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최하민도 거실에 나왔다.그는 나훈철을 반갑게 맞이한 후 한서준 앞에 섰다.두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비슷했지만 서준은 부탁하러 온 입장이기에 조금은 약했다.“최 대표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반갑습니다, 한 대표님.”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었을 때 서준은 하민에게서 느껴지는 적대감에 적잖이 당황했다.계량한복을 입고 있는 나훈철은 인자한 미소를 띠고 눈가에 주름이 겹쳐져 눈빛에서는 사업가 특유의 노련미가 묻어져 있었다.그는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하민아, 이번 박람회 건으로 서준이랑 같이 이야기하러 왔단다. DS그룹에서 HT그룹을 거부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니니?”하민의 서늘한 눈은 서준을 향했다.“오해는 없습니다. 그저 DS그룹은 HT그룹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HT그룹은 이번 박람회 참가를 위해 자금을 늘릴 수 있습니다. 최 대표님이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서준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만으로 이곳에 왔다. 이번 박람회에 참가하기만 하면 HT그룹이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올 수 있었다.하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커피를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안 됩니다.”상대방이 자신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말도 섞기 싫어하는 모습을 본 서준은 분노가 차올랐다.“최 대표님, 인정사정이 없으시네요,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닙니까?”두 사람은 한 치의 양보없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하지만 이때 나훈철이 중재자로서 이야기했다.“오늘은 내가 중재자로 왔으니 두 사람은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말게. 그래도 명색이 그룹 대표들인데 앉아서 좋게 대화하지 그래?”서준은 그의 말에 분노를 누그러뜨렸다.‘그래, 싸우려 들면 되려던 것도 안 될 거야.’그는 차갑고 어두운 눈으로 말했다.“최 대표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조건을 말씀해 주시면 저희 HT그룹에서 검토 후 이행하겠습니다.”“한 대표께서 HT그룹 연구팀의 핵심 기술을 DS그룹과 공유한다면 얘기
“하연이가 B시로 가는 구나.”이 소식을 들은 나훈철은 눈을 반짝이며 흥분했다.“하연이가 돌아오면 우리 두 가문이 이전에 얘기했던 정락결혼도 날짜를 정해봐야 하지 않겠니?”최하민은 담담히 대답했고, 나훈철만큼 적극적이지 않았다.“그건 당사자가 알아서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결혼은 두 사람이 하는 거니까요.”나훈철은 하민의 뜻을 이해했다.자기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그는 늦둥이로 나운석을 낳아 오냐오냐 키운 탓에 버릇이 없었다.NW그룹의 대표 자리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여자들과 어울리며 방탕한 생활을 즐겨왔고 최씨 가문에서 바라는 사위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최씨 가문의 유일한 딸인 최하연은 모두의 사랑을 받고 애지중지 키웠기에 최씨 가문은 당연히 딸을 이런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넘겨주기 싫을 것이다.‘하연이를 본 적이 있었는데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아 며느리감으로 제격이었어.’‘아무래도…… 이번에는 운석이한테 정신을 차리고 B시에 가서 기회를 잡으라고 상기시켜야겠어. 부모로서 이정도는 도와줘야지.’빨리 돌아가 운석에게 이 일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나훈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했고, 하민은 그를 배웅했다.다시 거실로 돌아갔을 때, 하연이 서재에서 나왔다.“오빠, 나보고 B시 지점 대표 자리를 맡으라는 거야?”하민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네가 B시에 대해 잘 알고 있잖아. 전략적으로 배치를 한 거야. 여기에 있을지 B시로 갈지는 네 결정에 달려 있어.”하연의 눈은 자신감으로 빛났다.“오빠, 그럼 B시 지점으로 갈게.”하민은 하연에게 하나를 상기시켰다.“B시에 가기로 결정한 이상 DS그룹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해. 낙하산이라는 말 듣지 않게 열심히 해.”이번 D국에서 패배의 맛을 본 서준은 B시로 돌아간 후 DS그룹에 자비를 베풀지 않고 계속해서 경쟁할 것이다.하연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여동생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었다.하연은
