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략 결혼도 서로 방해되지 않는 이상 괜찮을 것 같은데?”한서준은 자기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넌 괜찮겠지만 난 아니거든?”“내 아내가 될 사람은 첫눈에 반할 정도로 미인이어야 해.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답고 높은 IQ, 모든 것을 압도하는 아우라를 가지고 있어야지 그 여자는 절대 내 취향이 아니야.”나운석은 손을 저었다.“넌 내가 아니라 이해하지 못할 거야.”이런 친구의 모습을 본 서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박람회로 화제를 돌렸다.“박람회는 네 선에서 처리할 수 있어?”운석은 당당하게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이번 박람회는 나씨 가문이랑 DS그룹이 공동으로 주최한 거야. 내가 책임지고 처리해 줄게. 나중에 밥이나 사.”그는 말을 하다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상대방의 응답이 없자 운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상대가 전화를 거절했다. 분명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화가 난 마음에 전화를 끊은 운석은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지며 난감했다. 조금전에 당당하게 말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호언장담했는데 이렇게 눈 앞에서 거절당하다니. 서준이가 나한테 부탁하는 일도 잘 없는데 창피하게 이게 뭐야.’그는 코를 긁적이며 미안한 듯 말했다.“많이 바쁜가 봐. 오랜만에 만났는데 환영회라도 열어야지, 박람회 건은 내가 나중에 얘기해 볼게.”서준은 운석을 따라 대표실 밖으로 나갔다.당연히 자신이 퇴짜 맞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운석이가 이 일을 해결할 가능성은 희박해. 하연이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어.’한편, VIP를 대상으로 한 맞춤 드레스 명품 매장 안.최하민은 고상하고 심플한 Y국산 소파에 앉아 있었다.하민은 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를 거절하고 사이즈를 재고 있는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한서준이 D국에 와서 나운석을 만났나 봐. 나랑 대화를 하고 싶대.”그는 동시에 하연의 표정에 집중했고, 여동생이 정말 그에게 마음이 없는지 고민했다.하지만
저녁, D국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클럽 파티룸에 정예나는 최하연을 위해 성대한 파티를 준비했다.분위기는 따뜻하고 활기찼으며 굉장히 압도적이었다.예나는 하연을 팔로 감싸며 무대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잔을 들었다.“자! 내 친구 하연이가 불행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난 걸 축하하면서 다들 건배!”“건배!”“축하해요!”하연은 손에 든 술을 마시고 예나의 손에 이끌려 사람들 속으로 끌려갔다.“하연아, 이 분은 천억 자산가 HB그룹의 아들이야.”“이분은 TS산업 사장님. 몸이 엄청 좋으셔.”하연은 와인잔을 들어 그들의 얼굴을 살펴보다 누군가와 부딪혔다.“눈은 장식이야? 발 밟혔잖아!”뒤에서 날카롭고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하연은 눈썹을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이 목소리는 그녀에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바로 한씨 가문의 뻔뻔한 시누이 한서영이었다.하연에게 큰소리 치는 모습에 예나는 그녀의 앞을 막고 섰다.“당신은 또 뭐야? 함부로 말하지 마!”새로 산 하이힐이 신경 쓰이던 서영은 고개를 들어 상대 중 한 명이 새언니였던 하연임을 깨닫고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어? 우리 오빠한테 버림받은 새언니잖아?”그녀는 이수애를 안심시키기 위해 민혜경과 함께 D국에 왔다.이 말을 들은 예나는 불같이 화가 났고 소매를 걷어붙이며 싸우려 들었지만 하연이 그녀를 막았다.“괜찮아, 상대하지 마.”과거에는 서준 때문에 그의 집안 사람들을 사랑했고, 당연히 서영에게 시누이 대접을 제대로 해줬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 서영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서영과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하연의 눈에 서영은 그럴 필요도 없었다.하연의 경멸의 눈빛이 서영을 지나 혜경에게 향했다.혜경은 헐렁한 디올 정장에 진주가 박힌 플랫 슈즈를 신고 누가 봐도 임산부 티가 났다.‘허!’‘여기서 뭐하는 거야? 애기는 생각 안 해?’혜경은 적대적인 눈으로 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서준 씨랑 최하연에 대해 이야기하러 친히 D국에 왔는데 당사자가 내 눈 앞에 있었네?’오늘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싸우는 한서영의 행동은 너무 볼품없어 보였고, 민혜경은 본능적으로 그녀와 거리를 두고 뒤로 물러섰다.최하연은 잔에 담긴 샴페인을 흔들고 다시 두 사람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무시하는 눈빛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뭐야, 시누이가 곤경에 처했는데 예비 새언니로서 체면도 없이 도망가려는 거예요?”