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 씨?”민혜경은 한 공간에 같이 있는 이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모른 채 그저 최하연이 눈에 거슬리기만 했다.“서준 씨, 얼른 주고 보내! 오늘 우리 부모님이 내가 당신 데리고 오는 줄 알고 기다리고 있어, 오랫동안 못 만났잖아, 우리 부모님이 서준 씨 보고 싶대.”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에 한서준은 정신을 차렸다.한씨 가문은 민씨 가문에 가책을 느끼고 있어 그는 민씨 저택에 방문했어야 했다.하지만 이 말에도 하연의 얼굴은 서준에 대한 모든 것들이 더 이상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평온했다.서준은 답답하고 복잡했다.“저기 있어.”하연은 그가 턱으로 가리킨 쪽을 바라봤다.그곳엔 신분증이 정수기 밑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채 마치 그녀처럼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다.“네.”하연은 씁쓸한 마음을 억누르고 신분증을 주워들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서 대표실을 떠났다.그 뒤에는 날카롭고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대표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사무실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그저 흥미롭게 보는 사람도 있고 동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에는 가십거리라는 배경이 깔려 있었다.더군다나 회사에선 하연이 서준을 꼬셔서 그에게 쫓겨났다는 소문도 돌았다.그녀는 법적으로 서준의 부인이었지만, 내연녀로 치부됐다.하연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을 참기 위해 애쓰며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뒤에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최 비서님, 밖에 비 와요. 추우시면 제 겉옷 드릴게요.”우산을 가져다준 사람은 다름아닌 구동후였다.‘매정한 HT그룹에도 따뜻한 사람이 있긴 하구나.’겉옷을 벗으려는 동후를 본 하연은 그를 말리며 씁쓸함을 목에 삼켰다.“아니에요, 고마워요 구 실장님. 이제 만날 일도 없겠네요.”그녀의 씁쓸한 표정을 본 동후는 입을 움직였지만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하연은 미련없이 자리를 떠나 빗 속으로 뛰어들었다.이럴 때는 폭풍우만이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 유일
고택에서 한참을 기다린 가정부는 돌아온 한서준의 외투를 받아들었고, 서준의 뒤에 있는 민혜경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혜경 아가씨, 방은 준비해 뒀습니다. 이쪽 복도를 따라 올라가시면 됩니다.”서준을 따라 계단으로 향하던 혜경은 멈춰 서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서준 씨, 우리 같이 자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고택으로 들어오는 걸 동의한 서준은 결혼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격이었다.함께 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그녀의 말에 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그...”혜경은 더 이상 어떠한 말도 감히 하지 못했다.남아있던 하연의 흔적이 사라질까 봐 그는 가정부에게 다른 방을 준비하라고 지시했었다.“난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먼저 자러 가.”서준은 무관심한 어투로 혜경을 바라보며 눈빛을 보냈다.“하지만...”예상대로 혜경은 여전히 달갑지 않은 추궁을 해 왔고, 서준의 지시를 받은 배현숙이 그녀를 막았다.“혜경 아가씨, 절 따라오세요.”고택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차갑기 짝이 없는 서준의 얼굴을 가렸다.혜경은 마음속의 불만을 억눌렀다.‘귀국한 후로 서준 씨의 행동이 너무 달라졌어.’가깝고도 먼 그의 마음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서재로 돌아온 서준은 샤워를 하고 목욕가운을 입은 뒤 손에 든 문서를 훑어봤지만 정신은 딴 데로 가 있었다.예전 같으면 하연이 서재에 따뜻한 수프를 가져다주고 침실로 가 그를 기다렸을 것이다.때로는 서재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때로는 침실로 돌아와 그녀는 소파에서, 서준은 침대에서 자기도 했지만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수프를 가져다줬다.하지만 오늘은 아무리 기다려도 수프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었다.이런 그녀의 흔적에 서준은 괜히 짜증이 났다.이때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구 실장’이라는 글자를 보고 서준은 왠지 모르게 느낌이 좋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방금 D국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는데 HT그룹이 기부금액이 적다는 이유로 참가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합니다
