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에서 한참을 기다린 가정부는 돌아온 한서준의 외투를 받아들었고, 서준의 뒤에 있는 민혜경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혜경 아가씨, 방은 준비해 뒀습니다. 이쪽 복도를 따라 올라가시면 됩니다.”서준을 따라 계단으로 향하던 혜경은 멈춰 서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서준 씨, 우리 같이 자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고택으로 들어오는 걸 동의한 서준은 결혼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격이었다.함께 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그녀의 말에 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그...”혜경은 더 이상 어떠한 말도 감히 하지 못했다.남아있던 하연의 흔적이 사라질까 봐 그는 가정부에게 다른 방을 준비하라고 지시했었다.“난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먼저 자러 가.”서준은 무관심한 어투로 혜경을 바라보며 눈빛을 보냈다.“하지만...”예상대로 혜경은 여전히 달갑지 않은 추궁을 해 왔고, 서준의 지시를 받은 배현숙이 그녀를 막았다.“혜경 아가씨, 절 따라오세요.”고택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차갑기 짝이 없는 서준의 얼굴을 가렸다.혜경은 마음속의 불만을 억눌렀다.‘귀국한 후로 서준 씨의 행동이 너무 달라졌어.’가깝고도 먼 그의 마음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서재로 돌아온 서준은 샤워를 하고 목욕가운을 입은 뒤 손에 든 문서를 훑어봤지만 정신은 딴 데로 가 있었다.예전 같으면 하연이 서재에 따뜻한 수프를 가져다주고 침실로 가 그를 기다렸을 것이다.때로는 서재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때로는 침실로 돌아와 그녀는 소파에서, 서준은 침대에서 자기도 했지만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수프를 가져다줬다.하지만 오늘은 아무리 기다려도 수프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었다.이런 그녀의 흔적에 서준은 괜히 짜증이 났다.이때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구 실장’이라는 글자를 보고 서준은 왠지 모르게 느낌이 좋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방금 D국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는데 HT그룹이 기부금액이 적다는 이유로 참가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합니다
유럽풍 건물의 호화로운 스위트룸, 최하연은 익숙한 듯 기지개를 펴고 일어났다.방 구조나 가구들은 그녀가 떠났을 때와 다름없었다.하연의 머리맡에는 따뜻한 차가 놓여 있었고, 침대 위에는 세련된 옷들이 여러 벌 놓여 있었다.코 끝이 시큰거렸다.B시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대우였다.“할아버지는 비행기 추락 사고 소식을 들으시고 네가 전화를 안 받아서 심정지가 오셨어, 아직도 병상에 누워계셔.”뒤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검은 옷을 입은 큰 키의 남자가 카리스마와 아우라를 풍기며 그녀의 침실에 나타났다.그는 B시로 하연을 데리러 온 오빠 최하민이었다.하민은 현재 최씨 가문의 경영을 이끌고 있고 항상 온화함을 유지하며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에 하연은 덜컥 겁이 나 울먹였다.“오빠, 많이 위중하신 거야...?”“심각한 정도는 아니야, 넌 네 몸이나 챙겨.”하민은 하연의 손을 잡아당기며 나가려는 그녀를 막았다.“지금 네 꼴을 봐, 이게 사람 얼굴이야? 예전에 한 약속 잊었어?”이 말을 들은 하연은 발걸음을 멈췄다.당연히 잊지 않았다.그녀는 할아버지에게 한서준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나아가 이혼까지 하게 된다면 영원히 최씨 가문에 남아 가업을 돕겠다고 약속했다.심지어 하연은 최씨 가문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4대 가문 중 하나인 나씨 가문과 결혼하겠다는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오빠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벌써 사람을 찾아 놓은 거야?’‘나씨 가문의 아들은 알아주는 바람둥이라고 하던데...’“근데 오빠 난 이혼한지도 얼마 안 됐고, 아직 재혼할 생각이 없어.”그녀는 거의 빌다시피 말했다.순간 하민은 표정을 풀더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겁주려고 한 말이었다.“넌 최씨 집안 딸이야. 우리 가문은 자식을 팔면서까지 집안을 키우진 않아 하지만, 할아버지가 완치하실 때까지는 내 옆에서 오른팔 역할을 똑똑히 해.”이 말의 의미는 D국에 있는 하민의 DS그룹에 들어