“지금 뭐하는 거야!”어디선가 고함이 터져 나왔다.사람들은 고함 소리가 나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향했고, 검은 정장을 입은 한서준이 어둡고 서늘한 눈빛으로 강력한 아우라를 풍기며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한눈에 하연을 발견했다.그녀가 떠난 지 얼마 안 됐지만 한씨 저택에 있을 때의 초췌한 모습보다는 조금 더 통통해져 보기 좋아 보였다.빛의 한가운데 서서 눈처럼 고운 피부가 돋보이는 맞춤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딴 사람 같아 그의 시선을 끌어당겼다.서영은 오빠가 온 것을 보자마자 기세등등해지며 하연과 장예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오빠, 저 사람들이 날 괴롭혔어.”이미 화장이 다 지워진 서영의 모습과 쩔쩔매고 있는 민혜경을 본 서준이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현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이렇게 여럿이 한 명을 괴롭힌다고? 비겁하네.”“편할 대로 생각하세요.”하연은 그와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았고,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당신 동생... 오빠인 서준 씨가 더 잘 알겠죠.”그녀는 걸리는 게 없었다. 악역이 되어도 상관없었다.예나는 경멸하며 말을 꺼냈다.“빨리 동생을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주세요. 우리 장씨 가문은 한씨 가문을 초대한 적 없습니다!”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너 나 하지 않고 화를 내며 말했다.“뭐야! 저 여자가 말로 사람을 슬슬 긁더만!”“맞아! 쓸데없는 사람이라는 둥 못된 말을 스스럼없이 뱉던데, 우리가 그런 사람 편을 왜 들어야 돼?”“행동은 경찰서에 끌려갈 것처럼 하더니 사람들 몇 마디에 움찔하더라, 완전 웃겨.”서준은 눈살을 찌푸
한서준은 최하연의 이런 행동이 처음이라 검은 눈동자가 극도로 차가워졌다. 이혼 소송 이후 그녀의 행동은 통제할 수 없었고 고삐 풀린 야생마 같았다.“임산부를 때릴 정도로 악한 사람인 줄은 몰랐어, 내가 너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네.”하연은 눈을 살짝 치켜뜨며 태연하게 말했다.“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설명 같은 건 필요 없었다.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이제 다 떠들었어? 그럼 여기서 사라질 때도 되지 않았나?”“최하연, 말 조심해.”서준은 얼굴이 어두워지고 눈빛이 차가워졌다.“뭐? 내가 아직도 굽신거리며 사과할 거라 생각하는 거야?”하연은 웃으며 비꼬았다.“아직도 꿈에서 안 깼나 봐?”“서준 씨, 나 아파...”귓가를 파고드는 울먹이는 소리에 서준은 품에 안긴 혜경을 바라봤다.붉게 부어오른 얼굴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입술은 창백했다. 남아 있는 힘이 없어 보이는 그녀는 손으로 배를 감싸 안고 곧 기절할 것 같았다.서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병원으로 가자.”그는 허리를 숙여 혜경을 안아 올렸고, 사람들은 곧바로 길을 터주었다.몇 발자국 걷다 멈춰선 그는 하연을 향해 말했다.“아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전부 책임을 물을 거니 그렇게 알아!”“뺨 한 대 맞았다고 애가 어떻게 되겠어? 종잇장도 아니고.”예나는 하연의 옆에 서서 이성을 잃고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부었다.“생각이 있으면 안 가겠지. 누가 누굴 무서워하겠어? 우리가 고개 숙일 것 같아?”“저런 사람들 때문에 감정 낭비하지 마.”사람들과 함께 떠나는 서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연의 얼굴에는 점점 미소가 사라졌다.예나는 어깨 너머로 말했다.“하연아, 아직도 저 머저리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하연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을 거야.”‘정말 3년 동안... 난 눈이 멀었나 봐.’‘저런 허접한 여우짓에 넘어가다니.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호텔로 돌아가는 길, 롤스로이스 차내는 조용했다.서준은 잠든 혜경을
휴대폰에는 평소처럼 차가운 말투로 메시지가 와 있었다.[오늘은 서영이 잘못이야. 내가 사과할 테니까 너도 서영이한테 사과해.]최하연은 화가나 모진 말을 뱉었다.“이게 사과라고 보낸 거야? 미친놈!”소리를 지른 그녀는 서준을 차단한 채 휴대폰을 옆으로 던졌다.정예나는 하연을 보며 은밀한 미소를 보냈다.“하연아, 모레 너네 하민 오빠랑 경매장에 갈 거야?”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가기로 했어.”“그럼 내가 옷을 골라줄 테니까 네 럭셔리한 드레스룸을 공유해 줘.”“좋아, 안에 있는 건 뭐든 골라 입어.”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나서 그녀는 드레스룸의 문을 열었다.예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우와.”“하연아, B시에 있는 우리 브랜드 숍보다 넓잖아!”3층으로 이루어진 드레스룸에는 여러 주요 명품 브랜드의 옷들과 악세서리로 가득했다.