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 씨?”민혜경은 한 공간에 같이 있는 이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모른 채 그저 최하연이 눈에 거슬리기만 했다.“서준 씨, 얼른 주고 보내! 오늘 우리 부모님이 내가 당신 데리고 오는 줄 알고 기다리고 있어, 오랫동안 못 만났잖아, 우리 부모님이 서준 씨 보고 싶대.”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에 한서준은 정신을 차렸다.한씨 가문은 민씨 가문에 가책을 느끼고 있어 그는 민씨 저택에 방문했어야 했다.하지만 이 말에도 하연의 얼굴은 서준에 대한 모든 것들이 더 이상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평온했다.서준은 답답하고 복잡했다.“저기 있어.”하연은 그가 턱으로 가리킨 쪽을 바라봤다.그곳엔 신분증이 정수기 밑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채 마치 그녀처럼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다.“네.”하연은 씁쓸한 마음을 억누르고 신분증을 주워들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서 대표실을 떠났다.그 뒤에는 날카롭고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대표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사무실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그저 흥미롭게 보는 사람도 있고 동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에는 가십거리라는 배경이 깔려 있었다.더군다나 회사에선 하연이 서준을 꼬셔서 그에게 쫓겨났다는 소문도 돌았다.그녀는 법적으로 서준의 부인이었지만, 내연녀로 치부됐다.하연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을 참기 위해 애쓰며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뒤에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최 비서님, 밖에 비 와요. 추우시면 제 겉옷 드릴게요.”우산을 가져다준 사람은 다름아닌 구동후였다.‘매정한 HT그룹에도 따뜻한 사람이 있긴 하구나.’겉옷을 벗으려는 동후를 본 하연은 그를 말리며 씁쓸함을 목에 삼켰다.“아니에요, 고마워요 구 실장님. 이제 만날 일도 없겠네요.”그녀의 씁쓸한 표정을 본 동후는 입을 움직였지만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하연은 미련없이 자리를 떠나 빗 속으로 뛰어들었다.이럴 때는 폭풍우만이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 유일
고택에서 한참을 기다린 가정부는 돌아온 한서준의 외투를 받아들었고, 서준의 뒤에 있는 민혜경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혜경 아가씨, 방은 준비해 뒀습니다. 이쪽 복도를 따라 올라가시면 됩니다.”서준을 따라 계단으로 향하던 혜경은 멈춰 서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서준 씨, 우리 같이 자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고택으로 들어오는 걸 동의한 서준은 결혼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격이었다.함께 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그녀의 말에 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그...”혜경은 더 이상 어떠한 말도 감히 하지 못했다.남아있던 하연의 흔적이 사라질까 봐 그는 가정부에게 다른 방을 준비하라고 지시했었다.“난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먼저 자러 가.”서준은 무관심한 어투로 혜경을 바라보며 눈빛을 보냈다.“하지만...”예상대로 혜경은 여전히 달갑지 않은 추궁을 해 왔고, 서준의 지시를 받은 배현숙이 그녀를 막았다.“혜경 아가씨, 절 따라오세요.”고택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차갑기 짝이 없는 서준의 얼굴을 가렸다.혜경은 마음속의 불만을 억눌렀다.‘귀국한 후로 서준 씨의 행동이 너무 달라졌어.’가깝고도 먼 그의 마음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서재로 돌아온 서준은 샤워를 하고 목욕가운을 입은 뒤 손에 든 문서를 훑어봤지만 정신은 딴 데로 가 있었다.예전 같으면 하연이 서재에 따뜻한 수프를 가져다주고 침실로 가 그를 기다렸을 것이다.때로는 서재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때로는 침실로 돌아와 그녀는 소파에서, 서준은 침대에서 자기도 했지만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수프를 가져다줬다.하지만 오늘은 아무리 기다려도 수프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었다.이런 그녀의 흔적에 서준은 괜히 짜증이 났다.이때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구 실장’이라는 글자를 보고 서준은 왠지 모르게 느낌이 좋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방금 D국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는데 HT그룹이 기부금액이 적다는 이유로 참가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합니다
