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국장님도 제 신분을 아실 텐데... 조금 사정을 봐줄 수는 없나요?”황천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눈살을 찌푸렸다.“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진환은 황천호가 이토록 제 체면을 봐주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해 뭐라도 더 말하려 했지만 상혁이 나서서 막았다.상혁은 덤덤한 표정으로 느긋하게 말했다.“우선 사건 담장 형사한테 물어보자.”진환은 그 말에 순간 화를 가라앉혔다.“알았어, 형.”방금 전과 너무 다른 태도를 보이는 진환을 보자 황천호는 상혁의 신분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자연스레 상혁을 대하는 태도가 더 공손해졌다.“안으로 드시지요.”세 사람은 함께 경찰서 안으로 걸어 들어가 웬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랬더니 경위 계급 제복을 입고 있는 형사 한 명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여기는 우리 강력계 형사 오성훈 경위입니다.”황천호는 먼저 나서서 쌍방에게 서로를 소개했다.“오 경위, 이분이 바로 진환 도련님이야. 이번 사건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 드려.”성훈은 말없이 인사하고는 세 사람과 함께 테이블 앞에 둘러앉았다.그러자 황천호는 네 사람에게 공간을 내어 주기 위하여 대충 둘러내고 자리를 피했다.황천호가 떠난 뒤 성훈이 먼저 물었다.“황 국장님 말씀 들었습니다. 5년 전 교통사고 건에 대해 알아보려 하신다고요?”“오 경위님, 이 사건은 우리한테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니 숨김없이 아는 건 다 말씀해 주세요.”성훈은 싱긋 웃으며 설명했다.“이 사건은 그때 큰 파장을 불러일으켜 저도 기억에 남습니다. 세 분이 오시기 전에 사건 기록도 확인해 봤고요...”“이건 아주 큰 교통사고였는데, 두 대의 차가 충돌한 뒤 연료가 새어 나와 폭발까지 나며 화재로 번졌습니다. 그때 현장에 있던 3명은 화재로 돌아가시고, 두 명은 중상을 입었죠.”“이 사고가 엄중하다는 이유도 사실 나중에 번진 화재 때문에 생존자 두 분마저 큰 화상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임모연 씨도 그 때문에 얼굴과 등 대부분이 화상을 입었고요.”“...”여기
하연은 이내 눈을 들어 상대를 바라봤다.“그때 생존자가 두 명이었다면 임모연 외에 다른 사람도 있었다는 말인가요?”“네, B시에서 살던 20대 정도의 젊은 남성분이셨어요...”“B시요?”하연의 심장은 순간 반 박자 느려졌다. 이렇게 듣고 보니 왠지 이 일이 자기와 은연중에 연관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혹시 그 생존자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성훈은 싱긋 웃으며 하연의 요구를 거절했다.“죄송합니다.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그 대답에 하연은 왠지 실망감이 들었다.그도 그럴 게, 나머지 한 명이 B시에서 온 남자라면 모연과는 큰 연관이 없으니까.그때, 상혁이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대뜸 질문했다.“세 명이 사망했다고 했는데 임모연의 부모 외에 나머지 한 분의 정보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성훈은 그 정보에 대해 숨기지 않았다.“그분도 B시에서 온 젊은 여성이었는데 마침 그 남자분과 연인 사이였어요. 그분 역시 얼굴의 3분의 2 정도가 큰 화상을 입었어요...”“그 여성분이 세상을 뜨고 나서 남자분이 슬퍼하며 몇 번이나 치료를 포기해 의사 선생님들도 겨우 그분을 살려냈거든요...”“...”하연은 그 말을 들은 순간 대담한 생각이 들었다.‘교통사고에 화상, 그리고 젊은 여자라니...’‘설마 이게 다 우연의 일치라고?’하연과 상혁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똑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이건 마치 안개 낀 미스터리처럼 두 사람이 안개를 걷어내고 천천히 풀어헤치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혹시 그 여성분에 대한 정보는 있나요?”하연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성훈이 대답했다.“외국 국적이라 우리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건 대사관에서 확인해 보셔야 해요. 하지만 몇 년 전 일이라 단서를 알아내기 어려울 겁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하연의 눈에 실망감이 드리웠다.“혹시 더 궁금하신 점은 없으십니까?”상혁은 하연의 앞에 다가가 맑은 눈으로 하연을 바라봤다.“너무 낙심하지 마. 적어도 조금씩 의문이 풀리고 있잖아.”하연은 상혁을 보며
경찰서에서 나온 하연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상혁은 그런 하연의 곁에 바싹 붙어 물 한 병을 건네주었다.“물 좀 마시고 쉬어.”하연은 고개를 저었다.“상혁 오빠, 저 잠깐 혼자 있고 싶어요.”이윽고 혼자 길을 따라 한참 동안 걸었다. 상혁은 그런 하연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그때 다시 돌아온 진환이 상혁의 앞에 다가가 물었다.“형, 왜 형수 따라 안 가? 외국 땅에서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떡하려고?”“잠깐 혼자 있게 내버려둬. 우리는 뒤에서 따라가면 돼.”상혁이 말을 마치자마자 성큼성큼 하연의 뒤를 따르자 진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곧바로 상혁을 뒤따랐다.“형, 벌써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그동안 형수랑 진전은 있었어?”진환은 멀리 있는 하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형, 절대 망설이지 마. 망설이다가 형수 또 도망가면 어떡해...”