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연은 이미 사직서를 냈으니 민혜경의 말을 들을 의무가 없어 거절했다.그리고 민혜경의 부탁은 거의 명령에 가까웠기에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하지만 하연의 신분증이 아직 한서준에게 있으니 마지막으로 잡다한 일을 맡기로 했다. 더불어 커피를 가져다주면서 자연스레 그에게 말을 걸 수도 있었다.하연은 심호흡을 한 뒤 동의했다.“알겠습니다.”“그럼 부탁할게요.”그렇게 말한 후 혜경은 화장실을 나갔다.임신 후 모성애가 그녀를 감싸는 순간이 잠시 있었지만, 여전히 혜경에게서 풍겨 나오는 자신감과 화려함은 하연과 대조적이었다.과거 하연은 부유한 집안의 그늘 아래 혜경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하지만 몇 년이 흐른 지금, 하연은 초라한 신세였다.엄청난 격차에 그녀는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깊은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추스린 후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나온 하연은 탕비실로 가서 커피를 만들었다.서준은 흑설탕 3 티스푼과 우유를 넣은 아메리카노를 좋아했다.회의가 끝난 사람들은 하나 둘씩 회의실을 빠져나왔지만 그녀는 서준을 발견하지 못했다.‘벌써 대표실로 들어간 건가?’하연은 커피를 들고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안에서 들려온 것은 서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닌 온화하고 부드러운 혜경의 목소리였다.하연은 손이 떨려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했다.긴 고민 끝에 그녀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대표실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서준의 무릎에 앉아 그의 목을 껴안고 있는 혜경을 발견했다.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보니 하연은 진정할 수 없었고 심장은 고통으로 뛰고 있었다.대표실로 들어온 하연을 본 혜경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여기에 두고 나가시면 돼요.”혜경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녀는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하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꽤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준의 눈과 마주쳤다.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단숨에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그 순간 하연은 직감
대표실은 살얼음장과 같았다.늘 한서준을 조심스럽게 대하던 최하연이 강압적이고 차가운 태도를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녀의 말에 서준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정말이야, 서준 씨?”혜경이 다가온 순간, 서준은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미간을 찌푸렸다.“정말이겠어?”그는 서늘한 표정으로 말했다.“저 여자 말대로 HT그룹에 일 잘 하는 사람은 차고 넘쳤어. 저런 일개 비서의 신분증은 원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아.”“퇴사하기 전에 인수인계는 똑바로 해야지. 입사할 때 지급한 유니폼을 입고 인수인계도 없이 떠나는 건 HT그룹 규칙에 어긋나니까.”그제야 하연은 자신의 신분증을 이용해 HT그룹으로 불러들인 서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이곳에 남거나 아무것도 없이 떠나거나.서준은 이런 방법을 사용해 그녀를 항복하도록 하려고 했으며 하연이 항복할 것이라 확신했다.그 순간, 하연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자존심까지 모조리 짓밟혔다.“아, 그런 거야? 그런 거면 최 비서가 잘못했네.”“순간 최 비서랑 서준 씨 사이에 뭔가 있는 줄 알았잖아.”혜경이 서준의 품을 더 파고드는 것을 본 하연은 미친듯이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검은색 유니폼 자켓을 벗고 셔츠를 하나씩 풀었다.“벗을게요.”간결하고 확실한 네 글자.‘서준 씨 말이 맞아. 끝낼 거면 확실하게 끝내야지.’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대표실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혜경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이미 고개를 숙인 서준의 욕정으로 얼룩진 서늘한 눈빛이 얼어붙었다.그는 최근 하연이 이전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이 느낌은 그녀가 자신의 족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서준은 완전히 통제력을 잃었다.아니면 3년이라는 결혼 생활동안 그녀를 정말로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닐까?대표실의 소문이 빠르게 퍼지자 많은 직원들이 문 앞에서 기웃거렸다.아무도 항상 온화하고 친절했던 하연에게 그런 거친 면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셔츠를 벗은 하연
“서준 씨?”민혜경은 한 공간에 같이 있는 이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모른 채 그저 최하연이 눈에 거슬리기만 했다.“서준 씨, 얼른 주고 보내! 오늘 우리 부모님이 내가 당신 데리고 오는 줄 알고 기다리고 있어, 오랫동안 못 만났잖아, 우리 부모님이 서준 씨 보고 싶대.”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에 한서준은 정신을 차렸다.한씨 가문은 민씨 가문에 가책을 느끼고 있어 그는 민씨 저택에 방문했어야 했다.하지만 이 말에도 하연의 얼굴은 서준에 대한 모든 것들이 더 이상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평온했다.서준은 답답하고 복잡했다.“저기 있어.”하연은 그가 턱으로 가리킨 쪽을 바라봤다.그곳엔 신분증이 정수기 밑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채 마치 그녀처럼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다.“네.”