유럽풍 건물의 호화로운 스위트룸, 최하연은 익숙한 듯 기지개를 펴고 일어났다.방 구조나 가구들은 그녀가 떠났을 때와 다름없었다.하연의 머리맡에는 따뜻한 차가 놓여 있었고, 침대 위에는 세련된 옷들이 여러 벌 놓여 있었다.코 끝이 시큰거렸다.B시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대우였다.“할아버지는 비행기 추락 사고 소식을 들으시고 네가 전화를 안 받아서 심정지가 오셨어, 아직도 병상에 누워계셔.”뒤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검은 옷을 입은 큰 키의 남자가 카리스마와 아우라를 풍기며 그녀의 침실에 나타났다.그는 B시로 하연을 데리러 온 오빠 최하민이었다.하민은 현재 최씨 가문의 경영을 이끌고 있고 항상 온화함을 유지하며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에 하연은 덜컥 겁이 나 울먹였다.“오빠, 많이 위중하신 거야...?”“심각한 정도는 아니야, 넌 네 몸이나 챙겨.”하민은 하연의 손을 잡아당기며 나가려는 그녀를 막았다.“지금 네 꼴을 봐, 이게 사람 얼굴이야? 예전에 한 약속 잊었어?”이 말을 들은 하연은 발걸음을 멈췄다.당연히 잊지 않았다.그녀는 할아버지에게 한서준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나아가 이혼까지 하게 된다면 영원히 최씨 가문에 남아 가업을 돕겠다고 약속했다.심지어 하연은 최씨 가문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4대 가문 중 하나인 나씨 가문과 결혼하겠다는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오빠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벌써 사람을 찾아 놓은 거야?’‘나씨 가문의 아들은 알아주는 바람둥이라고 하던데...’“근데 오빠 난 이혼한지도 얼마 안 됐고, 아직 재혼할 생각이 없어.”그녀는 거의 빌다시피 말했다.순간 하민은 표정을 풀더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겁주려고 한 말이었다.“넌 최씨 집안 딸이야. 우리 가문은 자식을 팔면서까지 집안을 키우진 않아 하지만, 할아버지가 완치하실 때까지는 내 옆에서 오른팔 역할을 똑똑히 해.”이 말의 의미는 D국에 있는 하민의 DS그룹에 들어
“미안해, 오빠가 늦었지?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이제야 들었지 뭐야. 시시하게 벌써 돌아온 거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전부 쓸데없는 걱정이었네!”이 목소리를 들은 최하연은 단번에 자신의 셋째 오빠인 최하성이라는 것을 알았다.사실 하성은 그녀의 친오빠가 아니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서 버려졌고 이후 최씨 가문에 입양되었다.하연은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방해하지 말고 잠시 앉아 있어.”3일이 지났지만 하연은 최하민의 비서인 이민영이 준 서류를 정리하지 못했다.전 세계 협력사로부터 하루에 백 통이 넘는 전화를 받다 보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하성은 그녀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소파에 앉아 말했다.“다 형이 시킨 거야? 이건 분명히 널 후계자로 키우려는 걸 거야. 안 쓰러지는 게 이상하지, 차라리 나랑 같이 콘서트 투어하자. 기분 좀 풀어.”“안 가.”하연은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지난 번에 일 기억 안 나? 오빠 팬들이 날 여자친구로 생각해서 얼마나 힘들었다고. 오빠가 조금만 늦게 왔으면 난 돌에 맞아 죽었어.”“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하성은 빙그레 웃으며 입술을 닦고 그녀를 바라봤다.“에이, 아닌 척하면서 오빠 생각은 하고 있었구나? 아직도 우리의 추억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다니 우리 하연이 최고!”...하연은 말문이 막혀 서류를 바라보며 눈을 굴렸다.“망상도 병이야.”하성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실은 진지한 제안이었다.“내 병은 너만 고칠 수 있어.”...불행 중 다행인 건 그녀가 이미 하성과의 이런 대화에 익숙해져 불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하성은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즐겨 불렀고, 지금은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스타였다.아무리 바빠도 늘 하연에게만큼은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그녀가 서준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했을 땐 예정된 콘서트를 그 자리에서 취소하고 B시로 날아가 서준과 싸우려 했으나 큰형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 주위에 좋은 남자가 널렸는데 왜