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혁이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오는 바람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한참 고민하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형, 나도 좋은 마음에 귀띔하는 거잖아. 사실 가끔은 숨길 필요 없어. 형수한테 솔직히 말해.”진화이 볼 때 하연은 상혁에게 완전히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그저 일부러 본인의 감정을 외면하고 있을 뿐,“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이 정도 시간은 충분히 기다릴 수 있어.”이 말을 하는 순간 상혁의 눈빛도 부드러워졌다. 심지어 시선을 하연에게 고정한 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마지막에 함께하는 사람이 하연이라면 조금 늦더라도 상관없어.”진환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환도 사실 하연의 앞에 있을 때만 상혁의 부드러운 모습을 보곤 한다.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언제나 본인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다.“컴퓨터 가져왔어?”“차 안에.”“좀 쓰자.”진환은 곧바로 손을 휘휘 저었고, 그걸 본 기사가 차를 몰고 오자 두 사람은 얼른 차에 올랐다.“나 대신 하연이 안전한지 지켜봐 줘.”진환은 알겠다
하연은 어리둥절했다.‘저 사람 누구지?’하연은 왠지 자꾸만 상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특히 남자 몸에서 나는 특유의 은은한 샌달우드 향은 분명 어딘가에서 맡아본 적 있는 것 같았다.‘방금 그 말 대체 무슨 뜻이지?’‘설마 임모연이 보낸 사람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에 상대는 아무런 악의도 없어 보였다.주위를 둘러보던 하연의 머릿속에는 점점 많은 의문이 들어찼다.“형수, 왜 그래요?”진환은 헐레벌떡 달려온 탓에 아직도 헐떡거리고 있었다. 방금 하연이 갑자기 인파 속으로 달려가는 걸 본 진환은 너무 놀라 다급히 차에서 내려 하연을 뒤쫓았다.그러자 하연이 진환의 팔을 꽉 잡으며 물었다.“혹시 어떤 남자 못 봤어요?”그 말에 진환이 오히려 어리둥절했다.“무슨 남자요? 혹시 아까 누가 형수 괴롭혔어요? 말만 해요, 내가 당장 그놈을 잡아 결판낼 테니까...”진환은 당장이라도 쫓아가 싸울 기세로 말했다.그러자 하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방금 이상하게 생긴 남자를 봐서요. 꼭...”하연은 한참 생각했지만 상대의 생김새를 정확히 말할 수 없었다.진환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자 하연이 잘못 봤을 거라고 생각했다.“형수, 한창 걸었는데 힘들지 않아요? 차에서 좀 휴식해요.”하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약 두 걸음 정도 걸었을 때 갑자기 방금 전에 본 남자의 냄새는 전에 F국 주차장에서 저를 구해줬던 그 남자한테서 나는 냄새와 같다는 걸 알아챘다.심지어 체형과 몸매, 그리고 독특한 분위기마저 그때 그 사람과 겹쳐 보였다.‘분명 그 남자야!’하연은 속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이고,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하연아, 나 뭐 좀 알아냈어.”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하연은 상혁의 말에 눈을 들어 물었다.“뭔데요?”“자, 봐 봐.”상혁은 손에 든 컴퓨터를 하연에게 건넸다.이윽고 화면에 뜬 사진 몇 장에 하연의 눈은 반짝 빛났다.“애가 방금 확인했는데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싱긋 미소만 지었다. 하지만 옆에 놓은 손은 상혁의 기분을 드러냈다.상혁은 눈앞에 놓인 컴퓨터 화면을 빤히 바라보며 점점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이 사진 자료는 상혁이 찾아낸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일부러 상혁에게 보내준 것이다.하지만 아쉽게도 상대방의 네트워크 기술이 상혁과 막상막하여서 상혁은 상대의 그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 계속 추적한 끝에 고작 가상 번호 하나만 알아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하연아, 우리 귀국하자.”상혁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상대가 이렇게 빨리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했다는 건, 그들이 하루빨리 G국을 떠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그건 다른 의미로 이 사건 속에 다른 사람들이 알면 안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하지만 그걸 알아내려면 상대방의 계략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하연도 그토록 애타게 찾을 때 알 수 없던 모든 사실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게 너무 이상했다.“상혁 오빠, 왠지 이 사건 수상한 것 같지 않아요?”상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보아하니 우리 하연이는 여전히 총명하네.’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이윽고 하연이 입을 열었다.“그래요, 돌아가요.”그날 저녁 진환은 두 사람을 전용기로 모셔다 주려고 했지만 상혁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비행기 티켓 두 장 끊어주면 돼.”진환은 상혁의 결정이 의아했다.“형, 내가 전용기로 데려다주면 편하기도 하고 안전하기도 한데, 뭐 하러 공항까지 가?”상혁은 토 달지 말라는 태도로 자기 의견을 견지했다.“내 말대로 해. 가장 빠른 티켓으로 예약해 줘.”진환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상혁의 분부대로 티켓 두 장을 예약했다. 하지만 하연과 상혁은 진짜로 떠날 생각이 없었다.“형, 두 사람 대체 무슨 속셈인 건데?”상혁은 싱긋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하연을 바라봤다.“손자병법을 안 읽어봤어?”“내가 그걸 왜 봐?”진환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하연은 고개
