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연은 주먹을 꽉 쥐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이 남자가 큰오빠가 말했던 내 결혼 상대이자 나씨 가문 바람둥이 나운석.’단순히 결혼 상대였다면 하연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가 이렇게 반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운석이 다섯 살때부터 그녀가 못생겼다며 소문을 내고 다녔고, 죽어도 그녀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해왔기 때문이다.운석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고, 하연도 운석에게 관심이 없었다!그의 아버지인 나훈철이 하연의 스승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운석에게 지옥의 맛을 보여줬을 것이다!운석은 관심있는 여자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더구나 눈앞의 하연이 자신의 기억 속 최하연이라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물었다.“번호 좀 알려주실래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하연이 던진 손수건에 얼굴을 맞았고 그녀를 다시 잡으려 했지만 하연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화가 난 것처럼 걸음을 재촉하는 하연의 모습에 운석은 혼란스러웠다.“아니 저 분은 왜…….”그는 하연이 남기고 간 눈물 닦은 손수건을 주으며 말했다.“기분 상할 행동은 안 한 것 같은데…….”운석은 허탈한 얼굴로 한참동안 하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눈을 감더니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완전 내 스타일이야.”그 후 운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나 드디어 내 이상형을 만났어! 고귀한 자태를 뿜어내는 얼음 공주, 드디어 만났다고!”“진짜야! 이번엔 찐사랑이야!”안태현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내가 널 모를까 봐? 이것도 며칠이나 갈까~.”그의 말에 운석은 펄쩍 뛰며 말했다.“진짜라니까? 예전의 나로 돌아가도 그 여자를 만나면 순애보가 될 정도야!”옆에 있던 서준은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비웃었다.“차라리 복권 당첨 확률이 더 높겠다.”“그럼 나랑 내기해! 내가 한 달 안에 저 여자 꼬신다. 같이 찍은 사진 보고 부러워할 준비나 해.”……최씨 저택의 서재 안.하연은 앤티크한 나무 상자를 최하민에게 건네며 말했다.“
곧 최하민도 거실에 나왔다.그는 나훈철을 반갑게 맞이한 후 한서준 앞에 섰다.두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비슷했지만 서준은 부탁하러 온 입장이기에 조금은 약했다.“최 대표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반갑습니다, 한 대표님.”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었을 때 서준은 하민에게서 느껴지는 적대감에 적잖이 당황했다.계량한복을 입고 있는 나훈철은 인자한 미소를 띠고 눈가에 주름이 겹쳐져 눈빛에서는 사업가 특유의 노련미가 묻어져 있었다.그는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하민아, 이번 박람회 건으로 서준이랑 같이 이야기하러 왔단다. DS그룹에서 HT그룹을 거부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니니?”하민의 서늘한 눈은 서준을 향했다.“오해는 없습니다. 그저 DS그룹은 HT그룹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HT그룹은 이번 박람회 참가를 위해 자금을 늘릴 수 있습니다. 최 대표님이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서준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만으로 이곳에 왔다. 이번 박람회에 참가하기만 하면 HT그룹이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올 수 있었다.하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커피를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안 됩니다.”상대방이 자신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말도 섞기 싫어하는 모습을 본 서준은 분노가 차올랐다.“최 대표님, 인정사정이 없으시네요,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닙니까?”두 사람은 한 치의 양보없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하지만 이때 나훈철이 중재자로서 이야기했다.“오늘은 내가 중재자로 왔으니 두 사람은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말게. 그래도 명색이 그룹 대표들인데 앉아서 좋게 대화하지 그래?”서준은 그의 말에 분노를 누그러뜨렸다.‘그래, 싸우려 들면 되려던 것도 안 될 거야.’그는 차갑고 어두운 눈으로 말했다.“최 대표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조건을 말씀해 주시면 저희 HT그룹에서 검토 후 이행하겠습니다.”“한 대표께서 HT그룹 연구팀의 핵심 기술을 DS그룹과 공유한다면 얘기