하연은 씁쓸한 마음을 억누르고 신분증을 주워들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서 대표실을 떠났다.그 뒤에는 날카롭고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대표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사무실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그저 흥미롭게 보는 사람도 있고 동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에는 가십거리라는 배경이 깔려 있었다.더군다나 회사에선 하연이 서준을 꼬셔서 그에게 쫓겨났다는 소문도 돌았다.그녀는 법적으로 서준의 부인이었지만, 내연녀로 치부됐다.하연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을 참기 위해 애쓰며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뒤에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최 비서님, 밖에 비 와요. 추우시면 제 겉옷 드릴게요.”우산을 가져다준 사람은 다름아닌 구동후였다.‘매정한 HT그룹에도 따뜻한 사람이 있긴 하구나.’겉옷을 벗으려는 동후를 본 하연은 그를 말리며 씁쓸함을 목에 삼켰다.“아니에요, 고마워요 구 실장님. 이제 만날 일도 없겠네요.”그녀의 씁쓸한 표정을 본 동후는 입을 움직였지만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하연은 미련없이 자리를 떠나 빗 속으로 뛰어들었다.이럴 때는 폭풍우만이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 유일
고택에서 한참을 기다린 가정부는 돌아온 한서준의 외투를 받아들었고, 서준의 뒤에 있는 민혜경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혜경 아가씨, 방은 준비해 뒀습니다. 이쪽 복도를 따라 올라가시면 됩니다.”서준을 따라 계단으로 향하던 혜경은 멈춰 서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서준 씨, 우리 같이 자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고택으로 들어오는 걸 동의한 서준은 결혼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격이었다.함께 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그녀의 말에 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그...”혜경은 더 이상 어떠한 말도 감히 하지 못했다.남아있던 하연의 흔적이 사라질까 봐 그는 가정부에게 다른 방을 준비하라고 지시했었다.“난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먼저 자러 가.”서준은 무관심한 어투로 혜경을 바라보며 눈빛을 보냈다.“하지만...”예상대로 혜경은 여전히 달갑지 않은 추궁을 해 왔고, 서준의 지시를 받은 배현숙이 그녀를 막았다.“혜경 아가씨, 절 따라오세요.”고택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차갑기 짝이 없는 서준의 얼굴을 가렸다.혜경은 마음속의 불만을 억눌렀다.‘귀국한 후로 서준 씨의 행동이 너무 달라졌어.’가깝고도 먼 그의 마음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서재로 돌아온 서준은 샤워를 하고 목욕가운을 입은 뒤 손에 든 문서를 훑어봤지만 정신은 딴 데로 가 있었다.예전 같으면 하연이 서재에 따뜻한 수프를 가져다주고 침실로 가 그를 기다렸을 것이다.때로는 서재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때로는 침실로 돌아와 그녀는 소파에서, 서준은 침대에서 자기도 했지만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수프를 가져다줬다.하지만 오늘은 아무리 기다려도 수프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었다.이런 그녀의 흔적에 서준은 괜히 짜증이 났다.이때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구 실장’이라는 글자를 보고 서준은 왠지 모르게 느낌이 좋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방금 D국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는데 HT그룹이 기부금액이 적다는 이유로 참가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합니다
유럽풍 건물의 호화로운 스위트룸, 최하연은 익숙한 듯 기지개를 펴고 일어났다.방 구조나 가구들은 그녀가 떠났을 때와 다름없었다.하연의 머리맡에는 따뜻한 차가 놓여 있었고, 침대 위에는 세련된 옷들이 여러 벌 놓여 있었다.코 끝이 시큰거렸다.B시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대우였다.“할아버지는 비행기 추락 사고 소식을 들으시고 네가 전화를 안 받아서 심정지가 오셨어, 아직도 병상에 누워계셔.”뒤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검은 옷을 입은 큰 키의 남자가 카리스마와 아우라를 풍기며 그녀의 침실에 나타났다.그는 B시로 하연을 데리러 온 오빠 최하민이었다.하민은 현재 최씨 가문의 경영을 이끌고 있고 항상 온화함을 유지하며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에 하연은 덜컥 겁이 나 울먹였다.“오빠, 많이 위중하신 거야...?”“심각한 정도는 아니야, 넌 네 몸이나 챙겨.”하민은 하연의 손을 잡아당기며 나가려는 그녀를 막았다.“지금 네 꼴을 봐, 이게 사람 얼굴이야? 예전에 한 약속 잊었어?”이 말을 들은 하연은 발걸음을 멈췄다.당연히 잊지 않았다.그녀는 할아버지에게 한서준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나아가 이혼까지 하게 된다면 영원히 최씨 가문에 남아 가업을 돕겠다고 약속했다.심지어 하연은 최씨 가문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4대 가문 중 하나인 나씨 가문과 결혼하겠다는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오빠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벌써 사람을 찾아 놓은 거야?’‘나씨 가문의 아들은 알아주는 바람둥이라고 하던데...’“근데 오빠 난 이혼한지도 얼마 안 됐고, 아직 재혼할 생각이 없어.”그녀는 거의 빌다시피 말했다.순간 하민은 표정을 풀더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겁주려고 한 말이었다.“넌 최씨 집안 딸이야. 우리 가문은 자식을 팔면서까지 집안을 키우진 않아 하지만, 할아버지가 완치하실 때까지는 내 옆에서 오른팔 역할을 똑똑히 해.”이 말의 의미는 D국에 있는 하민의 DS그룹에 들어