“미안해, 오빠가 늦었지?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이제야 들었지 뭐야. 시시하게 벌써 돌아온 거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전부 쓸데없는 걱정이었네!”이 목소리를 들은 최하연은 단번에 자신의 셋째 오빠인 최하성이라는 것을 알았다.사실 하성은 그녀의 친오빠가 아니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서 버려졌고 이후 최씨 가문에 입양되었다.하연은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방해하지 말고 잠시 앉아 있어.”3일이 지났지만 하연은 최하민의 비서인 이민영이 준 서류를 정리하지 못했다.전 세계 협력사로부터 하루에 백 통이 넘는 전화를 받다 보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하성은 그녀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소파에 앉아 말했다.“다 형이 시킨 거야? 이건 분명히 널 후계자로 키우려는 걸 거야. 안 쓰러지는 게 이상하지, 차라리 나랑 같이 콘서트 투어하자. 기분 좀 풀어.”“안 가.”하연은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지난 번에 일 기억 안 나? 오빠 팬들이 날 여자친구로 생각해서 얼마나 힘들었다고. 오빠가 조금만 늦게 왔으면 난 돌에 맞아 죽었어.”“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하성은 빙그레 웃으며 입술을 닦고 그녀를 바라봤다.“에이, 아닌 척하면서 오빠 생각은 하고 있었구나? 아직도 우리의 추억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다니 우리 하연이 최고!”...하연은 말문이 막혀 서류를 바라보며 눈을 굴렸다.“망상도 병이야.”하성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실은 진지한 제안이었다.“내 병은 너만 고칠 수 있어.”...불행 중 다행인 건 그녀가 이미 하성과의 이런 대화에 익숙해져 불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하성은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즐겨 불렀고, 지금은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스타였다.아무리 바빠도 늘 하연에게만큼은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그녀가 서준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했을 땐 예정된 콘서트를 그 자리에서 취소하고 B시로 날아가 서준과 싸우려 했으나 큰형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 주위에 좋은 남자가 널렸는데 왜
구동후는 굳은 얼굴로 다시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모두 통화 중이었다.그가 N번째로 전화를 걸자 한서준은 어두운 얼굴로 휴대폰을 뺏아 들었다.[정말 끈질기시군요. 구 실장님, 한서준 씨에게 이번 박람회와는 인연이 없다고 전해주세요.]최하연이 퉁명스럽게 얘기하자 전화기 너머에는 정적만이 맴돌았다.한참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야.”이 목소리를 들은 하연이 순간 목이 막혔다.서준은 그녀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HT그룹이 이번 기부금 금액을 600억에서 900억으로 늘렸는데, 이 정도면 이번 박람회에 참가할 자격이 있는 거 아닌가?”그 순간, 하연은 이미 최하성의 슈퍼카에 앉아 말했다.[한서준 씨, 지금 장난하는 것 같습니까?]방금 전 하성은 그녀가 바쁜 것을 보고도 하연을 끌고 D국의 야시장을 구경하자고 고집했고 그녀는 그런 오빠를 거절할 수 없어 차에 올라탔다.“900억이 부족하다면 2000억, 그래도 안 되면 글로벌 상업연합회에 보고해 그 사람들의 결정에 따를 거야. 네가 있는 그룹이 유일한 주최자는 아니니까.”[정말...]하연은 그의 몇 마디로 말문이 막혔고, 운전을 하고 있던 하성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하연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빼앗았다.[낯짝도 두껍네, 내 동생이랑 이혼한 주제에 왜 자꾸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거야? 뭐 재혼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말해두겠는데, 그런 거라면 마음속에 고이 접어 둬. 최하연은 내 거야. 참고로 우린 방도 잡았다고!]이 말을 끝으로 하성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하연에게 던졌다.하연은 완전히 충격을 받았다.“뭐? 방을 잡아?”“또 모르지? 이 말 한마디에 한서준은 지금 화가 머리 끝까지 났을 걸?”...전화가 끊긴 후 서준의 얼굴은 정말 보기 싫을 정도로 일그러졌다.동후는 그가 왜 그런지 몰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사표를 낸 건 분명히 최 비서님인데 왜 갑자기 HT그룹을 상대로 공격을 하는 거지? 그리고 어떻게 D국 DS그룹 수석 비서로 이직한 거지? 거긴 취업하기 어렵
“이거야.”민혜경은 손을 뻗었고, 심플하지만 빛을 받으면 독특한 빛을 반짝이는 반지가 그녀의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서준의 시선이 반지에 닿는 순간, 그는 이 반지가 결혼 3년 동안 최하연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었음을 기억했다.혜경의 손에서 반지를 빼앗은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반지 안쪽을 문질렀다.분명했다. 반지 안 쪽에는 ‘SJ&HY’이라는 이니셜도 새겨져 있었다.그는 하연이 반지를 끼워달라던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퉁명스럽게 ‘나중에 다시 얘기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3년 동안 한 번도 이 반지를 뺀 적이 없었다.혜경은 반지를 들고 생각에 잠긴 서준의 모습에 기분이 안 좋았지만 여전히 밝은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이렇게 소중한 걸 버리고 가다니, 서준 씨, 그 반지를 최 비서한테 다시 돌려줄 거야? 