“그렇게 헤어지고 싶다는데 들어줘야지!”“변호사한테 전화해서 언제 가정법원에 갈지 약속을 잡아.”한서준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그의 가슴에 쌓인 분노는 어디에도 표출할 곳이 없었다.그러나 구동후는 눈치 없이 전화를 끊지 않고 말을 건넸다.[대표님, 상대 측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언제든 상관없다고 말했습니다.]이 말을 들은 서준은 통화 중이던 휴대폰을 바닥에 세차게 내려쳤다.머리를 쓸어 넘긴 그는 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최하연…… 진짜 지독하다 지독해!”……DS그룹 B시 지사.하연은 회의실 문을 열고 섬세하고 우아한 OL정장을 입은 여러 임원들과 정예나 앞에 나타났다.이번에 하연과 화해한 예나는 F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절친과 함께 경력을 쌓고 자신의 디자이너 브랜드 숍을 열고 싶어했다.하연은 자신과 예나를 소개했다.“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이번에 D국 본사에서 파견되어 대표직을 맡게 된 최하연입니다. 제 옆에 있는 이 분은 정예나 부사장입니다. 다같이 앞으로의 업무에 성실히 임하고 B시 지사의 실적을 올리기 바라겠습니다.”B시 지사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D국 본사에서 파견된 임원들로 하연보다 1년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오랫동안 공석이었던 사장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다짐을 오래전부터 해왔지만 낙하산이 이 자리를 꿰찰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그러나 몇몇은 하연이 DS그룹 수석 비서였다는 사실만 알았지 그녀의 배경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최 대표님, 환영합니다!”“잘 부탁드립니다!”하지만 본부의 결정이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만을 토해내지 못함에 못마땅했다.“대표님은 예전에 한서준 대표의 비서였지 않습니까? 지금은 DS그룹의 대표직에 오르셨는데 본사에서 이전 상사에게 회사 비밀을 유출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으십니까?”이 말을 들은 예나는 하연을 변호할 준비가 되었지만 하연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막았다.그 말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임원들 중 가장 뛰어난 성과를 거둔 개발팀 본부장
쇼핑거리 가운데 통유리로 된 5층 건물이 우뚝 서 있다.오늘은 정예나가 디자이너 브랜드 숍을 다시 여는 날이었다.3년 동안 하지 못했던 졸업 작품을 이제 다시 시작했다.위치는 3년 전보다 더 좋고 넓어졌다.내부는 독특하게 꾸며진 화려한 조명과 엄선된 명품 브랜드 의류와 악세서리로 가득 찼다. 통유리로 된 심플한 외관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당시 두 사람의 독특한 디자인과 독창적인 코디는 B시 귀족층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고, 젊은 여성들의 관심을 끌었다.공식적으로 가게를 오픈하기 전부터 입구에는 긴 줄이 늘어섰는데, 모두 대기표를 뽑은 후 기다리는 명문가 출신 여성들이었다.회사에 있던 최하연도 예나의 부름에 달려 나와 손님들을 맞이했다.오전은 쉴 틈이 없었고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사람들이 줄어들었다.하연과 예나는 지친 내색이 가득했다.예나는 하연의 팔을 껴안으며 말했다.“하연아, 이러고 있으니까 꼭 3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지 않아?”“그러게, 3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야.”하연은 예나의 얼굴을 만지며 미소 지었다.“하연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나도.”예나는 하연이 쉴 수 있도록 혼자서 위층으로 올라가 상황을 살폈다.홀로 소파에 앉아 있던 하연은 우연히 지나가던 한서영과 민혜경의 모습을 봤다.고급스러운 이번 시즌 드레스를 입고 있던 서영은 카메라를 들고 매장에서 연신 셀카를 찍고 있었고 그 중 잘 나온 사진 9장을 편집한 후 글을 올렸다.[참으려 했는데 유명한 디자이너 브랜드 숍이 보이길래 또 질러버렸다…….]SNS에 글을 올린 그녀는 흥분된 마음에 혜경을 끌고 돌아다녔다.서영은 3억원 상당의 고급스러운 이번 시즌 제품을 꺼내 들고 간절한 눈빛으로 혜경을 바라봤다.“새언니, 이거 나한테 잘 어울리지?”그녀의 말은 너무나도 투명했다. ‘당신은 내 새언니이고 돈도 많으니 나를 위해 이걸 사달라’는 뜻이었다.혜경도 당연히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요즘은 돈에 쪼들리는 삶을 살고 있었다.며칠 전 5