“하연이가 B시로 가는 구나.”이 소식을 들은 나훈철은 눈을 반짝이며 흥분했다.“하연이가 돌아오면 우리 두 가문이 이전에 얘기했던 정락결혼도 날짜를 정해봐야 하지 않겠니?”최하민은 담담히 대답했고, 나훈철만큼 적극적이지 않았다.“그건 당사자가 알아서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결혼은 두 사람이 하는 거니까요.”나훈철은 하민의 뜻을 이해했다.자기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그는 늦둥이로 나운석을 낳아 오냐오냐 키운 탓에 버릇이 없었다.NW그룹의 대표 자리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여자들과 어울리며 방탕한 생활을 즐겨왔고 최씨 가문에서 바라는 사위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최씨 가문의 유일한 딸인 최하연은 모두의 사랑을 받고 애지중지 키웠기에 최씨 가문은 당연히 딸을 이런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넘겨주기 싫을 것이다.‘하연이를 본 적이 있었는데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아 며느리감으로 제격이었어.’‘아무래도…… 이번에는 운석이한테 정신을 차리고 B시에 가서 기회를 잡으라고 상기시켜야겠어. 부모로서 이정도는 도와줘야지.’빨리 돌아가 운석에게 이 일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나훈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했고, 하민은 그를 배웅했다.다시 거실로 돌아갔을 때, 하연이 서재에서 나왔다.“오빠, 나보고 B시 지점 대표 자리를 맡으라는 거야?”하민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네가 B시에 대해 잘 알고 있잖아. 전략적으로 배치를 한 거야. 여기에 있을지 B시로 갈지는 네 결정에 달려 있어.”하연의 눈은 자신감으로 빛났다.“오빠, 그럼 B시 지점으로 갈게.”하민은 하연에게 하나를 상기시켰다.“B시에 가기로 결정한 이상 DS그룹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해. 낙하산이라는 말 듣지 않게 열심히 해.”이번 D국에서 패배의 맛을 본 서준은 B시로 돌아간 후 DS그룹에 자비를 베풀지 않고 계속해서 경쟁할 것이다.하연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여동생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었다.하연은
“그렇게 헤어지고 싶다는데 들어줘야지!”“변호사한테 전화해서 언제 가정법원에 갈지 약속을 잡아.”한서준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그의 가슴에 쌓인 분노는 어디에도 표출할 곳이 없었다.그러나 구동후는 눈치 없이 전화를 끊지 않고 말을 건넸다.[대표님, 상대 측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언제든 상관없다고 말했습니다.]이 말을 들은 서준은 통화 중이던 휴대폰을 바닥에 세차게 내려쳤다.머리를 쓸어 넘긴 그는 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최하연…… 진짜 지독하다 지독해!”……DS그룹 B시 지사.하연은 회의실 문을 열고 섬세하고 우아한 OL정장을 입은 여러 임원들과 정예나 앞에 나타났다.이번에 하연과 화해한 예나는 F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절친과 함께 경력을 쌓고 자신의 디자이너 브랜드 숍을 열고 싶어했다.하연은 자신과 예나를 소개했다.“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이번에 D국 본사에서 파견되어 대표직을 맡게 된 최하연입니다. 제 옆에 있는 이 분은 정예나 부사장입니다. 다같이 앞으로의 업무에 성실히 임하고 B시 지사의 실적을 올리기 바라겠습니다.”B시 지사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D국 본사에서 파견된 임원들로 하연보다 1년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오랫동안 공석이었던 사장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다짐을 오래전부터 해왔지만 낙하산이 이 자리를 꿰찰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그러나 몇몇은 하연이 DS그룹 수석 비서였다는 사실만 알았지 그녀의 배경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최 대표님, 환영합니다!”“잘 부탁드립니다!”하지만 본부의 결정이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만을 토해내지 못함에 못마땅했다.“대표님은 예전에 한서준 대표의 비서였지 않습니까? 지금은 DS그룹의 대표직에 오르셨는데 본사에서 이전 상사에게 회사 비밀을 유출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으십니까?”이 말을 들은 예나는 하연을 변호할 준비가 되었지만 하연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막았다.그 말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임원들 중 가장 뛰어난 성과를 거둔 개발팀 본부장