아니면...”“걔한테 다시 줘서 뭐해!”혜경의 말을 들은 이수애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평소에 그렇게 착한 척, 순진한 척, 척이란 척은 다 떨었으면서 이제야 등 돌리고 떠난 사람한테 줘서 뭐해? 우리가 무슨 꼴을 보려고!”“맞아,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부터 뭔가 쎄하다 했어.”옆에 있던 한서영이 말을 거들었다.그 말에 서준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고, 손에 있던 반지를 꽉 움켜잡았다.방금 전 통화에서 방을 잡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그 남자를 생각하면 기분은 더 나빠질 뿐이었다.서준은 왠지 모를 분노의 물결이 가슴에 솟구쳐 점점 더 짜증이 났다.‘최하연은 이미 남자가 생긴 거였네, 그러니까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지.’그는 미련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버려.”아들의 말에 이수애는 더욱 비꼬며 말했다.“그래, 잘 생각했어. 최하연이 두고 간 걸 만지다니, 어휴 재수 옴 붙었네!”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 쳤다.“맞아, 엄마 말 대로 다 버리고 다 새걸로 바꿔.”하지만 서준은 반응도 하지 않고 침실을 둘러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가정부에게 지시를 내렸다.“난 내 공간을 다른 사람이 함부로 손 대는
비행기 일등석 기내 안.한서준은 버리라고 말한 두 개의 반지를 꺼냈다.잠시 망설이던 그는 좀 더 두꺼운 반지를 골라 꼈다. 한 번도 껴본 적 없는 반지가 잰 것처럼 사이즈가 딱 맞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서준은 업무상의 이유로 결혼반지를 3년 동안 끼지 않았다.평범한 커플이라면 화를 내며 싸울 일이었지만, 싫은 소리 하나 없이 현명하고 이해심 많았던 최하연은 늘 그에게 관대했다.하지만 3년 후 서준과 이혼을 하고 다른 누구보다 더 매정하게 그를 떠나 결혼 반지조차 원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서준은 소리 없이 반지를 돌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온화하고 이해심이 많은 모습과 무자비하고 단호한 모습.’‘도대체 뭐가 진짜 네 모습이야?’비행기는 곳 D국에 도착했다.서준은 곧장 NW그룹 꼭대기 층에 있는 대표실로 향했다.나운석은 사슴 같은 눈을 가늘게 뜨고 컴퓨터와 프로젝트 서류를 번갈아 확인한 다음 서류를 내려놓고 진지하게 말했다.“서준아, 보니까 HT그룹의 참가 자격은 충분한 것 같네.”서준은 짙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역시 DS그룹이 막고 있었네.’운석이 물었다.“DS그룹 최하민 대표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기록을 보니까 그 사람이 HT그룹 참가를 거부했다고 하더라고.”서준의 눈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난 한 번도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 이번 박람회도 내 비서가 맡았고. 이전 보고서에는 별 탈 없이 서명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어.”“그럼 비서는 어디 있어? 비서한테 처리하라고 해.”운석은 시크하게 웃으며 쥐고 있던 펜을 돌렸다.서준은 그대로 고개를 떨군 채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만뒀어.”그 말에 운석은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그럼 그 비서 짓이네. 뒤에서 일을 다 망쳐놓고 회사를 떠난 게 분명해.”“입사할 때 근로계약서를 썼을 거 아니야, 뭐해, 고소하지 않고.”‘문제를 일으켜서 고소한다라...’서준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어두워졌다.이때 구동후는 대표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정략 결혼도 서로 방해되지 않는 이상 괜찮을 것 같은데?”한서준은 자기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넌 괜찮겠지만 난 아니거든?”“내 아내가 될 사람은 첫눈에 반할 정도로 미인이어야 해.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답고 높은 IQ, 모든 것을 압도하는 아우라를 가지고 있어야지 그 여자는 절대 내 취향이 아니야.”나운석은 손을 저었다.“넌 내가 아니라 이해하지 못할 거야.”이런 친구의 모습을 본 서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박람회로 화제를 돌렸다.“박람회는 네 선에서 처리할 수 있어?”운석은 당당하게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이번 박람회는 나씨 가문이랑 DS그룹이 공동으로 주최한 거야. 내가 책임지고 처리해 줄게. 나중에 밥이나 사.”그는 말을 하다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상대방의 응답이 없자 운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상대가 전화를 거절했다. 분명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화가 난 마음에 전화를 끊은 운석은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지며 난감했다. 조금전에 당당하게 말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호언장담했는데 이렇게 눈 앞에서 거절당하다니. 