“암표상으로부터 구매한 초대권은 그 자리에서 무효화됩니다.”최하연은 눈꼬리를 치켜뜨며 조롱 섞인 표정을 지었다.“그런 사람은 사장도 손님 대접 못해드려요.”“물론 오늘 두 사람이 여기서 100억을 쓴다면 말이 달라지지만요.”그녀는 눈을 깜빡였다.ST그룹의 딸인 민혜경이 가진 돈은 얼마 없었다. 하물며 지난 번에 57억을 썼기에 하연은 현재 혜경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다고 확신했다.하지만 혜경이 과감히 나서는 건 정예나의 매출에도 도움이 됐다.한마디로 일타쌍피였다.하지만 눈치 없는 한서영은 혜경을 재촉했다.“새언니가 여기에 있는 걸 다 사서 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줘!”혜경은 서영이 무슨 말을 해도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마 돈이 없으세요?”“돈도 없고 암표를 사서 구경하시는 거면 경비원을 불러야 할 것 같네요.”하연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지만 매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명문가 사모님들 사이에서도 이 일은 큰 이슈거리가 되었다. 곧 몇몇 사람들이 이 일을 단체 메시지 방에 올렸고 이윽고 많은 사람들의 글들이 올라왔다.순식간에 혜경과 서영은 비웃음거리가 되었다.둘의 얼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최하연 씨! 사람이 그러면 안 돼요!”혜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화가 난 얼굴이 새하얘진 것도 오래였다.그녀는 위협적인 말투로 말했다.하연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고, 눈빛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빛났다.“그래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게 난데.”그러자 검은 안경을 쓴 경비원이 나타나 혜경과 서영에게 정중하게 손짓했다.“따라오시죠.”수많은 야유 속에 두 사람은 황급히 도망쳤다.가게에서 나가자마자 혜경은 큰 굴욕감에 쇼핑할 기분이 아니었고 서영에게 말한 뒤 홀로 운전사의 차에 올라탔다. 홀로 남은 서영은 화를 내며 발을 쿵쾅거리며 떠났다.그녀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 휴대폰을 꺼내 한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준은 술집에서 안태현 등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가 서영의
3일 후, 가정법원. 양측의 변호사가 미리 약속을 정해둔 시간에 하연과 서준이 각각 나타났다.이혼서류를 가져갔을 때 하연은 자기 부분을 기입하는 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반면 서준은 시간을 질질 끌면서 좀처럼 빈칸을 잘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하연은 서준의 이런 모습을 곁눈질로 흘겨보고, 차갑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한대표님, 제가 시간이 빠듯해서요.”하연의 재촉에 서준은 안색이 어두워졌다가, 곧장 서류의 빈 칸을 채워 가기 시작했다.양식을 작성한 후 두 사람은 창구의 직원에게 서류를 건네주었다.“잠깐만요.”서준은 이혼서류가 곧 접수될 것을 보고 갑자기 한마디 내뱉었다.서류를 다루던 법원 직원이 즉시 손을 멈추었다. 오늘 아침 첫 번째 고객이 뜻밖에도 HT그룹의 대표와 그의 비서일 줄은 몰랐다!‘한서준과 그 아내가 사실혼 관계에서 발전해 혼인신고를 하러 온 줄 알았는데 이혼이라니, 상상초월이군!’서준은 하연을 바라보면서 지난 날 두 사람이 부부 사이였을 때의 고압적이고 거들먹거리는 차갑고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정말 잘 생각한 거 맞지?” ‘만약 이 여자가 지금처럼 입단속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이혼을 제기하고 가버리면, D국에서 혜경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더 쓰게 하고 곤란하게 만든다면…….’그는 이런 일들을 모두 잠시 내려놓고 싶었다.‘하연이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은데.’“나 지금 어느 때보다 정신이 멀쩡하고 이미 충분히 고려했어.”하연은 눈썹 끝을 구부리며 붉은 입술은 제멋대로인 산만함을 잔뜩 풍기고 있었다.“왜? 내가 아직도 당신이랑 장난치고 있는 거 같아?”하연의 태도가 이렇게 단호한 것을 보고 서준은 가슴이 답답할 뿐이었다. 딱히 뭐라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끝없이 추락하는 감정의 끝에 하연이 있었다.하연이 떠난 이후 최근 며칠 사이, 서준은 두 사람 사이에 허심탄회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서준의 말투가 분명히 좀 더 부드러워졌다.“너에게 좀 더 차분하