하연이 D국으로 돌아온 후 최하민은 드레스룸을 새로 꾸며놓으라고 지시했고, 이제 막 완성된 상태였다.“내 드레스룸도 나름 넓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야!”예나는 화려한 드레스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감탄을 금치 못했다.하연은 아무렇지 않게 드레스를 집어 그녀의 몸에 가져다 댔다.“괜찮네, 안 맞으면 다시 맞춰줄게.”‘그땐 어려서 몰랐는데, 상속받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그녀가 말하던 그때 집사인 장창석이 문을 두드렸다.두 명의 하녀가 그의 뒤를 따라 드레스를 가득 들고 나타났다.장창석은 정중하게 말했다.“막내 아가씨, 프라다에서 이번 시즌 수제 맞춤 드레스를 보내왔습니다. 시장에 선보이기 전에 먼저 고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 거기 두시면 돼요.”하연은 예나를 끌어당기며 담대하게 말했다.“원하는 대로 골라 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보내달라고 할 게.”예나는 하연의 절친이었다.예나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났고, 그녀의 얼굴을 잡고 볼에 뽀뽀세례를 했다.“하연아, 역시 너 밖에 없어.”드레스룸은 웃음 소리로 가득했다.롤스로이스를 타고 있던
오늘 최하연은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다.윤기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그녀의 얼굴은 화사하고 아름다웠으며, 출시하지 않은 고급스러운 핸드메이드 맞춤 드레스는 그녀를 더욱 우아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치명적인 그녀의 외모에 사람들은 하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그녀는 천천히 서준에게 발걸음을 옮겼다.서준의 눈은 복잡해 보였고, 온화하고 얌전한 모습에서 화려하고 도도한 모습으로 바뀐 그녀의 모습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정말 변했어.’서준의 기억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한 대표는 정말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네요.”서준에게 다가간 하연은 붉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눈에 조롱의 빛이 가득 담겼다.“대표님은 어디 있어?”서준이 차갑게 물었다.하연은 비웃으며 말했다.“못 봤어? 나 혼자 와서 실망했나?”기분 나쁜 메시지를 받은 하연은 오빠에게 도움을 청했다.‘오빠를 만나고 싶으면 오빠 의사부터 물어야지!’자신의 의도를 짐작한 것 같은 하연의 조롱에 서준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경매 주최자는 곧바로 웃으며 하연을 맞이했다.“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하연은 서준을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그녀의 화려한 모습을 본 서영은 서준에게 귓속말했다.“오빠, 내 말이 맞지? 어떻게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될 수 있었겠어?”서준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 말했다.“닥쳐.”화가 난 것 같은 오빠의 모습을 본 서영은 화가 났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혜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서준에게 말했다.“들어가자.”30분 후, 경매가 시작됐다.지적이고 우아한 여자 경매사가 경매품을 소개했다.“얼음 종 에메랄드 팔찌, 시작가 4천만원부터 시작합니다!”빛을 받은 팔찌는 섬세하고 투명한 느낌을 줬다.하연은 곧 서준의 할머니인 강영숙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손을 들어 제시했다.“6천.”“자, 6천만원 나왔습니다.”뒷줄에 있던 혜경은
직원은 재빠른 행동으로 팔찌를 가져와 민혜경이 수표를 작성할 때까지 기다렸다.경매에 참가한 사람은 모두 자신의 회사를 보고했고, 수표를 빼돌릴 시 경매장으로부터 고소를 당할 수 있었다.혜경은 어쩔 수 없이 수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경매장 뒷좌석.나운석의 사슴 같은 눈에는 미소가 가득했다.“오늘 무슨 일이래? 호구도 잡고.”어머니 선물로 산 이 팔찌는 기껏해야 5천만원이었지만 보석상한테 사기당해 4천만원의 바가지를 썼고, 그의 어머니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경매장에 가져간 것이다.오직 운석의 시선은 원한을 품고 가격을 제시하던 아름다운 여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누구나 예쁜 것에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아름다움이 배가 된 하연에게는 어떻겠는가?운석의 관심은 모조리 하연에게 향했다.“왜 이렇게 낯이 익지? 누군지 알아요?”운석은 옆에 있는 HB그룹 사장에게 물었다.“최하연이라고 들었어요.”“최하연?”운석이 그녀의 이름을 곱씹자 문득 못난이 최씨 집안 막내 딸이 스쳐 지나갔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안 돼…….’‘그럴 리 없어!’그는 눈을 비비며 하연의 아름다운 옆모습을 재차 확인했고 확신했다.“동명이인 일 거야.”