서준이가 나한테 부탁하는 일도 잘 없는데 창피하게 이게 뭐야.’그는 코를 긁적이며 미안한 듯 말했다.“많이 바쁜가 봐. 오랜만에 만났는데 환영회라도 열어야지, 박람회 건은 내가 나중에 얘기해 볼게.”서준은 운석을 따라 대표실 밖으로 나갔다.당연히 자신이 퇴짜 맞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운석이가 이 일을 해결할 가능성은 희박해. 하연이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어.’한편, VIP를 대상으로 한 맞춤 드레스 명품 매장 안.최하민은 고상하고 심플한 Y국산 소파에 앉아 있었다.하민은 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를 거절하고 사이즈를 재고 있는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한서준이 D국에 와서 나운석을 만났나 봐. 나랑 대화를 하고 싶대.”그는 동시에 하연의 표정에 집중했고, 여동생이 정말 그에게 마음이 없는지 고민했다.하지만
저녁, D국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클럽 파티룸에 정예나는 최하연을 위해 성대한 파티를 준비했다.분위기는 따뜻하고 활기찼으며 굉장히 압도적이었다.예나는 하연을 팔로 감싸며 무대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잔을 들었다.“자! 내 친구 하연이가 불행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난 걸 축하하면서 다들 건배!”“건배!”“축하해요!”하연은 손에 든 술을 마시고 예나의 손에 이끌려 사람들 속으로 끌려갔다.“하연아, 이 분은 천억 자산가 HB그룹의 아들이야.”“이분은 TS산업 사장님. 몸이 엄청 좋으셔.”하연은 와인잔을 들어 그들의 얼굴을 살펴보다 누군가와 부딪혔다.“눈은 장식이야? 발 밟혔잖아!”뒤에서 날카롭고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하연은 눈썹을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이 목소리는 그녀에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바로 한씨 가문의 뻔뻔한 시누이 한서영이었다.하연에게 큰소리 치는 모습에 예나는 그녀의 앞을 막고 섰다.“당신은 또 뭐야? 함부로 말하지 마!”새로 산 하이힐이 신경 쓰이던 서영은 고개를 들어 상대 중 한 명이 새언니였던 하연임을 깨닫고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어? 우리 오빠한테 버림받은 새언니잖아?”그녀는 이수애를 안심시키기 위해 민혜경과 함께 D국에 왔다.이 말을 들은 예나는 불같이 화가 났고 소매를 걷어붙이며 싸우려 들었지만 하연이 그녀를 막았다.“괜찮아, 상대하지 마.”과거에는 서준 때문에 그의 집안 사람들을 사랑했고, 당연히 서영에게 시누이 대접을 제대로 해줬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 서영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서영과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하연의 눈에 서영은 그럴 필요도 없었다.하연의 경멸의 눈빛이 서영을 지나 혜경에게 향했다.혜경은 헐렁한 디올 정장에 진주가 박힌 플랫 슈즈를 신고 누가 봐도 임산부 티가 났다.‘허!’‘여기서 뭐하는 거야? 애기는 생각 안 해?’혜경은 적대적인 눈으로 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서준 씨랑 최하연에 대해 이야기하러 친히 D국에 왔는데 당사자가 내 눈 앞에 있었네?’오늘은
조봉규의 말은 하나하나 송혜선의 마음을 쳤다. “정 안 되면, 우리도 그냥 확 뒤엎어.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잖아. 신발 신은 놈들이야 겁낼 게 많겠지만, 우린 맨발이야.”‘맞아... 지금이라도 안 붙잡으면, 우린 끝장이야.’송혜선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채로, 그녀는 곧장 부동건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동건은 송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틈조차 없었다. 부남준의 사건이 악화로 치닫고 있었다. 갓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고, 경찰 쪽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법 앞에선 아무리 부동건이라도 무력하군.’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이 부동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한 죄, 그건 부모의 몫이야...’그저 무기력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송혜선의 말은 부동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그는 오히려 조용히 갓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린 얼굴. 손가락 하나만 잡혀도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이 아이는... 내 마지막 기적일지도 몰라.’부동건은 딸을 안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의 복잡한 모든 것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딸아, 네 엄마랑 진짜 많이 닮았네. 크면 예쁘겠다... 아주.”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지윤이라고 이름 지었어. 복 많은 아이라고 하더라. 부씨 가문 첫 딸, 제대로 키울 거야. 우리 지윤이는, 아빠의 제일 소중한 딸이 될 거야.”‘그래... 