구동후는 굳은 얼굴로 다시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모두 통화 중이었다.그가 N번째로 전화를 걸자 한서준은 어두운 얼굴로 휴대폰을 뺏아 들었다.[정말 끈질기시군요. 구 실장님, 한서준 씨에게 이번 박람회와는 인연이 없다고 전해주세요.]최하연이 퉁명스럽게 얘기하자 전화기 너머에는 정적만이 맴돌았다.한참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야.”이 목소리를 들은 하연이 순간 목이 막혔다.서준은 그녀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HT그룹이 이번 기부금 금액을 600억에서 900억으로 늘렸는데, 이 정도면 이번 박람회에 참가할 자격이 있는 거 아닌가?”그 순간, 하연은 이미 최하성의 슈퍼카에 앉아 말했다.[한서준 씨, 지금 장난하는 것 같습니까?]방금 전 하성은 그녀가 바쁜 것을 보고도 하연을 끌고 D국의 야시장을 구경하자고 고집했고 그녀는 그런 오빠를 거절할 수 없어 차에 올라탔다.“900억이 부족하다면 2000억, 그래도 안 되면 글로벌 상업연합회에 보고해 그 사람들의 결정에 따를 거야. 네가 있는 그룹이 유일한 주최자는 아니니까.”[정말...]하연은 그의 몇 마디로 말문이 막혔고, 운전을 하고 있던 하성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하연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빼앗았다.[낯짝도 두껍네, 내 동생이랑 이혼한 주제에 왜 자꾸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거야? 뭐 재혼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말해두겠는데, 그런 거라면 마음속에 고이 접어 둬. 최하연은 내 거야. 참고로 우린 방도 잡았다고!]이 말을 끝으로 하성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하연에게 던졌다.하연은 완전히 충격을 받았다.“뭐? 방을 잡아?”“또 모르지? 이 말 한마디에 한서준은 지금 화가 머리 끝까지 났을 걸?”...전화가 끊긴 후 서준의 얼굴은 정말 보기 싫을 정도로 일그러졌다.동후는 그가 왜 그런지 몰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사표를 낸 건 분명히 최 비서님인데 왜 갑자기 HT그룹을 상대로 공격을 하는 거지? 그리고 어떻게 D국 DS그룹 수석 비서로 이직한 거지? 거긴 취업하기 어렵
“이거야.”민혜경은 손을 뻗었고, 심플하지만 빛을 받으면 독특한 빛을 반짝이는 반지가 그녀의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서준의 시선이 반지에 닿는 순간, 그는 이 반지가 결혼 3년 동안 최하연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었음을 기억했다.혜경의 손에서 반지를 빼앗은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반지 안쪽을 문질렀다.분명했다. 반지 안 쪽에는 ‘SJ&HY’이라는 이니셜도 새겨져 있었다.그는 하연이 반지를 끼워달라던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퉁명스럽게 ‘나중에 다시 얘기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3년 동안 한 번도 이 반지를 뺀 적이 없었다.혜경은 반지를 들고 생각에 잠긴 서준의 모습에 기분이 안 좋았지만 여전히 밝은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이렇게 소중한 걸 버리고 가다니, 서준 씨, 그 반지를 최 비서한테 다시 돌려줄 거야? 아니면...”“걔한테 다시 줘서 뭐해!”혜경의 말을 들은 이수애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평소에 그렇게 착한 척, 순진한 척, 척이란 척은 다 떨었으면서 이제야 등 돌리고 떠난 사람한테 줘서 뭐해? 우리가 무슨 꼴을 보려고!”“맞아,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부터 뭔가 쎄하다 했어.”옆에 있던 한서영이 말을 거들었다.그 말에 서준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고, 손에 있던 반지를 꽉 움켜잡았다.방금 전 통화에서 방을 잡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그 남자를 생각하면 기분은 더 나빠질 뿐이었다.서준은 왠지 모를 분노의 물결이 가슴에 솟구쳐 점점 더 짜증이 났다.‘최하연은 이미 남자가 생긴 거였네, 그러니까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지.’그는 미련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버려.”아들의 말에 이수애는 더욱 비꼬며 말했다.“그래, 잘 생각했어. 최하연이 두고 간 걸 만지다니, 어휴 재수 옴 붙었네!”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 쳤다.“맞아, 엄마 말 대로 다 버리고 다 새걸로 바꿔.”하지만 서준은 반응도 하지 않고 침실을 둘러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가정부에게 지시를 내렸다.“난 내 공간을 다른 사람이 함부로 손 대는