“이번 상품은 E국 앤틱 회중시계입니다, 시작가 9억부터 시작합니다!”하연은 그 회중시계가 최하민이 알려준 시계임을 눈치채고 손을 들어 입찰했다.“11억!”“12억!”……이번 경매는 혜경과 엉뚱한 쟁탈전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하연은 13억에 회중시계를 손에 넣었다.혜경은 화가 나고 억울했지만, 하연이 또 그런 속임수를 쓸까 봐 감히 도전하지 못했다.그녀의 계좌에는 충분한 돈이 없었다.혜경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긋했다.“서준 씨, 안 본 사이에 하연 씨는 정말 딴 사람이 됐네.”“서준 씨랑 이혼할 때는 한 푼도 받지 않더니, 며칠 만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13억으로 회중시계를 사다니, 놀랄 정도로 손이 커졌네.”그녀는 서준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하연 씨 DS그룹 대표 수석 비서로 이직했는
“내가 서준 씨한테 말해야 할 필요가 있나?”최하연은 여유롭게 일어나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한서준은 그들이 이미 이혼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하연에게 물어볼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하연의 몸과 마음은 한때 자신의 것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남자의 것이라는 생각에 미간이 찌푸려지고 그 조차도 알 수 없는 소유욕이 마음 속에 솟아올랐다.“이혼한 진짜 이유가 뭐야?”서준은 우울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하연은 붉은 입술로 헛웃음을 쳤다.“오랜 만에 만나서 이런 걸 묻는다고? 재밌어?”그녀는 서준의 어두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진짜 이유는 단 하나야, 난 참을 만큼 참았어!”“도대체 뭐가 불만인데!”“지난 3년 동안 넌 우리 집에서 먹고 자는 데 아무 문제없었어, 게다가 내 옆에서도 높은 직책을 맡았는데 지금 네가 사는 삶과 그때의 삶이 뭐가 다른데?”서준은 이혼 전날 밤 하연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잠시 말문이 막혔다.“부부관계를 안 해서 그래?”그는 마음 속 상처 때문에 하연과 스킨십을 하지 않았다. 일찍이 그녀는 잠결에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불렀고 자존심 때문에 그녀와 부부관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이 말을 들은 하연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도대체 머리에 뭐가 든 거야?”“그럼 지금 해줄게!”서준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하연 얼굴을 잡고 키스를 했다.짝!하연은 있는 힘껏 그를 밀었고 세차게 그의 뺨을 때렸다.뺨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고 서준은 혀를 깨물었다.그의 눈은 이글거렸고 눈 앞에 있던 하연은 점점 더 당황했다.하연은 너무 화가 나 눈물이 고였다.‘머저리 같은 놈, 내가 고작 그거 때문에 이혼한 것 같아?’‘내가 도대체 저런 사람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 참고 살았던 거야?’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말했다.“3년 동안 보고 싶은 것만 봤으니 모르겠지. 눈 뜬 장님이랑 뭐가 달라!”하연은 서늘한 눈을 내리깔고 말을 덧붙였다.“아니지, 눈 먼 사람은 나야. 바보같이 당신이 나한테 감동하고 사랑에 빠질
상혁은 하연을 단숨에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밀착했다. “대범하다는 건 과장이야. 그저 한 번의 신세를 갚았을 뿐이야.” 하연은 그의 말에 질투가 더 짙어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톡톡 찌르며 따져 물었다. “어떤 일이길래 부 대표님이 그렇게 큰 손을 쓰셨나요?” 전진그룹의 프로젝트는 최소 몇억에 달하는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었다. 하연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니면, 부 대표님이 나한테 감추고 싶은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건가요?” 상혁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그녀의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네 작은 머릿속엔 도대체 무슨 생각이 그렇게 가득하니?” 상혁의 큰 손은 자연스럽게 하연의 어깨로 내려왔다. 그는 몸을 숙이며 하연의 시선을 마주했다. 깊고 진지한 눈동자 속에 하연의 모습만 담겨 있었다. 상혁은 하연을 장난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알아? 하연아, 너 지금 엄청 귀엽다.” 하지만 하연은 여전히 진지했다. “부 대표님, 화제를 돌리지 말아요.” “응.”상혁은 가볍게 대답하며 그녀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는 그 모임에서 들었던 말이 하연의 귀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주슬기에게 이익을 준 건, 단지 주슬기에게 빚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이 세상에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른 얽매임이 없다는 걸 뜻하지.” 잠시 말을 멈춘 후, 그는 덧붙였다. “하지만, 하연아. 오늘 너의 모습은 정말 마음에 들었어.” 하연이 질투를 하고, 다른 여자를 신경 쓰는 모습...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상혁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하연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상혁의 손등을 꼬집으며 말했다. “부 대표님, 오해하지 말아요. 그냥 우리 아이 아빠가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으읏!” 하연의 말이 끝나