쇼핑거리 가운데 통유리로 된 5층 건물이 우뚝 서 있다.오늘은 정예나가 디자이너 브랜드 숍을 다시 여는 날이었다.3년 동안 하지 못했던 졸업 작품을 이제 다시 시작했다.위치는 3년 전보다 더 좋고 넓어졌다.내부는 독특하게 꾸며진 화려한 조명과 엄선된 명품 브랜드 의류와 악세서리로 가득 찼다. 통유리로 된 심플한 외관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당시 두 사람의 독특한 디자인과 독창적인 코디는 B시 귀족층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고, 젊은 여성들의 관심을 끌었다.공식적으로 가게를 오픈하기 전부터 입구에는 긴 줄이 늘어섰는데, 모두 대기표를 뽑은 후 기다리는 명문가 출신 여성들이었다.회사에 있던 최하연도 예나의 부름에 달려 나와 손님들을 맞이했다.오전은 쉴 틈이 없었고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사람들이 줄어들었다.하연과 예나는 지친 내색이 가득했다.예나는 하연의 팔을 껴안으며 말했다.“하연아, 이러고 있으니까 꼭 3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지 않아?”“그러게, 3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야.”하연은 예나의 얼굴을 만지며 미소 지었다.“하연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나도.”예나는 하연이 쉴 수 있도록 혼자서 위층으로 올라가 상황을 살폈다.홀로 소파에 앉아 있던 하연은 우연히 지나가던 한서영과 민혜경의 모습을 봤다.고급스러운 이번 시즌 드레스를 입고 있던 서영은 카메라를 들고 매장에서 연신 셀카를 찍고 있었고 그 중 잘 나온 사진 9장을 편집한 후 글을 올렸다.[참으려 했는데 유명한 디자이너 브랜드 숍이 보이길래 또 질러버렸다…….]SNS에 글을 올린 그녀는 흥분된 마음에 혜경을 끌고 돌아다녔다.서영은 3억원 상당의 고급스러운 이번 시즌 제품을 꺼내 들고 간절한 눈빛으로 혜경을 바라봤다.“새언니, 이거 나한테 잘 어울리지?”그녀의 말은 너무나도 투명했다. ‘당신은 내 새언니이고 돈도 많으니 나를 위해 이걸 사달라’는 뜻이었다.혜경도 당연히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요즘은 돈에 쪼들리는 삶을 살고 있었다.며칠 전 5
“암표상으로부터 구매한 초대권은 그 자리에서 무효화됩니다.”최하연은 눈꼬리를 치켜뜨며 조롱 섞인 표정을 지었다.“그런 사람은 사장도 손님 대접 못해드려요.”“물론 오늘 두 사람이 여기서 100억을 쓴다면 말이 달라지지만요.”그녀는 눈을 깜빡였다.ST그룹의 딸인 민혜경이 가진 돈은 얼마 없었다. 하물며 지난 번에 57억을 썼기에 하연은 현재 혜경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다고 확신했다.하지만 혜경이 과감히 나서는 건 정예나의 매출에도 도움이 됐다.한마디로 일타쌍피였다.하지만 눈치 없는 한서영은 혜경을 재촉했다.“새언니가 여기에 있는 걸 다 사서 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줘!”혜경은 서영이 무슨 말을 해도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마 돈이 없으세요?”“돈도 없고 암표를 사서 구경하시는 거면 경비원을 불러야 할 것 같네요.”하연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지만 매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명문가 사모님들 사이에서도 이 일은 큰 이슈거리가 되었다. 곧 몇몇 사람들이 이 일을 단체 메시지 방에 올렸고 이윽고 많은 사람들의 글들이 올라왔다.순식간에 혜경과 서영은 비웃음거리가 되었다.둘의 얼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최하연 씨! 사람이 그러면 안 돼요!”혜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화가 난 얼굴이 새하얘진 것도 오래였다.그녀는 위협적인 말투로 말했다.하연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고, 눈빛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빛났다.“그래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게 난데.”그러자 검은 안경을 쓴 경비원이 나타나 혜경과 서영에게 정중하게 손짓했다.“따라오시죠.”수많은 야유 속에 두 사람은 황급히 도망쳤다.가게에서 나가자마자 혜경은 큰 굴욕감에 쇼핑할 기분이 아니었고 서영에게 말한 뒤 홀로 운전사의 차에 올라탔다. 홀로 남은 서영은 화를 내며 발을 쿵쾅거리며 떠났다.그녀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 휴대폰을 꺼내 한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준은 술집에서 안태현 등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가 서영의