남준이는 못 지켜도, 이 아이만큼은...’부동건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혜선의 속은 서늘했다.‘정작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닌데...’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를 부동건의 품에서 안아올렸다.“조심해요, 아직 작아서... 그렇게 막 들면 안 돼요.”부동건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동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밝은색으로 혈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새파랗게 질리더니, 순식간에 붉어졌다.‘이게 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조진숙은 그런 부동건의 반응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갑고 단호한 말투로 말을 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당신 입으로 한 말, 잊지 마.”철컥-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진숙은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남겨진 부동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딱 한 발, 그 한 걸음이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줄은 몰랐네...’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진숙의 마지막 말이 담고 있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그저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로 여긴 것이다.그 후 부동건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사 전문 변호사를 찾았고, 부남준의 사건을 맡겼다. 그것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소식을 들은 송혜선은 더 이상 산후조리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남준이는 부동건 당신 아들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이 저렇게 손 놓고 있는다고?”그녀에게 있어 부동건은 F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었다. 사람 하나 죽었든, 법을 어겼든, 그 모든 걸 덮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 정도 힘도 못 쓰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내가 그 옆에 왜 있었겠어?’그런데도 부동건은 변호사 하나 붙인 걸로 끝이라니. 송혜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돼.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겠어.”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조봉규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송혜선을 다독였다.“혜선아, 지금은 당신 몸이 먼저야. 다른 건 잠시 내려놔.”하지만 송혜선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남준이 내 아들이야.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 그 애랑 나, 이 지경이 되도록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몰라? 이제 와서 그냥 두라고?”송혜선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옆에서 어쩔 수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야?”불길한 예감이 부동건의 마음 한켠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는 조진숙을 매섭게 응시하며, 진실을 쫓아가려 했다.“빚은 갚아야 하고, 사람을 죽였으면 그에 대한 대가는 받아야지. 이번엔, 저승사자라도 그 애를 못 구해.”조진숙은 단도직입적으로 진실을 꺼내놓았다.“당신이 그 귀하디귀한 막내아들이, 고경수 딸을 죽였어. 그 교통사고, 전부 부남준이 계획한 일이야.”“지금은 모든 증거가 경찰 손에 들어갔고, 고경수 집안도 전부 알아버렸어. 딸을 먼저 보낸 부모가, 가만히 있겠어? 반드시 그 애한테서 정의의 심판을 받아내겠지.”부동건의 몸이 비틀거렸다.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충격이 가득했다.“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돼!”남준에 대한 부동건의 인식은 그저 ‘야망이 좀 있는 아들’일 뿐이었다. 부동건이 동남아시아 사업권을 남준에게 통째로 넘겨준 것도, 송혜선과 남준의 관계를 정식으로 인정해주려 했던 것도, 다 막내아들을 위해서였다. ‘내가 뭘 놓친 거지? 어떻게 그런 짓을...?’“그뿐만이 아냐. 약혼식 당일에 하연이를 납치했다는 사실도 몰랐지? 상혁이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으면, 최씨 가문의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망신당했을지 그건 알고 있어?”조진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동건의 표정이 무너졌다. ‘이건... 너무 심각해.’ 그 어떤 상황도 예측하지 못했던 부동건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미친 자식...!”부동건은 책상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흔들리는 가슴과 거칠어진 숨결은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하지만 조진숙은 그런 전남편을 보면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형사사건이야. 증거도 확실하고, 죄도 여러 개. 법대로라면,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당신의 막내아들 부남준이가 어떤 판결을 받게 될지...”부동건은 몇 걸음 뒷걸음치더니,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얼굴엔 절망과 피로가 교차하고 있었다. ‘이건...