혜경은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눈앞의 서준이 자신에게 속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만약 서준 씨가 지금 나에게 청혼해 준다면 바로 받아들일 텐데.’ 하지만, 화제의 중심에 있는 서준은 상황을 질질 끌려는 듯, 잔을 들어 올리는 동작을 하지 않았다. 서준의 얼굴색은 대단히 어두웠으며 눈썹 사이의 억압적인 빛 또한 아주 뚜렷했다. 서준은 입을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서준의 머릿속에서는 미련 없이 떠나버린 하연의 그림자가 끊임없이 되감기 되어 오랫동안 흩어지지 않는 듯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서영이 나서서 말했다. “오빠, 뭐라고 말 좀 해 봐! 오빠가 아무 말도 안 하니까 분위기가 너무 어색하잖아!” “그래, 서준아. 우리 집에 액운을 가져오던 사람이 떠났으니, 가장 기뻐해야 할 사람은 바로 너란다. 그런데 어쩐지 너는 영 흥이 나지 않아 보이는구나.”이수애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혜경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이제 다른 생각은 하지 않을 거야. 그저, 서준이 네가 빨리 혜경이를 받아들이면 좋겠구나. 엄마는 손주를 만나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단다!”혜경의 작은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어머니, 서준 씨도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서준이 앞의 세 사람을 힐끗 쳐다보고는 입을 다물 수 없을 만큼의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 “저와 최하연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할머니께 알려서는 안됩니다.”서준의 말을 들은 혜경은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이게 무슨 소리야?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거야? 그럼…… 내 뱃속의 아이는?’ 혜경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서준 씨, 그럼 나랑 이 뱃속에 아기는 어쩌겠다는 거야?” 손을 뻗어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던 혜경이 끝내 눈물을 흘렸다.혜경이 입고 있던 옷이 눈물로 젖어들었다. 깊은숨을 들이마신 서준이 솟아오르는 심란함을 겨우 누른 채 혜경을 향해 말했다. “나중에 다 설명해 줄게.”“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올라가 보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수화기 너머 여은의 어투는 세련되고 깔끔했다.[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난 항상 네 편이니까.] “고마워.”하연이 여은과의 전화를 끊자, 예나가 다가와 물었다. “자기야,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 여우도 정말 짜증 나 죽겠어!” “내일 저녁에 큰오빠랑 같이 B시 경제인 협회가 주최하는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야. 그 연회에 B시의 모든 명문가가 참석할 테니, 거기서 그 여우가 숨을 곳이 없게 만들어 줘야겠어!” 예나가 하연을 위해 소리를 높여 말했다.“자기야, 바로 그거야!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와!” …… 연회 당일 밤.홀의 내부는 아름다운 장식들로 가득했으며, 불빛도 눈부시게 현란했다. 귀빈들과 술잔이 한데 뒤섞여 매우 떠들썩했다.하연이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홀로 들어섰다. 하연이 입은 고가의 수공예 다이아몬드 드레스는 하연의 영롱하고 우아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사람들은 하연의 고급스러움과 존귀함에 매료되어 눈을 뗄 수 없는 듯했다. 하연의 매무새는 환상적일 정도로 아름다웠으나 표정은 칼날과 같이 날카로워서 모든 사람들의 기세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하연을 본 명문가 아가씨들이 하연의 가십 기사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손에 샴페인을 든 한서영의 주위로 아가씨들이 모여들었다. 그 아가씨들의 얼굴은 호기심과 비웃음으로 가득했다. “서영아, 실시간 검색어 봤어, 정말 최하연이 네 새언니였어?”“그러게, 내가 본 기사 사진이랑 똑같은데? 정말 아름다우시다!” “흥! 저 여자가 네 새언니가 될 자격이나 있었어?” 한서영이 참지 못하고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우리 오빠랑 저 여자는 이미 끝났거든?” 이때, 이 모습을 본 하영이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띤 채, 한서영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저 여자, 디자이너 브랜드숍의 사장일 뿐이었어. 그런 주제에 감히 우리 오빠와 혜경 언니 사이에 끼어들어, 기어코 오빠의 세컨드가 되겠다며 뻔뻔스럽게 우리 집에 시집까지 왔던 거야. 아무리 애써도 쫓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혁이 안방에서 나왔다. 최씨 가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상혁에게 쏠렸다. 