“미안해, 오빠가 늦었지?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이제야 들었지 뭐야. 시시하게 벌써 돌아온 거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전부 쓸데없는 걱정이었네!”이 목소리를 들은 최하연은 단번에 자신의 셋째 오빠인 최하성이라는 것을 알았다.사실 하성은 그녀의 친오빠가 아니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서 버려졌고 이후 최씨 가문에 입양되었다.하연은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방해하지 말고 잠시 앉아 있어.”3일이 지났지만 하연은 최하민의 비서인 이민영이 준 서류를 정리하지 못했다.전 세계 협력사로부터 하루에 백 통이 넘는 전화를 받다 보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하성은 그녀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소파에 앉아 말했다.“다 형이 시킨 거야? 이건 분명히 널 후계자로 키우려는 걸 거야. 안 쓰러지는 게 이상하지, 차라리 나랑 같이 콘서트 투어하자. 기분 좀 풀어.”“안 가.”하연은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지난 번에 일 기억 안 나? 오빠 팬들이 날 여자친구로 생각해서 얼마나 힘들었다고. 오빠가 조금만 늦게 왔으면 난 돌에 맞아 죽었어.”“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하성은 빙그레 웃으며 입술을 닦고 그녀를 바라봤다.“에이, 아닌 척하면서 오빠 생각은 하고 있었구나? 아직도 우리의 추억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다니 우리 하연이 최고!”...하연은 말문이 막혀 서류를 바라보며 눈을 굴렸다.“망상도 병이야.”하성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실은 진지한 제안이었다.“내 병은 너만 고칠 수 있어.”...불행 중 다행인 건 그녀가 이미 하성과의 이런 대화에 익숙해져 불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하성은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즐겨 불렀고, 지금은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스타였다.아무리 바빠도 늘 하연에게만큼은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그녀가 서준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했을 땐 예정된 콘서트를 그 자리에서 취소하고 B시로 날아가 서준과 싸우려 했으나 큰형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 주위에 좋은 남자가 널렸는데 왜
구동후는 굳은 얼굴로 다시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모두 통화 중이었다.그가 N번째로 전화를 걸자 한서준은 어두운 얼굴로 휴대폰을 뺏아 들었다.[정말 끈질기시군요. 구 실장님, 한서준 씨에게 이번 박람회와는 인연이 없다고 전해주세요.]최하연이 퉁명스럽게 얘기하자 전화기 너머에는 정적만이 맴돌았다.한참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야.”이 목소리를 들은 하연이 순간 목이 막혔다.서준은 그녀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HT그룹이 이번 기부금 금액을 600억에서 900억으로 늘렸는데, 이 정도면 이번 박람회에 참가할 자격이 있는 거 아닌가?”그 순간, 하연은 이미 최하성의 슈퍼카에 앉아 말했다.[한서준 씨, 지금 장난하는 것 같습니까?]방금 전 하성은 그녀가 바쁜 것을 보고도 하연을 끌고 D국의 야시장을 구경하자고 고집했고 그녀는 그런 오빠를 거절할 수 없어 차에 올라탔다.“900억이 부족하다면 2000억, 그래도 안 되면 글로벌 상업연합회에 보고해 그 사람들의 결정에 따를 거야. 네가 있는 그룹이 유일한 주최자는 아니니까.”[정말...]하연은 그의 몇 마디로 말문이 막혔고, 운전을 하고 있던 하성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하연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빼앗았다.[낯짝도 두껍네, 내 동생이랑 이혼한 주제에 왜 자꾸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거야? 뭐 재혼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말해두겠는데, 그런 거라면 마음속에 고이 접어 둬. 최하연은 내 거야. 참고로 우린 방도 잡았다고!]이 말을 끝으로 하성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하연에게 던졌다.하연은 완전히 충격을 받았다.“뭐? 방을 잡아?”“또 모르지? 이 말 한마디에 한서준은 지금 화가 머리 끝까지 났을 걸?”...전화가 끊긴 후 서준의 얼굴은 정말 보기 싫을 정도로 일그러졌다.동후는 그가 왜 그런지 몰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사표를 낸 건 분명히 최 비서님인데 왜 갑자기 HT그룹을 상대로 공격을 하는 거지? 그리고 어떻게 D국 DS그룹 수석 비서로 이직한 거지? 거긴 취업하기 어렵
“이거야.”민혜경은 손을 뻗었고, 심플하지만 빛을 받으면 독특한 빛을 반짝이는 반지가 그녀의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서준의 시선이 반지에 닿는 순간, 그는 이 반지가 결혼 3년 동안 최하연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었음을 기억했다.혜경의 손에서 반지를 빼앗은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반지 안쪽을 문질렀다.분명했다. 반지 안 쪽에는 ‘SJ&HY’이라는 이니셜도 새겨져 있었다.그는 하연이 반지를 끼워달라던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퉁명스럽게 ‘나중에 다시 얘기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3년 동안 한 번도 이 반지를 뺀 적이 없었다.혜경은 반지를 들고 생각에 잠긴 서준의 모습에 기분이 안 좋았지만 여전히 밝은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이렇게 소중한 걸 버리고 가다니, 서준 씨, 그 반지를 최 비서한테 다시 돌려줄 거야? 아니면...”“걔한테 다시 줘서 뭐해!”혜경의 말을 들은 이수애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평소에 그렇게 착한 척, 순진한 척, 척이란 척은 다 떨었으면서 이제야 등 돌리고 떠난 사람한테 줘서 뭐해? 우리가 무슨 꼴을 보려고!”“맞아,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부터 뭔가 쎄하다 했어.”