하연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아직 남아 있는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나... 진짜로...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 그 말을 끝내기도 전에, 상혁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남자의 입맞춤은 조심스럽고 따뜻했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소중한 보물을 대하듯, 가볍고도 짧게... 그러나 그 안엔 너무도 많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상혁은 하연의 이마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바보야.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난 어떻게 하라고.”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진짜야. 네가 무너지면... 나도 다 망가질 거야. 세상 다 부숴버리고 싶어질지도 몰라.’ 하연은 상혁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눈을 바라보았다. “나도, 우리 아기도, 다 잘 지낼 거예요. 앞으로 우리 셋, 평생 함께할 거예요. 행복하게.” 하연의 말은 다짐처럼, 기도처럼 따뜻했다. ‘지금 이 순간, 이 사람과의 미래가 너무 선명하게 그려져.’ 상혁은 눈빛을 부드럽게 떨구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렇게 될 거야.” 바로 그때, 하연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녀는 당황한 듯 배를 살짝 문질렀다. “나랑 아기, 배고프대요...” 상혁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뭐 먹고 싶어?” 하연은 동그란 눈으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음... 갈비탕 칼국수.” “알겠어. 바로 해줄게.” 잠시 후, 주방에서 고소한 냄새와 함께 상혁이 갈비탕과 칼국수를 들고 나왔다. 하연은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고, 그릇을 보자 두 눈이 반짝였다. “맛 좀 봐봐.” 그는 젓가락을 건넸고, 하연은 한 입 먹고 바로 엄지를 들었다. “완전 맛있어요!” 상혁은 그녀 맞은편에 앉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천천히 먹어.” 두 사람의 시간은 너무나 평화롭고 따뜻했다. 하지만, 진동음이 연이어 울리며 그 고요를 깼다. 상혁은 휴대폰을 슬쩍 확인했다. 그
부동건은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송혜선의 갑작스러운 감정 폭발에 당황한 그는,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남준이...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송혜선의 눈물은 참을 새도 없이 주르륵 계속 흘러내렸다. “남준이가... 경찰에 잡혀갔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갈라졌고, 감정은 한층 더 격해졌다. “상혁이가 그랬어요. 그 애... 남준이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밀어붙였어요.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회장님.”“지금 남준이를 살릴 수 있는 사람... 오직 당신뿐이에요.” 그 말을 들은 부동건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상혁이가... 그렇게까지 했다고? 그 애가 남준이랑 무슨 마찰이라도 있었던 건가?’ 복잡한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그는 송혜선의 눈물을 조심스레 손수건으로 닦아줬다. “방금 출산했잖아. 지금은 몸조리가 먼저야.” 하지만 송혜선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회장님... 설마... 정말 보고만 계시겠다는 거예요?” 부동건은 깊게 주름 잡힌 미간으로 그녀의 손을 덮었다. “남준이는 내 아들이야. 내가 내 아들을 어떻게 외면하겠어?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너야. 산후조리는 반드시 잘해야 돼. 알겠지?” “회장님... 제발 이번일 진심을 다해서 신경 써 주셔야 해요. 이번 일, 그냥 덮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송혜선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리고... 구치소라는 데가 어떤 곳인지 회장님도 아시잖아요. 남준이가 거기 있는 거 생각만 해도... 너무 괴로워요.” 부동건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고요히 말했다. “일단 몸부터 회복해. 남준이 일은 내가 변호사 붙여서 알아볼게.” “회장님...” 그녀가 더 말하려 하자, 부동건은 단호한 눈빛으로 그녀를 제지했다. 송혜선은 결국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어. 무슨 생각을 하든, 일단은 고분고분 따라야 해.’ “알겠