“마침 ZT그룹의 서류가 도착했네요. 최 사장님, 함께 올라가시죠.” 연지의 말에 하연은 자연스럽게 주의를 기울였다. “DL그룹이 ZT그룹과도 협력하고 있나요?” 연지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원래는 없었죠.” 바로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연지는 공손하게 손짓하며 말했다. “먼저 타시죠.” 하연은 앞장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연지는 뒤따라 옆에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올해 사업 조정으로 ZT그룹과 협력할 기회가 조금 생겼습니다. 게다가 부 대표님께서 ZT그룹을 꽤 신경 써 주신 덕에, 자연스레 왕래가 잦아졌죠.” 하연은 시선을 고정한 채 연지의 말 속에 숨은 의미를 느꼈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호기심 섞인 말투로 물었다. “오, 그게 무슨 뜻이죠?” 연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연말은 늘 우리 회사에서 가장 바쁜 시기인데, 최근 부대표님께서 전진그룹의 프로젝트를 모두 ZT그룹에 넘기셨거든요. 덕분에 이번 연말은 꽤나 한가해졌어요. 전진그룹이라면 바로 무역협회 전영철 회장님 회사잖아요.”하연은 연지의 말 속에서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전진그룹은 F국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으로, 그 기반은 단단했고 산하 프로젝트도 방대했다. 그런 이익을 고스란히 주슬기에게 넘겼다니, 충분히 의심할 만했다. 하연의 마음속에 의혹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평정을 유지하며 연지를 흘깃 바라봤다. 연지가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건 분명 의도가 있었다. 하연은 차갑게 눈을 좁히며 물었다. “그 말은, DL그룹이 그 프로젝트를 전부 ZT그룹에 넘겼다는 거네요?” 연지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런데 부 대표님께서 이 일을 말씀 안 하셨나 봐요?” 하연은 옅게 미소 지으며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이렇게 말해 줬으니, 덕분에 알게 됐네요.” 연지는 속이 뜨끔하며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급히 변
하성은 핸드폰 화면을 힐끗 보더니, 온통 빨갛게 물든 주식 그래프를 보고는 손을 뻗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었다. “우리 하연이, 이제 완전 큰 부자가 됐네.” 하연은 활짝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다 오빠 덕분이에요. 역시 든든한 나무 밑에 있어야 시원하게 쉴 수 있는 거죠.” 하성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눈에 애정 어린 미소를 띄웠다. “하연이 네가 기댈 수 있는 나무가 될 수 있어서 오히려 내가 영광이지.” 하연은 문득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오빠가 있어서 참 좋아요.” 하성은 책상 위의 서류를 들어 흔들며 웃었다. “그럼, 최 사장님. 이 프로젝트, 이제 나한테 넘겨줄 준비는 됐습니까?” 하연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네, 오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업무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하성은 업무를 빠르게 익혔다. 그의 예리한 감각과 타고난 사업적 통찰력은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심지어 정태훈도 하성의 능력에 감탄하며 연신 칭찬했다. “하성 도련님, 처음부터 연예계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렇게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우리 최 사장님보다 더 대단한 걸요.” 하성은 장난스레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정 실장까지 이런 입발린 소리를 하다니, 어울리지 않네.” 태훈은 황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진심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는 하성을 한번, 하연을 한번 번갈아 보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최씨 가문 분들은 모두 사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십니다. 하민 도련님이든, 하연 아가씨든, 지금의 하성 도련님까지, 모두 뛰어난 경영 실력을 가지셨죠. DS그룹은 누구 손에 맡겨도 틀림없이 번창할 겁니다.” 하연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들었죠, 오빠? 이제 회사는 오빠한테 맡기고, 저는 잠시 쉬어야겠어요.” 하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지금 너는 우리 집안