비행기 일등석 기내 안.한서준은 버리라고 말한 두 개의 반지를 꺼냈다.잠시 망설이던 그는 좀 더 두꺼운 반지를 골라 꼈다. 한 번도 껴본 적 없는 반지가 잰 것처럼 사이즈가 딱 맞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서준은 업무상의 이유로 결혼반지를 3년 동안 끼지 않았다.평범한 커플이라면 화를 내며 싸울 일이었지만, 싫은 소리 하나 없이 현명하고 이해심 많았던 최하연은 늘 그에게 관대했다.하지만 3년 후 서준과 이혼을 하고 다른 누구보다 더 매정하게 그를 떠나 결혼 반지조차 원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서준은 소리 없이 반지를 돌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온화하고 이해심이 많은 모습과 무자비하고 단호한 모습.’‘도대체 뭐가 진짜 네 모습이야?’비행기는 곳 D국에 도착했다.서준은 곧장 NW그룹 꼭대기 층에 있는 대표실로 향했다.나운석은 사슴 같은 눈을 가늘게 뜨고 컴퓨터와 프로젝트 서류를 번갈아 확인한 다음 서류를 내려놓고 진지하게 말했다.“서준아, 보니까 HT그룹의 참가 자격은 충분한 것 같네.”서준은 짙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역시 DS그룹이 막고 있었네.’운석이 물었다.“DS그룹 최하민 대표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기록을 보니까 그 사람이 HT그룹 참가를 거부했다고 하더라고.”서준의 눈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난 한 번도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 이번 박람회도 내 비서가 맡았고. 이전 보고서에는 별 탈 없이 서명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어.”“그럼 비서는 어디 있어? 비서한테 처리하라고 해.”운석은 시크하게 웃으며 쥐고 있던 펜을 돌렸다.서준은 그대로 고개를 떨군 채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만뒀어.”그 말에 운석은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그럼 그 비서 짓이네. 뒤에서 일을 다 망쳐놓고 회사를 떠난 게 분명해.”“입사할 때 근로계약서를 썼을 거 아니야, 뭐해, 고소하지 않고.”‘문제를 일으켜서 고소한다라...’서준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어두워졌다.이때 구동후는 대표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정략 결혼도 서로 방해되지 않는 이상 괜찮을 것 같은데?”한서준은 자기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넌 괜찮겠지만 난 아니거든?”“내 아내가 될 사람은 첫눈에 반할 정도로 미인이어야 해.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답고 높은 IQ, 모든 것을 압도하는 아우라를 가지고 있어야지 그 여자는 절대 내 취향이 아니야.”나운석은 손을 저었다.“넌 내가 아니라 이해하지 못할 거야.”이런 친구의 모습을 본 서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박람회로 화제를 돌렸다.“박람회는 네 선에서 처리할 수 있어?”운석은 당당하게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이번 박람회는 나씨 가문이랑 DS그룹이 공동으로 주최한 거야. 내가 책임지고 처리해 줄게. 나중에 밥이나 사.”그는 말을 하다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상대방의 응답이 없자 운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상대가 전화를 거절했다. 분명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화가 난 마음에 전화를 끊은 운석은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지며 난감했다. 조금전에 당당하게 말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호언장담했는데 이렇게 눈 앞에서 거절당하다니. 서준이가 나한테 부탁하는 일도 잘 없는데 창피하게 이게 뭐야.’그는 코를 긁적이며 미안한 듯 말했다.“많이 바쁜가 봐. 오랜만에 만났는데 환영회라도 열어야지, 박람회 건은 내가 나중에 얘기해 볼게.”서준은 운석을 따라 대표실 밖으로 나갔다.당연히 자신이 퇴짜 맞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운석이가 이 일을 해결할 가능성은 희박해. 하연이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어.’한편, VIP를 대상으로 한 맞춤 드레스 명품 매장 안.최하민은 고상하고 심플한 Y국산 소파에 앉아 있었다.하민은 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를 거절하고 사이즈를 재고 있는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한서준이 D국에 와서 나운석을 만났나 봐. 나랑 대화를 하고 싶대.”그는 동시에 하연의 표정에 집중했고, 여동생이 정말 그에게 마음이 없는지 고민했다.하지만