옆에 있던 한서영이 말을 거들었다.그 말에 서준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고, 손에 있던 반지를 꽉 움켜잡았다.방금 전 통화에서 방을 잡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그 남자를 생각하면 기분은 더 나빠질 뿐이었다.서준은 왠지 모를 분노의 물결이 가슴에 솟구쳐 점점 더 짜증이 났다.‘최하연은 이미 남자가 생긴 거였네, 그러니까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지.’그는 미련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버려.”아들의 말에 이수애는 더욱 비꼬며 말했다.“그래, 잘 생각했어. 최하연이 두고 간 걸 만지다니, 어휴 재수 옴 붙었네!”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 쳤다.“맞아, 엄마 말 대로 다 버리고 다 새걸로 바꿔.”하지만 서준은 반응도 하지 않고 침실을 둘러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가정부에게 지시를 내렸다.“난 내 공간을 다른 사람이 함부로 손 대는
며칠 사이, 정다영은 차갑게 닫힌 문을 수없이 마주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이 다영을 떠받들며 찬란한 별처럼 여겼지만, 이제 집안의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만 했다. 마치 다영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될 것처럼... 그렇게 다영은 세상의 차가운 이면과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송 여사와 남준이는 요즘 집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정 다영 씨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상혁은 평범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은 다영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남준 씨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혁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려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건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다영은 상혁을 따라가며 급히 소리쳤다. “부 대표님, 잠깐만요...” 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라도?” 다영은 망설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이 난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건 검찰 소관이에요. 전문 변호팀을 고용하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다영은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이건 분명 오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아버지는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계약서를 조작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정지철은 딸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번 일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
최씨 가문 본가 후원에 있는 온실에서는 조용히 바둑알이 내려놓아는 소리가 들렸다. 상혁과 최동신은 마주 앉아 바둑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상혁아, 지금 이 바둑판은 승부가 거의 결정 난 것 같은데!” 바둑판 위에서 흑과 백이 치열하게 맞서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최동신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네의 백돌이 반 집 차이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대단해!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 상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기백이 여전히 넘치시니 제가 아직 배울 점이 많습니다.” 최동신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탄식했다. “늙었지.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흑돌을 손에 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네도 조심해야겠어.” 최동신은 그 말을 하며 흑돌을 바둑판 위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 돌이 놓인 자리로 인해 한순간 바둑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바둑판 위에 집중되었다. 상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황이 단 한 수로 인해 역전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바둑 실력은 늘 감탄할 따름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간과하고 놓치고 있었네요.” 상혁은 차분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판세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최동신은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을 다시 주우며 훈계하듯 말했다. “그렇지. 이길 수 있는 상황도 한 수의 실수로 모두 망쳐버릴 수 있는 법이다.” 상혁은 최동신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최동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에 DL그룹의 실질적인 권한은 이제 자네가 잡았고, 자네 동생은 동남아 지사로 발령이 났다고 들었네.” “겉으로 보기엔 좋은 상황 같아 보이지만, 상혁이, 네가 한 수라도 실수하는 날엔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충고 이상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남준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의 음성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남준은 방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연말 이후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어떻게 앞당겨진 거지?” 