유럽풍 건물의 호화로운 스위트룸, 최하연은 익숙한 듯 기지개를 펴고 일어났다.방 구조나 가구들은 그녀가 떠났을 때와 다름없었다.하연의 머리맡에는 따뜻한 차가 놓여 있었고, 침대 위에는 세련된 옷들이 여러 벌 놓여 있었다.코 끝이 시큰거렸다.B시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대우였다.“할아버지는 비행기 추락 사고 소식을 들으시고 네가 전화를 안 받아서 심정지가 오셨어, 아직도 병상에 누워계셔.”뒤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검은 옷을 입은 큰 키의 남자가 카리스마와 아우라를 풍기며 그녀의 침실에 나타났다.그는 B시로 하연을 데리러 온 오빠 최하민이었다.하민은 현재 최씨 가문의 경영을 이끌고 있고 항상 온화함을 유지하며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에 하연은 덜컥 겁이 나 울먹였다.“오빠, 많이 위중하신 거야...?”“심각한 정도는 아니야, 넌 네 몸이나 챙겨.”하민은 하연의 손을 잡아당기며 나가려는 그녀를 막았다.“지금 네 꼴을 봐, 이게 사람 얼굴이야? 예전에 한 약속 잊었어?”이 말을 들은 하연은 발걸음을 멈췄다.당연히 잊지 않았다.그녀는 할아버지에게 한서준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나아가 이혼까지 하게 된다면 영원히 최씨 가문에 남아 가업을 돕겠다고 약속했다.심지어 하연은 최씨 가문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4대 가문 중 하나인 나씨 가문과 결혼하겠다는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오빠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벌써 사람을 찾아 놓은 거야?’‘나씨 가문의 아들은 알아주는 바람둥이라고 하던데...’“근데 오빠 난 이혼한지도 얼마 안 됐고, 아직 재혼할 생각이 없어.”그녀는 거의 빌다시피 말했다.순간 하민은 표정을 풀더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겁주려고 한 말이었다.“넌 최씨 집안 딸이야. 우리 가문은 자식을 팔면서까지 집안을 키우진 않아 하지만, 할아버지가 완치하실 때까지는 내 옆에서 오른팔 역할을 똑똑히 해.”이 말의 의미는 D국에 있는 하민의 DS그룹에 들어
“미안해, 오빠가 늦었지?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이제야 들었지 뭐야. 시시하게 벌써 돌아온 거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전부 쓸데없는 걱정이었네!”이 목소리를 들은 최하연은 단번에 자신의 셋째 오빠인 최하성이라는 것을 알았다.사실 하성은 그녀의 친오빠가 아니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서 버려졌고 이후 최씨 가문에 입양되었다.하연은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방해하지 말고 잠시 앉아 있어.”3일이 지났지만 하연은 최하민의 비서인 이민영이 준 서류를 정리하지 못했다.전 세계 협력사로부터 하루에 백 통이 넘는 전화를 받다 보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하성은 그녀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소파에 앉아 말했다.“다 형이 시킨 거야? 이건 분명히 널 후계자로 키우려는 걸 거야. 안 쓰러지는 게 이상하지, 차라리 나랑 같이 콘서트 투어하자. 기분 좀 풀어.”“안 가.”하연은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지난 번에 일 기억 안 나? 오빠 팬들이 날 여자친구로 생각해서 얼마나 힘들었다고. 오빠가 조금만 늦게 왔으면 난 돌에 맞아 죽었어.”“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하성은 빙그레 웃으며 입술을 닦고 그녀를 바라봤다.“에이, 아닌 척하면서 오빠 생각은 하고 있었구나? 아직도 우리의 추억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다니 우리 하연이 최고!”...하연은 말문이 막혀 서류를 바라보며 눈을 굴렸다.“망상도 병이야.”하성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실은 진지한 제안이었다.“내 병은 너만 고칠 수 있어.”...불행 중 다행인 건 그녀가 이미 하성과의 이런 대화에 익숙해져 불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하성은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즐겨 불렀고, 지금은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스타였다.아무리 바빠도 늘 하연에게만큼은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그녀가 서준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했을 땐 예정된 콘서트를 그 자리에서 취소하고 B시로 날아가 서준과 싸우려 했으나 큰형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 주위에 좋은 남자가 널렸는데 왜
구동후는 굳은 얼굴로 다시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모두 통화 중이었다.그가 N번째로 전화를 걸자 한서준은 어두운 얼굴로 휴대폰을 뺏아 들었다.[정말 끈질기시군요. 구 실장님, 한서준 씨에게 이번 박람회와는 인연이 없다고 전해주세요.]최하연이 퉁명스럽게 얘기하자 전화기 너머에는 정적만이 맴돌았다.한참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야.”이 목소리를 들은 하연이 순간 목이 막혔다.서준은 그녀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HT그룹이 이번 기부금 금액을 600억에서 900억으로 늘렸는데, 이 정도면 이번 박람회에 참가할 자격이 있는 거 아닌가?”그 순간, 하연은 이미 최하성의 슈퍼카에 앉아 말했다.[한서준 씨, 지금 장난하는 것 같습니까?]방금 전 하성은 그녀가 바쁜 것을 보고도 하연을 끌고 D국의 야시장을 구경하자고 고집했고 그녀는 그런 오빠를 거절할 수 없어 차에 올라탔다.“900억이 부족하다면 2000억, 그래도 안 되면 글로벌 상업연합회에 보고해 그 사람들의 결정에 따를 거야. 네가 있는 그룹이 유일한 주최자는 아니니까.”[정말...]하연은 그의 몇 마디로 말문이 막혔고, 운전을 하고 있던 하성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하연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빼앗았다.[낯짝도 두껍네, 내 동생이랑 이혼한 주제에 왜 자꾸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거야? 뭐 재혼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말해두겠는데, 그런 거라면 마음속에 고이 접어 둬. 최하연은 내 거야. 참고로 우린 방도 잡았다고!]이 말을 끝으로 하성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하연에게 던졌다.하연은 완전히 충격을 받았다.“뭐? 방을 잡아?”“또 모르지? 이 말 한마디에 한서준은 지금 화가 머리 끝까지 났을 걸?”...전화가 끊긴 후 서준의 얼굴은 정말 보기 싫을 정도로 일그러졌다.동후는 그가 왜 그런지 몰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사표를 낸 건 분명히 최 비서님인데 왜 갑자기 HT그룹을 상대로 공격을 하는 거지? 그리고 어떻게 D국 DS그룹 수석 비서로 이직한 거지? 거긴 취업하기 어렵