부남준은 하연을 사무실로 끌어들인 뒤, 하연이가 믿기 힘들다는 듯 물었다. “왜 황연지를 해고한 거야?” 남준은 느긋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화상 입었잖아.” “내가 원하는 건 공평하고 공정한 처리야. 너의 독단적인 행동을 원한 게 아니라고.” “지금 상황에서 네 신분이 이미 밝혀졌는데, 그 사람들이 여전히 공평함을 믿을 것 같아?” 남준은 말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비서에게 약상자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면봉을 꺼내 하연에게 약을 발라주려고 해서 하연의 손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말이야, 최 사장님이 손을 다쳤다면, 황연지 한 명 해고하는 걸로 충분히 배상이 될 것 같아?” 하연 남준의 농담을 무시하며 말했다. “나도 일부러 황연지에게 부딪힌 게 아니야. 첫째로, 동기도 없었고, 둘째로, 내가 굳이 적을 죽이려다 내 몸도 해치는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누가 더 잘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자면, 하연이 당연히 연지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총애받았을 것이다.“바로 그 동기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네가 직원을 괴롭히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거야.” 남준은 하연의 손에 약을 발라주며, 신중하게 말했다. “보통 사람들의 부유층에 대한 반감을 과소평가하지 마.” 하연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손을 빼려 했지만, 남준은 계속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듣기로는 DS그룹의 성적이 꽤 좋은데, 최 사장님의 정신이 이런 사소한 일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다니. 가족들은 확실히 너를 너무도 잘 보호했나 보군.” 하연은 그가 비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비웃지 마.” 그녀는 대답하면서 손을 뺐다. “그러니까 왜 날 찾아왔어?”남준은 물었다.“그냥 길 지나가다가 목말라서 물 한 잔 마시러 들렀어.” 하연은 억지로 핑계를 댔지만, 남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웃으며 면봉을 던지고 화장실로 손을 씻으러 갔다.하연의 시선은 남준의 비서에게
연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제 잘못이에요.” 남자 직원은 바로 반발했다. “뭐가 연지 씨의 잘못이에요? 연지 씨가 뭘 잘못했는데요? 연지 씨가 피해자잖아요.” 연지는 남자 직원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조용히 말했다. “그만해요, 이분은 DS 그룹의 최하연 사장님이에요.” “최... 최...?” 남자 직원은 다시 하연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한층 낮췄고, 연지를 데리고 가려 했다. “자, 내가 널 처리해 줄게요.” 이 상황이 되니 하연은 마치 권력을 휘두르는 자, 강압적인 자로 여겨지기 시작했다.하연의 머릿속이 아파지며, 그녀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잠깐 서봐요. 황연지 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 여기서 딱 정확히 말해 봅시다. CCTV를 확인하면 다 알 수 있잖아요.” 연지는 사과하며 말했다. “최 사장님, 제 잘못이에요. CCTV까지는 필요 없어요. 죄송해요, 제가 당신까지 다치게 했네요.” “너...” 하연은 더 화가 났다. ‘차라리 황연지가 맞서 싸우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무조건 고개를 숙이며 순순히 사과하니 마치 내가 진짜 잘못한 사람처럼 보이잖아.’주변의 많은 시선들이 하연에게 집중되자, 하연은 더욱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요. 기왕 내가 날 무서워한다면... 좋아요!! 내가 마음대로 하는 게 맞다고 치자. 아무튼 CCTV는 반드시 봐야겠어요!” 멀리서 상혁이 이쪽에서 나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저쪽에선 무슨 일이야?” 원신민이 발돋움하며 말했다. “무슨 소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층은 부남준의 영역이었다. 상혁은 입을 굳게 다물고 이쪽으로 걸어왔다.연지는 불쌍한 얼굴로, 머리에 커피가 묻어 있었다. “정말 괜찮아요...” 이때, 부남준 사람들 속에서 나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하연은 남준과 마주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가 정말로 나타났다. “CCTV를 확인하면 되잖아. 확인해.”