“오빠, 정말 나한테도 숨길 거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잖아요!” 하연은 점점 초조해졌다.하성은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다 지난 일이야.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거잖아.”“하지만...” 하연이 더 말하려 하자, 하성은 서둘러 동생의 말을 잘랐다. 그는 손으로 하연의 어깨를 주무르며 화해를 구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됐어. 하연아, 오빠 이제 막 돌아왔는데 좀 쉬게 해 줘. 내일이면 회사에 나가야 하는데, 남은 마지막 자유 시간마저 빼앗을 거야?”하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알았어요. 더 이상 묻지 않을게요. 다만, 후회하지 않으면 좋겠어요.”하성은 입가를 살짝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응, 알았어. 난 할아버지랑 좀 있다가 갈게.”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바로 몸을 돌려 떠났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떠나는 하성의 뒷모습을 보며, 하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꺼내 신가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가흔에게도 아무런 답장이 오지 않았다. 마치 그 메시지가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듯했다.다음 날. 하성이 DS그룹을 맡게 된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퍼지며 많은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이른 아침부터 회사 입구에는 여러 매체의 기자들이 몰려들어 첫 번째 단독 기사를 얻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서여은이 하연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하성 오빠가 DS그룹을 맡는다는 소문 들었는데, 진짜야?] 하연은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답장을 보냈다. [응, 맞아.] 여은은 깜짝 놀라며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왜 갑자기 하성 오빠가 DS그룹을 맡아? 그리고 너는? 혹시 너는 상혁 오빠랑 사랑에 빠져서 정신없는 거 아니야?]하연은 당황하며 짧게 답했다. [나 임신했어.]순간 채팅창에는 감탄사로 가득 찬 메시지가 연달아 올라왔다. [!!!] [하연아, 너 진짜 너무 빠르잖아!]하연이 답장을 쓰기도 전에 여은
손이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의 하늘은 이미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눈부신 석양이 한 폭의 그림처럼 창유리를 통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는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이현을 발견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상무님, 깨어나셨습니까?”이현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오늘 고생 많았어.”그 말에 비서는 마치 큰 짐을 내려놓은 듯 숨을 내쉬며 미소 지었다. “전 괜찮습니다. 상무님, 그리고 이젠 정말 건강 좀 생각하세요. 그러다가 큰일 나십니다. 더 쉬세요.”이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고 있어.”“사장님,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목마르시죠? 물 한 잔 가져오겠습니다.” 비서는 그렇게 말하며 유리잔에 따뜻한 물을 따라 내밀었다. “오늘 하루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으니 제가 도시락 하나 포장해 올게요.”이현이 막 말리려 했지만, 이미 비서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장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하연은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연말 전까지 모든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이젠 홀몸도 아닌데. 몸도 챙기고 뱃속의 아이도 생각해야지.” 최동신은 진심 어린 충고를 했지만, 하연은 자기 할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저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지금 큰오빠, 새언니 달콤한 신혼이잖아요. 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좀 보낼 수 있게 큰 오빠 몫까지 제가 해야죠.”최동신은 하연의 이 말에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최 노인에게는 손자, 손녀 모두 소중했기 때문이다. 하민이 이제 막 신혼을 맞이했으니 당연히 더 신경 써줘야 했다.“정 실장이 있잖아. 정 실장이 네 옆에서 오래 도왔으니. 정 실장한테 맡기면 되지, 네가 다 할 필요는 없잖아.” 그 말의 하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하