조진숙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겨우 이 정도에 무너지다니, 송혜선이란 여자... 대단한 척하더니, 결국 그릇이 딱 거기까지였네.” 상혁은 다리를 꼬고 소파에 느긋하게 앉은 채, 손에 쥔 유리잔을 살짝 기울였다. 입가에는 장난스럽게 번지는 미소. “애가 나올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네요.” 원신민이 옆에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딸이라고 합니다. 근데 아무래도 조산이라 아이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고... 지금은 신생아 중환자실에 들어갔습니다. 회장님께서 그 얘기 듣고 병원으로 바로 가셨고요.” 잠시 말을 멈췄던 원신민은 우려 섞인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회장님이 나이 들어 얻은 딸이라... 기뻐하실 거예요. 그래서 혹시... 송 여사님 쪽에서 이 기회를 이용해 부남준 상무님 건에 회장님이 개입하려 들까 봐...” ‘그건 정말 최악의 시나리오다.’ 부동건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충분히 사건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무게가 생긴다. “그 인간이 감히!” 조진숙이 단번에 말을 끊었다. “부동건이 뭐 어쩌겠다는 거야? 부남준이 살리겠다고? 웃기지 마. 내가 가만있을 것 같아? 최씨 가문은 또 어쩔 건데? 부씨 가문 어른들 앞에서도 얼굴 못 들게 될걸?” 그녀의 말투는 단호했고, 눈빛은 날카로웠다. “부동건이 어떤 사람인지 나도 알아. 손익 따지지 않는 짓은 절대 안 해. 법에 걸린 일이야, 이건. 감정 따위로 움직일 사람 아냐.” ‘이번 일, 감싸면 오히려 회장님이 무너지게 돼.’ 상혁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잔을 내려놓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래. 딸 낳은 건 축하할 일이긴 하지.” 그러곤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근데 말이지... 연기를 오래 하다 보면, 진짜 자기 삶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송혜선... 넌 지금 연기 중인 걸까, 진심인 걸까?’ 그 말에 조진숙의 눈이 번뜩였다. “맞아, 나도 까먹고 있었네. 애까지 낳았으니 이제 덮어둔 패
다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송혜선을 바라보며, 낯설고 멀게만 느꼈다. ‘예전엔 그래도 어머니를 믿고 따랐었는데... 이젠 하나도 모르겠어.’ 이미 상황은 너무 많이 와버렸다. 다영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 정말... 정말 저희 아버지를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간절한 눈빛에 절박한 마음이 묻어났다. 송혜선은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다영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 “걱정 마.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너희 아버지, 꼭 너랑 다시 만나게 해줄게.” 그 말에 다영의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래... 아빠만 돌아올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 처음엔 경계하듯 굳어 있던 다영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다영이 나가자마자, 송혜선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졌다. “부상혁 쪽, 더 철저히 감시해.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바로 보고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관에서 조봉규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송혜선은 인상을 찌푸렸다.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 안 그래도 정신이 사나운데. 좀 침착하게 다닐 수는 없겠어? 이게 뭐 하는 꼴이야.” 하지만 조봉규는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남준이... 큰일 났어.” “뭐라고?” 송혜선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갑작스러운 긴장에, 배가 강하게 쑤시는 듯 아팠다. 하지만 그럴 겨를도 없었다. 배를 감싸쥔 채 조봉규 앞까지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야? 뭐가 어떻게? 남준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거야?!” 조봉규는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도 자세한 상황은 아직... 근데, 이번 일로 최씨 가문이랑 부씨 가문이 전부 움직였어. 남준이... 지금 경찰에 체포됐어.” 송혜선은 그 말의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조봉규가 재빠르게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최씨 가문은 F국에서도 영향력 있는 집안이잖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혁이 안방에서 나왔다. 