상혁은 가볍게 웃으며 말없이 하연의 손을 꼭 잡았다.“그건 나도 궁금해. 하지만 꼬리가 길면 언젠간 밟히게 돼 있어.”그 시각, B시.모연은 해변가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심지어 와인이 절반쯤 담긴 잔을 즐거운 듯 흔들어댔다.“한 대표님, 왜 그렇게 정색하고 그래요? 앉아서 같이 술이나 마셔요.”서준은 눈앞의 여자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모연은 분명 아주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왠지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임모연 씨, 얼마면 돼요?”서준의 온기 없는 싸늘한 말투에 모연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눈썹을 치켜떴다.“참 시원시원하네요. 하지만 무슨 자격으로 저한테 그런 제의를 하는 거죠? 최하연과 씨와는 이미 이혼한 거로 아는데.”서준은 모연과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오늘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도 그저 모연더러 하연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라는 요구를 하러 왔을 뿐이다.“그건 나와 최하연의 일이니 임모연 씨는 상관하지 마세요.”서준은 말하면서 백지 수표 한 장을 꺼내 모연 앞에 내놓았다.“원하는 액수 적어요.”모연은 싱긋 웃을 뿐 수표를 받지 않았다. 이윽고 눈을 들어 서준과 시선을 교환했다.“한 대표님은 본인 여자한테 다 이렇게 관대하신가요? 그게 아무리 전처라고 한들, 이 정도 돈은 기꺼이 쓰나 보죠? 가져가세요, 저 임모연은 돈에 관심 없으니까.”“하, 돈이 싫다면 왜 최하연한테 2천억을 달라고 했죠? 돈이 싫은 게 아니라 내 돈이 싫은 모양이네...”모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준 앞에 다가갔다. 그 순간 강한 카리스마가 모연의 얼굴을 덮쳐왔다.‘역시 한서준이라 이건가?’‘몇 년이 지나도 여전하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달려들지.’“한 대표님 돈은 너무 시시하잖아요? 다른 거래하는 게 어때요?”서준은 말없이 건네던 수표를 움켜쥐었다가 도로 거두어들이더니 또박또박 물었다.“무슨 거래요?”모연은 앞으로 바싹 다가가 서준과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멈춰 서더니 고개를 들고 싱긋 웃었다.“돈거래는 안 되지만
서준은 본인이 뭐에 홀린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살짝 젓더니 이내 대답했다.“임모연 씨의 목적이 뭐든, 뭘 하고 싶든, 절대 최하연은 다치게 하지 마요.”모연은 그 말에 깔깔 웃어댔다. 뼈를 뚫고 전해지는 듯 섬뜩한 웃음소리는 사람을 소름 돋게 했다.“한서준, 이미 늦었어. 뭐,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이윽고 모연은 서준을 빤히 바라보더니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한 대표님이 나와 결혼한다면 최하연에게 자비를 베풀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절대 봐주지 않을 거예요.”서준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네 주제에 감히?”늘 담담하던 서준의 눈동자에는 순간 매섭고도 악랄한 빛이 스쳐 지났다. 이윽고 서준이 손을 휘휘 젓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은 동후가 서류 한 묶음을 꺼내 모연에게 건넸다.“임모연 시, 그래도 평화롭게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한 것 같네요. 그렇게 자신만만하니, 내 손에 뭘 들고 있는지 모르나 보죠?”모연은 서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동후 손에 있는 자료를 확 낚아챘다. 이윽고 그 안에 든 내용을 본 순간 안색이 크게 변했다.이 순간 모연은 정말 당황했다.“이건 어떻게 손에 넣었지?”서준은 모연과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 증거들은 최하연이 누명을 썼다는 걸 충분히 증명할 수 있고, 당신이 그동안 디자인 업계에서 쌓은 명예도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있어. 내가 임모연 씨라면 아무 소란도 일으키지 않고 얌전히 있을 텐데. 안 그러면 이 증거들 바로 언론사에 뿌릴 거니까...”서준의 협박에 모연은 등골이 오싹했다. ‘적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하지만 모연은 오히려 피식 웃었다. 심지어 서준의 말을 무시한 채 제 귀밑머리를 뒤로 넘기며 덤덤하게 말했다.“한 대표님, 따로 할 얘기가 있는데...”서준은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할 얘기가 있으면 경찰한테나 하시죠.”모연은 고개를 살짝