연지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사건이 중대한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면서 연말 전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상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정규인의 입을 열어 내 약점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상혁도 모르는 게 있지. 정규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야.” 연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상무님, 그 말은 혹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남준의 강렬한 눈빛으로 끊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는 남준의 의도를 즉각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정규인의 사건은 법원에서 열렸고,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구치소에서 정규인을 호송해 나오자, 멀리서 그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규인의 기운 없는 모습에서 예전의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정 방청석을 둘러보다가, 맨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순간, 정규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달려들며 미친 듯이 외쳤다. “여기 왜 왔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경찰들이 급히 정규인을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저지당했다. “진정해!” 경찰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결국, 경찰봉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정규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청석의 허징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
“이모...” 하연은 조진숙을 꽉 끌어안으며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어떤 말도 조진숙에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이모 곁엔 항상 저희가 있어요.” 조진숙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맙다.” ...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독채 빌라. 고급스러운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차고로 들어섰다. 황연지는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빌라는 꽤 외진 곳에 있었고,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상무님? 계신가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텅 빈 집안의 메아리뿐이었다. 연지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용기를 냈다. 계단 끝에 닫혀 있는 문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상무님, 안에 계신가요?” 그녀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망설이던 연지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강렬한 술 냄새가 그녀를 덮쳤다. 연지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고 안으로 더 들어갔는데,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상무님?” 이사회 이후 부남준은 자취를 감췄고, 외부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단다. 그렇게 된 지가 삼 일째였다. 연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남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지금의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그 매서운 매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황연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였구나?” 연지는 아침에 급히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상무님, 사라지신 며칠 동안 정다영 씨가 상무님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정다영은 남준을 찾기 위해 거의 미쳐버린 상태였고, 부남준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저녁에 하연과 상혁은 음악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의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 “돌아왔니?” 하연과 상혁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조진숙을 보았다. 지금의 조진숙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집에 계셨네요?” 조진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활짝 웃으며 조진숙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거예요? 일찍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하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진숙은 손을 들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너희가 안 들어오면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하연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더 애교를 부렸다. “이모가 이렇게 저희를 걱정해주니까, 너무 좋아요!” 