그 순간, 비서는 이현에게 팔을 잡히며 벽 쪽으로 강하게 밀려 들어갔다. 비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이현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걸 비서도 알고 있었다. ‘마음의 병은 결국 마음의 약으로 치료해야 한다는데, 최 사장님 이야말로 그 약이 아닌가? 그런데 상무님은 왜 자꾸 피하려고만 하는 걸까?’비서는 이현이 하연을 피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계속 하연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현의 마음속 병은 마음의 약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마음의 약이 바로 최하연이라는 사실을...그래서 비서도 이현이 왜 굳이 숨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저 멀리, 하연은 상혁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눈에 띄는 잘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가 함께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껏 끌었다. 두 사람은 오늘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받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최하연 님, 초음파실은 이쪽입니다.” 간호사의 안내를 따라 하연은 초음파실로 들어갔고, 상혁은 밖에서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연이 초음파실에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한 장의 초음파 사진이 들려 있었다. 하연의 눈은 반짝였고, 사진을 바라보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상혁이 다가가 사진을 보려고 했지만, 하연은 능숙하게 사진을 감추며 피했다. “자, 부 대표님? 보고 싶으세요?” 하연은 얼굴 가득한 환한 미소를 띄우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상혁은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의사가 뭐래? 아이는 잘 자라고 있데?” 하연은 익살스럽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응수했다. “어머, 부 대표님도 긴장하는 순간이 있네요?” 상혁은 하연을 따라붙으며 장난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빨리 말해봐, 최하연. 의사가 뭐라고 했는지.” “히히, 안 알려줄래요.” 두 사람은 웃음소리를 주고받으며 평온하고 따스한 장면을 연출했다. 한편, 벽 뒤에 숨어 있던 이현은 하
상혁은 부동건의 말을 듣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재미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한 태도였다. 바로 그때, 상혁의 핸드폰에 하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 출발하려고 하는데, 당신은 뭐 하고 있어요?] 그는 간단히 답장을 보냈다. [회사에 있어.] [아직도 안 끝났어요?] 하연이 메시지를 보내는 동시에 귀여운 이모티콘 하나가 따라붙었는데, 살짝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상혁의 손가락이 화면 위를 두드렸다. [곧 끝나 조금 있다가 보자.] [넹, 부 대표님.]하연은 말 잘 듣는 학생이 선생님한테 보내듯 답장을 보내왔다. 상혁의 눈빛에는 어느새 부드러움이 가득해졌다. 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아버지, 그럼 하고 싶은 말씀이 더 남으셨으면 그건 남준이한테나 들려주세요.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상혁의 단호한 태도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고, 부동건에게 체면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상혁아, 나는 진심에서 하는 말인데...” 부동건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긴 한숨만 내쉬면서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과 풀리지 않는 걱정이 어른거렸다. 상혁이 복도로 나오자, 그곳에서 원신민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원신민은 상혁이 나오자마자 바삐 뒤따랐다. “대표님, 교도소 쪽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고경수가 새로운 증거를 대량으로 제출했는데, 정규인을 철저히 몰아넣으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상혁은 담담히 대꾸했다. “고나희의 죽음은 고경수에게 가장 큰 상처였어. 이번엔 그저 이자 정도를 챙기는 셈이야. 결국 개싸움일 뿐이지.”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원신민이 이어 말했다. “정규인은 이미 구속영장이 발부되었고, 검찰 쪽에서 증거를 고정하고 있습니다. 변호사 말로는 내년 초쯤 재판이 열릴 예정이며, 최소 20년형 이상은 불가피하다고 합니다.” 경제 범죄는 보통 다른 사건보다 형량이 무겁다. 게다가