“이건 도 잘 몰라요.” 정민의 권한은 고위급 기밀에 알 수 없었다. 하연은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증거를 정태훈에게 넘기자, 태훈이 바로 ‘까마귀’를 찾으러 갔다. 마침내 이틀도 지나지 않아 그 땅은 DS그룹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까마귀’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일로 인해 정민도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하연이 정민을 다시 찾으러 갔을 때, 정민은 이미 그곳을 떠난 상태였다. 예전에 만났던 정민을 아는 ‘여자 동료’가 하연에게 말했다.“정민 언니... 고향으로 돌아갔어. 마치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도망치듯이 갔다던데. 그쪽 정민 언니의 사촌이라고 했잖아, 정말 몰랐어?” 하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가 말하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랐어요.” “정민 언니의 옛 애인 ‘까마귀’가 지금 언니를 온통 찾아다니고 있으니 빨리 도망가야지.” 하연은 그 말을 들으며 다시 한번 씁쓸하게 웃었다.“...”하연은 DL그룹 본사를 찾아갔다. 안내데스크 직원이 하연을 보고 전혀 놀라지 않으며 말했다. “최 사장님, 누구를 찾으셨나요?” 하연은 입을 열었다가 망설이며 말을 바꿨다. “부남준 상무님을 뵈러 왔어요.” 직원은 곧바로 부남준의 비서에게 연락을 취했고, 하연이는 대기실로 안내되었다. “상무님은 아직 바쁘셔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하연은 대기실에서 부남준의 사무실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중년 남성이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바로 하연이 그날 부씨 가문 저택의 서재에서 본 부건국이었다. 부남준은 부건국에게 친절한 듯 보였지만, 부건국은 다소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나누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부씨 가문 가족이 부남준을 이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그의 권력이 점차 돌아오고 있음을 의미했고, 부남준이 DL그룹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시선을 돌린 하연은
하연은 상혁이 자신을 도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못된 장난을 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우리 졸업 날짜가... 며칠이더라?”그 말에 상혁의 평온했던 표정이 순간 무너졌다. 얼굴에 잠시 분노가 스쳐 갔다. 하연은 그의 반응을 보며 장난기가 잦아들었다.“농담이에요. 나도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요.”하연은 그제야 상혁을 달래듯 메모장을 받아 들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순간을 잠시나마 밝게 비추는 듯했다.“내가 한명준의 선물을 받을 뻔했어요. 하지만 다행히 우리 넷째 오빠가 있잖아요. 오빠가 내가 고생하는 걸 두고 보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연은 이미 이득을 본 주제에 오히려 얄밉게 굴며, 일부러 두 사람이 감정이 깊어지던 때 사용했던 애틋한 호칭으로 상혁을 불렀다.상혁의 몸도 순간에 마치 굳혔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연은 그가 준 땅이 절대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았다. 그런데 조사 결과, 그 땅은 이 도시에서 악명 높은 깡패, 별명 ‘까마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연은 예상치 못한 결과에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땅이 그렇게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을 줄은 몰랐다.정태훈이 말했다. “그 사람, 까마귀는 굉장히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 땅이 값어치 있다는 걸 알고 계속 내놓지 않으려 합니다.” 상혁이 준 주소는 ‘까마귀’의 애인의 집이었다. 그녀는 눈에 띄지 않도록 소박한 옷으로 갈아입고 홀로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착해 보니 그곳은 마치 사창가 같은 장소였다. 남녀가 뒤섞여 있었고, 코를 찌르는 불쾌한 냄새가 가득했다.“정민 언니 만나러 왔어요.” 길가에 서 있던 여자는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정민 언니? 무슨 일로 찾는 거야?” “저는 정민 언니의 친척입니다. 좋은 거래를 소개해 드리려고 왔어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였
상혁은 한 손으로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사실 꽤 좋은 거래였어. 아쉽네.” 이 순간, 그가 사업을 하는 사람의 태도로 하연의 말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하연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말문이 막힌 채 그대로 서 있었다. 하연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상혁의 눈에 잠깐 비쳤는지, 결국 그는 약간의 연민을 보였다. “부남준을 만났어?” 하연이 고개를 들었다. “네 몸에서 부남준이가 좋아하는 남자 향수가 나네. 오늘 부남준이 정다영 씨와의 만남은 순조로웠나?”하연은 상혁이 모든 걸 이미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설마 당신이 주선한 거였어요?” 상혁이 모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정다영 씨는 재능 있는 남자를 좋아해. 이 사회에서 부남준은 정다영 씨에게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지.” 