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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물건이요?

최하연은 이미 사직서를 냈으니 민혜경의 말을 들을 의무가 없어 거절했다.

그리고 민혜경의 부탁은 거의 명령에 가까웠기에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하연의 신분증이 아직 한서준에게 있으니 마지막으로 잡다한 일을 맡기로 했다. 더불어 커피를 가져다주면서 자연스레 그에게 말을 걸 수도 있었다.

하연은 심호흡을 한 뒤 동의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할게요.”

그렇게 말한 후 혜경은 화장실을 나갔다.

임신 후 모성애가 그녀를 감싸는 순간이 잠시 있었지만, 여전히 혜경에게서 풍겨 나오는 자신감과 화려함은 하연과 대조적이었다.

과거 하연은 부유한 집안의 그늘 아래 혜경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몇 년이 흐른 지금, 하연은 초라한 신세였다.

엄청난 격차에 그녀는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추스린 후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나온 하연은 탕비실로 가서 커피를 만들었다.

서준은 흑설탕 3 티스푼과 우유를 넣은 아메리카노를 좋아했다.

회의가 끝난 사람들은 하나 둘씩 회의실을 빠져나왔지만 그녀는 서준을 발견하지 못했다.

‘벌써 대표실로 들어간 건가?’

하연은 커피를 들고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안에서 들려온 것은 서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닌 온화하고 부드러운 혜경의 목소리였다.

하연은 손이 떨려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했다.

긴 고민 끝에 그녀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대표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서준의 무릎에 앉아 그의 목을 껴안고 있는 혜경을 발견했다.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보니 하연은 진정할 수 없었고 심장은 고통으로 뛰고 있었다.

대표실로 들어온 하연을 본 혜경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여기에 두고 나가시면 돼요.”

혜경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녀는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꽤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준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단숨에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그 순간 하연은 직감적으로 서준이 일부러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왜 왔는 지 알면서 나한테 굳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뭐야!’

“최 비서님?”

우쿠커니 서 있는 하연을 본 혜경이 입을 열었다.

“네.”

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은 후 도망치듯 돌아갔지만 단 두 걸음 만에 걸음을 멈췄다.

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그녀의 머리속엔 뒤엉켜 있는 두 사람의 모습뿐이었다.

하연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러나 혜경은 자신과 서준,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는 그녀의 존재가 거슬렸다.

“최 비서님, 또 다른 용건 있으세요?”

“그...”

하연은 끝내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뒤를 돌아 말했다.

“저한테 아주 중요한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대표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대표님, 돌려주세요.”

200제곱미터에 달하는 대표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흰 셔츠를 입고 가죽 의자에 앉아 있는 서준은 소름 끼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물건이요?”

이 말을 들은 혜경은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서준을 더 꽉 껴안으며 물었다.

“서준 씨, 왜 비서 물건을 숨기는 거야?”

“아, 별거 아니야.”

서준은 혜경의 얇은 팔을 잡아당겼고, 하연의 눈 앞에서 두 사람의 몸을 더 밀착시켰다.

하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피눈물이 나는 기분이었다.

남 보다 못한 서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가봐.”

그 말은 강렬하고도 가혹했다.

그런 서준의 모습은 그녀에게 신분증을 쉽게 돌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 신분증이에요.”

혜경이 있는 틈을 타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 일을 해결하고 깔끔하게 떠나고 싶었을 뿐 잠시도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전 이미 HT그룹에서 퇴직했는데 대표님께서 왜 제 신분증을 가져 가셨는지 모르겠어요? 대표님이 저에게 다른 감정이라도 가지고 계신 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HT그룹에는 일 잘하는 사람이 차고 넘치잖아요. 저 같은 비서에게 그런 비열한 방법은 사용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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