그 누구도 상혁을 탓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하연이 이런 일을 겪은 이상, 상혁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상혁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제가 하연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그 말에 최동신의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상혁아, 이 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냐?”최동신은 단도직입적으로 상혁에게 말을 했다. 최씨와 부씨 가문의 오래된 관계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 사태를 이렇게 넘길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최씨 가문은 아주 힘이 있기 때문에 부남준 하나쯤, 제거하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나 부남준 역시 부씨 가문의 핏줄이었다. 이 문제는, 부씨 가문 내부에서 해결하는 것이 도리였다. 그래야만 두 가문 간의 균열을 막을 수 있었다. 상혁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그 눈빛은 확고했고, 더 이상 송혜선과 부남준에게는 그 어떤 자비도 남지 않았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그러나 최동신은 여전히 꺼림칙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네 아버지 가... 가만히 있겠니?”부동건이 송혜선을 얼마나 감싸고 있는지는 모두 알고 있었다. 게다가 송혜선은 지금 임신 중이었고, 남준 역시 ‘사생아’긴 하지만, 부동건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부동건이 직접 나설 경우, 상황은 더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하지만 상혁은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어떤 타협도, 그 어떤 방해도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기세였다. ‘이번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 “이번 일은... 누구도 남준이 그 녀석을 구할 수 없습니다.”...최씨 가문은 사태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송혜선은 하연이 납치됐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약혼식이 끝난 뒤, 그녀는
하성의 움직임은 빠르고, 날카로우며, 정확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대로 남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그 순간, 하연의 몸이 허공에 떠오르듯 중심을 잃었다. 반응할 틈도 없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하지만 순간, 상혁이 재빠르게 하연을 품에 안았다.익숙한 온기에 하연은 잠시 얼어붙었다. 다음 순간, 상혁은 마치 유리인형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녀를 꼭 안았다.“괜찮아?”콧등이 시큰해진 하연은 남자의 품에 안기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응... 괜찮아요...”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남준은 금세 제압당했고, 경찰이 빠르게 그를 둘러쌌다.한 경찰관이 체포영장을 꺼내 들며 선언했다. “부남준 씨, 살인 혐의로 체포합니다.”이내 수갑이 남준의 손목에 채워졌다.“살인이라니? 말도 안 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누굴 죽였다는 거야! 부상혁, 대체 뭘 꾸미는 거야!”상혁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 상황에서도 발뺌한다고?”“하!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참 능숙해. 네 특기였다는 걸 깜빡했네?”그런 남준을 바라보며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어올리며 비웃었다. “허징인 모자를 없애고 증거를 없앤다고 해서, 네 죄가 덮일 줄 알았냐?”그 말에 남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난 모른다고 했잖아!”“끝까지 입만 살아서는...” 상혁은 더는 말이 없었고, 곧장 하연을 번쩍 안아 올렸다.“법은 피할 수 없다. 하고 싶은 말은 법정에서 해.”말을 끝낸 그는 하연을 안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남준은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앉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상무님... 저 감옥 가기 싫어요...”황연지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그녀는 다급히 외쳤다. 그러다 상혁의 뒷모습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지만, 경찰이 그녀를 막아섰다.“부 대표님! 제가 몇 년을 부 대표님 옆에서 헌신했는지 아시죠? 제발... 이번 한 번만..