하연은 드디어 기억났다.“정다영의 아버지가 지금도 DL그룹의 이사였고, 정다영과 부남준의 결혼은 부남준에게 득이 될 뿐이야.” “왜 굳이 스스로 적을 만들어요?”상혁은 하연의 다리를 힐끔 보았다. 그녀는 아직 발목이 완전히 낫지 않은 듯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 누가 적인지 알 수 없어.”하연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 생각에는 정다영이 부남준과 결혼하면 두 집안이 단단히 결속되고, 상혁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결국 가족의 지지가 없이는 부남준을 막아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혁은 하연을 지나쳐 서류를 들고 검토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늦었어. 이제 돌아가.” 그는 밤새도록 잠을 잤고, 이미 시간이 늦었지만 하연은 움직이지 않고 의자에 주저앉아 무언가를 깊이 생각했다. 상혁이 이미 계획을 세운 것 같다면, 하연도 자신이 정다영을 굳이 경고할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일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었다. 조승원이 계약을 취소했고, 지금 하연에게 남은 시간에 새로운 땅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손이현은 하연이가 굴복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녀는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상혁이 바로 하연을 밀어냈다. “몸이 더럽고, 냄새도 안 좋으니, 나가라.” 상혁이 자신에게 말하듯 말했다. “전에 당신도 나를 이렇게 많이 챙겨줬잖아요.” 하연은 고집스럽게 상혁의 곁으로 다가갔다. “술주정뱅이.” 상혁은 그녀의 밝은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원신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부에 있는 원신민을 불렀다. 하연이 다시 상혁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원 비서는 이미 갔어요. 여기엔 나만 있어요.” 상혁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하연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원신민은 말했다. [대표님, 오늘 검토하셔야 할 서류는 모두 최 사장님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우선 충분히 쉬세요. 정규인 문제는 해결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상혁은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씻기 시작했다. “정규인은 떠났나요?” [새로운 사업을 받았고, 이익을 얻었으니 당연히 떠났습니다. 오후 비행기로 떠났습니다.]“고경수의 딸이 임신한 거 아니었나요?” [같이 가지 않았습니다. 정규인은 그렇게 위험을 무릅쓸 용기가 없었습니다.] “확실한가요? 그 아이는 누구의 아이죠?” [정규인의 아이입니다. 검사 결과는 최 사장님이 드린 서류에 있습니다.]상혁은 씻고 나와 머리가 한결 맑아졌다. 문을 열었을 때, 하연은 발코니에 서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는 서류에서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승원아, 도대체 왜 갑자기 우리와 계약 해지하려고 한 거야?” 하연은 정태훈에게서 연락받았다. 승원이 일방적으로 DS그룹과의 계약을 취소했다는 소식이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하연은 마치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승원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계약 취소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면서, 그동안 쌓아온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나도 분명히 말했잖아. 이건 우리 둘 사이의 계약이고, 다른 사람은 상관없어.”[알아, 하지만 존이가 예전에 내 목숨을
하연이는 멀리서 송혜선이 정다영을 칭찬하는 소하연 은은하게 들렸다. 그 내용은 대부분 과찬이었다. “졸업 후에 이곳에 남을 계획인가요, 아니면...” “우리 정씨 가문은 외동딸이니까, 당연히 곁에 두겠죠.” 하미주는 단호했다. 다영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망설였다. 그녀는 외부 세상을 보고 싶으며 큰 야망을 키웠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계획은 단순히 집에서 기다리며 맞선을 보거나 결혼하는 것 이상이었다. “그거 좋네요. 다영 씨, 남준은 계속 여기에 익숙하니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남준에게 연락하면 돼요.” “그렇게 하면 민폐겠죠.” 하미주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송혜선은 다영이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고, 이미 마음속으로 계산을 끝냈다. “무슨 걱정이세요, 아이들끼리는 공통된 언어가 있는 법이잖아요. 우리 남준은 기꺼이 도와줄 텐데, 다영이는 어때요?” 다영은 조금 전 남자에게서 느꼈던 은은한 향기를 떠올리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남준 오빠가 귀찮아하지 않는다면, 저도 기꺼이 좋겠어요.” 그 말을 들은 송혜선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보시죠’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미주는 딸이 의외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고 놀란 듯했다. 그녀는 딸이 반항심 강한 줄 알았지만, 남준에게 마음이 있는 것을 보고 조금 의아해했다. 화분 뒤쪽에서 하연의 핸드폰이 ‘딩’소리를 내며 울렸다. 하연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남준 오빠.”남준은 그 소리에 흠칫하며 당황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볼게요. 남준 오빠는 여기서 마음껏 즐겨요.” 하연은 착하게 미소 지으며 가방을 들어 올리고는 가볍게 돌아섰다. 남준이가 따라올지 신경 쓰지 않은 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하연 이미 다영의 연락처를 손에 넣었고, 또 다른 소식도 받았다. 즉, 오늘 상혁이 바로 옆 식당에서 접대 중이라는 것이었다. 전날 과음한 그는 방에 묵고 있었고,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이 모든 정보를 준 사람은 바