“대표님, 대체 왜 그러세요? 최하연 씨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왜 그냥 이렇게 떠나는 건데요?”동후의 질문이 연속적으로 쏟아졌지만, 서준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표님, 왜 그러세요?”“돌아가자.”서준이 끝까지 입을 다물자 동후도 입을 오므리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올 때만 해도 분명 하연의 누명을 벗겨주겠다며 자신만만해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그저 충격을 받은 모습이니 동후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방금 임모연이 대표님한테 뭐라고 했지?’동후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서준이 갑자기 물었다.“최하연 돌아왔어?”동후는 다급히 대답했다.“아니요, 아직 G국에서 돌아오지 않으셨어요.”그 대답에 한참 동안 고민한 서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전용기 준비해, G국으로 갈 테니까.”이토록 갑작스러운 결정에 동후는 의아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분부에 따랐다.“네, 대표님.”...이틀 동안 하연과 상혁은 더 이상 아무 진전이 없었다.그도 그럴 게, 상대가 마치 뭔가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깊이 숨어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으니까.그 때문에 하연은 저와 상혁이 상대의 손에 완전히 놀아나는 건 아닌지, 귀국하지 않은 걸 들킨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그때, 진환은 새로운 정보를 알아 왔는지 흥분에 겨워 말했다.“형, 나 임모연이 성형 수술한 병원 찾았어.”그 한마디에 하연이 눈은 반짝 빛났다.“어딘데요?”진환은 어렵게 찾아낸 진료기록을 상혁과 하연에게 건넸다.“임모연 진짜 너무 교활하던데. 수술할 때 사용한 이름이 임모연이 아니라 전에 아무것도 못 찾은 거였어. 조사한 데 따르면 수술을 총 20여 차례나 받았는데 그중 4차례는 피부 이식 수술과 성형 수술이었어.”“음.”상혁은 가볍게 대답하고 진료 기록을 하연에게 건넸다.“네가 봐, 무슨 수상한 점 있어?”하연은 진료 기록을 한참 동안 펼쳐보다가 성명란에 적힌 Anna라는 영어 이름을 보고 멈칫했다.“임모연의 영어 이름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
둥근 형태의 테라스는 새하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위로 푸릇푸릇한 덩굴식물이 감싸고 있었다. 연둣빛 야자수 잎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테라스 중앙에는 우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연아, 우리 저기에 앉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직접 꽃차를 따라주었다. 하연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거 무슨 차예요? 향이 너무 좋아요.” “목련차야. 테라스 뒤쪽에 한가득 피어 있는데, 한번 가볼래?” ‘목련꽃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피어 있다니.’ 순백의 꽃잎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가보자!” 둘은 테라스를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원형 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신 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우와...’ 하연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백의 목련이 바람에 살랑이고, 보랏빛 라벤더가 넘실댔으며, 튤립이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귀한 품종의 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있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어디선가 꽃으로 엮은 화관을 꺼내더니, 조심스레 하연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아, 여기는 너만을 위한 꽃밭이야.” 놀란 듯 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여자의 가슴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을 따라 걷자 길이 점점 넓어졌고, 상혁과 함께 그 길을 따라 가자 점점 하연의 시야가 트였다.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하연이 상혁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예요?” 상혁은 여자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때 버려졌던 작은 섬인데. 나중에 내가 사들였어.” 그는 자연스럽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손가락을 맞물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좋아요!” ‘좋다니 다행이야.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보람이 있었네.’이 순간을 상혁이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는 하연의 손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일단 우리 아침부터 먹자. 그리고 이따가 바닷가에 데려가 줄게.” “좋아요.” 이 섬은 남태평양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작은 외딴섬이었다. 한때는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황폐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상혁이 이곳을 매입해 전문가에게 맡겼다. 불과 2년 만에 섬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집도 짓고, 길도 만들고, 섬 전체가 아름답게 정돈되었다. 한낮이 되자 햇살이 섬을 따스하게 감쌌다. 하연과 상혁은 손을 잡고 깔끔하게 정돈된 자갈길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하연의 원피스 자락이 살짝 날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곱디고운 모래가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봐요! 야자수가 있어요!” 하연은 설레는 듯 조심스레 뛰어나갔다. 상혁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가 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푸른 하늘 아래, 키가 큰 야자수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들이 바닷바람을 타고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품고 바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연은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내디뎠다. 발끝을 감싸는 모래가 부드럽고도 간질거려, 묘한 전율이 발끝에서부터