“좋아, 줄게.” 상혁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하연이만 놔줘. 내 목숨, 네가 가져.”“상혁 오빠!” 하연이 쉰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고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안 돼요... 제발 그러지 마요...”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그 모습을 본 상혁의 가슴이 죄여왔다. ‘보지 마...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 그는 애써 시선을 돌려 하연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하연이를 놔. 내가 대신 네 인질이 되지. 죽이든 살리든, 네 마음대로 해.”그 말에 남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예상 밖의 전개였다. ‘설마... 부상혁이 내 앞에서 이렇게까지 물러날 날이 올 줄 몰랐네!’남준의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 “진짜구나, 형. 이 여자가 정말 목숨보다 더 소중한가 봐?”그는 말을 마치며 하연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차가운 손끝에 하연은 몸을 움찔했고, 그 찰나, 상혁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하연이한테 손대지 마!!”남준의 손이 멈칫했다. “걱정 마, 형. 상황이 안정되기 전까지... 이 여잔 내 생명줄이야.”남준의 표정이 돌변했다. 눈빛이 매서워지며 말이 이어졌다.“길 열어. 다 물러서. 그래야 내가 놔줄 수 있지.”모든 시선이 상혁에게 쏠렸다. 그는 잠시 눈을 감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팔을 들어 뒤로 휘둘렀다.그 신호에 따라 사람들이 양옆으로 흩어졌다. 남준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하연을 인질 삼아 헬기 쪽으로 향했다.하성이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가려 했다. “그냥 보낼 수 없어. 저 인간이 사라지면 하연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그러나 상혁은 아무 말 없이 팔을 뻗어 그를 막았다. 하성은 당황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는 순간, 하성의 동작이 멈췄다.‘됐어. 지금이다.’ 둘 사이에 짧은 눈빛 하나로 묵계가 오갔다.남준은 하연을 끌고 헬기 앞으로 나아갔고, 한 손으
사방이 막혔다. 수십 대의 차량이 사방에서 들이닥쳤다.상혁은 운전석에 앉은 채 전방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온몸에서 분노가 솟구쳤고, 그 눈빛은 세상을 집어삼킬 듯 매서웠다.그는 거침없이 액셀을 밟았고, 양옆 건물들이 빠르게 뒤로 밀려나갔다.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차가 멈춰 섰고, 흙먼지가 거세게 일었다.차가 멈추자, 상혁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상혁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남준의 몸이 본능적으로 긴장됐다. 그리고 팔에 안긴 하연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형... 왔네?”상혁은 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그리고 시선이 천천히 전방을 향했다. 하연을 팔에 가둔 채 비웃는 듯한 표정의 남준, 그 눈빛엔 노골적인 도발이 담겨 있었다.“딱 맞춰 왔네. 이 여자가 형한테 그만큼 소중하단 얘기겠지?”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하연에게 옮겼다.하연은 눈에 띄게 겁먹은 듯했지만,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상혁을 마주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아주 살짝 저었다.‘걱정하지 마요...’그 짧은 눈빛 하나에 상혁의 숨이 멎는 듯했고, 주먹을 꽉 쥐었다. ‘죽여버리고 싶다... 당장이라도.’“놓아.”차가운 두 글자,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단호함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었다. 황연지조차 숨을 삼켰다.이런 모습의 상혁은 처음이었다. 연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길은 없었다. 상혁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이미 그녀는 상혁과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었다.남준은 코웃음을 쳤다. 전혀 위축되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확실히, 최하연이 진짜 형한테 중요한 사람인가 보네.”그는 하연의 뺨을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고, 하연은 몸을 돌려 고개를 피했다.상혁의 눈빛이 번뜩이며 한 걸음 내디뎠다.“하연이한테 손대지 마.