3일 후, 가정법원. 양측의 변호사가 미리 약속을 정해둔 시간에 하연과 서준이 각각 나타났다.이혼서류를 가져갔을 때 하연은 자기 부분을 기입하는 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반면 서준은 시간을 질질 끌면서 좀처럼 빈칸을 잘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하연은 서준의 이런 모습을 곁눈질로 흘겨보고, 차갑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한대표님, 제가 시간이 빠듯해서요.”하연의 재촉에 서준은 안색이 어두워졌다가, 곧장 서류의 빈 칸을 채워 가기 시작했다.양식을 작성한 후 두 사람은 창구의 직원에게 서류를 건네주었다.“잠깐만요.”서준은 이혼서류가 곧 접수될 것을 보고 갑자기 한마디 내뱉었다.서류를 다루던 법원 직원이 즉시 손을 멈추었다. 오늘 아침 첫 번째 고객이 뜻밖에도 HT그룹의 대표와 그의 비서일 줄은 몰랐다!‘한서준과 그 아내가 사실혼 관계에서 발전해 혼인신고를 하러 온 줄 알았는데 이혼이라니, 상상초월이군!’서준은 하연을 바라보면서 지난 날 두 사람이 부부 사이였을 때의 고압적이고 거들먹거리는 차갑고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정말 잘 생각한 거 맞지?” ‘만약 이 여자가 지금처럼 입단속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이혼을 제기하고 가버리면, D국에서 혜경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더 쓰게 하고 곤란하게 만든다면…….’그는 이런 일들을 모두 잠시 내려놓고 싶었다.‘하연이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은데.’“나 지금 어느 때보다 정신이 멀쩡하고 이미 충분히 고려했어.”하연은 눈썹 끝을 구부리며 붉은 입술은 제멋대로인 산만함을 잔뜩 풍기고 있었다.“왜? 내가 아직도 당신이랑 장난치고 있는 거 같아?”하연의 태도가 이렇게 단호한 것을 보고 서준은 가슴이 답답할 뿐이었다. 딱히 뭐라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끝없이 추락하는 감정의 끝에 하연이 있었다.하연이 떠난 이후 최근 며칠 사이, 서준은 두 사람 사이에 허심탄회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서준의 말투가 분명히 좀 더 부드러워졌다.“너에게 좀 더 차분하
혜경은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눈앞의 서준이 자신에게 속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만약 서준 씨가 지금 나에게 청혼해 준다면 바로 받아들일 텐데.’ 하지만, 화제의 중심에 있는 서준은 상황을 질질 끌려는 듯, 잔을 들어 올리는 동작을 하지 않았다. 서준의 얼굴색은 대단히 어두웠으며 눈썹 사이의 억압적인 빛 또한 아주 뚜렷했다. 서준은 입을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서준의 머릿속에서는 미련 없이 떠나버린 하연의 그림자가 끊임없이 되감기 되어 오랫동안 흩어지지 않는 듯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서영이 나서서 말했다. “오빠, 뭐라고 말 좀 해 봐! 오빠가 아무 말도 안 하니까 분위기가 너무 어색하잖아!” “그래, 서준아. 우리 집에 액운을 가져오던 사람이 떠났으니, 가장 기뻐해야 할 사람은 바로 너란다. 그런데 어쩐지 너는 영 흥이 나지 않아 보이는구나.”이수애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혜경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이제 다른 생각은 하지 않을 거야. 그저, 서준이 네가 빨리 혜경이를 받아들이면 좋겠구나. 엄마는 손주를 만나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단다!”혜경의 작은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어머니, 서준 씨도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서준이 앞의 세 사람을 힐끗 쳐다보고는 입을 다물 수 없을 만큼의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 “저와 최하연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할머니께 알려서는 안됩니다.”서준의 말을 들은 혜경은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이게 무슨 소리야?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거야? 그럼…… 내 뱃속의 아이는?’ 혜경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서준 씨, 그럼 나랑 이 뱃속에 아기는 어쩌겠다는 거야?” 손을 뻗어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던 혜경이 끝내 눈물을 흘렸다.혜경이 입고 있던 옷이 눈물로 젖어들었다. 깊은숨을 들이마신 서준이 솟아오르는 심란함을 겨우 누른 채 혜경을 향해 말했다. “나중에 다 설명해 줄게.”“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올라가 보