“이거야.”민혜경은 손을 뻗었고, 심플하지만 빛을 받으면 독특한 빛을 반짝이는 반지가 그녀의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서준의 시선이 반지에 닿는 순간, 그는 이 반지가 결혼 3년 동안 최하연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었음을 기억했다.혜경의 손에서 반지를 빼앗은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반지 안쪽을 문질렀다.분명했다. 반지 안 쪽에는 ‘SJ&HY’이라는 이니셜도 새겨져 있었다.그는 하연이 반지를 끼워달라던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퉁명스럽게 ‘나중에 다시 얘기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3년 동안 한 번도 이 반지를 뺀 적이 없었다.혜경은 반지를 들고 생각에 잠긴 서준의 모습에 기분이 안 좋았지만 여전히 밝은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이렇게 소중한 걸 버리고 가다니, 서준 씨, 그 반지를 최 비서한테 다시 돌려줄 거야? 아니면...”“걔한테 다시 줘서 뭐해!”혜경의 말을 들은 이수애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평소에 그렇게 착한 척, 순진한 척, 척이란 척은 다 떨었으면서 이제야 등 돌리고 떠난 사람한테 줘서 뭐해? 우리가 무슨 꼴을 보려고!”“맞아,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부터 뭔가 쎄하다 했어.”옆에 있던 한서영이 말을 거들었다.그 말에 서준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고, 손에 있던 반지를 꽉 움켜잡았다.방금 전 통화에서 방을 잡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그 남자를 생각하면 기분은 더 나빠질 뿐이었다.서준은 왠지 모를 분노의 물결이 가슴에 솟구쳐 점점 더 짜증이 났다.‘최하연은 이미 남자가 생긴 거였네, 그러니까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지.’그는 미련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버려.”아들의 말에 이수애는 더욱 비꼬며 말했다.“그래, 잘 생각했어. 최하연이 두고 간 걸 만지다니, 어휴 재수 옴 붙었네!”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 쳤다.“맞아, 엄마 말 대로 다 버리고 다 새걸로 바꿔.”하지만 서준은 반응도 하지 않고 침실을 둘러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가정부에게 지시를 내렸다.“난 내 공간을 다른 사람이 함부로 손 대는
비행기 일등석 기내 안.한서준은 버리라고 말한 두 개의 반지를 꺼냈다.잠시 망설이던 그는 좀 더 두꺼운 반지를 골라 꼈다. 한 번도 껴본 적 없는 반지가 잰 것처럼 사이즈가 딱 맞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서준은 업무상의 이유로 결혼반지를 3년 동안 끼지 않았다.평범한 커플이라면 화를 내며 싸울 일이었지만, 싫은 소리 하나 없이 현명하고 이해심 많았던 최하연은 늘 그에게 관대했다.하지만 3년 후 서준과 이혼을 하고 다른 누구보다 더 매정하게 그를 떠나 결혼 반지조차 원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서준은 소리 없이 반지를 돌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온화하고 이해심이 많은 모습과 무자비하고 단호한 모습.’‘도대체 뭐가 진짜 네 모습이야?’비행기는 곳 D국에 도착했다.서준은 곧장 NW그룹 꼭대기 층에 있는 대표실로 향했다.나운석은 사슴 같은 눈을 가늘게 뜨고 컴퓨터와 프로젝트 서류를 번갈아 확인한 다음 서류를 내려놓고 진지하게 말했다.“서준아, 보니까 HT그룹의 참가 자격은 충분한 것 같네.”서준은 짙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역시 DS그룹이 막고 있었네.’운석이 물었다.“DS그룹 최하민 대표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기록을 보니까 그 사람이 HT그룹 참가를 거부했다고 하더라고.”서준의 눈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난 한 번도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 이번 박람회도 내 비서가 맡았고. 이전 보고서에는 별 탈 없이 서명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어.”“그럼 비서는 어디 있어? 비서한테 처리하라고 해.”운석은 시크하게 웃으며 쥐고 있던 펜을 돌렸다.서준은 그대로 고개를 떨군 채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만뒀어.”그 말에 운석은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그럼 그 비서 짓이네. 뒤에서 일을 다 망쳐놓고 회사를 떠난 게 분명해.”“입사할 때 근로계약서를 썼을 거 아니야, 뭐해, 고소하지 않고.”‘문제를 일으켜서 고소한다라...’서준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어두워졌다.이때 구동후는 대표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정략 결혼도 서로 방해되지 않는 이상 괜찮을 것 같은데?”한서준은 자기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넌 괜찮겠지만 난 아니거든?”“내 아내가 될 사람은 첫눈에 반할 정도로 미인이어야 해.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답고 높은 IQ, 모든 것을 압도하는 아우라를 가지고 있어야지 그 여자는 절대 내 취향이 아니야.”나운석은 손을 저었다.