“부상혁한테는 뭐든 다 해주면서, 너도 같은 부씨 집안 자식인데 왜 이런 대접을 받고 살아야 해?” “남준아, 정신 좀 차려. 절대 부상혁한테 밀리면 안 돼.” “부씨 가문의 재산, 절반은 네 몫이어야 해.”“...”‘도대체 얼마나 지겹게 들었으면 머릿속에서...’ 송혜선의 목소리가 남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치 저주처럼, 귓가에 맴돌고 또 맴돌았다.남준은 무의식적으로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터질 듯한 분노 속에 외쳤다.“그만해! 제발 좀 그만하라고!” 사냥감을 놓친 짐승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본 남준은, 다음 순간 거침없이 다가가 그녀의 목을 거세게 움켜잡았다.“닥쳐!”악을 쓰듯 소리친 남준의 손에 핏줄이 불거졌다. 순식간에 하연의 얼굴은 붉게 질려올랐고, 숨이 막히는 듯 거칠게 헐떡이기 시작했다. “부남준... 놓아줘... 제발...!”하연은 힘겹게 말을 잇고 있었지만, 남준의 눈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온몸이 찌릿하게 울렸고, 하연의 머릿속은 새하얬다.‘죽는 건가...?’질식해오듯 점점 줄어드는 숨, 하연의 눈앞이 흐려지며 고개가 툭 떨어지려는 순간, 황연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상무님!!”상황을 파악하자마자,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남준의 팔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외쳤다.“상무님, 제발 그만두세요! 하연 씨 죽어요!”하지만 남준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연지는 조급하게 남자의 손등을 치기 시작했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러다 진짜 큰일 나요!”순간, 손등으로 전해진 통증 때문에 이성을 잃었던 남준이 그녀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됐다. 그는 얼이 빠진 듯 손을 풀었고, 하연은 그대로 주저앉듯 바닥에 쓰러졌다.다행히 연지가 재빨리 하연을 붙잡았다.“하연 씨! 괜찮아요?”하연은 바닥에 손을 짚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기침을 터뜨렸다.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의 눈물이 맺혔다.연지는 급히 고개를 돌려 외쳤다.“상무님, 부상혁 대표 쪽 사람들이
남준의 손등을 하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세게 악물었다. 남준의 이마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아귀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결국, 참지 못한 남준이 손을 놓았다. 하연은 비틀거리며 두 걸음 물러섰고, 경멸과 경계가 뒤섞인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남준은 피가 흘러내리는 손등을 바라보며, 다른 손으로 상처를 눌렀다. 붉은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최하연, 너 개냐?”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한 걸음 다가갔다. “오지 마!”하연은 경고하듯 외쳤고,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다. “그렇게까지 나를 싫어하는 거야?”남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너한테 난 그저 비열하고 파렴치한 그런 놈이라는 생각뿐인 거야?”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하연의 앞에 멈춰 섰다. 하연이 또다시 물러나려 했지만, 남준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최하연, 오늘 나랑 같이 가기만 하면, 부씨 가문의 모든 걸 버리겠어.”하지만 하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손목을 힘껏 뿌리쳤다.“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왜 나한테 하는 건데? 넌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감춰둔 연인? 아니면, 형제 간 싸움에서 이용할 도구?”“아니야!”남준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목젖이 떨렸다. “만약 내가 널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게, 오직 너와 함께하기 위해서 그런 거라면?”하연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지만, 곧 의심과 경계가 자리 잡았다.“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남준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네 눈엔 난 온갖 술수를 부리는 교활한 놈으로밖에 안 보이겠지.”그는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아니면, 네가 바라볼 수 있는 남자는 오직 부상혁 하나뿐인 거야?”남준의 시선이 하연을 꿰뚫듯이 바라봤다.“최하연, 네 눈에 내가 그렇게도 한심해? 정말 넌 나를 사랑해 줄 수는 없는 거야?”그 순간, 뒤편에
“하연 씨, 곧 도착할 테니까 힘 빼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예요.”연지는 옆에 앉아 있던 세븐을 힐끗 보았다. 세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액셀을 힘껏 밟았다. 차량이 갑자기 급가속했고 강한 출력으로 몸이 쏠리며, 하연은 반사적으로 옆 좌석을 꽉 잡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주변 풍경은 점점 더 외진 곳으로 변해갔다.개인 헬기 이착륙장. 헬리콥터 한 대가 이륙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상무님, 세 사람이 도착했습니다!”멀리서 익숙한 검은색 차량이 점점 가까워지자, 부남준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이륙 준비하고, 계획대로 진행해.”“네, 상무님!”검은색 차량이 점점 다가와 마침내 멈춰 섰다.“하연 씨, 도착했어요.”연지가 먼저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 주었다.차에서 내린 하연의 시선은 곧장 저 멀리 서 있는 남준에게로 향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남준은 먼저 하연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하연 앞에서 멈춰 서며,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이런 방식으로 모셔와서 미안하군.”그러나 남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연은 성큼 다가가 단호하게 손을 뻗었다. 짝!