부동건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부상혁을 따로 불렀다. “아버지, 부르셨어요.” 상혁의 태도는 겸손하면서도 당당했다. 곧은 자세로 한쪽에 서 있었다. 부동건은 아들을 보며 얼굴 가득 기쁨을 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 있지 말고 앉아, 오늘은 차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나 나누자.” 탁자 위에 놓인 찻주전자에서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부동건은 능숙하게 찻주전자를 들고 차를 따랐다. 그의 손놀림에는 세월이 묻어나는 노련함이 깃들어 있었다. 차 한 잔을 따르더니 부상혁에게 내밀었다. “올해 새로 나온 좋은 녹차다. 한 번 맛보아라.” 상혁은 잔을 들어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맑고 푸른 차빛이 잔 속에서 아른거리며 은은하게 빛났다.“괜찮은데요. 목 넘기도 부드럽고 여운이 깊네요. 좋은 차네요.” 상혁은 짧게 평가한 뒤 잔을 내려놓았다. 부동건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따가 비서한테 네 쪽에 하나 보내라고 말해 놓으마.” “그럼 감사하죠 아버지.” 상혁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객관적이고 정중했지만 정이 느껴지지 않는 태도였다. 하지만 부동건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 두 부자는 단둘이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만나더라도 주로 업무 이야기에 그쳤고, 오늘처럼 함께 차를 마시며 앉아 있는 시간은 그야말로 드물었다. 그런 만큼 부동건은 자연스레 감회가 밀려왔다. “네가 DL그룹을 처음 맡았던 때가 떠오르는구나. 그땐 겨우 열여덟 살이었지.” 부동건의 눈빛은 어느새 회상에 젖어 있었다. “그 당시 넌 너무 젊고 패기만 넘쳐 보여서 내가 네가 이 자리를 감당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었다. 하지만 단 몇 년 만에 모두를 놀라게 할 만한 성과를 냈지.”“심지어 중간에 DL그룹을 내려놓고 너만의 회사를 설립하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 고집스러운 DL그룹 원로 이사들조차 너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니 말이다.” 부동건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뛰어난 아들이
송혜선의 마음속 질투심은 폭풍우처럼 휘몰아쳤다. 송혜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이토록 기뻐하는 상황에서, 만약 하연의 뱃속에서 정말로 부씨 가문의 장손이 태어난다면, 자신과 부남준의 위치는 크게 흔들릴 것임을. 그녀는 부드럽게 설득하려 했다. “회장님, 보양식 같은 건 하연이 쪽에서도 충분히 알아서 준비를 했을 거예요. 우리까지 굳이 하연이 보양식을 신경 쓸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부동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며 그의 목소리는 차가워졌다. “당신 말은 내가 괜히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거야?” 송혜선은 급히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다.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회장님,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동건은 이미 인내심을 잃은 듯 보였다. “그만해! 이 집에서 당신이 나를 가르칠 위치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 거야? 내가 너무 오냐오냐해줬더니 본인의 위치를 잊은 모양이군.” 부동건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몸조리나 잘하고 있어. 다른 일들은 당신이 신경 쓸 필요 없어.” 말을 끝낸 그는 소매를 휘날리며 방을 나갔고, 송혜선에게 조금의 체면도 남겨주지 않았다. 부동건이 나가자, 조봉규가 시중드는 가정부를 물리고 송혜선의 뒤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때에 왜 괜히 회장님 심기를 건드리는 거야.” 송혜선은 가라앉지 않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차갑게 말했다. “최하연이 임신했어.” 조봉규의 손이 순간 멈췄다가, 이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하연이랑 부상혁이 오래전부터 함께 있었잖아.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굳이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니고.” 송혜선은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당신 정말 몰라. 이 아이는 부씨 가문 3대의 첫 번째 아이야.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데 저 노인네가 벌써 그렇게 기뻐하는 걸 보면, 진짜 장손이라도 태어나면 어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