“넌 내가 아니라 이해하지 못할 거야.”이런 친구의 모습을 본 서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박람회로 화제를 돌렸다.“박람회는 네 선에서 처리할 수 있어?”운석은 당당하게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이번 박람회는 나씨 가문이랑 DS그룹이 공동으로 주최한 거야. 내가 책임지고 처리해 줄게. 나중에 밥이나 사.”그는 말을 하다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상대방의 응답이 없자 운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상대가 전화를 거절했다. 분명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화가 난 마음에 전화를 끊은 운석은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지며 난감했다. 조금전에 당당하게 말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호언장담했는데 이렇게 눈 앞에서 거절당하다니. 서준이가 나한테 부탁하는 일도 잘 없는데 창피하게 이게 뭐야.’그는 코를 긁적이며 미안한 듯 말했다.“많이 바쁜가 봐. 오랜만에 만났는데 환영회라도 열어야지, 박람회 건은 내가 나중에 얘기해 볼게.”서준은 운석을 따라 대표실 밖으로 나갔다.당연히 자신이 퇴짜 맞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운석이가 이 일을 해결할 가능성은 희박해. 하연이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어.’한편, VIP를 대상으로 한 맞춤 드레스 명품 매장 안.최하민은 고상하고 심플한 Y국산 소파에 앉아 있었다.하민은 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를 거절하고 사이즈를 재고 있는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한서준이 D국에 와서 나운석을 만났나 봐. 나랑 대화를 하고 싶대.”그는 동시에 하연의 표정에 집중했고, 여동생이 정말 그에게 마음이 없는지 고민했다.하지만
“네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어.” 다영은 원래 조금 망설였지만, 그 말을 듣자 마음속에서 은근히 결심이 섰다. ‘반드시 아버지를 구해야 해.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어머님, 걱정 마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 송혜선은 다영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충분해. 나를 실망시키지 않길 바랄게.” ...대기실 밖. 상혁은 잘 맞춘 정장을 입고 서 있었다. 훤칠한 체격에 비율까지 완벽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하성은 장난스럽게 상혁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자, 한번 말해 봐. 지금 기분이 어때?” 상혁은 거울을 가볍게 흘깃 쳐다보았다. 비록 자신은 전날 밤 한숨도 못 잤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들떠 있었다. 오히려 얼굴엔 생기가 돌았고, 눈빛도 반짝였다. 그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음, 좋아.”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고작 ‘좋아’ 한마디?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야?” 하성은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지만, 이내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어쨌든, 우리 하연이한테 잘해. 만약 조금이라도 속상하게 하면, 우리 집안에서 널 가만 안 둘 거야.” 상혁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친구의 가슴팍을 툭 쳤다. “그 말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몰라. 이제 외울 지경이라고.” 그러다 갑자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걱정 마.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하성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럼 됐다.” ...대기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서여은과 정예나는 상혁을 보자마자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물러나, 둘만의 시간을 남겨 주었다. 하연은 거울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눈썹을 그리며 메이크업을 손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진숙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니? 이제 아무나 이런 자리에 낄 수 있는 거야?”서해정은 앞을 손으로 휘저으며,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누군가 했더니. 요즘은 첩들도 이런 곳을 이렇게 당당하게 오나 보네?”그 말이 떨어지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소리 없이 속삭이는 중에도, 누구나 비웃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했다.송혜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그러나 기어코 분노를 삼켰다.‘이 여자, 서해정...’조진숙의 절친이자, 상류층 사모 모임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그리고 서해정의 시댁을 건드렸다간 큰일 나는 상대였다.송혜선은 감히 덤빌 수 없었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조진숙의 손에 들린 붉은 봉투를 단숨에 낚아챈 후, 아무렇지도 않게 송혜선의 품에 던져버렸다.“우리도 선물을 받을 때, 가리는 건 가려야지. 네 손에서 나온 건, 왠지 더러워서 받기가 싫네?”“당신...!”