눈앞의 남자는 상혁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은 눈매, 흡사한 이목구비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순간적으로 하연은 착각할 뻔했다.‘세상에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그때, 남자의 시선이 하연에게 닿았다. 그리고 눈빛에는 짧은 순간 놀라움과 흥미가 스쳤고, 곧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예쁜 분이 밤에 혼자 노시는 건가요? 연락처라도 하나 주고 가는 게 어때요?”이 남자는 상혁과 외모만 닮았을 뿐, 막상 입을 여는 순간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단순한 생김새를 넘어,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그 차이는 너무도 확연했다.“죄송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단 한 치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남자는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지갑에서 금빛 명함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그럼 그냥 친구로라도. 이 정도도 안되나요?”고급스러운 금박이 감도는 종이 위에 큼직하게 적힌 영문 이름.[세븐]하연은 그 명함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고, 그 순간 그녀의 약지에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미안하지만, 안 돼요.”남자의 반응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하연은 가볍게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남자는 하연이 멀어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VIP룸 안.남준은 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기가 폐 깊숙이 들어갔다가 천천히 뿜어져 나오는 동안,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그때, 문이 열리며 황연지가 들어왔다.그녀는 성큼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오셨습니까?”남준은 담배를 비벼 끄고, 재떨이에 던졌다.“왔군.”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상무님, 절 찾으셨다면서요.”남준은 얕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새해를 맞아 너한테 특별한 선물을 하나 주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
허징인이 상혁을 찾았다는 소식은 남준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은 것 같아. 물론 앞으로도 절대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남준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속내에서는 의문이 피어올랐다.‘내가 오래 지켜본 부상혁이라면, 이유 없이 움직일 리가 없는데...’하지만 상혁이 허징인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남준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처럼,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의심이 한 번 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남준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급히 뛰어 들어온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상무님, 교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남준은 정다영의 집에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옷깃을 정리하던 손이 멈춰 섰고,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일인데 그래?”부하는 다급한 얼굴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정규인이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변호사를 불러서 항소재판을 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남준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순식간에 부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잘 갇혀 있던 놈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부하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혹시... 어쩌면 허징인과 그 아들...”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단칼에 잘라버렸다.“말도 안 돼. 이 일은 우리 쪽만 알고 있어. 교도소 안에 있는 정규인이 대체 어떻게 알겠어?”부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외부와 접촉할 방법은 없습니다.”그러나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정규인,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남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놓았다.‘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