조진숙은 하연의 손등을 살짝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오늘은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야.” 상혁은 소파의 다른 쪽에 앉아 조진숙의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하연과 눈빛을 교환한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모,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조진숙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네 동건이 삼촌이 송혜선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뿐이야.” 이 말은 마치 고요한 연못에 큰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분위기를 흔들었다.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조진숙이 그를 불러 세웠다. “상혁아, 흥분하지 마라.”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눈빛을 깊게 내리깔았다. “가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조진숙이 단호히 말하며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마치 이번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아들아,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함께 사는 건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은 그런 장난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네 아버지도
“이 말은...?” “회장님, 저랑 결혼해주실 수 있어요?” ... 카페에서. 부동건은 카페에서 오래 시간 조진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진숙이 마침내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동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조진숙은 능숙하게 피해버렸다. “말해봐. 이렇게 급하게 나를 부른 이유가 뭐죠?” 부동건은 조진숙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짓으로 직원을 불렀다. “블루마운틴 한 잔, 반 설탕으로.” 조진숙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내 취향을 기억하다니 의외네요.” 부동건은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한때 부부였잖아, 결국엔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거지.” 조진숙은 무심한 태도로 대꾸했다. “‘잘못했다’라는 말은 이미 너무 많이 들었어. 다른 표현은 없어?” “알겠어.” 부동건은 커피를 젓는 스푼을 천천히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사는 이미 상혁이한테 넘겼어.” “응, 들었어.”조진숙은 가볍게 대답했고, 목소리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톤이었다. “상혁이는 신중하고 믿음직스러워. 회사를 맡기기에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야. 앞으로 상혁이하고 하연이는 그 얘들 둘은 함께 안정된 삶을 살게 될 거야.” “너도 알다시피, 하연이는 말 안 해도 좋은 아이라는 걸 당신도 알잖아. 하연이가 상혁이 곁에 있는 한, 상혁이는 하연이로 인해 고통받는 일은 없을 거야.” 조진숙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오늘 나를 부른 이유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어?” “아니야.” 부동건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혼 후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앉아 대화하는 시간은 정말로 드물었다. 부동건은 오늘따라 조진숙을 천천히, 자세히 바라보았다. 세월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수많은 세월 속
송혜선은 태동이 불안해졌지만, 병원에 제때 도착한 덕분에 큰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병실에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다. 조봉규가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돌아오자, 송혜선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혜선아, 의사가 말했잖아. 임신 기간은 많이 지나서 안정기에 들었지만 그래도 감정 조절을 잘해야 한다고 지금처럼 자극을 받으면 쉽게 자궁 수축이 일어나 조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조봉규의 말에 송혜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대신 천천히 물었다. “그 사람... 아직 안 왔어?” 그녀가 말한 ‘그 사람’이란 당연히 부동건을 뜻했다. 조봉규는 안경을 고쳐 쓰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빠르게 부드럽게 말했다. “이미 연락했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 송혜선은 그 말을 듣고서야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이번에 남준이가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은 그 사람 때문이야. 그러니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야겠지...” 그녀는 손을 천천히 배 위로 가져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부동건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 문 너머로 송혜선이 몰래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한걸음에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다급히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괜찮아?” 하지만 송혜선은 몸을 돌려 등을 돌렸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동건은 다급해지면서 그녀 앞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야? 대답 좀 해봐.” 옆에 있던 조봉규가 상황을 대신 설명했다. “회장님, 사모님께서 자극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부동건은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자극?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 순간, 송혜선은 얼굴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흐르고 있지만,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나요?” 부동건은 어리둥절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자 송혜선은 참아왔던 말을 모두 쏟아냈다. “뭐긴 뭐겠어요! 내가 다 들었어요. 이사회에