송혜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더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손으로 배를 감싸며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자 서해정은 일부러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의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어머, 뭐야. 설마 지금 나한테 시비 걸려고? 이런 짓 나한테는 안 통해.”송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분노를 삼켰다.“서 여사님, 아무리 그래도 제게 어느 정도 예의는 좀 지켜 주시죠.”그러나 서해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진숙의 팔짱을 끼고 돌아섰다.“진숙아, 우리 가자. 오늘은 상혁이의 중요한 날인데, 괜히 재수 없게 만들 필요 없잖아.”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조진숙의 눈에는 어딘가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이렇게까지 망신을 줘도 괜찮을까...?’‘만약 이대로 가버린다면, 송혜선이 부동건에게 이를 고하면 오히려 내가 나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은데...’친구의 망설임을 읽은 듯, 서해정이 조용히 속삭였다.“그 인간도 네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저 여자를 여기에 데리고
호텔 로비에는 이미 많은 하객들이 모여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그러나 그때, 송혜선이 부동건의 팔짱을 끼고 등장하자, 순간적으로 홀 전체가 술렁였다.“저거... 부 회장의 정부 아니야? 어떻게 저 여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저렇게 당당히 나타난 거지?”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자, 그 말이 그대로 서해정의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가시 돋힌 말을 내뱉었다.“이런 자리에까지 기어들어올 정도로 정말 뻔뻔하네. 부동건도 정말 갈수록 가관이야.”조진숙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찬구인 서해정은 부동건의 이런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몰랐어?”옆에 있던 하객 하나가 서해정의 소매를 살짝 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부 회장이 이번에 송혜선을 정식 부인으로 올릴 생각이라던데?”서해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 진심이야?”“처음엔 그냥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꽤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해정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우리 진숙이 불쌍해서 어쩌나...’이어서 송혜선을 향한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결국 첩은 첩일 뿐이야. 설령 정식 부인이 된다고 해도, 그 꼬리표는 절대 떼지 못할걸?”...사실, 부동건은 애초에 송혜선을 이 자리에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출발 직전, 그녀가 다가와 어리광을 부렸다.그 순간부터, 부동건의 얼굴에는 미묘한 불쾌감이 감돌았다.“오늘은 상혁이의 약혼식이야. 네가 따라올 이유가 없잖아.”그러나 송혜선은 환하게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상혁이의 경사스러운 날인데, 당연히 축하하러 가야죠. 저도 기분 좋은 일에 함께하고 싶어요.”부동건은 눈살을 찌푸렸다.“네 상태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어. 집에서 푹 쉬어야 할 때야. 괜히 사람들 많은 곳에서 불편하게 굴지 마.”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걱정 마세요, 회장님. 다영이가 저랑 같이 있을 거예요. 문제될 거 없어
‘정말... 부 대표님을 대신할 수 있을까?’연지는 눈에 의심과 불안이 섞인 채 남준을 바라봤다.“상무님,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 겁니까?”여자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남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은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불길한 유성처럼 섬뜩했다.그 순간, 연지의 등줄기를 싸늘한 한기가 훑고 지나갔다.조명이 비친 남자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듯했다.남준은 천천히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유려한 손길로 술을 술잔에 가득 따라낸 후, 한 잔을 연지 앞으로 내밀었다.“내일이 무슨 날인지는 알지?”‘내일?’연지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곧 깨달았다.“내일은 약혼식... 부 대표님과 하연 씨의 약혼식 날입니다.”남준은 손목을 살짝 돌리며, 술잔 속 액체를 천천히 흔들었다.술이 잔 속에서 부드럽게 회전했다.그는 반쯤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모든 것이 남준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듯이.“오래 기다렸지. 드디어 그날이 왔군.”연지는 흐름을 감지하며 조심스레 물었다.“설마... 상무님, 약혼식을 망치시려는 건가요?”남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며 잔을 비웠다.남자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명확했다.연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만약 이 약혼식이 깨진다면... 나도 손해 볼 건 없지.’