최씨 가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상혁에게 쏠렸다. 그 누구도 상혁을 탓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하연이 이런 일을 겪은 이상, 상혁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상혁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제가 하연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그 말에 최동신의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상혁아, 이 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냐?”최동신은 단도직입적으로 상혁에게 말을 했다. 최씨와 부씨 가문의 오래된 관계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 사태를 이렇게 넘길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최씨 가문은 아주 힘이 있기 때문에 부남준 하나쯤, 제거하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나 부남준 역시 부씨 가문의 핏줄이었다. 이 문제는, 부씨 가문 내부에서 해결하는 것이 도리였다. 그래야만 두 가문 간의 균열을 막을 수 있었다. 상혁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그 눈빛은 확고했고, 더 이상 송혜선과 부남준에게는 그 어떤 자비도 남지 않았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그러나 최동신은 여전히 꺼림칙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네 아버지 가... 가만히 있겠니?”부동건이 송혜선을 얼마나 감싸고 있는지는 모두 알고 있었다. 게다가 송혜선은 지금 임신 중이었고, 남준 역시 ‘사생아’긴 하지만, 부동건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부동건이 직접 나설 경우, 상황은 더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하지만 상혁은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어떤 타협도, 그 어떤 방해도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기세였다. ‘이번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 “이번 일은... 누구도 남준이 그 녀석을 구할 수 없습니다.”...최씨 가문은 사태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송혜선은 하연이 납치됐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약혼식이 끝난 뒤, 그녀는
하성의 움직임은 빠르고, 날카로우며, 정확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대로 남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그 순간, 하연의 몸이 허공에 떠오르듯 중심을 잃었다. 반응할 틈도 없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하지만 순간, 상혁이 재빠르게 하연을 품에 안았다.익숙한 온기에 하연은 잠시 얼어붙었다. 다음 순간, 상혁은 마치 유리인형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녀를 꼭 안았다.“괜찮아?”콧등이 시큰해진 하연은 남자의 품에 안기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응... 괜찮아요...”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남준은 금세 제압당했고, 경찰이 빠르게 그를 둘러쌌다.한 경찰관이 체포영장을 꺼내 들며 선언했다. “부남준 씨, 살인 혐의로 체포합니다.”이내 수갑이 남준의 손목에 채워졌다.“살인이라니? 말도 안 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누굴 죽였다는 거야! 부상혁, 대체 뭘 꾸미는 거야!”상혁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 상황에서도 발뺌한다고?”“하!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참 능숙해. 네 특기였다는 걸 깜빡했네?”그런 남준을 바라보며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어올리며 비웃었다. “허징인 모자를 없애고 증거를 없앤다고 해서, 네 죄가 덮일 줄 알았냐?”그 말에 남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난 모른다고 했잖아!”“끝까지 입만 살아서는...” 상혁은 더는 말이 없었고, 곧장 하연을 번쩍 안아 올렸다.“법은 피할 수 없다. 하고 싶은 말은 법정에서 해.”말을 끝낸 그는 하연을 안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남준은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앉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상무님... 저 감옥 가기 싫어요...”황연지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그녀는 다급히 외쳤다. 그러다 상혁의 뒷모습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지만, 경찰이 그녀를 막아섰다.“부 대표님! 제가 몇 년을 부 대표님 옆에서 헌신했는지 아시죠? 제발... 이번 한 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