거침없는 손길이 남자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순간 얼어붙었다.연지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다가섰다.“상무님, 괜찮으세요?”남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 하연이가 얼마나 세게 뺨을 때렸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짓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걸로 화가 풀린다면, 한 대 더 때려도 괜찮아.”하연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부남준,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남준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 신호에 따라 연지를 비롯한 부하들이 한 걸음 물러섰다.하연은 경계심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바로 그때, 남준의 뒤편에서 헬리콥터 엔진이 가동되었다. 회전 날개가 점점
‘이 사람... 상혁이 너 같은데 아니야?'하성이 무심결에 내뱉었다. 하지만 이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소리쳤다.“아니다!”그는 몸을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상혁의 얼굴은 이미 어두운 먹구름이 낀 듯 굳어 있었다. 그리고 눈은 화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모니터 속에서, 하연은 세븐에게 붙잡혀 있었다. 여자의 허리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깊숙이 눌려 있었다.하연이 몸부림치려 하자, 세븐이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댔다. 두 사람은 멀리서 보면 마치 다정하게 속삭이는 것처럼 보였다.세븐은 한 손으로 하연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피부의 촉감이 남자의 손끝을 간지럽혔다.세븐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가만히 있어. 누군가가 눈치라도 챈다면, 난 당신 안전을 장담할 수 없어.”순간 하연의 몸은 떨렸다. 본능적으로 손을 배 위로 가져가 보호하듯 감쌌다. 결국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세븐은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렇게 순순히 따라오면 돼. 그럼 난 널 해치지 않아.”하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문 쪽을 향해 걸어가며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당신 누군데 나한테 이러는 거야? 돈이 필요해서? 아니면 무슨 다른 목적이라도 있어?”세븐은 한쪽 눈썹을 올리며 웃었다.“당신 생각엔 내가 왜 이러는 것 같아?”“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금액을 말해. 난 최씨 가문의 딸이야. 당신 요구를 최대한 맞춰줄 수 있어.”세븐은 비웃듯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만약 돈이 아니라면? 내가 다른 요구를 한다고 해도 네가 들어줄 수 있어?”그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연의 허리를 거칠게 감쌌다. 단검을 거두며 그녀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하연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괜히 머리 쓰지 말고 가만히 따라오기나 해.”그렇게 두 사람은 호텔 문을 빠져나갔고, 곧 감시카메라의 사각지대로 사라졌다.상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화를 이기지 못하고 벽을 세게 내리쳤다. 상혁의 몸 전체에서 뿜어
상혁이 다시 로비로 돌아왔을 때, 무의식적으로 하연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하지만 익숙한 실루엣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벨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통화가 끊겼다.상혁은 미간을 좁히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차가운 자동 응답 음성이 들려왔다.[죄송합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습니다.]왠지 모르게 상혁의 눈꺼풀이 떨렸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이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올랐다.그는 발걸음을 서둘러 인파 속에서 하성을 찾아냈다. 곧장 하성의 팔을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하연이 못 봤어?”하성은 주위를 둘러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너희 같이 있던 거 아니였어?”상혁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재빨리 하성을 놓고 출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하성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발걸음을 재촉하며 따라붙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상혁은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아니야. 아마 쉬러 갔을 거야. 가서 확인해 볼게.”하성은 더 묻지 않고 상혁와 함께 휴게실 방향으로 향했다.“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그렇게 말하면서도 상혁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두 사람은 호텔 내 모든 휴게실을 확인했지만 하연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핸드폰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상혁은 점점 초조해졌다.그때, 정예나가 급하게 뛰어왔다. 그녀는 상혁을 보자 놀란 듯 말했다.“부 대표님, 아까 하연이랑 부 대표님 같이 나가지 않았어요?”순간, 상혁의 몸이 굳어졌다.“뭐라고?”하성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상혁이는 계속 나랑 같이 있었어. 네가 착각한 거 아니야?”예나는 당황한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아까 분명이 로비에서 ‘부상혁'이 하연을 감싸 안고 호텔 문을 나서는 걸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이다.심지어 장난스럽게 한마디 던지기도 했다.“신혼부부는 아니랄까 봐 떨어질 생각이 없나 보네. 어디 가서 둘이 꽁냥꽁냥 거리기라도 하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