남준은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결합은 단순한 약혼이 아니다. 이 약혼식에는 양가의 주요 인물들이 총출동해. 사람이 많다는 건, 우리에게 기회가 많다는 뜻이겠지.”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가볍게 던졌다. 유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앞의 남자는 상혁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은 눈매, 흡사한 이목구비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순간적으로 하연은 착각할 뻔했다.‘세상에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그때, 남자의 시선이 하연에게 닿았다. 그리고 눈빛에는 짧은 순간 놀라움과 흥미가 스쳤고, 곧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예쁜 분이 밤에 혼자 노시는 건가요? 연락처라도 하나 주고 가는 게 어때요?”이 남자는 상혁과 외모만 닮았을 뿐, 막상 입을 여는 순간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단순한 생김새를 넘어,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그 차이는 너무도 확연했다.“죄송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단 한 치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남자는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지갑에서 금빛 명함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그럼 그냥 친구로라도. 이 정도도 안되나요?”고급스러운 금박이 감도는 종이 위에 큼직하게 적힌 영문 이름.[세븐]하연은 그 명함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고, 그 순간 그녀의 약지에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미안하지만, 안 돼요.”남자의 반응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하연은 가볍게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남자는 하연이 멀어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VIP룸 안.남준은 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기가 폐 깊숙이 들어갔다가 천천히 뿜어져 나오는 동안,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그때, 문이 열리며 황연지가 들어왔다.그녀는 성큼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오셨습니까?”남준은 담배를 비벼 끄고, 재떨이에 던졌다.“왔군.”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상무님, 절 찾으셨다면서요.”남준은 얕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새해를 맞아 너한테 특별한 선물을 하나 주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
허징인이 상혁을 찾았다는 소식은 남준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은 것 같아. 물론 앞으로도 절대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남준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속내에서는 의문이 피어올랐다.‘내가 오래 지켜본 부상혁이라면, 이유 없이 움직일 리가 없는데...’하지만 상혁이 허징인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남준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처럼,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의심이 한 번 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남준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급히 뛰어 들어온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상무님, 교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남준은 정다영의 집에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옷깃을 정리하던 손이 멈춰 섰고,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일인데 그래?”부하는 다급한 얼굴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정규인이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변호사를 불러서 항소재판을 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남준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순식간에 부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잘 갇혀 있던 놈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부하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혹시... 어쩌면 허징인과 그 아들...”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단칼에 잘라버렸다.“말도 안 돼. 이 일은 우리 쪽만 알고 있어. 교도소 안에 있는 정규인이 대체 어떻게 알겠어?”부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외부와 접촉할 방법은 없습니다.”그러나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정규인,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남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놓았다.‘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