떠나기 전, 부동건은 마지막으로 남준에게 다시 한번 당부했다. “비록 너를 본사에 남기지는 않았지만, 동남아 지사의 전망은 여전히 밝다. 남준아, 이 기회를 잘 살려 내가 기울인 정성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이사들이 하나둘씩 회의실을 떠났다. 순식간에 넓은 회의실에는 상혁과 남준 단둘만 남게 되었고,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준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이겼네요, 형님.” 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느긋하게 옷깃을 정리하며 말했다. “결국 그렇게 말할 거면서 원래부터 누구의 것이었는지, 오늘로 분명해졌을 뿐이다.” 남준은 코웃음을 치며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대꾸했다. “형님 말씀이 맞아요. 승패는 병가상사일 뿐, 그저 순간의 결과에 불과하겠지요.” 상혁은 미소를 머금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동남아 시장은 기회의 땅이지. 남준아, 이 기회를 잘 활용해라. 너의 전임자였던 정규인의 사례처럼 성급하게 욕심을 부리다가 낭패를 보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상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이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참, 깜빡할 뻔했네. 정규인의 사건이 곧 재판에 들어간다고 하더라.” 남준의 얼굴에는 잠시 놀란 기색이 스쳤다. ‘이렇게 빨리?’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남준은 곧 평정을 찾으려 애썼다. 상혁은 남준의 속내를 꿰뚫은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규인의 입은 아직 단단히 닫혀 있지. 지금까지는 별다른 중요한 정보는 불지 않았다고 하던데. 하지만...” “하지만 뭐 말입니까?” 남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급히 물었다. “형님, 말씀은 끝까지 하셔야죠.” 상혁은 몇 걸음을 걸어 남준의 바로 앞에 서서 목소리를 낮췄다. “고경수는 제법 많은 걸 실토했다고 하던데. 정규인은 거의 감옥에서 나올 수 없을 거야. 게다가 정규인의 아내가 뭔가 중요한 증거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하고... 그게 네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부동건과 부남준의 대립을 본 이사회 임원들은 공기의 분위기를 읽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회의실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부동건의 목소리가 임원들을 붙잡았다.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은 모두 나와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분들입니다. 굳이 자리를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동건의 한 마디에, 임원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부동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온몸에 깊은 회한과 슬픔을 내비쳤다. 부씨 가문 형제가 서로 다투는 모습은 부동건이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이미 이렇게 된 김에, 오늘 여러분께 제 마음속에 있는 말 몇 마디 전하고자 합니다.” “회장님,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우리는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 장 이사가 먼저 나서서 지지를 표명하자, 다른 이사들도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나타냈다.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DL그룹이 누구에게 넘어가든, 우리는 최선을 다해 협력할 것입니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이사회의 임원들은 이제 그의 뜻과 함께하는 모습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좋습니다. 제가 여기서 다시 한번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부동건은 주석 자리에 앉아, 깊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남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항상 두 형제가 화합하고 협력하기를 바랐지만, 결국 그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부동건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고요한 숨을 내쉬었다. 이내 시선을 돌려 상혁을 바라보았다.상혁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고, 그 모습은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냉담한 태도를 풍기고 있었다. “동남아 시장에서 남준이가 해낸 일은 정말로 훌륭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시장을 안정시키고 발전시킨 공로는 인정받아 마땅합니다.” 남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진수용이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