“우리 남준이는 타고난 재능이 좋지 않으니, 일을 열심히 하는 게 당연해요.” 송혜선의 말에 하미주는 더욱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우리 집안이 혜선 사모님의 사정을 잘 몰라서 소홀히 했던 점이 있네요.” “무슨 말씀이세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남준은 다영을 데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그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다영은 계속 남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다음에 제가 밥을 살게요. 연락처 좀 알려주시겠어요?” 그제야 남준은 그녀를 한 번 보고, 비서에게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다영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제가 남준 씨의 개인 번호를 받고 싶어요.” 남준은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으며 말했다. “저는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습관이 없어요.” “제가 저장할게요.” 다영은 긴장했지만, 동시에 솔직하고 대담했다. 남준은 벽에 기대며 숫자를 읊어주었다. “다영 씨,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해 주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남준은 다영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같이 안 가요?” “회사에 일이 있어서 급히 돌아가야 해요.” 그제야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엘리베이터에 탄 다영은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남준을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봤는데, 갑자기 번호를 누르며 말했다. “그런데, 남준 씨의 그 작품은 정말 멋졌어요. 웅장하면서도 제가 그림 안에 서글픔과 고독이 느껴지더군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남준은 잠시 멈칫하며 그녀를 다시 보았다. 그의 감정은 가려졌지만, 차분히 대답했다. “다영 씨께서 제 작품을 감상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다른 작품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요?” 다영의 눈빛에는 이미 애정이 담겨 있었다. “제 번호를 이미 받지 않았나요?” 다영은 거절당하지 않았다는 것에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하연은 이 호텔의 VIP 회원이었기 때문에, 호텔 지배인이 직접 안내했다. “정다영
“설령 제가 왕씨 가문을 하연 씨에게 준다고 해도, 하연 씨는 받지 않을 거잖아요.”이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남산 땅은요? 당신이 왜 제가 그걸 받을 거라고 생각하죠?”짧은 침묵이 흘렀다.하연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자신이 겨우 얻어낸 또 다른 부지를 이현이 몇 마디로 취소시켜 버렸다.“앞으로 제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하연은 차갑게 말하며 다시 돌아가 가방을 집어 들었다.“우리 회사와 계약 해지를 한 계약서라도 썼나?”승원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계약서도 없으니, 우리 계약은 그대로 진행할 거야. 내가 보증금도 곧바로 입금할게. 승원아, 협력은 우리 둘이 한 것이지, 다른 사람이 끼어들 자격은 없어. 잘 기억해.”하연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고, 그 분노는 차갑고 단호했다.그녀는 가방을 들고 단호히 자리를 떠났다.승원은 멍한 표정으로 한쪽에 앉아 있는 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봐, 진심이야? 정말로 하연을 여자 친구로 만들려고?” 오랜 침묵 끝에 이현은 조용히 대답했다. “응.” 승원은 놀란 눈으로 이현을 바라보았다. “네가 농담하는 줄 알았어. 너 정말 하연이가 누구인지 알기나 해? 최씨 가문이 그렇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집안이라고 생각해? 게다가 하연의 전 남친은 세계 50대 기업의...” “부상혁 말이지, 알아.” 이현은 아주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승원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현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아까 먹다 남긴 음식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마치 굳은 결심이 담긴 듯한 모습이었다. “난 그저 과거의 후회를 만회하고 싶을 뿐이야. 지금 어떤 장애물도 문제가 되지 않아.” ...‘미녀4총사’의 톡방이 톡을 끊임없이 계속 문자를 올리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남산 땅을 가져왔다는 건 정말 큰 공을 들였다는 의미야. 하연아, 지금 그저 앉아서 득을 보면 되는 건데, 왜 안 받아?]여은이는 전형적인 사업가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