가정부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다영은 손에 힘을 주며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정말이야?” 가정부는 몸을 잔뜩 웅크리며 떨었다. “정말 없습니다. 다만...” “다만 뭐?” 가정부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오늘 아침 신문을 내밀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다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가정부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다영은 신문을 펼쳤고,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부남준의 충격적인 스캔들이었다. 각종 유명 유흥지에서 여성들과 어울리는 사진들,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장면들이 페이지를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게 말이 돼? 남준 씨가 나한테 이럴 리가 없어.’ “이건 거짓말이야!” 신문을 쥐고 있는 다영의 손의 힘에 의해 손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녀는 결국 신문을 찢어버렸다. 그때, 송혜선이 아래층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다영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송혜선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어요?” ‘이럴 수가 없어!’ 송혜선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다영은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집어 송혜선에게 내밀었다. 송혜선은 대충 훑어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남준의 사생활에 대해서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회사 권력을 잡기 위해 정지철의 힘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송혜선은 감히 정다영을 건드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정지철은 구속됐고, 정씨 가문도 몰락했으니, 다영에게 아직 이용 가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송혜선은 진작에 다영을 내쫓았을 것이다. 다영에게 이렇게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이런 신문 기사 하나에 휘둘리지 마라, 다영아.” 송혜선은 태연하게 다영의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 “넌 남준이의 약혼녀야. 네가 남준이를 의심하면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하연을 품에 안았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네가 좋아하는 요리들 준비해뒀어.” 하연은 눈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정말 맛있는 저녁이 되겠네.” 상혁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톡 하고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하연이, 여전히 먹을 것 앞에서는 못 참는구나.” 식탁 위에는 하연이 좋아하는 요리들이 정성스레 차려져 있었다. 마늘 버터 가리비, 새우찜, 전복찜, 킹크랩, 탕수육까지. 하연은 만족스럽게 식사를 즐겼고, 상혁은 그녀 옆에서 직접 새우를 까서 접시에 올려주었다. “부 대표님의 또 다른 재능이 새우 까기였나 봐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상혁은 마지막 한 마리를 까서 그녀 앞에 내밀며 미소 지었다. “너만을 위한 서비스야.” “그럼 나는 정말 행운아네요.” 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새우를 한입에 넣었다. 그때, 테이블 위의 휴대폰이 깜빡였다. 원신민이 보낸 메시지였다. [부 대표님, 그 사진들 보낸 사람이 정다영 씨였습니다.]상혁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으려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나서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남자의 눈빛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이건 예상 밖이군.’ 그러나 그는 곧 차분하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남준이는 요즘 뭐 하고 다니지?]원신민의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부남준 상무님은 최근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여성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상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진 확보 가능해?][어렵지 않습니다.][서여은 편집장 요즘 기사거리가 부족하다던데, 도와줘야겠어.] 메시지를 받은 원신민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부 대표님, 한 방에 끝내버리는구나.’ [알겠습니다, 대표님.]상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하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어요?” “작은 일 좀 정리했어.” 그는