비서님, 밖에 비 와요. 추우시면 제 겉옷 드릴게요.”우산을 가져다준 사람은 다름아닌 구동후였다.‘매정한 HT그룹에도 따뜻한 사람이 있긴 하구나.’겉옷을 벗으려는 동후를 본 하연은 그를 말리며 씁쓸함을 목에 삼켰다.“아니에요, 고마워요 구 실장님. 이제 만날 일도 없겠네요.”그녀의 씁쓸한 표정을 본 동후는 입을 움직였지만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하연은 미련없이 자리를 떠나 빗 속으로 뛰어들었다.이럴 때는 폭풍우만이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 유일
고택에서 한참을 기다린 가정부는 돌아온 한서준의 외투를 받아들었고, 서준의 뒤에 있는 민혜경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혜경 아가씨, 방은 준비해 뒀습니다. 이쪽 복도를 따라 올라가시면 됩니다.”서준을 따라 계단으로 향하던 혜경은 멈춰 서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서준 씨, 우리 같이 자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고택으로 들어오는 걸 동의한 서준은 결혼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격이었다.함께 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그녀의 말에 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그...”혜경은 더 이상 어떠한 말도 감히 하지 못했다.남아있던 하연의 흔적이 사라질까 봐 그는 가정부에게 다른 방을 준비하라고 지시했었다.“난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먼저 자러 가.”서준은 무관심한 어투로 혜경을 바라보며 눈빛을 보냈다.“하지만...”예상대로 혜경은 여전히 달갑지 않은 추궁을 해 왔고, 서준의 지시를 받은 배현숙이 그녀를 막았다.“혜경 아가씨, 절 따라오세요.”고택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차갑기 짝이 없는 서준의 얼굴을 가렸다.혜경은 마음속의 불만을 억눌렀다.‘귀국한 후로 서준 씨의 행동이 너무 달라졌어.’가깝고도 먼 그의 마음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서재로 돌아온 서준은 샤워를 하고 목욕가운을 입은 뒤 손에 든 문서를 훑어봤지만 정신은 딴 데로 가 있었다.예전 같으면 하연이 서재에 따뜻한 수프를 가져다주고 침실로 가 그를 기다렸을 것이다.때로는 서재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때로는 침실로 돌아와 그녀는 소파에서, 서준은 침대에서 자기도 했지만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수프를 가져다줬다.하지만 오늘은 아무리 기다려도 수프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었다.이런 그녀의 흔적에 서준은 괜히 짜증이 났다.이때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구 실장’이라는 글자를 보고 서준은 왠지 모르게 느낌이 좋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방금 D국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는데 HT그룹이 기부금액이 적다는 이유로 참가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합니다
유럽풍 건물의 호화로운 스위트룸, 최하연은 익숙한 듯 기지개를 펴고 일어났다.방 구조나 가구들은 그녀가 떠났을 때와 다름없었다.하연의 머리맡에는 따뜻한 차가 놓여 있었고, 침대 위에는 세련된 옷들이 여러 벌 놓여 있었다.코 끝이 시큰거렸다.B시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대우였다.“할아버지는 비행기 추락 사고 소식을 들으시고 네가 전화를 안 받아서 심정지가 오셨어, 아직도 병상에 누워계셔.”뒤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검은 옷을 입은 큰 키의 남자가 카리스마와 아우라를 풍기며 그녀의 침실에 나타났다.그는 B시로 하연을 데리러 온 오빠 최하민이었다.하민은 현재 최씨 가문의 경영을 이끌고 있고 항상 온화함을 유지하며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에 하연은 덜컥 겁이 나 울먹였다.“오빠, 많이 위중하신 거야...?”“심각한 정도는 아니야, 넌 네 몸이나 챙겨.”하민은 하연의 손을 잡아당기며 나가려는 그녀를 막았다.“지금 네 꼴을 봐, 이게 사람 얼굴이야? 예전에 한 약속 잊었어?”이 말을 들은 하연은 발걸음을 멈췄다.당연히 잊지 않았다.그녀는 할아버지에게 한서준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나아가 이혼까지 하게 된다면 영원히 최씨 가문에 남아 가업을 돕겠다고 약속했다.심지어 하연은 최씨 가문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4대 가문 중 하나인 나씨 가문과 결혼하겠다는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오빠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벌써 사람을 찾아 놓은 거야?’‘나씨 가문의 아들은 알아주는 바람둥이라고 하던데...’“근데 오빠 난 이혼한지도 얼마 안 됐고, 아직 재혼할 생각이 없어.”그녀는 거의 빌다시피 말했다.순간 하민은 표정을 풀더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겁주려고 한 말이었다.“넌 최씨 집안 딸이야. 우리 가문은 자식을 팔면서까지 집안을 키우진 않아 하지만, 할아버지가 완치하실 때까지는 내 옆에서 오른팔 역할을 똑똑히 해.”이 말의 의미는 D국에 있는 하민의 DS그룹에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